소설리스트

33화 (33/187)

그리스? 로마? 신화?

한편, 동부의 황궁에서는 고트족의 남하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책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루피누스가 분노하면서 책상을 내려쳤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숙였고, 황제인 아르카디우스만이 그런 루피누스를 달랬다.

“루피누스, 저들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니겠나.”

“폐하, 지금 야만인들이 그리스를 불태우고 있단 말입니다. 그리스가 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군.”

“우리 자금줄이 끊어진단 말입니다!”

“아···. 그래?”

“그래서가 아니라···. 하아···.”

아르카디우스는 루피누스의 말에 귀를 파면서 그의 속을 답답하게 했다.

루피누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군대, 군대는 준비됐겠지?”

“부대의 절반은 스틸리코 장군의 휘하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티마시우스 장군이 소아시아로 데려갔습니다.”

“소아시아? 거기는 또 무슨 일인데.”

루피누스가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듣기로는 백훈이라고 부르는 야만인들이 우리의 영토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약탈을 일삼고 있다 합니다.”

“백훈? 시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그리고 듣자 하니. 스틸리코 장군도 오신다고···.”

“뭐? 그 양반이 여기는 왜?”

“고트족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라 씨발.”

루피누스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동방의 황궁에 도착한 뒤로 이제야 동부의 섭정으로 뭔가를 해보려던 시점에 고트족이 밀려오고, 그걸 빌미로 스틸리코까지 오는 상황이 참으로 골치가 아팠다.

한참을 고민하던 루피누스가 말했다.

“그 새끼한테 사람 보내.”

“예? 누구 말입니까?”

“알라리크인지 뭔지 하는 그 새끼!”

“예?”

“가서 전해. 선제께서 임명해주신 포이데라티 직위는 인정해주고 테살로니카 약탈도 허용해준다고 말이야.”

“루피누스 님 그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좀···.”

“가만히 있으면 스틸리코 장군께서 물리치실 텐데···. 그건 좀···.”

루피누스가 다시금 책상을 내리쳤다.

이에 말하던 다른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루피누스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방안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평생을 고생만 하다가 이제야 빛을 보게 생겼는데, 여기서 포기하라고?”

“그, 포기하라는 게 아니고···.”

“그게 그 말 아니야! 스틸리코 그 새끼가 여기로 오면은 그다음은 어떻겠나?”

“좋겠죠.”

루피누스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던지면서 소리쳤다.

“좋기는 뭐가 좋아! 그 새끼가 동방 섭정직도 가져가려고 들 게 뻔하잖아!”

“그건···. 그렇긴 합니다.”

“나만 모가지인 줄 알아? 이들 중에 내 돈 안 받은 놈 있어? 있냐고! 너희들도 전부 다 모가지인 거 몰라?!”

“크흠···.”

“흠흠···.”

“어험···.”

원로원 의원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루피누스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스틸리코 그 새끼가 오기 전에 알라리크 놈하고 붙여버린 뒤에, 이긴 녀석을···.”

루피누스의 주먹이 손바닥을 때렸다.

“어때?”

“우리에게 그럴만한 병력이 있습니까?”

“지금부터 뽑아야지, 도시에 징집령을 내려!”

“징집령이라니요! 그래봤자 얼마나 모일 것 같습니까, 이건 너무 무모한 생각이십니다.”

“너, 나가.”

“아니 이게 무슨? 놔라! 이것 놔! 루피누스 당신이 내게 이럴 수는 없어!!”

루피누스에게 반대하던 의원이 개처럼 끌려나가자 원로원은 침묵에 휩싸였다.

“자, 반대의견이 더 있나?”

******

“협상?”

알라리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나 간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너희들 영토를 약탈하는 걸 허용해줄 테니, 다시 충성을 바치라고?”

“정확하게 들으셨습니다.”

“쯧쯧쯧···. 우릴 속이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안 그렇나 비디메르?”

알라리크의 곁에 있던 이가 대답했다.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정도의 일이 생긴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군. 그래, 내부 일인가 외부의 일인가.”

“무, 무엇이 말입니까.”

루피누스의 사신으로 온 이가 몸을 떨었다.

알라리크는 턱을 괴고 앉아 말없이 루피누스의 사신을 응시했다.

비디메르는 그 옆에서 자신의 도끼를 만지작거리니, 결국 두려움을 견디지 못한 루피누스의 사신이 입을 열었다.

“스, 스틸리코! 스틸리코가 옵니다!”

“스틸리코?”

알라리크가 비디메르를 돌아봤다.

하지만 비디메르도 어깨를 으쓱거릴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 뭐냐···. 그 사람은 서쪽에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아, 알라리크 님을 토벌하신다고 직접 오고 계십니다···.”

“그래?”

알라리크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런 걸 말해줘도 괜찮은 건가? 아무리 그래도 자네들과 동족 아닌가?”

“어차피 루피누스 님과 스틸리코는 대립한 지 제법 시간이 됐습니다. 인제 와서 동족이라고는 해도···. 솔직히 말하자며는 저희에게는 알라리크 장군이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구먼···.”

알라리크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

“알겠으니 돌아가서 자네 주인에게 전하게, 고트족은 받은 만큼만 일한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사신이 돌아가자, 뚱한 얼굴로 서 있던 비디메르가 말했다.

“주군, 저들이 스틸리코와 우리를 싸움 붙이려는 모양입니다.”

“그런 것 같아.”

“차라리 스틸리코에게 우리를 고용해달라고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로마놈들한테 깨져서 기어들어 온 놈이 로마와 손을 잡자고 한다고···.”

“그 일과 이 일은 다르지 않습니까.”

“하하하. 농담이야 비디메르.”

알라리크자 자세를 바로 하면서 말했다.

“스틸리코 녀석에게 제의하기보다는 저 녀석들의 조건을 들어주자고.”

“그럼 싸우시겠다는 겁니까?”

“굳이 피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주군, 로마놈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등에 칼을 꽂을 녀석들입니다.”

“놈들이 칼이나 들 힘이 남아있을까?”

“그건 모를 일 아닙니까, 전투 이후에 우리가 약해진 틈을 노릴 수도 있잖습니까.”

“적들은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지쳤을 텐데 무엇이 그리 걱정인가 비디메르?”

느긋한 알라리크의 모습에 비디메르가 답답한 듯이 말했다.

“주군, 로마군은 언제나 우리가 방심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다네, 그렇지만 지금 동쪽에는 우리를 막을 군대가 없지 않은가.”

“그건 모를 일입니다.”

“듣자 하니 백훈 놈들이 아시아를 돌면서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영역을 약탈한다고 들었어, 그것도 제법 지난 일이니 그쪽에 군대가 가 있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알라리크가 비디메르의 등을 치면서 말했다.

“하하하 자네는 너무 걱정이 많아! 어차피 우리는 정착할 땅만 찾으면 끝이야!”

“예, 주군.”

******

옛말에 이르기를.

전쟁은 사람과 사람이 하기에 앞서, 돈이 먼저라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매일같이 심마쿠스와 아칸에 빌다시피 하면서 예산을 타냈고, 그마저도 안된다면은 개인재산을 털어 넣었다.

그렇게 내 개인재산을 털어서 돈을 처바를수록, 친위대 병사들의 때깔이 좋아졌다.

망토나 속에 입는 튜닉 같은 것도 떡갈나무를 태워서 만든 숯으로 검게 물들이니, 검은색과 회색이 제법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도대체 병사들 망토나 옷은 왜 검은색으로 하셨습니까?”

“때도 안 타고, 멋지잖아.”

“검은색은 불길함을 상징하지 않습니까···. 악마들이 검은색을 쓴다던데···.”

“그럼 더 좋은 거 아니겠나!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 새끼들이 내 휘하에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그게 좋은 겁니까?”

“별로 같습니다.”

“어허, 자고로 검은색이야말로 최고의 색이야.”

흑복의 멋짐을 모르다니···.

쓸데없이 돈만 많이 들어가고 휘황찬란하기만 했던 자주색보다는 검은색이 훨씬 괜찮았다.

“심마쿠스님은 왜 전부 모이라고 하신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사열하시려는 게 아닐는지요.”

“심마쿠스님이? 끙···. 올 것이 왔구먼”

심마쿠스와는 스틸리코라는 얄팍한 연결점으로 이어져 있긴 했지만, 그는 원로원을 오가면서 행정업무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나는 나대로 친위대를 개편하느라 바빴던지라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아쉬울 때마다 예산 좀 더 달라고 말하는 게 아니면 거의 만나지도 않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열을 요구하다니,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저기 오십니다.”

“부대 차렷!”

내 목소리에 맞춰서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듯이 병사들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조금 과장하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부대에 대대장님만 오셔도 난리가 났었는데. 지금은 국무총리가 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준비를 안 하고 싶어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리우스.”

“심마쿠스님 어서 오시지요.”

“흠···.”

심마쿠스는 병사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내게 말했다.

“몇 주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군.”

“하하하, 모두 심마쿠스님의 지원 덕분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심마쿠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단장 앞에선 대대장의 심정이 이랬을까?

이등병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잔뜩 긴장됐다.

“부대원들 복장이···. 전부 검은색이군. 이유가 있나?”

“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길게 말하지 말고 용건만, 짧게.”

“...원가절감과 미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새롭게 바꿔봤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만족하셨습니다.”

호노리우스를 언급하니 심마쿠스도 눈썹을 추켜세우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흠···. 그래, 뭐 색이 조금 칙칙하긴 하지만···. 괜찮군.”

“감사합니다.”

“이제 기병대를 보러 가지.”

“병사들은 해산시켜도 되겠습니까?”

“아니, 잠시 대기시키게.”

“알겠습니다.”

폴로와 데키무스에 손짓으로 병사들을 쉬게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폴로와 데키무스는 다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잠시 휴식!”

[휴식!]

심마쿠스를 데리고 기병들을 모아둔 공터로 데리고 갔다.

기병들은 번쩍이는 어린갑에 마갑을 두른 중기병들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그 옆에는 라멜라 갑옷으로 무장한 경기병들이 서 있었다.

“준비가 잘 되어 있군.”

“황궁을 지키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필수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후우···.”

흡족한 듯이 미소를 짓던 심마쿠스는 불현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최근에 자네가 아칸과 친하게 지낸다고 들었네.”

“그, 그건···.”

“아아···. 그것을 탓하거나 책망하려는 것은 아닐세, 대강 돌아가는 사정쯤이야 눈치채고 있어.”

“그럼 그것은 갑자기 왜···?”

“아칸이 황제 폐하를 꼬드겼다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동쪽에서 알라리크가 이끄는 고트족이 그리스를 휩쓴다는 소식에 황제 폐하께서 자기 형을 도우러 가고 싶다 하셨네.”

“예?”

“스틸리코 장군께서 이미 갔다고 말해봤지만, 도저히 듣질 않으시더군.”

“아니, 잠깐···. 스틸리코 장군은 라인강으로 가신 게 아닙니까?”

심마쿠스는 혀를 찼다.

“쯧쯧쯧···. 그 친구가 자네에게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애초에 이번 출병은 조만간 동부로 돌아가는 휘하 병사들로 전선을 안정시키려고 한 것이야, 그런데 그리스 쪽에 야만인들이 침입했다는 소식에 스틸리코 장군이 달려가신 것이지.”

“병사들이 왜 동부로 돌아가는 겁니까?”

“애초에 동부의 병사들이었네, 선 제께서 승하하시고 은근슬쩍 데리고 있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원래 테오도시우스가 이끌던 동부의 병사들이, 테오도시우스의 사후에 아르카디우스와 루피누스가 절반을 이끌고서 돌아갔고, 남은 절반이 스틸리코의 휘하에 있다는 말이었다.

이제는 그 병사들이 돌아갈 시간이었고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는 왜 그리스로 가시겠다는 겁니까.”

“왜긴 왜겠나, 자네가 그 방정맞은 입으로 폐하를 구슬린 덕분이지.”

“그건 또 무슨 소 리습니까, 제가 언제 그랬다고···.”

“자네가 그동안 해줬던 이야기들을 듣고서 폐하께서 자신도 장군처럼 군대를 이끌어 보고 싶다고 하셨어!”

“예?”

그동안 심심하다고 알고 있던 위인들의 이야기를 해줬던 게 화근이었다.

내 어린 시절에도 위인전을 많이 봤던지라, 당연하게도 동생 같은 호노리우스에게 위대했던 장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이게 어린 호노리우스의 마음에 불을 지펴놓은 듯했다.

아칸은 옆에서 이걸 말리기는커녕 부채질을 했고 말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친위대를 준비시키게.”

심마쿠스가 결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리스에 다녀오게나, 스틸리코 장군에게 안부 전해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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