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우스와 8인의 도둑들.
아칸이 나를 이끌고서는 헤라클리우스의 옆자리에 앉혔다.
나를 곤란하게 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지난번의 일로 조금 불편해할 줄 알았던 헤라클리우스는 의외로 친절하게 날 맞이했다.
“환영하네! 마리우스. 자네가 우리와 합류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
“예, 뭐···.”
“당황스럽겠지만 차분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나?”
그 뒤로 헤라클리우스는 스틸리코가 얼마나 권력에 미친 개새끼인지,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 궁 안에 갇혀서 고통받고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거기다가 자신들의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지, 그리고 자신들을 따랐을 때 어떤 이득이 찾아올지도 설명해 줬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런 조직들이 그러하듯이 확답을 주는 것은 없었고 대부분인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말이었다.
정작 그 고통받는다는 황제는 매일같이 같이 놀자고 졸라대는 꼬맹이고 그들이 그토록 욕하는 스틸리코는 이들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은 참으로 웃긴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전횡을 일삼고 있는 스틸리코를 몰아내고 진정한 우리의 제국을 되찾는 것일세!”
헤라클리우스의 말이 끝나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모두 손뼉을 쳐댔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손뼉을 치면서 주변에 있는 이들을 살펴보니, 이들은 진심으로 헤라클리우스의 말에 감탄한 듯했다.
“헤라클리우스 님이 계셔서 정말 든든합니다!”
“정말 명언이었습니다.”
“하하하 다들 쑥스럽게 왜 그러시나···. 그래 마리우스 우리와 함께하겠나?”
주변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여기서 거절한다면 아마 뒷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겠지.
“헤라클리우스 님의 말을 들으니 제 마음속에 있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입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서 우리와 함께하겠나?”
“당연한 말을 하려니 조금 부끄러워지는군요.”
“환영하네! 마리우스. 자네는 이 거사가 성공한다면 군의 한 축을 담당할걸세!”
“오···.”
군의 한 축을 담당한다는 말을 들으니 살짝 마음이 혹했다. 거기다가 머릿속으로 헤라클리우스와 스틸리코를 상관으로 생각해보니, 깐깐한 스틸리코와 적당히 농땡이를 부려도 넘어가 줄 헤라클리우스를 비교해보니 아예 이쪽에 붙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로마에는 스틸리코가 필요했다. 스틸리코의 사후에 로마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생각하니, 내 머릿속에 있던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자자···. 이렇게 기쁜 날에 술이 빠져서야 하겠는가?”
아칸의 말에 노예들이 온갖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를 들고서 들어왔다.
“내 특별히 손수 담근 포도주라네 많이들 드시게나!”
노예가 따라주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셔보니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게 절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감탄하면서 한 잔 더 마시려 했지만, 이미 다른 이들이 도자기를 하나씩 붙잡고서는 끝도 없이 받아마시고 있었다.
돼지 같으니라고···.
“하하하, 마리우스 걱정하지 말게 돌아갈 때 하나 챙겨줄 테니까 말이야.”
“아···. 감사합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이나 먹고 있으니 아칸이 슬며시 종이 한 장을 들이밀었다.
“이게 뭡니까?”
“한번 읽어보겠나?”
종이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옆에는 그들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혀있었다.
종이의 맨 아랫부분에는 내 이름도 적혀있었다.
당황하면서 아칸을 돌아보니,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자네도 인장을 찍어주시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아무래도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아칸은 나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그에게 확실한 신뢰를 줘야겠다는 생각에 늘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자그마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자, 자네 이게 무슨···.”
아칸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고, 신나게 술을 마시던 이들도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단검을 뽑아 들고서는 내 엄지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손가락을 타고서 흘러내렸고, 바로 종이 위에 지장을 찍으면서 말했다.
“보통 제 고향에서는 인장보다는 이런 방식을 선호합니다. 고작 그런 금속쪼가리보다는 제 몸에서 나온 피가 더 신뢰감이 있으니까요.”
“그, 그렇구먼.”
단검을 집어넣으니 황급히 노예 하나가 달려와서 흰 천으로 내 손가락을 지혈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나를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발,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네, 파상풍은 안 걸리겠지?’
책에서나 보던 혈서를 실제로 따라 해봤는데 막상 손에 상처를 낼 때보다 지장을 찍고 나서가 더 쓰라렸다.
그것과는 별개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은 감탄하고 있었다.
“자네 고향의 풍습은 참으로 야만적이군.”
“그렇지만 그 마음은 잘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군요.”
아칸이 내 어깨를 두들겨 주는 것으로 다시금 파티가 시작되었고, 이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다들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술을 퍼먹어댔다.
그러는 틈에 슬그머니 아칸의 곁으로 가니 제법 취했는지 얼굴이 붉어진 아칸이 나를 반겼다.
“마리우스 어서 오게나. 한잔하겠나?”
“아칸 님께서 따라주시는 술이라면 언제든 좋지요.”
“하하하! 내가 이래서 자네가 참 마음에 든다니까.”
아칸이 따라주는 술을 받아먹으니 아칸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그동안에 자네를 조금 의심했는데, 참으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네.”
“하하, 뭐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요.”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참으로 고맙구먼. 혹시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보게나.”
아칸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난번에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하하, 뭐 어떤가? 뭐든 말해보게나.”
“뭐든 말이지요···.”
나는 잠시 고민했다.
막상 생각해보니 개인적으로 그렇게 필요한 게 없었다.
현대에서 누리던 것들에 비할 바는 못됐지만, 그래도 삶에 있어서 불편함도 없었다.
그뿐인가, 현대에서는 꿈도 못 꿨던 내 집 마련의 꿈도 이 군인 데다가 취업까지 했는데 더는 필요한 게 무엇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참 생각하던 중 그동안 생각하던 게 하나 떠올랐다.
“어르신, 제가 필요한 게 있긴 합니다.”
“그래, 사람이 어떻게 필요한 게 없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 어디 말해보게나.”
“거기, 필기구 좀 가져다주겠나?”
지목당한 노예는 황급히 밖으로 나가서 필기구를 가져왔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서 등자를 그려서 아칸에 보여줬으나, 그는 그림을 둘러보면서 의문을 표할 뿐이었다.
“이게 무슨 물건인고?”
“말을 쉽게 탈 수 있게 해주는 물건입니다.”
“말을 쉽게 탄 다라···?”
아칸은 한참을 둘러보다가 고리 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발을 끼우겠군?”
“예, 그렇습니다. 저 부분을 지지대로 삼아서 중심을 잡는 겁니다.”
“확실히 편리하긴 하겠군.”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병을 육성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겠지요. 이게 있다면은 빠르게 기병대를 양산해낼 수 있고, 그 기병대로 밀려오는 야만인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아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리우스를 칭찬했다.
“생각보다 괜찮은 물건이야 그래서 얼마가 필요한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고로 이렇게 돈을 타낼 때는 아슬아슬하게 받는 것보다는 될 수 있는 한 최대로 당겨 받는 게 중요했다.
“솔리두스로 금화 삼천 닢만 주십시오.”
“삼천 닢? 그렇게나 필요한가?”
“남은 돈으로는 친위대를 무장시키려고 합니다.”
“허···. 그렇게나 상황이 안 좋은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아칸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 5천 닢으로 하지 거사 전까지 친위대를 무장시키고 훈련해놓게.”
“예, 그런데 거사는 언제 어떻게 일어납니까?”
내 질문에 아칸이 조금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아직 자세한 것은 정해지지 않았네만, 자네가 거사당일 적에 황궁을 점령해서 황제 폐하의 신병을 확보하면 외부에 있는 수도군단과 도시 순찰대가 수도를 장악할걸세.”
“그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스틸리코를 붙잡아서 죄를 물어야지. 그의 지지자와 가족들 모두 아피아 가도에 매달아 버릴 것이야.”
듣다 보니 의문점이 들었다.
이 계획은 스틸리코가 도망치지 않고, 수도군단과 순찰대가 수도의 방어를 뚫어낸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만일 수도 장악에 실패하거나 스틸리코가 도주해버린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들의 계획이 실패할 게 뻔히 보였기에 마음속에 남아있던 미련도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스틸리코가 이들을 신경 쓰지 않는 이유도 이해가 됐다.
“자네, 아직 믿음이 모자란 듯 보이는구먼.”
“제, 제가 말입니까?”
아칸의 갑작스러운 말에 화들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안 거지?
“우리 계획이 겉으로 보면 부실해 보일 수도 있네, 하지만 이 계획은 최종계획일뿐이야.”
“그렇다는 말은···.”
“지금 북아프리카의 속주들에서는 로마를 향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네.”
“예? 처음 듣습니다.”
물론 스틸리코에게 전부 들었던 이야기였다.
“당장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그들의 분노가 터져 나올걸세, 반란을 진압하러 스틸리코가 떠나는 그때!”
아칸은 눈을 빛냈다.
“그때가 기회일세.”
“오···.”
솔직히 감탄했다.
처음에 계획을 들을 때야 이런 허술한 계획에 스틸리코가 실각한다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스틸리코가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에서 그의 정치적인 경륜이 느껴졌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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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속도 쓰라렸고, 몸이 쇳덩어리처럼 무거웠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머리가 울리는 듯이 어지러워 몇 걸음 걷지 못해서 의자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나으리, 일어나셨습니까.”
“으음···. 코프루스? 너야?”
“예, 나으리 씻을 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들어와.”
코프루스가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니, 분명 집에는 온 것 같은데 어젯밤의 기억이 없었다.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기억이 없는 것을 보니 갑자기 두려웠다.
‘시발, 술 처먹고 또 다 불어버린 것 아냐?’
현대였다면 주변에 메시지를 마구 보내면서 상황을 알아봤겠지만, 지금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 내면서 기억을 되짚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코프루스가 말했다.
“나으리, 안색이 창백하십니다. 몸이 편찮으신지요?”
“그래? 거울을 가져와 주겠나.”
코프루스가 건넨 금속거울로 얼굴을 비춰봤지만, 생각보다 잘 보이지 않았다.
거울을 내려놓으면서 코프루스에 물었다.
“코프루스, 어젯밤에 내 시중을 든 게 자네인가?”
“예, 나으리.”
“그렇다면 내가 술자리가 끝나고 여기까지 데려온 것도 자네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 혹시 아칸 님이나 다른 분들이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나?”
“다른 분들은 거나하게 취하셔서 마차에 실려 가셨고, 아칸님 또한 크게 취하셔서 배웅도 못 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군.”
다행히도 별일은 없었던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니 코프루스가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테르만티아 님께 보내신 편지는 잘 전해드렸습니다.”
“응?”
편지를 보냈다고?
내가?
언제?
편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깊은 물 속에 잠겨있던 진주가 튀어나오듯이 떠오르는 기억들에는 잔뜩 술에 취해서 편지를 쓰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악! 씨발!”
“나, 나으리?”
역시 술은 만악의 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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