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87)

마리우스와 8인의 도둑들.

“허허 어째서 답하지 못하는 건가?”

스틸리코가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일부러 나와의 불화를 일으켜서 사이가 조금 틀어지는 그림을 생각한 모양인데···.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결코, 나쁜 방법은 아니었지만, 그의 방식이 나를 굉장히 화나게 했다.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질러버렸다.

생각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이내 스틸리코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고, 그의 부인은 뜬금없는 상황에 놀랐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나와 스틸리코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테르만티아 님이 마음에 든다 했습니다. 테르만티아 님을 처음 뵙는 날부터 지금까지 그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허허···.”

스틸리코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태연하게 질러버렸다.

“말이 나온 김에 제가 사윗감으로는 어떤지요?”

스틸리코는 칼같이 대답했다.

“불가.”

“어째서입니까?”

“자네가 우리 가문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지금의 제가 아니라 미래의 저를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안된다면 그런 줄 알고 있게나.”

“뭐 그러시다면야.”

스틸리코가 진짜로 화난 듯이 보였다.

눈앞에 놓인 포도주를 들어서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포도 향과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포도주가 참으로 괜찮았다.

스틸리코는 여전히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기고 있었고, 다른 가족들 또한 조용히 식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스틸리코는 식사시간 내내 나를 노려보고 있는지라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충 저녁을 해결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그래, 어서 돌아가게나.”

“손님을 이렇게 보내시면 어떻게 해요.”

“세레나, 당신이 나설만한 일이 아니야.”

“뭐가 아니에요. 평소에 손님을 데려온 건 저분이 처음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한 것도···.”

“그만! 세레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 자네는 빨리 돌아가기나 하게!”

“예 예, 갑니다.”

스틸리코를 뒤로하면서 저택을 나섰다.

정문으로 걸어 나오면서 조금 전의 스틸리코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왜 멀쩡한 사람을 건듭니까.”

“잠시만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스틸리코의 장녀 테르만티아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전에 했던 말은 무슨 뜻인가요.”

“저는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고, 장군께서 물어보시기에 대답한 것뿐이지요.”

“그래요?”

테르만티아는 다시 한번 위아래로 날 훑어봤다.

지난번에는 경계심이 담겨있었다면, 이번에는 상품을 품평하는 상인의 눈빛이었다.

“뭘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지금 친위대장이라고 하셨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시나요.”

“예? 그거야 당연히 황궁을 경비하고 황제 폐하를 지키는 것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아버지와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제가 마음에 든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할 말이 없었다.

테르만티아는 객관적으로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아버지인 스틸리코 장군과 황제의 질녀이자 양녀인 어머니가 가져오는 뒷배경 또한 내게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스틸리코 그 양반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당장은 좋아 보일지 몰라도 그는 몇 년 안 가서 실각하는 인물이다.

그녀와 이어진다면, 당분간은 즐겁겠지만 그 이후를 장담할 수가 없다.

“왜 대답이 없으세요. 혹시 조금 전의 말은···. 그냥 해보신 말인가요···?”

테르만티아가 실망했는지 눈꼬리가 살짝 쳐졌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미모였다.

현대에서 만났다면 용기를 내서 번호를 물어봤을 정도지만, 나는 그녀의 최후를 알고 있었다.

몇 년 뒤에 일가족이 전부 죽고 어머니와 함께 유폐돼버릴 그녀를 생각하니 조금 불쌍한 마음도 든 게 사실이었다.

“그냥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마리우스 님이 마음에 들어요.”

로마 여인은 참으로 화끈했다.

“좋다는 건 아니고, 그냥 마음에 든다는 소리예요.”

“아···.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는데···. 마리우스 님의 말을 들어보니 관심이 생겼네요.”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군요.”

“편지, 기다릴게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어르신 어디 편찮으신지요.”

“크흠···. 괜찮아. 빨리 가기나 하지.”

“이미 말을 대기시켜 놨습니다.”

그녀의 미소가 떠올라 다시 얼굴이 붉어졌다.

확실히 미소 하나는 매체에서 봐왔던 여느 미녀보다도 인상적이었다.

******

“갔어?”

“예, 아가씨 말을 타고서 떠났네요.”

“그렇단 말이지···.”

테르만티아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 저분이 어디 사시는지 알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아마 요나스라면 알지 않겠어요?”

“그럼 요나스를 보내면 되겠네.”

“아가씨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세요.”

테르만티아는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그냥, 관심이 생겨서···?”

그녀의 입꼬리는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

그 뒤로 며칠간은 스틸리코를 보지 못했다.

의식적으로 그를 피한 탓도 있지만, 스틸리코 또한 나를 피해 다니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궁 내부에서는 알게 모르게 조금씩 소문이 퍼져나갔고, 급기야 꼬맹이까지도 이 일을 언급했다.

“마리우스, 숙부랑 싸웠다면서!”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나는 황제야. 이 나라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을 것 같아?”

꼬맹이는 한껏 어깨에 힘을 주면서 잘난 체를 했지만, 대충 누가 말해줬는지 짐작이 갔다.

“또 몰래 꼭꼭 숨어 계시다가 들은 것 아닙니까?”

“아, 아니야! 그리고 황제한테 숨는다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말버릇이라는 단어도 배우셨군요. 축하드립니다.”

그동안 황제의 곁에서 같이 강연도 빼먹고 놀아준 덕분인지 호노리우스는 제법 나를 따르고 있었다.

매일매일 부대 내에서 공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호노리우스에게 전수해줬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던 꼬맹이를 현대의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다 보니 이제는 아칸보다 나를 먼저 찾게 되었다.

“그래서 왜 싸운 건데?”

“별일 아니니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궁금하니까 빨리 말해봐!”

“개인적인 일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럴 때만 그래.”

호노리우스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볼을 부풀리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미래의 암군이라고는 해도, 하도 붙어 지내다 보니 이제는 그냥 동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 왜 입이 시라쿠사까지 닿을 만큼 튀어나오셨습니까.”

“마리우스가 안 말해주잖아.”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알려줄 거야?”

심통 가득했던 얼굴에 금세 기대감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슬슬 강연시간이십니다.”

“아악! 알려줘!”

“강연을 무사히 마치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진짜지? 말해줘야 해!”

꼬맹이는 선생이 들어오기도 전에 그의 손을 붙잡고서는 저 멀리 가버렸다.

그 뒤를 친위대 병사들이 황급히 쫓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폐하와 친분을 쌓은 것 같군. 마리우스.”

“폐하는 지금 강연에 가셨습니다.”

“오해 말게나, 나는 폐하가 아니라 자네를 만나러 왔다네.”

물고기가 드디어 떡밥을 물었다.

시간이 지나도 반응이 없길래 실패한 줄 알았는데, 그냥 물고기가 의심이 많았을 뿐이었다.

“저를요?”

“그래, 마침 날도 좋으니 잠시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어떤가?”

“뭐, 그러시지요.”

푸른 하늘 아래 탁 트인 황궁 내 정원을 아칸과 함께 걸었다.

정원사가 열심히 관리한 덕분인지 싱그러운 꽃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은 모습은 원예에 대해 조예가 없는 내가 보기에도 아름다워 보였다.

다만, 이 모습을 음습한 환관 노인네와 봐야 한다는 게 조금 싫었다.

“날이 참 좋지?”

“평소처럼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로군요.”

“그렇지. 언제나처럼 똑같은 날씨야 로마도 늘 그런 말이지.”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칸은 웃고 있었다.

“얼마 전에 자네와 스틸리코 장군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말이야.”

“요즘 만나는 분 들마다 전부 그걸 물어보는 통에 골치가 아프지요.”

“하하하, 로마에서는 일주일이면 모르는 일이 없다는 말도 못 들어 봤는가? 그래서 무슨 일로 싸우게 됐는지 내게도 알려줄 수 있겠나?”

슬쩍 아칸의 표정을 훑어봤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듯 보였지만, 그의 눈은 사고를 치고 자신이 전부 수습하겠다던 모 중대장을 바라보던 행보관의 눈처럼 의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대장은 모든 잘못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려다가 사단장에게 찍혔다.

아칸은 아직 날 의심하고 있었다.

“전부 소문이 과장된 겁니다. 가벼운 견해차였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스틸리코의 가문과 맺어지려다가 문제가 생겼다던데, 사실인가?”

아칸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최대한 슬픈 생각을 하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백일휴가 당시에 창고 키를 들고 나갔던 일을 떠올리니 몸이 덜덜 떨리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이런, 내가 자네의 안 좋은 기억을 건드려 버렸구먼···. 내 사과하겠네.”

아칸은 당황했다는 얼굴로 사과했지만, 사과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희열이 느껴졌다.

“후···. 하긴 아칸 님이라면 들어도 되겠지요. 어제 스틸리코 장군의 저택에서 테르만티아 양에게 청혼했지만, 장군께서 저의 출신을 운운하시면서 내치셨습니다.”

“저런, 참으로 슬픈 일이군. 남녀 간의 일을 가문이 끊어놓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자네의 마음이 크게 상했겠군···. 이를 어쩐다.”

“아닙니다. 아칸 님께서 이리 위로를 해주시니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하하.”

그렇게 한참이나 아칸과 스틸리코의 뒷담화를 하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때를 시작으로 아칸이 찾아오는 횟수가 부쩍 늘었고, 이제는 자연스럽게 만나서 스틸리코를 욕하는 게 일상이 될 때쯤···.

“자네, 오늘 저녁에 시간 있는가?”

“하하하. 아칸 님께서 내달라는 데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어야지요. 암요!”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내가 다 고맙네.”

“오늘도 사람을 불러서 노는 겁니까? 아니면 검투경기를 보러 가시는지요?”

아칸은 주변을 조심스레 살피더니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 내 집으로 찾아오게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별일 아닐세 다만 이 나이를 먹고 자네와 놀 생각을 하니 조금 말하기 껄끄러워서 말이야.”

“에이- 아칸님 정도면은 아직 젊으시지요.”

“예끼! 그럼 이 늙은이는 이만 가보겠네.”

“예, 살펴 들어가십시오.”

아칸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웠다.

물론 다른 이들이야 평소와 다름없다고 느꼈겠지만, 그동안 아칸과 같이 다니면서 병적일 정도로 그를 관찰했던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

“왔는가.”

“아칸님의 저택은 언제와도 그 규모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우선은 안으로 들게나.”

마리우스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녀석을 따라온 병사들과 노예들을 떼어놓고서는 천천히 저택의 깊은 곳까지 안내했다.

마리우스 녀석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저택 내부 깊숙한 곳에 마련된 방으로 마리우스를 안내했다.

마리우스는 기세등등하게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에서 자리를 잡은 다른 이들을 보며 물었다.

“아니 아칸님 이분들은···?”

“사실 자네를 이곳에 부른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일세.”

“예?”

“우리는 로마를 바로 돌리려는 이들일세.”

“예??”

마리우스는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동안 의심했던 것이 헛것으로 생각될 만큼 순수한 그의 모습에 내 마음속에 있던 마지막 의심이 사그라들었다.

‘걸려들었어.’

******

‘걸려들었어.’

지난번에 스틸리코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대충 눈으로만 훑어봐도 메디올라눔의 군단장과 원로원의 치안관과 몇몇 의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정 중앙에는 헤라클리아누스가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내가 설명해 주겠네.”

헤라클리아누스가 덤덤하게 내게 말했다.

“우리는 어린 황제 폐하를 손에 쥐고 흔들고 있는 스틸리코를 몰아내려는 모임일세.”

“예?!”

월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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