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도둑놈이 너무 많습니다.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서 퇴근을 준비했다.
우선은 스틸리코에게 이제 신세를 안 져도 되겠다는 말을 해야 했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갑자기 어디서 집을 구했다고 하면 뭐라고 설명하지?”
사실대로 말할까?
그럼 그대로 찍힐 텐데.
그동안 모은 돈으로 샀다고 할까?
퍽이나 믿겠네.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딱히 해결방법이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은 점점 흐르고 있었고.
결국, 모든걸 포기한 채로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스틸리코에게 찍히기는 하겠지만, 그건 뭐 아칸이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면서 집무실로 들어갔다.
스틸리코는 내가 들어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흠흠···. 접니다 장군.”
“아칸을 만났다지?”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로마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내가 모르는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나?”
“예, 만났습니다.”
“순순히 대답하는군?”
“알고 계신다는데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스틸리코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 사실을 문제 삼으려고 말한 건 아닐세. 오히려 자네가 그놈과 접촉해줬으면 했는데 잘된 일이지.”
“예?”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스틸리코도 뭔가를 꾸미고 있었나?
“그게 무슨···.”
“아칸이 내 정보를 요구했을 거야 그렇지?”
“......”
“그런가 보군. 뭐 상관없네! 그 녀석이 날뛰어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
스틸리코는 들고 있던 파피루스를 내려놓고서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칸 녀석이 내 정보를 원하면 줘버리게.”
“정말입니까?”
스틸리코의 말은 당황스러웠다.
이건 대놓고 자기를 배신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게 아닌가?
“자네도 아칸의 정보를 가져오게.”
시발.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더니···.
스틸리코와 아칸의 알력다툼에 내 대가리가 터지게 생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내 믿음을 져버리지 말게나.”
“저를 발탁해주신 게 스틸리코 님인데 어찌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니 내 마음이 다 놓이는 것 같군. 아칸 그자와는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이 좋아.”
“명심하겠습니다.”
황궁에 내 편은 없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스틸리코의 집무실을 나와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도 타국으로 망명할까도 고민해봤지만.
타국이라고 해봤자 말이 안 통하는 페르시아나, 얼마 전까지 피 터지게 싸워댔던 게르만족들뿐이었다.
“에라이 씨발.”
가슴이 답답했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면서 적과 몸을 부딪히는 게 낫지, 보이지도 않는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싸움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퇴청하십니까?”
“그래, 코프루스 자네와도 이만 안녕이군.”
“스틸리코 장군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제 소유권은 마리우스 님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놓고 내 곁에 사람을 심겠다는 스틸리코의 뻔한 수작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래, 집으로 안내나 해.”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첫 출근이 끝났다.
******
“아칸님, 마리우스가 스틸리코와 만났다고 합니다.”
“그럴 줄 알았지. 그래서 대화 내용은 들었나?”
“아쉽게도 근처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제지당해서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
아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생각했다.
‘스틸리코라면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
그러고선 아칸은 품 안에서 하품을 하는 고양이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마리우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서 내게 한 시간마다 보고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히스파니아에 좀 다녀와 줘야겠어.”
“예? 히스파니아···. 말입니까?”
“그래.”
젊은 환관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아칸에게 물었다.
“히스파니아 같은 촌구석에는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요?”
“최근에 그곳에 자리를 잡는 게르만 인들이 토착민들과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가서 불을 지펴야겠어.”
“불···. 말입니까?”
젊은 환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불만을 점점 쌓아가다가···. 한 번에 터뜨리는 거지 어때 할 수 있겠나?”
“아, 알겠습니다.”
“그럼 충분히 준비해둬. 일주일 내로 떠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법 긴 여행이 되겠군요.”
젊은 환관이 인사를 하면서 방을 나가자 아칸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면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스틸리코···. 황제 폐하의 눈에 띄어서 벼락출세한 근본도 모를 녀석이 정치에서 나를 배제하려고 해?”
아칸이 점점 거칠게 고양이를 쓰다듬자.
고양이가 괴로워하면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억세게 틀어쥐고 있는 아칸의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고양이는 열심히 발버둥 치면서 구슬픈 비명을 냈지만.
아칸은 신경질적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제깟 놈이 날뛰어봤자지. 고작 싸움 좀 잘한다고 나를 깔아뭉개려고 들어?”
냐아아옹─
아칸이 고양이를 놓아주고선 밖으로 향했다.
밖에서 대기중이던 환관들이 뒤를 따라붙으며 아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헤라클리아누스”
******
야심한 밤.
헤라클리아누스의 집에 여러사람이 모여 있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스틸리코가 데려온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아칸의 말에 헤라클리우스가 기억을 뒤져가면서 대답했다.
“마리...우스 였던가요?”
“오늘 그 자와 접촉했습니다.”
“굳이 그럴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군요.”
“스틸리코를 몰아내는데 제법 도움이 될것같아서요.”
“믿을만 한 자입니까?”
아칸은 피식 웃었다.
헤라클리우스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길도를 지원하는 것을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칸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쯧쯧쯧···. 지금이 중요한 시기입니다. 어지간한 일로는 스틸리코가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말씀입니까, 자칫 잘못했다가는 북아프리카 속주를 통째로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까짓 땅쯤이야 다시 찾아오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스틸리코를 몰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그 날이 거사 일이 될 겁니다.”
헤라클리우스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저는 모쪼록 아칸 님만 믿겠습니다.”
“당연하지요. 제가 누굽니까? 선제만 수십 년을 모셔왔고 오늘날의 폐하를 길러낸 사람입니다.”
아칸은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런 야만족의 피가 섞인 이가 선제의 탁고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제 위에 설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로마는 로마인들의 것이어야만 합니다. 다른 이들은 필요 없어요.”
헤라클리우스는 입을 다물었다.
흥분했던 아칸은 숨을 고르면서 흥분을 가라앉히며 헤라클리우스에게 물었다.
“지금 확보한 부대는 어느 정도입니까.”
“메디올라눔의 순찰대와 인근의 군단 하나를 포섭했습니다.”
“1개 군단으로 수도를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마리우스라는 친구···. 그 친구가 데리고 있는 친위대가 황궁을 장악한 사이에 밖에서 들이친다면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아직 시간은 여유로우니 준비를 철저히 해주세요. 돈이 필요하다면은 제 창고에서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습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칸은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늙은이의 추레한 웃음이었지만, 헤라클리우스에게는 드높은 천상의 천사처럼 자애로운 미소로 보였을 뿐이었다.
******
몇 주 동안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아니, 사실은 무난하지 못했다.
“마리우스 놀자!”
출근하자마자 호노리우스와 놀아주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놀아주는것도 그냥 놀아줄수가 없었다.
온갖 놀이를 해본 호노리우스는 매번 새로운 놀잇거리나 이야기를 원했다.
그뿐인가?
꼬맹이와 잔뜩 놀아주고 나면은 잔뜩 지친 몸으로 집무실로 와서는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오늘 점심과 저녁 메뉴뿐인 돌대가리들과 개판인 문서들을 손봐야 했다.
“그러니까, 여기 적힌 숫자가 맞냐고.”
“아마도 맞을 겁니다.”
“아마도? 야 이 새끼야 병사숫자가 사천 명이 조금 안 되는데 무기창고만 7개인 게 말이 돼!”
“그, 그렇습니까?”
“당장 다시 해와!!!”
특히나 이 문서 쪽에 문제가 심각했는데 전임자가 얼마나 개판으로 부대를 운영했는지 무기 수량이 들쭉날쭉 한 건 기본이었다.
문제가 무기들뿐이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전임자가 명부도 건드려놓은 탓에 부대원을 파악하는 일에만 꼬박 2주가 걸렸다.
“씨발 진짜 가관이네.”
살벌한 내 욕지거리에 부관들의 몸이 움츠러드는 게 보였다.
하지만 욕을 안 하고 싶어도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 분명 수년 전 기록에서는 죽었다고 나온 인물이 버젓하게 살아서 급료를 타간 것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기병이라고 등록된 이는 열심히 보병으로 근무하는 것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중기병의 말 갑옷이 사라진 것도 이제는 그러려니 할 정도였다.
“이 명부에 따르면은 우리 친위대에는 대대가 하나 더 있어야 하는데, 이 대대는 어디 간 거야.”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너희가 모르면 안 되지. 그러니까 부대가 개판 나는 거 아니야!”
몇 주 동안의 갈굼에 설움이 폭발했는지, 부관이 울먹이면서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도 잘하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부대가 개판이라고 하셨지만, 장군께서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잘 굴러가는 부대였습니다!”
“이 부대는 잘 굴러가면 안 되는 부대란 말이야!”
한숨만 푹푹 나왔다.
장부를 파면 팔수록 정말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개지랄들의 향연이었다.
분명 제국 행정부에서 지급되는 돈이나 자원이 상당했음에도 그 자원과 돈들이 줄줄이 세고 있었다.
자신이 백인 대장 시절에는 화살 하나까지 세 가면서 아꼈던 게 우스워질 정도였다.
보충병만 제대로 왔더라면, 보급품만 제대로 지급됐더라면 같은 별 병신같은 이유로 병사들이 뒤져나갔다.
그런데 막상 보니 중앙에 도둑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들이 너무 많아.”
“예?”
“아무래도 스틸리코 장군을 만나봐야겠어.”
자줏빛 망토를 걸치면서 부관에게 말했다.
“그거 종류별로 정리만 해놓고 이만 퇴근해도 좋네. 그리고 오늘 암구호는 마르쿠스에 바야 투르로 하게.”
“예, 장군.”
몇몇 서류를 챙겨 들고는 그 길로 스틸리코 장군의 집무실로 향했다.
제법 날이 어두워졌지만, 스틸리코의 집무실은 촛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장군.”
“으음? 마리우스 무슨 일인가 이리 늦은 시간에.”
“장군께서 퇴근하지 않았는데 제가 먼저 가겠습니까.”
“하하하, 그런가? 이거 민폐를 끼쳐버렸군.”
스틸리코는 기지개를 켜면서 나를 반겼다.
“그래, 무슨 일인가?”
“필요한 게 있어서 왔습니다.”
“필요한 것이라···?”
나는 품 안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스틸리코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이게 무엇인고?”
스틸리코는 서류를 들고서는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몇 분쯤 흘렀을까.
굳게 닫힌 스틸리코의 입에서는 나지막한 신음성이 새어 나왔고, 부드러웠던 얼굴은 식은 빵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흐음···. 친위대에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다 내 불찰일세.”
“어찌 이것이 장군 개인의 문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원하는 것이 이것과 관련 있는 모양이군.”
“예, 제가 판노니아에 있을 때부터 생각한 일입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연습했던 말이었지만 막상 스틸리코의 앞에 서니 긴장이 되어 심호흡했다.
“이 나라에는 도둑놈이 너무 많습니다.”
“도둑놈이라···.”
“이 나라가 가난하거나 약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도둑놈들이 창고의 쥐 새끼들처럼 제국을 갉아 먹어서 그런 것입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 도둑놈들을 때려잡을 권한을 제게 주십시오.”
“권한이라···.”
스틸리코는 고민하는 듯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네는 내가 그들을 찾지 못해서 놔뒀다고 생각하나?”
“아닙니까?”
“아니지. 그런 이들이라도 자리를 지켜야만 이 제국이 살아남을 수 있어.”
“궤변입니다.”
“궤변이지.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네 당장 그리스만 하더라도 알라리크가 돌아서지 않았는가.”
알라리크라는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지금쯤 그리스를 휩쓸고 있는 게 맞긴 한데···.
그건 동로마의 일이었다. 스틸리코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건 동쪽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로마는 하나일세. 동쪽과 서쪽으로 나눈 것은 그 거대한 몸집을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함이야.”
“그렇게 나눴기 때문에 비대해진 관료집단의 부패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들을 일일이 때려잡기엔 시간이 없어. 우선은 외적들을 막아내야 해.”
스틸리코의 얼굴에는 한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제국을 위해 제국이 썩어가는 것을 버려둘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나는 얼마 전에 만났던 굶주린 빈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길거리에서는 수백, 수천이 굶어 죽어 나가고. 한 줌도 안 되는 귀족들이 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게 정상입니까?”
“비정상적이지.”
“군의 창끝은 무뎌졌고, 갑옷은 풀어진 지 오래입니다. 이게 정상입니까?”
“아니다.”
“이 나라는 잘못됐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그것을 고칠만한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쿵쾅거리던 심장이 고요해지면서 감각들이 들끓었다.
“저는 그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권한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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