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
“따라오시면 제가 일을 못 합니다.”
“내가 여기 주인인데, 왜 안돼?”
“저도 제 일이 있습니다.”
“마리우스는 친위대장이라면서, 그럼 내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꼬맹이가 꽤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건···. 맞습니다만.”
“그럼 나를 따라와야겠지?”
으음···. 분하지만 맞는 말이다.
그냥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황실의 교육은 다르다는 건가.
“좋아! 따라와서 놀아줘.”
“저는 ‘호위’담당이지 ‘놀이’담당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 노는 거나 지켜봐.”
꼬맹이는 뭐가 신난 지 복도를 신나게 뛰어갔다.
황급히 뒤를 따라가니 심마쿠스가 잔뜩 열 받은 얼굴로 호노리우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폐하, 지금 무엇을 하시는지요?”
“노는 중인데.”
“지금은 강연을 들어야 하는 시간이 아닐는지요.”
“음···. 그렇기도 하지.”
“그렇다면 강연을 들으러 가시지요.”
“싫어!”
꼬맹이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지만.
듣는 사람의 표정은 그러지 못했다.
잔뜩 구겨진 얼굴 사이로 입이 열리면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
“폐하, 이렇게 놀기만을 좋아하시니 나라의 장래가 어둡습니다.”
“지금은 밝잖아.”
“폐하, 장차 이 제국을 다스릴 분이 어찌 그렇게···.”
한참을 떠들던 심마쿠스는 나를 보더니.
새로운 분노를 토해냈다.
“자네는 무엇을 하기에 폐하를 말리지 않았는가!”
“저는 부임한 지 몇 분 안 됐습니다.”
“쯧···. 핑계대지말고 열심히 하게, 그리고 폐하!”
은근슬쩍 도망가려던 호노리우스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왜 불러.”
“제발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알았어~”
심마쿠스는 못마땅한 듯이 입이 달싹거렸지만.
더 쏘아붙이지 않고 바쁘게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꼬맹이와 나는 멀어지는 심마쿠스의 눈치를 보다가 냉큼 자리를 떴다.
******
“폐하께서 또 강연에 불참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환관 아칸은 웃고 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자신이 부모처럼 기른 호노리우스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것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호노리우스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 아칸이었다.
“뭐, 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내버려 두게.”
“예 알겠습니다.”
“스틸리코는 뭘 하고 있다던가?”
“스틸리코 장군은 집무실에서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다른 움직임은?”
“마리우스라는 이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마리우스? 누구지?”
“11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백인 대장이라고 합니다.”
“그래?”
아칸은 처음 듣는 마리우스라는 이름에 흥미를 느꼈다.
“알았으니 나가봐.”
젊은 환관이 방을 나갔다.
홀로 남겨진 아칸은 파피루스에 적힌 명단에 마리우스를 채워 넣고서는 자신의 앞에 놓인 포도알을 집어 들었다.
“마리우스라···. 스틸리코와는 별 접점이 없는데. 스틸리코가 친위대장에 꽂아줬다?”
아칸은 냄새를 맡았다.
향긋한 권력의 냄새이자.
여태껏 자신의 안위를 지켜왔던 감각이 반응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 녀석이 섭정직에 오르고 숨통이 막혔는데···. 잘됐네?”
아칸은 포도알을 입에 던져넣으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마리우스···. 넌 얼마짜리니?”
******
“마리우스!”
“부르셨습니까.”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심마쿠스 님께서 강연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으니 강연을 들으러 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으음···. 싫어.”
“......”
뭐 어쩌라는 거지.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는데 재게 묻고 있는 꼬맹이의 심리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이 난 호노리우스가 말했다.
“마리우스 뭐 재밌는 거 없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음···. 공놀이!”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심마쿠스에는 좀 혼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황제가 놀고 싶다는 데 밑에 있는 신하가 거절할 수가 있나.
“족구라고 아십니까?”
“족구? 그게 뭐야.”
“오롯이 발만을 사용하는 공놀이입니다.”
“재미없어 보이는데.”
꼬맹이의 말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족구가 재미없다고?
내 군 생활 중에 족구를 한 번도 안 한 녀석은 봤어도.
딱 한 번만 한 놈은 보질 못했다.
“듣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게 재밌습니다.”
반신반의하는 호노리우스를 데리고서 병영에 있는 공터로 향했다.
한창 훈련 중이던 병사들이 호노리우스를 알아보고서는 경례를 올렸지만.
꼬맹이는 전부 다 무시하고서는 그대로 지나갔다.
“그래서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우선은 같이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저쪽에 있는 병사들을 끼면 적당할 것 같군요.”
그렇게 시작된 족구에 호노리우스는 금세 빠져들었다.
오죽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족구를 해대는 통에 전쟁터에서 단련된 내 허벅지와 다리가 저릴 정도였다.
“헥헥···. 폐하, 안 지치시는지요···?”
“마리우스 이거 엄청 재밌어! 한판만 더하자!”
꼬맹이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에 병사들은 이미 나가떨어진 지 오래였고.
나도 슬슬 한계점이 찾아오고 있었다.
“폐하, 너무 오래 하신 게 아닌지요. 이제 슬슬 해가 지고 있습니다.”
호노리우스는 점점 지고있는 해를 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뭐야, 왜 재밌는 건 항상 끝나는 건데.”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난 끝내기 싫은데.”
“내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지금 하고 싶은데.”
꼬맹이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폐하 여기 계셨군요. 줄곧 찾아다녔습니다.”
“아칸! 여기는 웬일이야.”
“하하하···. 날이 늦었는데 폐하께서 돌아오지 않으니 소인이 찾으러 다닐 수밖에요.”
“아칸! 오늘은 뭘 했냐 면은···.”
시무룩해져 있던 꼬맹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살아났다.
환관의 품에 안긴 꼬맹이는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칸은 꼬맹이의 말에 전부 웃으면서 대답해주었고 아칸이 대답할수록 꼬맹이는 점점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
“폐하, 이제 날이 늦었으니 식사를 하시고 씻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아 맞다. 나 오늘 밥 안 먹었네!”
“하하하···. 그러실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두라 일러뒀습니다.”
“역시 아칸이 최고야!”
“별말씀을요.”
호노리우스가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면서 뛰어가자 황급히 뒤를 따르려 했으나, 아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새로 오신 친위대장이시군요. 이름이 마리우스라고 했던가요?”
뭐야, 목소리 왜 이래.
멀리서 들을 때도 조금 이상함을 느꼈지만.
가까이서 들으니 확실하게 느껴졌다.
어제 만났던 헤라클리아누스는 중년인 답지 않고 간교하고 간사한 목소리라 불쾌했다면.
아칸의 목소리는 바늘처럼 날카로웠고, 생크림처럼 부드러웠지만 썩은 생선의 비린내만큼이나 역겨웠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제 소개가 늦었군요. 황제 폐하를 모시고 있는 아칸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공손히 인사를 올리니 아칸이 눈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듣자 하니 마리우스 님은 얼마 전까지 공격지대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내 뒤를 캔 건가.’
“예, 그랬지요.”
“참으로 힘드셨겠습니다.”
“힘들었지요.”
아칸과는 더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아서 단답형으로 끊어냈지만.
아칸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이번에 황궁에 처음 오셨을 텐데, 불편한 점은 없으신가요?”
‘당신이 제일 불편한데.’
“불편한 점이랄게 있겠습니까? 이곳이 제국의 제일인데.”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슬그머니 상황을 넘어가려 했지만.
도무지가 눈앞의 이 환관 새끼는 미친개처럼 한번 물고는 놓지를 않았다.
“에이, 그러시지 마시고요. 필요한 게 있을 텐데요?”
“필요한 것이라···. 흐음···.”
고민하는척하면서 상대를 떠봤다.
쉽게 말하자면 선제시?
“듣자 하니 스틸리코 장군의 집에서 머무르신다던데···.”
상대는 생각보다도 정보가 많아 보였다.
내가 스틸리코 장군의 집에서 머문 것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르는 일인데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소름이 돋으면서도 꺼림칙함이 심해졌다.
“예, 뭐···. 이곳에서는 빈털터리 신세인지라.”
“제국을 위해 희생하신 분에게 그래서야 하겠습니까?”
아칸이 손가락을 튕기자 뒤에 서 있던 젊은 환관이 열쇠 하나를 가지고 왔다.
조심스럽게 그 열쇠를 받아든 아칸이 내게 그 열쇠를 건네며 말하기를.
“황궁 인근에 있는 자그마한 제 저택이 있는데···. 제국을 위해 헌신한 군인에게 드리는 제 작은 선물이랍니다.”
“굳이 이러실 것까지야···.”
일단 선물이라기에 받았다.
아무리 봐도 뇌물 같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한국에서도 못한 내집마련을 로마에서 한다는데?
심지어 일반 거주구역에 있는 복층주택도 아니고, 황궁 근처라는 프리미엄이 붙은 저택이었다.
이건 못참지.
“기뻐하시는 것을 보니 참으로 흐뭇합니다.”
“흠흠... 누가 기뻐했다고...”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나 보다.
애써 헛기침으로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 폐하를 잘 부탁드린다는 뜻으로 드리는거에요.”
“예?”
아칸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니.
어디 숨어있었는지 수십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커다란 궤짝을 들고서 튀어나왔다.
“이, 이게 다... 뭡니까?”
“제가 준비한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서, 성의요?”
사람들이 내려놓은 궤짝들은 하나같이 좋은 원목으로 만들어졌는지 해가 지고있음에도 절로 광택이 났고.
그 안에는 반짝거리는 금화와 각종 보석들이 가득했다.
“전부 들고가시기 힘드실테니 제 노예들도 드릴게요. 애들아 앞으로 이분이 너희의 새로운 주인님이다.”
끄응...
사나이 나상훈의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동안 뉴스에서 수많은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는 것을 보고 혀를 찼건만.
정작 내게 이런상황이 찾아오니 참으로 고민되었다.
이런일에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한심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마음으로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금액이었다.
“뭐 이런걸 다... 하하하...”
“별건아니고...”
아칸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휘어졌다.
“제가 장군에게 소소한 부탁이 하나있는데...”
“부탁말입니까?”
느낌이 왔다.
지금 말하는게 중요한 분기점이다.
“예, 별건 아니고... 스틸리코 장군과 가까운 사이라고 들어서 말입니다.”
“아... 그렇지요.”
아칸이 뭘 원하는지 대충 느낌이 왔다.
스틸리코 장군과 관련되서 뭔가를 묻고 싶은것이겠지.
하지만 아칸의 대답은 상상이상이었다.
“스틸리코 장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시고 쓸만한 정보를 제게도 알려주시지요.”
“예?”
뭐야.
뭘 알려달라고?
“아이참... 스틸리코 장군의 정보를 알려달라구요.”
“그게 왜 필...”
“쉿.”
조금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다시 나락으로 쳐박히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있는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면 모를까, 남자가 저짓거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속에서 열불이 끓어 올랐지만.
눈앞에 펼쳐진 금화들이 내 분노를 가라앉혔다.
“이유는 묻지 마시구요.”
“......”
고민됐다.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생각했지만, 딱히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을 받을지 아니면 거절할지의 문제였는데.
아칸의 주위에 있는 환관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았다.
어느샌가 내 주위를 둘러싼 이들은 펑퍼짐한 토가안에 무언가를 숨긴 듯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갑옷을 입고있긴 했지만, 주위를 둘러싸인데다가, 숫적으로도 불리했던지라 쉽게 빠져나가기는 힘들어 보였다.
“어떻게 하실건가요?”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이걸받고 충실한 번견이 되던지.
아니면 조용히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것.
“하겠습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능청스럽게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하나씩 주으면서 말했다.
금화를 줍느라 아칸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기쁜얼굴이었겠지.
“어머나, 역시 마리우스님이라면 그렇게 대답하실줄 알았어요.”
“별말씀을... 그런데 금화말고 괜찮은 갑옷도 하나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갑옷이요...?”
아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웃는얼굴로 대답했다.
“좋아요, 좋은 검까지 덤으로 드릴게요.”
“하하하, 말이 통하는 진정한 친구를 여기서야 찾았군요!”
“친구라... 후후후... 좋은 말이네요.”
나는 아칸의 손을 맞잡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녀석의 목을 수십번이고 비틀고 있었다.
아마 녀석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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