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87)

호노리우스.

아침 햇살은 따스하게 날 반겨주고.

거리에 지저귀는 새들은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처음으로 막사 내의 딱딱한 침낭이 아닌, 전에 느껴본 적 없는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맞는 아침.

정말 끝내줬다.

이 좋은걸. 이제야 알았다는 사실이 억울해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마리우스 님, 소인 코프루스입니다. 일어나셨는지요?”

문밖에서 어제의 그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일어났습니다.”

“씻을 물을 준비해왔는데,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세요.”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노예를 대하던데.

나는 왠지 모르게 말을 놓기가 조금 그랬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 무릎 꿇고는 내가 씻기 편하게 세숫대야를 받쳐 들었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땅으로 숙였다.

이렇게 과한 친절은 받아본 적이 없어서 조금 불편했던지라 빠르게 세수를 마치니.

시종은 팔에 걸어두었던 수건을 건네주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방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지니.

그제야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넓은 방과 호화로운 가구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는 맞지 않는 시계태엽처럼 괜스레 마음이 불안했다.

한 번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대충 준비를 마치고서 방을 나오니 문 앞에서 시종이 대기 중이었다.

“뭐, 뭐야 간 거 아니었어?”

“주인님께서 마리우스 님의 시중을 들라 하셨습니다.”

“어, 음···. 그래요. 당분간 잘 지내보죠.”

“말을 편히 하시지요, 듣는 제가 다 민망합니다.”

“알겠습니다. 아니, 알겠어···.”

“그럼 바로 황궁으로 향하시겠습니까?”

“그래, 안내해주겠나?”

시종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앞장섰다.

정문에는 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궁금하여 시종에게 물어봤다.

“이보게 코프룰루.”

“코프루스입니다.”

“그래, 코프루스 저 줄은 뭔가?”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줄을 힐끔 둘러본 코프루스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주인님께서 빈민들에게 아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 좋은 일을 하시는군.”

이렇게 보니 스틸리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저 많은 빈민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그 선의도 선의지만.

저렇게나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리고도 이런 저택을 유지하는 게 가능한 어마어마한 부도 감탄스러웠다.

저택에서 나와 황궁으로 향하는 길에도 끊이지 않는 줄을 보면서 감탄스럽기도 했고, 착잡하기도 했다.

“메디올라눔 정도의 대도시에 이 정도로 많은 빈민이라니.”

“외곽에는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예, 지금도 매일같이 수십, 수백의 이민자들이 도시로 몰려오고 있을 것입니다.”

“허허···.”

이 나라는 확실히 잘못됐다.

이제야 깨달았다.

전쟁터에서 아무리 야만족을 쳐 죽여도,

제국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곪아가고 있는데,

참으로 착잡한 기분이었다.

“연금 타 먹을 때까지는 멀쩡하겠지?”

“예?”

“아, 혼잣말일세, 혼잣말.”

******

다시 돌아온 황궁은 밤에 봤다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어두운 밤에도 제법 크다고 생각했는데,

낮에 보니 여태까지 봐왔던 어지간한 건물들보다도 거대해 보였다.

“마리우스 님, 확인되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코프루스와 헤어져 친위병의 안내를 받으면서 황궁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홀이 나를 반겼다.

“스틸리코 님의 집무실은 좌측복도로 가시다 보면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친위병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등을 돌려서 돌아가 버렸다.

넓은 홀에 홀로 남아 주변을 둘러보니, 거대한 석벽에 새겨진 로마의 지도가 눈에 들어왔다.

로마 전역이 새겨진 지도는 예술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투박하면서도 절로 웅장함이 느껴지는 역작이었다.

‘판노니아···.’

잠깐 생각에 빠져있을 때.

뭔가가 내 발을 콕콕 찌르는 느낌에 내려다보니, 웬 닭한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 발을 쪼고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왜 황궁에 닭이 돌아다니는 거지?

오늘 식사에 닭고기를 올리려다가 탈출한 건가.

“로마!”

그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마, 어디 갔던 거야 찾았잖아.”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꼬맹이는 복도를 뛰어와서는 내 옆에 있던 닭을 끌어안으면서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아저씨는 누군데 여기 있어. 여기 오면 안 돼.”

“아저씨···?”

나 말하는 건가?

혹시나 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황당함에 꼬마에게 되물었다.

“나 부른 거야?”

“그래, 왜 여깄어.”

꼬마는 순진한 얼굴로 내 가슴을 후벼팠다.

하지만, 아이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자세를 낮춰서 꼬마의 눈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나는 볼일이 있어서 잠깐 지나가는 중이었는데···. 그런데 넌 누구니?”

“나? 호노리우스.”

“호···. 뭐?”

시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호노리우스라고,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여기 사람들은 내 이름 들으면 다 알던데. 아저씨는 왜 몰라.”

내 눈앞에는 앞으로 로마를 시원하게 말아먹는 최악의 암군이 서 있었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간드러진 기분 나쁜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중년의 남성과 그의 뒤를 따르는 몇몇 사람들이었다.

“폐하, 어디를 가시거든 소인에게 말을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로마가 도망가버렸는걸.”

“폐하, 그래도 그렇지요···.”

호노리우스와 호들갑을 떨던 중년인은 돌연 고개를 돌려서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날 쏘아봤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중년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마치 뱀의 혓바닥으로 내 귀를 간질이는 듯이 사특하고 기괴했다.

“스틸리코 장군님을 뵈러 왔을 뿐입니다.”

“스틸리코?”

눈앞의 중년인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는 무슨 용무십니까.”

“그저 마주쳤을 뿐입니다.”

“마주친 다라···. 그게 말이 되는 소리십니까?”

“헤라클리아누스, 또 자네인가?”

“...스틸리코.”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와 뒤를 돌아보니,

스틸리코가 언짢은 얼굴을 한 채로 서 있었다.

그의 등장에 호노리우스는 재빠르게 중년인의 뒤로 숨어버렸다.

“자네는 왔으면 재깍 찾아올 것이지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헤라클리아누스, 자네는 왜 멀쩡한 사람을 붙잡아두고서는 귀찮게 구는가.”

“그, 그것이 아니라···.”

“쯧,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폐하 곁에는 가지 말라고.”

“자, 장군 오해십니다. 이것은···.”

“어째서 자네와 만날 때마다 이런 ‘오해’가 생기는지 영문을 알 수 없군.”

스틸리코의 한마디에 중년인의 입이 다물어졌다.

열심히 쏘아붙이던 스틸리코는 중년인의 뒤에 숨은 호노리우스에게 다가가더니,

그를 내려다보면서 한마디 했다.

“폐하, 외숙부이자 제국의 장군으로서 한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하, 하세요 숙부.”

“제발 그 닭대가리들은 치우시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폐하의 어깨에 수천만 제국민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시고, 또...”

호노리우스는 이어지는 스틸리코의 잔소리에 점점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한참이나 이어지던 스틸리코의 잔소리는 호노리우스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이났다.

“후우... 폐하, 갑작스럽게 황제가 되셔서 혼란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헤쳐나가셔야 합니다. 마음을 굳게 먹으십시오.”

스틸리코는 어린 호노리우스를 끌어안아주면서 등을 토탁거려줬다.

그러고는 중년인의 뒤에있던 젊은이들에게 호노리우스를 맡기고서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푸른눈으로 헤라클리온을 쏘아보고서는 내게 말했다.

“따라오게, 자네의 업무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예, 장군!”

나도 모르게 힘차게 대답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집무실까지는 그렇게 긴 거리가 아니었지만, 입을 다물고서 걷다보니 절로 숨이 턱 막힐정도로 답답했고, 전에 없을정도로 멀게만 느껴졌다.

“이제부터 자네 업무에 대해 설명해 주겠네.”

겨우 도착한 스틸리코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스틸리코는 본론부터 꺼냈다.

성격 한번 급하시네.

“자네의 업무는 굉장히 간단하지만, 복잡한 것이야. 뭔지 알겠나?”

“황궁 주변을 지키면서 주요인사들을 보호하는일 아닙니까?”

“그래, 그정도면 얼추 맞는말이지만... 그건 ‘병사’의 일이지 ‘대장’의 일은 따로있다네.”

대장의 일?

그런게 따로 있었나.

의문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요?”

“폐하의 곁을 지키면서, 폐하에게 손을 뻗으려고 접촉하는 모든이들을 차단하게.”

“전부... 말입니까?”

“그래, 조금전의 헤라클리아누스나 몇몇 환관들을 특히 주의해주게. 최근에 선제께서 돌아가신뒤로부터 부쩍 폐하께 들러붙는 기생충같은 작자들일세.”

“그렇군요...”

뭔가 위험한곳에 들어와버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저 지긋지긋한 최전방에서 벗어나서, 후방에서 꿀좀빨수있을까 싶어서 온것일 뿐인데...

이제는 여러 이익집단이 부딪히는 복마전에 발을 들여놓게 생겼다.

“자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네, 폐하의 곁에서 최대한 기생충들을 견제해주게.”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이 아니라 해내야만 하네. 자신있나?”

스틸리코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해보겠... 아니, 하겠습니다. 제가 있는한은 기생충무리들이 황제폐하의 앞에 모습도 드러내지 못할겁니다.”

“하하, 안심이 되긴 하네만.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네.”

스틸리코는 내 어깨를 두들겨주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나도 이곳에 있을테니, 크게 문제는 없을걸세.”

“그건 듣던중에 다행이로군요.”

“자네의 집무실은 황궁내에 있는 병영에 있을걸세, 뭔가 또 필요한건 없는가?”

“필요한 것 말입니까?”

잠깐 고민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게 무엇일까.

지금의 나는 스틸리코라는 배에 매달려서 황궁이라는 상어떼가 가득한 바다위를 표류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일 필요한 것은 내 말을 듣고 실행해줄 충실한 부하였다.

“장군, 혹시 이전에 제가 복무하던 부대에서 폴로라는 병사가 있는데. 그를 제 휘하에 배속시켜주실수는 없으신지요.”

“고작 병사하나면 되겠나?”

“예.”

한참이나 나를 살펴보던 스틸리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또 다른 요구사항은 없나?”

“아직은 없습니다.”

“아직이라... 그래,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가보면 알겠지. 필요한게 있다면 부담없이 말하게 내 선에서 처리해줄테니.”

역시 군 총사령관의 말은 차원이 달랐다.

예전에 대대장이 말하던 것과는 말에 신뢰도부터가 차이가 났다.

정말 말하면 전부 들어줄 것 같은 느낌에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감사합니다 장군!”

“으음... 자네 고향의 인사는 참으로 독특하군, 볼일은 끝난 것 같으니 병영으로 가서 인수인계를 받고 바로 근무 설수 있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군례를 올리고는 집무실을 나오니 조금전에 만났던 호노리우스가 기둥뒤에 숨어서 날 훔쳐보고 있었다.

제딴에는 숨는다고 숨었겠지만,

어림도 없지.

다보인다.

“폐하,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엇... 이봐 아저씨.”

“오늘부터 폐하의 호위를 맡게 된 마리우스입니다 폐하.”

“마리우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먼 옛날의 위대했던 장군의 이름과 혼동하신게 아닐는지요.”

“장군?”

호노리우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뭔가 재밌는걸 발견했다는 눈빛을 보니, 스틸리코가 내게 무슨생각으로 이 일을 맡겼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보모일이네.’

“예,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아직 이 나라가 황제의 나라이기 이전의 일입니다.”

“나, 나! 나 그거 알아!”

“역시, 폐하께서는 모르는게 없으시군요.”

“외숙부가 그건 공화정이라고 했어!”

“훌륭하십니다.”

“그래서, 그 장군이 무슨일을 했는데?”

“제가 잠시 다녀올곳이 있는지라... 조금있다가 설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뭐야, 아저씨 어디가?”

금새 호노리우스가 풀이죽은 얼굴로 물었다.

“잠시 병영에 들러서 처리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병영?!”

“예, 폐하.”

“나도 갈래!”

“예?”

호노리우스는 애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외숙부가 거기는 위험하다고 가지 말라고 했어.”

“그렇다면 가면 안되는 것이 아닐는지요...?”

“명령이야 안내해!”

“페하...”

호노리우스는 힘껏 내 정강이를 걷어차면서 말했다.

“안내하라면 할것이지 뭐가 말이많아!”

역시 미래의 암군은 떡잎부터 씹새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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