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
“오늘 한 마리의 양이 주님의 곁으로 돌아갑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의 추도문을 끝으로 장례식은 무사히 끝났다.
장례식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은 제법 이름있는 귀족들이었는지, 하나같이 자신의 부를 은연중에 과시하고 있었다.
장례식에 조문객보다 시종의 수가 더 많은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스틸리코 또한 말은 없었지만, 영 언짢은 얼굴이었고, 심마쿠스는 아예 죽일 듯이 귀족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거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곁에서 온갖 험한 말을 중얼거리는 심마쿠스의 옆자리는 너무도 불편했다.
추도사가 끝나자마자, 먼 거리를 와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면서 술 한잔하자는 가우덴티우스의 말도 거절한 채로 밖으로 나왔다.
황궁 앞에는 이미 수많은 마차로 도로가 가득 차 있었다.
몇몇 마부는 황도를 지키는 친위대와 시비가 붙었는지 고성도 오가고 있었다.
“마리우스, 벌써 가는 건가.”
“아, 예···. 아는 분도 없고 해서···.”
“현명한 판단이야, 나도 저런 자리는 질색이거든.”
어느샌가 따라온 스틸리코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자네는 내 집이 어딘 줄은 알고 있나?”
“예? 아···.”
너무 대책 없이 빠져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스틸리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이를 소개해줬다.
“이 친구는 내 심복인 코프루스라고 하네, 이 친구가 집까지 안내해줄 터이니 오늘은 푹 쉬게나.”
“감사합니다. 장군.”
“그래, 나는 오늘 들어갈 일이 없으니 기다리지 말게나.”
“예?”
아니, 그러면 나 혼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자라는 건가.
그것도 까마득한 상관의 집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 알겠습니다.”
“크게 신경 쓸 건 없으니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예, 장군···.”
스틸리코는 나름 배려해준다고 그렇게 말한 것 같지만, 듣는 처지에서는 더 부담스러웠다.
스틸리코는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서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시종과 단둘이 남게 된 나는 어색함을 느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시종이 고개를 숙이면서 말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리우스 님.”
“흠흠···. 나도 반갑네! 코···.”
“코프루스입니다.”
“그래, 코프루스.”
군대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부리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눈앞에 있는 이가 노예라고 생각하니 말이 조금 어색해졌다.
어떻게 대우해줘야 할지를 몰라서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시종은 어디선가 말을 끌고 와서는 그 옆에 엎드렸다.
“자네 뭐 하는 건가?”
“이러면 말에 오르기 편하실 겁니다.”
사람 등을 밟고 올라선다는 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황급히 시종을 일으켜 세우면서 말했다.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혼자서 힘겹게 말 위에 오르니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시종이 천천히 말의 고삐를 쥐었고.
스틸리코의 집으로 안내했다.
메디올라눔의 밤거리는 한적했고, 또 어두웠다.
황궁에서 조금만 멀어지니 금세 어두워지는 것이 어디가 어딘지도 잘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시종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안내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으리으리한 저택 앞에 멈춰서고서야 이곳이 스틸리코의 집인걸. 알 수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생각보다 매우 큰데···?”
황궁보다는 작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저택의 모습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 응, 그래 앞장서.”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봐 시종의 뒤를 따르면서 저택을 거닐고 있으니 참으로 부럽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런 커다란 집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며 찬란한 미래를 떠올릴 때쯤.
“코프루스.”
“아가씨.”
복도에서 마주친 여인에게 시종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건가요.”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황궁에서 밤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분은 누구신가요.”
눈앞의 여인은 스틸리코의 딸인 듯싶었다.
한눈에 봐도 스틸리코를 연상시키는 청아한 푸른 눈과 잘 정돈된 반짝이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마리우스라고 합니다.”
시종이 설명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내가 대답할 줄 몰랐던지, 눈앞 여인의 눈은 시종과 나를 번갈아 봤다.
“처음 듣는 이름인데···.”
“주인님의 손님이십니다.”
“그래요?”
눈앞의 여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했다.
나도 엉거주춤 따라서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그녀가 웃고 있었다.
“몸이 좋으신데 군인이신가요?”
그녀는 위아래로 내 몸을 훑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하하···. 항상 먹으면 움직이다 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은근슬쩍 몸에 힘을 주다가 괜스레 창피해져 얼굴이 붉어졌다.
여자와 마지막으로 대화해본 게 일병 말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던 전 여자 친구 이후에는 없었던지라,
그녀의 웃음과 목소리는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테르만티아라고 해요.”
테르만티아라니.
호노리우스가 두 번째로 황후로 들인 사람이 아니었던가.
권력을 원했던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를 손수 죽여버리고는 황후의 자리에서 쫓아냈고,
이후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할 때 그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죽어버린 비운의 여인이었다.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는 건 조금···.”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길었다.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느라.”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럼 편하게 쉬세요.”
“예.”
테르만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서는 나를 지나쳐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의 뒤를 쫓던 내 눈은 아쉬움을 느끼면서 다시금 고개를 돌렸는데,
바로 앞에서 시종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잇, 깜짝이야!”
“안내해드려도 괜찮을지요?”
“그래, 빨리 쉬고 싶네···.”
오늘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지 몸은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졌다.
그래도 오늘은 지긋지긋한 천막이 아니라. 지붕이 있고, 침대가 있는 편안한 방에서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밤이었다.
******
황제의 장례식이 끝나고.
메디올라눔에 모였던, 수많은 제국의 귀족들과 여러 유력자가 흩어질 무렵.
스틸리코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려는 루피누스를 불러 세웠다.
“루피누스.”
“아, 장군···.”
“내 말 잊지 않았길 바라네. 아르카디우스를 부탁하지.”
“...명심하겠습니다.”
돌아선 루피누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동쪽으로 돌아가면 곧 자신의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참아낼 수 있었다.
멀어지는 루피누스를 뒤에서 지켜보던 스틸리코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스틸리코에 심마쿠스가 물었다.
“장군, 루피누스를 너무 압박하시는 게 아닌지요.”
“심마쿠스, 내 친구여 저런 이들의 마음속에는 뱀이 살고 있다네.”
“뱀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단지 안의 그 뱀은 피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언제나 단지 속에 숨어있지만,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면···.”
스틸리코는 뒤를 돌아서 황궁을 바라봤다.
“단지 위로 머리를 내밀게 될 것이오.”
“루피누스에게 그럴만한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 능력은 모르겠지만, 그런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명분이 없지 않겠습니까.”
스틸리코는 수염은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하길.
“명분이야 만들면 될 일이 아니던가. 아르카디우스가 황제에 오른다면 자신의 딸을 황후로 밀어 넣고도 남을 양반이네.”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말이야.”
심마쿠스는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 걱정이 심하신 겁니다. 루피누스는 그럴만한 위인이 못됩니다. 오히려 그런 짓을 벌이려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군요.”
“하긴, 그것도 그렇군.”
스틸리코와 심마쿠스는 크게 웃으면서 다시금 황궁 안으로 들어갔다.
******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곳에 적힌 내용 그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는 뜻일세.”
무키우스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천막 안의 모두를 얼어붙게 했지만,
불행히도 전령의 입은 얼어붙게 하지 못했다.
“가우덴티우스 장군께서 백부장 마리우스와 그 휘하의 장병들을 스틸리코 장군의 직속으로 배속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새끼가 무슨 권한으로!!”
무키우스의 분노가 폭발했다.
“말이나 타고 다니는 야만인 새끼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래라 저래라야!”
“저는 그저 말을 전하는 전령일 뿐입니다.”
“장군, 진정하시지요.”
결국, 티투스가 나서서 무키우스를 말렸다.
그가 나서자 다른 장교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정은 무슨 진정, 자네는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판노니아에도 일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일은 무슨 일! 내가 그들을 버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들에게 그곳에서 죽으라고 했는가!”
무키우스의 말에 루프스가 움찔거리면서 시선을 피했다.
무키우스는 못난 아들을 다시 한번 노려보고서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부대보충도 잘 안 되는 형국에 대대하나가 통째로 사라졌어!”
“그것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니 게르만 놈이 어린 황제를 쥐고 흔들려고 하고, 스키타이놈은 군대가 온통 제 것인 줄 아는구나. 허!”
“장군···!”
“그래, 다 가져가라! 어차피 필요하지도 않았어!”
“장군···.”
티투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무키우스를 바라봤지만, 무키우스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입을 닫고서는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전령은 덤덤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스틸리코 장군께서는 11군단이 중앙의 허락도 없이 주둔지를 이탈한 사실에 대해 질책하셨습니다.”
“뭐? 내가 군대를 움직이는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하나?”
“굳이 따지자면 문제가 생길 수는 있는 일 아니었습니까.”
티투스의 말에 무키우스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는지 볼살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곁에서 조용히 서 있던 퀸투스를 부르면서 그를 질책했다.
“퀸투스!”
“예? 예! 장군.”
“분명 콘스탄티노플에서 움직여도 괜찮다는 확답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그것이 받긴 했는데···.”
퀸투스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무키우스는 거칠어진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했는데. 왜 이런 게 내 앞으로 날아오지?”
“그, 그것이···.”
“후우···. 퀸투스.”
“예 장군···.”
“쓸데없이 질질 끌지 말고 시원하게 대답하게.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건가?”
“사실 그 허가증을 내준 것이 루피누스였습니다.”
“루피누스? 그 새끼가 왜.”
무키우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도대체 왜 루피누스가 나온단 말인가.
퀸투스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로 갔을 때는 이미 폐하께서 이탈리아로 떠난 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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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는 이탈리아를 순방 중이시네.”
“아이코···. 제가 잘못 찾아왔군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 아니라면 대신 폐하께 전해드리겠네.”
“그것이···. 더는 판노니아에 가해지는 압박을 견딜 수가 없어서 군단을 달마티아로 옮긴다는 허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뭐? 전선에 문제가 생긴 건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을 들어보면 곧 문제가 생길 듯싶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루피누스는 턱을 집고서는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퀸투스에 말했다.
“그래,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아유···. 아닙니다. 저야 뭐 여기까지 오는 것 말고는 한 일도 없는데요.”
“그런데 이탈리아까지 다시 돌아가려면은 조금 멀지 않겠나?”
“음···.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어휴···. 어떻게 갈지도 고민입니다.”
“그럼 이 방법은 어떤가?”
“무슨 방법 말입니까?”
루피누스는 웃으면서 퀸투스에 손짓했고.
퀸투스가 한걸음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귀를 붙잡아 귓가에 속삭였다.
“솔직히 자네도 이탈리아까지는 가기 귀찮지 않은가, 솔리두스로 금화 30닢 정도면 내 기꺼이 폐하의 인장을 한번 빌려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어허, 알만한 친구가 왜 이러나 듣자 하니 자네의 집안이 뼈대 깊은 호민관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그건 그렇습니다만···.”
“원로원에서 일하고자 입대했건만, 부대원들은 신입 군단병보다 못하게 보고 있고. 한참 아랫것들조차 무시하고···. 그런데 이렇게 잡일까지?”
루피누스의 목소리는 굉장히 달콤하게 들렸다.
“금화 30닢 정도야 이탈리아까지 가는 수고로움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푼돈이 아닌가.”
“......”
한참을 고민하던 퀸투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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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네놈이 정녕 미친 것이더냐!”
“군단장님 죄송합니다.”
“허어···.”
“이틀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런 보고도 없이 무단으로 주둔지를 이탈한 셈이 아닙니까?”
“허허허···.”
무키우스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만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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