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87)

새로운 시대.

애초의 계획과는 다르게 부대는 노리쿰에 주둔했다.

부대 내의 부상병들로 인해 행군이 길어지는 것도 있었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던 탓에 제시간에 메디올라눔에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가우덴티우스가 결정한 것이다.

나에게도 말 한 마리가 배정됐는데.

승마는 처음이었던지라 말에 오르는 그것조차 힘이 들었다.

등자가 없는 것도 컸다.

말 위에서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서 오롯이 허벅지만으로 무게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이렇게 흔들리는 말 위를 제 몸처럼 움직이면서 싸운다는 생각을 하니 내심 기병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괜찮나?”

“아, 아직은 버틸 만합니다.”

“처음 타는 것이니 너무 무리하지는 말게나.”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왜 점점 더 속도를···. 어어···!”

“하하하, 빨리 따라오게나!”

“아악-!”

덕분에 메디올라눔으로 오는 시간은 크게 단축되었다.

족히 20일은 넘게 걸리는 길을 밤낮없이 달려서 그 절반인 열흘 만에 도착했으면 말을 다 한 것 아닌가.

“으아···. 죽겠습니다.”

“괜찮네, 고통은 잠시일 뿐이야.”

“진짜, 다음에는 꼭 등자 만들고 만다.···.”

“음? 자네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가시지요.”

처음으로 본 로마의 대도시는 정말 컸다.

하지만 크다는 생각 외에는 별다른 생각이 드는 곳은 아니었다.

아무리 휘황찬란하다고는 해도 현대의 마천루들에 익숙해진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패션의 도시라고 불리던 밀라노를 한 번쯤 가고 싶었는데···. 어찌 됐건 와보긴 했으니 된 건가?

“이봐, 촌놈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면 어떻게 하나!”

“예?”

“대도시에 처음 와본 것은 알겠지만 너무 촌놈 같지 않은가 하하하!”

가우덴티우스는 연신 촌놈이라고 놀려대면서 등을 팡팡 쳐댔다.

“자, 둘러보는 건 나중에 해도 좋으니까, 우선은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네.”

“예? 장례식을 보러 오신 게 아닙니까?”

“폐하의 마지막 가시는 길도 중요하지만···.”

가우덴티우스가 웃음기 없이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향후 제국을 이끌어갈 사람들과 얼굴 정도는 틔어 놓아야 운신이 편해진다네.”

“그, 그렇습니까.”

“자네는 운이 좋은 줄 알게나, 내가 목숨도 살려주고 다른 이들은 얻기 힘들다는 출셋길도 뚫어주지 않는가.”

“그, 그렇지요.”

“그러고 보니 내가 이번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자네 때문에···.”

한번 열리기 시작한 가우덴티우스의 입은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세상에 내 아들놈이 태어나자마자 나를 부른 게 아닌가?”

로 시작한 말은.

“크으···. 고 조그마한 놈이 빨빨거리면서 기어 와서 내 발을 붙잡는데···.”

를 거쳐.

“그때, 딱! 아들놈이 그 녀석을 노려보니까 꼬리를 말고 도망간 거 아니겠나, 으하하.”

에서 황궁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가우덴티우스는 아직도 할 말이 남았는지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궁 안에서는 함부로 눈을 돌리지 말게.”

“어째서입니까?”

“여기는 까탈스러운 양반들이 많거든.”

의문이 들었으나, 묻지는 않았다.

가우덴티우스가 말을 많이 하는 편이기는 해도,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기도 했던가.’

아무튼, 가우덴티우스의 뒤를 따라서 궁 안에 마련된 신당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는데, 그들이 입은 옷들이나 데리고 다니는 많은 사람으로 봐서는 하나같이 고위층으로 보였다.

“마리우스, 이제부터는 내 뒤통수만 보고 따라오게.”

“예, 장군.”

살짝 긴장됐다.

이제야 자신이 신분제가 살아있는 고대로 왔다는 게 체감됐다.

가우덴티우스의 뒤통수만을 보면서 뒤를 따라갔는데, 그는 커다란 관 앞에서 멈춰 섰다.

“황제 폐하의 앞이니 몸을 바로 하고, 내가 하는 대로 그대로만 따라 하면 된다네.”

“예, 알겠습니다.”

황제라는 이름에 한번, 거대한 석관에 또 한번 놀랐다.

주변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황제도 한번쯤은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한번쯤은 황제를 해볼수도 있는게 아닐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딱히 가능하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가우덴티우스는 굳게 닫힌 석관에 입을 맞추고서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우십니까?”

“그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말이야···.”

“황제 폐하께서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는 누구였기에 이렇게 많은 이들이 슬퍼해 주는 것일까.

“미약한 촛불을 타오르는 장작더미로 바꾼, 위대한 황제이자 로마인들의 모범이었지.”

“거기에다가 다른 이들을 달래는 데는 도가 트신 양반이었지.”

“오셨습니까.”

가우덴티우스와의 대화 중에 낯선 이가 끼어들었다.

두 눈에 드넓은 하늘을 담은 듯이 푸른 눈과 사자의 갈기처럼 찰랑거리는 금빛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조금 늦었군.”

“늘 그렇듯이 로마를 지키느라 늦은 것이지요.”

“그렇겠지, 여기 안 그런 사람이 있나···. 그런데 이 청년은 누구인가?”

“아, 이 청년 말입니까?”

가우덴티우스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대로 옆으로 끌고 와서는 나를 소개했다.

“이번에 돌아다니면서 제법 괜찮은 친구를 찾아서 소개해드리려고 데려왔지요.”

“호오···. 그래?”

눈앞의 남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가우덴티우스는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마리우스, 이분은 군의 사령관이신 스틸리코 님일세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

“아···.”

스틸리코라니.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불린 명장을 눈앞에서 볼 줄이야···.

감탄이 절로 나왔지만, 애써 참았다.

“음···. 이 친구 쓸만한 거 맞나? 조금 모자라 보이는데.”

“아하하하, 난데없이 제국군 사령관을 만난다면 그럴법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런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직각 인사를 해버렸다.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는 스틸리코가 재밌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 이곳 출신이 아닌가 보군.”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저···. 머나먼 동방에서···.”

“요새는 변방 출신이라도 로마인이 될 수있지, 페르시아 쪽에서 온건가?”

“그, 그쪽보다도 조금 더 동쪽입니다.”

“더 동쪽이라고?”

스틸리코는 조금 전보다 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가우덴티우스도 싱글벙글하면서 지켜보니 부담감만 높아져 갔다.

나한테 왜 그러는데···.

“그보다 더 동쪽이라면은 박트리아인가?”

“그···. 박트리아보다도 동쪽입니다.”

“박트리아보다도 동쪽이라···. 그런 곳은 들어본 기억이 없군.”

“출신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 친구의 실력은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스틸리코가 조금 고민하는 기색을 비치자, 가우덴티우스가 나를 두둔해줬다.

이 양반이 왜 이러는 거지.

“그렇군, 자네의 말이니 믿을 수 있겠지.”

“암요, 제가 언제 틀린 말이라도 한 적이 있습니까?”

스틸리코는 말없이 나를 위아래로 둘러보더니, 이내 말했다.

“자네는 지금 소속이 어딘가?”

“11군단 1대대에서 임시 백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임시 백부장···? 백부장이면 백부장이지 임시는 또 뭔가.”

“그것이···.”

스틸리코에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군단에 입대해서 기수로서 활약했던 일과 임시 백부장으로 승진하여서 벌어졌던 일, 그리고 판노니아에 남겨져서 벌어졌던 일까지.

스틸리코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어떠한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듣고 있었고.

내 이야기가 끝나자, 스틸리코는 조금 굳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11군단이면 무키우스가 군단장이었던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쯧···. 자식 교육이 엉망이군.”

가볍게 혀를 찬 스틸리코는 들고 있던 포도주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서는 말했다.

“그래, 그 편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 그건 화살이 모자라서 만들어 본 것인데···.”

한참을 편전에 대해서 스틸리코에 설명했다.

중간중간 궁금한 점을 물어오는 스틸리코의 날카로운 질문에 대답을 못 하는 때도 있었지만.

내 설명을 끝까지 들은 스틸리코의 얼굴은 전에 없을 정도로 아주 흡족해 보였다.

“훌륭해.”

“가, 감사합니다.”

“흐음···. 경력이 짧은 게 흠이지만···. 위기상황에서 새로운 무기를 생각해내는 창의성이나 응용성, 불리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그 투지만큼은 높이사지.”

“정 그러시면 장군의 곁에서 키우셔도 될 일이 아닙니까?”

가우덴티우스의 말에 스틸리코가 그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 방법도 괜찮군.”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자네, 내 밑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나?”

“예?”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싹수가 제법 보이는 것 같아 하는 말일세 하겠나?”

“하, 하겠습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드디어 내 인생에도 볕 들 날이 생기는 건가.

참으로 고된 나날이었다.

숨을 쉬듯이 삽질을 반복하는 나날.

그리고 더럽게 무능한 상관까지···.

그동안의 고난이 생각나서 절로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마침 친위대장 자리가 비었는데···.”

스틸리코는 조금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공이 있긴 한데···. 친위 대장직을 맡기는 것도 조금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야.”

스틸리코가 고민하는 모습에 절로 조바심이 들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두 번 다 시는 이런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할 수 있습니다. 고트족 놈들에 비하면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흐음···. 그렇단 말이지···.”

스틸리코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쉬운 자리는 아닐걸세, 서방 황제의 성격은···. 좋다고는 말할 수가 없어, 그뿐만 아니라 환관들이 그분의 총애를 꽉 잡고 있지. 그런데도 하겠는가?”

스틸리코의 말에 조금 고민되었다.

역사적으로 로마를 말아먹었다고 평가받는 호노리우스의 밑에서 일한다니, 그렇지만 해볼 만했다.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너무 길지는 않을 거야 5년···. 아니 3년만 참게, 그 이후로는 자네의 출신이나 다른 것으로 트집자는이는 없을걸세.”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머무를 곳은 있나?”

“...없습니다.”

스틸리코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당분간은 내 집에서 머물도록 하게···. 머문 곳은 급여가 나오면 알아서 구해보고.”

“예, 감사합니다.”

“이야, 앞으로는 친위대장이라고 불러줘야 하나?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기는! 신나게 야만인들을 썰어 재끼던 마리우스는 어디 갔나!”

가우덴티우스는 신나게 웃어 재꼈고,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이 아저씨 왜 이래.

“거 참, 뭐 이렇게 시끄럽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였군요.”

“오오, 이게 누군가 위대한 행정가 아니신가!”

“쯧쯧, 가우덴티우스 자네는 자식이 생겨도 그리 경망스러워서는···.”

“하하하, 나야 뭐 일평생을 전장에서 살다가 죽어갈 이가 아니겠는가.”

“황제 폐하께서 편히 주무실 수 있게 조금은 조용히 하는 게 어떤가.”

“하하하, 혹시 모르지 우리의 목소리가 시끄럽다고 폐하께서 벌떡 일어나실지, 누가 알겠나.”

심마쿠스는 이마를 '탁' 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숨을 쉬던 심마쿠스는 가우덴티우스 곁에 있는 꾀죄죄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이 친구는 누구인가, 자네의 시종인가?”

“시종이라니, 이래 보여도 전쟁 영웅일세.”

“전쟁 영웅? 요즈음에 전쟁이 있었던가?”

“쯧쯧, 책상물림은 모르겠지만 로마의 국경지대는 끝나지 않는 전쟁터와 같다네.”

가우덴티우스의 말에 심마쿠스가 발끈하면서 말했다.

“누구보고 책상물림이라는 건가! 자네가 먹고 입는데 들어가는 돈을 누가 다 관리한다고 생각하는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돈 이야기가 나오자 꼬리를 마는 가우덴티우스였다.

“쯧···. 그래서 자네가 누구라고?”

심마쿠스의 물음에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마리우스, 친위대장입니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고 말하니, 심마쿠스의 눈빛도 조금은 달라졌...

“정확히는 예정이지.”

“아, 그렇군요.”

이 아저씨가 오늘따라 왜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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