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87)

새로운 시대.

황제가 세상을 떠났을 때.

황가의 일원들은 황제를 위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메디올라눔의 별궁 한곳에 모인 탁고대신 세 명은 저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부른 것은 스틸리코로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급이니까.”

“황제 폐하께서 맡기신 제국의 후일에 대해 논의코자 불렀소.”

“폐하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는데, 벌써부터 후일을 논의하다니요.”

순백의 수도복을 입은 암브로시우스가 분노와 당혹감이 섞인 얼굴로 스틸리코에 소리쳤다.

스틸리코는 침울한 얼굴로 답했는데.

“나도 마음 같아서는 목놓아 울고 싶으나, 지금도 헛된 생각을 품는 이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원로원의 의원 몇몇이 사사로이 만남을 주선하면서 인근의 군단장들이나, 총독들과 만남을 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마쿠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런 역적도당의 무리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

스틸리코는 이런 심마쿠스를 달래면서 말했다.

“아직은 군사적으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진정하시지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폐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다들 저들의 욕망을···. 으그극···.”

“저도 심마쿠스의 말에 동의합니다. 비록 신의 뜻을 따르기는 하지만, 폐하께서 그들에게 베푼 것이 있는데···. 쯧쯧.”

“일단은 폐하의 말씀대로 심마쿠스 경이 행정부와 원로원을 잘 다독여 주시지요.”

“이를 말씀이요! 원로원 녀석들이 허튼 짓거리라도 세무조사 한 번이면 아무것도 못 할 것이오.”

스틸리코는 이번엔 암브로시우스를 돌아봤다.

“주교께서는 시민들을 다독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헛된 무리가 시민들을 선동하여 일을 꾸미려 할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들 좋습니다. 저는 이 길로 친위대장을 만나볼 생각입니다.”

스틸리코의 말에 심마쿠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루피누스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긴, 그 친구라면은 조심해야지요.”

스틸리코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앉아 있는 둘에게 인사를 올리고서는 밖으로 향했다.

황궁을 빠져나온 스틸리코는 호위병들의 경호를 받으면서 루피누스의 집으로 향했다.

“아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한창 병사들에게 마지막 분기 급료를 나눠주고서 이제 휴식을 취하려던 루피누스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스틸리코의 모습에 매우 놀랐다.

“후···.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우선은 안으로 드시지요.”

루피누스의 집안으로 들어온 스틸리코는 대뜸 말을 꺼냈다.

“황제께서 승하하셨소.”

“예?!”

“친위대장인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찾아온 것이요.”

“아, 아니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지난주까지는 괜찮으셨던 거로 기억하는데···.”

스틸리코는 씁쓸한 미소로 답했다.

“나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요, 두 분께서는 후계자로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를 지목하셨으니 그렇게 알고 계시오.”

“잠깐, 이 사실을 더 알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나와 암브로시우스, 심마쿠스가 폐하의 임종을 지켰으니, 그다음으로는 자네가 처음이네.”

“그렇군요···.”

스틸리코는 순간 루피누스의 얼굴에서 탐욕의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엄히 꾸짖었다.

“혹시라도 허튼 짓거리를 하려거든, 제국에는 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나.”

“무, 물론입니다. 장군.”

“친위대를 가지고 허튼짓을 부리려 든다면은, 내 손으로 자네는 물론이고 일가친척을 전부 토막 내서 들개들에게 던져줄 것이야.”

스틸리코의 험악한 말에 루피누스는 꼬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세상을 떠난 전 황제가 아끼던 질녀이자 양녀의 남편이자, 곧 황위에 오르는 이들의 외당숙이니 황실의 큰 어른이라는 명분.

거기에 로마군 사령관(magister militum)이라는 막강한 군권이 버티고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황제의 외손인 자기 아들을 황제로 올려도 아무도 반발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반면에 루피누스는 친위대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스틸리코에 비하면 그의 영향력은 태양 앞에 반딧불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장군.”

“부디, 그 마음 변치 말게나.”

“물론입니다. 장군!”

“그래···. 편히 쉬게.”

스틸리코는 루피누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루피누스는 웃는 얼굴로 그를 떠나보냈으나, 스틸리코가 점점 멀어질수록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 역시 옅어져만 갔다.

******

판노니아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조언에 따라, 가우덴티우스는 기병대를 판노니아 전역에 풀어놓았고.

기병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판노니아 전역을 휩쓸면서 야만인 마을들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로, 로마군이다!”

“모두 숨어!”

처음 로마군이 인근을 휩쓸고 있을 때만 해도. 인근의 고트족이나 반달족들은 로마의 분노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랬기에 대부분은 로마군이 몰려오면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거나 그저 도망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로마인들의 끓어오르는 분노였을 뿐이었다.

“남자, 여자 가리지 말고 전부 죽여라.”

“아이들도 말입니까?”

“아니, 아이들은 데려간다. 잘 키워서 팔면 돈이 좀 되거든.”

마을은 불타올랐고, 저항하건 저항하지 않았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강은 피로 물들었고, 대지는 피를 머금어 붉게 변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죽은 이들은 핏물을 흘리는 상황이 며칠간이나 이어졌다.

이제 더는 태울 마을이 없어진 로마군은 숨은 야만인들을 찾아서 판노니아를 배회했고, 야만인들은 더욱 깊숙이 숨어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야만인들의 공포를 끝내준 것은 서쪽에서 날아온 로마 황제의 사망 소식이었다.

황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판노니아에 퍼지자, 살아남은 이들은 더욱 분노에 찬 로마인들을 생각하며 두려워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로마군은 자신들이 얻은 것들을 한데 모아서 주둔지로 돌아가 버렸다.

살아남은 이들은 검게 타버린 마을로 돌아와서 죽은 이들의 시체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황제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가우덴티우스는 마리우스를 불러 향후의 일을 논의코자 했다.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셨다는군.”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네 덕분에 제법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지만, 이것도 오늘로써 끝이겠군.”

“돌아가는 겁니까?”

“그래, 폐하께서 승하하셨다는데 한번 올라가 봐야지 않겠나···.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자네. 내 밑으로 올 생각은 없는가?”

“예?”

“요 며칠간 자네를 살펴보고, 부하들의 평판을 들어보니 제법 괜찮아 보여서 말이야. 자네 앞에 붙어있는 임시딱지도 떼주겠네.”

“그, 그렇지만 저는 말을 탈 줄 모릅니다.”

“그런가, 쓰읍···. 그렇다면 어쩔 수가 없군.”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부족한지라···.”

나는 아쉬움에 말끝을 흐렸다.

내심 하루라도 빨리 승진해서 조금이라도 더 편한 곳에서 근무하고 싶었지만, 매번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흐음···. 그렇다니 어쩔 수가 없군.”

“죄송합니다.”

“허허, 자네가 죄송할 게 무엇인가. 그만큼의 공적을 세우고서도 너무 겸손한 것도 좋지 않아.”

가우덴티우스가 손짓하니, 장막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부관이 사람 머리만 한 조그마한 궤짝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놨다.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궤짝과 가우덴티우스를 돌아봤고, 말이다.

“하하하, 내가 개인적으로 자네에게 주는 선물일세.”

“예?”

“열어보게.”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과연 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살짝 열어젖힌 궤짝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와 은화가 가득했다.

“아, 아니 이건···.”

“마음에 드는가?”

“저에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가우덴티우스는 가벼운 미소로 화답했다.

“자네는 자네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어.”

“잘 못 들었습니다?”

“자네는 이곳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로 고립됐음에도 명령을 수행했지 안 그렇나?”

그게 그렇게 되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우덴티우스의 말이 맞았다.

상황이 꼬여버렸다지만, 객관적으로 따져보자면 나와 내 부대는 버려진 게 맞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내 안에 잠들어있는 분노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려 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어떻게 했겠나.”

그제야 가우덴티우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은 대놓고 자살이나 다름없는 명령에 따르는 척하면서 적들에게 투항하거나 도망쳐 버렸겠지.

그런데 나는?

아직도 한국군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상명하복 원칙에 따라서 아무리 안 좋은 명령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려고 노력했고.

결과적으로는 명령을 수행했으니, 그가 탐낼만한 인재였다.

“아···!”

“하하, 내가 이래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한걸세. 다른 쪽으로는 머리가 전혀 안 돌아가지 않는가 하하하!”

“하···. 하하하···.”

가우덴티우스의 호탕한 웃음에 나는 멋쩍은 웃음으로 답했다.

한참이나 웃던 가우덴티우스는 웃음을 멈추고는 말했다.

“마리우스.”

“예, 장군.”

“다시 한번 묻겠네,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나?”

“......”

가우덴티우는 전에없이 진중하게 물었다.

“자네와 만난 것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그 기간동안에 자네가 얼마나 쓸모있는지는 알수있었다네, 같이 메디올라눔으로 가지.”

“생각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그래, 나도 당장 수락할것이라고는 생각안했다네.”

******

판노니아 이곳저곳으로 패잔병을 쫓으러 떠났던 기병대가 하나둘씩 합류했고, 부대도 출발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정말로 떠날 시간이었다.

판노니아의 요새는 며칠 전에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이제는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성벽을 만져보니, 그동안 병사들과 질리도록 해왔던 무수한 작업이 떠올랐다.

투덕거리면서도 말은 잘 들었던 친구들.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했던 친구들.

투덜거리면서도 술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친절했던 친구들.

다급할 때는 누구보다 의지가 되었던 친구들.

그들을 떠올리면서 온갖 잡생각이 들었다.

왠지 드는 씁쓸한 기분에, 품속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성벽에 작게나마 무언가를 새겼다.

“마리우스 님, 준비 다 끝났습니다!”

“그래, 곧 가지.”

팔에 붕대를 한 폴로가 다가와 마리우스에게 물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별건아니야.”

마리우스는 폴로의 질문에도 대충 대답하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새겨넣는데 집중할 뿐이었다.

한참이나 집중하던 마리우스는 일을 끝마쳤는지, 뿌듯한 얼굴로 단검을 집어넣었다.

“이제 가지.”

“아니, 이게뭡니까?”

폴로는 처음보는 글자에 마리우스에게 물었지만, 마리우스는 답하지 않았다.

폴로가 궁금했는지 몇 번이고 물었지만, 마리우스는 콧노래만을 부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멀어지는 마리우스와 폴로의 뒤로.

성벽의 한 부분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다.

[마리우스 왔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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