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87)

새로운 시대.(수정)

병사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찾았다는 듯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빨리 안 싸우고 뭐 해!”

“난 저 대머리가 이긴다는 것에 은화 두 닢 걸지.”

“두 닢까지고 되겠어? 세 닢 정도면 모를까.”

“지난번에 방패 하나 해 먹어서 돈 없어!”

“좀 조용히 좀 보자 새끼들아!”

가축무리를 병사들이 빙 둘러쌌다.

그동안의 전투와 훈련 속에서 스트레스가 쌓은 병사들은 저마다 내기를 하거나, 고함을 질러댔다.

“뭐해 안 싸우고!”

“너한테 내 급여 전부 다 꼬라박았으니까, 지면 뒤진다.!”

“미친놈아, 돈을 왜 다 거기 써!”

우리 안의 족장들은 가운데 떨어진 검 하나와 주변에서 소리치는 병사들 사이에서 서로 눈치만을 볼 뿐이었다.

누가 먼저 움직이냐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먼저 움직이는 녀석도 위험했기에 서로 눈치만을 봤다.

“아무래도 움직일 생각들이 없는 모양이로군, 데려와.”

무키우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병사들을 움직였다.

병사들은 야만인 포로들 가운데에서 족장들의 가족을 하나씩 끌고 와서는 무키우스의 앞에 무릎 꿇렸다.

“아, 아버지!”

“여보!”

포로들은 울부짖으면서 족장들을 불렀으나, 병사들은 무덤덤하게 곤봉을 내리치면서 그들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족장들은 벌게진 눈으로 외쳤다.

“어찌,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란 말이냐!”

“우리도 로마인이란 말입니다!”

“너희가 왜 로마인인가, 세상에 군대를 공격하는 시민도 있던가?”

“우리는 그 일과는 관련이···.”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한다. 너희가 싸우지 않겠다면, 너희 대신 너희들의 가족들이 들어갈 거야.”

무키우스의 말에 족장들은 다시금 서로의 눈치를 살피면서 천천히 검을 향해 다가갔다.

병사들도 그제야 흥미가 되살아났는지, 환호성을 보냈다.

가축우리 안에서 한 족장이 검을 집어 들자마자, 곧 여러 명이 뒤엉켰다.

진흙탕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뒹굴면서 허공에 피를 흩뿌렸고, 피라 뿜어져 나올 때마다 병사들이 흥분하면서 괴성을 질러댔다.

무키우스의 발 앞에 무릎 꿇려진 포로들은 그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면서, 가족들이 죽거나 다치는 모습에 절망했다.

이 일을 벌인 무키우스는 포도주 한잔을 곁들이면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검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눈이 뒤집힌 야만인들의 싸움에 병사들의 흥분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싸움이 끝났다.

살아남은 이는 오른팔을 잃고서 바닥에 처박혀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래도 한 놈이 살아남긴 했군.”

“치료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놈을 살릴지 죽일지는 내가 아니라 저들에게 달려있어.”

무키우스는 손가락으로 병사들을 가르치며 소리쳤다.

“제군들 구경거리는 즐거웠는지 모르겠군.”

“최고였습니다!”

“역시 군단장님이십니다!”

“전에 없던 즐거운 경기였습니다!”

환호하는 병사들에게 무키우스는 주먹을 앞으로 뻗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행동의 의미를 눈치챈 병사들은 곧바로 나무 울타리를 손으로 두들기며 소리쳤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병사들의 함성에 무키우스는 웃었다.

살아남은 족장과 그의 가족들도 이제야 살았다는 사실에 웃었다.

그리고, 무키우스의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했다.

******

전투가 끝난 뒤, 판노니아의 요새는 완전히 무너졌다.

외곽 목책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요새 내부에는 사람 머리만 한 돌들이 굴러다녔으며, 걸레짝이 된 로마군과 고트족의 시체가 거리에 가득했다.

중앙 성채는 한 축이 무너져서 더는 제 역할을 할 수도 없었고 말이다.

안채의 임시병동에는 부상자가 넘쳐났다.

그런 그곳을 찾아온 이가 있었는데.

“자네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안채에 있는 황제의 조각상에 기대서 쉬고 있던 마리우스를 찾아온 건, 기병대의 대장 가우덴티우스였다.

고개를 들어 올린 마리우스의 얼굴에는 전투의 피로와 고통이 묻어있었다.

“예, 덕분에 살았습니다.”

“보아하니, 제법 치열했나 보군.”

“예, 뭐···.”

마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마에 맺혀있던 피가 마리우스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곳의 일은 어떻게 아시고···.”

“그거 말인가? 자네의 부하가 말해주더군.”

“예?”

“아작스라고 했던가? 그 친구가 알려줬다네.”

“아작스···. 그렇군요.”

마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럼,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단은 군단과 합류해야겠지요···.”

“어떻게 말인가, 걸레짝이 된 자네 부대로 야만인들 사이를 뚫고서 돌아갈 수 있겠나?”

“...그건.”

가우덴티우스의 말이 맞았다.

마리우스가 데리고 있는 부대는 이미 반수 이상이 전사했고, 나머지 부대원들도 대부분 부상병이었다.

이런 부대를 이끌고서 야만인들이 가득한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를 지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고민하는 마리우스에게 가우덴티우스가 말했다.

“나와 같이 노리쿰으로 가지.”

“노리쿰···. 말씀입니까?”

“그래, 본대에는 내가 전령을 보내줄 테니 나와 같이 가지.”

“흐음···.”

마리우스는 고민했다.

노리쿰으로 간다면은, 군단의 명령 없이 움직이는 것이라 다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부상병들을 데리고 달마티아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래의 처벌과 당장의 안식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마리우스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하하, 얼마든지 상관없다네.”

“언제쯤 출발하시겠습니까?”

“글쎄, 아마 이틀 정도는 이곳에서 쉴 것 같네.”

“이틀···. 말이군요.”

마리우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장군, 혹시 인근의 야만인들을 털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적들은 이미 패퇴하지 않았는가.”

“바로 그것입니다.”

마리우스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판노니아의 부족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검과 방패들을 잃었습니다. 그 말은 지금 저들은 맨몸으로 내던져진 상태나 다름없다는 말이지요.”

“오호라, 자네 말은 다른 이가 채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자 이 말인가?”

“바로 그겁니다. 제 부대만이 남았다면 엄두도 못 냈겠지만···. 기병대가 있으니···.”

“하하하, 그것참 명안이로군. 어차피 이곳 판노니아를 누군가는 차지할 테니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겠다는 것 아닌가.”

“쥐어짠다기보다는 병사들의 정당한 몫을 되찾는 것이자···.”

마리우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쓰러져있는 이름 모를 병사들과 민병대의 시체가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제 병사들에 대한 복수이기도 합니다.

******

로마의 북쪽.

알프스의 밑자락에 펼쳐진 드넓은 평야위에 건설된 도시 메디올라눔.

메디올라눔에 마련된 별궁의 깊은 곳에는 바닥에 쓰러진 로마를 다시 세우고, 일평생을 로마를 위해 살아온 한 명의 남자의 숨이 꺼지려 하고 있었다.

“거기···. 누구 있는가···.”

“폐하!”

“으음···. 누구인가···.”

“소인 스틸리코입니다. 기운을 차리소서 폐하!”

“스틸리코···. 자네인가···?”

“예 폐하, 소인입니다.”

“그래, 다른 이는 누가 있는가···.”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던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앞이 보이지 않았는지, 바로 곁에 있던 이들을 보지 못했다.

그 모습에 감성적이었던 심마쿠스가 눈물을 참지 못했다.

“폐, 폐하 소인 심마쿠스입니다.”

“폐하, 소인 암브로시우스입니다.”

수종으로 몸 이곳저곳에 물이 차오른 테오도시우스의 모습은 참으로 흉측했지만, 방안의 그 누구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황제를 위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 다 모였군.”

테오도시우스는 조금 전보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신께서 나를 데려가시려 하는 모양이야···.”

“폐하, 그게 무슨 소 리습니까. 곧 털고 일어나실 겁니다!”

“맞습니다. 저 사악한 동방의 이교도들조차 폐하를 어쩌지 못했는데, 한낮 병 따위가 어찌 폐하에게 위해를 끼치겠습니까.”

“...맞습니다. 폐하.”

“아닐세, 내 몸은···. 내가 더 잘 아는 법이야···.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일이 있었지···.”

테오도시우스는 회한에 찬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초점이 맺히지 않는 그의 두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알 수 없었지만, 테오도시우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참으로 힘겨운 나날들이었어···. 내 아들들이 겪지 않았으면 할 정도로 말이야···.”

“폐하···.”

“모든 걸 이뤄냈지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버려야 했던 삶이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의식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늘어지던 몸도 점점 가벼워졌고.

항상 몸을 짓누르던 중후한 압박감도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점점 또렷해지는 정신과 활력이 돌아오는 육신에 드디어 끝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이제는 모두 털어버리고 멀리 있는 길을 떠나야 하건만, 돌아보니 너무나도 후회되는구나.”

“폐하, 무엇이 말씀입니까.”

“나는 내 손으로 로마를 부수고, 그 위에 새로운 로마를 세웠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를 흘려야 했어.”

“폐하, 그건 대의를 위한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의라···. 그대들이 보기에 나는 어떠했는가.”

“...훌륭한 로마인이자 황제셨습니다.”

“신앙의 수호자기도 하셨지요.”

“모든 이들의 모범이셨습니다.”

“그래, 말이라도 고맙군.”

테오도시우스는 급격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제 정말로 끝이 다가왔다.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고, 하지 못한 말들도 많았다.

“이제 너희의 황제가 마지막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지시하시옵소서 폐하.”

테오도시우스의 두 눈이 반짝이면서 순간,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 사후에 로마를 다시 둘로 나눠서 통치하게, 하나로 다스리기에는 로마는 너무 커져 버렸어···. 쿨럭쿨럭.”

테오도시우스의 마른기침에 그의 말이 잠시 끊겼지만, 이내 숨을 고르면서 말을 이어갔다.

“동쪽과 서쪽은 각각 내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맡기겠다···. 스틸리코, 자네가 내 아들들을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해주겠나?”

테오도시우스는 한창때처럼 굳건한 눈으로 스틸리코를 바라봤다.

참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스틸리코의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예, 폐하. 목숨을 바쳐서 로마와 두 분을 지키겠습니다.”

“그래, 자네라면 믿을 수 있지···.”

테오도시우스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암브로시우스를 불렀다.

“암브로시우스.”

“예, 폐하.”

“자네에게는 내 사후에 내 장례식과 내부의 단속을 부탁하겠네. 쓸데없는 짓을 하려는 이들을 막아주게나.”

“예, 폐하 소인의 숨이 붙어있는 한 누구도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심마쿠스.”

“예···. 폐하.”

“그동안 고마웠네, 내 밑에서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폐하···. 같이 일할 수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었습니다.”

“자네는 원로원을 잘 다독여 주게나···. 그 치들이 새로운 황제들을 지지하게 도와주게.”

“폐하의 명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말을 마치고서,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구름 위에 누워있는 듯한 편안함이 테오도시우스의 온몸을 감싸들었고.

테오도시우스는 눈을 감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내 삶은 황제의 삶이기 전에 로마인의 삶이었어.”

“폐하?”

“폐하!”

제국의 혼란기에 보위에 올라 무너져버린 제국을 재건했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방에 모인 세 명의 탁고대신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떠나보냈고.

그들의 통곡 소리에 밖에서 대기 중이던 가족들과 대신들이 들어와서 그들의 황제를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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