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87)

각성.

가우덴티우스와 휘하의 기병대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가볍게 움직이는 정도로 대열의 움직임을 맞추면서 일정 속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맞춰졌다는 판단이 들자 점점 속도를 높였고.

대부분이 가벼운 근접기병이지만, 들판을 내달리면서 내는 말발굽소리는 병사들의 심장을 옥죄어 왔고, 대지를 박찰때마다 느껴지는 땅의 울림은 병사들의 다리를 흐물거리는 두부처럼 만들었다.

말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비디메르도 이럴진대, 병사들은 금방이라도 도망치려는 모습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친위대의 차가운 눈빛이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금방이라도 대열은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매서운 눈빛이라도 자신을 향해서 달려드는 기병대의 공포감을 완전히 씻어줄수는 없었다.

“진형을 재정비해라, 적이 오고 있다.”

“예, 대족장!”

비디메르는 착잡한 얼굴로 진영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군을 뒤로 물리고 싶었지만, 이미 도망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창병은 앞으로 궁수는 뒤로 가! 창으로 말이나 허벅지를 노려라!”

“적이 달려온다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지 마라! 눈을 부릅뜨고 적에게 창을 박아넣으란 말이야!”

부관이 바쁘게 움직이면서 병사들을 통제하니, 몸이 굳어있던 병사들이 느릿느릿하게나마 움직였다.

어느샌가 훌쩍 다가온 로마군 기병대의 모습에 부관이 궁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사격준비!”

궁수들이 허겁지겁 활을 당겼다.

어떤 병사는 너무 긴장한 탓인지, 활을 얼마 당기지도 못하고서 그대로 놓쳐버린 탓에 아군의 뒤통수에 화살을 쏴버리기도 했다.

로마군은 그런 사정을 알지도 못한 채, 잿빛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는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사격!”

부관의 손이 떨어지면서 궁수들의 화살이 로마 기병대를 향해 날아갔지만, 결과는 영 시원치 않았다.

화살은 빠르게 움직이는 로마 기병대가 방향을 트는 것만으로 빗나가버렸고, 기병대를 향해 날아온 화살들도 운이 나쁘게 갑옷의 틈새에 화살이 박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방패나 갑옷에 맞아 튕겨 나가거나, 말가죽에 생채기를 내는 정도로 그쳤다.

“끼요오오옷!”

말들의 거친 투레질 소리와 잔뜩 흥분한 기병들의 함성에 고트족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부관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병사들 사이로 전염되듯이 퍼져나가는 공포는 개인이 막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이야아아아아앗!”

“하아아앗!”

술렁거리는 방진을 로마군 기병대가 정면에서 틀어박았다.

“아아악! 아악!”

“억···.”

최선두에 있던 병사들은 기병대와 부딪히는 그 순간부터 비명을 지른다거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거나, 머리가 깨지면서 삶을 마감했다.

다른 병사들도 사정은 비슷했고, 고트족의 방진은 채 3초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했다.

기병대는 막아서는 이도 없이 방진을 깨부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전열을 지탱하던 병사들이 붕괴해버리자, 뒤에 있던 궁수들은 차마 저항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쳤지만, 인간의 두 다리는 말의 네 다리를 넘어설 수 없었다.

“쫓지 마라, 포로는 필요 없다. 중앙을 쪼개고 들어가서 아군을 구하는 거다! 뒤처리는 브레누스의 부대에 맡겨!”

가우덴티우스의 부대는 고트족의 진형을 반으로 갈라버리면서 전진했다.

그것만으로 이미 적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제 살길을 찾아서, 두 다리에 의지한 채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 이게 무슨···.”

“대족장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여긴 위험합니다!”

“아아···. 내 병사들이···. 내 꿈이···!”

“대족장!”

비디메르는 제 목숨을 위해 흩어지는 병사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베린하르트가 아직 오지 않았다. 병사들을 다시 불러모아! 베린하르트를 구해야 한다.!”

“대족장, 이미 틀렸습니다. 훗날을 기약하시지요.”

“우리에게 다음은 없단 말이다···. 오늘도 이루지 못 한 일을 어찌 내일 이룰 수 있겠느냔 말이다···!”

“대족장, 살아있다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비디메르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친위대는 비디메르를 중심으로 원진을 만들어서 도망가는 병사들 사이에 숨어들었다.

그들은 쫓아오는 기병대를 피해, 간신히 전장을 이탈할 수 있었다.

******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치고 나가야 한다···.

이건 다시없을 기회였다.

적군은 지휘관을 잃었고,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눈앞에 밥상을 차려줬는데 밥상을 걷어찰 수는 없지 않은가.

“으아아앗!”

한계까지 쥐어짠 몸을 억지로 움직이면서, 적군의 사이로 파고들어 눈에 보이는 대로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둘렀다.

고트족 병사들 사이를 휩쓸면서 몸을 부딪쳤다.

검이 부러지면 적의 무기를 주워서 썼고, 그나마도 마땅치 않으면, 맨손으로 정신줄을 놓고 미친놈처럼 달려들었다.

고트족 병사들은 그런 나를 어떻게든 죽이려고 발악했지만, 어느샌가 따라온 병사들이 내 뒤를 든든하게 받쳐줬다.

“죽어, 이 개새끼야!”

“끄아악! 아악!”

“마리우스 님!”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로 오늘 처음 본 어린 고트족 병사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고 있었던 내 어깨를 폴로가 붙잡았다.

거칠게 폴로를 밀쳐버리고는 다시금 투구를 내리치려 할 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미 적들은 저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마리우스 님, 이제 살았습니다.”

바닥에 드러누운 폴로가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살아남은 병사들이 모였다.

한눈에 봐도 스무 명이 넘지 않았다.

물론 안채에 병사들이 더 살아남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에라 시발새끼들.”

마리우스는 고트족의 시체를 베고 누워,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다.

******

가우덴티우스는 뒷일을 브레누스에 맡기고는 그대로 부대를 이끌고서 언덕을 달려 올라갔고, 얼마 가지 않아서 좁은 요새 입구를 힘겹게 빠져나오는 고트족 병사들을 발견했다.

“장군, 적이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바로 공격하시겠습니까?”

“당연한 걸 물어보나, 저놈들이 진형을 갖추기 전에 전부 때려 부숴버려!”

“크하핫, 예 장군!”

돌격 이후에 쉬지도 못하고 제법 전장을 뛰어다닌 탓인지 말들이나 사람이나 조금 지친 듯했지만, 가우덴티우스는 개의치 않고 또다시 돌격을 준비했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흐트러졌던 대열을 가다듬고서는 다시 한번 앞장서서 적을 향해 달려가니, 막 요새를 빠져나오던 부대는 당황하면서 다시 들어가려 했고, 뒤에 있던 병사들과 엉키면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상황에 빠져들었고.

그다음은 기병들의 시간이었다.

가우덴티우스의 기병대는 그대로 적을 들이받았다.

병사가 빽빽하게 몰려 있었던 탓에, 조금 전처럼 적을 꿰뚫을 수는 없었지만, 그것조차도 보병들에게는 큰 공포였다.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무기를 버려라!”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부대원들 중에서 고트어를 할 줄 아는 몇몇이 소리치니, 용케 그 말을 알아들은 병사들이 하나둘씩 무기를 바닥에 던졌고, 다른 이들도 눈치껏 무기를 던지면서 지독했던 판노니아의 공방전이 막을 내렸다.

******

판노니아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판노니아의 경계선에서는 무키우스가 이끄는 11군단은 판노니아의 경계에 도착했다.

“이곳인가?”

“예,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쯧, 이런 곳을 제대로 정찰도 하지 않고 넘으려 하니 문제가 생길 수밖에.”

무키우스가 혀를 차니, 곁에 있던 루프스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무키우스는 티투스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군과 시민들이 잡혀있을 만한 곳은 어딘지 알 수 있겠나?”

“저 산속에 있는 부족들을 털다 보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두 번 다 시는 이 짓거리를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전부 제 불찰입니다···.”

“쯧···. 됐네, 어차피 지나간 일이야.”

무키우스는 뒤에 서 있는 대대장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작전은 간단하다. 부대를 끌고 가서 눈에 띄는 모든 야만인을 잡아 오든지 죽이든지, 전부 정리해.”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다.”

“로마에 귀의한 부족들도 말입니까?”

“군대를 보고 도망가면 야만인, 반항해도 야만인, 환영해도 야만인이다.”

“......잘 못 들었습니다?”

“구분하지 말라는 소리다. 전부 죽여.”

무키우스의 냉혹한 말에 다들 얼어붙었다.

장교 중 하나가 입을 열려 했지만.

티투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 밤.

수많은 부대가 군영을 벗어나 산을 올랐다.

산 이곳저곳에서 주홍빛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반달, 고트족의 마을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아악! 아아악!”

“이건 뭐 하는···.”

로마군은 철저하게 남녀를 분리해서 죽였다.

정확히 그들이 가진 방패보다 조금이라도 큰 남성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드문드문 로마군에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무질서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차가운 강철 검뿐이었다.

로마군은 각자 맡은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붙잡혀있는 시민들과 병사들을 구했다.

대부분 몰골이나 상태가 심각하게 좋지 않았던지라 야만족들을 향한 로마군의 손속이 더 잔인해져만 갔다.

각 부족의 부족장들은 저항하다가 죽은 이들을 제외하고서는 전부 꽁꽁 묶인 채로 무키우스의 앞에 끌려갔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그 중 한 명이 억울하다는 듯이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지만, 무키우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왜 로마를 건드렸나.”

“로마를 건드리다니요, 그게 무슨···.”

“내 휘하의 병사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죽었는데 발뺌인가?”

“그건 우리 부족과는 관련 없는 일입니다!”

“관련이 없었다고?”

무키우스가 손가락을 튕기니.

조금 전까지 붙잡혀있었던 로마 시민 중 한 명이 걸어들어왔다.

이제 스물이 조금 넘어 보이는 그녀는 얼굴이나 몸에 상처가 가득했고, 두 눈은 분노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처자가 자네 부족에서 나왔어.”

“그, 그건···.”

“이 근처의 모든 부족이 직접 우리에게 손해를 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인을 노예로 부린 이들을 용서할 수가 있나.”

“죄송합니다! 목숨만은···. 아니 저는 괜찮으니 부족만은···!”

“나는 자네들에게 사과를 들으러 온 게 아니야.”

무키우스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주변에 서 있던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서 묶여있는 족장들에게 다가갔다.

족장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묶여있는 탓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가 없었고 이내 병사들이 다가와 검을 휘둘렀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 자신들의 최후를 짐작하던 족장들은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의아함을 느끼면서 다시금 눈을 떴다.

“자네들은 해야 할 일이 있어.”

무키우스가 손을 드니 병사들이 족장들을 붙잡고서는 비어있는 가축우리로 끌고 가더니, 전부 가축우리로 던져넣었다.

“자네들의 풍습 중에서는 싸우다 죽은 이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무키우스는 자신의 검을 뽑아서 가축우리 한가운데로 던지고서는 말했다.

“대충 눈치챘겠지, 이제부터 서로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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