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87)

각성.

베린하르트를 뒤따르던 병사들은 로마군이 설치해놓은 장애물을 힘겹게 넘으면서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헥헥···. 뭐가 이렇게 많아···!”

“게르문드, 앞에!”

“어, 어어···!”

고트족 병사들이 힘겹게 장애물과 씨름하고 있을 때, 로마군이 곳곳에 설치해둔 함정들이 하나둘씩 작동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베린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저곳만 넘으면 된다. 모두 힘을 내라!”

“크악-!”

“악-!”

고트족 병사들은 안 그래도 언덕길을 달려오면서 체력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는데, 장애물을 넘어가고 조심스럽게 함정을 피하는 과정에서 거의 멈춰있다시피 했다.

로마군은 거의 멈추어 서다시피 한 고트족 병사들의 머리 위로 신나게 화살을 쏘고 투석기로 돌을 날려댔다.

투석기나 스콜피오가 한번 쏘아질 때마다. 수많은 고트족 병사들이 쓰러졌고, 날아오는 화살이나 돌을 피한다고 움직이다가 함정에 빠지기도 하는 등, 고트족 병사들은 아비규환의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려웠던 것은 소리 없이 날아오는 화살이었다.

분명, 적이 쏘는 것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샌가 날아와 몸에 박힌 작은 화살은 너무나도 손쉽게 갑옷을 뚫고서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장군, 성벽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아군의 희생이 너무나도 큽니다!”

“적들의 준비가 철저했어, 후···. 일단은 부대를 뒤로 물린 후에 본대와 합류한다.”

“예 장군, 퇴각하라-! 퇴각-!”

베린하르트는 날아오는 화살들을 방패로 막으면서 뒤로 물러났고, 병사들 또한 퇴각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황급히 줄행랑을 쳤다.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함정들에 병사들이 휩쓸러 나가면서, 짧지만 강렬했던 전투가 끝났다.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비디메르는 패잔병 꼴을 한 채로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병사들을 보고는 이마를 찌푸리면서 말했다.

“선봉이 투입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런 꼴인가.”

“오셨습니까.”

베린하르트는 똥 씹었다는 얼굴로 비디메르를 맞이했고, 비디메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베린하르트에 말했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그렇게나 자신만만하게 군을 이끌고 가더니만···. 쯧쯧.”

“로마군이 울타리를 버리고, 그 중간지대에 온갖 장애물과 함정을 깔아두고서는 중앙 성채로 들어간 지라 피해가 컸습니다···. 죄송합니다. 대족장.”

베린하르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본 비디메르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겠는가,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

베린하르트는 비디메르의 위로에 순간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애써 참아내면서 답했다.

“...감사합니다.”

“로마 녀석들···. 제법 준비를 열심히 한 모양이야.”

“실로 그러합니다. 특히나 장애물 사이사이에 악랄할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진 함정들도 함정이지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화살이 더 위협적입니다.”

베린하르트는 그 말과 함께 자그마한 화살 하나를 비디메르에 건네줬다.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의 길이 정도 되는 화살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비디메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이것이 왜 위협적이라는 건가?”

“그것이···. 분명 적의 궁수가 활을 쏜 것을 보지 못했는데도 화살이 날아와 이미 박혀있었습니다.”

“소리도 나지 않았단 말인가?”

“예,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어느샌가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화살이 꽂혀있었습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비디메르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작은 화살을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게 가능하다고는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참 신기한 일이로군, 그냥 쏘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말이지···.”

“갑옷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리는 그 위력이나, 은밀함을 보면 꼭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확실히 이런 거로 지휘관들을 노린다면 위험하겠어.”

비디메르는 작은 화살을 꺾어서 부러트려 버린 뒤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면서 말했다.

“투석기와 사다리를 준비해라, 베린하르트 다시 선봉에 설 수 있겠나?”

“예, 대족장. 이번에는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투석기가 준비되는 대로 바로 공격한다.”

******

고트족의 첫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로마군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요하던 병사들도 허무하리만큼 쉽게 무너진 고트족의 모습에 자신감을 되찾은 듯했다.

“마리우스 님, 적들이 물러났습니다.”

“그래, 이 틈에 부상자들을 옮기고 장비들을 점검해, 적이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니까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폴로가 병사들 사이로 사라지자, 마리우스는 성벽에 몸을 숨기면서 성벽에 난 작은 구멍들로 적을 바라봤다.

숨이 턱 하니 막힐 정도로 우글우글한 고트족 병사들이 요새 외곽에 모여서 무언가를 하는 듯했지만,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후퇴할 거라면, 진즉에 내려갔어야 정상인데···. 또 뭔가를 꾸미는 건가.’

한참이나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고트족의 움직임이 신경이 쓰였던 마리우스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여러 번 들려오더니, 이윽고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뭐, 뭔가 날아온다.!”

“에이 시발-!”

누군가의 외침에 황급히 병사들은 자세를 낮추면서, 성벽에 바짝 붙었다.

이윽고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면서 그대로 성벽에 부딪히면서 병사들이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갔다.

“크악-”

“억-”

마리우스가 상황을 파악하려고 성벽 위로 고개를 드니,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매끈한 돌 탄환이 보였다.

마리우스가 재빨리 고개를 숙인 덕분에 죽는 것은 면했지만, 돌 탄환이 마리우스의 머리 위를 지나가면서 그의 투구가 크게 망가져 버렸다.

마리우스는 걸레짝이 된 투구를 벗어 던지고는 소리쳤다.

“아군 투석기와 스콜피오는 뭘 하는 건가! 빨리 대응 사격 시작해!”

마리우스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허겁지겁 움직였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고트족이 날린 돌덩어리가 요새 곳곳에 떨어지고 있었다.

“어이쿠!”

“아악- 내 다리!”

“커헉···.”

곳곳에서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면서 뜨거운 피를 흩날리는 병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성벽 역시도, 날아오는 돌덩어리들을 견디지 못하여, 임시로 쌓아 올린 벽들이 하나둘씩 무너져내리거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리우스는 손에 들고 있던 방패를 내팽개치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개새끼들! 역시 숨겨놓은 한 수가 있었구먼.”

“마리우스 님, 피하십시오! 이곳은 위험합니다.”

“피하긴 어디로 피해! 그리고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최전선에서 적을 막겠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 말을 해놓고 어떻게 나 혼자 뒤로 물러설 수가 있겠나!”

마리우스는 그동안 쌓아왔던것이 점점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그대로 뱉어냈다.

“이 야만인 새끼들아, 쏠 테면 몇 번이고 쏴봐라! 시발 그런다고 내가 겁이 나 집어먹을 것 같냐!”

“마리우스 님 위험합니다!”

“이거 놔, 이 시발 모지리 새끼들아!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타조 새끼처럼 땅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어, 어차피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죽는 건 정해져 있다. 그러면 적어도 뒤질 자리는 스스로 정해야 사나이 아니겠나!”

“아이고, 마리우스 님 투구라도 쓰십시오!”

“시발 지금 투구가 중요해?! 아군 투석기랑 스콜피오 새끼들은 뭐 하는 거야!”

마리우스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요새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자, 적들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겁을 집어먹었던 병사들이, 천천히 자세를 일으키면서 마리우스의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투석기와 스콜피오도 준비가 완료되었는지, 둔중한 소리와 함께, 고트족을 향해 열심히 돌과 화살을 날렸다.

투석기에서 쏘아진 사람 머리만 한 돌덩어리는 첫발부터 고트족의 방진에 적중했고, 돌덩어리에 맞은 고트족 병사들이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는 모습을 본 마리우스는 폭소했다.

“으하하, 그래 야만인 새끼들이면 땅이나 퍼먹을 것이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쳐 기어들어 오고 지랄이야, 지랄이!”

“마리우스 님 위험합니다. 제발 몸을 사리십시오.”

“백부장님 앞에!”

고트족이 쏜 돌 탄환 하나가 마리우스를 향해 맹렬히 날아오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그의 몸을 잡아당겼지만, 마리우스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몇 번 당기던 폴로와 몇몇 병사는 방패를 들고 날아오는 돌을 막아섰다.

“시발, 신이 나를 여기 보냈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면 고작 그런 새끼였던 것뿐이고 말이야.”

“마리우스 님 머리나 숙이세요!”

마리우스는 담담하게 자신을 향해서 날아오는 돌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이, 점점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트럭에 치이기 전까지의 기억에 이어서 로마에 떨어져서, 이름 모를 거지들과 싸워가면서 하루하루 살아남고.

결국에는 군대에 들어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생들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듯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올 때쯤.

바람이 불어왔다.

세차게 불어온 바람은 마리우스의 머리에서 불과 몇 cm 정도를 빗겨나가, 뒤에 떨어졌다.

내심 눈앞으로 다가오는 돌덩어리에 주마등까지 겪은 마리우스는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시발 고작 한다는 게 이거야?”

“마, 마리우스 님?”

폴로와 병사들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에 혹시 머리가 잘못된 건 아닌지 고민했지만, 한참을 웃던 마리우스는 바닥에 내팽개쳤던 방패를 주워들고, 검을 뽑아 들고선 난간 위로 뛰어 올라갔다.

열심히 쌓아 올린 임시성벽들은 고트족의 투석기에 두들겨 맞아 걸레짝이 되었지만, 마리우스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그 위로 뛰어올라 힘껏 소리쳤다.

“이 졸렬한 새끼들아! 숫자가 열 배는 거뜬히 넘어가는 새끼들이 졸렬하게 지랄이냐! 한판 붙자 이새끼 들어!”

******

“저건 뭔가.”

“어, 음···. 뭐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건 나도 또렷하게 들리는군. 라틴어인가?”

“예, 그런 것 같습니다만···. 왠지 모르게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자네도 그런가? 이상하군, 나도 그렇다네.”

비디메르는 흥미롭다는 듯이 성벽 위에 올라선 마리우스를 바라봤고, 무언가 기억났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볍게 손바닥을 쳤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지난번에 봤던 그 로마군 대장인데.”

“그렇습니까? 거리가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상당히 어려 보입니다.”

“실제로도 대단히 어린 친구였지.”

“대족장께서도 젊지 않습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하하하.”

비디메르는 평원이 떠나가도록 쩌렁쩌렁하게 악을 써대는 마리우스를 바라보면서 이마를 찌푸렸다.

“아무래도 한판 붙자는 것 같군···.”

“대족장,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하겠다는데···. 막을 건가?”

비디메르가 싸늘한 눈으로 베린하르트를 내려봤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앞장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린하르트의 말에 비디메르가 멍한 얼굴이 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코, 그래 자네가 선봉이었지. 하하하, 좋네! 저 건방진 녀석의 목을 가져오게나.”

“이번에는 기필코 저 벽을 넘겠습니다.”

“그래, 믿고 있겠네.”

베린하르트가 검을 뽑아 들자, 그의 뒤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움직일 준비를 했다.

“돌격!”

[와아아아-]

베린하르트는 거칠게 말을 몰고서 중앙 성채로 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병사들이 따랐다.

중앙 성채로 가는 길에 장애물과 함정들은 이미 선봉대가 밟고 지나간 것이 대부분이었던지라 생각보다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장애물들 탓에 제 속도가 나오지 못해서 성벽 위의 궁수들에게 일방적인 피해를 강요받기는 했지만 말이다.

“화살을 쏴라! 저놈들이 머리도 못 들게 해! 특히 저기 혼자서 날뛰는 저 녀석부터!”

베린하르트의 명령에 고트족 궁수들이 날린 화살은 성벽을 넘었다.

******

고트족 측에서 날아온 화살들은 매섭게 로마군의 방패와 갑옷에 틀어박혔고, 곳곳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상황 속에서, 마리우스는 방패 하나와 검에 의지한 채로 성벽을 누볐다.

“날아오는 건 그냥 방패로 쳐내! 그것도 안 되겠으면 갑옷 입은 부위로 맞아!”

“마리우스 님, 적이 몰려옵니다!”

“우리 궁수들은 뭐 하는 거야, 빨리 화살 날려!”

마리우스는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의 목덜미를 붙잡아서 똑바로 일으키고, 지친 병사에게 손수 물까지 떠서 주는 등 바쁘게 성벽 위를 오갔다.

어떤 때는 직접 활을 들고서 화살을 날렸고, 어떤 때는 투석기에 쓸 돌을 날랐으며, 성벽에 걸린 적 사다리를 밀어내기도 하면서 분주히 움직였다.

“적이 올라옵니다!”

마리우스의 발악에도, 적은 무수한 피를 흘리면서 성벽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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