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바람.
비디메르는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오늘이 약속한 일주일이다. 준비는 다 된 거겠지 베린하트르?”
“예, 대족장.”
“그래 좋다. 병사들은 어떤가.”
“그렇게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은···. 이제 선봉을 정해야 할 텐데···. 누가 맡겠나.”
비디메르의 말에 천막은 침묵이 감돌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같이 타오르던 열의에 찬 전사들은 어디갔는지, 다들 입을 다물고서는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없는 건가?”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베린하르트, 자네가?”
비디메르가 의아해하면서 되물었지만, 베린하르트는 단호했다.
“예, 제가 문을 열겠습니다.”
“흠···. 자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격에 반대하던 것 아니었나?”
“대족장, 시간이 지날수록 아군의 식량은 떨어져만 가고 있고, 내부도 알게 모르게 분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시간을 끌었다가 로마군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아군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베린하르트의 말에 귀족들은 잔뜩 긴장하며 비디메르를 돌아봤지다. 비디메르는 웃으면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베린하르트. 그래서 선봉을 자처한 거로군.”
“예, 그렇습니다. 대족장께서 후퇴는 없으시다고 하시니 남은 것은 저 성을 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바로 그거야 베린하르트!”
비디메르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호쾌한 웃음소리는 천막을 가득 채웠고, 베린하르트는 그저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답했을 뿐이었다.
“그래, 이번 공세에 모든 것을 건다고 생각해, 저기만 점령한다면 판노니아 전체가 우리 수중에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부족들에게 조금 더 좋은 땅이 돌아가게 되겠지.”
“그, 그 말씀은···?”
“하하하,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보장하겠네. 저 성벽 위에 제일 먼저 올라선 이와 제일 먼저 성문을 여는 이는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려주겠다!”
비디메르의 말은 바람 빠진 타이어에 바람을 불어 넣은 것처럼 활기를 잃은 고트족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줬다.
귀족들과 장로들 그리고 제일 말단의 병사들까지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면서 탐욕에 젖어 들었고, 비디메르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 다들 전투를 준비해라. 오늘에야말로 로마인들에게 지옥을 보여주는 거다!”
******
마리우스와 폴로는 중앙 성채에 지어진 망루에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판에 새까맣게 몰려있는 고트족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절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광경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조용하던 고트족 군영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던 마리우스는 대뜸 폴로에 물었다.
“본대로 보냈던 전령은 소식이 있나?”
“무소식입니다. 아무래도 탈영한 것이 아닌지···.”
“아작스가 탈영을? 그럴 리가 있나.”
“솔직히, 지금도 야간에 탈영을 시도하다가 붙잡히는 병사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
마리우스는 말없이 성채를 내려다봤다.
궁수들 사이사이로 편전 사수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뒤를 창과 방패를 든 군단병과 민병대가 받쳐주고 있었다.
외곽 목책보다도 높고 튼튼한 성벽이 안정감을 줬고, 굳게 걸어 잠긴 성문으로 올라오는 길은 온갖 장애물과 함정이 깔려있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있으니, 어렸을 적에 재밌게 봤던 판타지 영화들에서 나오던 공성전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는 마리우스였다.
“재밌군, 재밌어.”
“뭐가 말씀입니까.”
“예전에는 내가 이런 곳에서 싸우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야, 세상일이란 거 참 재밌어.”
“맞습니다. 저도 원래는 양치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양치기라···. 그런데 어쩌다가 군에 입대했나.”
“뭐, 다들 비슷한 사정 아니겠습니까, 집에 있다가는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입대했지요.”
“크크크···. 그래, 다들 그렇지.”
“마리우스 님은 어쩌다가 입대하신 겁니까?”
“크크크···. 한 사흘 굶고 나니까, 배가 고프더군. 그런데 도시 광장에서 로마군을 모집한다고 해서 당장에 입대했지.”
“사람 사는 건 어디서나 비슷하군요.”
“그런 셈이지.”
마리우스와 폴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고트족 부대가 준비를 마쳤는지, 뿔 나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고트족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리우스와 폴로는 말없이 옆구리에 들고 있던 투구를 들여 머리에 뒤집어쓰면서 망루를 내려가 소리쳤다.
“적이 오고 있다. 전원 위치로!”
“위치로!”
성채 내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자, 병사들이 각자 맡은 구역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슬갑옷이 찰랑거리는 소리와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내 전개를 마친 병사들의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긴장한 병사들을 다독였다.
“긴장하지 마라, 몇 번이고 막아왔던 고트족 놈들이야. 이번이라고 다를 게 있겠나.”
“적들이 많다고 해봤자, 저들은 양 떼다. 사자가 양 떼를 두려워했던가? 모두 눈에 힘주고 적에게 칼을 박아넣으라고.”
몇 번이나 적을 물리치긴 했으나, 숫자가 가져오는 폭력과 두려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며칠 간이나 갇혀있으니,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 또한 상당했다.
군단병들이야, 아무리 기강이 해이해졌다고는 하나 그래도 군인인지라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민병대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 시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전쟁이 가져오는 스트레스는 견뎌내기 참으로 힘든 것이었고 말이다.
“시발, 또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군.”
“이번에도 살 수 있을까?”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그냥 항복하면 안 되나?”
“쓸데없는 소리말어, 저 야만족 놈들이 우릴 살려둘 것 같아?”
“우리 신은 저놈들의 신보다 약하신 걸까?”
“쓸데없는 소리 말아!”
일주일간의 평화가 병사들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든 탓인지, 지난번과 비교하면 병사들의 동요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마리우스는 초조해하는 병사들을 보며, 폴로에 말했다.
“병사들의 동요가 심해.”
“일주일간 너무 늘어진 모양입니다.”
“이래서는 될 일도 안 되겠어.”
“몇 명 잡아다가 채찍질이라도 하면 조용해지지 않겠습니까?”
“전투가 코앞인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나.”
“그럼 어떠시겠습니까, 저렇게 내버려 두면 적들의 모습만 보고 도망가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릴 만한 방법이 없을까.’
마리우스는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재주라도 좋았다면은 뛰어난 명연설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겠지만, 그에게는 그런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동요하는 병사들을 보고 있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서 사기를 북돋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마리우스 님, 급한 대로 제가 돌아다니면서 병사들을 다독이겠습니다.”
“그래, 그 방법이 최선이겠···.”
그 순간 무언가가 마리우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렸을 적에 수도 없이 읽었던 수많은 위인전에 나오는 인물들이 그의 귀에 속삭이는 것처럼, 안갯속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았던 생각들이 점점 또렷해졌다.
무언가에 홀리듯이 성벽의 난간에 올라선 마리우스의 모습에 병사들의 시선이 마리우스에게로 집중됐다.
“마리우스 님, 위험합니다. 내려오십시오.”
“저 양반 왜 저러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혼잣말 한 거야.”
마리우스의 돌발행동에 병사들의 관심이 쏠렸다.
성벽의 난간 위에서 위태롭게 선 마리우스는 담담하게 운을 띄웠다.
“제군들은 로마를 지키는 세 가지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마리우스의 말에 술렁이던 병사들이 조용해지면서,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에 집중했다.
“철혈의 황제,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원로원, 그리고 강철과 같은 군단병이다.우리는 지난 두 번의 전투에서 스스로 가치를 입증하지 않았는가, 어제도 그러했듯이 요새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며 판노니아는 로마의 속주로 남을 것이다!이제는 기억하는 이도 없을 정도로 오랜 옛 시 절에는 한 위대한 장군이 있었다.그 장군은 존망의 갈림길에 처한 왕국을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구해냈고, 끝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마리우스는 숨을 고르면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기회가 찾아왔을 때 올림포스의 산처럼 너희의 분노를 터뜨려라, 파도가 밀려온다면 내가 너희들의 앞에 서서 방파제가 되어주겠다. 폴로!”
“예, 마리우스 님.”
“내가 도망가려 한다면 죽여라.”
“예···?”
“내가 조금이라도 물러서거나 도망친다면 베어라!”
폴로가 당황하면서 뭐라 말하려 했지만.
마리우스는 검을 뽑아 들고는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판노니아는 로마의 땅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말을 내뱉었다.
“ROME INVICTA!”
[ROME INVICTA!]
병사들은 연신 로마를 외쳤다.
점점 더 로마를 부르는 그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갔고, 그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그들의 마음속의 두려움과 불안감은 점점 작아져만 갔다.
“마리우스 님, 조금 전에 그 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가, 오래전에 한 음유시인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들은 것을 말했을 뿐이라네.”
“그렇습니까? 하긴, 저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니···.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위대한 장군이었겠군요.”
“그래, 위대한 장군이지.”
폴로의 말에 마리우스는 이제는 미래가 되어버린 과거의 위대했던 장군을 떠올렸다.
******
한편, 고트족의 선봉대는 이제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이들을 이끌던 베린하르트는 지난날들과는 다르게도 적의 저항이 없자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적들의 저항이 없어. 함성이 들려오는 것을 보면 적은 아직 요새에 남아있는 것이 확실한데···.’
베린하르트는 잠깐 군을 멈춰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함정인가? 하지만 함정이라기에는 적들이 너무나도 시끄럽게 떠들고 있거늘···.’
잠시 고민하던 베린하르트는 병사들을 채근하면서 속도를 높였다.
“적이 성벽 너머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때가 기회다. 모두 나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 설 것이다!”
베린하르트가 말을 몰고서 성벽으로 달려가니, 다른 병사들도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덕분에 무거운 공성 병기를 밀던 병사들이 뒤처졌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사다리를 든 병사들은 베린하르트의 뒤를 바짝 쫓으면서 단숨에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언덕을 올라오는 내내, 지난 전투에서 파괴되거나, 미처 회수하지 못한 공성 병기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길을 막았지만, 어떻게든 길을 뚫어서 성벽에 사다리를 거는 데는 성공했다.
베린하르트가 병사들을 제치고서는 제일 먼저 성벽을 오르기 시작하자, 다른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랐다.
“고지가 눈앞이다. 모두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베린하르트는 사다리를 오르면서도 로마군의 역습을 걱정했지만, 그가 목책 위에 올라서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 이게 무슨···.”
로마군은 외곽에 매복한 게 아니라, 전부 버리고 내부의 성채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말이다···.
목책부터 중앙 성채로 이어지는 제법 널찍한 공터는 불타오르는 바리케이드와 여기저기 놓인 장애물들이 길을 막고 있었고, 그 뒤에는 중앙 성채가 우두커니 버티고 있었다.
“이거였나···. 오늘은 제법 슬픈 날이 되겠어.”
베린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손에 쥔 검과 방패를 더욱 단단히 붙잡으면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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