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87)

동쪽의 바람.

편전을 만드는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본대가 두고 간 자재들과 포위가 이뤄지기 전에 주변에서 긁어모은 재료들이 창고에 수북하게 쌓여있었고, 만드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리우스의 명령이 떨어진 것은 아침이었는데, 그 결과물이 나온 것은 점심쯤이었다.

간단한 말 몇 마디만이 전해졌을 뿐인데, 나온 결과물은 상상 이상으로 괜찮았다.

손가락 한 뼘쯤 되는 길이의 편전과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통아까지, 생각보다 장인들의 솜씨가 좋은 듯했다.

마리우스는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진 편전의 모습에 기뻐했지만, 폴로는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이걸로 뭘 하실 생각입니까, 애들 장난감도 아니고···.”

“흠···.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네.”

“이런 작은 화살은 활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저 나무로 만든 이상한 물건은 왜 필요한 겁니까.”

“다 쓸데가 있으니 궁금하면 따라오게.”

뒤에서 폴로가 투덜댔지만, 마리우스는 무시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집무실을 벗어나 평소에 병사들이 훈련장으로 쓰이는 공터로 갔다.

그곳에서는 몇몇 병사들이 모여서 쉬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마리우스와 폴로를 알아보고는 군례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고?”

“별일이라면, 오늘은 야만인 새끼들이 좀 조용한 것 같습니다.”

“그것참 별일이군.”

“그건, 뭡니까?”

“아, 이것 말인가?”

마리우스는 편전을 통아에 걸고서는 병사가 들고 있던 활을 빼앗으며 말했다.

“잠시 빌리겠네.”

“어어···. 안 되는데.”

마리우스는 활을 잡고서는 가볍게 당기고는 고점에서 손을 놓았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통아가 손에서 튕겨 나가 버렸다.

“쏘신 겁니까?”

“뭐야, 언제 쏘신 거지?”

다들 웅성거리고 있을 때, 과녁을 살펴보러 간 병사가 소리를 지르면서 다른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다들 여기 와봐!”

“뭔데, 네가 오면 되잖아.”

“아, 좀 와서 이것 좀 봐보라니까!”

한 병사의 호들갑에 다들 몰려와 과녁을 살폈지만,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에, 다들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마리우스 님 그렇게나 자신하시더니 빗나가신 겁니까 하하.”

“너희들 백 부장님 놀리지···. 푸하하하하.”

“하하하!”

“이 멍청이들아, 정 중앙을 잘 보라고!”

신나게 웃어 재끼던 병사들은 꽁지깃의 끝부분만을 남긴 채로 과녁판을 뚫어버린 화살을 보고서는 웃음을 멈추고 마리우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마리우스의 앞에 모여 한마디씩 했는데.

“마리우스 님 이건 뭡니까!”

“요 작은놈이, 뭐 이렇습니까!”

“이건 어떻게 쏘는 겁니까?”

“어때, 쓸만하겠지?”

마리우스가 폴로를 돌아보니, 멍청한 얼굴로 편전과 활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쓸만하겠냐고.”

“아···. 예, 이건 쓸만한 정도가 아니라···. 이 정도면···.”

폴로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고작, 나뭇조각 하나일 뿐이었다.

줄에도 걸지 못할 정도로 짧은 화살에.

그저, 간단한 제작과정을 거친 나뭇조각일 뿐이었을 텐데, 저런 파괴적인 위력을 낸다는 건.

폴로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군인은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하라면 하면 될 뿐.

의문은 사치였고, 생각이 많아질수록 전쟁터에서 살아남기가 힘들었다.

“이거면은 화살 하나로 네 개를 만들 수 있으니, 당분간은 이걸 쓰도록 하고, 그 틈에 화살을 새로 만드는 방향으로 하자고.”

“예, 따르겠습니다.”

“그래, 우선은 모든 물자와 장비들을 중앙 성채로 옮겨. 외곽은 포기한다.”

“전부 말입니까?”

“그래, 전부.”

폴로는 말없이 마리우스에게 경례를 올리고는 발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멀어져갔다.

마리우스는 폴로를 보내고서는 바닥에 떨어진 통아를 주워서, 줄에 끼워 넣고서는 활을 당겼다.

******

군단장 무키우스의 분노는 며칠이 지나도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루프스가 부하들을 버려두고 왔다는 것과 부대를 몽땅 날려버린 것은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 진짜로 합니까?”

“그래, 몇 번이나 말하게 하는 건가.”

채찍을 든 병사는 두려움에 떨면서 티투스를 바라봤지만, 그는 말없이 눈을 감고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병사는 한숨을 내쉬더니 아홉 갈래로 갈라진 가죽 채찍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채로 묶여있는 루프스의 등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끄아아악!”

찰싹이는 소리가 한번 들릴 때마다 루프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도 군영 내에 울려 퍼졌다.

채찍질이 계속될수록 루프스의 등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채찍질은 계속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조차 잔혹한 광경에 다들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려버렸지만, 무키우스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한참을 채찍질하던 병사는 루프스의 비명이 더는 들려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기, 기절했습니다!”

“깨워.”

“...군단장님, 이만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깨우라고 했다. 티투스.”

곁에서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준비해뒀던 물이 든 양동이를 루푸스에게 뿌리니, 기절해있던 루프스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그가 정신을 차리렷다.

“여, 여긴···.”

“...아직 서른대가 남았습니다.”

“아, 안돼···. 살려줘···.”

“...군단장님의 명령입니다.”

“아니야···.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어!”

바닥에서 허우적거리던 루프스는 무키우스를 발견하고는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내며 소리쳤다.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전부 제 실책입니다. 그러니 부디···. 자비를···.”

“뭣들 하는가, 죄인을 형틀에 묶고 형을 집행해라!”

“아, 아버지···.”

병사가 다가와 조심스레 루프스의 손을 붙잡으니, 돌연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하면서 분노에 차 소리쳤다.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제 판단은 옳았습니다. 단지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제게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루프스의 외침에도 무키우스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네가 명예를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부하들을 한 명이라도 더 챙겼겠지. 네가 관용을 알았다면 야만족들이 국경을 넘지 않았을 것이야, 그리고 네게 지혜가 있었다면···.”

무키우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네게 지혜가 있었다면은 부하들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고, 혼자서 돌아올 일도 없었을 거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이게 내가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교육이다.”

“아버지···.”

“루프스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끝내겠습니다.”

루프스는 정신이 나간 듯이 멍한 얼굴이었다.

곁에서 병사가 몸을 형틀에 묶는 그 순간까지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형을 마저 집행해라.”

“군단장님 루프스님은 아직 부상이 채 낫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부상을 치료하고 집행하시지요.”

“티투스,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무키우스가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에 모인 장교들은 무키우스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무키우스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바로 곁에 있던 티투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내려왔다.

“그래, 이 정도면 저 녀석도 잘 알아들었겠지.”

무키우스는 루프스가 한 병사에게 업혀 가는 모습에 혀를 찼다.

그리고는 주변에 둘러앉은 장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 지난번에 그 건들에 대해서는 다들 생각해둔 바가 있는가?”

무키우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다른 장교들이 크게 당황했다.

지난번에 말했던 건이라니.

무키우스의 갑작스러운 말에 장교들은 서로를 돌아보면서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무키우스가 말한 게 무엇인지 눈치챈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왜들 대답이 없는가, 지난번에 그 건 말일세, 설마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순간, 무키우스의 눈에서 번개가 쏘아져서 작렬한 것처럼, 장교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무키우스의 눈빛에 압도당한 장교들은 연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이를 보다 못한 티투스가 말했다.

“군단장님, 지난번의 그 건이라는 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건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자네 잊어버린 건가?”

“제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종종 잊어버리곤 합니다. 죄송합니다.”

“원, 사람 참···.”

무키우스는 능청스러운 티투스의 모습에 헛웃음을 짓고서는 말을 이었다.

“판노니아에 남은 부대와 피난민들을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다들 좋은 의견이 있다면 말해보시게.”

“군단장님, 지금 우리 군단이 다시 판노니아로 들어가는 길은 1대대를 습격했던 야만인들이 지키고 있을 게 아닙니까.”

“그래서, 방법이 있겠나.”

“...어쩔 수 없습니다. 찬탈자 에우게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우리 군단이 입은 손해를 메우지도 못했잖습니까.”

“맞습니다. 지금 군단의 질적 저하가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제가 데리고 있는 게 군인인지 강 건너의 야만족인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장교들의 반대에도 무키우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1대대의 병사들을 전부 버리자는 건가! 군단의 질적 저하가 문제라면은, 1대대의 고참병들을 구한 다음에 각 대대에 배분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군단장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 산을 넘기도 전에 군단의 반 이상이 전사할 것이고, 다시 건너올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묻는 게 아닌가.”

“버리시지요.”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이 티투스의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자, 공터는 침묵에 잠겼다.

“...진심인가?”

“예, 제 전우들이긴 하지만, 그들을 구하려고 군단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티투스의 말에 군영장이 반박했다.

“달마티아로 오는 게 문제라면, 다른 부대를 보내서 도우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주변에 와줄 만한 부대가 있었나?”

“기병대를 부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 안된다면 라벤나에 주둔 중인 경비대라도 동원하심이···.”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시겠나?”

“어···. 음···.”

“요사이에 폐하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지금 군단을 옮긴 것만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는데 다른 군대에까지 손을 뻗자는 건가?”

“그건, 퀸투스를 보내서 확인하신 후에 한 일이 아닙니까, 이번에는 사안이 급한 일이니 우선 조처한 다음에 보고를 올리는 것이···.”

무키우스의 한숨 소리에 군영장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보게 군영장, 엄연히 체계라는 게 있는데 필요에 따라 무시한다면 누가 따르겠는가.”

“그럼 저들을 버리자는 겁니까!”

“어렵군, 어려워···.”

“그렇다면 일단 판노니아로 향하는 길목부터 확보하심이 어떻습니까.”

“맞는 말입니다. 그러기 전에 우선은 판노니아의 아군과 연락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말이 옳다.”

무키우스가 눈을 감으니, 군영장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무키우스는 눈을 떴다.

“우리 군단은 판노니아로 간다.”

무키우스의 말에 티투스가 말했다.

“군단장님, 아군을 구하시려는 것이라면···.”

“끝까지 듣게, 우리 군단은 판노니아로 향하는 길목을 점거 중인 야만인들을 공격해서 병사들과 시민들을 구한 다음, 부대를 둘로 나누겠다.”

“둘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군단장님.”

“말 그대로다. 내가 길목을 지키고 있을 때, 군영장이 부대를 끌고서 판노니아에 남은 부대들과 합류해서 데려오게.”

다른 이들이 무키우스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내려 했지만, 무키우스는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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