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의 바람.
“다행히도 갑옷이 제 역할을 다했나 봅니다. 뼈와 장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끙···.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겁니까?”
“하하하, 그렇게 무식하게 큰 도끼에 얻어맞으셨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병사들은 이미 불사신이니 미트라의 화신이니 좋아하던데 말입니다.”
“쓸데없는 소릴···. 그럼 움직여도 괜찮은 겁니까?”
“으음···. 그래도 며칠, 아니 적어도 이틀 정도는 쉬여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상처가 벌어지는 데다가 심해지면 곪다 못해 썩어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상처야 꿰매면 되는 거 아닌가.”
“꿰매는 것도 단단히 고정하는 것뿐인지라, 움직이시다 보면 실이 풀어지거나 끊어질 수 있습니다.”
군의관이 옆에 두었던 수술 도구를 손에 들고서는 마리우스에게 말했다.
“이제, 상처를 꿰맬 시간이니 잠시 엎드려 주시겠습니까.”
“잠깐, 이대로 꿰맨다고.? 마취 같은 거 없나?”
“마취라···. 지금 환자들이 많은지라 아편은커녕, 술까지 전부 떨어진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남자답게 참으시지요.”
마리우스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군의관들을 둘러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아, 안 아프게 부탁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부대에서 제일 바느질을 잘합니다. 이쁘게 꿰매드리지요.”
“부탁하네···.”
마리우스의 단단한 결심은 군의관의 바늘이 살을 파고들자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으갸갹!”
“이제 시작했습니다.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엄살이 아니라···. 크힉!”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끝납니다.”
마리우스는 눈물을 흘렸다.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바늘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옆구리를 길게 가른 상처가 아파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화가 났을 뿐이었다.
의무대에서 웃옷을 벗은 채로 고통에 몸부림치게 만든, 그 야만족 새끼가 떠올라 화가 났을 뿐이었다.
그랬을 뿐이다···.
******
마리우스가 의무대를 나오니 곳곳이 부서지고 불타오른 흉물스러운 목책들이 보였다.
이번 공격까지는 어떻게든 막아냈지만, 다음에 적이 몰려온다면은 더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보수작업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밤새 이어진 전투 탓에 병사들이 많이 지친 상태였고, 예상보다 병사들이 많이 상했다.
“마리우스 님.”
“폴로.”
“상처를 입으셨다고 들었는데···. 멀쩡하시군요.”
“멀쩡하긴, 죽다 살아났다.”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뭘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나쁜 소식부터 듣지.”
“조사해본 바로는 어젯밤의 전투로 총원 450명 중에서 49명이 전사하고, 117명가량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뭐?! 뭐 그렇게 많이 다친 거야.”
“그래도 갑옷이라도 챙겨줘서 산 겁니다.”
마리우스의 이마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적과 비교하면 소수가 될 수밖에 없는 아군의 특성상, 질적인 측면에서라도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창고를 열어 병력을 무장시킨 것이었는데, 예상외로 피해가 너무나도 컸다.
어젯밤의 전투는 적군의 숫자도 적었고, 적의 공성 병기 대부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유리한 상황이었는데도 이러한 피해가 나올 정도면, 더는 목책에서 막는 건 무리였다.
“전부 태워버려야겠군···.”
“아, 그리고 동쪽 성문이 전소했습니다.”
“뭐?!”
마리우스가 눈을 크게 뜨면서 되물었다.
“병사들이 불을 꺼보려고는 했는데···. 전부 타버렸다는군요, 우선은 근처에 있던 적군의 시체들과 돌덩어리들로 입구를 막아두기는 했습니다만···.”
“끄응···. 오래 못 버티겠지. 그래 이제 나쁜 소식은 끝인가?”
“화살도 모자랍니다.”
“화살이야 다시 만들면 되지 않은가.”
“그···. 만들 사람이 없습니다.”
마리우스는 할 말을 잃었다.
고작 두 번의 전투 만에 요새는 전투 기능을 반쯤 상실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을 많이 죽이면 뭐하겠는가, 적 여덟 명이 죽어 나가도 아군 한 명이 죽는다면 오히려 우리의 손해인 싸움이었다.
“씨발···. 어쩌지.”
“그···. 좋은 소식도 남았습니다.”
“그래, 말해봐.”
“적이 이곳저곳에 버려두고 간 공성 병기들이 언덕을 올라오는 길을 막아주는 걸림돌이 됐습니다.”
“그게 좋은 소식이야?”
“어···. 음···. 예.”
“하아···. 그래, 지금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게 뭐야.”
“화살부터 채워 넣어야 합니다. 우선은 병사들에게 전장에 널린 화살들을 회수하게 하긴 했지만···.”
마리우스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 상황에서 화살을 다시 만드는 것은 무리였다.
재료는 있지만, 그걸 만들 사람이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 널브러진 화살들을 회수하는 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차라리 있는 화살들을 아껴서 쓰는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할 때쯤, 마리우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폴로.”
“예, 부르셨습니까.”
“나뭇가지들을 반으로 쪼개서 속을 파낸 물건을 어느 정도나 만들 수 있겠나?”
“예? 잘 못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이렇게 생긴 거지.”
마리우스는 손가락으로 흙바닥에 U자를 그렸지만, 폴로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건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이걸로 화살을 쪼개 쓰는 거지.”
“예? 멀쩡한 화살을 왜 쪼갭니까.”
“그런 게 있으니까, 두 개 정도···. 아니지 열 개정도는 만들어봐.”
“아니, 굳이 그런걸···.”
“하라면 해!”
폴로는 투덜거렸지만, 마리우스는 확고했다.
편전을 모두가 다룰 수는 없겠지만, 이 근처에서 제법 활 좀 만졌던 이들이라면 금세 적응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은 그들에게는 편전을 들려주고, 다른 이들은 일반 화살을 쓰게 만들어서 조금 더 효율적으로 화살을 배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
고트족의 군영은 지독한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탓도 있겠지만, 아군끼리 전투를 벌인 것도 한몫했다.
비디메르가 상황을 정리하고, 벌어진 틈을 강제로 봉합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강제로 합쳐진다고 합쳐지는 것이던가.
고트족 군영 내에는 알게 모르게 서로 편을 가르는 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고.
비디메르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내일 마지막 공격으로 저 성을 넘는다.”
“......”
“왜 대답들이 없지?”
“대족장, 이 상황에서 다시 공격하는 건 무리입니다.”
“베린하르트, 그럼 우리에게 무슨 선택지가 남나. 저 평원에서 굶어 죽는 것? 아니면, 동쪽에서 밀려오는 사르마티아 놈들에게 죽는 것?”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벌써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죽거나 다쳤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피를 보실 생각입니까.”
“그럼, 이대로 개처럼 꽁지 빠지게 도망이라도 가야 하나? 어디로?”
“곧 겨울입니다. 차라리 북쪽으로 가셔서 다른 부족들의 식량을 빼앗는 편이···.”
비디메르가 주먹으로 책상을 후려치면서 말했다.
“어차피 털어먹을 거면, 저 작은 요새를 털어먹는 게 더 낫지 않은가, 왜 그런 간단한 사실조차 모르느냐 이 말이야!”
“지금 우리 군의 상태로 가능하겠습니까? 이건 다 죽자는 겁니다.”
“누군가는 살아남겠지, 그리고 우리의 시체 위에 깃발을 꽂겠지. 그게 싸움이고 전쟁이야.”
“대족장···!”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베린하르트, 일주일의 시간을 줄 테니 병사들을 재편하고 공격을 준비해.”
“대족장, 이건 미친 짓입니다.”
“미친 짓이지···.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야.”
“대족장, 병사들의 시체를 넘어서 저 요새를 점령하시더라도, 그다음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베린하르트의 격한 반대에도 비디메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늘이 없는데, 어떻게 내일이 있을 수 있겠나.”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남은 것들이라도 지킬 수 있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돌아갈 곳은 없어!”
“로마놈들이 판노니아에서 전부 빠져나갔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저들뿐인데 차라리 저들을 그냥 보내주시지요.”
“뭐?!”
분노한 비디메르가 곁에 있던 친위대의 검을 빼 들고는 베린하르트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베린하르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도 덤덤하게 비디메르에 말했다.
“이제는 인정하셔야 합니다. 우린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진겁입니다.”
“그럼, 저곳에서 죽어간 내 병사들은 전부 개죽음이었다는 말인가!”
“예, 개죽음입니다. 대족장의 욕심과 야망, 어쩌면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죽어 나갔지요. 그걸 개죽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나를 위해서, 싸우고! 죽었어! 그런데 고작 네놈 따위가 개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냐!”
“이곳에서 대족장을 위해 싸우지 않은 이가 있습니까?”
베린하르트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있던 몇몇 귀족들과 장로들이 헛기침하면서 얼굴을 붉혔지만, 베린하르트의 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모두 대족장을 위해 싸웠고, 개처럼 죽었습니다. 프리두헬름 장로님은 대족장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최전선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개죽음이 아닙니까?”
“그 녀석은 군의 공세에 있어서 쓸데없는 말들로 아군의 사기를 꺾으려 했다.”
“그렇다면, 어젯밤에 있었던 공격은 어떻습니까, 대족장은 돌아오셨지만, 돌아오지 않은 다른 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비디메르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화를 참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눈앞의 건방진 녀석을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그의 말이 전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결국은 물러나자, 이 말인가?”
“예, 버릴 수 있을 때 버려야 합니다.”
“뭘 버린단 말인가.”
“대 족장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적은 그 수도 적은 데다가, 지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 포기하자고?”
“우리도 지치고, 다쳤습니다. 그들만 힘듭니까. 우리도 힘든 상황입니다.”
“듣기 싫다. 베린하르트, 일주일이다. 정확히 일주일 뒤에는 저 요새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다.”
“대족장···.”
비디메르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거칠게 내팽개치면서 돌아섰고, 그렇게 회의는 끝이 났다.
다른 이들은 숨이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드디어 해방됐다는 사실에 기뻐했으나, 베린하르트를 비롯한 몇몇 이들은 한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
가우덴티우스는 요즈음 기분이 좋았다.
지난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 기병대장으로 승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토록 고대하던 자식이 태어났으니 군인으로서의 기쁨과 아버지로서의 기쁨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한해였다.
더군다나 요 몇 달간은 대대적인 야만족들의 침입도 없었던지라, 나름 편안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컸다.
“대장님, 먼저 들어가십니까?”
“그래, 어젯밤에 아들이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안 갈 수가 있나. 하하하.”
“하하, 참 좋으시겠습니다. 저는 언제쯤이나 결혼을 할는지 어휴···.”
“하하하, 자네도 노력하다 보면 결실이 생길걸세, 하하하.”
“하긴, 대장님도 결혼하셨는데 저라고 못할 게 있습니까, 하하하.”
“허허, 상관을 그리 헐뜯어도 되는가. 하하하.”
“장군!”
즐겁게 동료와 농담을 던지면서 집으로 향하는 가우덴티우스를 불러 누군가 불러 세웠다.
“음? 뭔가.”
“그, 잠시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가우덴티우스는 자신의 길을 막아서는 병사의 행동에 즐거웠던 기분이, 꺼졌지만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다.
병사를 따라서, 군영 안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로 향하니.
간신히 로마 병사임을 알아차릴 정도로 형편없는 행색의 병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11군단 1대대 소속의 전령입니다. 주변을 헤매다가 군영을 발견해서···.”
“그래? 자네 부대는 어디 가고, 혼자서 이곳을 떠돌았는가, 자신을 증명하는 물건은 있나?”
“그, 암호 표가 있긴 한데···.”
“줘보게.”
가우덴티우스는 나무패에 새겨진 로물루스라는 단어를 보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부대의 것이 아닌 건 확인했군. 그래서 무슨 연유로 홀로 헤매고 있었나?”
“장군,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작스가 냅다 엎드리면서 눈물을 보이자.
당황한 가우덴티우스와 병사들이 그를 다독였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눈물을 보인단 말인가.”
“그것이···.”
아작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에 가우덴티우스와 주변에 있던 병사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경악하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침음성을 흘렸다.
아작스의 입이 다물어졌을 때.
가우덴티우스는 참고 있던 숨을 들이쉬듯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면서 아작스의 어깨를 두들겨줬다.
“그래, 자네가 고생이 많았군.”
“장군, 동료들을 도와주십시오.”
“흠···.”
“장군, 단독으로 움직이기에는 적의 규모도 모르지 않습니까,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지금 고트족이 연합해서 침공한 것인지, 아니면 대대적인 침공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군을 움직였다가는···.”
“차라리, 중앙이나 주변의 다른 부대들에 도움을 청하는 편이 어떠신지요.”
부관들이 가우덴티우스에게 각자의 의견을 전하면서, 그의 집무실이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중심에 서 있는 가우덴티우스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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