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87)

동쪽의 바람.

“쯧, 놓쳤군.”

마리우스는 혀를 찼다.

녀석을 죽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전투를 끝낼 기회라고 여겨 병사들을 투입했던 것 치고는 결과가 좋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크게 다친 병사들이 즐비했고, 두 다리로 서 있는 병사들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는 데다가, 이들 모두 지쳐 보였다.

마리우스는 긴장이 풀렸는지,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봐.”

“부르셨습니까.”

“중앙 성채로 가서 폴로에게 예비대를 보내 달라고 전해.”

“예, 알겠습니다.”

마리우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들을 끌어들여서 외곽목책들과 함께 전부 태워버릴 생각이었지만, 예상외로 적의 기세가 어느 순간부터 급격히 꺾이더니 이제는 역으로 밀려나는 모습인지라 생각을 바꿨다.

언덕 아래에 대기 중인 적의 본대가 움직이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적을 밀어내는 것뿐이었다.

******

“대족장, 괜찮으십니까?”

“문제없다. 병사들은?”

“...많이 상했습니다. 더 이상의 공세는 무리입니다.”

“그래, 그렇군···. 본대는 왜 소식이 없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령을 세 번이나 보냈지만, 소식이 없습니다.”

“후우···.”

비디메르는 한숨을 내쉬면서 요새를 올려다봤다.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은 소수였고, 그나마도 금세 로마놈들에게 당하거나 밀려나기 일쑤였다.

궁수들이 아군을 엄호한다고 부단히도 화살을 날리고는 있었지만, 로마군에게 그렇게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하는 듯싶었다.

충차 쪽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대실패였다.

충차는 고트족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후퇴한다. 부상병들 먼저 뒤로 보내고, 나머지 병사들과 같이 내려간다.”

“알겠습니다.”

“자네가 앞장서서 병사들을 이끌게, 난 뒤를 맡지.”

“대족장, 어찌 제가 먼저···.”

비디메르는 어찌할 줄 모르는 부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오늘은 슬픈 날이야, 자네도 이해해주게.”

“대족장···.”

“명령일세.”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부관은 빠르게 병사들을 불러모았다.

“전군, 재집결하라!”

집결을 알리는 뿔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니 성벽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던 병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순식간에 수백 명의 병사가 모였다.

비디메르는 남은 병사들을 보며 참담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출발할 때만 해도 제법 많은 수였는데 인제 와서 돌아보니, 눈에 띌 정도로 숫자가 줄어들어 있었고, 남은 이들도 멀쩡한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고트족 병사들이 동료들을 챙겨,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성벽 위의 로마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으로 그들을 배웅했다.

“다시는 오지 마라! 개새끼들아!”

“도망치는 꼴 좀 보라지!”

“끙···.”

“마리우스 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죽을 것 같은데.”

“부축해드릴까요?”

“끙···. 됐어,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

마리우스는 옆구리를 부여잡고는 절뚝거리면서 의무대로 향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제야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 빛이 그의 축 늘어진 어깨를 어루만져주듯이, 따스한 빛을 내어주고 있었다.

******

한편, 본대의 흔적을 쫓아온 아작스는 몇 시간이나 근처를 뒤졌으나, 아군이 주둔했던 흔적들만 발견했을 뿐, 아군은 찾지 못했다.

달마티아로 넘어간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기엔 군영이 있었던 자리에는 주둔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둔 임시 목책이 그대로인 것이 걸렸다. 이곳을 떠난다면 당연히 부수고 갔을 텐데 말이다.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던지라 복귀도 못 하고 주변을 어슬렁어슬렁 거릴 때쯤에 익숙한 갑옷을 입은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그들에게 다가갔으나,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저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아작스의 귀에 들려왔다.

“지난번에 그 년말이야.”

“누구?”

“왜, 그 로마 새끼들 사냥하고 잡아 온 애 중에 키 큰 여자 말이여.”

“아, 그게 왜.”

“이번에 금화 두 닢에 넘어갔다고 하던데.”

“두 닢? 어디에 팔았길래.”

“동쪽에서 온 스키 타이들에 넘겼다던데.”

“스키타이? 사르마티아가 아니고?”

“아, 그건가?”

“에라 멍청한 새끼야.”

아작스는 그들이 로마군이 아님을 단번에 눈치챘다.

애초에 그들이 하는 말이 전형적인 게르만족의 말이었고, 억양부터가 로마에 거주하는 다른 게르만계열 부족들과는 달랐다.

‘뭐야, 본대가 당하기라도 한 건가?’

아작스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상황을 제대로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에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서 쫓아간 지 몇 시간이 흘렀을까, 산 중턱쯤에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아작스는 어렵지 않게 마을 안에 감금되어있는 로마 병사들과 로마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시발, 대대장 새끼가 제대로 사고를 쳤구먼.’

아작스는 조심스레 마을 안을 살펴봤다.

그 안에는 개처럼 끌려가는 수많은 사람이 보였고, 마을 중앙에는 대대를 상징하는 깃발과 각 백인대를 상징하는 깃발들이 전리품처럼 로마군의 시체 위에 꽂혀있었고,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웃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뭐야, 전부 당한 건가?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간 거지?’

아작스는 마을 주변을 돌면서 꼼꼼히 흔적을 찾아봤지만, 이곳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마을 주변을 서성이던 아작스는 마을 밖으로 빠져나온 젊은 남녀를 발견하고서는 뒤를 쫓았다.

점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두 남녀는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지도 모르고 정신이 팔려있었고, 어느 정도 마을에서 떨어졌다고 판단한 아작스가 검을 뽑아 들 때도 둘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알베릭, 도대체 언제까지 숲속에서 만나야 하는 건데.”

“알바, 어쩔 수가 없잖아.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준비만 하다가 할머니 되겠어!”

“오, 할머니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거야?”

“몰라-!”

“모르긴, 하하하.”

“거기 둘, 보기 좋네.”

“응?”

알베릭이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돌린 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단칼에 알베릭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아작스는 비명을 지르려는 알바의 얼굴을 검의 손잡이로 후려쳤고, 알바또한 그대로 쓰러졌다.

순식간에 둘을 제압한 아작스는 뜨거운 피를 쏟고 있는 알베릭의 시체를 지나쳐 알바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고,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면서 물었다.

“이봐, 이제부터 내 질문에 예, 아니요. 둘 중 하나로 대답해 알겠나?”

“아, 알베릭···.”

아작스가 뺨을 올려치자, 알바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다시 그녀의 목을 쥔 아작스는 눈을 부라리면서 물었다.

“이 근처에서 로마군을 본 적이 있나?”

“모, 몰라요···. 저는 마을에만 있었다고요!”

“예, '아니요'로만 답하랬지.”

목에 차가운 검이 살갗을 파고들자, 잔뜩 겁먹은 알바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네! 네! 네! 네! 왔어요! 네!”

“한 번만 말해, 머리 아프니까. 로마군과 싸웠나?”

“네···.”

“로마군은 전부 죽었나?”

“어···. 음···. 그건 아닐 건데···. 요···.”

“쯧, 답답하게 굴지 말고, 눈치껏 잘 대답해봐.”

“로, 로마군이 저희 마을을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족장님한테 당하셨어요···.”

“그래? 그다음엔?”

“어···. 그다음에는 로마인들을 잡아 오셨고···.”

“아니, 당했다는 그 로마인들이 어떻게 됐냐고, 전부 잡힌 건 아닐 거 아니야.”

“저, 저도 듣기만 한 거라···.”

“하···. 네가 지금 이것저것 생각할 때가 아닐 텐데?”

아작스는 검에 묻은 알베릭의 피를 알바의 옷에 닦아내면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알바는 겁을 집어먹고는 벌벌 떨었다.

그런 그들의 뒤편에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 알ㅂ···.]

“시간을 너무 끌었군.”

“살려주세요, 집에 아프신 어머니가 계세요!”

알바는 아작스에 빌었으나, 그는 냉철하게 답했다.

“네 족속이 죽인 수많은 내 형제자매들도 그랬을 거다.”

“제발···.”

아작스는 알바의 눈물에 조금 망설였고,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알바는 그를 밀치고서 어두운 숲속을 헤치면서 달려가 버렸다.

아작스는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면서 숲을 내달렸다.

그 방향은 동쪽, 노리쿰이었다.

******

베린하르트와 브루노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져만 갔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같은 깃발 아래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적이 되어 싸웠다.

대지에는 피와 눈물이 흘렀고.

수많은 병사가 돌아오지 못할 여행길에 올랐다.

“혼을 져버린 배신자들을 처단해라!”

“멍청한 자식들, 비디메르가 영원히 너희의 주인일 줄 알았느냐?!”

싸움은 점점 치열해져만 갔다.

브루노가 포섭한 귀족들과 장로들이 가진 병사들이 수적으로 우월했으나, 베린하르트와 비디메르 부족의 병사들이 거세게 저항하는지라 양쪽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상자만 늘어났을 뿐, 어느 누구 하나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는 언덕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비디메르는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무엇인가.”

이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부관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갈했다.

“이놈들! 대족장 앞에서 무슨 추태인 것이냐!”

부관의 우렁찬 목소리는 언덕 아래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의 함성에 섞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부관은 당황했고, 비디메르는 분노와 슬픔을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지금 뭣들 하는 건가!”

“앗, 대족장!”

비디메르의 외침에 병장기를 부딪치던 병사들이 일제히 멈춰서서는 비디메르 쪽을 바라봤다.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오를 듯이 분노한 비디메르는 자신의 도끼를 오른손으로 움켜잡고서는 말을 몰아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대족장의 등장에 병사들이 혼란에 빠져들었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자 하나둘, 무기를 던져버리고는 비디메르에 길을 터줬다.

부관이 황급히 멀쩡한 병사들과 친위대를 이끌고서 비디메르의 뒤를 따랐지만, 분노에 찬 비디메르의 마음이 말에게까지 전해졌는지, 평소보다 빠르게 내달리는 그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노오오옴!”

“대족장!”

“비, 비디메르!”

비디메르는 본능적으로 이 사태의 원인을 찾아냈다.

이곳저곳에 상처를 입은 베린하르트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만하게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던 브루노를 돌아본 비디메르는 도기를 크게 휘둘러 브루노가 탄 말의 목을 베어내고서야 말을 멈춰 세웠다.

순식간에 목이 잘려나간 브루노의 말은 그대로 굳어버리면서 풀썩, 쓰러져버렸다.

그 위에 타고 있던 브루노 또한 휘청거리면서 추한 모습으로 말에서 떨어졌고, 말이다.

비디메르는 조용히 땅에 널브러진 브루노에게로 말을 몰고 갔다.

그는 혼자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에게 무기를 들이밀거나, 막아서는 이 없이 브루노에게 다가간 비디메르는 그의 목에 도끼를 들이대며 낮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왜 그랬는지는 묻지 않겠다. 네 잘못이 아니라 네 마음속의 야망이 문제임을 아니까.”

“대족장, 잘못했습니다. 제정신이 잠깐 어떻게 됐나 봅니다. 살려주십시오!”

“자네를 용서하기에는 이미 멀리 와버렸다네. 눈이 있다면 주변을 둘러보게, 저 대지에 쓰러진 이들 중에 로마인이 있는가.”

“대, 대족장.”

“억울한가?”

“예, 억울합니다. 대족장, 전부 설명할 수 있으니 제게 기회를···.”

비디메르의 눈썹이 갈대처럼 휘어지더니, 이내 그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명은 무슨 설명 말인가, 자네가 설명해야 할 것은 자네의 잘못된 판단으로 발할라로 가지 못한 전사들에게 해야 할 것이야! 검을 들어라. 브루노!”

“대, 대족장···.”

브루노는 눈을 굴리면서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와 같이 반란을 모의했던 귀족들이나 장로들에 병사들까지, 전부 그의 눈을 피하면서 비디메르의 분노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익···. 나만 죽을 것 같으냐 이 머저리들아! 비디메르가 너희들을 살려둘 것 같아?! 차라리 이 자리에서 비디메르를 죽여라, 저 녀석을 죽이는 녀석에게는 내 재산의 반을 떼주겠다!”

“반절이라···.”

브루노의 외침에 비디메르가 흥미롭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봤으나, 그의 부리부리한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마치, 신을 영접한 신도들처럼 몸을 떨면서 시선을 피하는 이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비디메르는 다시 고개를 돌려 브루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떨리고 있었다.

“고작, 그 정도로 날 어찌 해보겠다는 것이었나.”

“고, 고작이라니···. 절반이면 네놈의 그 잘난 부족들보다도 많은 것이다!”

“아니지, 아니야···. 그게 아니야 브루노. 우리의 재산은 튼튼한 몸뚱어리와 사랑스러운 가족이면 족한 것임을 잊어버렸는가.”

“고, 고작 그런걸···.”

비디메르는 도끼는 바람처럼 휘둘러져 브루노를 장작처럼 반으로 쪼개버렸다.

엄청난 피가 비디메르에 튀었으나, 비디메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면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내게 불만이 있다면, 아니 그냥 내 자리가 탐이나 면은 언제든지 내게 말해라. 나는 도전을 피하지 않는다.”

이에 모든 귀족과 장로들, 그리고 병사들까지 무기를 버리면서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ㅎㅎㅎㅎ 친구가 그려줬습니다 ㅎㅎㅎㅎ

누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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