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7)

동쪽의 바람.

“적군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비디메르가 멈추어 서는 것도 아니었다.

비디메르는 열심히 도끼를 휘두르면서 로마 병사들을 위협했다.

병사들은 하나로 뭉쳐서 다시금 비디메르를 밀어내거나, 처리하려 했지만.

비디메르는 노련하게 병사들의 빈틈을 파고들면서 도끼를 휘둘러댔고, 여러 명의 병사가 비디메르의 도끼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다.

[몇 명이든지 상관없다. 천둥의 신 토르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니!]

“저 미친 야만족 새끼 빨리 안 밀어내고 뭐 하는 거야!”

“소리 지르지 말고, 너도 붙어 이 새끼야!”

병사들이 한데 모여서 방패진을 이뤘을 때쯤에는 이미 사다리와 공성 탑을 타고, 비디메르의 친위대가 목책 위로 올라온 시점이었다.

[대족장을 지켜라!]

[로마놈들을 몰아내자, 오딘의 이름으로!]

[형제들을 죽인 로마놈들!]

“개새끼들이 기어 올라왔다!”

“빨리 밀어내!”

“활쟁이 새끼들은 뭐 하고 있냐!”

하지만, 비디메르와 그 친위대의 숫자는 극히 적었고, 다른 병사들은 밑에서 올라오는 중이었기에 친위대는 몸을 던져가면서 비디메르를 지켰다.

반면에, 로마 병사들은 방패로 몸을 가린 채로 천천히 한 명씩 처리하면서,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고 말이다.

비디메르가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갈 때마다 얼마 없는 친위대들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고, 비디메르의 몸 이곳저곳에도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꿋꿋하게 성벽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하하하하! 로마의 개들아, 너희들이 발버둥 친다 해서 내가 물러날 것 같으냐!]

“저 자식이 대장 같은데?”

“시발, 진짜 골때리네.”

[오늘의 승리는 내 것이 되리니!]

로마 병사들이 비디메르에 시간을 뺏기고 있을 무렵.

비디메르에 쏠린 관심 덕분에 상대적으로 여유가 생긴 충차 쪽은 어떻게든 병사들을 밀어 넣으면서 충차에 달라붙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 뒤에 충차를 움직여 성문을 때려봤지만, 성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여기가 뚫리면 다 죽는다고 생각하고 막아!”

“지지대가 모자라, 더 가지고 와야 해!”

“지금 다 바쁜 거 안 보여? 네가 가져와!”

병사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동안, 마리우스 또한 목책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기어 올라오는 고트족들과 싸웠다.

아직 전선은 여유로웠고, 고트족 병사들은 목책에 발을 올려놓기도 전에 죽거나, 벽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이렇게만 버티면 오늘의 싸움도 이길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마리우스는 목책 위에서 아군 병사들과 싸우고 있는 비디메르와 눈이 마주쳤다.

“저건 또 뭐야.”

[저 녀석이, 이곳의 대장인가 보군.]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말없이 무기를 바로잡았다.

마리우스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 비디메르의 앞에 섰다.

몸을 감싸고 있는 사슬갑옷 사이사이마다 스며든 로마인들의 피가 흘러내리는 비디메르와 마찬가지로 갑옷 여기저기에 이름 모를 고트족 병사들의 피가 흐르면서 살점이 붙어있는 마리우스의 대치는 보는 사람이 절로 긴장하게 됐다.

마리우스는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에 비해서도 머리가 하나에서 하나 반 정도 더 컸지만, 비디메르는 그런 마리우스보다도 더 컸다.

서로를 마주 보던 둘의 침묵을 깬 쪽은 마리우스였다.

“야만족 새끼가···.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올라와?”

[다른 연약한 로마놈들과는 다르게, 제법 강단 있어 보이는군.]

“그래, 한눈에 봐도 네가 중요한 사람인 건 알겠네.”

[한눈에 봐도, 네가 이곳의 책임자인가 보군.]

마리우스가 늘어트린 검을 들어 올리자, 비디메르 또한 도끼를 들고 소리쳤다.

[센릭! 바짝 붙도록.]

[대, 대족장.]

“마리우스 님, 괜히 저놈 자극하지 마시고 물러나십시오!”

“저놈만 잡으면, 이번 전투가 끝난다.!”

“지난번에도 그 소리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너희가 방해했···.”

[말이 많구나!]

비디메르는 무식할 정도로 커다란 양손도끼를 회초리처럼 휘둘렀다.

막으면 분명 죽는다고 판단한 마리우스는 왼손의 방패로 막는척하며 비디메르의 시야를 가렸고, 순간적으로 방패를 던지면서 비디메르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어 검을 찔렀다.

[대족장 위험합니다!]

곁에 있던 친위대중 하나가 자신의 방패로 급히 비디메르의 몸을 가려서 비디메르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병사는 그렇지 못했다.

“쯧, 쓸데없는 짓을.”

마리우스는 방패를 스치면서 하늘로 솟구친 오른손의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검을 역수로 쥐고서는 무방비하게 노출된 병사의 오른팔에 내리치니.

썩은 나무토막이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듯이 마리우스의 검이 병사의 오른팔과 몸뚱어리를 갈라놓았고, 고통도 느끼지도 전에 비어있는 병사의 목에 붉은색의 선을 그렸다.

[칵, 켁···. 컥···.]

마리우스의 귀신같은 솜씨에 센릭은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쓰러졌고, 로마 병사들과 비디메르의 친위대는 멍하니 마리우스를 바라봤다.

마리우스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검을 바로잡고선, 자세를 바로 했다.

‘와, 이게 되네?’

마리우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도 애써 내색하지 않고 태연하게 비디메르를 도발했다.

“무식한 소대가리야. 싸우러 왔으면서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나?”

[센릭을 죽이다니···. 제법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말이야.]

“또 중얼거리네, 뭐하냐 빨리 안 밀어내고!”

“예!”

[센릭의 원수를 갚아주마!]

로마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적을 밀어내려 했지만, 비디메르가 무식하게 큰 도끼를 휘두르면서 거칠게 저항하고 있었다.

분명 방패로 도끼를 막았음에도, 단단한 방패는 장작처럼 반으로 갈라지면서 병사들을 멀찍이 날려 보냈다.

“저 새끼가!”

“백 부장님 지켜!”

병사들이 피를 흘리면서 죽어 나가는 모습에 마리우스가 재빨리 비디메르와 무기를 맞대면서 그를 막아섰고, 다른 로마 병사들과 비디메르의 친위대 또한 달라붙으면서 목책 위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비좁은 목책 위에서 여러 사람이 몰리니, 가뜩이나 좁았던 곳이 더욱 좁아졌지만, 비디메르는 개의치 않고 마리우스의 머리를 노리면서 도끼를 휘둘러댔다.

육중한 도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리우스의 검과 방패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이런 멧돼지 같은 녀석이 다 있어.”

비디메르의 실력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한 지역을 제패한 사람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적진 한가운데나 다름없는 곳을 제집처럼 편하게 돌아다니면서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사신이 손짓하는 듯했다.

마리우스의 실력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그동안은 부대에서 쇠질로 다져진 육체적으로도 충분했지만, 눈앞의 이 괴물은 자신이 상대하기엔 너무 노련했고, 실력이 뛰어났다.

[무슨 잡생각을 그렇게 하느냐?!]

“억-”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진 마리우스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비디메르의 도끼는 기괴한 방향으로 꺾이더니, 그대로 마리우스의 빈약한 옆구리를 후려쳤다.

급히 방패로 틀어막았지만, 비디메르의 도끼는 마리우스의 방패를 쪼개버리고 갑옷을 짓이기면서 마리우스를 목책 아래로 날려 보냈다.

“마리우스 님!”

“빨리 백 부장님 챙겨!”

[적장이 쓰러졌다. 계속해서 밀어붙여!]

목책 아래로 튕겨 나간 마리우스는 다행히도 갑옷이 막아준 덕택에 목숨은 건졌지만, 사슬갑옷은 흉물스럽게 뜯어졌고, 옆구리에는 제법 큰 상처가 생겼다.

병사들이 달려와 마리우스를 부축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들의 손을 뿌리치면서 스스로 일어나서는 아랫배에서부터 힘을 끌어모아 소리쳤다.

“고작, 그 정도로 날 죽일 수 있겠냐 이 멍청한 야만인 새끼야!”

[아직 살아있었군.]

******

선발대는 이미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을 정도로 큰 피해를 봤지만, 이를 지휘해야 할 비디메르가 최전선에서 전투를 벌이는지라 부관 혼자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면서 병사들을 다독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여전히 충차는 성문을 박살 내기는커녕 흠집도 내지 못해서 끙끙대고 있었고, 가져왔던 사다리나 공성 탑의 대부분은 쓰지도 못하게 부서진 지 오래였다.

남아있는 몇몇 공성 탑과 사다리로 병사들이 몰리다 보니, 피해는 더욱 커져만 갈 뿐이었지만, 부관에게는 후퇴할 권한이 없었다.

그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모두 벽을 넘어라, 고지가 눈앞이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는 자는 내 손에 죽을 것이다!”

“지금 너희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적도 고통스럽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부관이 목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러대도, 이미 기세가 한풀 꺾여버린 병사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성벽 밑에는 수많은 고트족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있었고, 일부는 이 시체들을 밟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기도 할 정도였다.

“도대체 본대는 언제쯤 오는 거야!”

부관이 분노에 찬 목소리를 토해내며 뒤를 돌아봤지만, 본대는 여전히 언덕 아래에서 대기하면서, 방관할 뿐이었다.

******

“올라가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명령이 없는데 어떻게 군을 움직이겠나.”

“하지만···.”

“어허, 베린하르트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장로님! 당장 군을 움직여야 합니다. 아군이 죽어 나가고 있습니다.”

장로는 그저 의미 모를 웃음만을 지으면서, 베린하르트에 답했다.

“비디메르가 로마놈들과 같이 죽어준다면, 좋은 것 아니겠나?”

“장로님 그게 무슨···.”

“이미 다른 이들과는 이야기가 끝났다네. 비디메르가 그동안 자기가 왕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 거리는 꼴을 더는 볼 수가 없어.”

“......대족장의 등에 칼을 꽂으시겠다는 겁니까?”

“굳이 그렇게 험악한 말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그저 우리의 관계를 재정립한다고 해주게.”

“브루노!”

“어이쿠, 베린하르트 왜 그리 화가 난 게인가.”

베린하르트가 검을 뽑아 들자, 주변에 있던 귀족들과 전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서로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 병사들도 술렁이면서 긴장감이 흘렀다.

“대 족장께서 네놈에게 베푼 호의를 잊었느냐?!”

“그놈의 부족이 우리 부족에게 했던 짓을 잊지 않았을 뿐이라네.”

“지금 적을 앞에 두고서 다른 생각을 품다니, 내가 오늘 네놈의 목을 베어서 정당함을 증명코야 말겠다!”

“정당함은 칼끝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베린하르트.”

브루노는 검지로 자신의 이마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여기, 이 속에서 나오는 거야. 내가 곧 정의고 기준이 된다면, 누가 날 심판하겠나?”

“쓸데없는 소리!”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야 베린하르트. 자네도 저런 싸움만 할 줄 아는 무식한 놈이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족장은 사자의 용기와 늑대의 혼을 타고나신 분이다!”

“세상은 용기와 용맹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많아, 안 그런가?”

“더는 네놈의 뱀 같은 혓바닥에 놀아나지 않겠다. 안 그런가!”

베린하르트의 외침에 그의 뒤에 있던 수많은 전사가 이에 호응했다.

“이제 비디메르의 시대는 끝났다는걸. 어째서 모르는 건가.”

브루노의 한숨 소리에 뒤에 있던 수많은 병사와 귀족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면서 브루노의 앞으로 튀어나와 그를 감쌌다.

“굳이 피를 보고 싶다면은 말리진 않겠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돕고 싶다면 너희끼리 가면 되는 게 아닌가.”

“대 족장께서는 명령을 내리셨고, 우리는 행하면 될 뿐이야.”

“비디메르가 네놈의 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꿔서 대족장을 돕는다면은 없는 일로 해주겠다.”

“베린하트르, 넌 참 거짓말을 못 해.”

“그럼 끝이군.”

베린하르트가 조금 전부터 눈앞에서 얼짱이던, 귀족 한 놈을 베어내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

한편, 목책 위에서는 아직도 생과 사가 오가는 지루한 싸움이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비디메르가 마리우스를 날려버리기는 했지만, 역으로 그러고도 멀쩡한 마리우스의 모습을 보고는 로마군의 사기가 더 올라갔다.

비디메르의 친위대와 그의 병사들은 올라오는 족족 로마군에게 격퇴되거나 차디찬 바닥에 몸을 뉘었던 반면에.

사기가 오른 로마군은 제법 큰 희생을 치르면서도 효과적으로 비디메르를 막아섰고, 그의 친위대의 수를 착실하게 줄여나간 덕에 어느새 목책 위에는 비디메르와 그를 따르는 친위대 두 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후우···. 대족장, 어서 가십시오.]

[여긴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나는 부하를 두고 가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가더라도 같이 간다.]

[대족장, 저희는 이미 틀렸습니다.]

비디메르는 눈을 돌려 부하들을 바라봤다.

한 녀석은 어딘가에 팔아먹었는지 팔이 하나 없었고, 다른 녀석은 큰 상처를 입어 쏟아져나오는 내용물을 손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이게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날뛰지만 않았더라면, 이들이 이런 일을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회가 들었지만, 후회는 언제 해도 늦은 법이었다.

[대족장···. 어서 가십시오. 발할라에서 뵙겠습니다.]

[대족장과 싸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둘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고, 이러는 순간에도 신화 속에서 들어왔던 그 어떤 거인들보다도 사악해 보이는 로마군이 천천히 거리를 좁히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슬쩍, 성벽 아래를 살펴보니 들고 있는 횃불들보다 바닥에 널브러진 횃불이 더 많이 보일 정도였다.

[...미안하다. 뒤를 부탁하지.]

[영광입니다. 대족장.]

[부디 뜻하신 바를 이루십시오.]

“어어···?”

“저, 저거 막아!”

“대장이 도망친다 잡아!”

[어딜!]

[못 간다.!]

로마 병사들이 도망가려는 비디메르를 잡으려 했지만, 남은 두 명의 병사가 무기를 휘두르면서 그들을 막아섰다.

분명 몇 시간이나 싸운 데다가, 심한 부상까지 입었을 텐데 오히려 상처를 입기 전보다 더욱 맹렬하게 로마군을 밀어붙였고, 결국 보다 못한 마리우스가 나섰다.

“비켜,”

“마리우스 님?”

마리우스는 이를 악물고서는 그대로 방패를 들고 밀어붙여서 팔이 하나 없는 녀석을 휘청거리게 만들고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창을 던져서 다른 녀석의 가슴팍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리고는 남은 녀석은 주변에 있던 병사들이 달려들어 난도질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이미 비디메르는 망설임 없이 목책 위에서 뛰어내린 지 오래였다.

2층 건물 정도의 높이였지만, 비디메르는 겁 없이 뛰어내렸고, 그 밑에 수북이 쌓여있던 시체 위로 무사히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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