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늘과 같다.
고트족의 군영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낮 동안 기운을 보충했던 병사들은 어제보다도 기운이 넘쳐 흘렀고, 사기 또한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투에서는 비디메르가 선봉에 서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대족장, 선봉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전쟁터에서 위험은 숨 쉬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전방이나 후방이나 위험하긴 마찬가지야.”
“그래도···.”
“듣기 싫네, 어차피 저 요새를 넘으려면 우리 병사들을 잘 다독거려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비디메르는 자신을 만류하는 부관을 물리치면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야말로 저 요새를 손에 넣을 때로군.”
“대족장, 병사들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다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래? 허허, 다들 장하도다. 모두 알다시피 오늘의 선봉은 내가 맡을 것이니, 자네들은 본대를 이끌고 내 꽁무니만 따라오면 될 것이야.”
“대족장의 위용에 적들이 지려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하하.”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하하하 그래도 자네들 몫은 남겨둘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들.”
비디메르는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말에 올랐고, 이내 들판에 늘어선 병사들의 사이를 지나 대열의 최선두로 향했다.
비디메르가 지나갈 때마다 병사들이 양옆으로 길을 만들어주는 광경은 그 옛날, 홍해를 반으로 갈랐다는 모세와 같은 것으로 비디메르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병사들에게서 자신감을 얻었다.
대열의 최선두에 선 비디메르는 말머리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봤다.
밤이었지만, 무수히 많은 횃불이 타오르면서 내뿜는 빛은 대낮만큼이나 환했고.
병사들의 환희에 찬 모습들과 긴장한 모습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비디메르가 입을 열었다.
“나의 병사들이여!”
“오늘 우리는 여기에 섰다. 이곳이 어디인가!”
비디메르는 병사들을 둘러봤지만, 그들에게서 대답이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비디메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이를 드러내며 웃었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로마인들이 우리를 내쫓고서는 자기들 멋대로 눌러앉은 곳이다.”
“우리는 이곳을 로마인들의 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부터 이곳은 다르게 불릴 것이니···!”
비디메르가 검을 뽑아 들었고, 쥐고 있던 기수를 힘껏 뒤로 당기자 놀란 발이 앞다리를 들었다.
“이곳의 이름은 고트족들의 땅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누가 나와 함께하겠나!”
“와 아아아아아-!”
비디메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들의 함성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비디메르는 그 말머리를 돌리면서 요새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오늘 저 요새를 빼앗는다. 공격 개시!”
“와 아아-!”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대열을 갖추고, 공성 병기들을 밀기 시작했고.
다른 병사들도 자신의 무기를 쥐고서는 천천히 요새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저 요새도 곧 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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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적들이 움직입니다!”
“드디어 움직이는군, 다들 침착하게 자리를 지켜라. 저 녀석들이 성벽으로 기어 올라오지만 못하게 해!”
마리우스는 목책을 돌아다니면서 긴장한 병사들을 다독였다.
“빨리빨리 움직여! 기름과 물을 끓이고 불화살을 준비해라!”
“적이 온다. 다들 움직여!”
“신병들 챙겨!”
고트족은 이전과는 다르게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 어설프게나마 대열을 맞추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에 가린지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공성 병기들도 보였고 말이다.
“충차에···. 공성 탑인가? 쉽지 않겠어.”
천천히 다가오던 적들은 강을 건너자, 로마군의 스콜피오와 투석기들이 움직였다.
수십 개의 톨과 탄환이 적진을 갈랐고, 로마군의 병기들이 쏘아질 때마다, 고트족 병사들 사이에서 비명과 함께, 수십 명이 쓸려나갔다.
[모두 멈추지 마라! 토르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오오오오-!]
고트족들은 동료의 희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기세가 줄어들 법도 했지만, 고트족들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묵묵히 전진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 미친 새끼들!”
“시발, 신이시여···.”
“저 새끼들 뭐 잘못 먹었나?”
“잡담할 시간에 활이나 잡고 움직여!”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궁수들의 불화살이 적의 공성 병기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침 사이에 바싹 말라 있던 병기들에 불화살이 꽂히기 시작하니,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불타기 시작했다.
공성 병기들에서 불길이 치솟자, 고트족 병사들이 당황하면서 대열이 멈춰 섰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로마군은 더욱 맹렬하게 활과 투석기로 고트족을 괴롭히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들판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어둠을 밝혔다.
“대족장! 불길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에잇, 고작 몇 개에 불이 붙었다고 뭐 이리 호들갑이더냐! 정신 차려라. 고지가 눈앞이다.!”
“대족장!”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으면서 병사들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에서.
백마를 탄 비디메르는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달려나갔다.
한밤중이었지만, 은은한 달빛 아래 내달리는 비디메르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 만했고, 로마군 또한 홀로 튀어나온 비디메르를 잡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썼다.
“백마를 탄 녀석이 대장이다. 놈을 노려라!”
“어리석기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화살이 비디메르를 노렸지만.
비디메르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로마군의 민병대들이 주축이 된 궁수들이 전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겠지만.
비디메르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선택받았다.’
그에게 쏘아진 돌과 화살 중 어느 것도 그에게 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전설 속에서 하늘과 바다, 그리고 명계를 달렸다는 명마 슬레이프니르에 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끓어오르는 고양감 속에서 비디메르는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했다.
“두려워 마라 형제들이여, 너희의 왕이 여기 있다. 누가 나처럼 저 벽을 넘어서겠는가!”
“대족장을 모셔라!”
비디메르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들판에 울려 퍼졌고, 우왕좌왕하던 고트족 병사들과 이를 이끌던 전사들이 다시금 대열을 정비하며, 함성으로 화답했다.
[와아아아아- 비디메르!]
전장에 울려 퍼지는 함성이 로마 병사들을 위축시켰고, 불타오르는 공성 병기들 앞에서 고트족이 다시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많은 수의 공성 병기들이 불타고 있었지만, 이미 많은 수를 준비해뒀던 고트족인지라 전투가 완전히 불가능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날의 패배로 인해, 그들 마음속에 깃들었던 두려움을 비디메르가 단번에 용기로 바꿔버리면서 사기가 치솟아오른 고트족 병사들이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 적이 언덕을 올라옵니다!”
“일일이 말 하지 않아도 다 보고 있어! 통나무와 돌을 굴려라, 적이 기어 올라오지 못하게 해!”
로마군은 바삐 움직이면서 통나무와 돌을 옮기면서 언덕으로 굴려 보냈다.
방패 하나에 의지하면서 언덕을 오르던 고트족 병사들은 굴러오던 통나무와 돌덩어리들을 정통으로 맞았고, 곳곳에서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언덕을 오르던 공성 병기들 또한 어둠 속에서 굴러오는 통나무와 돌덩어리에 맞아, 이를 밀던 병사들이 다치거나 병기에 문제가 생겨 움직임을 멈췄다.
“멈추어 서지 마라! 제일 먼저 벽을 넘는 자에게 금화 20닢과 병사들을 지휘할 명예로운 전사로 만들어주겠다. 멈추어 서지 마라!”
비디메르가 목이 터지라고 병사들을 다독이니, 느릿느릿하지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누군가 뒤에서 강제로 등 떠미는 것이 아닌, 오로지 비디메르의 명령 하나에 병사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비디메르 또한 백마에서 내려서, 병사들 사이에서 천천히 요새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손수 공성 탑을 밀었고, 화살에 맞아 쓰러진 병사를 부축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이러한 비디메르의 모습에 병사들은 더욱 전의를 불태웠고, 어느새 충차와 공성 탑이 목책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름을 부어라! 적의 남은 병기들까지 다 태워버려!”
“화살 모자라! 더 가져와!”
“그냥 창고에서 다 가져와!”
“나도 화살 떨어졌어!”
“화살은 언제 오는 거야?”
점점 다가오는 적들의 모습에 초조해진 로마군의 손은 점점 바빠졌고, 제대로 된 조준도 못 하고 쏘아대는 통에 대부분의 화살은 고트족 병사들의 방패나 갑옷에 막히기 일쑤였고, 역으로 적들에게서 날아온 화살들이 슬슬 로마군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크악-”
“한 명 맞았다!”
“빨리 치워!”
고트족이 날린 화살들은 대부분 로마군의 방패나 갑옷에 막히기 일쑤였지만, 그 숫자가 숫자인지라 일부는 그대로 갑옷의 빈틈이나, 갑옷을 뚫고서 병사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물론 그렇게 쏘기 위해서 요새에 가까이 다가와야 했던지라, 고트족 궁수들의 피해가 막심했지만, 적들은 그런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분명 곁에서 동료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비명을 질러대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화살을 날리고, 요새를 향해 달려왔다.
“정말···. 정말 악독한 놈들입니다.”
“그래, 그런 점은 인정해야겠군.”
“마리우스 님, 슬슬 중앙 성채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직이다. 적들을 조금 더 깊숙이 끌어들인다.”
“그러다가 제때 물러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군. 그럼 자네가 폴로에 전해주게, 내가 죽는다면 부대를 끌고 동부 능선을 따라서 노리쿰으로 물러난 뒤에 군단과 합류하라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전령이 군례를 올리고는 중앙 성채로 떠났다.
그런 와중에 고트족의 충차가 성문을 두들기고 있었고, 살아남은 소수의 공성 탑이 목책에 닿았으며, 목책 곳곳에 사다리가 걸렸다.
“궁수들 사격준비!”
마리우스의 명령에 모인 몇몇 궁수들이 공성 탑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고, 이내 공성 탑의 문이 열리자 마리우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궁수들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목책으로 뛰어들려던 고트족 여럿이 고슴도치가 되어 목책 바깥으로 굴러떨어졌다.
뒤이어 달려든 고트족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병사들의 창끝이었다.
목책 곳곳에서는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로마군의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트족 병사들이 내는 소리였다.
고트족이 대충 만든 사다리들 대부분은 요새의 높이보다 심각하게 짧은 물건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나마도 얼마안되는 제대로 만들어진 기다란 사다리들도 마리우스의 명령으로 쌓아올린 흙포대보다 낮거나, 로마군의 저항에 밀려나가버렸다.
더군다나 빈약하던 사다리는 병사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전선 곳곳에서 우지끈하고 부러지거나, 휘청거리면서 제대로 세워지지도 않아서 병사들이 세우려고 애를 쓰다가 오히려 피해가 늘어났다.
성문이나 목책을 두들기는 충차들은 더 심각했는데.
충차를 몰던 병사들은 성문 입구까지 충차를 몰고가는데는 성공했지만, 쏟아지는 화살과 돌덩이에 전부 전사해버렸고, 뒤이어 달려온 병사들이 충차에 손을 대려고만 해도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드는통에 충차앞에는 고트족의 시체만이 수북히 쌓여가고 있었다.
“대족장, 아군의 피해가 너무 큽니다!”
“상관없다. 아직 본대가 남았어.”
“대족장!”
“지금 물러나면 바닥에 쓰러진 병사들의 희생이 개죽음이 되버린단 말일세! 그래도 좋은가!”
“대족장, 지금 남은 병사들이 몇이나 될 것 같으십니까, 현실을 보십시오!”
“내 현실은 저 요새너머에 있어.”
“대족장!”
“선봉대란게 원래 그런것이야! 본대가 오기전에 적의 틈을 벌려주면 되는거라고!”
비디메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소리쳤다.
“이제 얼마남지 않았다. 로마놈들의 시체위에서 축제를 벌이자!”
[우오오오-]
비디메르는 앞장서서 사다리를 올랐다.
고트족 병사들도 이를 알아차리고는 비디메르에게 바싹 붙었고, 사다리를 밀어내려던 로마군은 고트족의 집중사격에 벌집이 되거나, 고개조차 못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묵묵히 사다리를 오른 비디메르는 자신을 가로막는 로마 병사에게 도끼를 휘두르면서 목책위로 뛰어올랐고.
결국 목책위에 올라설수 있었다.
긴장한채로 자신을 포위한 로마병사들을 둘러보며, 비디메르는 소리쳤다.
“비디메르! 제일먼저 성벽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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