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7)

어제는 오늘과 같다.

주린 배를 부여잡으며, 적의 동향을 살핀 지 몇 시간째.

적들도 지쳐버렸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재네들 뭐하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쯧···. 이쯤 하면 됐어,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취사병들한테 간단하게 병사들한테 먹일 것 좀 만들고, 점심 좀 풍족하게 준비하라고 전해.”

“적이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것 같은데 말입니까?”

“잠도 안재우고, 밥도 안 먹인 병사들이 퍽 잘 싸우겠네.”

“그건, 그렇긴 합니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취사병들이나 갈궈.”

“예!”

폴로가 기운을 차리면서 목책을 내려갔다.

이윽고,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주둔지 위로 피어올랐다.

****

[대족장, 연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로마놈들이 식사를 준비 중인 모양입니다.]

[그래, 나도 보고 있어.]

비디메르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요새를 노려봤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오늘이야말로 저 요새를 손에 넣고 말겠다고 다짐했건만.

병사들이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에 탈진해버린지라 오늘 하루를 통째로 날리게 생겼다.

하루하루 식량은 줄어만 가는데 성벽을 넘기는커녕, 성벽은 구경도 못 했다.

이게 군대인가?

이게 자신이 믿고 있던 병사들인가?

비디메르는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다.

화를 낼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지금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날뛴다면, 왕이 되기 전에 폐위부터 겪지 않겠는가.

[식사를 준비해라···. 늦었지만, 병사들을 먹이고 쉬게 해.]

[대족장, 그렇다면 오늘 공격은···?]

비디메르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그의 손가락은 맹렬한 빛을 뿜어내는 태양을 향했다.

[저 태양이 없어질 때.]

[대족장, 밤에는 피아식별이 어려운 데다가, 전투를 위해서 횃불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오늘을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낸다면 내일이라고 저 요새를 넘을 수 있겠나?]

[그건, 그렇지만···.]

[적들에게 쉴 시간을 줘서는 안 돼, 아군 병사들을 둘로 나누어 낮과 밤으로 저 요새를 공격해서 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군의 피해가 클 겁니다.]

[살아남는 것도 능력이지.]

비디메르는 조용히 요새를 바라볼 뿐이었다.

******

“다시 한번 말해보게, 뭐가 어쨌다고?”

“...적의 매복으로 대대가 궤멸당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저와 같이 온 이들은 채 열 명이 안 됩니다.”

무키우스는 그대로 목덜미를 잡고 쓰러졌다.

“군단장님!”

재빨리 군영장이 달려와 목덜미를 잡은 채로 쓰러지는 무키우스를 붙잡았고, 다른 대대장들 또한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뭣들 하는가, 당장 군의를 불러!”

“됐네···.”

“군단장님?!”

무키우스는 자신을 붙잡는 군영장의 손길에서 벗어나면서, 긴장한 채로 서 있는 티투스에게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 티투스···. 자네라도 살아와서 다행이네.”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무엇인가, 쓸모없는 아들 녀석의 잘못인 것을.”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루프스님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습니다.”

“피로할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게나. 이보게 군영장.”

“예, 장군.”

“이들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식사를 부탁하네.”

“예.”

군영장의 뒤를 따라서 티투스 일행이 천막을 나가자, 창백해진 얼굴에서 금세 타오를 듯이 붉어진 얼굴이 된 군단장이 책상을 내리쳤다.

“이후의 일을 논하라.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나!”

“......”

“왜 다들 대답이 없는가, 이제 판노니아는 완전히 아국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어!”

천막 안에 모인 수많은 이들은 어느 사람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부관!”

“ᄋ···. 예!”

“지난날. 자네가 판노니아에서 물러나자고 하지 않았나 응?”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해결책도 있겠지? 아니, 있어야 될 거야.”

부관은 순식간에 안색이 시꺼멓게 죽어버렸다.

그때야 나름 머리를 굴려서 낸 의견이었는데, 이런 변수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그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하얗게 비어버렸다.

“부관, 왜 대답이 없나!”

“장군, 진정하시지요.”

“지금 그럴 시간도 아까워! 다들 의견이나 생각 비스무리한거라도 있으면 말해보라 이 말이야!”

“장군, 듣자 하니 아직 판노니아에 부대가 하나 남아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 대대장의 말에 무키우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듣는 말인데?”

“돌아온 이들 중, 루시우스라는 백부장이 알려줬습니다.”

“자세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게.”

무키우스는 머리가 울리는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천막 안에 마련된 자신의 전용 의자에 앉아서 부드러운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에 눈치를 살피던 이들 중 한 명이, 슬그머니 앞으로 나와 말을 이어갔는데.

“듣자 하니, 판노니아에 남은 부대는 대대의 철군을 지원하고자, 후방에 남았다고 합니다.”

“철군하면 한 번에 할 것이지, 왜 부대를 따로 남겨놓는단 말인가?”

“그, 그것은 저도 잘···.”

“루프스···. 그 개자식 어딨어!”

“루, 루프스님은···.”

“님?”

무키우스의 눈이 떠지면서, 그의 부리부리한 눈이 눈앞의 대대장을 바라봤다.

“자네는 내 부하인가, 루프스의 부하인가.”

“자, 장군의 부하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동료를 높이 부르지? 내가 분명히 내 아들이라고는 해도 한 명의 군인으로 대하라고 일러두지 않았는가?”

“죄, 죄송합니다!”

“자네가 올해로 나와 몇 년을 근무했는가.”

“20···. 5년 정도 될 겁니다.”

“그래, 자그마치 25년이야. 그러니 이번 한 번은 그냥 넘어가지···. 말하던 거나 마저 하게.”

무키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다시 눈을 감았고.

그 앞에 서 있던 장교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면서 말을 이었다.

“루프스님은 지난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지금 의무대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다쳐? 얼마나?”

“그것이···.”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정도로 무슨 의무대야! 당장 쫓아내!”

“예, 장군!”

“후방에 남은 녀석들을 구할 방법도 생각해두게!”

“예, 장군!”

“대답만 하지 말고, 당장 나가서 알아보란 말이야!”

무키우스의 호통에 천막 안의 각 대대장과 여러 장교가 우르르 천막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무키우스는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 놓은 탁자를 걷어차면서 소리쳤다.

“부하고, 아들이고 제대로 된 놈들이 단 한 놈도 없어!”

******

온종일 고트족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겨울잠을 준비하는 곰처럼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요새를 공격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고, 오히려 경계를 서는 병사들까지 적어서 얼핏 보면 적이 물러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쯧···. 저놈들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오늘은 공격을 포기한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있나, 자네는 모르겠지만 내가 밖에서 태워버린 고트족 마을만 해도 스무 곳이 넘어.”

“그게, 무슨 상관인지요?”

“생각해보게, 나는 건물이나 밭, 그리고 적들의 식량창고까지 모조리 태워버렸어. 그런데 고트족 놈들은 거의 안 죽였단 말이야. 그럼 무슨 문제가 생기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쯧···. 식량이 모자라지 않겠나 식량이!”

“아···. 그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 먹을 건 그대로인데 먹일 입이 갑자기 늘어난 데다가, 곧 겨울이 다가오는데 한 해 농사까지 망쳐버리지 않았는가.”

“그럼 다른 곳으로 약탈하러 가야지, 왜 이곳을 노리는 겁니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서 뭔가를 노리는 것 같아.”

“그런데 식량이 모자란다면, 단기전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기 고트족들은 왜 이리 느긋한 겁니까.”

“그러니까, 그게 의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

폴로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마리우스는 그 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만을 지을 뿐, 굳이 뭐라고 하진 않았고.

강 건너의 고트족들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슨 계획이 있을 텐데···.”

“날이 점점 추워집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그래, 오늘 저녁은 뭔가?”

“늘 같지요, 밀 빵에 닭고기 스튜라는군요.”

“병사들도 같은 식사인가?”

“밀 빵은 같지만, 병사들은 고기 대신에 사과를 지급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 가서 조리장한테 전하게, 내 식사도 병사들것으로 달라고 말이야.”

폴로는 흠칫 놀라면서 되물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병사들 사기를 유지하는데 이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나, 시킨 대로 하게.”

마리우스의 명령에도 폴로가 머뭇거리자 마리우스가 폴로에게 물었다.

“뭔가, 더 할 말이라도 있나?”

“그···. 혹시···. 제 식사도···?”

“어허, 상관이 하겠다는데 부하가 따라야 함이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 그렇지만 저는 야간근무에 주간근무까지 같이하느라 기운이 없습니다요···.”

마리우스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내 몫까지 자네가 다 먹게.”

“하하하, 역시 이래서 제가 마리우스 님을 존경합니다!”

“그래, 두 번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서 가보게.”

그렇게 즐거운 저녁 시간이 지나갔고.

마리우스는 홀로 지휘소에 남아서, 어제 있었던 전투들에 대해 기록하면서, 오늘 있을 야간근무에서 사용할 암구어를 정하고 있었다.

“로물루스에 레무스? 아니야 이건 너무 흔해···.”

그렇게 오늘 쓸 암구어를 고민하고 있을 때쯤, 마리우스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고, 굳이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지휘소로 들어온 전령이 급하게 말을 꺼냈다.

“백부장님, 적 진지에서 연기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불꽃은 또 뭐고, 연기는 또 무슨 말인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겠나?”

“저, 적진에서···.”

“쯧, 아니네! 내가 직접 나가보지. 오늘 암구어는 목판에 새겨뒀으니 나갈 때 챙겨나가게.”

“예!”

마리우스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지휘소를 나섰다.

지휘소의 문을 여는 순간 보인 것은 강 건너에 보이는 타오르는 불꽃들과 연기 들 뿐이었다.

분명 달이 중천에 뜬 어두운 밤이었으나, 저들이 만들어낸 불꽃으로 대낮만큼이나 환했으며, 또 매캐한 연기가 요새까지 풍길 정도였다.

“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마리우스 님!”

마리우스는 근처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를 붙잡고선 물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했나?!”

“저, 저도 잘···.”

“언제, 저들이 언제부터 저랬나.”

“불꽃이 피어오른 것은 20분도 안될 겁니다.”

“20분? 씨발, 그동안 다들 무엇을 한 거야!”

적들이 뭔가를 준비하는 게 확실해졌다.

마리우스는 당황하면서 적들을 살폈으나.

환하게 빛나고 있는 강 건너에서는 고트족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만이 보일 뿐, 그 이상은 잘 보이질 않았기에 지휘소 인근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주목, 적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당장 폴로를 불러오고 병사들을 깨워서 준비시켜라, 알겠나?”

“예!”

병사들이 불이 켜진 방 안의 바퀴벌레처럼 재빠르게 흩어졌고.

또다시 홀로 남은 마리우스는 곧장 자신의 천막으로 뛰어가 갑옷과 무기 등을 챙겨 지휘소로 향했다.

지휘소에는 피로가 잔뜩 쌓여 보이는 폴로가 마리우스를 반겨주고 있었다.

“후우···. 또 고트족 놈들입니까···.”

“그래, 적들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네.”

“그렇다면 어제와 같이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 자네는 이곳에서 조금 쉬면서 아군을 살피다가, 위험한 곳에 예비대를 보내주게나. 아래쪽은 내가 맡지.”

“알겠습니다···.”

“졸지 말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있게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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