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87)

어제는 오늘과 같다.

임시로 설치한 고트족의 캠프에는 분노한 대족장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로마놈들은 구경도 못 하고 전부 도망치다니, 이게 전사들이 보일 모습인가!]

[하지만 병사들이 너무나도 지친 탓에···.]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 건 자네들이 잘 관리했어야지, 자네들이 위에서 명령만 내리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란 말인가!]

[대족장, 아무래도 우리의 준비가 너무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준비?! 무슨 놈의 준비 말이야! 저놈들은 뭐, 우리가 올 줄 알고 준비했던가!]

비디메르는 변명만을 늘어놓는 전사들에게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분명, 자신은 그들을 믿고서, 병사들을 내어줬건만.

돌아온 것은 차디찬 병사들의 시체뿐이었고, 저 요새 위에는 아직도 로마군의 깃발이 꽂혀있는 게 아닌가?

[대, 대족장 일단은 분노를 가라앉히시지요. 어차피 이번 전투가 첫 전투 아니겠습니까? 아직 기회는 많습니다.]

[마, 맞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아직 이곳에 익숙하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 적들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았으니, 다음에는 저 성벽을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어떻게든, 대족장의 분노를 잠재우려고 애를 썼다.

대족장도 결국에는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기에, 더는 그들을 몰아붙이지 않았다.

[크흠···. 그래? 그럼 한 번만 더 자네들을 믿어보지.]

[반드시 저 성을 대족장의 발밑에 바치겠습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족장!]

비디메르는 천막 안에 마련된 자신의 옥좌에 앉아 다른 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 저 요새를 공략할 방법에 대해 말해봐. 어떻게 하면, 저 쥐새끼 같은 로마군을 몰아낼 수 있지?]

[우선은 오늘의 패배원인부터 분석해보는 것이 맞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생각하는 그 원인이란 건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세 번째 장로께서 공격전에 대족장께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공성 병기가 필요했습니다.]

전사의 말은 목에 박힌 생선 가시처럼 비디메르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지만, 본인은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거기다가 아군은 행군을 마치자마자, 휴식시간이나 준비시간 없이 곧바로 전투에 투입된 지라 아군이 더 빨리 지친 감도 있습니다.]

[크흠···.]

비디메르가 헛기침하자, 열심히 말하던 전사도 영 눈치가 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정도는 대 족장께서도 다 생각하고 계셨겠지요···.]

[그래, 내가 자네들의 통찰력을 한번 시험해 본 셈이지. 크흠...]

[역시 대족장이십니다!]

[대족장 만세!]

옆에 있던 다른 전사가 재빠르게 비디메르를 연호하자, 엉겁결에 다른 이들도 이를 따라 했다.

막사 내에서 연신 비디메르의 이름이 울려 퍼졌고, 다들 살기 위해서 열정적으로 비디메르에 찬사를 보냈다.

이런 모습에 기분이 좋았던 비디메르는 만족한다는 듯한 미소로 화답했는데.

[그래,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신께서 결정하시는 일이 아니던가, 오늘의 패배는 토르께서 우리의 무지함과 나약함을 꼬집으려 하신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야.]

비디메르는 천막 안의 수많은 사람을 둘러보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내일은 저 요새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만 해, 지금 당장 내일 요새를 기어 올라갈 사다리와 장비들을 준비하라고 해!]

[예, 대족장!]

대족장의 명령은 곧 고트족의 암세포처럼 군영 전체로 퍼져나갔다.

[주변의 나무란 나무는 모조리 베서 사다리를 만든다.!]

[장군, 저희는 사다리를 만들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 자식이, 안되는 게 어디 있어! 밟고 올라갈 수 있게만 하라 이 말이야!]

[하, 하지만···.]

[듣기 싫네, 내일 아침까지 사다리와 공성 탑을 만들어!]

대족장의 휘하 전사들은 병사들에게 내일 아침까지 공성 병기를 만들라고 했지만.

평생을 사냥이나 농사를 짓던 병사들이 그런 물건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다리 정도야 병사들의 손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규칙 없이 중구난방이었다.

어떤 것은 너무 길었고.

어떤 것은 너무 짧았으며.

어떤 것은 너무나도 무거웠고.

어떤 것은 사람이 올라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빈약했다.

이뿐이면 다행이겠지만, 정작 요새를 공략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성 탑과 충차는 얼마 없는 목수와 장인들이 모였지만, 마땅한 재료가 없었다.

[주변에 널린 게 나무인데, 아무것이나 쓰면 안 되나?]

[무슨 소리! 단단한 성문을 부수거나, 저놈들의 투석기에도 공성 탑이 멀쩡하려면은 튼튼한 참나무가 필요한 법이야!]

[이 주변에는 괜찮은 게 없는데 어쩌시게요.]

[끄응···. 그렇다고 아무 나무나 썼다가는 문제가 생길 텐데···.]

[어차피 높으신 분들은 잘 모르시지 않습니까, 대충 아무렇게나 만들죠?]

[맞습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 못 만들면, 우리만 죽습니다.]

[끄응···.]

그렇게 얼렁뚱땅 결정된 사안으로 공성 병기가 만들어졌으니, 그 상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퀴는 뻑뻑하여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았고, 충차를 덮은 지붕은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이 바싹 마른 데다가, 공성 탑 또한 시간과 재료의 부족으로 무척이나 조잡했다.

[이걸로 싸울 수나 있을까요···?]

[...어쩌겠나, 우린 최선을 다했네···. 오딘께서도 우리의 노고를 알아주시겠지···.]

[오오···. 토르시여···.]

* * * *

반면에, 로마군은 첫 전투를 무사히 마치고 한껏 사기가 오른 상태였다.

“저 멍청한 놈들이 발버둥 치는 것 봤어?”

“하하하, 저놈들 목책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꽁지 빠지게 도망갔잖습니까 하하.”

“이번에 뽑힌 족장 놈은 적당히 멍청한 게, 아주 마음에 들어! 으하하.”

첫 전투를 무난하게 끝낸 병사들에게 염소들을 잡아, 고기를 먹이니 아주 축제 분위기였다.

병사들이 노는 모습은 좋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 지랄 맞은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매일같이 귀찮게 굴던 행보관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내가 쉬지 말라는 게 아니잖아, 주말이라도 최소한의 군기는 유지하고 쉬라는 거야 어? 담당구역 청소도 좀 하고, 슬리퍼도 정리도 좀 하고, 너희도 잘 알지? 나 지킬 것만 지키면 터치 안 하는 거.’

다시 생각해봐도 주옥같은 명대사였다.

절로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그 효과도 확실했다.

“마리우스 님, 바지에 실례하신 겁니까?”

PTSD에 허우적거리던 나를 건져준 것은 폴로의 허튼소리였다.

“폴로.”

“예.”

“대가리 박아.”

“예?”

“셋 셀 때까지 안박이면, 애들 앞에서 상관 모욕으로 채찍질해주마.”

폴로는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박으면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나는 고작 이런 일로 화를 내는 속 좁은 성격이 아니었다.

“내가 자네를 혼내는 건, 나를 조롱했기 때문은 아니네.”

“예?”

“이제부터 자네가 그 이유를 찾아보게.”

“예!?”

“밤은 길고, 시간은 많지 않은가. 허허허.”

폴로는 울상이 되어 몇 번이고, 사과했지만 조금 전에 말했듯이 나는 놀림당하였다고 부하를 혼내거나 갈구는 나쁜 상관이 아니다.

암, 그렇고말고.

“죄송합니다!”

“폴로, 자네의 잘못한 점을 찾으라니까?”

“으윽···. 마, 마리우스 님을 모욕했습니다!”

“하하하, 이 친구야···. 아니지, 그게 아니야.”

폴로는 이미 땀을 뻘뻘 흘리면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몸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슬슬 이 정도로 하는 게 좋겠군.

“자네가 모르겠다면 친히 알려주지.”

“예!”

“오늘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가 내게 안 올라왔어.”

“예?”

폴로는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건, 전투 끝나고서 바로 보고드렸잖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보고서가 아직 안 왔어.”

“그, 그런···.”

“폴로, 슬슬 일어나지.”

폴로는 숨을 헐떡이면서, 원망스럽다는 듯이 나를 노려봤다.

어허, 상관에게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다니 참으로 로마군의 군기가 개판이구나.

“어허, 폴로 네 놈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미움과 원망이 가득하구나.”

“...아닙니다.”

“본인이 관심법으로 가만 보니, 자네의 머릿속에 온갖 잡념과 번민이 가득해.”

“그건 또 무슨 소리십니까, 관심법은 또 뭐고요.”

“감히 나를 의심하다니, 가만 보니 자네의 잡념과 번민을 다스릴 필요가 있겠어.”

“예?”

폴로는 기겁하면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마 내가 전투에 대한 부담감으로 미쳐버린 건 아닌가 의심하는 듯이 보였다.

괘씸하기는 상관을 의심하다니···.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 위에 오늘 전투 경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오게나.”

“예? 보고서는 또 뭡니까?”

“허허, 모르면 자네의 군 생활이 끝난단 말인가?”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해오게, 자네의 머릿속에 그 번민과 잡념을 없애줄 것이야.”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폴로의 당황하면서도 분노에 차오르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행보관도 이런 생각으로 우릴 갈궜던 건가?

다시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새끼는 그냥 우리를 엿먹이려고 시킨 게 분명했다.

개랑 친구 할 새끼···.

“하하하, 농담해본걸세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나.”

“아···. 농담···. 아, 아하하하···. 그렇군요. 농담! 아하하하.”

“그래-그래 농담이지 하하하”

“하하하···. 저는 진짜인 줄만 알고···.”

폴로가 신나게 웃고 있었고, 나 또한 신나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싹 바꾸며 폴로에게 말했다.

“금일 야간경계는 더 철저히 하도록, 독이 바짝 오른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말이야.”

“하하하···. 예?”

“그럼 근무 수고하게.”

폴로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하루가 끝났다.

****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고트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녀석들은 아침도 먹기 전에 부산히 움직이면서 신경 쓰이게 했다.

나 또한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목책으로 내려오니, 밤새 근무하느라 눈이 판다처럼 까매진 폴로가 경례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하아암···. 그래, 어젯밤에는 별일 없었고?”

“예, 적들이 밤사이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만 빼면, 별일 없었습니다.”

“그래? 인제 보니 어젯밤에는 못 보던 것들이 많이 생겼네?”

“예···. 밤사이에 부지런히 만든 것 같습니다···. 흐아아암···.”

“저 정도 숫자를 보니···. 아마도 병사들을 재우지도 않은 것 같고.”

고트족은 금방이라도 공격하려는 듯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멀리서만 봐도 병사들의 움직임이 아주 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저놈들의 지휘관은 병사들을 재우지도 않고서, 밤새도록 공성 병기를 만든 듯싶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저러는 건가, 분명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단은 병사들 전부 깨우고, 밤새 근무했던 병사들은 잠깐 눈 좀 붙이게 해.”

“예, 마리우스 님. 그러면 저도···.”

“자네는 내 곁을 지켜야지.”

“예? 하지만···.”

“이 사람아, 바늘이 가는데 실이 안 따라오면 쓰겠는가!”

“하, 하지만···.”

“허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자네 곁에 있을 테니!”

폴로는 절망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폴로에게 씨익 웃어주고서는 다시 고트족의 군영 쪽을 바라보니, 이제 슬슬 대열을 갖춘 고트족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쯧, 아침도 못 먹고 이게 무슨 소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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