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늘과 같다.
적을 맞이할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언제 적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다행히도 병사들은 마리우스의 명령을 잘 따라줬다.
요새 외곽에 언덕을 따라 둘린 목책들을 정비하고, 본대가 떠나면서 두고 간 쓰레기나 폐품들로 이곳저곳에 바리케이드와 함정들을 깔아뒀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원치는 않았지만 진지 공사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병사들을 진두지휘했다.
“거기, 흙 주머니 잘 쌓아!”
“마리우스 님 이게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흙무더기가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차라리, 저기 쌓아둔 석재와 목재들을 이용하시지요.”
“어허, 그건 전투용으로 남겨둔 것이니 손대지 말게.”
“전투용 치고는 너무 많은 것 아닙니까?”
“중간중간 목책이 부서지면 보수도 해야지 않겠나.”
“끄응···.”
폴로는 성벽 위에 흙 주머니를 쌓는 것에 불신을 가진 듯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마리우스는 개의치않고, 계속해서 흙주머니를 쌓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래주머니를 쌓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모래를 구하기가 힘들뿐더러 모래들이 통과하지 못할 만큼의 자루를 만드는 게 힘들었다.
벽이 일 센티미터 높아질 때마다. 적의 피가 일 리터는 더 흐르게 되어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삽질하고 있을 때, 경종이 울렸다.
“동쪽 숲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뭐? 숲?”
“멀어서 잘 안 보입니다만, 엄청 많아 보입니다!”
망루에서 경계를 서던 병사가 제법 눈이 좋았는지, 동쪽 숲 너머에서 다가오는 적을 빠르게 찾아낸 듯싶었다.
황급히 성벽으로 다가가서 동쪽 숲을 바라보니, 확실히 숲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새떼가 날아오르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쪽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병사들을 모은 다음에 성문을 잠그고, 전투준비 시켜.”
“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폴로,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 빨리 병사들이나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폴로가 급히 병사들을 모으는 사이에 동쪽 숲에서는 마치 전날 과음한 아버지가 어머니의 매운 손맛을 견디지 못하고 속을 게워내는 것처럼 숲은 병사들을 하나둘씩 뱉어내기 시작했다.
“저, 적 발견!”
“동쪽 숲에서 야만인들 접근중!”
“쯧···.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경계병의 다급한 외침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긋했던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마리우스 또한,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이미 준비를 마친 수십 명의 민병대와 병사들이 자리 잡은 성벽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거기! 놀지만 말고 화살 옮겨!”
“아니, 그거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기름은 나중에 부어도 되니까, 솥부터 데워놓으라고!”
한창 바쁘게 움직이는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숲 쪽을 봤는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예전과 다를 바 없는 고트족 야만인들인데···.
“뭐야, 왜 계속 나와.”
병사들이 끊임없이 숲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리우스나 병사들이나 저게 정확히 몇 명인지는 몰랐지만, 자신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개미굴에서 개미 떼가 튀어나오듯이 숲에서 고트족이 계속해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건드린 게, 그저 야만족 마을 몇 개가 아니라 고트족이라는 거대한 개미굴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시발, 망했네.”
******
[대족장, 로마놈들이 많이 줄어든 것 같습니다.]
[그래?]
전사들을 이끌고서 마을을 떠난 지 며칠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중에서도 가장 머릿속에 강하게 박힌 것은 해볼 만하다는 것이었다.
웃기지 않은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로마군을 두려워하면서 전전긍긍하던 게 우스워질 정도였다.
로마군은 자신을 막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막지 못했다는 게 맞겠지.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세력을 모을 때까지 아무런 간섭조차 없었지···.’
로마가 어떤 놈들인가, 국경을 위협할만한 녀석들이 나타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숴버리는 게 그들 아니었던가?
그들의 손에 박살이 난 부족들만 몇이며, 가족과 친구를 잃고 피눈물을 흘렸던 이들은 또 몇이란 말인가, 그런 로마였고 로마군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뭐란 말인가.
그동안의 걱정이 우스운 고민이었다는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스스로를 가둔 채로 떨고 있는 모습이라니!
[하늘도 우릴 돕는구나.]
[실로 그렇습니다. 대족장!]
[어허, 대족장이라니요. 장로님, 이제는 새로운 고트왕국의 지배자가 되실, 대왕이라고 칭해야 함이 맞지 않습니까? 하하하]
[아,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하]
비디메르는 겉으로는 근엄하게 자리를 지키며 못 들은 척했지만, 내심 누구보다 기뻐했다.
어느 누가 칭찬에 화를 내겠는가.
거기에 수많은 병사와 용맹한 전사들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수족처럼 움직이는 권력의 달콤함은 그를 기쁘게 하기 충분했다.
[대족장, 모든 병사가 준비를 마쳤습니다.]
[대족장,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비디메르는 기쁘다는 듯이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제 저 손바닥만 한 요새만 점령한다면, 자신은 왕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크하하하하하, 그래 좋다! 가서 저 요새를 내게 가져와라!]
[대족장의 명을 따릅니다!]
들판을 가득 메운 그의 군대는 신화 속에서 들어봤던, 그 어떠한 병사들보다 강해 보였고, 다시는 없을 무적의 군대와 같이 느껴졌다.
이제, 자신의 꿈이 이뤄진다고 생각하니 심장은 터질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그 무엇보다도 붉게 달아올랐고.
전에 겪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숨이 격해졌지만, 비디메르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없던 희열감이 온몸을 감쌌다.
[대족장, 그래도 공성 병기는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던 그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한 마디.
[뭐?]
[그···. 맨몸으로 저 요새를 오르기에는 저 벽이 너무 높아 보입니다···.]
비디메르는 불쾌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의 황홀경이 끊겨버린 탓일지도.
[그래, 자네의 의견도 일리는 있네.]
[대족장···!]
[내 용맹한 전사들이 고작, 저런 벽 하나 넘지 못할 거라는 자네의 그 패배자 같은 생각이 우리를 약하게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예? 대족장···?]
비디메르는 도끼를 꺼내 들었다.
평소와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에 비디메르의 곁에 있던 다른 이들이 긴장했다.
[그래, 어떻게 하겠는가. 앞장서서 저 요새를 넘겠나? 아니면 내 도끼에 피를 묻힐 영광을 주지, 선택은 자네 몫이야.]
[대, 대족장 저는 그저···.]
[마, 맞습니다. 대족장. 장로님은 그저 대족장을 향해 충언을···.]
장로를 변호해주던 전사의 머리에 도끼날이 박혔다.
조금 전까지 살아있던 그는 허무하리만큼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라면서 앞으로 꼬꾸라졌다.
비디메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도끼를 뽑아 들더니, 어깨 위에 걸쳤다.
[그래, 자네의 선택은 뭔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 앞에서
장로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내가 앞장서겠다. 모두 나를 따르라!]
달려나가는 장로의 등 뒤에서 비디메르는 다시금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다른 이들 또한 재빨리 장로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고트족이 또다시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
“개미 떼처럼 몰려왔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놈들은 무슨 밥만 먹고 애만 낳는답니까?”
“하하, 내 말이 그 말일세, 아무래도···. 항복 요구는 없는 모양이군.”
“야만인들이 그런 걸 알기나 하겠습니까 하하.”
“나름대로 멋진 대사도 생각해뒀는데···. 아쉽군, 아쉬워~”
“오, 무슨 말을 하시려고 했습니까?”
폴로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봤지만, 웃음만 지을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이제 슬슬 움직이게나.”
“하하하, 전투가 끝나면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
폴로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음에도.
평야를 가득 메우는 적군 앞에서는 저절로 주눅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민병대까지 끌어모은 덕에 오백 명을 조금 넘는 우리 군과 한눈에 보기에도 족히 수천에 가까워 보이는 적군을 앞에 두니 절로 오금이 저렸다.
병사들도 많이 긴장했는지, 몇몇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듯했다.
민병대와 신병들에게 선임병이라고 부를만한 친구들을 붙여놨지만, 영 안심이 안 됐다.
지난 몇 번의 싸움에서는 내 쪽으로 오는 병사들만 막으면 됐었는데.
이제는 모든 방향에서 몰려오는 병사들을 상대하려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폴로, 좀 밀린다 싶으면, 바로 목책에 불을 놓고 물러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래, 한번 믿어보지.”
지더라도 최대한, 적들에게 큰 피해를 줘서 당분간은 움직이지도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긴장된 대치가 이어지더니, 뿔 나팔 소리와 함께 고트족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폴로, 작전대로 해! 작전대로!”
“알겠습니다!”
폴로가 경례를 올리고서는 병사 사백 명을 이끌고 외곽 목책으로 향했고, 나는 중앙 성채에 남아서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고트족을 내려다봤다.
강을 건너온 고트족 병사들의 진형은 많이 어수선해 보였지만, 다들 그런 것은 신경을 안 쓴다는 듯이 천천히 속도를 높이면서 요새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들 손에는 짧은 창이나 검, 그리고 방패가 있을 뿐이었지만.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치 고향을 향해 돌아가는 연어처럼 힘차게 속도를 낼 뿐이었다.
“사격준비, 준비되는 대로 쏴!”
폴로의 외침과 함께 쏟아진 화살 비는 고트족 전사들에게 쏟아졌다.
드문드문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이가 있었지만, 적들의 숫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정도였다.
대다수는 방패로 화살을 막거나, 화살에 맞으면 그 속도만 줄어들었을 뿐 요새를 향해 달려오는 건 똑같았다.
스콜피오와 투석기도 열심히 적들을 향해 투사체를 날렸지만, 새까맣게 몰려오는 적들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조금만 더 가면 목책이다! 다들 힘을 내라!]
고트족들은 어느새 평야 지대를 지나, 언덕기슭까지 닿았다.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일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고, 몇몇 부대는 조그맣게 난 길을 따라서 성문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들이 성문으로 향한다.! 적을 막아라!”
“저, 적의 궁수들입니다!”
“뭐?!”
어느샌가 다가온 고트족의 궁수들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지만, 그 거리가 거리인지라 로마군에게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화살은 성까지 날아오기는 했으나, 성에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그 힘을 잃어서 목책에 맞고 튕겨 나가거나, 병사들의 갑옷도 뚫지 못한 채로 튕겨 나갔다.
그래도 무언가가 날아온다는 두려움 자체는 있었기에, 화살이 날아올 때마다 병사들이 움찔거리면서 화살을 피하는 탓에, 고트족 병사들이 조금 더 수월하게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다들 겁먹지 마! 어차피 저 화살은 여기까지 닿지도 못해!”
“고개 숙이지 말고 일어서라!”
“적들이 올라온다. 통나무를 굴리고 돌을 던져라!”
전투는 점점 치열해져만 갔다.
고트족 병사들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목책에 닿기도 전에 수많은 병사가 쓰러졌다.
거기다가, 목책을 향해 달려가는 병사들도 너무 긴 거리를 뛰어온 탓인지, 대부분의 병사가 탈진상태였다.
반면에 로마군은 성벽 위에서만 전투했기에, 물건을 나르다가 넘어진 병사를 제외하고는 부상자조차 없었고, 오히려 개죽음당하는 적들을 보며 공포심을 느끼는 병사들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흠···. 이번 족장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끈질긴 것인지 모르겠군.”
혼잣말처럼 한 말이었는데, 옆에 있던 병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음? 아, 저기 죽어 나가는 고트족 병사들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 요새가 만만해 보인다고는 해도, 공성 병기 하나 없이 공격하다니···.”
“뭐, 우리 전력을 시험해보려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뭔가 급해 보이는군.”
“그렇군요···.”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긴 하지.”
적이 스스로 죽어주겠다는데 굳이 말릴 이유는 없었다.
다만, 적들이 아군의 화살 개수보다 많아 보인다는 게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적들은 아군이 우수수 죽어 나가자, 슬슬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진격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내 등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맨 앞에서 고트족을 이끌던 이는 그러한 사실도 모르는지 연신 뭐라고 외치면서 성벽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한 놈 남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내버려 둬, 지치면 돌아가겠지. 전장에 널브러진 화살들을 회수하고 다친 이가 없는지 확인해!”
폴로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고, 전장에 홀로 남은 외로운 전사는 고함을 질러가면서 성벽을 기어오르려 했지만, 뭐하나 짚을 것이 없는 성벽을 맨손으로 기어오른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죽어라. 로마놈들!]
“저 녀석이 뭐라고 하는데···.”
“내버려 둬, 저 녀석이 반도 못 기어 올라온다는 것에 금화 한 닢 건다.”
“너 지난번에 가죽끈값 못 내서 가불받았는데, 또 돈 날리려고?”
“야! 그건, 내가 베로니카한테···.”
[로···. 마···. 헥헥···.]
“거기 좀 조용히 해봐요!”
한창 대화를 하던 로마군 하나가 던진 돌에 고트족 장로가 맞으면서, 짧은 전투가 끝이 났다.
수천의 고트족은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무작정 들이댔지만, 로마군의 요새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무수한 사상자를 낳은 채로 후퇴해야만 했다.
그렇게 요새를 둘러싼 첫 번째 공성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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