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늘과 같다.
마리우스는 주둔지를 둘러보면서 한가지 깨달은 게 있었는데.
주둔지가 생각보다 잘 만들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목책에서 근무할 때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중앙에서 내려다보니 목책들이 강을 끼고있는지라, 인근의 강이 해자의 역할을 대신해주었고, 거기에 언덕위에 쌓은 요새이다 보니, 적들은 언덕을 기어올라와야 한다는 점도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점이 야만족들의 욕심을 불러오며, 요새는 늘 침략에 시달려야만 했다.
중앙 성채에서 주변을 살피던 마리우스는 저 멀리서 폴로가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폴로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였고, 마리우스의 이마는 절로 찌푸러졌다.
“뭐야, 보고할 거라도 있어?”
“헉헉···. 마리우스···. 님···. 헉헉···.”
“숨 고르고 똑바로 말해봐, 무슨 일인데?”
“헥헥헥···. 그게 아니라···. 후···. 마리우스 님 인근의 고트족 마을들이 깡그리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우리 병사들이 다 불태웠잖아.”
“그게 아닙니다!”
폴로는 거칠어진 숨을 다시 가다듬으면서 심호흡했고, 이내 쏘아지듯이 말을 뱉었다.
“주변의 친 로마계열의 부족들의 마을도 비워졌습니다!”
“그래? 그건 조금 이상하긴 하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찰병들의 말에 따르면, 무리를 이룬 채로 돌아다니는 고트족 병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뭐?!”
마리우스도 그제서야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챘다.
고트족이 뭉치고 있었다.
주변에 있던 다른 부족들은 그 여파를 피해서 도망갔거나, 녀석들에게 합류한 것으로 보였고 말이다.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 본거지부터 박살 낸다고 돌아다닌 게 괜한 일이 되어버렸다.
오히려 벌집을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화가 난 고트족이 몰려오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은 주둔지는 진즉에 불태우고 본대를 따라서 열심히 행군 중이었겠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아직 판노니아를 벗어나지 못한 본대 탓에 이곳에서 예정에도 없는 공성전을 한 번 더 치르게 생겼다.
“벼, 병사들을 시켜서 도···. 돌이랑 나무 물 같은 거 잔뜩 모아놓으라고 해!”
긴장한 탓인지 저도 모르게 혀가 꼬여버렸지만, 폴로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럼 지금 하는 작업은 어떻게 합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작업은 전부 취소시키고, 전부 중앙 성채로 무기랑 장비들 전부 옮겨!”
“예!”
“아, 목책마다 설치된 스콜피오나 투석기들도 끌고 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전부 부숴버리고.”
마리우스의 생각에는 나무 목책으로 둘려있는 외곽보다. 그래도 나무를 뼈대로 돌과 시멘트를 발라서 만든 중앙 성채는 조금 비좁긴 했으나, 외곽의 목책들보다는 훨씬 단단했고, 웬만한 사람 키의 두 배, 세배는 되는 높이인지라 목책과 비교하면 방어하기 쉬워보였다.
시멘트를 만들 모래가 조금 더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가져왔던 것들은 중앙 성채를 구축하는데 전부 써버렸고, 근처에서 모래를 구할 곳도 없었던지라 아쉬울 뿐이었다.
폴로를 보내고는 마리우스도 그 뒤를 따라서 목책으로 내려가니 병사들이 한창 작업 중이었고, 작업 중인 병사들과 민병대들을 불러모아, 같이 장비들을 옮기기 시작했고, 주둔지 내에 몇 마리 남아있던 돼지들과 염소들까지 끌어모아 중앙 성채로 옮기고 나니 하늘높이 떠 있던 태양은 동산너머로 모습을 감춰버렸고.
그 자리를 은은하게 빛나는 달이 대신했다.
다들 급하게 움직인 탓인지 신병들이나 민병대는 진작에 퍼져버렸고, 선임병들은 그나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이들도 많이 지친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으니, 그 결과는 하늘이 정하는법.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 최대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고, 마리우스는 이미 그 일들을 마쳤다.
* * *
판노니아 인근의 고트족을 이끄는 비디메르에게는 한가지 고민거리가 있다.
그의 휘하에는 주변 부족들을 억지로 끌어모으면서 모은 팔천 명이 조금 넘어가는 병사들과 수만 명에 이르는 부족민들로 생긴 부족의 방향성이었다.
비디메르는 이 군대를 이끌고 풍족한 다키아나 그리스 같은 곳을 약탈하고 싶었지만, 대부분 부족민들은 로마에 대한 복수를 외치면서 판노니아에 있는 로마군을 처리한 뒤에 달마티아로 가자고 했다.
로마군이 아무리 예전과 비교하면, 약해졌다고는 해도 로마는 로마가 아니던가.
자신들의 부족이 인근에서 제일 큰 세력이라고는 해도, 경계하나만 넘어가도 자신들만 한 부족들이 여럿인데, 하물며 로마라니!
[대족장, 이제는 결단을 내릴 시간입니다.]
[부족민들과 전사들이 복수를 원하고 있어요!]
[대족장!]
비디메르는 고민에 잠겼다.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된 다른 부족들을 합병하는 것은 맨땅에서 헤엄치는 것만큼이나 쉬웠지만, 그들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 아닌가, 장로들과 부족민이 다 같이 모여 자신에게 로마를 공격하자고 청하고 있다.
분명 눈앞에 있는 술잔에 술이 아닌 독이 든 것이 뻔했지만, 이걸 마셔야만 했다.
마시지 않는다면 자신의 대족장 자리는 물론, 원래 데리고 있던 부족민들까지 위험했기에 비디메르는 눈물을 머금고 술잔을 들이켰다.
[좋다. 전부 준비해라, 판노니아에 있는 저 작은 요새를 점령하고 우리는 달마티아로 갈 것이다!]
[대족장을 따르겠습니다!]
대족장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고트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주변에 흩어져있던 동족들을 불러 모았으며, 마을의 대장간에서는 풍족한 가을을 만들어줄 농기구가 아닌, 전쟁에 쓰일 무기들과 방패, 갑옷 등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대족장의 천막에서는 연일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가고 있었다.
[우리의 수는 저들의 다섯 배, 아니 열 배는 족히 넘을 텐데 우리가 왜 겁쟁이처럼 수그리고 있어야 합니까, 당장 저 손바닥만 한 요새를 함락시키고 로마를 불태워야 합니다!]
[자네는 지금의 일만 생각하는가, 저 요새를 점령하는데 우리가 입을 손해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우리 전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용감하고, 분노에 차 있습니다. 토르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시고 있잖습니까!]
대족장 비디메르는 그런 장로들과 전사들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면서도, 앞으로의 일을 고민했는데, 자신들이 가진 전력으로는 장기전은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기전으로 가려면은 정착할 땅과 식량이 필요했는데, 지금의 자신들에게는 땅은 있었지만, 식량이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지난번의 습격으로 인근 마을들이 불타버린지라 그곳에 있던 식량들도 전부 불타버렸고, 지금은 비디메르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식량들도 모자라, 지금 전사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인근의 동물들을 사냥했고, 부족의 여인들과 노인들은 들판으로 나가 과일과 먹을 수 있는 풀들을 채집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판노니아를 벗어나지도 못하는 거지 떼가 무슨 달마티아를 약탈하고 로마를 도모한다는 말인가?
머리가 아픈 비디메르는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그만! 앞으로의 일은 대족장인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비디메르의 말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싸우던 장로들과 전사들이 입을 다물었고, 이내 조용해진 천막 안에서 비디메르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저 요새를 점령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울 것이다.]
[국가···?]
[우리 고트족을 위한 새로운 국가 말이다!]
[그게 무슨···.]
[고트족들의 나라 만세!]
천막 안은 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대족장의 건국선언에 장로들은 당황했고, 전사들은 환호했다.
[대, 대족장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비디메르는 당황하는 장로에게 누렇게 변색한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저 로마인들도 처음부터 제국이었겠나? 우리에게도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들과 우리를 따르는 백성이 있지 않은가!]
[맞습니다!]
[고트족만의 나라 만세! 대족장 만세!]
[자, 잠깐만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대족장?]
장로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이가, 황급히 다른 이들을 제지하면서 대족장의 앞에 섰고, 비디메르는 그런 그에게 말을 해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이를 로마인들이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만의 나라를 세운다고 한들 우리는 고작 판노니아도 전부 도모하지 못했는데, 개국을 선언하시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기상조라···.]
[이 겁쟁이 자식! 저 이빨 빠지고 늙은 늑대들이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대족장! 초원에서의 늑대는 하나로도 두렵지만, 그 무리를 만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애초에 자네들이 결정한 일이 아니던가, 이제 우리는 더 멈추어 설 수가 없네. 저 요새를 손에 넣는 것으로 우리 왕국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니!]
비디메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내리쳐 원형 탁자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자네들은 내 등만 바라보면서 따라오면 돼!]
[와아아아아!!!]
[대족장 만세! 고트족의 왕국 만세!]
[허허···.]
[어찌 이런 일이···.]
비디메르는 부족 내의 분위기가 확실하게 자신에게로 기운 것을 느끼고는 다시금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한껏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이제 태양은 고트족을 위해서 뜰 것이고, 달도 고트족을 위해서 뜰 것이야. 무엇이 두려운가?]
‘어차피, 저놈들 중에 내 말을 진심으로 따르는 놈은 없다. 저 요새를 차지하고 살아남은 녀석들을 확실한 내 수족으로 만들어야 해!’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은 나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우리의 적 로마가 쓰러지는 그 날까지 나는 멈춰서지 않을 것이다!]
‘미쳤다고 로마랑 싸우겠어? 적당히 이 인근과 달마티아까지만 세력을 확장해도 충분히 큰 이득이야.’
[이제 쓸데없는 말은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억울하게 죽어 나간 형제, 자매들의 원한을 갚을 것이니!]
‘최대한 털어먹을 수 있을 만큼만 털어먹고 빠진다.’
[나를 따르겠나! 아니면 저 로마놈들의 노예로 죽을 텐가!]
‘빨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빨아먹는다!’
겉과 속이 다른 그라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천막 내의 누구보다도 빛났다.
비록 그것이 태양을 향해 날아오른 이카로스의 날갯짓일지라도.
타오르는 수십 개의 눈동자가 비디메르를 쫓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외쳤다.
비디메르.
왕이 될 자여.
*****
달빛 아래 로마군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는지라, 절그럭거리면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병사들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지만, 대대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완벽한 계획대로라면 적들은 알고도 막지 못하리라.
그것이 로마군이었고.
그들을 이끄는 것이 스키피오나 카이사르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은 안된다고만 했지만, 그렇기에 대대장은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다.
이 작전, 먹힌다.!
“대대장님, 곧 길잡이들의 마을입니다.”
“그래, 적들이 눈치채지는 않았나?”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대대장은 금방이라도 전차를 타고서, 콘스탄티노플을 누비는 영광을 떠올리고 있었지만, 곁에 있었던 루시우스와 티투스는 불안한 듯이 주변을 연신 돌아보며 말했다.
“대대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풀벌레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대대장님, 보통 이렇게 어두운 밤에는 풀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야 정상이지만, 지금은 뭔가···.”
루시우스의 말에 다른 백 부장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소리쳤다.
“대대장님을 지켜라!”
“귀갑진을 펼쳐라, 대대장님을 지켜!”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무가 드리워진 어두운 숲속에서 화살과 창 등이 날아들었다.
“크헉-.”
“아악-!”
“이, 이게 무슨 일인가!”
“함정입니다. 빨리 몸을 피하시지요!”
“하, 함정?!”
대대장의 머리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멈춰버린 듯했다.
함정이라니?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저 야만족들이 어떻게 눈치챘단 말인가?
자신은 개선장군이 되어, 황제 폐하와 시민들에게 영세토록 추앙받아야 하거늘.
함정이라니?!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늪이 대대장을 깊이 끌어당겼고.
그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들었다.
“대대장님,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어서!”
“후, 후퇴는 없다.”
“대대장님?”
대대장은 검을 뽑아 들면서 외쳤다.
“후퇴는 없어, 적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전부 죽여!”
“대대장님!”
“뭣들 하는가, 대대장님을 잡아!”
대대장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검을 뽑아 들고서 진형을 벗어나려 했고, 황급히 루시우스와 다른 백부장이 그를 붙잡으면서 소리쳤다.
“티투스 님! 아무래도 대대장님께서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시는 듯싶습니다!”
“티투스 님, 명령을!”
티투스는 갈등했다.
병사들을 살리고, 자신의 불명예를 뒤집어쓸지.
아니면 명예를 위해 병사들과 동료들을 죽일지.
하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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