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장은 너희에게 실망했다.
전투가 끝나고, 병사들이 전장을 정리하는 동안에 이름 모를 고트족 시체 위에 걸터앉아서 아직 몸 안에 남아있는 전투의 열기를 식히면서 다음 행동을 구상했다.
지금 우리 부대는 내가 구상했던 내용을 대부분 성공리에 끝마쳤고, 계획보다 빠르게 주둔지로 복귀하고 있다.
이대로 주둔지로 복귀한 이후에는 본대가 어디까지 이동했는지를 확인하면서 슬슬 철수준비를 해야 했지만, 고트족이 이렇게나 활발하게 판노니아를 누비는 모습을 보니 철수를 조금 미뤄야 하는지 고민됐다.
이제 어느 정도 정착을 마친 판노니아의 고트족을 혼란에 빠트린다면은 달마티아에서 군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이런 수백의 고트족과 맞닥뜨리니 생각이 복잡해졌다.
“...우선은 주둔지로 돌아가야겠어.”
전장을 정리하던 병사들을 급히 불러모아, 주둔지로 향했다.
고트족이 이렇게 빠르게 피해를 수습하고 병력을 끌어모은 걸 보면, 이들을 지휘하는 지휘관 또한 있을 것이었고, 이들이 주둔지를 들이치거나 우리를 쫓아오기 전에 폴로와 합류해야 했다.
* * *
[대족장, 선발대가 당했소이다.]
[뭐?! 어쩌다가!]
[로마놈들의 함정에 걸렸다는군요.]
[이런 한심한 놈들···. 도대체 뭘 했길래!]
비디메르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화를 냈다.
선발대가 뭐 하는 녀석들인가, 본대 보다 앞장서서 적의 동향을 살핀 후에 본대가 왔을 때 자리를 잡을 장소를 마련하라고 보낸 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하라는 정찰은 뒤로하고 로마놈들에게 된통 당하고 병사들까지 몽땅 잃어버렸으니, 그의 분노는 가히 올림포스산의 끓어오르는 용암과도 같이 터져 나왔고, 이는 당연하게도 병사들을 모두 잃고 돌아온 그의 부하에게로 향했다.
[쯧···. 시킨 일도 하나 못하고, 허튼짓으로 형제들을 죽였으면서.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나.]
부하는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더욱 깊게 박으면서 울부짖었다.
[부디, 부디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그래, 살려줘야지. 지금은 사람 하나도 아쉬운 시점이 아닌가.]
비디메르가 손을 까딱거리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와 부하의 양팔을 단단히 붙잡았고, 부하는 당황하면서 말했다.
[사, 살려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살려준다 했지 자네를 용서한다고는 안 했어.]
비디메르는 자신의 애병인 거대한 양손도끼를 들고선, 그대로 부하의 무릎에 내리쳤다.
고통스러운 비명이 천막을 뒤덮었고, 그 비명은 한동안 끊이지 않고 대지에 울려 퍼졌다.
비디메르는 피가 흐르는 도끼를 든채로 중얼거렸다.
[쯧, 쓸데없는 짓으로 우리가 뭉치고 있다는걸 알려 버렸어.]
* * *
며칠 만에 돌아온 주둔지의 모습은 떠나기 전과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무너져있던 목책들이 조금이나마 멀쩡한 것으로 바뀌어 있다는 점 정도?
“마리우스 님!”
주둔지로 다가가니, 민병대들과 폴로가 우리를 반기면서 문을 열어줬다.
“나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야만족들이 잊고 있던 로마의 두려움을 떠올리게 해줬지.”
“하하하, 그거 듣던 중에 기쁜 소식이군요.”
“여기는 별일 없었나?”
“예,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습니다.”
“그래?”
발끈한 고트족이나 반달족이, 한 번쯤은 주둔지를 들이칠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평화로운 주둔지를 보니, 자신들이 밖에서 제법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티투스 님께서 전령을 보내셨습니다.”
“전령? 무슨 전령.”
“본대는 앞으로 이틀 뒤에 달마티아 방면에 진입 예정이랍니다.”
“이틀? 왜 그렇게 속도가 더딘 거야, 출발한 건 일주일도 넘었잖아!”
“그, 그건 저도 잘···.”
본대에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서 아무리 느긋하게 행군한다고 쳐도, 일주일이면 달마티아의 경계선까지 가는데 충분한 시간이었음에도 본대는 아직도 판노니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본대로 달려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고트족이 준동하면서 의심 가는 움직임을 보이는지라 이대로 철수하기도 어려웠다.
“폴로, 본대에 전령을 보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애들 중에서 잽싼 놈들 서넛 좀 뽑아서 주변 좀 둘러보게 해.”
“예, 알겠습니다.”
“대대장님은 도대체 뭘 하길래···.”
바쁘게 뛰어가는 폴로의 등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 * *
대대는 며칠째 판노니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굉장히 간단했는데, 산을 넘어가려면 길잡이가 필요했는데, 이 길잡이들이 의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몇 번이나 사정하고, 품삯을 올려준다고 해도, 길잡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한번은 분노한 대대장이 직접 검을 뽑아 들고서 그들을 협박했지만, 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오히려 태연하게 자기 목을 담아줄 그릇을 요구하면서 대대장을 질리게 했다.
“도대체,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아봤는가?”
대대장의 질문에 루시우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지난여름에 일어난 산사태로 기존에 다니던 길이 막혀버려, 다른 길로 가야 하는데 그곳에서 사나운 맹수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의뢰를 거절하는 게 말이 되는가! 사람 숫자만 해도 몇 명인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맹수는 핑계인 것 같고 이들이 속한 부족의 부족장이 이를 거부하는 듯싶습니다.”
“후우···.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전임이었던 족장은 친 로마파로 수십 년 전에 부족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으나, 최근에 야만족들이 구역을 침범해오는 통에 땅을 지키기에도 버거웠다 합니다. 그런 일이 몇 번 벌어지다가 결국, 침범해온 야만족에 의해 족장이 살해당하고 반 로마파의 부족이 이곳의 부족까지 흡수해서 눌러앉은 듯합니다.”
“그렇다는 건, 그들은 로마의 적이라는 건가?”
대대장의 말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대, 대대장님 아직 저들을 적이라고 판단하기엔···.”
“루시우스, 우리는 이곳에서 3일이나 시간을 버렸네. 우리는 그동안에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말이야 아닌가?”
“그, 그건 맞습니다만···.”
“그런데 저들은 우리에게 협력을 거부하면서 식량이나 보급품의 값은 쓸데없이 비싸게 부르고 있지 않은가?”
“......”
“그런데도 저들이 로마의 적이 아니라면, 누가 로마의 친구고 적인가?”
“대대장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티투스가 지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대대장을 타이르려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대대장은 그의 말을 잘라냈다.
“아니, 더 이상의 의견은 받지 않겠네. 오늘 밤에 저 부족을 쳐서 족장이란 놈의 머리를 대대기에 매달아서 내일 저 산을 넘을 것이야, 한니발도 했는데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나?”
“대대장님, 길잡이도 없이 산을 넘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차피 산이라고 해봐야, 길이 있을 테고 그 길을 따라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저 산에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길이 없습니다. 대대장님!”
“세상에 그런 곳이 어딨나,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길부터 먼저 만들어지는 것이거늘.”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란 대대장에게는 아주 당연한 말이었지만, 갈리아나 히스파니아와 같은 다른 속주들에서 자란 백부장들에게는 맞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대대장님, 저 산속에 길이 없는 건 정찰병들도 확인한 사실입니다. 길이 없는 곳을 억지로 뚫고 가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얼마 가지도 못하고 병사들이 지칠 겁니다.”
“흠···. 그렇다면 저 비협조적인 부족부터 불태워 버리는 건 어떤가.”
“굳이 저들과 긁어 부스럼을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근처에 사는 이들이라면 우리가 판노니아로 돌아올 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대대장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의자에 있는 팔걸이를 내리쳤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이곳에서 3일이나 보냈는데도 해결책이 안 나오면 어쩌자는 것이야!”
“대대장님, 저들을 잘 달래셔서 길잡이를 고용하시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대대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리는 1대대야! 군단 내에서도 제일 선두에 서야 한단 말일세. 다른 놈들은 진즉에 달마티아에 도착했을 텐데, 우리만 늦는다면 군단장님께서 날 뭐라고 생각하시겠나!”
대대장의 말에 앞에 앉아있던 백 부장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했고, 대대장은 이러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기라도 한 듯이 다음 말로 쐐기를 박아넣었다.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야 한다. 그게 로마의 정신이고 신념이야, 오늘 밤에 저 오만방자한 부족 놈들을 전부 쳐 죽이고 산을 넘겠다.”
“대대장님 그건···!”
“조용! 반론은 듣지 않을 테니 전투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대대장은 더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회의장을 떠나버렸고, 남은 백 부장들은 황당함과 분노를 느끼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닙니까, 이럴 거면 회의는 왜 하는 겁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쯧···. 아무리 아버지가 원로원의 높으신 분이라고는 해도, 군대에서는 군대의 규율이라는 게 있는 것인데···.”
“그나저나, 애꿎은 부족을 건드리는 게 걱정입니다. 물론 저도 화나기야 하지만, 지금 우리에 대한 평판이 극히 나쁜 이 시점에서 저들을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산을 넘어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거기에 뭐가 있을 줄 알고요?”
“뭐가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뻔한 것 아닙니까, 토이부르크에서 있었던 일들 기억하시겠지요?”
토이부르크라는 말에 다른 백 부장들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그 중 한 명이 말까지 더듬어가면서 물었다.
“토, 토이부르크라면은···.”
“예, 바루스가 세 개의 군단이 사라진 곳 말입니다.”
“허허, 그렇다는 말은 저 산 위에 야만족들이 매복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애초에 우리는 이 길이 초행 아닙니까.”
백 부장들의 얼굴은 시꺼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고, 티투스 또한 고민이 많았는지 턱을 괸 채로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었다.
“티투스 님, 우리 중에 제일 오래 복무하셨고, 경험도 많으시니 대대장님을 설득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루시우스의 말에 티투스는 조금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대대장님이 내 말을 끊는 것을 보지 못했나, 이미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리신 거야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다네.”
“하아···. 그럼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후방에 있는 마리우스라도 있었다면 조금 달랐겠지만···.”
티투스의 말에 다른 백 부장이 딴지를 걸어왔다.
“마리우스? 그 애송이 놈이 뭘 할 수 있다고 그러십니까.”
“애송이라니, 그도 자네와 같은 백 부장이라네.”
“허···. 백 부장이라고 다 같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경력도 없는 녀석이 작은 전공과 얄팍한 정치질로 백부장을 따냈으면 조용히라도 지낼 것이지 쯧···.”
가만히 듣고 있던 루시우스는 마리우스를 욕하는 백 부장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어허! 마리우스가 군 경력이 짧은 것은 사실이나,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또 누구보다 많은 전공을 세우지 않았나! 그가 해치운 고트족 족장만 해도 셋이고, 지금도 후방에 남아 우리를 돕고 있거늘, 어찌 동료를 모함하는 말인가!”
“그, 그것은···.”
“듣기 싫네! 자네가 마리우스를 탐탁지 않게 보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우리의 동료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나, 그리고 지난 전투에서도 마리우스가 동문에서 버텨주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몇이나 살아남았겠나?”
루시우스의 열변에 다른 백 부장들이 숙연해졌고, 그런 루시우스가 조금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티투스가 일어나 루시우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 정도만 하게나, 저 친구도 잘 알아들었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리고 티투스는 다른 백 부장들을 둘러보면서 나지막이 말하길.
“대대장님을 설득하는 것은 내가 잘 말해볼 터이니, 자네들은 나가서 병사들을 다독이면서 준비하게나.”
“예!”
티투스는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백 부장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후···. 이놈의 군대는 시간이 지나도 똑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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