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87)

한군두

인간이 체력적인 한계에 도달하면, 돌연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몸이 날아갈 것 같은 러너스 하이에 도달한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현상을 겪으니, 머리의 어딘가가 망가지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몸속의 엔돌핀이 미친 듯이 분비되기라도 하는지, 수백명의 적은 앞에 두고서도 온몸에 활력이 돌았고, 적을 베어넘길 때마다 즐거움과 희열이 느껴졌다.

인생에 다시없을 즐거움과 새롭게 차오르는 활력속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으니, 쓰러지는 고트족 전사들 사이로 새파랗게 질려있는 모습의 족장이 눈에 들어왔다.

단단히 무장한 병사들 사이에 숨어있었지만, 어차피 칼맞으면 뜨거운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건 똑같을터, 망설임없이 어린 족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자신들의 족장을 지키기 위해 내 앞을 가로막던 고트족 전사들은 하나같이 내 검이나 방패를 맞고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졌고, 한명한명 쓰러질때마다 어린 족장과의 거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온몸에 적의 피를 뒤집어쓰고 다가오는 내 모습에 어린 족장녀석은 잔뜩 겁을먹은채로 소리치고 있었다.

[막아! 저 미친놈을 막아!]

이제, 이제 딱 한 걸음만 더 다가간다면 녀석을 처리하고 내 이름 앞에 붙은 지긋지긋한 임시딱지를 떼고서, 정식으로 백인 대장이 될 기회가 눈앞에 있었다.

이미 고트족 한가운데 들어와 버려 부하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뭐 어떤가. 어차피 적의 수괴만 베어낸다면 알아서 도망칠 야만족들이거늘.

어린 족장을 지키려는 듯이 고트족 전사들은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두려웠던 건지 차마 달려들지는 못했다,

그런 그들을 비웃으면서 다시 덤벼들려는 그때, 뒤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뒤로 끌려가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검을 휘두르면서 돌아본 곳에 서 있던 이들은 아군이었다.

"백부장님 죽고 싶으셔서 환장하셨습니까?!"

"죽으려면 혼자 뒤지십시오!"

"백부장님 챙겼다. 뒤로 물러나!"

"뭐야, 이거 안 놓냐?!"

"마리우스 님 아무리 전공이 좋으셔도, 살아있어야 전공도 쌓는 거 아닙니까요!"

"딱, 한 놈만 더 잡으면 된다고.!"

애타게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황급히 나를 방패로 가리면서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내가 기를 쓰고 뚫어놓은 길은 슬금슬금 고트족 전사들이 다시 메우면서 말이다.

"저 족장 새끼만 잡으면, 우리가 이긴다고.!"

"아이고, 백 부장님 지금 이기는 게 중요합니까. 다 뒤지게 생겼는데."

"이거 놔, 안 놔?!"

아군에게 끌려가면서 발버둥 쳐봤지만, 개인이 수십 명이 당기는 힘을 이길 수가 없었고, 땅바닥에서 먼지 구덩이 위를 지나며 뒤로 끌려 나왔다.

그 탓에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아니면 러너스 하이가 끝나버린 것인지는 몰라도 가벼웠던 몸은, 이전보다 더 무거웠고, 손목이나 어깨는 시큰거리는 것이 검을 들기도 힘이 들었다.

"씨발···. 마지막 기회였는데."

"오, 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를 들어보니, 고트족 전사들이 자신들의 진형에 생긴 공백을 메우면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거기다가 우리에게 위협을 주려는 듯이 방패를 자신들의 무기로 두들기면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압도적인 수적 차이에, 마지막으로 생긴 기회마저 날아가 버리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군대에서 아프기만 해도 서럽고, 이역만리 타국에서 혼자 아플 땐 더 서럽다.

그런데 이역만리 타국보다도 먼 수천 년 전 로마에서 그것도 전쟁터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서러움과 동시에 억울함과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시발 내가 왜?’

남들보다 열심히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들만큼이라도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억울함이 복받쳐 나를 일어서게 했다.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니, 주변의 병사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초조함이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버리거나 도망가지도 않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내가 쓰러져서야 하겠나?

심호흡하면서 당장 쉬게 해달라고 고통을 호소하는 몸뚱이를 일깨웠다.

지금은 싸워야 할 때라고.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자세를 낮춘 채로 왼손에 쥔 방패를 단단하게 움켜쥐고는 검을 쥔 오른손을 들며 소리쳤다.

“옆 사람과 대열을 맞춰라, 적이 오고 있다!”

“마리우스 님, 이만하면 됐습니다. 후퇴하시죠!”

“전투준비!”

“아이- 씻팔!”

병사들은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험한 욕들로 투덜거리면서도 진형을 갖췄다.

나는 그 대열의 첫 번째 줄에서 적을 기다리면서 소리쳤다.

“여기서 다 죽기 전까지는 놈들을 보내면 안 된다.!”

그렇게 모두 쌍욕을 퍼부으면서 전투를 준비할 때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갑옷과 무기가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토록 기대하던 지원군이 오고 있었다.

"살았다!"

"티투스 님이다!"

병사들은 지원군의 모습에 다시 사기가 살아났고, 나 또한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마음이었으나, 애써 기쁜 마음을 억누르면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좌우로 밀착! 기병대가 지나가게 길을 터줘라!"

"좌우로 밀착!"

"너는 밥 먹는 손이 왼손이냐? 반대편으로 가!"

모세는 홍해를 갈랐지만, 대대의 최선임이자 군단의 최선임 백부장인 티투스는 병사들이 갈랐다. 병사들이 자리를 비켜주며 열린 길을 따라서,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적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고트족 전사들이 몸으로 막으려 했지만, 아무리 냉철한 이성이라도 눈앞에서 달려오는 수십, 수백 킬로짜리 기병들을 맨정신으로 막아서기는 불가능했고, 실 끊어진 연처럼 몸이 이리저리 튕겨 나가면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뒤이어 달려온 보병들 또한 창을 던지고는 검을 뽑아 들고 기병대가 뚫어놓은 거대한 구멍 속으로 뛰어들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껏 기세가 오른 내 휘하 병사들도 합세해 적에게 달려들었고, 나는 제일 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티투스와 반달족 기병대가 양 떼에 난입한 사자처럼 내가 뚫어놓은 얄팍한 길을 따라서 고트족 진형에 난입하니, 고트족 전사들은 겁먹은 양 떼처럼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말에 치이고, 창에 몸이 꿰뚫리는 등 완전히 부대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기병대만 해도 정신이 없는데, 그 뒤를 밀고 들어온 1대대 병사들과 내 병사들이 쓰러진 고트족 전사들과 허둥지둥 도망가는 병사들의 등 뒤를 공격하니,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고트족 전사들은 허둥지둥 목책을 내려가 도망갔다.

"밀어붙여!"

"전부 떨어트려!"

고트족들은 더는 전사라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각자 제 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도망치고 있었고, 곳곳에서 전투가 아닌 학살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피로와 분노로 붉게 물든 눈을 부릅뜨면서, 어린 족장을 찾아 나섰다.

지금이야 고트족 녀석들이 도망가는 중이었지만, 족장이 살아있다면 다시 세력을 규합해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트족을 베어 넘기면서 족장을 찾으니, 다리에 다트가 꽂힌 채로 곁을 지키는 병사들도 없이 힘겹게 도망가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찾았다.”

재빠르게 내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칼로 베어버리거나, 방패로 쳐내면서 녀석에게 다가가니 그놈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 그놈이다! 아무도 없느냐?!]

녀석이 어린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제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 눈앞에서 겁에 질려있으니,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양심이 찔리면서 머뭇거리게 됐고, 바닥에서 벌벌 떨던 어린 족장은 자신의 다리에 꽂힌 다트를 뽑아서 그대로 내게 휘둘렀다.

녀석의 발버둥에 내 몸은 그동안 배웠던 대로 바로 반응하며, 녀석의 팔을 잘라내면서 바로 심장에 검을 박아넣었고, 손끝으로 전해지던 고동은 이내 멈췄다.

사기가 바닥을 친 고트족 전사들이 등을 돌리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두 명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수십, 수백의 병사들이 도망가면서 치열했던 전투가 막을 내렸다.

동문에서 족장이 전사하자, 다른 방향을 공격하던 고트족들 또한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전투가 끝난 그 날 밤, 전장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나와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고, 뒷수습은 티투스가 데려온 병사들이 대신에 했다.

이번 전투의 최고 격전지였던 동문에서는 추가로 30명 정도의 지원을 받아, 총 90명이 조금 넘는 인원들이 전장을 정리했지만, 병사들은 해가 뜰 때까지 시체를 전부 치우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이를 둘러보던 티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독하군."

곁에 있던 옵티오(오늘날 선임부사관쯤)가 대답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가뜩이나 병사들이 적은데, 이번 전투로 너무 많이 상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불카누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다네, 대부분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변명일 뿐이야···."

"그래도 마리우스 백 부장님이 제법 잘 버텨주지 않으셨습니까."

티투스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래, 입대한 지는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괜찮은 친구더군. 그 멍청한 대대장이 어떻게 저런 인물을 알아봤는지 모를 정도였어."

"하하, 사실 그것도 사연이 조금 있습니다. 지지난 전투에서 대대장님의 잘못된 판단으로 백인대하나가 통째로 전멸한 건이 있지 않습니까?"

"그랬지, 난 잠시 군단장님을 뵈러 다녀온지라 잘은 모르네만."

"그때, 살아남은 인원이 서너 명가량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마리우스 님입니다. 듣기로는 기수로서 본인 백인대 깃발을 창처럼 휘두르면서 족장의 머리를 깨부쉈다는군요."

"뭐? 하하하, 그런 미친놈을 보았나."

"대대장님께서도 피떡이 된채로 너덜너덜 거리는 깃발을 보고 크게 노하셨지만, 자기 책임을 덮으시고 하셔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그것참 가관이구먼."

티투스는 한번 웃음이 터진 뒤로는 끊임없이 웃어댔고, 그의 웃음소리는 주둔지 곳곳에 울려 퍼졌다.

* * *

제법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아침 해가 뜬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지쳐 쓰러진 병사들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투 이후에 야간 경계까지 맡았던 병사들은 죽은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로 잠에 빠져든 상황에서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뜨니, 그제야 막혀있던 둑이 터져나가듯이 고통이 밀려들어 왔다.

"끄으응······."

"아, 일어나셨군요!"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니 편한 차림을 한 의무관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딥니까?"

"아, 의무대요. 안심하세요. 상처가 제법 많은지라 지혈제를 좀 썼고, 상처 치료에 특효인 허브를 붙여뒀으니 이틀 정도 푹 쉬시면 다 나으실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당분간은 근무나 작업도 없을 테니, 이 틈에 편히 쉬시죠."

"끄응···. 전투는 어떻게 됐습니까?"

"적들은 물러났고 로마는 또다시 승리했지요."

"그렇군요···."

한창 의무관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옆 침상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일어나셨군요.”

"의, 의무관님 아래쪽에 감각이 없는데 무슨 일입니까?"

"어···. 음···. 화살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쳐 갔다네, 쉽게 말해서···. 자네는 앞으로 성···. 관계를 할 수 없다네, 아이를 가질 수 없단 말이지."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자자,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으니 진정하게나."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미친 듯이 몸부림치던 병사를 막는다고 의무관과 병사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내가 멀쩡히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내가...고...!”

옆 침상에서 슬프게 울려퍼지는 울부짖음에 굉장히 슬픈 상황이었음에도, 웃음이 터져나올뻔 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그 고통은 내고통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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