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군두
고트족이 주둔지 앞에서 모여든 지도 어언 일주일이 흘렀지만, 고트족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론 그 기간 내내 야간근무는 빡빡하여졌고, 낮 근무 또한 빡빡하게 굴러가는지라 온갖 작업은 더 적고 지친 병사들과 내가 도맡아 해야 했고 말이다.
피를 말린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병사들은 나날이 거칠어져만 갔고, 주둔지 내에서 채찍질 소리가 끊기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적을 앞에 두고 채찍질이라니, 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대대장님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면서 하루하루가 흘렀다.
"루시우스님 저 녀석들은 언제쯤 물러나겠습니까?"
"글쎄, 아예 천막을 깔고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고 야지에서 노숙하면서 버티는 걸 보니 밥 동냥 다니는 거지 떼는 아닌듯싶으이···."
루시우스 백부장 표정은 심히 좋지 못했다.
평소 유순하면서도 사람 좋은 얼굴 덕에 병사들과 잘 어울리던 그였지만, 지금은 병사들을 훈련한다면서 온갖 작업과 근무에 찌든 병사들을 굴려대는 통에 주둔지 내의 평이 극히 나빠졌다.
그래도 그 덕분에 진형이란 걸 만들 수 있는 병사들이 되었지만, 그 덕분에 병사들이 완전히 퍼져버렸다.
이대로 저 녀석들이 몰려든다면 검을 들 수는 있을지, 활은 당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요 며칠간 병사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당분간은 훈련과 근무를 조금 줄이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내가 쉽사리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군."
"대대장님께 잘 말씀 좀 올려주시지요."
"그 꼬장꼬장한 양반이 말을 듣기라도 하겠나? 크흠···. 일단 말은 해보겠네만 너무 기대하진 말게."
"그리고 그 지랄 맞은 채찍질도 그만해달라고 전해주시지요, 적을 앞에 두고 병동이 미어터지려고 합니다."
"알겠네, 온 김에 나 대신 근무 좀 서주지 않겠나? 요 며칠간 눈도 못 붙였더니 슬슬 피곤하군, 젊었을 적엔 일주일을 꼬박 새워도 괜찮았는데 말이야."
나도 어젯밤 목책 보수작업과 오늘 아침 울타리 보수작업으로 몹시 피곤했지만 루시우스의 몰골이 영 아니었던지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푹 쉬고 오십시오, 제가 있는 한 저들은 이 울타리를 넘지 못할 겁니다."
"허허, 사람 참···. 뭐 그리 비장한가 하하···. 그럼 자네만 믿고 자러 가겠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루시우스가 목책을 내려갔고, 그를 대신해서 자리를 지켰다.
근무 중에야 몸을 움직이는 일은 적어서 힘들지는 않았지만, 온종일 시끄럽게 떠들면서 지랄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정신적으로 피곤해졌다.
그뿐인가, 가끔 대열을 갖추고서 금방이라도 공격할듯한 모습을 보일 때는 경종을 울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쌓여만 갔다.
다행히 내가 대타로 근무하는 지금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조용해져서 근무는 편했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너무 조용한 것이 오히려 신경 쓰였다.
병사들은 저 새끼들도 드디어 지쳤거니 하고는 저마다 장비를 대충 걸쳐놓고는 낮잠 자기 일쑤였으며, 궁수들은 화살이 무겁다며, 망루에 들고 올라가지도 않았다.
이런 이들을 보고 어느 누가 위대했던 군단병들을 떠올리겠는가.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들이 지쳤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입을 꾹 다물고는 붉게 물든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동산 위에서 온 세상을 밝게 비춰주던 미트라의 화신이 점점 사그라지고, 진득한 어둠이 찾아오는 늦저녁.
오전 근무가 끝나가는 시점이라 그런지, 근무 내내 늘어지게 잠을 자던 병사들도 하나둘씩 일어나고 있었고, 주둔지 내에서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듯 맛있는 냄새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한 시간 정도만 있으면 부드럽고 따뜻한 침대에서 쉴 생각을 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건너편의 고트족들도 저녁을 준비하는지 부산한 모습이었고, 숲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보아하니, 잠시간은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였다.
이참에 눈이나 잠깐 붙여둘까 생각하면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니, 어느샌가 잠이 깬 병사들이 경직된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눈을 붙인다면 근무 중에 낮잠이나 자는 새끼로 놀려댈 게 분명했기에 한 시간 뒤의 달콤한 취침을 생각하면서 참아냈다.
"흐아암···."
"많이 졸리신 모양입니다."
"그래, 다른 놈들 다 자빠져 잘 때 혼자 눈 부릅뜨고 있어서 그런지 더 졸리군."
"그, 그래도 다른 인원들이 기력을 되찾았으니 좋은 일 아닙니까."
"내가 근무 선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다른 분들이었으면 진즉에 근무 태만으로 전원 채찍질이니까."
"아이고···. 하하하, 저희가 이래서 마리우스 님을 제일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요."
"어허, 왜 이러시나 꿀빨이들?"
"꿀을 빨아먹는 자라니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감이 좋군요, 마리우스 꿀을 빨아먹는 자!"
이 새끼가 나를 엿 먹이는 건가 싶었지만, 진지하게 나를 칭찬하려고 저러는걸 보니 화도 안 났다.
"듣기 좀 거북하니 그러지 말게."
"하하하, 모름지기 백인 대장쯤 되셨으니 별명 하나쯤은 가지시는 게 좋지 않습······."
"뭐야, 왜 말을 하라 말······."
병사가 바라본 방향에서는 고트족 전사들이 횃불을 밝히면서 천천히 주둔지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가 막 떨어지고 달이 뜨기 전이라 어둑어둑해진 틈을 노린 고트족의 기습이었고, 병사들 또한 비몽사몽 한 상태여서 그런지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들 정신 차려! 적이 오고 있다. 경종을 울리고 동료들을 깨워라, 전원 전투준비!"
"저, 전투준비!"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면서 전투를 준비했다.
아직 졸고 있는 동료들을 깨웠고,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무기고에서 화살과 장비들을 꺼내오고 있었다.
주둔지가 한창 소란스러워졌고, 곳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오더니 방금 잠에서 깬듯한 모습으로 루시우스가 목책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으음... 그래, 무슨일인가 마리우스?”
“저 강너머 고트족이 움직였습니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이 요새를 공격하려는 듯 싶습니다.”
“쯧···. 예의라는 걸 모르는 야만족들이군.”
“그렇습니다.”
“그럼 혼내줘야지.”
루시우스는 대충 걸치고 있던, 갑옷을 점검하면서 입을 열었다.
“마리우스, 미안하지만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말씀하십시오.”
“자네 병사들을 이끌고 동문을 맡아주게, 동쪽벽은 내가 책임지지.”
“예? 제 부대는 원래 영내대기 아니었습니까?”
“자네도 둘러보면 알겠지만, 이들만으로 저놈들을 막아낼수 있겠나?”
루시우스는 담담히 말했지만, 나는 그 말속에 담긴 한탄이 느껴졌다.
숙련병이나 정예병과는 거리가 먼 신병들 투성이인 이 부대에서, 적보다 숫자까지 적으니 전투가 어려울 것은 불보듯이 뻔해 보였다.
그렇다고 내 부대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건 아니었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던가.
“예, 제가 동문을 맡겠습니다.”
급히 병사를 보내서 전투준비중인 부대를 불러오게 한뒤에 목책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전투를 준비했다. 신병들이라 그런지 다들 처음으로 겪은 실전에 몸이 많이 굳어있었기에, 그들을 채근하면서 바쁘게 전투를 준비했다.
목책 곳곳에 있는 스콜피오를 장전하는 것으로 병사들이 전투준비를 마쳤을 때쯤 하얀 백마를 탄 대대장이 대대 선임 백부장인 티투스와 함께 동문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마리우스 무슨 소동인가."
대대장이 한번 설명을 해보라는 듯이 턱을 추켜세우는 모습이 심히 짜증 났지만, 뭐 어쩌겠는가? 계급이 깡패인 것을···.
속으로 정신머리 없는 대대장을 욕하면서 입을 열려 할 때, 루시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설명하겠...”
“루시우스, 난 자네에게 말한게 아닐세. 자네는 왜 여기있는가?”
“오늘 동쪽목책을 담당하는 부대가 루시우스의 부대입니다.”
“크흠...”
대대장은 티투스의 속삭임에 뻘쭘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슬그머니 루시우스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고트족이 강을 넘어서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그 외에는?"
"잘 못 들었습니다?"
"마리우스 그 외에 다른 징후는 없었냐는 말이다."
대대장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대대장님 징후는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적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내 눈에는 그저 로마인이 되고 싶어 하는 백성들만이 보이는군."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칼 들고 백성이 되고자 찾아오는 이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선임 백 부장님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자 뒤에서 눈치를 보던 티투스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대장님, 대대장님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며칠간 저들의 행적으로 미루어보아서는 아무래도 이 주둔지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함인 것 같습니다."
"흠···. 그럴 수도 있겠군."
"적이 강을 다 건넜습니다!"
때마침 밖에서 들려온 병사의 목소리가 대대장을 자극했는지, 대대장이 고민에 찬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들이 진정으로 로마인이 되려고 온 게 아닐까?"
"대대장님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라 결단하실 때입니다."
"흠···. 마리우스 적의 수는 얼마인가?"
"경보병으로 3천 ~ 4천 정도 되어 보입니다."
"아군은?"
이 새끼는 도대체 아는 게 뭘까 싶었다.
아군 총원도 파악 못 하는 새끼가 대대장이라니, 임시라고는 해도 백인대장 직급을 5개월짜리에 턱 하니 내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487인입니다."
"음? 언제 그렇게 줄어든 건가."
"...지난 전투에서 희생이 컸잖습니까."
"아."
뭐가 아. 라는건지 모르겠지만 대충 이해는 한듯싶었다.
아무리 못난 새끼여도 대대장이었고, 이 주둔지의 최고 통수권자였기에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음···. 그래, 그렇다면 이제 전투가 벌어지겠군."
"대대장님 동문은 전투준비가 끝났습니다. 다른 곳들도 전투준비가 끝났을 테니 예비군과 함께 중앙을 지켜주시지요."
한시라도 빨리 눈앞에서 이 새끼를 치워버리려고 말하니, 대대장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다시 무게를 잡았다.
"흠흠···. 확실히 자네 말이 옳다고 생각되는군, 좋네! 제 1 백인대를 예비대로 편성하겠네, 티투스?"
"예, 대대장님"
"나와 같이가세."
"예."
티투스님은 내 어깨를 두들겨 주고서는 대대장님과 함께 자리를 떴다.
물끄러미 이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대대장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너나 할것없이 불만을 터뜨렸다.
“지원병을 보내줘도 모자랄판에, 정예병을 예비대로 돌리시다니.”
루시우스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위기상황에서 적절할 때 아군을 구원하시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 중앙요새에서 벌벌떨고 있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60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답을 구하려 했지만, 내가 뭘 알고있을리가 있나, 난 눈앞의 적을 베는일만 잘할뿐이지 지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배웠던 대로만 해라. 적이 기어올라오면 떨어트리고, 궁수들은 적을 맞추는것에만 집중해. 어차피 마구 쏴도 한놈은 맞을거다."
"마리우스님 적이 너무 많습니다요."
"반대로 말하자면 전공을 세우기도 딱 좋은 환경이 아닌가? 나도 실력 하나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왔다. 이제 내 이름앞에 달린 임시딱지를 뗄 날이기도 하지."
병사들을 돌아보니 하나같이 초조한 모습들이었다.
이제 막 전입온 신병들 중에서는 울먹거리는 이도 있을 정도였으니, 병사들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겁먹지 마라, 우리는 따뜻한 침상에서 따뜻한 식사를 하면서 지내왔고, 적들은 추운 야지에서 비바람을 맞아가며 날음식만을 먹었다. 그런 비루한 자들조차 못이긴단 말인가?"
"아닙니다!"
"그래. 로마의 아들들아, 미트라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ROME INVICTA!"
하나되어 외치는 구호 속에서 병사들은 잠시 공포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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