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밤도둑
가을이 됐다.
메마른 먼지 돌풍이 휩쓸던 광장에 가을바람이 불었다. 더위가 물러나고 날이 선선해지자 여름 내내 포겔바이데와 벨데케 두 집안의 분란으로 뒤끓었던 도시에 일시적 평온이 찾아왔다. 말썽의 근원인 두 집안도 폭풍 전의 고요와 같은 휴전기에 접어든 듯이 보였다.
분수대가 있는 중앙 광장은 가을이 되자 더욱 북적였다. 봄에 파종해 수확한 작물을 영주의 성으로 실어 나르는 마차와 상인의 짐 마차가 긴 행렬을 이루며 끝없이 오갔다.
아이들은 구석에서 여느 때처럼 죽은 거위를 두들겨 패며 놀았고, 울에서 탈출한 흑 돼지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광장과 골목 곳곳을 쏘다녔다.
다가올 월동 준비로 도시 전체가 분주한 이즈음, 도시의 재력가와 호사가는 아침마다 시문 밖으로 특별 정찰대를 보냈다.
정찰대란 집집의 양을 이끌고 시문 밖에 있는 목초지로 나가는 양치기였다. 그들은 목초지로 나가면 제일 먼저 인근에 있는 산과 언덕에 교대로 올라가서 종일 남쪽 지평선을 살폈다. 그리고 날이 저물 무렵에 귀가해 자기들의 고용주에게 그날의 경과를 보고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포겔바이데가 진군한다는 소문 이후로 한바탕 전쟁을 각오하던 시민들은 이즈음 각자의 일상에 쫓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제나저제나 정찰대로부터 희소식을 고대하던 도시의 재력가도 소문의 진위에 살짝 의심을 품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이날 정오에 광장 주변의 상인과 행인은 전에 없던 진풍경을 목격했다. 그 주인공은 뜻밖에도 젊은 포겔바이데와 젊은 기사였는데, 칼부림 없이는 만날 리 없는 그들이 동일 동시에 광장에 등장한 것이다.
먼저 등장한 인물은 벨데케 가의 젊은 기사였다.
그는 늙은 포겔바이데가 진군한다는 소문 이후로 집안에서만 두문불출했다. 수목원 근처에서 그를 봤다는 이도 있었지만 공적인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시민들은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혀를 차고 성호를 그었다. 비록 그 거동은 전과 다름없이 기품이 있고 우아하며 당당했지만, 가문의 존속이냐, 자존심과 명예의 사수냐, 하는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한 젊은 기사의 낯빛이 예상했던 대로 어둡고 무척 초췌했다. 아름답던 황금빛 머리칼과 싱싱했던 뺨은 윤기를 잃고, 움푹 파인 눈가에는 말 못 할 고뇌를 반영하듯이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난여름 무도회에서의 찬란했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뒤이어 등장한 인물은 젊은 포겔바이데였다.
그는 앞서 등장한 기사와는 대조적으로 무척 발랄하고 씩씩하게 두 팔을 척척 휘두르며 무대에 등장했다. 낯바닥에는 싱글벙글한 미소가 폈을 뿐 아니라, 유령처럼 허여멀겠던 낯가죽에도 제법 윤기가 자르르 흐르기까지 했다.
그 꼴을 보자마자 몇몇 선량한 시민들로부터 동정과 연민을 유발한 기사의 경우와는 달리, 시민들 대다수가 격렬히 성호를 그었다. 머리가 무척 띵한지 제 이마를 짚는 이들도 있었다.
행방불명된 이후로 갑자기 살아 돌아와서 온갖 흉흉하고 기이한 행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그는 이날도 진창으로 얼룩진 검은 튜닉을 입고 등장했다. 그 수도사의 검은 튜닉이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그의 안광도 검은 숲의 괴수처럼 번득였고 사람들의 경계심과 두려움, 의혹도 커졌다. 최근 여러 목격자에 의해서 비정상적인 그의 밀행과 광증이 암암리에 속속 폭로됐던 터다.
사람들은 늙은 포겔바이데가 진군한다는 소문이 허위더라도 언젠간 그 아들이 이 도시를 통째로 결딴내거나 그와 비슷한, 더욱 가공할 짓을 저지르리라고 입을 모았다. 동정심 많은 여자들만은 5월의 햇살 같은 미모에서 한겨울의 주린 야수로 변한 그의 모습에서 주님께 버림받은 어린 양의 불행을 발견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먼저 등장한 기사는 기운찬 걸음걸이로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마차와 가금류를 뚫고 채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어느 골목에선가 튀어나온 로트가 냉큼 기사의 뒤를 쫓으며 뭔가 말을 걸었다.
기사는 처음엔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갔다. 로트는 계속 말을 걸었다. 그러자 기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와 마주 섰다.
그 둘을 지켜보던 상인 하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손님에게 물었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저 둘이 지금 저기서 뭘 하는 거요?”
“글쎄. 흠……. 대화를 하는데.”
“대화라고? 그새 저 둘이 화해했나?”
“어림없는 소리.”
손님은 즉시 반박했다.
“그럴 리가 없지. 벨데케 내외가 며칠 전에 수도원으로 요양을 갔다지 않소. 요양하러 간 건지 달아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주님이 명령했는데도 사죄는커녕 오기를 부리고 있으니 저 집안도 참 대담하지 뭐야.”
“포겔바이데 저 녀석은 그럼 뭐라는 거지?”
“뻔하지 않소. 제 아비가 온다니까 기세등등해서 시비를 거는 거지.”
“흠, 내 보기엔 시비를 거는 것 같진 않은데.”
“하긴 그렇군. 거 요상한 풍경일세.”
“그러게 말이요. 제법 정답게 대화를 하니……. 어라? 저건 또! 허, 살다 보니 별일일세.”
유례없던 진풍경이 연이어 펼쳐지자 광장 주변에 있던 구경꾼은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 갖가지 호기심과 추측을 유발하는 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가 상식적인 이해의 도를 넘어선 탓이다.
이유인즉, 헤죽헤죽 웃어대며 말을 걸던 로트가 불현듯 지나가는 마차를 피하다 픽, 쓰러졌다.
그러자 기사는 친절히 손을 내밀어 원수를 일으켜 세워줬다. 그러고서 제 갈 길을 가자 로트가 또 냉큼 그 뒤를 쫓아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대화를 계속했다.
이러한 이해 불가능한 진풍경은 날마다 거듭됐다.
그때마다 광장의 구경꾼들도 거듭 놀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마차가 지나가고 나면 로트는 번번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거나 분수대에 머리를 처박는 등의 기행을 연출했고 그때마다 기사는 친절히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워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사람들은 이런 진풍경이 가진 함의를 분석하고 관찰하며 분분한 의견을 나눴다. 언쟁 끝에, 위기에 처한 기사가 타협점을 찾았다는 주장이 대세로 기울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다음 날에도 둘은 어김없이 무대에 등장해 서로의 우애를 과시하며 대화를 나눴다.
“어이, 친구.”
로트는 기사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안녕하신가?”
그러자 기사도 미소를 짓고 살갑게 답했다.
“안녕, 포겔바이데. 오늘도 신수가 훤해 보이는구나.”
“오늘은 또 어디로 가시나?”
“어딜 가겠나. 교회에 간다네.”
“고해 성사를 드리러?”
“그건 이미 했지. 그리고 널 위해서도 기도를 올렸어.”
“나도 널 위해서 기도했어.”
“고맙다.”
“별말씀을.”
“별말씀을.”
“날씨가 좋네.”
“그래. 벼락이 내리칠 것 같구나. 야밤에 돌아다니다간 벼락 맞기 좋지.”
“요새 누가 밤에 돌아다니지?”
“미친 호색한이 돌아다닌다네. 그럼 난 이만.”
우애가 담뿍 서린 이 대화는 광장에서 도토리를 찾아 헤매던 흑돼지에게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누군가 흑돼지만큼이나 두 사람과 가까이 있었다면 이렇게 들렸으리라.
“어이, 친구.”
로트는 기사에게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폭군아.”
그러자 기사도 조소를 삼키고 답했다.
“안녕하냐, 개자식아. 간밤에는 어디서 미친 지랄을 하다 왔냐.”
“그런 넌 오늘은 또 어딜 가시나? 날 죽일 곳을 찾나?”
“교회에 간다. 널 파묻을 곳을 찾으러.”
“폭군아, 네가 교회에 간다고?”
“그래. 겸사겸사 널 위해서 기도도 올려야지. 하느님, 하루빨리 포겔바이데 이 개자식을 지옥으로 데려가 주소서.”
“흥. 언제 사죄하러 올 거냐?”
“곧 가마. 네놈을 능욕하러.”
“빨리 빌어야 할걸. 시간이 얼마 없을 텐데.”
“염려하지 마라. 밤새 해줄 테니.”
“내가 보내준 의사를 만났어?”
“그래 만났다. 엉덩이를 발로 차서 쫓아 보냈지.”
“나한텐 언제 사죄하러 온다고?”
“무덤 속에서 기다려라. 그때 가마.”
이젠하르트는 그러고서 홱 돌아섰다.
“이젠하르트, 잠깐만.”
돌아서는 기사를 로트는 급히 불러 세워서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날 죽이면 넌 어떻게 되지?”
“꺼져라.”
“주님의 가호를! 아차, 내 키스는 어땠어?”
“개자식이! 안 꺼져?”
두 주인공이 퇴장하고 나면 다음 차례는 조연의 등장이었다.
제일 먼저 광장에 나타난 카이렛은 어린애들이 가리킨 골목으로 뛰어갔다. 로에란그린과 이터의 몸종 둘이 그 뒤를 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마지막으로 탐파니스가 헐레벌떡 나타나서 광장 중앙에서 목청이 터져라 꽥! 소리를 질렀다.
“제엔장할! 요것들이 또 어디로 숨었지?”
“흑 돼지야! 어디 갔니? 흑 돼지야!”
“야! 돼지치기! 거기 서랏. 너 포겔바이데를 봤냐? 그 못생긴 바람둥이 녀석 말야.”
“전 몰라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에잇 죽인다! 멍청한 자식! 죽인다! 바람둥이!”
이러한 진풍경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갈 무렵에 가을비가 내렸다. 대지를 적시고 골목의 먼지를 씻어내던 가을비는 폭우로 변했다. 광장 바닥에 흥건히 찬 빗물 속에서 흑 돼지가 둥둥 떠다녔다. 밤에는 무시무시한 뇌성벽력이 거대한 삼지창처럼 하늘을 찢고 우르릉 쾅쾅, 두들겨 댔다.
이제껏 환전상 포겔바이데가 진군한다는 소문을 반신반의하던 시민들은 덜컥 겁에 질렸다. 하늘이 흉조를 내린 것이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남쪽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정찰대가 맡은 임무는 덕분에 막중해졌다. 그러나 한 어린 양치기가 제 어깨에 짊어진 임무의 막중함에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남쪽 지평선의 숲을 군대로 오판해서 도시를 발칵 뒤집은 탓에 사람들의 불안과 동요는 더욱 커졌다.
이 무렵 그들의 불안과 의혹을 가중하는 새로운 사건이 터졌다.
주인공은 역시 기사와 원수였다. 둘은 이 무렵에도 비가 그치면 무대에 등장해 기행을 연출했다.
그러던 중 몇몇 시민들은 자신들이 기사가 벌인 교묘한 폭력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놀란 시민들이 상세히 묻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느 때처럼 둘은 오붓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의 낯빛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살기등등한 어조로 복수를 부르짖으며 히죽대는 원수의 면전에서 바람보다도 빨리 칼자루를 쥐었다 놓더라. 그런데 그 손이 추풍낙엽처럼 부들부들 떨리더라고 했다.
또 다른 목격자는 목재를 잔뜩 실은 짐 마차가 지나는 사이, 기사가 로트의 뒷덜미를 잡아채서 분수대 속에 처박았다고 주장했다. 또는 발을 걸어 쓰러뜨리고서 마차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내밀었단다.
또 한 번은 갑자기 기사가 오른쪽 발목을 움켜쥐고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는데, 로트가 깜짝 놀라서 달려들었다가 머리가 잡혀서는 흙바닥에 얼굴이 처박혔단다.
시민들은 이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 직공이 사람들을 구석에 모아놓고 목소리를 낮췄다.
“실은 나도 봤어요.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뭘 봤다는 거야?”
“지난여름에 공회당 근처를 지나던 때였어요. 바람이 몹시 불던 그 날, 기사가 거기 담벼락에서 포겔바이데의 멱살을 움켜잡고 마구 흔들더군요. 그저께 비 오던 날 저녁에는 떠돌이 개를 내쫓듯 문간에서 내쫓았지요.”
“아니 그건 또 무슨 일이람?”
“젊은 포겔바이데가 그 집엘 간 겁니다. 그러고는 외출했다 돌아온 기사의 다리를 붙들고 자길 용서해달라며 울고불고 매달리더군요. 사죄의 선물이랍시고 궤짝 가득 선물까지 싣고 왔더군요. 그런데 기사는 매몰차게 그를 쫓아낸 겁니다. 궤짝은 불에 태우고 오른발을 꼭 붙든 포겔바이데를 강제로 떨어내며 꺼지라고 외쳤어요.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살기등등한 얼굴이라니! 악마라도 달아났을 겁니다.”
“잘못 봤겠지.”
“틀림없어요.”
“설마! 그 미친 녀석이 또 시비를 건 게지. 요전 날에는 아침 종이 치고 나서 저녁 종이 울릴 때까지 그 집 벽에 달라붙어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조롱을 하고 노래를 부르며 괴롭혔다던데? 그래서 젊은 기사의 볼 살이 쪽 빠졌지 뭐야.”
“아니에요. 그 녀석은 자길 용서해달라고 울기만 했다니까요. 하지만 젊은 기사는 발목에 달라붙은 그 녀석의 뒷덜미를 집어서 빗물 바닥에다 힘껏 내동댕이쳤어요. 참았던 분통을 터뜨린 겁니다.”
“건 또 왜?”
“영주님께 호출을 당했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하셨대요. 이제는 굴욕이냐, 가문의 멸망이냐, 선택의 기로에 선 겁니다. 사면초가지요. 그토록 궁지에 몰리자 본색을 드러낸 겁니다. 어쩐지 기사는 은근히 냉정하고 난폭한 데가 있었어요. 지난 무도회에서도 대뜸 칼부림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리가 없어. 네 녀석은 명예훼손으로 죽고 싶나? 이 도시의 영웅을 함부로 모함하다니!”
몇몇 시민들은 이 주장에 반박했다. 그들은 가난한 상인이나 농부들, 또는 거렁뱅이로서 지난여름에 벨데케에게서 받은 후한 대접을 잊지 않았다.
몇몇 혈기 왕성한 청년들도-그들 대부분은 3년 전에 느닷없이 연인에게 버림받은 노총각이었다- 명예의 기사를 모함하는 주장에 전면반박하며 외려 방종한 로트의 교만한 도발을 강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다음 날 벌어진 장면에 양측은 전부 입을 닥쳤다.
시커먼 비구름이 광장을 뒤덮은 오후.
기사의 뒤를 이어 등장한 로트는 다짜고짜 그의 등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이젠하르트! 우리 이제 그만 화해하자! 나는 너의 진실한 친구가 되고 싶어. 제발 내게 사죄하고 화해하자꾸나!”
그러자 기사도 소리쳐 답했다.
“교활하고 집요한 까마귀 같으니! 빌어먹을 수작은 집어치우고 꺼져!”
“매정한 이젠하르트, 자꾸 내 가슴을 찢어지게 할 거냐?”
급히 자리를 뜨려는 기사의 발아래로 로트는 몸을 던졌다. 두 손으로 기사의 다리를 꼭 움켜쥐고 소리쳤다.
“무모한 고집쟁이 이젠하르트, 너의 사랑과 사죄를 간청하는 내가 보이지 않냐? 저기 군대가 오고 있어! 저 밖에 십만 대군이 몰려오고 있다고! 무모하고 어리석은 이젠하르트, 어서 내게 사죄하렴. 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작정은 아니겠지? 빨리 내게 화평의 입맞춤을 간청하렴!”
경악한 구경꾼과 마차를 뚫고서 기사는 거침없이 광장을 가로질렀다.
로트는 기사의 다리에 매달려서 광장 끝까지 맨땅바닥 위로 질질 끌려갔다. 그의 오른쪽 발목을 꼭 움켜잡고 끌려가면서도 잡은 손을 절대 놓지 않고 얼른 굴복하라고 소리쳤다.
이렇게 초가을이 지났다.
세찬 가을비가 주홍색 박공지붕을 적시고 비바람이 추위를 몰고 왔다. 종탑에 앉아 있던 새들은 먹구름이 짙어지면 저공 비행하며 불길하게 울어댔다. 도시의 호사가는 군대의 진군을 막는 비와 진창길이 못마땅해서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오후, 남쪽 지평선에서 또다시 흉조가 나타났다.
“저 구름 좀 봐.”
“어디? 어디? 제기랄! 저게 뭐야?”
사람들은 남쪽에서 몰려온 먹구름의 불길한 형태에 겁을 먹고 성호를 그었다. 구름은 방패와 창 그리고 말에 탄 군대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늘을 손짓하며 수군댔다. 어린애들은 무서운 도적기사가 몰려온다는 소식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였다.
시문에서 이어진 가로의 저편에서 고함이 들렸다.
어린 양치기 소년이었다. 그는 행인과 마차까지도 멈춰 설 만큼 사색이 되어 광장으로 헐레벌떡 뛰어들었다.
“왔어요! 그, 그들이 왔어요!”
소년은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소리쳤다.
“야, 이놈아! 웅얼대지만 말고 똑바로 말해봐!”
“군대가 왔어요! 십만 대군이 오고 있어요!”
“뭐라고? 또 헛것을 본 거 아냐?”
“아니에요! 이번에는 진짜 군인들이에요. 어마어마한 군대가 새카만 구름처럼 저 남쪽 언덕 위에 나타난 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늙은 포겔바이데가 온 거죠!”
몰려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고함을 질렀다.
그들 틈에서 낯바닥이 새파래진 어린 한스가 몰래 빠져나왔다.
어린 한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다가 쌩! 하니 벨데케 가로 달려갔다.
이날 저녁부터 비가 내렸다.
밤이 되자 비는 폭우로 변했다. 사나운 비바람은 굳게 닫힌 집집의 창문을 두드리고 문을 흔들었다. 축축한 옆구리에서 김을 피워 올리며 먹이를 찾아 떠돌던 개와 고양이는 빗발이 거세지자 폐허 더미 아래서 비를 피했다. 도시는 암흑에 잠겼다.
벨데케 가의 늙은 한스는 이날 밤에 등불을 들고서 계단을 올랐다. 지나치게 고요해서 괴괴하기까지 한 집안에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3층에 오른 그는 주인의 침실로 들어갔다.
“나리, 문단속을 마쳤습니다.”
한스는 이젠하르트에게 말했다.
“문지기 영감이랑 쿤츠를 대동하고서 빈틈없이 확인했습니다. 다른 시키실 일은?”
“힐데가르트에 관해서는 모두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나?”
“그럼요. 철저히 시켰습니다.”
늙은 한스는 엄숙히 대답했다.
“소문이 나지 않도록 단단히 으름장을 놨습니다. 아가씨께선 나리 마님을 간병하느라 수녀원에 가셨다고 알고들 있습니다.”
“밖엔 야경꾼이 돌고 있나?”
“오늘은 놈들도 비번입니다. 날씨가 이렇다 보니. 제아무리 날랜 밤도둑이라도 이런 밤에 쏘다니다간 야경꾼의 몽둥이가 아니라 불벼락을 맞을 테니까요.”
이젠하르트는 생각에 잠겨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광이 번쩍이도록 잘 닦인 갑옷과 무구를 살펴보며 그 앞에 서 있었다. 사선으로 내리치는 비바람이 창을 흔들었다. 창밖의 나무도 굵은 가지를 뻗어 창문을 괴기스럽게 긁어댔다.
늙은 한스는 묵묵히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다 물었다.
“오늘은 어디에 잠자리를 마련할까요? 2층 가족실에 난로 불을 피울까요? 아니면 목욕탕에 불을 피울까요?”
“불을 피우다니?”
이젠하르트는 상념에서 깨어나 물었다.
“날이 어떻다고 불을 피운단 말이냐?”
“비도 오고 밤공기가 제법 쌀쌀해져서…….”
“내가 뭐라고 했었지?”
한스를 향해 돌아선 이젠하르트의 언성이 높아졌다.
늙은 한스가 움찔하고 고개를 조아리자 그는 혀를 차며 엄격히 말했다.
“네가 이 집안에 충성을 맹세한 종복이라면 이럴 때일수록 어떠한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고 했어? 우리의 굴욕과 패배를 부르는 건 원수의 간계뿐 아니라 나약한 심신을 유혹하는 안위의 욕구다. 지옥과도 같은 추위나 더위 따윈 능히 극복해내는 굳센 정신력을 길러서 그러한 욕구를 은자를 유혹하는 황야의 요부처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고 누누이 경고하지 않았어?”
“그럼요, 나리! 틀림없이 하셨습니다.”
“반드시 명심해라. 우리에겐 교활한 적이 있다. 승리와 목적 달성을 위해선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려선 안 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위기를 돌파해내려는 굳센 정신력이다.”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늙은 천치바보를 용서해주십시오, 나리.”
늙은 한스는 주인의 진심 어린 훈계에 몹시 감격해서 뉘우치고 답했다.
“저도 나리의 경고를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나리께 맹세했습니다. 우리 영광스러운 벨데케 가문의 충복으로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이지요. 제 아들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보셨지요, 나리? 십만 대군이 몰려온단 급보를 듣자 그놈은 조그만 낯바닥이 새파래져서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러고는 나리께 보고를 드리기도 전에 대뜸 곡괭이부터 찾더군요. ‘아닛, 요 녀석이 곡괭이는 왜 찾아?’ 하고 제가 영문을 몰라 캐묻자, 고 녀석이 대뜸 자긴 주님의 훌륭한 전사이신 작은 나리와 이 집안의 명예를 위해 싸우겠다고 했어요. 저 혼자서 십만 대군을 곡괭이로 때려죽이겠다고 눈물을 쭈르르 흘리며 부르짖었어요. 하지만 십만 대군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자 고 야무진 녀석이 얼마나 분통을 터뜨렸는지 모릅니다. 내일 비가 그치면 거짓말쟁이 양치기 녀석을 찾아가서 맛을 보여주겠다고 벼르고 있어요. 그만큼 단단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리. 제아무리 탐욕스러운 환전상이 대군을 끌고 온다 해도 저흰 까딱없습니다. 만일 놈들이 내일이라도 저 시문 밖에 나타난다면-…….”
“바보 같으니!”
한스의 열변을 가로챈 이젠하르트는 노엽게 물었다.
“그렇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건만 너흰 그런 헛소문을 아직도 믿느냐?”
“아닙니다, 나리! 절대로 아닙니다.”
한스는 깜짝 놀라 부르짖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십만 대군은커녕 떠돌이 부랑자 패거리가 열댓 명만 와도 기적이지요. 그런 오합지졸의 불한당 놈들!”
“다시 말하지만 잊지 말고 명심해라. 그건 전부 헛소문이다. 우리의 기세를 사전에 꺾으려는 포겔바이데의 교활한 술책에 지나지 않아.”
“네, 나리. 명심하겠습니다!”
“그만 나가봐.”
“그럼 잠자리는 어디에 마련할까요?”
“오늘 밤은 자지 않겠다.”
한스는 주인의 결연한 태도에 무척 감탄하며 물러갔다. 그러고는 때가 때이니만큼 자기도 주인을 따라 오늘 밤을 꼬박 새우리라 다짐하며 지붕 밑에서 실컷 자고 있는 아들 한스를 깨우러 갔다.
그가 나가자 이젠하르트는 갑옷과 무구를 다시 점검하고 창과 검을 면밀히 살폈다. 그동안 그의 오감은 민감하게 날이 서서 작은 소음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밤이 깊어갈수록 빗줄기는 거세졌다. 지붕과 뒷마당에서는 북을 치듯이 비가 쏟아져 내렸다. 때때로 밤하늘에 벼락이 치면 지붕 밑 방에서 자던 하녀들이 잠에서 깨 비명을 질렀다. 뒷마당에서는 쿤츠가 덩달아 짖어대 말들을 동요하게 했고 사나운 빗소리는 그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다.
밤이 더욱 깊었다.
무구를 점검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이젠하르트는 창가로 갔다. 등불 곁을 스치는 그의 낯빛은 파리하고, 음울하고, 짙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사납게 창을 때리는 빗발은 질책의 화살처럼 쓰라린 가슴에 꽂혔다.
‘망할 놈의 포겔바이데…….’
그는 창틀에 맥없이 이마를 기대며 생각했다.
‘그때 널 쳤어야 했어. 황야에서 네 놈의 심장을 뚫었어야 했어. 도마뱀인 줄 알고 놓아줬더니 독사가 되어 나를 무는구나. 빌어먹을……. 왜 이 지경까지 됐을까.’
광장에서 벌어진 소동과 일련의 사건을 떠올리며 그는 분루를 삼켰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자존심은 깊은 상처를 입고 수치심에 괴로웠다.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결과에 당면해 망연자실했다.
그러면서도 암투에서 당한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비롯되는 고통스러운 굴욕감보다는 비관에 빠져 나약해진 자신 때문에 더욱 괴로움을 느끼고 낙담했다.
쓰라린 자책과 굴욕의 고통은 꽝! 하고 지상을 내리친 벼락에 끊겼다.
이젠하르트는 창 옆으로 재빨리 몸을 비켰다. 빗물로 흐려진 창밖을 한참이나 노려보면서도 그는 제 눈을 의심했다.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어떻게 된 자식이지? 이런 밤에도 오다니. 정말로 악마한테 영혼을 판 거냐.’
흐르는 빗줄기 사이로 몇 번이나 밖을 확인했다. 착각이 아니었다. 벼락이 내리쳐 사위를 대낮처럼 하얗게 밝힌 찰나, 집 앞 가로에 우뚝 버티고 선 검은 형체를 똑똑히 목격했다.
분명 그놈이었다. 이전과 같은 수법, 같은 옷차림 그리고 같은 장소에 나타난 검은 튜닉의 밤도둑.
‘도대체 어쩔 작정이냐.’
무구 곁에 켜놓은 촛대를 보고 다시 창밖을 보고 검은 형체를 노려보며 그는 생각했다.
‘이 밤중에는 또 왜 온 거냐? 오늘도 종일 내 집 벽에 달라붙어서 수사슴이니 사명이니 고함을 치고, 괴상한 노래를 불러대 미치도록 날 괴롭혔잖아. 어제도! 그제도! 도대체 그놈의 흰 수사슴이 어쨌단 건지. 망할 자식이 어디서 요물을 만나 홀려서는 날마다 미친 짓을 할까. 그러고도 성에 안 차서 또 오다니 끈질기기도 하지.’
이때 나무로 다가선 밤도둑은 고개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봤다.
이젠하르트는 암흑 속에서 가까스로 분간되는 밤도둑의 동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했다.
‘뭘 찾고 있냐? 어딜 보고 있어? 이쪽을 보고 있군. 또 아래층의 힐데가르트를 노리고 있겠지. 안됐지만, 개자식아, 그 애는 여기 없어. 헛걸음을 하셨군. 네놈 덕에 영주의 볼모로 잡혀갔어. 바람둥이 난봉꾼 녀석아, 네놈의 진짜 속셈이 뭐냐? 사랑하는 계집이 있다며? 그 입으로 운명의 상대 운운하고는 여길 또 찾아와? 가라. 여기서 알짱거리지 말고 너의 순결한 매춘부한테로 가라. 네놈의 잘난 운명의 상대에게……!’
검은 그림자는 이때 대담하게 나무에 올랐다. 그가 2층으로 손을 뻗은 순간, 이젠하르트는 도끼로 후두부를 찍힌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콰당-
열린 창문 밖에서 나무가 송두리째 뒤흔들렸다.
창을 뛰어넘은 뒤, 부러진 나뭇가지를 잡고 바닥에 꽝! 추락한 이젠하르트는 곧바로 튕겨 일어나 빗물을 박차고 달렸다. 밤도둑은 그보다 앞서 빗속을 뚫고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추격자의 검은 그보다 빨랐다.
“서라! 포겔바이데!”
빗줄기를 가른 칼날이 물보라를 뿌리며 바닥에 내리꽂혔다. 쓰러진 그림자는 빗물에서 몸을 굴렸다. 칼날이 두 번째로 바닥을 찍어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빗물을 튀겼다. 밤도둑은 괴성을 내지르며 튀어 올랐다. 푸른 칼날이 휙, 허공을 갈랐다. 곧이어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쓰러졌던 이젠하르트는 칼을 잡고 일어서 땅속에 깊이 박힌 칼을 잡아 뺐다. 단검에 스친 어깨에서 피가 배어 빗물과 섞여 아래로 흘렀다. 쇠뿔에 처박히듯 들이 받친 가슴에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칼을 칼자루에 꽂고서 그는 얼굴에 달라붙은 진흙투성이 머리칼을 뒤로 걷어냈다. 주변을 돌아봤다. 빗발이 얼굴을 정면으로 때려 제대로 눈을 뜰 수도 방향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다.
콰직! 벼락이 내리친 직후, 이젠하르트는 뒤로 돌아 뛰었다. 물보라를 차올리며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피가 끓었다. 심장의 고동이 폭주했다. 패배로 인한 수치심은 비틀린 욕망과 비열하고 잔인한 복수심을 불러일으켰다.
‘저주받을 포겔바이데!’
그는 빗속을 뚫고 질주했다.
‘넌 나를 속였구나. 또 한 번 나를 기만하여 방심하게 하고 힐데가르트를 노렸어. 기다려라, 더러운 책략가 포겔바이데! 오늘 밤 네놈을 짓밟고 능욕해서 죗값을 받아내주마.’
연이어 터지는 벼락이 암흑의 골목길을 밝혔다.
거침없이 질주하던 이젠하르트는 가로를 향해 모퉁이를 돌았다. 이때 또 한 차례의 거대한 불벼락이 번쩍! 지상을 직격으로 내리쳤다. 벼락에 강타당한 가로의 나무는 목을 꺾고 빗물 바닥에 처박혔다. 세찬 빗발은 부러진 기둥에 부딪혀 뿌연 포말을 일으켰다.
쏴아아아-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바닥에 고인 빗물은 귀밑까지 차올랐다.
입안에 넘쳐나는 빗물을 뱉고서 이젠하르트는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자신이 또 빗속에 누워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 앉았다. 진창을 짚은 손등 위로 빗물이 철철 넘쳐흘렀다.
‘뭐지?’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느닷없이 눈앞에 벼락이 번쩍인다 싶었는데 눈을 뜨니 꿈결 같다. 정신이 몽롱하고 바윗돌에 갖다 박은 듯이 골이 쑤셨다.
‘깜빡 정신을 잃었구나. 번개에 맞았나. 아니, 그럼 살아났을 리가 없지. 막 모퉁이를 도는데 별안간 눈앞이 번쩍이며……. 빌어먹을. 그렇군. 모퉁이에 부딪혔구나. 제기랄, 이게 웬 개망신이냐. 정신을 차려라, 어리석은 기사여. 또 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이성을 잃고 굴욕을 자처하다니! 이 꼴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비틀대며 일어선 그는 중심을 또 잃었다. 뭔가에 발이 걸려 그 위로 쓰러졌다. 젖은 부대 자루 같은 그것은 축축하고 단단하고 미끌미끌했다. 게다가 미묘한 굴곡도 있었다. 양 측면에선 길쭉한 지체가 네 개나 뻗어 있었다.
“제기랄!”
그는 자루에 달려들어 멱살을 쥐고 소리쳤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네놈이 날 들이박았어!”
고함을 치며 이젠하르트는 잡은 멱살을 마구 흔들었다.
“개자식아! 비열하게 모퉁이에 잠복해 기습하다니! 가자! 네놈의 독무대인 광장으로 가서 모두를 깨우자! 네놈의 사악한 흉계를 만천하에 고발해주마! 일어나!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이 자식이?……!”
멱살을 쥐고 일어서려던 이젠하르트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반격은커녕 마구 뒤흔들린 원수의 목이 부러진 닭대가리처럼 이리저리 대롱대롱 흔들렸다. 두 팔은 축 늘어져 있고 낯바닥은 어둠 속에서도 분간될 만큼 새파란 인광을 뿜어냈다. 무심결에 움켜쥔 멱살을 놓자 뒤통수가 꽝! 빗물을 튀기며 바닥에 처박혔다. 진창에 파묻힌 고개는 삐딱하니 모로 젖혀졌다.
거친 숨을 뿜으며 이젠하르트는 멱살을 도로 잡아채서 뺨을 후려쳤다. 철썩, 철썩! 따귀를 올려붙이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크게 울렸다. 그런데도 원수의 몸뚱이는 축 늘어지고 모가지는 힘없이 대롱거렸다.
‘제기랄. 어떻게 된 거야? 이 미친 자식이 설마…….’
“앗!”
이때 난데없는 비명이 뒤에서 터졌다. 뒤를 돌아보니 가죽 덮개를 씌운 등불 아래로 작은 맨발이 보였다. 다리 옆에는 길쭉한 막대기가 늘어져 있다.
“나, 나리…….”
돼지치기가 겁에 질려 외쳤다.
“전 흑 돼지를 찾으러 왔어요……. 흑, 흑 돼지가 도망쳐서요. 그, 그런데……. 허억!”
이 순간 불꽃처럼 터진 번개가 축 늘어진 로트의 모습을 하얗게 드러냈다. 그 낯바닥은 주검처럼 푸르죽죽하고 핏줄기가 귀밑으로 줄줄 흘러 빗물과 섞였다.
돼지치기는 등불과 막대기를 떨어뜨렸다. 이윽고 빗속을 뚫고 달아나는 그의 고함이 한밤의 적막을 깨며 널리널리 울려 퍼졌다.
“사, 사람 살려! 죽, 죽었다! 포, 포겔바이데 나리가 죽었다! 사람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