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기습 (32/33)

4. 기습

기사는 계속 걸었다.

로트는 앞서가는 그를 따라잡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대꾸가 없다.

로트는 거칠고 쉰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니까? 왜 그렇게 걸어? 또 다리가 부러졌어?”

“…….”

“어이, 다리를 또 다쳤냐고? 자빠진 정도로 다리나 발목이 부러지진 않을 텐데. 엄살이나 연극이라면 꽤 훌륭해. 깜빡 속겠어.”

이젠하르트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이 순간 그 옆모습을 본 로트는 경악에 차서 제 눈을 의심했다.

땀이 흥건히 맺힌 이젠하르트의 이마. 깨물어 부르튼 입술. 고통으로 찌푸려진 미간.

그는 잘못 봤다고 여겼다. 그러나 거듭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기사는 오른쪽 다리를 눈에 띄게 절뚝댔다. 두 발을 빠르게 내디디면서도 비틀댔다. 저와 똑같이 절뚝대는 꼴을 본 적이 있었다. 검은 숲에서.

“이젠하르트!”

나뭇가지를 내던진 로트는 두 발로 잡초를 차내며 그를 단숨에 따라잡았다.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날만큼 거칠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치료를 안 했지? 넌 다리를 다쳤잖아. 왜 그대로 방치했어? 왜?”

“네 알 바 아냐.”

이젠하르트는 걸음을 더욱 빨리하며 쏴붙였다.

“치료를 하든 말든 네가 웬 참견이냐?”

로트는 입을 닥치고 그를 노려봤다. 이윽고 더욱 거칠고 공격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리를 그대로 둬선 안 돼.”

“참견 말고 꺼져.”

“치료를 받아. 그러다 다리를 잘라내야 하면 어쩌려고 그래?”

“참견하지 마, 개자식아. 잘라내야 한대도 네놈 손을 빌리지는 않을 테니까.”

“치료해.”

“꺼져.”

“치료해.”

“네놈이 알 바 아니라고 했을 텐데.”

“어리석게 굴지 마. 치료해.”

“너나 주제넘게 참견하지 말고 네놈의 더러운 몸뚱이나 잘 간수하시지. 내 다리야 썩어서 문드러진들, 네놈의 음욕에 찌든 두 다리보단 튼튼하니까.”

이젠하르트는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로트도 입을 닥치고 걸었다. 기사의 핏기가 가신 옆모습과 다리를 번갈아 노려보며 묵묵히 따라 걸었다. 커다란 돌부리가 때때로 그의 발부리에 걷어 채였지만 무엇에 부딪쳤는지도 아랑곳없이 무작정 걸었다.

진흙투성이의 더러운 손등에는 주먹을 쥐느라 핏줄이 불거졌다. 경악과 의문이 들어찼던 가슴에는 밀물이 차오르듯 원망과 분노가 차올랐다.

그런 심경의 변화를 알 길 없는 이젠하르트는 바로 곁에서 오른발을 힘껏 내디디며 보란 듯이 더욱 힘차게 걸었다.

“믿을 수가 없어.”

로트는 어쩐지 넋이 빠진 얼굴로 중얼댔다.

“너란 녀석은 대체 어떻게 된 놈이냐? 되게 아플 텐데?”

“물론 아프지.”

이젠하르트는 눈길도 주지 않고 쏴붙였다.

“발목이 부러졌는데 아프지 않을 리가 있냐. 하지만 난 너와 달라. 네깟 녀석이라면 이깟 부상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개처럼 낑낑댔겠지만 난 엄살쟁이 귀공자가 아니거든. 그러니 원숭이처럼 나불대지 말고 꺼져라.”

“얼굴이 창백해졌어.”

로트는 불안스레 중얼댔다. 시선은 기사의 옆얼굴과 오른쪽 다리를 번갈아 살폈다.

이젠하르트는 태연히 맞받아쳤다.

“네놈의 역겨운 낯짝은 썩은 송장 빛깔이지.”

“식은땀도 흐르는군.”

“넌 피눈물을 섞어서 흘리게 될 거야.”

“여기서 좀 쉬었다 가지 그래?”

“참견 말고 꺼지라니까.”

“쉬었다 가.”

로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 다리를 잘라내고야 말겠어.”

“닥치고 꺼져.”

“여기서 쉬었다 가. 제발.”

“꺼져.”

“망할 자식! 쉬었다 가! 쉬었다 가라고!”

버럭 내지르는 고함에 이젠하르트는 걸음을 멈췄다.

로트는 기사의 시선을 피해 눈을 내리깔고 침통한 어조로 되풀이했다.

“잠시라도 쉬었다 가라……. 난 갈 테니까…….”

“드디어 가시겠다?”

“그래. 난 얼른 갈게……. 넌 여기서 편히 쉬어라.”

“남을 미행해서 미친 개수작을 부리며 조롱하고 들볶더니 이제 슬슬 꽁무니를 빼겠다?”

“난 그냥 간다고. 너를 더 괴롭히고 싶지 않으니까…….”

“아, 그러셔?”

기사는 감격해서 대꾸했다.

“이제 새삼 내 사정을 봐주시겠다는 거군. 그럼 가라. 제발 당장 꺼져줘. 나도 네놈의 악취에서 벗어나 속 편히 갈 테니까.”

“고집 부리지 말고 넌 여기서 잠깐 쉬다 가. 내가 가겠다고 했잖아?”

“너나 네놈의 무덤을 파고 편안히 쉬다 가렴.”

“망할 자식아! 잠깐 여기서 쉬라니까!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뭘 기다려? 네놈이 자객을 보낼 때까지 기다리란 소리냐?”

“생트집 잡지 마.”

로트는 분을 참고 말했다.

“내 시종을 보내줄게. 말을 보낼 테니 그걸 타고 집으로 돌아가. 그럼 의사를 보낼게. 돌팔이 이발사 따위가 아니야. 유능한 의사야. 유대인이지만 영주님의 다리 골절을 깨끗이 고쳐줬어. 그 의사가 봐주면 곧 낫게 될 거야.”

“닥쳐라, 원수야!”

갑작스러운 노호가 고요한 벌판에 쩌렁쩌렁 울렸다.

이젠하르트는 보란 듯이 오른발로 땅을 꽝! 구르고 로트를 향해 소리쳤다.

“자, 봐라! 여길 봐. 똑똑히 봤어? 네깟 놈이 내게 의사를 보내? 이 개자식이 감히 내 앞에서 위선을 떨다니! 가증스럽군! 목적을 방해하는 지체 따위는 무용지물이야. 방해가 된다면 이까짓 다리는 내 손으로 직접 잘라 내버릴 수도 있어. 손에 가시가 박혀도 계집애처럼 울어댈 나약한 포겔바이데, 내 면전에서 위선 떨지 말고 똑똑히 명심해라. 지금 당장이라도 그래야 한다면 내 두 다리가 잘려서도 네놈 따윈 잡아 죽일 수 있으니까.”

습한 바람이 벌판에 휘몰아쳤다. 황갈색의 젖은 나뭇잎이 로트의 뺨을 때리고 날아갔다. 그의 뺨은 돌처럼 굳었다. 자책과 후회의 마음을 실망과 원망이 집어삼켰다. 긴장과 염려로 침울했던 낯에는 심술이 되살아나고 거친 입술은 음울하게 비틀렸다.

“널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거 참 잘 됐네. 난 너의 이해를 바라지 않아.”

“널 알면 알게 될수록 낯설고 놀라워. 경이로 느껴질 정도야.”

“그럼 나를 숭배하고 찬미하려무나. 네까짓 타락한 속물한테도 경이를 불러일으켰다니 그래야 마땅하지.”

“…….”

“왜?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건데? 사람 미치게 나불대더니 그새 벙어리가 되셨나?”

“이게 뭔 줄 알아?”

로트는 담벼락을 두드려 보였다.

“몰라서 물어? 튼튼한 담벼락이지. 네놈이 비굴하게 방어물로 삼은. 이쪽으로 건너오기만 하면 넌 죽은 목숨이야.”

“그게 아냐.”

로트는 슬픈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담벼락은 우리를 가로막은 망령이야. 해묵은 원한이라는 집요한 망령이지. 배가 주리면 배를 채우고 싶어지듯, 피를 갈망하는 생리적 욕구가 불러낸 복수의 망령 말야. 피해의식과 맹목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힌 너는 명예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워 자신의 불운에 대한 화풀이를 하려는 거야. 애꿎은 옛 친구에게 말야. 아냐? 충고하건대, 그런 앙심은 품으면 못 써. 복수는 거꾸로 된 창이야. 던지면 널 찌를 거야. 안쓰럽고 비참한 자멸이지.”

이젠하르트가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로트는 비아냥이 담긴 쓴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 볼만 하군. 내가 정곡을 찔렀나?”

“악귀의 입으로 요설을 나불댈 여유가 있으면 관이나 주문해 놓으시지.”

“관은 뭐에다 쓰게? 네 걸로 필요해서?”

“개자식아, 네놈의 관 말이다.”

“내 건 필요 없어. 어디든 널따란 풀밭이면 내 무덤으로 충분해.”

“그 소원을 꼭 들어주마. 곧. 그땐 네놈의 세 치 혀를 원망하고 후회하게 될 거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로트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손바닥으로 쓸어내면 지워질 듯 엷었지만, 침울하고 교활했다.

“어째서 곧 일까. 지금은 안 돼? 미룰 이유가 뭐 있어?”

“네놈의 비참한 최후를 재촉하지 마라. 머지않았으니.”

“지금 해보라니까? 그까짓 분풀이야 네겐 이교도의 약탈자가 어린애를 불 속에 던지듯 쉬운 일 아냐? 참, 한마디 더 조언하지. 뜻하는 바를 이루려면 강인한 의지가 관건이야. 50여 일의 단식도 능히 견뎌낼 수 있어야 해. 망령에 사로잡힌 기사여, 내가 너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나니, 무고한 원수에게 지금 즉시 복수하라. 가장 잔인하고 가혹하게!”

“…….”

“저런, 왜 얌전히 섰어? 너의 복수란 경멸과 증오의 시선뿐이었나. 아니면 허세인 위협 뿐일까. 50여 일의 단식! 그 각오로 지금 여길 뛰어넘어서 날 쫓아와 봐. 자, 덤벼라! 어서! 오, 망령에 사로잡힌 불행한 기사여! 두려움 없이 적과 맞서며 굳센 기상과 고결한 품성을 지키고, 목숨을 바쳐 진실을 수호하며 자신보다 약자를 보호하겠다고 너의 영광된 이름으로 서약한 그리스도의 기사여, 결백한 어린 양에게 복수의 칼을 휘둘러라! 하하하!”

로트의 고함에 놀란 까마귀 떼가 나무를 뒤흔들고 하늘로 새카맣게 솟아올랐다.

“미친 자식. 또 발광이 났군.”

이젠하르트는 서둘러서 자리를 떴다.

눈동자가 탁해진 로트는 숨이 막히도록 웃어대며 소리쳤다.

“뭘 망설이고 있어? 날 잡아 보라니까?”

“꺼져!”

“나 잡아 봐라! 응? 왜 안 쫓아오지? 참고 있나?”

“넌 미친 개자식이야.”

“이를 악물고 참고 있군. 그래야만 할 이유가 뭘까.”

“마음껏 지껄여라, 개자식아. 네놈이 뭐라 한들 미친개가 짖는 소리니까.”

“역시 꼬리를 사리며 허둥지둥 달아나려고 하는군. 검은 숲에서 날 두들겨 팰 때랑은 무척 다른데? 흠, 그 이유가 뭘까.”

“네놈의 악취가 역겨워서 그런다.”

이젠하르트는 치를 떨며 내뱉었다.

“음욕으로 썩어 문드러진 네놈의 악취는 저승사자도 쫓아내겠어. 지독해.”

“아, 그래? 너의 집요한 앙심에선 사프란의 향이 나는데.”

“개자식!”

둘은 담벼락의 끝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이젠하르트의 반응이 난폭하고 적대적일수록 로트의 기쁨은 커갔다. 그가 오른쪽 다리를 절뚝댈수록 원망에 찬 가슴에선 비틀린 쾌감이 솟았다.

“여어, 망령의 기사님. 다리는 부러졌을망정 매처럼 날아가는군. 그토록 급한 용무가 뭐지?”

“백번을 물어봐라. 내가 입을 뻥긋하나.”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넌 날마다 어디로 가는 걸까?”

“네 죽은 어미를 보러 간다.”

“천상으로 말이냐?”

“그래. 천상의 오물 구덩이 속에서 썩어문드러진 몰골을 감상하러 간다.”

“바른 대로 대. 어디 가는 거야?”

“어디인지 말해주면 네놈이 따라올 수 있어?”

“청한다면 기꺼이 동행할게.”

“청할 리 없으니 썩 꺼져라.”

“흠, 끝내 함구하는 걸 보니 짐작이 가는군.”

“맞았어. 네놈처럼 공창에 간다.”

“여긴 목욕탕으로 가는 길이 아냐.”

“속지 않는 걸 보니 완전히 돌아버린 건 아니군.”

“어디 가는지 난 알고 있어.”

“네가 뭘 알아? 농간부리지 말고 꺼져.”

“흠. 이상하군. 다리가 똑 부러지고서도 굳이 이 길로 가다니 너무 돌아가는데. 수목원으로 가는 지름길은 따로 있잖아.”

“…….”

“참, 만필요트 백작은 안녕하신가?”

이젠하르트가 멈춰 서자 로트도 멈췄다. 낯바닥이 뚫어질 듯한 시선을 받고서도 그는 태연히 웃었다.

“정색하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았군. 날마다 거긴 왜 가는 거냐? 야음을 틈타지 않을 뿐이지 꼭 애인과 밀회하는 정열가처럼 부지런히 오가더군. 넌 그런 정열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하하. 깜찍한 내숭쟁이 같으니.”

“…….”

“이크! 내 얼굴에 구멍이 뚫리겠네. 그런데 그 소문을 들었어? 만필요트 백작은 어마어마한 재산가래. 황제가 하사한 봉토를 헤아릴 수가 없대. 소문으론 옛날에 팔레스타인에서도 한몫 단단히 챙겼다는 거야. 그런데 이 소문도 들었어? 백작은 팔레스타인에는 가보지도 못했대. 오히려 라인 강 유역에 사는 유대인을 살육했다는 거야. 그들의 집을 털고 교회로 피신한 아녀자까지 몰살했다더군. 피해자는 죄다 부유한 대금업자들이었다나. 흠, 덕망 높고 명예로운 기사단장께서 왜 그랬을까. 저기, 잠깐 귀를 빌려줄래? 누가 엿들으면 안 되거든. 백작은 이 도시에서 천생연분인 배필을 찾고 있대. 게다가 마땅한 후계자도 없는 모양이야. 너도 알고 있었어?”

‘이것으로 명확해졌다.’

이젠하르트는 생각했다.

‘내가 어리석고 경솔한 판단 착오를 범했어. 저놈은 미련한 돼지 새끼일 줄 알았더니 교활한 까마귀였구나. 누구일까. 썩은 고기를 물어다 바치는 까마귀 떼가 있겠지. 역시 저놈의 경박한 난봉꾼 패거리인가.’

이젠하르트는 로트를 따돌리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 경계의 눈초리를 읽어낸 로트는 재빨리 뒤쫓으며 쾌활하게 말했다.

“불리해지니까 꽁무니를 빼네. 백작한테 내 안부를 전해줘.”

“사탄도 네게 안부 전하더구나.”

“그분은 안녕하시고?”

“그럼. 네놈을 고대하며 입맛을 다시고 있지.”

“말을 돌리긴. 뭘 그렇게 경계하고 겁을 내? 난 그냥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요새 그분의 병환은 어떻냐고?”

“아, 네놈을 꼬챙이에 꿰어 지옥 불에 구울 괴수 말이었군. 가서 직접 물어봐라.”

“네 부친 말야. 병상에서 위중하다던데.”

“네깟 놈은 알 것 없어!”

부친의 얘기가 나오자 이젠하르트는 분노를 감추려 하지 않았다.

“곧 비명횡사할 네 자신이나 애도하시지. 저승의 나룻배는 네가 먼저 탈 테니.”

“그건 두고 볼 일이지만 그래도 궁금하군. 그토록 건강하셨던 분께서 왜 갑자기 자리에 누우셨을까.”

“…….”

“그 때문이지? 그렇지?”

“뭐라는 거냐. 개자식! 혼자서 실컷 나불대봐.”

노성 뒤에 도사린 기사의 강한 경계심에 로트는 쾌감을 느꼈다. 바윗돌의 균열에 징을 때려 박듯, 갑옷의 틈새를 쑤시고 맛본 부드러운 속살이 달콤했다.

“그거 때문이야. 그분은 아들과는 달리 현명하고 신중하시니까. 갑작스러운 시련에 부닥쳐 마음의 고통도 크실 거야. 그건 나도 참 유감이야. 나라도 그런 궁지에 몰리면 원통해서 앓아누웠겠지. 하지만 난 그분을 믿어. 비록 지금은 가혹한 주님의 시험대에 서서 망연자실해 있지만 결국에는 현명한 결정을 내리실 거야.”

“주구장창 헛소리만 늘어놓으니 귀가 썩을 것 같군.”

“모른 체하지 마. 넌 알고 있어.”

“네가 교활한 까마귀란 건 알고 있지.”

“설마 영주님의 명을 어기진 않겠지?”

칼날이 투구를 내리치듯 불꽃을 튀기는 기사의 시선에 로트는 기뻤다. 상처를 헤집고 이성을 흔들어대는 게 즐거웠다. 그의 증오가 클수록 쾌감도 커지고 두 뺨의 핏기가 가실수록 더욱 커지고, 입을 닥친 모습에는 희열마저 느꼈다.

“어이, 친구, 대꾸를 해봐. 못들은 체 잡아떼려고만 하지 말고. 영주님께서는 엄명을 내리셨어. 어떤 사람은 ‘친절한 권유’라고도 하더군. 너의 부친께선 언제쯤 내게 사죄하신대? 너도 물론 올 거지? 느긋이 기다릴 테니 서두르지 않아도 좋아. 참, 둘 다 몸이 편찮으니 말을 보내줄까? 아니, 마차를 보내주지. 괜한 우려는 하지 마. 가령 내가 불행한 벨데케 부자를 문전박대한다든가 몽둥이로 찜질해서 쫓아낸다든가 또는 혹한의 겨울 눈밭에 맨발로 사흘간 세워놓는다든가, 뭐, 그런 푸대접은 절대 하지 않을게. 너한테는 더더욱……. 네가 만일 무릎을 꿇고 진실한 화평의 입맞춤을 간청한다면 축제를 열어 줄 수도 있어. 너의 굴욕과 패배를 기리는 성대한 축제를 말야. 어떠냐? 하하하.”

의기양양한 로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껄껄 웃었다.

이젠하르트는 문득 이상한 눈초리로 그를 응시했다. 분노는커녕 놀라움과 의문에 찬 시선이었다.

로트가 웃음을 그치자 그는 담벼락으로 한 발 다가섰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내 귀가 썩었나.”

“응? 뭐?”

“아니, 잘못 들었나 싶어서. 너한테 무릎을 꿇는다며?”

“그래!”

로트는 신나서 답했다.

기사는 더욱 미심쩍다는 듯이 반문했다.

“그래? 누가? 누가 네 발아래 무릎을 꿇는데?”

“하하. 그야 물론 너지. 벨데케 가의 장남이자 자존심이 하늘을 뚫는 이젠하르트 폰 벨데케, 네가 내 발아래 무릎을 꿇고서 화해의 키스를 애걸하는 거지.”

“……. 내가?”

“그래. 네가.”

그러자 기사는 담벼락으로 좀 더 가까이 오라고 로트에게 손짓했다. 그러고서 심한 충격을 받았을 때 한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처럼 조용히 물었다.

“내가 혹시 너한테 말했었나?”

“뭘?”

“내가 망령에 홀렸다면 넌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란 거, 말했었나? 아차, 아까 말했었지. 수백 번도 더 말했었는데, 제기랄, 잠시 깜빡했군. 머리가 어지럽구나. 미친 까마귀를 상대하다 보니 나까지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하, 살다 살다 별 헛소리를 다 듣는군.”

“큰일 날 소리 하는군.”

로트는 크게 놀라며 반문했다.

“넌 그럼 영주님의 명령에 불복할 셈이냐? 정말로 그럴 작정은 아니겠지? 아무리 맹목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힌 고집쟁이라도 궁지에 처했을 땐 좀 더 현명해져야 하지 않아?”

“궁지고 뭐고 내 목표는 네놈을 죽이는 거야.”

기사는 숨을 죽이고 속삭였다.

“똑똑히 들었어? 네놈에게 죗값을 받아내는 거다. 가장 비싼 죗값을, 네 목숨으로.”

“아, 그럼 네가 난처해질 텐데.”

“어째서?”

“몰라서 물어? 영주님께서 그땐 가만 계실까? 날 죽이면 네 부친의 머리를 잘라서-……. 윽!”

-!

부서진 돌가루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뒤꿈치가 들린 로트는 담벼락에 납작하게 붙었다. 숨통이 콱 막히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의 멱살을 움켜쥔 이젠하르트는 서로의 코가 맞닿도록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리고 숨을 삭이며 한 마디씩 뱉었다.

“잘 들어라, 교활한 포겔바이데, 굴욕과 패배의 주인은 너지 내가 아니다.”

“고, 고집 피우지 마……. 으…….”

낯바닥이 파래진 로트는 간신히 반박했다.

“네, 네가 그럴 처지가 못 될 텐데. 넌 고양이 발톱 아래의 쥐-…….”

“입 닥쳐! 네놈의 간악한 술책과 도발에 내가 속을 줄 알아?”

“하지만 영주님께선…… 으!”

“닥치라면 닥쳐! 제기랄! 누구든 이 망할 놈의 혀 좀 뽑아줬으면!”

“그, 그럼 넌……. 기어코……. 네 부친의 머리를 자르겠다는 거냐?”

“개자식아! 그래야 한다면 그러는 수밖에! 마음대로 간교를 부려봐라. 구역질 나는 까마귀 자식! 절대로 네놈한텐 굴복하지 않겠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맙소사!…….”

경악에 찬 로트는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 탄식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럼 넌 부친이 참수를 당해도 기어코 복수하겠다는 거야?……. 세상에! 그 정도로 복수의 집념에 사로잡혀 있다니 끔찍하군. 넌 망령에 단단히 홀렸어. 나를 미쳤다고 하지만 너야말로 미쳤어.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할까? 제 부친을 그릇된 복수의 제물로 바치겠다니 정말 믿을 수 없어. 넌 나랑 손잡고 빨리 얼음 감옥으로 가야 해. 우리 둘이 손을 꼭 잡고, 윽!……!”

꽝! 하고 내리친 주먹이 담벼락의 상단을 부쉈다.

뒤로 떠밀린 로트는 젖은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목에 핏대를 세우고 기침을 해댔다.

기사는 부서진 담벼락을 두 손으로 짚고 그 위에 이마를 맞댔다. 눈을 감고 분노를 삭이며 날아간 이성을 불러들였다.

“죽을 뻔했다!”하고 외친 로트는 숨을 헐떡이며 가슴팍에 성호를 그어댔다.

고개를 들고 그 꼴을 본 기사는 담벼락 상단에 꽝, 제 이마를 도로 처박았다.

로트는 그 소리에 움찔 놀랐다.

잠시 후 기사는 원수를 불렀다.

“야, 교활한 까마귀?”

“…….”

“개자식아?”

“왜?”

“자기가 개자식인 줄은 아는군.”

“…….”

“거기서 엄살 피우며 드러누워 있지 말고 이리와 봐.”

“갈빗대가 부러져서 곤란해. 숨을 쉴 수가 없으니까…….”

“마저 부러뜨리기 전에 얼른 이리 와.”

“싫어.”

“오라면 와.”

기사는 위협의 어조를 억지로 누그러뜨리고서 말했다.

“네가 그토록 주창하는 대화를 한 번 해보자. 이 기회를 놓치면 네놈 손해야.”

“너한텐 폭력이 대화냐?”

“누가 먼저 매를 자청했지? 널 패는 것도 얼마나 성가시고 힘든지 알아? 잔말 말고 이리 와봐.”

“미심쩍군. 왠지 덫에 빠지는 기분인데……. 음? 윽!…….”

빗발치듯 날아온 큼지막한 돌에 한 대 후려 맞고서야 로트는 담벼락으로 갔다.

침묵 속에서 탐색의 시선이 오갔다.

로트는 핏기가 가시고 땀이 흥건한 이젠하르트의 얼굴을 지나서 손을 내려다봤다. 왼손은 담벼락을 짚고 있었다. 체중이 왼쪽 다리에 실려 있었다.

이젠하르트가 물었다.

“네 녀석이 원하는 게 뭐냐?”

“난 주님께서 보낸 화해의 특사다.”

“난 너를 잡으러 온 지옥의 특사다.”

“그래서 성질이 그렇게 고약하시군.”

“…….”

“왜 또 노려봐? 또 한 대 치려고, 그래? 그럼 쳐봐.”

“때릴 가치도 없어.”

“흥. 때릴 기운이 없는 거겠지. 얼굴이 허옇게 떴어. 발목이 무척 아프지?”

기사는 사자후를 목구멍으로 꾹 삼키고 참을성 있게 말했다.

“순순히 대답이나 해. 네놈이 원하는 게 뭐냐?”

“너랑 화해하고 싶어.”

“그 이유나 들어보자.”

“나를 너를 미워하지 않으며 화해는 내 사명이니까.”

“나는 너를 미치도록 미워하며 복수는 내 사명이다.”

“불관용은 복수를, 복수는 폭력을, 폭력은 고통을 낳아. 끝없는 악순환의 고리지.”

“널 죽여서 그 고리를 끊겠다. 너희 가문의 씨를 말리면 되니까.”

“나는 주님의 어린 양이다.”

“가죽을 벗겼더니 교활한 여우였지. 현명한 목자라면 발견 즉시 몽둥이로 놈들을 때려죽여야 해.”

로트는 기사를 노려보고, 기사도 그를 노려봤다.

로트가 말했다.

“네 증조부가 당한……. 바르쿠스의 비극은 나도 유감스럽게 생각해.”

“더러운 입으로 그분 얘길 꺼내지 마.”

“하지만 무고한 내게 복수한다고 해서 망자가 기뻐할까.”

“널 죽이면 적어도 내 속은 시원하겠지.”

“거듭 말하지만 나는 결백해.”

“네놈이 결백하다면 순결한 처녀를 야음을 틈타 뒤쫓고 그 집안에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안긴 놈은 손발이 잘리는 대신에 모두 천상의 왕국에서 영혼의 구원을 얻었겠군.”

“무도회 건이라면 내가 사죄했고 넌 나를 용서한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넌 은혜를 원수로 갚았지. 더욱 비열한 복수를 했으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파렴치한 납치범아! 끝까지 잡아뗄 테냐? 수치를 안다면 그 입을 다물어. 난 그날 너를 똑똑히 봤어. 암흑과 적막도 네놈의 추잡한 죄악을 감추지 못했어. 흰 눈 한 송이로는 오물을 덮을 수 없듯이.”

“모함하지 마. 이미 내 결백을 증명했는데도 아직도 누명을 씌우다니.”

“누명?”

“그래.”

“하늘에 맹세코?”

“그래.”

“개자식! 이토록 파렴치할 줄이야. 여자의 변덕이 너를 살렸다면 돌아선 네 등을 찍는 것도 그것이야. 사탄의 나무를 건드리고 신의 율법을 최초로 어긴 그녀들이 악마의 문이란 걸 모르나?”

의혹과 놀라움에 로트는 말문을 잃었다. 이윽고 감정을 억누른 쉰 목소리로 물었다.

“……. 콘드비라무어스를 만났어?”

“네놈 어미를 만났지.”

“……. 그래, 나였어.”

로트는 고개를 숙이고 침울하게 덧붙였다.

“내가 갔었어……. 하지만 맹세컨대 그뿐이었어.”

“제기랄! 이제야 실토하는군. 참으로 가증스럽다. 네놈의 두꺼운 낯가죽은 창으로도 뚫리지 않겠어. 얼마나 추잡하고 음험한 간계냐. 사내로서 창과 방패로 당당히 맞서기는커녕 가장 치졸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복수하려 하다니!”

“내게 변명할 기회를 줘.”

“변명이 아니라 유언을 허락하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어리석었어. 그날 밤 일도, 거짓말도 모두 내 잘못이야. 하지만 이젠하르트, 하늘에 맹세코 그날 나는-…….”

“어떠한 악의도 품지 않았다, 이 말이냐.”

“제기랄! 어떡해야 사실 그대로 해명할 수 있을까?……. 미친 소리 같겠지만 그날 밤에 너희 집에 찾아간 건 진짜 내가 아니었어. 괴물이었지! 악마 같은 충동과 정열의 괴물, 그놈이 나를 정복했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날이 밝아있더군.”

“그렇군.”

기사는 냉소를 품고 말했다.

“드디어 네놈의 정체가 미친 악마임을 자백했구나. 음욕에 빠져 사냥감을 노리는 음탕한 괴물 말이다.”

“난 그녀를 노리지 않았어.”

“그래? 그럼 우리 집 못생긴 하녀를 노렸나?”

“천만에. 난 그런 짓은 다시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아차, 그렇지. 다른 운명의 상대가 생겼다고 했던가?”

“……. 그래.”

“개자식아! 그래서 너를 더욱 용서할 수 없어. 힐데가르트 그 애는 지금 비탄에 빠져 있어. 매춘부처럼 농락당하고 버려진 것도 모른 채, 네까짓 바람둥이 개자식 때문에!”

노호가 터진 공회당 폐허에 원한과 증오가 악순환하듯이 돌개바람이 몰아쳤다. 하늘은 짙은 잿빛이고, 허물어진 공회당의 벽도 축축한 잿빛이고, 로트의 낯도 죽은 잿빛이었다.

“그 망할 놈의 입을 겨우 닥쳤군.”

기사는 치를 떨며 말을 이었다.

“가련한 포겔바이데, 대화는 이걸로 끝이다. 네가 이 땅의 모든 면죄부를 사들여도 내 누이와 내 명예를 더럽힌 죗값은 반드시 치를 거다. 네놈 목숨으로.”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처참한 낯빛을 감상하며 분노와 흥분을 가라앉혔다. 끓었던 피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만족의 물결이 가슴을 채웠다. 두려움과 원망이 활활 타오르는 초록색 눈동자에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내게도 자비는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 거듭 말하지만 때가 되면 명예롭게 죽여주마. 네겐 과분한 최후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그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야겠지. 그럼 조만간 또 보자.”

입을 닥친 로트에게 조롱의 인사를 건네고 이젠하르트는 자리를 떴다. 그러나 채 몇 발짝 못 가서 뒤로 돌아섰다.

“아, 미안.”

담벼락 상단을 움켜쥔 로트는 눈 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웃음이, 하하, 웃음이 멈추질 않아서 말야. 와하하.”

“…….”

“제기랄, 눈물까지 나는군. 헉헉, 숨도 막히고. 오, 사람 살려. 아하하.”

“최후의 발광이군. 여기서 기다려라. 널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갈 쇠사슬을 보내주마.”

“네 것도 가져올 거지?”

로트는 기쁘게 반문했다.

“넌 피해망상에 빠져 있으니까 나랑 같이 묶여 있자. 서로의 살을 물어 찢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어때?”

기사가 되돌아와 마주 서자 로트는 웃음을 그치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날 죽일 수 없어.”

“네가 날 죽일 수 없겠지.”

“패배와 굴복의 주인도 네가 될 거야. 지금이라면 모를까 그때 가선 내게 용서의 키스를 간청해도 늦어.”

“용서의 키스를 간청한다? 진심으로 내가 그러리라 믿냐?”

“결국 그렇게 될 거야.”

“그 이유는?”

“대군 앞에서는 복수의 맹세도 한낱 가련한 허세일 뿐이니까.”

갑작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로트는 한 방 먹여서 미안하단 듯이 빙그레 웃느라 입을 닥쳤고, 이젠하르트는 치미는 분노를 삭이느라 입을 닥쳤다. 그는 로트의 도발과 교활한 속내를 읽고 그래서 그를 미워하고, 그 교만한 태도가 아니꼬워서 더욱 그를 미워했다.

“로마에서 출발한 대군 말이냐?”

“그래.”

“기가 막히는군. 내 생전에 이런 무서운 위협을 받을 줄이야.”

“위협이 아니라 조언이야. 한낱 자존심 때문에 가문의 멸망을 자처하진 않겠지?”

“내 생각엔 가문의 영예를 되찾을 것 같은데?”

“허세 부리지 마. 넌 위기에 처했어.”

“가련한 포겔바이데, 그래서 오늘 이토록 기고만장했구나.”

“넌 그것도 모르고 만용을 부렸지.”

“과연 누가 만용을 부린 걸까. 네게 연민마저 느낀다. 그게 헛소문이란 걸 몰라?”

“그건 네 간절한 희망이겠지.”

“그래? 그럼 지금쯤 군대는 어디까지 진군했을까?”

“금세 들이닥칠걸.”

“어디 쯤에 와 있는지도 몰라?”

“몰라. 곧 오겠지.”

“그걸 왜 몰라?”

이젠하르트는 조소하며 물었다.

“헛소문을 조장하고 유포한 당사자가 모르면 누가 알지? 그럼 내가 알려주지. 내 생각엔 환전상이 이끄는 오합지졸의 약탈자 패거리는 아직 로마에서 출발도 못 했어. 어리석은 포겔바이데, 차라리 독실한 기독교인을 정복하러 교황이 십자군을 보냈다고 하지 그래? 부용의 고드푸루아(1차 십자군의 지도자, 예루살렘의 초대 성묘 수호자)와 바바로사('붉은 수염'으로 불린 프리드리히 1세.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사자 왕 리처드도 끼워 넣어서. 그럼 내가 혼비백산해서 달아났을 텐데.”

“원 없이 비꼬렴. 어쨌든 넌 궁지에 몰렸어. 기세등등하게 어린 양을 뒤쫓다가 낭떠러지 끝에서 사냥꾼 무리와 맞부딪쳤지. 청천벽력처럼 말야.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지금도 그들은 진군 중이야. 그들이 약탈자라면 더욱 잘 됐군. 이 도시는 쑥대밭이 되고 사람들은 그 누군가의 만용과 허세를, 빌어먹게도 질긴 자존심을 원망하겠지. 그게 누굴까?”

빙그레 웃는 원수의 얼굴을 이젠하르트는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눈길은 차갑고 침착하고, 분노를 뛰어넘은 평온마저 깃들여 있었다.

“난 네놈을 보면 그 누군가가 떠올라.”

그가 마침내 속삭였다.

“닮은 점이라면 둘 다 요괴의 낯바닥을 하고 사랑에 대한 헌신이니, 맹세니 주워섬긴다는 거야. 차이점이라면 그놈은 미련하고 고지식한 몽상가였고, 너는 미친 악마야. 교활한 까마귀지. 불쌍한 포겔바이데, 충고 한 마디 해줄까.”

“얼마든지.”

“달아나라. 검은 숲이든 어디든. 오합지졸인 용병 패거리가 시문 밖에 도착한다면 너야말로 위험해. 네 아비는 너부터 잡아 죽일 테니. 네 존재 자체가 가문의 망신이거든.”

“헛소리 하지 마.”

“진심 어린 충고야. 네놈의 아비란 인간이 다 죽어가는 널 수도원에 내버린 걸 벌써 잊었어? 넌 버림받은 자식이야. 허약한 울보에 이교도의 씨앗이니 속히 죽기를 바랐었지. 넌 질긴 목숨을 잇고 돌아왔지만.”

로트가 입을 다물고만 있자 기사는 혀를 차며 빙그레 웃었다.

“비로소 달콤한 망상에서 깨어나 제 처지를 깨달았군. 안쓰러워라. 가엾은 포겔바이데, 난 네게 어울리는 최후를 직접 선사해주고 싶어. 그전에 네놈이 죽는 꼴은 보고 싶지는 않아. 사실 네가 밉기만 한 건 아니거든.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실은 네가 나의 운명의 상대라고 여겨. 뭐, 그렇게 놀라지는 마. 우린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지. 때로는 우리가 형제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는데, 오늘은 유독 그런 생각이 드는군. 우린 서로 닮은 점이 있거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내 형제도 친구도 아니지. 그럴 수도 없어. 넌 천박한 상인 놈의 자식에 이교도니까.”

“난, 이교도가 아냐.”

“너는 이교도 마녀의 자식이고 널 쳐서 내 영혼의 구원을 얻겠다. 주님께서 너를 그리스도의 전사인 내 운명의 상대로 점찍어주신 것도 그 때문이지.”

“난 이교도가 아냐.”

“좋아, 취소. 이단으로 수정하마. 랑그도크의 알비파(11세기부터 프랑스 랑그도크에 주로 전파된 기독교 교파. 13세기에 교황청이 이단으로 파문) 잔당이 내 고향에 숨어 있는 줄은 몰랐는걸.”

기사의 조롱과 협박, 진심 어린 증오가 이어질수록 로트의 낯빛은 무섭게 창백해졌다. 한순간 밝게 빛났다가 열을 품고 흐려지길 반복하는 눈빛은 감춰진 슬픔과 고통을 언뜻 언뜻 내비쳤지만 이어지는 독설에 원망과 오기로 변했다.

“왜 입을 닥치고 있냐?”

원수에게 치명타를 입혔다고 확신한 기사는 연이어 다그쳤다.

“너의 재주인 변명이라도 해봐. 유언이라도 좋아. 내가 전해주지.”

“……. 복수는커녕 넌 내 털끝도 건드리지 못할 거야.”

로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결코 그럴 수 없어. 너의 허세와 협박도 이제 끝이야.”

“아, 그러셔?”

“날 죽이면 네 아비는 목이 잘려. 그 비대한 고깃덩어리가 들보에 매달려 축 늘어지겠지. 구경꾼들은 썩은 주검의 악취에 침을 뱉을 거야. 네 늙은 어미는 어떻게 될까. 바짝 마른 거위나 뜯고 있다가 굶어 죽거나 거렁뱅이가 되겠지. 아니면 마녀로 잡혀가서 모진 고문을 받고서 통구이가 될지도 모르지. 네 순결하고 아름다운 누이는 어찌 될까? 너를 죽을 때까지 원망하고 미워하고 또 원망하면서 눈물에 빠져 죽겠지. 살아남는다면 고작 해야 유대 놈들의 첩이나 될까. 돈에 팔려갈 테니.”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셨군.”

“너야말로 본성을 드러냈어.”

로트는 담벼락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조용히 속삭였다.

“꼭꼭 은폐했던 실체를 드러냈지. 끝끝내 감출 수 있으리라 여겼나? 하지만 실패했군. 넌 두 얼굴의 위선자야.”

“더 지껄여봐.”

“사람들은 그간 널 명예와 신의의 기사로 칭송했지. 신성한 그리스도의 전사, 기사도 미덕의 전형이자 고매한 영웅. 하지만 정말 그럴까. 힐데가르트는 오라버니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표리부동한 인간이란 걸 알고 있나? 오라버니의 정체를 안다면 그녀는 수치심으로 죽고 말 거야.”

“…….”

“넌 가면을 쓴 약탈자야. 내 재산이 목적이지. 나를 쳐서 우리 집안의 재물을 약탈할 속셈이지? 네가 명예와 신의의 기사라고? 용맹한 숲의 파괴자라고? 하, 우습군. 넌 실은 도적 기사야. 우리 가문의 부흥과 재산을 시샘하는 정체불명의 적기사지.”

“입 조심 해.”

“난 황야에서 널 봤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피를 뿜고 죽은 뚱보를 벌써 잊었어?”

“…….”

“나는 기억하겠지? 우린 정답게 대화를 나눴잖아.”

-!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으스러지게 목을 죄었지만 로트는 빙긋 웃었다.

“당장 죽이고 싶지? 죽여서 너의 죄악을 은폐하고 싶지? 하하. 그럼 죽여 봐. 얼른!”

“네 명을 재촉하지 마라.”

이젠하르트가 분에 겨워 속삭였다.

“악의적으로 나를 모함한 대가는 네 피로도 부족해.”

“과연 모함일까. 윽!…….”

“교활한 까마귀야, 할 수 있다면 맘껏 모함해보렴. 누가 네 말에 귀를 기울일까? 네가 사탄에게 영혼을 내다 판 미친놈이란 소문이 이미 온 도시에 퍼졌어. 하지만 네놈이 화형을 당하기 전에, 내가 직접 명예롭게 죽여줄 테니 안심하렴. 그러려고 발이 닳도록, 머리가 깨지도록 고심하며 애를 쓰고 있어. 그러니까 넌 당분간 공창 같은 데 처박혀서 얌전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냐?”

잡힌 멱살이 난폭하게 흔들렸음에도 로트는 히죽 웃었다.

“콘드비라무어스랑 무슨 얘길 했지?”

“넌 알 것 없어.”

“애틋한 밀담이라도 속삭였나?”

“낯짝은 파래져도 입은 살아 나불대는군.”

“그 여자가 네게 청혼한다며?”

“어쨌든 너한텐 아니지.”

“경사났군. 굉장한 출세인데? 명성과 명예욕이 대단한 기사께서 그 여자의 혈통과 지참금 따위로 만족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말이지, 궁금한 게 있는데, 그 여자가 널 사랑한대? 아직 그런 말은 없었지? 그럼 한 가지 충고 겸 비밀을 알려줄까.”

“마음껏 지껄여봐라, 개자식아. 그 입이 썩어 문드러질 날도 머지않았으니까.”

“악마의 문이 누구라고 했었지?”

기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로트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연이어 물었다.

“그렇담 악마의 문이자 두려운 유혹자의 꾐에 놀아난 바보는 누구일까?”

“네놈이지.”

“너야.”

로트는 활짝 웃었다.

“바로 너야. 청혼이라고? 누가? 그 여자가 너한테 청혼할 것 같아? 하하. 어림없는 소리. 넌 희롱당한 거야. 음험한 피조물의 기만적인 매혹에 홀려서 우스꽝스럽게 놀아난 거지.”

“닥쳐.”

“유감스럽지만 그 여잔 너랑 결혼할 수 없어. 왜인 줄 알아? 그 여잔 날 사랑하거든. 내가 3년 전에 퇴짜를 놨더니 아직도 복수의 이를 갈고 있지. 하지만 남자를 증오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사랑하는 게 여자란 존재야. 애증의 노예지. 얻어터지며 개처럼 가혹하게 학대당해도 홀딱 빠진 남자한테선 벗어날 수가 없거든. 네가 조금 전에 그랬었지? 여자의 변덕이라고. 그 변덕이 다음엔 누구를 찌를까?”

“다 지껄였냐?”

“그 여자한테 반했어? 그 여자의 사랑을 얻고 싶나?”

“네까짓 놈은 알 것 없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그 여자를 얻고 싶나? 그래서 영주님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닥쳐.”

“그러고 나서 내게 복수하고 더불어 내 재산도 챙기고?”

“이 더러운 자식이…….”

“그럼 내 비위를 맞춰!”

로트는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내 명령을 따르란 말야. 그래도 못 알아먹겠나, 어리석은 야심가야? 내게 복종하고 날 도발하지 마. 무릎을 꿇고 화해의 키스를 애걸해. 단 한 마디로 이리 오라고 하면 콘드비라무어스는 결혼 화관 따윈 내던지고 침을 흘리며 내게 달려올 거야. 나를 노렸던 음험하고 비열한 복수의 창이 네 심장을 꿰뚫겠지. 그땐 나도 똑같이 갚아 주마. 네놈이 간청하고 후회해도 늦어. 너의 집안을 파멸시키고 네 누이를 납치해서 이교도의 노예로 팔아버릴 거야. 또 한 가지, 네놈이 악명 높은 적기사란 걸 만천하에 폭로할 테다. 그땐 저 광장의 효수대에 벨데케 가문의 깃발이 영원히 휘날리겠지. 알아먹었어? 알아먹었으면 당장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와 화해의 키스를 애걸하라니까!”

악마처럼 고함을 쳐댄 로트는 웃었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입가에 침이 줄줄 흘렀지만 빙그레 웃었다.

황금빛 머리칼 한 가닥이 땀에 흠뻑 젖은 기사의 이마에 달라붙었다. 로트는 그 머리칼을 적신 땀방울이 파란 핏줄이 불거진 관자놀이를 타고 턱 아래로 또르륵, 굴러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서 물었다.

“왜 갑자기 입을 닥쳤어? 더는 할 말이 없냐?”

멱살을 움켜쥔 기사의 면전에 대고 로트는 껄껄껄 웃었다. 숨통이 막힌 목구멍에서 히스테릭한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날 당장 죽이고 싶지? 잔인하게 난도질하고 싶지? 그럼 죽여 봐. 반항하지 않을게. 자, 여길 찔러! 왜 가만있어? 내 더러운 피로 단검을 물들이기 싫다 이거냐? 그럼 내가 도와주지.”

-!

눈 깜짝할 새에 로트는 멱살을 뿌리치고 제 단검을 잡아 뺐다. 그걸 자기 목에 겨누고 목덜미를 칼날로 슥슥 긁어댔다. 저를 노려보는 기사를 향해 피식 웃었다.

“네가 못 하겠다면 내가 할게. 내 모가지를 따서 이 벌판을 뜨끈한 피로 물들여야지. 그땐 내 몸뚱이는 송장이 되겠지만 넌 어떻게 될까. 뭐, 오늘이 아니라도 상관없지. 언제든 어느 으슥한 골목에서, 악취 고약한 시궁창에서, 시문 밖에 있는 저 강물이나 광장의 분수대, 아니면 내 집의 호사스러운 비단 금침 속에서든, 내 시체가 발견된다면 그땐 사람들은 뭐라고 떠들어댈까. 누가 날 죽였다고 수군댈까. 넌 어떻게 될까. 늙은 벨데케는 살만큼 살았으니 괜찮다지만 네 순결한 누이는 어떻게 되더라? 오, 저런. 참 유감이군. 내가 유령이라도 된다면 너의 결백을 입증해 줄 텐데. 그런데 사람들이 과연 내 말을 믿어 줄지는 모르겠군. 여봐요, 마을 사람들! 그건 이젠하르트가 한 짓이 아닙니다! 내가 내 모가지를 싹둑 잘랐어요! 아프지만 꾹 참고 잘랐어요! 영주님! 이젠하르트는 결백합니다! 그는 신의와 명예의 기사지 복수의 집념에 사로잡힌 극악무도한 살인자 따위는 아니랍니다! 오, 그렇담 누가 저 가여운 포겔바이데를 죽였을까? 누가 저토록 잔인한 난도질로 살해했을까? 권능하신 하느님, 부디 그 범인을 지옥 불로 데려가소서!”

단검이 날아가고 가슴이 담벼락에 꽝, 처박혔다. 멱살이 사납게 되잡혔다. 칼날에 스친 목덜미에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렀다.

로트는 흐뭇하게 웃었다. 기사는 코가 맞닿을 만큼 그의 얼굴을 바짝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낯바닥과 입술을 살피며 속삭였다.

“네 녀석의 상판이 이 모양인 걸 하늘에 감사한다.”

“무슨 말이지?”

“요사스런 악마야, 네 녀석의 낯짝이 이토록 아름다운 게 천만다행이란 소리야.”

“못 알아먹겠군.”

기사는 어리둥절한 로트의 멱살을 놔주고 목덜미와 턱을 움켜쥐었다. 그러고서 검은 머리칼 때문에 더욱 창백한 얼굴과 더욱 푸르게 빛나는 눈을 들여다봤다.

“실은 남몰래 그런 생각을 했어. 검은 숲에서 돌아온 이후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네놈의 뒷목을 움켜잡고 축축한 땅바닥에 처박을 때 그런 상상을 했었지. 어느 날 밤에는 달콤한 꿈까지 꿨어. 처음엔 몹시 역겹고 불쾌했지만 네놈 상판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흥분되더군. 사탄처럼 아름다운 포겔바이데, 복수를 위해서라면 난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아.”

“뭐라는 거냐?”

“모른 체하지 마, 음탕한 포겔바이데. 간통을 일삼고 수간도 마다하지 않는 호색한. 남색은 숱하게 즐겼을 테니 어떤 꼴을 당할지 알고 있겠지?”

“……. 몰라.”

“모른다면 가르쳐 주마, 이 거짓말쟁이 개자식아. 난 네 녀석을 깔고 밤을 새울 수도 있어. 네놈의 엉덩이에 내 걸 처박고 밤새도록 쑤셔댈 수 있단 말야. 네놈이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능욕해주마.”

“넌……. 넌 변태냐?”

“그래, 이 음탕한 남색가야.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지. 너의 아름다운 상판, 이렇게 붉고 싱싱한 입술이라면, 개자식아, 무덤에서 파내서 시간을 할 수도 있지. 송장이 참다못해 벌떡 일어날 만큼 짜릿하게.”

“세상에……. 이 도시의 영웅께서 그런……. 그런 추잡한 상상을 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

“구역질나게 아름다운 포겔바이데, 이 개자식아, 앞으로 조심해. 날이 저물면 특히. 비단금침이 깔린 침실에 숨어 십만 대군의 호위를 받아도 밤에는 경계를 늦추지 말고 조심하라고. 사탄과 요괴가 숨을 죽이고 도사린 방구석의 어둠, 네놈의 등 뒤, 등불이 미치지 않는 벽의 그림자를 경계하렴. 발가벗긴 네놈을 창턱에 엎어놓고 실컷 해버릴 테니까.”

“…….”

“왜? 창턱은 싫어? 그럼 대낮에 광장에서 해줄까? 슈바벤의 젊은 수도사도 그 꼴을 당하고 좋아했었지. 이틀이나 그 짓을 당하고도 또 해달라고 발등에 입 맞추며 눈물을 흘리던데. 이번엔 네놈한테 나의 총애를 맘껏 베풀어주마.”

“힐데가르트!”

갑작스러운 고함에 이젠하르트는 뒤를 돌아봤다. 놀란 까마귀 떼가 푸드덕, 날아올라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기사는 고개를 되돌렸다. 이 순간 그림자가 다가오고 뭔가가 입술을 핥았다.

이젠하르트는 무심코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뒤통수를 우악스럽게 움켜쥐고서 코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댄 로트는 벌려진 입술을 힐긋 보고, 불투명한 유리알 같은 잿빛 눈동자를 보고, 속눈썹 끝에 맺힌 땀방울을 보고, 메마른 입술 새로 다시 혀를 밀어 넣어 순식간에 혀를 빨고 입안의 점막을 핥고 속삭였다.

“누가 먼저 당한 거지?”

포겔바이데 가의 문지기 힌츠는 문간방 구석에 앉아 있었다. 몽창 빠진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낯익은 문간방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힌츠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쳇, 꿈이었군. 그놈의 개새끼들을 초전박살 내는 건데!”

곁에 둔 몽둥이를 쓰다듬으며 힌츠는 쓴 입맛을 다셨다. 꿈이라지만 퍽 실감이 난 터라 더욱 아쉬웠다. 십만 대군을 이끌고 온 주인 포겔바이데가 저 시문 밖에 서서 ‘벨데케의 개새끼들아, 내가 왔다! 문을 열어라! 문을 열어!’ 하고 외쳐댔었다.

“어라?”

힌츠는 문득 뾰족한 귀를 바짝 세우곤 눈을 비볐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분명히 저 밖에서 또?”

귀를 기울이니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렴풋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우렁차고 반가운 고함!

“옳거니!” 하고 무르팍을 찰싹 내리친 힌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다 다를까, 환청일 듯싶었던 고함은 더 크고 생생해졌다.

“문 열어!”

감격에 겨워 주님을 부르짖은 힌츠는 달려가다 말고 외쳤다.

“아닛! 저게 누구야?”

“문 열어, 힌츠! 제기랄! 문을 열어!”

“맙소사! 저 인간이 또!”

힌츠는 입을 딱 벌리고 섰다. 시커먼 형체가 고함을 내지르며 두두두두! 달려왔다.

로트였다. 땀으로 흠뻑 젖은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서 미친 듯이 돌진하며 소리쳤다.

“문을 열어, 힌츠!”

“아이구, 도련님!”

“문 열라니까, 이 통나무 대가리 노인네야! 당장 문 열어!”

“으악!”

힌츠를 떼밀고 문 안으로 몸을 날린 로트가 연거푸 외쳤다.

“문 닫아, 힌츠! 문을 닫아! 어서!”

“아이쿠, 이게 웬 난리에요?”

“문을 닫아! 제기랄! 빨리!”

꽝, 하고 문이 닫혔다. 숨이 끊어져라 집안에 뛰어든 로트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힌츠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로트는 닥치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쿠 맙소사! 십만 대군의 깃발은커녕 이 집안의 종말이 도래했구나! 저 꼴 좀 보게. 개처럼 거품을 질질 흘리구 눈알은 희번득하구!”

“꺼져, 이 사탄의 영감탱이야! 잡아먹는다!”

“돌았군, 아주 헤까닥 돌았어!” 하고 외친 힌츠는 성호를 격렬히 긋고 가버렸다.

문간 바닥에 드러누운 로트는 헉헉대며 숨을 골랐다. 그대로 한동안 누워 있다가 일어나 문짝에 귀를 대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바깥은 고요했다. 이따금 돌개바람이 몰아치는 외에는.

로트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문짝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갈빗대를 치듯 뛰고 관자놀이에선 맥박이 세차게 두근대고 머리가 멍했다.

‘어떠냐? 한 방 먹었지?’

헤죽 웃은 그는 바닥에 도로 드러누웠다.

그러나 복수의 기쁨도 잠시, 뜨거운 불덩이가 뱃속에서 슬금슬금 치밀다 온몸에 불을 지피고 내달렸다. 아찔한 열 폭풍의 전율.

‘제기랄…….’

몸을 부르르 떨며 로트는 눈을 감고 제 입술을 만졌다. 그러고서 저를 쫓아오던 기사의 사자후와 무시무시한 위협, 혀를 잡아 빼고 고환을 잘라버리겠다는 살기등등한 위협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한 올 한 올 보이던 황금빛 속눈썹과 까슬한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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