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교활한 까마귀 (31/33)

3.교활한 까마귀

며칠이 흘렀다.

광장의 시민들은 어느 날 로트의 소식을 접했다. 수족이 잘려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사지를 멀쩡히 달고 홀연히 귀가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말썽꾸러기 세 귀공자가 포겔바이데 가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 집안의 하인들도 기세등등해서 시장판을 휘젓고 다녔다.

그런데도 두문불출이라서 로트의 사망설이 여전히 분분할 무렵, 한 목격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대낮에 로트를 똑똑히 목격했노라고 증언했다.

목격자는 이후에도 속속 늘어났다. 결국 사망 설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그러던 중에 목격자가 전하는 이상한 얘기가 꼬리를 물고 도시에 퍼져 나갔다. 그들은 대부분 어두운 골목 창가에서 하루를 보내는 병든 노인이나 할 일 없는 어린애였다.

그들이 말하길, 탁발 수도사 차림으로 변장한 로트가 후드를 쓰고서 으슥한 골목을 쏘다닌다고 했다. 주로 새벽녘이나 밤에 안개가 자욱할 때만 출몰했으며, 주정뱅이로 의심되는 정체불명인 상대와 난투극이나 추격전을 벌였으며, 얼음 감옥에서 탈출한 미치광이가 아닌가 싶을 만큼 눈빛이 몽롱하고, 검은 숲의 짐승처럼 안광이 번뜩였다고 했다.

어느 소녀는 이 목격담에 전혀 반대되는 증언을 했다. 그 애는 자기가 개한테 쫓겨 넘어졌는데, 로트가 나타나서 개를 쫓아내고 희고 고운 손으로 저를 일으켜 세워줬다고 전했다. 그때 그의 얼굴은 꼭 천사처럼 빛나고 아름다워서 아이는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후 별다른 사건이 없자 이런 괴상한 목격담은 흐지부지 잊혔다.

그러던 어느 오후였다.

하늘에는 묵직한 잿빛 구름이 무너져가는 지붕처럼 사람들 머리 위로 내려앉고, 광장과 골목에선 먼지와 나뭇잎이 뒤섞인 돌풍이 가끔 솟아오를 때였다.

벨데케 가의 뒷문이 열리고 이젠하르트가 나왔다. 그는 옷자락을 휘날리는 돌풍을 뚫고서 빠른 걸음으로 집 밖으로 나섰다.

가로나 광장을 피해 인적 없는 골목을 지난 그는 골목을 벗어나자 시 외곽에 있는 공회당 쪽으로 향했다.

오래된 공회당은 폐허였다. 천장과 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성인 남자의 어깨쯤 닿는 공회당의 담벼락은 잡초가 무성한 벌판을 직선으로 가르며 길게 뻗어 있었다.

담벼락 안쪽에는 줄기가 검은 나무가 담벼락의 끝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비가 오거나 궂은 날씨에는 새카만 까마귀 떼가 날아와 나무를 점령했다. 까마귀는 비에 젖어 검은 나무줄기마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사람의 눈알 같은 까만 눈으로 행인을 노려보곤 했다.

공회당 초입에 들어선 이젠하르트는 좌측으로 그 시선을 받으며 담벼락 바깥쪽에서 첫 번째 나무를 지났다.

그가 지나자 까마귀 떼가 고개를 돌려서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두 번째 나무를 지났다. 두 번째 까마귀 떼도 모조리 고개를 돌려서 그를 노려봤다. 전방의 수많은 까마귀 떼도 모가지를 길게 빼고 빤히 노려보며 그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뭘 엿보고 있느냐, 음험한 염탐꾼들아.’

이젠하르트는 놈들을 경계했다.

‘썩은 고기를 탐내고 남의 비밀을 캐내려는 네놈들의 음험한 낯짝은 꼭 그 자식을 닮았구나.’

-!

이때 갑자기 세 번째 나무에 앉아 있던 까마귀 떼가 푸드덕, 푸드덕 검은 깃털을 흩날리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일순간 시야를 새까맣게 뒤덮은 놈들은 발톱과 부리로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치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어깨와 머리에 깃털이 달라붙은 이젠하르트는 팔뚝으로 놈들을 쳐내며 나아갔다. 푸드득! 푸드득! 까마귀 떼의 공격이 이어졌다.

놈들을 도발해서 그에게로 몰아낸 고함과 발소리는 공회당 안쪽에서 들렸다. 정체불명인 괴성에는 히스테릭한 웃음도 섞여 있었다.

이젠하르트는 축축하게 젖은 검은 나무 기둥과 허물어진 벽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그림자를 무시하고 담벼락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그러나 어지간해선 뒤를 돌아보거나 발길을 멈추지 않는 그도 이번에는 무심코 제자리에 서버리고 말았다. 기가 막혀서.

“나는 죽은 자의 왕이다!”

텅 빈 공회당 안에서 괴성이 부르짖었다.

“달아날 생각은 말아라! 너를 맛있게 잡아먹어주마! 하하하!”

‘맙소사.’

오만상을 찌푸린 이젠하르트는 충격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나 유치한 공격에 한순간 판단력이 마비될 정도였다.

정신을 차린 그는 오물을 피하듯 빨리 걸어갔다. 까악까악, 불쾌하게 울어대는 까마귀 떼가 그를 뒤쫓았다. 양배추를 넣고 잡아먹겠다는 괴성도 그를 쫓았다.

여차하면 칼자루를 잡아 뺄 작정이었던 그는 칼집에서 손을 떼고 걸음을 재촉했다. 탁탁탁탁, 발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이젠하르트!”

발소리의 주인은 그를 따라잡고 바로 곁에서 물었다.

“안녕, 이젠하르트? 깜짝 놀랐나? 얼굴이 새파란 걸 보니 무척 겁을 먹었군. 그렇지? 하하.”

“…….”

“이봐, 친구, 미안해. 내가 장난이 심했어. 어때? 오늘은 더 그럴싸했지? 이 녀석, 거기 서라! 나는 심술쟁이를 잡아먹는 죽은 자의 왕이다. 네놈을 양배추랑 같이 끓여 맛있게 잡아먹을 테다! 하하하!”

미간을 팍 찌푸린 이젠하르트의 걸음이 빨라졌다. 담벼락의 맞은편에 나타난 로트도 재빨리 따라 걸으며 쾌활하게 물었다.

“이젠하르트, 오늘은 또 어딜 가냐? 어딜 가는지 퍽 궁금하군. 오늘은 또 누굴 패러 어디로 가는 걸까?”

이젠하르트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로트도 검은 튜닉 자락이 다리에 휘감길 만큼 재빨리 쫓아가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토록 급하게 가는 걸 보니 역시 누굴 패러 가는군. 쯧쯧. 나보다 더 불행하고 가엾은 녀석이겠군. 권능하신 하느님, 그자를 굽어살피소서. 안됐지만 이름 모를 친구여, 자넨 글렀어. 오늘은 숲의 파괴자께서 기분이 썩 좋지 않거든. 용서를 모르는 그에게 맞서면 죽음뿐이야.”

이젠하르트는 멈춰 서서 로트를 노려봤다.

“왜?”

로트는 웃는 낯으로 그를 마주 봤다.

“내 낯바닥에 뭐가 묻었나?”

아무런 대꾸가 없자 로트는 둘 사이의 담벼락을 사랑스레 쓰다듬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니, 이런 담벼락을 누가 지었을까? 그놈 참 튼튼하고 높다랗군. 밤도둑을 잡으려고 한들 어지간해선 뛰어넘기가 만만치 않겠는데. 음, 그래도 이건 좀 심하게 높군. 잘못 넘었다간 다리가 똑 부러지겠어. 쯧쯧쯧.”

이젠하르트는 욕을 삼키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 속도는 한결 빨라져 무릎에 닿는 튜닉 자락과 머리칼이 휘날리고 허리에 찬 칼집은 허벅다리를 스쳤다.

싱글벙글한 로트는 냉큼 그를 뒤쫓으며 큰소리로 물었다.

“어이, 이젠하르트! 그냥 내빼기냐? 어딜 가냐니까?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 오늘은 또 누굴 작살내러 가는 거지?”

“…….”

“응? 살짝만 말해줘. 오늘은 그 무지막지한 칼로 누구 머리를 깨고 흙바닥에 처박으러 가냐?”

이젠하르트는 앞만 보고 걸었다.

로트는 상심해서 외쳤다.

“기껏 만났는데 참 매정하군. 나는 오늘도 화해를 청하러 왔는데 들은 척도 않는군. 아직도 반성을 못 했나?”

“…….”

“맙소사! 보름이나 시간을 줬는데도 아직 안 했군. 지난날 참회의 기도는 역시 시늉일 뿐이었나. 하! 원통해라. 결백한 인간을 초죽음으로 패놓고도 이제 와서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체하다니!”

“개자식아.”

이젠하르트는 우뚝 멈춰 섰다.

“미쳐서 싸돌아다니더니 아주 맛이 갔군. 발광이 나서 줄곧 남을 미행하더니 이젠 목숨이 아깝지 않아? 눈에 뵈는 게 없어?”

“없다.”

로트는 웃으며 딱 잘라 말했다.

“내 눈엔 오로지 날 두들긴 너와 내 사명만이 보일 뿐이야.”

이젠하르트가 말없이 노려보자 로트는 “거참 든든하군,” 하며 담벼락을 탁탁, 두드렸다. 이젠하르트의 몸이 약간 움직인다 싶으면 잽싸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달아날 폼을 잡고 싱글싱글 웃었다.

이젠하르트는 발길을 홱, 돌렸다.

로트는 또 냉큼 옆을 따르며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널 미행한 걸 알고 있었어? 그냥 찔러 본거지?”

“알고 있었다, 개자식아.”

이젠하르트는 걸음을 재촉하며 쏴붙였다.

“그따위 후드나 뒤집어쓰고 골목에 숨어 남을 엿보면 네놈의 구역질 나는 냄새가 안 난다더냐? 어쩐지 이 근방에서도 썩은 악취가 진동하더니 역시나 네놈이었군.”

“흠. 들통이 났네.”

로트는 그러자 안타깝게 중얼댔다.

“역시 여자로 변장할 걸 그랬군. 내 얼굴 정도면 속았을 텐데.”

“수염 난 여자도 있더냐. 차라리 돼지 새끼로 변장하지 그랬어?”

“흑돼지말야? 하하. 알았어. 그럼 다음엔 꼭 돼지로 변장할게. 하지만 너무하군. 이미 눈치를 챘으면 기미를 줬어야지. 이틀이나 헛수고를 시키다니.”

“간사한 원수야, 거짓을 나불대지 마. 나흘이다. 넌 나흘간 내 뒤를 미행했어.”

“나흘? 이틀이 아니고?……. 아, 그랬었지. 맞아. 요샌 잠깐씩 깜빡깜빡한단 말야. 머리가 약간 혼란스러워서……. 뭐, 그렇다고 너무 내 걱정은 하지 마. 일시적인 증상이라고 로에란그린이 말해줬으니까 곧 나을 거야. 하하하.”

로트는 썩 유쾌한 듯이 홍소를 터뜨렸다.

히스테릭한 그 홍소가 이젠하르트의 발을 묶었다. 그는 멈춰 서서 놀라움을 감추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또 뭔 일이냐.’

그는 로트의 초록색 눈동자를 새삼스레 눈여겨보며 생각했다.

‘저 괴상한 낯짝을 좀 보렴. 요사스러운 낯짝은 흥에 겨워 웃고 있지만 겉 가죽만 일그러졌을 뿐이다. 저 기이한 눈깔도 보렴. 마치 아흐마르디가 화염에 휩싸인 것 같군. 어떻게 된 거냐. 술에 취했나? 냄새는 나지 않는데……. 축축한 안개 속에서 쏘다니더니 정말 미쳐버렸나. 아니면 혹시…….’

이젠하르트는 반감마저 누르는 호기심을 품고 로트의 해괴한 몰골을 뜯어봤다.

로트는 끝자락이 진흙투성이인 치렁치렁한 검은 튜닉을 입고 있었다. 후드 아래의 머리칼은 물에 빠진 양 축축하게 젖었다. 뺨은 초췌하고 턱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고 입술이 까칠했다. 음성은 탁하게 쉬어버린 저음인데 웃음을 터트릴 땐 쇳소리처럼 맑고 날카로웠다. 가장 불쾌하게 시선을 끄는 초록색 눈동자는 전혀 깜빡이지 않는 눈꺼풀 아래서 박제된 짐승의 눈알처럼 뚫어지게 그를 보고 있었다.

“왜 그러지?”

그 눈초리에 낯바닥이 따가워진 로트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짝 돌아보고서, 왜 뜨거운 시선으로 저를 보느냐고 숨죽여 물었다.

창백했던 낯바닥에 핏기가 도는 꼴을 의아해 하며 이젠하르트가 말했다.

“넌 죽지 않고 잘도 돌아왔군.”

“그래. 멀쩡히 살아 돌아왔지.”

로트는 기쁘게 응답했다.

“복수의 일념에만 사로잡힌 어느 명예의 기사는 숲의 패거리 품에 날 내버리고 갔지만 난 살아 돌아왔어.”

“그래? 그것참 대단하군.”

“날 기다렸어?”

“물론 기다렸고말고.”

기사는 솔직히 고백했다.

“밤잠을 설치며 네놈의 썩은 주검을 기다렸지. 하지만 재수 없게도 살아 돌아왔군. 그런데 남들은 하루면 횡단 가능한 검은 숲에서 보름이나 뭘 하셨을까. 부잣집 귀공자께서 일생일대의 모험을 하셨나?”

“뭘 했겠나. 명상과 산책을 했지.”

“역시 멍청하게 헤맸다는 소리군.”

“그래.”

로트는 빙그레 웃었다.

“난 이 도시의 영웅을 구해줬는데도 버림받고 굶어 죽을 뻔했지. 몇 날 며칠을 헤매다가 죽은 자의 왕을 만났지만 나를 살려주더군.”

“당연하겠지. 네놈 몸뚱이에서 풍기는 악취가 고약하니까 차마 비위가 상해서 잡아먹을 수가 없었거든.”

“하하. 맞았어!”

로트는 이 대꾸를 농담으로 여기며 크게 웃었다.

“그치가 그러더군. 내 결백한 심장은 맛이 없다는 거야. 내가 그럼 양배추랑 콩을 함께 삶아서 끓여 드시지요? 하고 제안했더니, 나처럼 결백하고 선량한 영혼의 육즙은 후추를 잔뜩 뿌린들 맛이 고약하다나. 그 길로 숲 밖으로 쫓겨난 걸세. 하하하!”

“넌 영혼을 팔았군.”

“…….”

히스테릭한 웃음이 갑자기 뚝 끊겼다. 로트의 웃던 낯도 싹 바뀌었다.

-!

이때 젖은 나뭇잎과 까마귀 깃털을 휘날리는 돌풍이 로트를 덮쳤다. 하늘을 올려다본 로트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을 지르고 팔을 허우적대며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문득 찌푸린 하늘의 잿빛 구름 속에서 작은 은빛 조각이 햇살처럼 반짝였다. 매였다.

매를 목격한 이젠하르트는 생각했다.

‘저놈이 난데없이 어디서 나타났지? 저건 흰바다매인데.’

흩날리는 까마귀 깃털 사이로 은빛 깃털 한 개가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깃털이 담 너머로 내려앉자 로트는 두 팔로 그걸 쳐내며 저리 가라고 고함을 질러댔다.

하늘을 가르던 흰바다매는 곧 사라졌다.

이젠하르트는 찌푸린 먹구름의 틈새로 비추는 햇살을 보며 자기 눈을 의심했다.

‘잘못 봤나? 감쪽같이 사라졌어. 구름이 삼켰나.’

돌풍이 그쳤다.

로트는 담벼락 위로 머리를 내밀고 기사를 쳐다봤다. 머리칼이 들쑤신 새둥지처럼 까마귀 깃털과 나뭇잎 범벅이 된 그는 밤도둑처럼 눈만 살짝 내밀더니 곁눈질로 재빨리 주위를 살핀 후 숨을 죽여 초조하게 물었다.

“뭐라고 그랬지? 내가 어쨌다고?”

“네놈은 죽은 자의 왕한테 영혼을 팔아넘겼다고 했다.”

기사가 답했다.

“그 대가로 넌 목숨을 구하고 살아 돌아왔지. 쭉정이뿐인 빈 몸뚱이를 끌고 미치광이가 돼서.”

“헛소리 하지 마.”

“아니, 잠깐만……. 그렇군. 이번이 아니군. 넌 오래전에 영혼을 내다 팔았지? 그날 밤도둑처럼 야음을 틈타 내 누이를 노린 게 그 증거야.”

“헛, 헛소리하지 말라니까……. 나는 그런 적이 없어…….”

“흥. 네놈의 썩은 생선 같은 텅 빈 눈깔을 보렴. 그 속에 악귀가 보여. 죽은 자의 왕이 낙인을 찍었군. 끔찍해라. 이교도 마녀의 피를 이은 악마의 자식이 속세의 음탕한 쾌락을 탐하려고 영혼마저 팔아넘기다니!”

“모, 모함이야!”

“닥쳐라, 요사스런, 악귀야! 네놈은 영벌이 두렵지 않아? 소름이 끼치는군. 사탄이 오늘 밤 너를 잡아갈 거다. 너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비늘이 가시로 뒤덮인 음탕한 괴수랑 마음껏 뒹굴겠지. 아, 이런. 악취를 참을 수가 없군. 네놈의 썩은 육골이 지옥 불에 타는 냄새가 벌써 나는군.”

악담과 저주를 뒤집어쓴 로트는 턱을 덜덜 떨며 이젠하르트를 노려봤다.

이젠하르트는 재빨리 성호를 그었다.

그 모양을 보던 로트의 입 꼬리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이윽고 물결처럼 안면에 번진 경련이 멈추나 싶더니 갑자기 폭소가 터졌다.

“하하하. 속았지?”

로트는 껄껄대며 소리쳤다.

“카이렛 녀석도 속았는데 거 참 재미있군. 그래, 난 미쳤어. 죽은 자의 왕한테 영혼을 빼앗긴 미친놈이야! 여봐라, 고집쟁이 숲의 파괴자야, 내게 화해의 키스를 애걸해라. 안 그럼 네 녀석을 맛있게 잡아먹으마. 냠냠. 아하하!”

이젠하르트는 고개를 내젓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배꼽을 잡던 로트는 얼른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어이, 이젠하르트. 어딜 달아나지? 내가 무섭나? 저런, 겁에 질렸군. 이마에 식은땀 좀 보게. 용맹한 나의 기사여, 나를 두려워하지 말게. 나는 검은 숲의 악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보낸 화해의 특사야. 난 물 위를 걸을 줄도 아는데 한 번 해볼까? 이젠하르트? 오, 이젠하르트, 제발 나를 겁내지 마라!”

“가련한 포겔바이데.”

이젠하르트는 치를 떨었다.

“네놈한테 충고 한마디 해줄까.”

“뭐지? 얼른 해줘.”

“네놈이 지금 가야 할 곳이 어딘 줄 알아?”

“음, 에덴의 동산?”

“절벽의 얼음 감옥이다, 개자식아! 거기서 분뇨와 오물 속을 뒹굴며 족쇄를 차고 있으면 돼. 남의 눈깔을 파먹다가 보름달이 뜨면 제 육신을 물어뜯고 울부짖는 괴수, 그게 바로 네놈의 실체다. 거기로 가라. 그곳에서 인간의 탈을 벗고 네놈의 부정하고 추악한 본성과 야만을 드러내라. 사람을 홀리는 요사스러운 낯 껍질을 벗고 음탕한 미친 괴수의 낯짝을 드러내렴. 네놈과 똑 닮은 정겨운 벗들이 수두룩할 테니 외롭지는 않을 거다.”

“와!”

그러자 로트는 반색하며 외쳤다.

“함께 가자! 거긴 너랑 나의 보금자리 같군. 우리 손을 꼭 잡고 함께 가자꾸나. 너와 나는 동일한 운명을 타고난 형제니까 어디든 동행해야지. 함께 가자, 정다운 이젠하르트! 하하하.”

‘개자식!’

“어이, 이젠하르트? 함께 가자니까? 이크! 저게 뭐지? 사악한 염탐꾼들이군. 덤벼라, 이 녀석들! 훠이! 훠이! 워어!”

“……!”

한꺼번에 날아오른 까마귀 떼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었다.

이젠하르트는 정면으로 달려든 놈들을 두 팔로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칼을 잡아 빼 휘둘렀다. 두 동강이 난 까마귀 떼가 피를 쏟고 바닥에 추락했다. 놈들의 발톱과 부리에 뺨이 긁힌 그는 까마귀사체가 산더미를 이룰 때까지 칼을 휘둘러야 했다.

로트는 양손으로 허리를 짚고서 웃어댔다. 전방의 나무에 차례차례 달려들어 까마귀 떼를 충동질한 그는 이젠하르트가 가까스로 그곳을 벗어나자 얼른 뒤따르며 물었다.

“어이,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

“저런, 피칠갑이 됐군. 참말이지 무시무시하네. 귀여운 까마귀 떼를 삽시간에 몰살하다니!”

아무런 대꾸가 없자 빙그레 웃음을 띤 로트는 그보다 앞서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러고서 뒤돌아서 담벼락 너머로 다가오는 이젠하르트한테 저를 보란 듯이 소리쳐 물었다.

“이젠하르트, 넌 편지를 받았지?”

“…….”

“편지를 받았지, 응? 누군가 편지를 보냈을 텐데?”

이젠하르트는 질문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그가 바람이 일도록 지나치자 로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아하, 역시 받았군. 그런데 부끄러운가보군. 수줍은 아가씨처럼 달아나다니. 오, 그대, 나의 용맹한 기사여, 그대의 싱싱한 뺨은 루비처럼 붉어졌구나!”

오른발을 힘차게 내딛던 이젠하르트는 발길을 멈췄다. 뒤로 돌아섰다. 돌아서자마자 담벼락에서 얼른 한 발 비켜 선 로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둘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로트는 싱글벙글하며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뺨에 까마귀 떼의 핏자국이 얼룩진 이젠하르트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을 귓가로 걷어내고 물었다.

“편지를 받았냐고?”

“응. 받았지?”

로트가 흥분해서 되물었다.

이젠하르트는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내리깔았다가 물었다.

“편지라면, 익명의 편지 말이냐?”

“그래, 그거.”

“그거라면 물론 받았지. 어떤 어린애가 심부름을 받았다며 가져왔다더군.”

“하하. 역시 받았군.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었지?”

“뭐, 별다른 내용은 없었어.”

이젠하르트는 대수롭잖게 말을 이었다.

“연서였으니까.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내 사랑을 간청하는 내용이었지.”

로트는 극도로 흥분했다.

“어땠지? 기분이 어땠어?”

“네가 알 바 아니잖아.”

“그거, 누가 보냈게?”

로트는 참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 눈은 흥분으로 번들거리고 입 꼬리는 근질근질 떨렸다.

이젠하르트가 고개를 갸웃대며 묵묵부답하자 로트는 담벼락에 바짝 붙어 되물었다.

“누가 보냈냐니까? 누가 그걸 보냈는지 알아?”

“나야 모르지. 익명의 편지니까.”

“내가 보냈다.”

로트는 자랑스레 히죽 웃었다. 그는 흥분을 억누르느라 숨 막힌 음성으로 되풀이했다.

“내가 보냈어. 내가 보낸 편지야! 내 진실한 마음을 담아서 연서를 보낸 거야. 기분이 어때?”

그러자 깜짝 놀란 이젠하르트의 낯빛이 급속히 굳었다.

쾌재를 외치려던 로트는 다음 순간 입을 닥쳤다.

깜짝 놀랐던 이젠하르트는 격분하는 대신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보냈다고?”

이젠하르트는 어이없어하며 되물었다.

“넌 입만 열면 거짓말이냐? 그건 발신인이 따로 있어. 또 꼼수를 부리려는군.”

“뭐라고?”

로트는 매우 놀라서 반문했다.

“발신인이 따로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보냈는데.”

“하, 이 미친 자식은 어째서 날마다 거짓과 술책만 일삼는 걸까. 넌 내가 글을 모른다고 해서 속아 넘어갈 줄 알았나? 어리석긴! 베르나르 신부님께서 내게 똑똑히 읽어주셨다. 그 편지엔 차마 낯이 뜨거워 공개할 수 없는 사랑의 밀어가 담겨 있었지. 난 흔쾌히 답신을 보냈고.”

“뭐? 누구한테 답신을 보내? 언제?”

“글쎄, 누구한테 보냈을까.”

이젠하르트는 조소를 날렸다.

“그걸 네놈한테 일일이 밝힐 의무가 있나. 네놈이 내 마누라라도 되면 시시콜콜 보고하겠다만 네까짓 놈의 낯짝으로는 내 몸종으로 두기도 역겨우니 안 됐군. 결국 네 알 바 아니란 소리야.”

로트의 경악한 낯을 보며 이젠하르트는 만족스레 웃었다.

‘개자식아, 맛이 어떠냐. 미친 지랄을 하느라 방심한 새에 한 방 먹었지?’

그는 팔짱을 끼고 한 방 먹인 원수의 낯바닥을 즐겁게 감상했다. 저 나불대는 입을 틀어막으니 속이 뻥 뚫리고 오장육부가 가뜬해졌다. 싱글대던 낯짝이 경악으로 굳은 꼴을 보니 사라졌던 식욕마저 솟았다. 그간의 말 못 할 분노와 고통이 일시적이나마 싹, 씻겨가는 듯했다.

“저런, 어째서 많이 놀라셨을까?”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물었다.

“왜 그렇게 놀라? 꼭 누구처럼 그 입안에 사과를 통째로 쑤셔 넣어도 되겠군. 이 음험한 까마귀 자식아, 네놈의 시커먼 뱃속을 모를 줄 알아? 수작 부리지 마. 난 네놈의 뱃속을 훤히 다 꿰뚫고 있어. 내가 니 애비다.”

뺨의 핏기가 가신 로트는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다 조용히 뇌까렸다.

“넌 거짓말을 하는 거야.”

“거짓말이라니?”

이젠하르트는 즐겁게 반문했다.

“아, 그건 취소하마. 너의 애비는 나병에 걸린 유대 놈이지.”

“아니, 그렇지 않아…….”

“그래? 그럼 물 위를 걷는 돼지 새끼인가.”

이젠하르트는 조용히 웃었다.

로트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 눈빛은 의혹을 품고서 타올랐으나 불안과 망설임이 서려 있었다.

“넌 나를 또 교묘히 속이려 하는 거야.”

“그래? 넌 진실에도 속아 넘어가는 바보였냐.”

“거짓말하지 마. 그 편지를 내가 보낸 걸 넌 알고 있었어. 그렇지? 네 눈빛을 보면 알아.”

“내 눈은 간교를 꿰뚫고 거짓을 간파하는 창이지.”

“솔직히 털어놔.”

“뭘 말이냐, 음험한 까마귀 자식아. 너의 추잡한 속셈을 만천하에 드러내라고?”

“편지를 보고서 떨렸냐?”

“뭐?”

로트의 변한 어조를 이젠하르트는 무시했다.

로트는 거듭 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겠지?”

“뭐라고 자꾸만 헛소리를 해대냐.”

“……. 그건 진심이었어.”

불현듯 정색을 한 로트는 목구멍을 짜내 속삭이듯 내뱉었다.

“모른 체해도 이해할게. 부끄러울 테니까. 하지만 난 거짓말은 안 했어. 그건……. 편지 내용은 전부 사실이거든.”

“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관두자. 미친 자식의 헛소리는 귀담아들을-…….”

-!

말을 맺지 못한 이젠하르트는 담벼락에 앞가슴을 꽝! 부딪쳤다. 고개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쑥 뻗어 나온 두 손이 어깨와 머리칼을 움켜잡고 담벼락으로 확, 잡아당겼다.

로트는 오른손에 휘감은 머리칼에 입술을 처박고 거칠은 숨을 뿜어댔다. 금실 다발 같은 머릿결의 감촉을 음미하며 엄지로 문질러댔다. 그러고 나서 뾰족하게 혀를 내밀어 머릿결을 핥았다.

“이번이 두 번째지.”

그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잿빛 눈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음탕하게 번뜩였다.

“검은 숲에서도 이 머리칼을 휘감고서 원 없이 물고 빨고 했었는데, 넌 몰랐지? 역시 감촉이 좋군. 흐음, 이 산뜻한 향기는 그 어떤 향유에도 비할 수가 없어. 할 수만 있다면 이걸 내 모가지랑 맨몸뚱이에 휘감고 비단 이불 속에서 뒹굴고 싶은데.”

“개자식! 죽여주마!”

“에그머니!”

호들갑스럽게 비명을 내지른 로트는 간발의 차이로 뒤로 펄쩍 물러났다.

“윽!”

동시에 이젠하르트는 바닥으로 꽝! 추락했다. 두 손으로 담을 딛고 뛰어넘으려던 순간 로트가 어깨를 떠민 것이다.

정수리를 꿰찌르는 오른발의 통증을 억누르며 그는 벌떡 일어섰다. 담벼락에 손을 되짚고 땅을 박찬 반동으로 다시 몸을 날렸다.

이때 또 로트의 손이 쑥 뻗어와 손을 쳐내서 다시 추락했다. 튕기듯 도로 일어나 세 번째로 담벼락에 덤벼들었다.

하지만 몸을 날리는 대신에 그 앞에 서버렸다.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도록 담을 움켜쥔 두 손등에 이마를 파묻고 고개를 숙였다. 숨을 삼킨 어깨가 오르내렸다.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문 입술은 핏기가 가셔 있었다.

일찌감치 나무 뒤로 달아난 로트가 그 꼴을 보고 외쳤다.

“제기랄, 간이 철렁했군.”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연이어 외쳤다.

“오늘 아주 박살이 날 뻔했어. 담벼락이 높다랗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초상 치를 뻔했군. 세상에! 아직도 포기를 못 하고 저 높은 데를 뛰어넘으려 하다니 과연 복수의 화신이구나! 제기랄!”

로트는 나무 기둥 뒤에 숨어 이젠하르트를 훔쳐봤다.

이젠하르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동안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싱글벙글한 로트는 두 손을 입에 대고 소리쳐 물었다.

“이봐, 이젠하르트? 뭐 하는 거냐? 이번엔 엉덩이뼈가 부러졌나? 아님 또 발목이 부러졌나? 하하.”

“…….”

“저런, 엉덩이가 많이 아픈가 보군. 그렇다고 울다니! 쯧쯧. 그러게 어딜 쫓아와? 누굴 또 잡아 패려고? 고집불통 같으니! 역시 참회는 안 했군.”

많이 아프면 집까지 안아다 주겠다는 로트의 조롱을 들으며 이젠하르트는 담벼락에서 비켜났다. 추락할 때 부딪친 오른발을 조심스럽게 내디뎌봤다. 이윽고 경련이 이는 눈꺼풀을 꽉 감았다.

‘내가 어리석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했다.

‘저놈은 백치 한량이 아냐. 인두겁을 쓴 교활한 까마귀지. 썩은 피 냄새를 맡고서 설욕의 기회를 노리는 까마귀. 허점을 내보이는 순간 뼈다귀를 물고 늘어지는 사나운 들개처럼 나를 물어뜯을 속셈이겠지.’

한걸음 내딛자 오른쪽 발목이 쇠꼬챙이로 쑤시듯 아팠다. 검은 숲에서 부상을 당한 이후로 수치로 여겨 더욱 혹사한 발목은 그 가혹한 대우를 비난하듯이 통증을 호소했다.

이젠하르트는 그래도 걸었다. 무작정 앞으로 발을 디뎠다. 판단 착오라는 실책의 고배와 통증은 속으로 삼켰다.

걷기 시작하자 뒤에서 로트의 조롱이 날아왔다.

“어이, 이젠하르트? 많이 아프지?”

로트는 흥겹게 소리쳤다.

“저런, 궁둥이가 무거운 거위처럼 비틀비틀하는군. 하하. 많이 아프거든 고집부리지 말고 내 팔에 안겨. 너를 가뿐히 들어서 집까지 안아다 줄게. 뭐라고? 어서 안아달라고? 자, 이리 와. 내 널따란 품 안으로! 아하하.”

‘아직도 멀었군.’

이젠하르트는 저 멀리 담의 끝을 살피며 생각했다. 담벼락의 중간쯤을 지났다. 잠깐 설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날아온 작은 돌멩이가 연타로 등을 때렸다.

“쉬지 말고 가라, 패배를 모르는 기사여! 척척척, 예루살렘까지 전진하라! 어이, 왜 안 가고 섰어? 얼른 가라니까. 어린애도 아니면서 엄살은! 하하.”

‘어떻게 할까.’

이젠하르트는 멈춰 섰다. 초처럼 희게 질린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성가시게 등을 때리는 작은 돌멩이도 아랑곳없이 그는 오른발을 내려다보며 고심했다.

‘이대로 계속 가야 한다. 가증할 원수를 피해 후퇴나 우회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어쩌지? 저놈을 어떻게 따돌릴까. 따돌리기 전에 한 번 잡았으면 좋겠는데. 잡아서 저 낯바닥을 갈기고 싶다. 모가지를 꼭 잡고 여물통에 처박을 테다. 넌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겠지. 그럼 팔을 꺾고서 물통에 처박고 죽기 직전에 빼주자. 그러고 나서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빼내자. 창자를 빼내 말뚝에 묶어놓고 그게 전부 쏟아져 나와 죽을 때까지 그 주위를 빙빙 돌게 하자. 투르크(셀주크투르크. 예루살렘의 순례자를 박해하며 십자군원정 유발)놈들이 순례자에게 한 짓을 직접 시연해보자. 창자가 다 쏟아져 나오면 거기다 코를 처박고 죽겠지……. 빌어먹을, 아니다. 내 고통이 이렇게 크다면 그렇게 간단히 죽일 수야 없지.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가능한 꼭 붙들어서 탑 속에 가둬 넣고 오랫동안 괴롭히고 싶다. 죽도록 괴롭혀서 피 한 방울까지 짜내고 싶다. 놈이 죽어가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꼴을 보고 싶어. 가장 비참하고 비굴한 방식으로 굴복시켜 복수하고 싶어.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부정하며 더러운 벌레처럼 목숨을 구걸하게 하고 싶어. 저 요사스러운 낯짝도 어떻게든 망가뜨리고 싶은데…….’

짜릿한 복수의 쾌감과 상상의 희열에 빠져 이젠하르트는 통증마저 잊었다.

“……?”

이때 뭔가가 어깨를 쿡, 찔렀다.

어깨를 내려다봤다. 기다란 나뭇가지가 보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트가 보였다.

담벼락 너머로 몸을 반쯤 내민 로트는 길게 쭉 뻗은 손에 끝이 까치발처럼 갈라진 나뭇가지를 쥐고 있었다. 그 까치발에 이젠하르트의 머리칼을 걸어 몰래 잡아당기다 딱 걸리고 말았다.

시선이 맞닿자 로트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서 나뭇가지를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 미안.”

그는 헤죽 웃었다.

“콕 찔렀네. 따가웠나? 실수로 그만……. 응? 으악!”

나뭇가지가 허공으로 날아갔다.

이젠하르트는 그보다 빨리 몸을 날렸다. 느닷없이 오른팔이 붙잡힌 로트는 혼비백산했다. 그는 남은 왼손과 두 다리로 담에 매달려서 소리쳤다.

“에그머니! 사람 살려!”

“이리 와!”

“사람 살려! 죽은 자의 왕이 날 잡아먹으려고 한다!”

“닥치고 이리 못 와!”

“으악! 동네 사람들! 사람 살려요!”

“개자식 같으니! 손을 놔!”

두 발을 담 아래 지렛대처럼 디딘 이젠하르트는 로트를 힘껏 잡아당겼다. 로트도 잡힌 팔을 빼내려고 몸부림쳤다.

뿔을 맞댄 수사슴처럼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로트의 팔에 쓸린 담에서 돌가루가 쏟아졌다. 잡아당겨진 로트의 몸뚱이 절반은 젖은 빨래처럼 담벼락 반대편에 널리고 말았다.

-!

불현듯 야수가 내지르는 듯한 괴성이 폐허에 울려 퍼졌다.

괴력으로 기사를 떨쳐낸 로트는 맨땅에 드러누워 숨을 헉헉댔다. 그들의 몸싸움에 놀란 까마귀 떼가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로트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일어나 앉았다. 담벼락에 달려들어 반대편을 살핀 후 소리쳤다.

“제기랄! 아찔했네. 하마터면 저놈의 물귀신한테 산 채로 낚일 뻔했군. 흐유!…….”

로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땅바닥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누워 있던 이젠하르트가 일어섰다. 빤히 지켜보는 로트를 지나쳐서 담을 따라 걸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걷는 그 뒷모습에 대고 로트가 싱글대며 물었다.

“어이, 또 내빼기냐? 그냥 보낼 순 없지.”

새 나뭇가지를 찾아 쥐고서 냉큼 그 뒤를 쫓아가던 로트는 경악했다. 나뭇가지를 찾느라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담 너머의 물귀신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다 담벼락으로 달려들었다. 담 너머의 너른 벌판은 안개에 젖은 잿빛이었다. 젖은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 떠돌 뿐 텅 비어 있었다. 물귀신 기사는 완전히 사라졌다.

등짝에 소름이 쪽 끼친 로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숨을 토했다. 아무도 없었다. 을씨년스런 공회당뿐, 발밑에서 솟아오른 물귀신 따윈 없었다.

“맙소사! 어디로 사라졌지?”

이때였다. 나지막이 한숨이 들렸다. 바로 담 너머에서.

로트는 단숨에 달려들어 담벼락 바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이젠하르트는 담에 바싹 등을 붙이고 앉아있었다. 고개는 뒤로 젖혀 기대고 오른쪽 다리를 길게 뻗고 있었다. 꽉 다문 입술 새에서 신음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들렸던 바로 그 신음이었다.

이젠하르트는 잠시 후에 일어섰다. 담을 따라 계속 나아갔다.

로트는 뒤에 남았다. 그는 망치로 때려 박은 것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가면을 뜯어낸 듯이 낯빛이 바뀌어 있었다. 빛깔이 짙어진 초록색 눈은 기사의 오른쪽 다리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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