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_ 동행 (29/33)

에필로그 1_ 동행

해 질 무렵이 되면 목로주점은 하루 중에서 가장 바빴다.

밖에는 마구간으로 향하는 말과 노새가 북적이고 안에는 하룻밤 묵고 가려는 길손으로 가득 찼다.

해가 지고 달이 뜨자 어수선했던 주점 안에 자발적인 질서가 잡혔다. 국적이나 신분, 재산을 막론하고 따듯한 봄날 저녁, 동일 동시에 한 장소에 모여든 그들이 현재 품은 관심사는 단 한 가지였다.

“여봐, 주인장!”

손님 한 명이 소리쳤다.

“아직도 멀었어? 밥을 언제 줄 거야? 창자가 쭈그러졌어!”

“조그만 기다리세요. 다 돼 가요.”

“핫, 또 저 소리네.”

그의 일행이 껴들었다.

“또 술수를 부리는군.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먹여 치우려고 저러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목로주점 주인이나 요리사 녀석들은 약삭빠른 게으름뱅이라니까! 쳇.”

굶주린 손님 무리는 주점 한복판에 놓인 나무 송판 앞에 일렬로 주루룩 앉았다. 다들 손에는 나무스푼과 조그만 칼을 매섭게 움켜쥐고서 자리 시비가 벌어지면 기를 쓰고 자리를 사수했다.

하늘에 달이 뜨고 양고기 굽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오자 난리 북새통이던 실내에 갈수록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저녁 식사 때가 닥친 것이다.

이 시대 주점에서 하는 식사는 백병전이었다. 주린 입은 넘치고 자리와 음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힘센 놈은 자리를 차지하고 영악한 놈은 먼저 고기를 낚았다. 굶주림은 노약자랑 여자, 바보의 몫이었다.

새가슴인 우락부락한 주인장이 화덕에서 물러서자 비좁은 식탁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수많은 눈알이 번득였다.

마침내 죽과 양고기가 등장했다. 색색의 눈알이 잔뜩 숨을 죽인 채 불꽃을 튀기며 주인의 입을 노려봤다.

양고기가 얹힌 나무 송판을 힘껏 허공에 쳐든 주인이 호탕하게 외쳤다.

“자아, 식사가 나왔습니다. 맛있는 양고기입니다! 어서들 드세요!”

“우아아악! 고기다!”

“우악! 저리 꺼져! 내 고기다! 이 녀석! 우어어어!”

괴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식사가 시작됐다. 한쪽에서 뼈다귀를 통째로 우적우적 씹어대면 다른 쪽에서는 죽 그릇이 엎어지고 맥주용 뿔잔이 옆 사람의 정수리를 찍었다. 살이 야들야들한 어린 양은 제 한 몸 희사해 축성하느라 삽시간에 공중분해 됐다.

주점 한구석에는 한껏 차려입은 젊은 두 여자가 서 있었다. 그들은 우악스러운 사내들 틈에 끼어 앉을 엄두도 못 내고서 말끄러미 식탁을 쳐다봤다. 옷차림은 사치스러웠지만 그간에 겪은 고생을 암시하듯 먼지에 찌들고 낡았다. 짙은 화장을 한 얼굴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고 먼지 투성이었다.

두 여자는 두 마리 어린 양처럼 오도카니 벽에 붙어 서서 짐승처럼 먹어대는 사내들을 구경했다. 때와 장소가 이렇다 보니 다음 차례가 자기들이라고 여겼는지 애써 불안을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이따금 문을 힐긋대면서 방어하듯이 당돌하게 주변 사내들을 노려보곤 했다.

그 둘 쪽으로 한 남자가 다가갔다. 우락부락한 생김새에 손에는 기름이 번질번질한 갈빗대를 쥐고 있었다. 그걸로 여자들에게 치근대자 둘 중 나이 많은 여자가 쏘아붙였다.

“당신 왜 자꾸 이래요? 저리 가라고요. 우리가 뭐로 보여요?”

“뭐로 보이냐고?”

그 앞에 떡 버티고 선 남자는 사내들에게서 동조를 얻으려고 보란 듯이 말했다.

“그야 앙증맞은 새끼 돼지로 보이지. 살이 통통하고 한입에 쏙 넣으면 살살 녹을 만큼 살이 야들야들한 새끼돼지 말야.”

“와하하!”

식탁 앞자리를 꿰찬 사내들은 왁, 하니 웃어댔다.

두 여자는 용감히 대응했지만 응원군을 얻은 남자가 점점 대담하게 희롱하자 겁을 먹고 당황했다. 그들은 달아날 궁리를 하는 건지 정의의 기사를 기다리는지 주점 문을 불안스레 힐끔댔다.

남자는 그 틈을 타 여자의 손을 낚아챘다.

“앗, 이 손 못 놔요?”

“아잉, 앙탈은! 이봐, 아가씨. 우리 같이 목욕이나 할까? 응?”

“싫다고 했잖아. 저리 가요! 앗!”

공중에 쳐들린 여자가 비명을 울렸다.

사내들은 환호성으로 답했다. 남자의 어깨에 얹혀서 물레방아처럼 돌아가는 여자의 비명이 거세지자 혼자 남은 여자는 입술이 보랏빛으로 변해서 울었다.

“아하하핫! 잘한다! 마구 돌려! 혼을 쏙 빼놔!”

“이 망나니야! 죽으려고 작정했냐? 날 내려놔! 어마낫!”

한참 동안 격렬한 반항을 하던 여자는 갑자기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사내들은 여자를 사냥감처럼 공중에 불끈 쳐든 남자에게 환호성과 함께 맥주를 뿌려댔다. 여자가 기절하자 다른 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이봐, 그만둬.”

“넌 뭐야?”

우뚝 멈춰선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방해꾼과 마주 섰다. 용감무쌍한 방해꾼의 외양을 일갈한 그의 두툼한 입술에 헤벌쭉, 비웃음이 서렸다.

“얼씨구, 이 고자 녀석을 보게. 상판이 희멀건한 수도사 녀석 따위는 헛간에 가서 이 집 뚱보 마누라랑 몰래 오입질이나 하지 어디서 참견이야. 엉?”

“여자를 내려줘.”

“하, 네 여자냐? 네놈이 먼저 맛을 보게? 꺼져, 이 고자야!”

남자가 술에 취했고 손님들 이목이 집중되자 후드를 깊이 눌러쓴 수도사는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남자가 앞을 가로막고 고함쳤다.

“이 고자 녀석이 남의 여자를 탐내더니 비겁하게 꽁무니를 빼네. 어림없지! 에잇!”

승세를 잡은 남자는 여자를 내던지고 수도사에게 달려들었다.

곧이어 우렁찬 비명이 터졌다. 왁, 하니 터진 손님들 환호성으로 주점이 들썩 들썩했다.

“와하하하! 저것 좀 봐. 굉장한데! 애송이 수도사한테 한 방에 뻗었군. 와하하!”

남자를 번쩍 들어서 바닥에 동댕이친 수도사는 황급히 제 자리로 돌아갔다. 맨바닥에 앉아서 죽을 떠먹던 노약자랑 종자가 놀라서 그를 쳐다봤다.

두 여자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당돌하고도 야릇한 시선으로 그를 흘끔댔다.

이목이 자꾸만 집중되자 수도사는 슬그머니 벽으로 돌아앉아서 먹다 남긴 죽을 떠먹었다.

이때 정수리 위에서 목로주점 주인이 소곤댔다.

“잘하셨어요.”

주인은 거품을 물고 뻗은 취한을 가리켰다.

“저놈은 몹쓸 주정뱅이인데 밤낮 여기 눌러앉아서 저 난리를 친다죠. 아주 골치가 아파요. 이리 오세요, 수도사님. 고기 좀 드세요. 제 몫을 드리죠.”

“핫, 어딜 앉혀? 여기도 좁은데!”

주인이 두 손님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트려고 하자 오른편 손님이 발칵 성을 냈다.

“하 참, 같이 좀 앉으세요. 천당에 가려면 축성하셔야죠.”

“난 됐어요.”

수도사는 손을 내저었다.

힘 좋은 주인은 그를 강제로 떠밀었다.

“앉으세요. 어서요. 끼어서 앉으면 되죠.”

“됐다니까요.”

“아유, 탁발 수도사님 같은데 제가 한턱낸다니까요. 사양하지 마세요. 저도 천국 구경 좀 하게요.”

수도사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주인은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식탁에 앉았다. 공연한 실랑이로 또 이목을 끌기 싫었다.

좁다고 불평한 오른쪽 손님은 식성 좋아 뵈는 수도사를 무척 경계하며 제 몫을 허둥지둥 먹었다.

왼쪽에 앉은 손님은 취한이 소동을 부리건 말건, 수도사가 끼어 앉건 말건 잠자코 죽만 떠먹었다.

둘 사이에 앉은 수도사는 재빨리 왼쪽 손님의 옆모습을 힐긋 보고 후드를 더 깊숙이 눌러썼다.

이때 휭, 하니 뭔가가 날아와 왼쪽 손님 앞에 있는 죽 그릇에 떨어졌다.

“아, 제거에요. 미안해요.”

저 멀찌감치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소리쳤다.

“이리 던져주실래요? 야, 팔을 조심하라고 했잖아.”

왼쪽에 앉은 손님, 이젠하르트는 상인 행색인 손님에게 갈빗대를 던져줬다.

식사는 정점에 올랐다. 뒤늦게 도착한 손님이 헐레벌떡 자리에 껴들자 여기저기서 빈번히 멱살잡이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수도사, 로트는 왼편을 경계하느라 죽 떠먹는 숟가락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오른편에 앉은 손님은 거동이 수상쩍은 수도사가 심상치 않게 자기 쪽으로 밀착해오며 반대편으로는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 돌아앉자 자기 저녁밥과 맥주를 노린다는 심증을 굳히고 미친 듯이 먹어치웠다. 수도사 주제에 식전 기도는커녕 밤도둑처럼 얼굴을 반이나 내리덮은 후드가 상당히 미심쩍었다.

휙-

“아, 미안해요. 제거예요. 하 참, 자꾸만 날아가네.”

또 날아온 갈빗대가 죽 그릇에 떨어져서 로트는 화들짝 놀라 상인에게 얼른 갈빗대를 던져줬다.

“참, 수도사님.”

이때 주인이 뒤에 나타나서 그를 불렀다.

흠칫 어깨가 굳은 로트는 들릴락 말락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시오?”

“그분은 찾으셨어요? 여기 어디 계실 텐데.”

“누, 누구 말이오?”

“아, 찾으셨군요. 바로 옆에 계셨네. 이분이 맞지요?”

무슨 소리냐며 로트는 허둥지둥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주인은 축성에 열심이었다.

“아니, 이분이 아닌가요? 맞을 텐데요. 아까 도착하자마자 이분을 찾으셨잖아요. 이 주점에 머리칼이 긴 금발인 손님은 이분 빼고는 없습니다만. 보세요, 손님? 이 수도사님께서 찾으시던데요. 일행이 아니신가요?”

주인이 이젠하르트의 어깨를 흔들며 대놓고 묻자 로트는 식탁에 이마를 쿵! 처박았다.

“어라, 아니었던가요?”

주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제가 잘못 봤나요? 허, 이상한데. 손님, 이 수도사님, 아세요?”

“알지.”

“……!”

이 대답에 로트는 고개를 홱, 쳐들고 조심스레 옆을 돌아봤다. 낭패가 역력했던 낯빛이 싹 달라졌다.

로트는 후드를 벗으며 오른편으로 돌아앉아서 이젠하르트를 쳐다봤다.

“아니, 이, 이럴 수가!”

이젠하르트와 눈이 마주치자 별안간 크게 놀라는 몸짓을 하며 탄성을 터트린다.

“이젠하르트, 이게 어쩐 일이야? 여기서 널 만나다니!”

“거봐요. 맞지요? 제 눈이 정확하다니까요.”

주인은 가버렸다.

로트는 눈을 비비며 계속 외쳤다.

“와, 이거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맙소사, 이런 우연이 있다니!”

“…….”

“……. 오랜만이야. 이런 데서 널 만나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데…….”

'제기랄.'

뱉고 나니 제가 벌이는 멍청한 짓이 더 믿기지 않아서 로트는 입을 닥치고 죽을 떠먹었다.

곁에서는 손님들 사이에 맥주 쟁탈전이 벌어지고 물어뜯긴 뼈다귀가 바닥에 쌓여가는 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차곡차곡 쌓였다.

로트는 기회를 틈타서 조심스럽게 이젠하르트의 옆모습을 살폈다. 그는 예전의 그답지 않게 방심한 듯이 묵묵히 맥주를 마신다. 표정은 무덤덤하고 나태해 보이기까지 했다. 입술은 거칠고 여윈 두 뺨에는 지난겨울에 앓은 병색이 남아 있었다.

'맥주를 마셔서 저렇겠지.'

로트는 제 죽 그릇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문득 목이 막히며 아릿한 목구멍에 돌덩이가 차오른다.

얼음감옥에서 나온 지 한 달여가 지났는데도 이젠하르트는 장작개비처럼 말랐다. 눈가와 이마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듯한 그늘이 새겨져 있다.

“……. 일부러 쫓아온 건 아냐.”

“…….”

“오다가 우연히 너를 봤어. 처음에는 넌 줄 몰랐지만 보다 보니 꼭 너 같더라. 마침 같은 방향으로 가기에…….”

삼키려던 죽이 목에 걸려 변명이 끊겼다. 기침을 해대느라 눈이 벌게져서 고개를 들고나니 식어가는 죽 그릇 옆에 새 맥주잔이 놓여 있다.

어리둥절해서 돌아보니 이젠하르트는 태연히 자기 맥주를 마시고 있다. 다른 손님도 자기들 죽 그릇을 핥느라 눈이 벌겠다.

로트가 고개를 갸웃대고만 있자 이젠하르트는 자신의 빈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안 마실 거냐? 하긴 수도사니까 금주의 맹세를 했겠군. 그럼 이리 줘.”

갑작스레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치고 올라온다.

로트는 허겁지겁 맥주를 마시고 죽을 떠먹었다. 경계하던 수도사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자 오른편 손님도 자기 죽 그릇을 닥닥 긁어 먹었다.

로트가 두 그릇째 죽을 비웠을 때였다.

“어? 여봐요?”

누군가가 식탁 끄트머리에서 그를 불렀다. 돌아보니 웬 코가 빨간 사내가 반색하며 손짓을 해댔다.

“오호라, 당신이 맞네요. 하핫, 나예요. 나 모르겠어요?”

“누구신지?”

“아, 모르겠어요? 그때 만났었잖아요. 이 주점에서요. 눈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던 날이었죠.”

로트는 기억을 더듬으려고 애썼다.

빨간 코는 그 모양을 보고 자기 일행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 친구 그때 단단히 얼빠져 있더니 우릴 몰라보는데.”

“암, 단단히 얼이 빠졌었지.”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여자라니요?”

로트가 되물었다.

빨간 코는 능청맞게 헤벌쭉 웃었다.

“이야, 시치미를 딱 떼시네. 파혼했다는 여자 말예요.”

“아…….”

“아휴, 그래서 수도사가 되셨구만. 짝사랑하던 여자를 딴 놈팡이한테 뺏기고 추방당하더니!”

“어허, 추방이라니!”

일행이 소리를 빽! 질렀다.

“그냥 추방이 아니지. 영구추방이야. 설교사를 죽였으니까.”

“……!”

사람들 시선이 빗발치듯 꽂혀서 로트는 삼켰던 죽을 뿜어낼 뻔했다. 이 청천벽력 같은 폭로가 불러일으킨 파급력은 아랑곳없이 빨간 코는 신나게 소리쳤다.

“전혀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뭐, 이해합니다. 그때 당신은 헤까닥한 사람 같았죠. 당신이 코를 찔찔 짜고 울기만 하자 이 녀석이 말했죠. 그 여자를 납치하라고. 난 결사반대했어요. 남의 여자를 납치하면 목이 매달린다고 말이죠. 그랬더니 당신은 죽 그릇에 코를 처박고 엉엉 울었지요. 그래,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그날 당신은 무작정 뛰쳐나갔잖아요. 당신 일행은, 그 누구냐, 양을 반 마리나 혼자 해치운 친구 말예요, 그 친구도 당신을 쫓아 뛰쳐나갔었죠. 그때 우린 딱 감을 잡은 겁니다. 아하, 저 친구가 기어코 그 여자를 납치하러 가는구먼. 하지만 우린 애도의 기도문을 외웠어요. 그날은 눈이 펑펑 왔고 도적 떼한테 잡아 먹힐 게 뻔했으니까요. 근데 살아 계시네요? 우린 당신이 개죽음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수도사가 되셨네요. 쯧쯧. 이봐, 양털! 자네 이 친구 기억나지?”

로트가 경악한 사이 빨간 코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상인을 불러댔다. 식사 내내 사방팔방으로 갈빗대를 날려 보냈던 그는 빨간 코가 가리킨 손길을 따라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로트를 쳐다봤다.

“어라라, 그분이네?”

샹파뉴의 양모 중개 상인은 반색하며 외쳤다.

“아, 그분 맞네요. 대뜸 제 목을 졸랐죠. 오랜만이네요.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전 어쩌다 보니 겨우내 여기 눌러앉았어요. 식사도 잘 나오고 맥주 맛이 좋다죠. 하핫. 참, 그 집안은 어떻게 됐나요? 벨데케 그 양반은 죽었죠? 기사는요? 기사도 죽었겠죠? 얼음 감옥에 가보셨어요?”

상인은 그러고서 로트 곁에 앉은 이젠하르트를 힐끔 보더니 다시 로트에게 말했다.

“왜 그러세요? 못 만났어요? 거 참 안됐네. 제가 헛고생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참, 지난겨울에 피살됐다는 전령 말이에요. 그 전령은 바로 당신의 고향에서 보낸 자랍니다. 쩝, 그러게 제가 뭐랬어요. 오스터팅겐 성백의 영지는 망조에 걸렸다고 했잖아요. 아마 벨데케 가문 기사도 지금쯤-…….”

쾅-

“어욱, 깜짝이야. 저놈은 누구야?”

문득 요란한 굉음이 터져서 상인과 같은 의문을 품고 손님들이 주점 문을 쳐다봤다. 빨간 코는 맥주잔을 든 채로 엉거주춤 서버렸다.

콰당! 발길에 차여서 열린 문가에 한 사내가 서 있다. 차림새를 보니 편력 기사로 보이는 그는 허리에 찬 검과 양날 도끼를 뽐내며 주점 안을 유유자적 휘둘러봤다. 남들이 전부 주목하건 말건 아랑곳없다는 투였다.

사내는 식탁으로 향하며 주점 하인에게 명령했다.

“야. 고기를 가져와.”

“손님, 고기는 벌써 다 떨어-……. 우악!”

하인은 두 다리를 허공에 뻗고서 빈 맥주통 안에 꽂혔다.

“잔말 말고 가져와. 난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제에기. 어떤 개잡놈인지 몰라도 두고 보자. 뼈도 못 추릴 테니. 감히 내 말을 훔쳐갔지. 저리 비켜!”

“우억!”

식탁으로 다가선 사내는 한 손님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내던졌다. 사내가 앉자 반경 2미터까지 자리가 텅 비었다.

잠시 후, 주점 하인이 턱을 달가닥대며 고깃국을 내왔다.

사내는 송판에 놓인 고깃국을 모조리 쏟아붓고 맨손으로 고기를 덥석 집어먹었다. 짙은 콧수염을 타고 기름 덩어리와 국물이 흘러내렸다. 남이 보건 말건 유유자적 배를 채운 사내는 먹다 남은 돼지비계 한 점을 벽에다 던졌다.

“야. 처먹어.”

비계는 여자의 치맛자락에 빗맞고 튕겨 나갔다. 눈을 치뜬 여자는 목덜미를 새빨갛게 붉혔다.

손님들 시선이 여자에게로 쏠리자,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왜? 저 계집을 깔고 싶냐? 내 궁둥이를 핥으면 저것들을 하룻밤씩 빌려주지. 어떤 놈이 먼저 맛을 볼래? 추잡한 돼지 새끼들! 눈깔들 못 치워?”

두 여자는 사내의 아내와 처제로 밝혀졌다.

사내는 이후로도 손님과 여자에게 입에 담지 못할 음란한 조롱과 욕을 퍼부었다.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자 더는 꺼릴 게 없다고 여겼는지 두 여자의 태도도 달라졌다. 사내가 퍼붓는 폭언과 학대에 익숙한 듯이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면서 난폭한 악당이 등장하자 주눅이 든 사내들을 보란 듯이 멸시하고 비웃었다.

사내는 빨간 코의 맥주를 빼앗아 마셔버렸다. 이윽고 여자의 시선을 좇다가 “저년이!”하고서 눈에 불꽃을 튀겼다. 제 아내가 보란 듯이 웬 놈팡이 쪽으로 추파를 던진다.

와당탕-

“이 개잡놈 봐라?”

사내는 달려들어서 로트의 멱살을 움켜쥐고 부르짖었다.

“네놈이 저 매춘부를 홀렸냐? 벌써 둘이 눈이 맞았어? 이 추잡한 개잡놈아! 죽어라!”

“으윽!”

“이런 수도사 새끼들은 벗겨놓으면 죄다 변태에 호색한이야. 이 새끼야, 너 저 창녀랑 언제 눈이 맞았냐?”

“윽! 이, 이봐요. 당신 갑자기 왜 이래? 억!”

느닷없이 멱살이 잡혀 허공에 쳐들린 로트는 숨을 헐떡이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럴수록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아귀는 숨통을 집게처럼 죄었다.

울긋불긋해진 로트의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본 사내는 비위가 더 틀렸다.

“얼씨구, 이 새끼 낯짝 좀 보게.”

“이, 이거 놓고 말하시오. 으…….”

“주둥이 닥쳐. 흥, 악마의 낯바닥이로구나. 그렇군. 요따위 요사스러운 상판으로 저년을 홀렸군?”

“이거 놓으래도……. 아윽!”

“옳거니, 그러고 보니 네놈 짓이야. 네놈이 시켜서 저년이 내 말을 훔쳐다 팔아먹었어. 내 말을 내놔! 이 음탕한 말 도둑놈아! 그걸 팔아서 저년하고 달아나려고 했냐?”

“무슨 소리야? 난 모르는……!”

오! 하는 손님들 탄성과 함께 로트는 천장으로 솟구쳤다가 콰당, 추락했다. 뒤이어 양날 도끼가 쓰러진 그를 향해 날아갔다. 빗나간 도끼에 의자가 와지끈, 박살이 났다.

밖에 나갔던 주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기사님, 왜 이러세요? 그분은 수도사입니다. 천벌을 받으시려고!”

“꺼져! 남의 계집을 홀리는 악마나 천벌을 받겠지.”

“억!”

거구인 주인장은 제 몸뚱이로 식탁을 휩쓸었다.

주인을 내던진 사내는 기절한 양 누워 있는 로트에게 다가섰다.

“일어나, 이놈아. 네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피로써 네놈의 죗값을 치러라. 안 일어날래? 엄살을 피워?”

무지막지하게 처박혔기 때문에 로트는 반쯤 정신이 나가서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도 몰랐다.

두 번째 도끼가 바로 날아들었다. 빨간 코는 제 눈을 가리며 “사람 살려!” 하고 외쳤다.

눈알이 툭 불거진 일행은 날아가는 도끼를 보다가 소리쳤다.

“앗! 저게 뭐냐?”

도끼는 로트의 머리를 박살 내는 대신에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 옆에 함께 떨어진 죽 그릇이 바닥에서 빙그르르, 돌아갔다.

도끼를 쳐들었던 사내는 제 손목을 맞혀서 도끼를 떨어뜨린 무기가 뭔지 다급히 주변을 휘둘러봤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검이나 창이 아니다. 웬 나무로 된 죽 그릇이다.

사내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떤 놈이냐? 누가 이걸 던졌어? 누구야?”

야수가 포효하자 죽 그릇 주인 쪽으로 손님들 고개가 팩팩, 돌아갔다.

로트의 오른편에 앉은 손님은 부릅뜬 눈을 끔뻑대며 사라진 제 죽 그릇과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으드득, 이를 갈고 다가섰다.

“요놈 봐라. 네놈이 던졌군.”

“으악! 아니에요! 제가 아니에요! 이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내 접시를 집어서 던졌어요! 사람 살려!”

그러자 사내는 손님이 가리킨 이젠하르트의 야윈 몰골을 위아래로 훑고 콧방귀를 끼었다.

“이 말라깽이는 또 뭐야. 야, 저걸 니가 던졌냐?

“그래.”

이젠하르트가 순순히 대답했다.

“내가 던졌다. 술주정은 마구간에서나 해. 여기선 조용히 식사 좀 하게.”

“아, 그러셔?”

상대의 무모한 일갈에 사내는 전의가 치솟아서 유쾌해졌다.

“너도 기사라 이거지. 요새는 어중이떠중이가 죄다 기사 행세를 해대니 속는 셈 치고 믿어줘야겠군.”

“…….”

“흥. 그런데 꼬락서니를 보니 어디 동굴에 처박혀 죽다 살아난 유령처럼 으스스하네. 어이, 용맹한 기사님. 평소에 밥은 먹고 다니시나? 기사치고는 너무 맥아리가 없잖아. 굶어 뒈진 조상이라도 있나.”

“…….”

“어이, 대꾸를 해. 넌 어디 출신이냐? 저놈하고 일행이냐?”

“아니.”

“그럼 저놈하고 뭔 상관이야?”

“나하곤 상관없지.”

이젠하르트가 무심히 받아쳤다.

사내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그럼 닥치고 구경이나 하시지 왜 주제넘게 나대?”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이때 로트가 비틀대며 일어나 앉았다.

그 꼴을 본 사내는 아니꼬운 웃음을 터뜨리며 이젠하르트에게 말했다.

“그럼 네놈은 다음 차례니까 얌전히 기다려. 야, 이 색마야. 내 계집을 욕보이고 말을 훔쳐 갔으니 네놈에게 명예롭게 값을 치를 기회를 주마. 일어나! 나가서 결투를 하자!”

로트는 자신이 말 도둑도 아니고 여자한테 추파를 보낸 적도 없다고 강하게 항변했다.

“거짓말 마. 안 그럼 저년이 왜 너만 쳐다보고 있냐? 악마의 낯바닥으로 저년을 홀렸잖아. 이 색마야, 네놈한테도 불알이 달려있으니 명예롭게 맞서 싸워라. 밖으로 나가서 창 시합을 하자!”

사내는 반항하는 로트를 강제로 잡아끌었다. 사내의 완력이 어찌나 센지 로트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이때 주인장이 용감히 축성에 나섰다.

“기사님, 제발 그만두세요. 달밤에 웬 창 시합을 한다는 겁니까. 게다가 이분은 수도사님이에요. 감히 주님의 종복과 결투를 하다니요? 천벌을 받습니다. 굳이 하시겠거든 차라리 대적 기사랑 붙으세요.”

분풀이가 필요했지만 주인 말대로 수도사를 죽이기가 속으론 께름칙했던 사내는 생각을 바꿨다.

“좋아. 그럼 어떤 놈이 이 음탕한 색마 대신 붙을 테냐? 어떤 쓸개 빠진 놈인지 몰라도 목숨 값은 크게 불러야 될 거야. 제 무덤을 파고 비문을 새겨야 할 테니. 누구야? 어디 나와 봐. 기사 신분이 아니어도 상대해주마. 누구든 나와 봐!”

사내는 로트의 뒷덜미를 놔주고 의기양양하게 기다렸다. 건장한 체구인 손님들은 한발씩 뒤로 물러났다. 빨간 코와 일행은 서로를 떠밀었다.

“흥, 아무도 없냐.”

사내가 코웃음을 치자 주인은 누구든 이 땅에 신의 정의가 존재함을 증명해달라고 읍소했다.

사내는 기고만장해서 웃었다.

“하, 꼴좋다. 겁쟁이 녀석들! 어이, 거기. 점잖게 식사나 하시는 기사 친구, 한 놈도 나오지 않으니 당신이 대신 나서야겠는데.”

“그러지.”

이젠하르트가 태평한 어조로 기꺼이 수락하자 여기저기서 경탄이 터졌다.

별다른 생각 없이 물었던 사내는 이젠하르트의 태도가 매우 침착함을 깨닫고서 비로소 진지한 관심을 품었다.

“정말로 당신이 나서겠다고?”

이젠하르트는 사내가 던진 질문은 무시하고 로트를 돌아봤다. 얼떨떨한 로트가 멍하니 마주 보자 이젠하르트는 그의 주의를 환기하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전에 대적료부터 흥정해야겠지만 나중에 따로 계산하면 되겠지. 우선 계약금은 포도주 한 잔이야.”

“그건 제가 사지요!”

주인이 기꺼이 나섰다. 하지만 이젠하르트의 용맹함과 외양은 반비례여서 사내의 양심을 찔러 기적을 바라는 심정으로 열렬히 덧붙였다.

“한 통이라도 기꺼이 사겠습니다. 주님의 전사를 위해서! 승리하면 가장 맛 좋고 살찐 양도 잡겠습니다. 주님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요.”

“어라라? 저 기사가 누군지 이제 알겠군.”

이때였다. 한 손님이 남의 주목을 끌만큼 제 이마를 대뜸 무지막지하게 후려치더니 외쳤다.

“이제야 기억이 나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어. 하핫. 이봐요, 주인장! 양을 잡겠다는 약속은 꼭 지켜요. 이 많은 입을 다 먹이려면 거덜이 날 거요. 하하하.”

“뭔 소리요?”

손님들이 물었다.

양을 꼭 잡으라는 손님은 흥이 나서 소리쳤다.

“여러분, 우린 횡재했으니 걱정일랑 말고 속 편히 구경이나 합시다! 지상 최고의 창 시합을 구경하자고요.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결투가 아닙니다. 그 명성이 저승까지 이르고, 창을 대려면 벌목을 해야 하는 저 ‘숲의 파괴자’, 그가 선뵈는 창 시합이니까요!”

“뭐? 숲의 파괴자? 당신 미쳤군. 이런 데서 생뚱맞게 그를 찾다니.”

“그럼 어디서 찾습니까? 바로 저기 있는데요!”

손님은 이젠하르트를 손짓하며 부르짖었다.

“여러분! 저분이 바로 숲의 파괴자올시다! 기억들 하시죠? 슈바벤에서 열린 마상경기의 영웅 말예요!”

곧 환성이 터지며 누구라 할 것 없이 이젠하르트를 돌아봤다. 깜짝 놀란 편력 기사 사내는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고서, 그 드높은 명성과는 달리 태도가 몹시 시큰둥한 ‘숲의 파괴자’를 쳐다봤다.

환호성을 올린 주점 주인은 냉큼 포도주 한 잔을 내왔다.

잔을 건네받은 이젠하르트는 그걸 로트에게 들어 보이고 천천히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고 상인은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저, 저 사람이 벨데케의 기사였다고? 살아있었군. 하, 거 참! 이거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데! 몰라보게 변했구나!”

상인은 완전히 넋이 빠져서 이젠하르트를 바라봤다.

로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밤이 되자 손님들은 식탁을 치우고 잠자리를 준비했다. 양 떼처럼 모여 주점 한복판에 드러누운 그들은 각자의 짐 꾸러미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이젠하르트는 모자를 베고 양 떼의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양날 도끼를 휘두르는 늑대에 쫓겼던 양 떼가 너도나도 양치기 곁으로 몰려들었다.

밤이 이슥할 무렵, 양치기 오른편에 꼭 달라붙어서 자던 양 떼가 연거푸 포악하게 고함을 질렀다.

“컥! 누구냐? 어떤 놈이 남의 배를 밟아?”

“미안해요.”

“커헉! 옆구리를 밟지 마!”

“미안해요. 캄캄해서 못 봤어요.”

“아휴, 어딜 껴들어? 좁아요!”

“조금만 옆으로 터줘요.”

“염병, 널따란 데 놔두고 왜 여기 끼어든담? 늑대 새낀가. 에잉!”

양 떼를 모조리 밟고 들어선 한 마리 늑대는 간신히 자리를 트고 맨바닥에 몸을 뉘었다.

자리는 옆 사람과 어깨가 꼭 맞닿을 만큼 비좁다. 이 좁은 틈에 몸을 눕힌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숨을 죽이고 있자니 양치기가 반대편으로 돌아눕는 기척이 느껴졌다.

“…….”

반듯이 드러누운 로트는 그 기척을 온몸으로 느끼며 어두컴컴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피로했다. 자고 싶었다. 어제까지는 한순간이라도 모든 사념을 떨치고, 뚜껑을 닫아버리면 완벽히 외부와 차단되는 상자처럼 의식의 끈을 끊고 잠에 취하고 싶었는데, 오늘 밤은 흥분과 얼떨떨한 감격이 가시지 않은 심장이 시끄럽게 고동쳐서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다. 고난 끝에 도달한 사막의 저 모래 언덕 너머에서, 육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생동하게 하며 어른대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듯이.

로트는 눈을 감았다. 어깨너머로 양치기가 내쉬는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서 취객이 해대는 잠꼬대와 코 고는 소리가 불협화음을 이룰 무렵, 로트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벽에 걸린 흐릿한 등불 덕분에 머리에서 어깨를 타고 옆구리로 흐르는 이젠하르트의 실루엣이 보였다.

로트는 바로 목전에 드리워진 황금빛 머리칼과 완고한 어깨 그리고 암벽 같은 등을 응시했다. 어깨너머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고를수록 심장이 제 존재를 알리듯 뛴다.

‘이젠하르트.’

로트는 오늘도 그를 불렀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자고 있어?’

‘잔다’ 하고 이젠하르트의 뒷모습이 말했다.

제 심장이 점점 더 급박하게 고동치는 소리를 들으며 로트는 수줍게 말을 이었다.

‘아까 일은 뭐라고 사례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뜻밖이라서 경황이 없었어.’

- 내게 사례할 건 없지. 그놈이 그냥 달아났으니.

‘넌 정말로 날 위해서 싸우려고 했어?’

- 널 위해서가 아냐. 빚을 갚으려고 했을 뿐이지.

‘날 위해서 접시를 던진 거지?’

- 헛물 켜지 마. 너한테 던졌는데 빗나간 거다.

‘네가 날 위해서 접시를 던지고 창을 들려고 하다니…….’

- 시끄러워. 아니라고 했지.

만면에 번지는 미소를 삼키며 로트는 이젠하르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포도주 잔을 쳐들어 보였던 그의 모습을 다시금 되새겼다.

난동을 부렸던 편력 기사는 내일 정오에 결투를 하기로 정해지자 말을 구해오겠다고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자도 사라졌다. 빨간 코와 상인은 사내가 여자를 미끼로 재물을 뜯어내는 사기꾼이라고 주장했다.

로트는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코끝에 금실 다발 같은 머리칼이 닿았다. 그 감촉을 기억하는 손끝이 부르르 떨려서 무심코 이젠하르트의 목덜미에 숨을 내뿜었다.

순간 숨을 잔뜩 죽이니, 어깨 너머에서 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어디까지 날 쫓아올 거냐.”

“…….”

“계속 쫓아올 거냐.”

“…….”

“자는 체하지 마. 왜 자꾸 날 쫓아 오냐고 물었어.”

“네가 불편하다면 내 자리로 돌아갈게. 저긴 좀 추워서 온 건데…….”

“말 장난 하지 마. 그럴 기분 아냐.”

“…….”

“왜 날 미행하느냐고 물었잖아.”

로트는 이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면서도 짓궂은 자기 유혹에 스스로 굴복했다.

“오해는 하지 마. 널 미행한 게 아냐.”

“그럼 뭐야?”

“그렇게 캐물으면 꼬집어 말하긴 힘들지만 굳이 이유를 대라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내 진실한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왔다고 할까.”

잠깐의 한숨과 긴 침묵 후에 기사가 말했다.

“그럼 앞으로도 네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라. 난 그 반대로 갈 테니. 오늘부로 빚은 다 갚았어.”

이젠하르트는 그러고서 모자로 얼굴을 덮었다.

로트는 또다시 유혹에 져서 얼른 고개를 쳐들고 모자 밖으로 드러난 귀에 속삭였다.

“난 이자를 받고 싶어. 널 위해서 내 목숨을 걸었으니까.”

“…….”

“난 아무도 뚫지 못한 사선을 넘어서 달려왔어. 오로지 널 위해서 목숨을 건 거야.”

“……. 생색을 내는 거냐.”

“그래. 넌 평생 내게 그 빚을 갚아야 해. 내가 널 살렸잖아. 고작 맥주 한 잔과 창 시합 한 번으로는 부족해.”

이젠하르트는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어깨가 눌려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그가 발작하리라고 예상하고 어깨를 누른 로트는 머리를 찧고 싶은 유혹을 되삼키며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농담이니까 너무 화내지 마. 그렇게 일일이 화를 내면 건강에 해로워 성묘에 가기도 전에 쓰러지면 어떡해.”

“남의 걱정이나 할 처지가 아닐 텐데. 넌 내일 당장 객사할 수도 있어. 가는 곳마다 그렇게 여자랑 분란을 일으키니 제 명에 못 살지.”

“…….”

“손이나 치워.”

로트는 잠자코 손을 치웠다. 감격에 찼던 가슴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짓궂은 미소가 떴던 입가에는 쓴 미소가 피어났다.

가슴에 서글픈 격랑이 들어찬다. 어깨를 그저 슬쩍 눌렀을 뿐인데도 이젠하르트는 일어나지 못했다. 상인도 그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한 달 여전에 덤불 뒤에 숨어서 고향을 떠나는 그를 처음 엿봤을 때 제가 그랬듯이.

온 신경을 등 뒤로 곤두세운 이젠하르트는 정적이 흐름을 이상하게 여기고 물었다.

“왜 또 그러냐.”

대답이 없다.

“또 뭔 꿍꿍이를 벌이고 있어?”

“아무것도.”

한 참 후에 쉰 목소리가 답했다.

이젠하르트는 다시 잠을 청하려다 말고 충동적으로 물었다.

“넌 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거냐. 네 명예는 회복됐어. 돌아가.”

“아니, 안 갈 거야.”

“왜?”

“내 마음이 향하는 데가 고향이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군. 잠이나 자라.”

“……. 이젠하르트.”

“…….”

“이젠하르트?”

“또 왜?”

“넌 잠이 와?”

“…….”

“난 자고 싶은데도 잘 수가 없어.”

“자.”

“이젠하르트.”

“그만 성가시게 하고 자. 네놈이 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살이 떨려. 또 뭐라고 지껄여서 내 속을 긁어놓을까,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섭다고. 그만 자라.”

이젠하르트는 모자를 다시 얼굴에 덮었다.

밤이 깊어가자 사방에서 울리는 불협화음이 높아졌다. 긴장으로 굳었던 이젠하르트의 어깨도 풀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지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로트는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며 이젠하르트가 잠이 들었음을 확인했다. 그러고서 그의 등에 대고 속삭였다.

“이젠하르트, 혼자서 잘도 자는구나. 나도 자고 싶어. 그날 이후로 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단 하루도 푹 잔 적이 없어. 이젠하르트……. 잠깐 나를 돌아봐줘. 자고 있다면 꿈속에서라도 뒤를 돌아보고 날 용서한다고 말해줘. 제발 잠을 자게 해줘……. 네가 나를 재워줘…….”

툭-

몸을 뒤척이는 기척이 들린다 싶은 순간, 어깨너머로 뭔가가 넘어와서 가슴팍에 툭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로트는 그걸 더듬어서 집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손에 닿았다. 심신 안정제가 든 약병이다.

“그거나 마셔라.”

이젠하르트가 기사가 말했다.

“한 방울만 마셔. 다 마셨다간 어떻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이상한 신음에 이어서 휘감긴 두 팔에 이젠하르트는 상반신이 죄였다. 바로 뒤에서 귓전에 닿아오는 숨결은 뜨겁고 거칠다. 목구멍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배 속을 텅 비워낸 듯이 깊고 지쳐 있다.

이젠하르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로트는 온몸을 떨면서 힘껏 그를 끌어안았다. 떨쳐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그렇게 껴안고 나서야 제 두 팔이 얼마나 이 포옹을 원했는지 깨달았다. 얼마나 오랜 나날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는데 이젠하르트가 툭 내뱉는다.

“이 꼴이지만 아직은 널 때려눕힐 기운이 있어. 엄한데 힘쓰지 말고 잠이나 자.”

“…….”

“뭐 하냐. 안 들려?”

로트는 두 뺨을 붉히며 팔을 풀고 눈을 감았다. 오랜 불면과 긴장에 시달린 눈은 시큰하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가슴이 너무나 벅차서 오늘 밤도 쉽사리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한참을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는데 이젠하르트가 돌아누웠다. 잠이 든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내리감은 눈꺼풀과 표정은 고요했다.

로트는 문득 긴장으로 굳었던 온몸에서 맥이 빠지는 걸 느꼈다. 고개를 슬쩍 돌리기만 해도 머리칼이 두 뺨에 닿는 바로 곁에서 이젠하르트의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고동치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로트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무심결에 눈을 감았다.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로트는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있자니 둥글게 깎인 머리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일어나셨어요?”

주점 하인이 손바닥을 코앞에 휘휘, 저어대며 물었다.

“정신이 드시나요? 아유, 다행이에요. 전 기절하신 줄 알았죠. 어제 과음하셨나 봐요.”

여기가 어디인가 싶어서 로트는 고개만 쳐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누워 있는 곳이 벽 구석이다. 주점 한복판에는 어젯밤에 치웠던 식탁이 제자리에 놓여 있다. 손님은 단 한 명도 없다.

로트는 물벼락을 맞은 듯이 일어나서 소리쳤다.

“제기랄! 다들 어디 갔지?”

“손님들 말인가요?”

하인이 태평하게 물었다.

“목욕탕에 갔는데요. 왜 그러세요?”

“기사는?”

“네? 누구요?”

“이젠하르트, 숲의 파괴자 말야! 이젠하르트도 목욕탕에 갔나?”

“아, 그분은 아까 떠나셨는데요.”

“뭐라고? 벌써!”

“그럼요. 떠날 분은 다들 떠나셨죠. 벌써 대낮인걸요. 으앗, 왜 그러세요? 수도사님!”

로트는 무작정 돌진하다가 의자를 엎으며 넘어졌다.

다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가니 화창한 봄날 햇살이 눈을 찌른다. 핑그르 천지가 회전하며 현기증이 일다.

먼지가 날리는 목로주점 앞 가로에 서서 망연히 비틀대던 로트는 남쪽으로 돌진했다.

이 직후에 주점에서 하인이 튀어나와 그가 쌩하니 사라진 방향으로 소리쳤다.

“수도사님! 잠깐만요! 수도사님!”

로트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숨이 끊어져라 달렸다. 한참이나 내달렸더니 기절초풍할 광경이 펼쳐졌다. 높다란 언덕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제기랄, 어느 쪽이지?’

침을 튀겨서 방향을 정할 새도 없고 그런 요행에 운명을 걸기에는 현재 상황이 너무나 절박했으므로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왼쪽 길로 들어서서 질주했다.

한 참 후에 숨을 헐떡이며 되돌아온 그는 이번엔 오른쪽 길로 뛰어갔다.

그리고 또 한 참 후에 다시 돌아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따가운 햇볕에 녹아버리는 눈사람처럼 사지를 벌리고 맨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밝은 햇살이 눈이 부신다.

로트는 숨을 헐떡이며 절망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 엄혹하신 주님…….”

이때 갈림길에 있는 덤불에서 바스락, 바작 나뭇가지가 밟히는 소음이 울렸다.

로트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그쪽을 돌아봤다. 코를 쫑긋대는 다람쥐가 튀어나왔다.

“망할 녀석!” 하고 욕을 퍼부은 로트는 흙을 한 움큼 쥐어 다람쥐에게 뿌리고 땀 범벅이 된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흘렸다.

“제기랄……. 젠장……. 차라리 독을 타지 그랬냐. 하아……. 이젠 어디로 가야 할까.”

문득 햇살이 가려지며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로트는 홀연히 나타나서 저를 내려다보는 이젠하르트랑 눈이 마주쳤다.

멍하니 드러누운 로트를 내려다보며 그가 물었다.

“네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아직도 갈피를 못 잡았냐.”

모자 아래로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을 흘리며 이젠하르트는 남쪽으로 이어진 길을 택했다.

로트는 벌떡 일어섰다.

먼 길을 돌아서 마침내 이곳에 섰다.

아직은 요원하지만 저 언덕을 넘고 산을 넘으면 언젠가는 평탄한 초원이 보이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그 끝에 긴 여로의 끝이 보이리라.

남쪽 길로 들어선 이젠하르트는 벌써 저만치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져간다.

“이젠하르트, 같이 가자!”

로트는 그쪽으로 힘차게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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