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흰바다매 이젠하르트
한겨울이 됐다.
가을비로 진창이 됐던 땅은 빙설에 뒤덮여서 얼어붙었다. 오전에 잠시 그쳤던 눈은 오후가 되자 다시 쏟아졌다. 해무가 낀 듯 희뿌연 눈보라가 시야를 가렸다.
눈보라의 저편에서 희미한 잿빛 형체가 점차 커지며 근접했다. 여행객 세 명이었다. 두 명은 말을, 한 명은 노새를 타고 있었는데 말과 기수의 형체를 따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눈에 뒤덮여 있었다.
세 여행객은 목로주점 앞에 있는 노상에 멈춰 섰다.
흑마를 뒤따라온 준마가 멈춰 서자 상념에 잠겨 있던 로트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봤다.
“이터, 여기가 어디야?”
“흠, 모르겠는데. 이크!”
이터가 탄 흑마가 언 땅을 발굽으로 사납게 차댔다.
“이 녀석 배가 고픈가 보구나. 마구간이 어디지? 어이, 주인을 불러와라.”
“네!”
맨 뒤에서 따라온 젊은 몸종이 노새에서 뛰어내렸다. 때마침 마구간 지기가 물통을 들고 주점의 뒷문에서 나왔다.
이터는 그를 불러 세웠다.
“여봐, 이 녀석을 데리고 가서 물을 먹여. 먹이도 듬뿍 줘.”
“먹이를 주라고요?”
젊은 마구간 지기는 두 필의 말과 노새 한 마리를 소 닭 보듯이 쳐다보며 태연히 받아쳤다.
“있어야 주죠. 건초가 다 떨어졌는걸요. 마구간에 자리도 없어요.”
“뭐야? 그럼 네 녀석 가죽을 벗겨서 먹이고 네 녀석 잠자리에다 재우면 되겠군.”
“아유! 그런 소리 마세요.”
“농담 같으냐, 이놈아? 얼른 구해다 멕여! 안 그럼 네놈이 잡아먹힐걸. 우린 닷새간 조난을 당해서 쫄쫄 굶다가 어린애를 잡아먹고 왔다. 주인장은 어디 있어?”
주점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터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직접 문을 열었다. 후덥지근한 습기와 매운 연기가 자욱한 그 안에서 왁, 하니 고함이 쏟아져 나왔다.
이터는 열린 문가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으악! 웬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다들 눈보라 때문에 발이 묶였어요.”
문가에 나타난 주점 주인이 말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새가슴처럼 가슴팍이 불룩한 사내였는데 벌건 얼굴이 땀 투성이었다.
“들어오세요. 밟혀 죽더라도 이런 날씨엔 별 수 없어요.”
“이터.”
뒤에서 로트가 그를 불렀다.
이터가 돌아보자 그는 말머리를 되돌리며 소리쳤다.
“이터, 자네는 여기 있어. 나는 갈게.”
“뭐야? 미쳤어?”
이터는 몸을 날려서 로트의 준마 앞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눈이 오는데 어디로 가? 얼른 내려.”
“아니, 난 갈래. 잘 있어.”
“오냐, 잘 가라. 나를 먼저 때려 눕히고 말야.”
말 옆구리로 달려들어 껑충 뛰어오른 이터는 로트의 허리를 낚아챘다. 두 육중한 몸뚱이가 눈발을 휘날리며 푹신한 눈 더미가 깔린 바닥으로 곤두박질했다.
“앗, 나리 괜찮으세요?”
몸종은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등자에 한쪽 발이 걸린 채 드러누운 로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신음을 흘렸다.
이터는 눈을 털고 일어났다.
“가다 죽더라도 몸을 녹이고 술과 고기로 배부터 채우고 가. 안 그럼 얼어 죽어. 먹고 죽자.”
“옳으신 말씀이죠.”
주인이 맞장구를 쳤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다가 동사하기 전에 먼저 잡혀 죽을 겁니다. 다들 그래서 발이 묶였으니까요.”
“도적 떼 말이군.”
이터가 의기양양 말했다.
“그 녀석들은 이 몸이 너끈히 해치우지.”
“서쪽에서 오셨나 보군요.”
주인은 혀를 차며 대꾸했다.
“도적 떼보다 더 곤란하죠. 인근 영지에서 전쟁이 났거든요. 결투를 앞둔 영주끼리 싸움질이 났어요. 선제타격을 준답시고 상대편 농부뿐 아니라 자기들 영지를 통과하는 여행객까지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고 있어요. 첩자라는 거죠. 상인들도 봉변을 당했습니다. 통행세랍시고 다 털리고 맨몸뚱이로 가까스로 도망쳤대요. 어디로 가세요? 북쪽? 남쪽? 동쪽?”
“남쪽으로 가려다 길을 잃었어.”
“조심하세요. 행여 동쪽으로는 절대 가지 마시고요. 그쪽은 통행세가 목숨이에요. 자, 들어오세요.”
이터는 다리를 절뚝대는 로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취사용이자 난방용 화덕의 불을 마구 때서 매운 연기가 자욱하고 시큼한 땀 냄새, 맥주 냄새가 진동했다.
중앙에는 식탁으로 쓰이는 기다란 널빤지가 한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일렬로 길게 놓여 있었다. 외국 상인과 방랑 행상인,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편력 직공과 여행객이 거기 앉아서 단체로 저녁을 기다렸다.
이들 목로주점은 이 시대의 술집이자 여관이었다. 밤이 되면 손님은 널빤지를 치운 맨땅바닥에 짐 보따리나 겉옷을 깔고서 울타리 안에 모인 양떼처럼 뒤엉켜 잤다.
“여봐, 주인장!”
손님 하나가 주인을 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코가 빨갰다.
“아직도 멀었어? 식사를 언제 줄 거야? 창자가 쭈그러졌어.”
“조금만 기다리세요. 다 돼 가요.”
“아까부터 저 소리네.”
빨간 코의 일행이 껴들었다.
“귀찮으니까 한꺼번에 먹여 치우려고 저러는 거야. 오지도 않을 손님을 죄다 기다렸다 먹으려면 밤을 꼬박 새우겠군. 이놈이고 저놈이고 목로주점 주인이나 요리사 녀석은 약삭빠른 게으름뱅이야.”
이터와 로트는 아우성치는 손님 틈에 끼어 앉았다.
자리에 앉은 로트는 주변의 떠들썩한 소음은 개의치 않고 기름때와 흘린 맥주가 눌어붙어 지저분한 식탁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닷새간이나 길을 잃고서 눈보라를 헤치며 온 터라 기다란 속눈썹엔 눈 녹은 물방울이 맺혀 있다. 입술과 코끝은 푸르스름하게 얼어 있었다.
그러나 완고히 다문 입매와 움푹 파여서 그늘이 드리워진 눈가에는 조난 끝에 안식처를 발견한 기쁨은커녕, 암울한 우수가 드리워져 있다.
“어허, 이미 얘기가 끝났는데도 미련을 못 버렸구나.”
그 모습을 본 이터는 그의 옆구리를 옴팡지게 꼬집었다.
“말해봐. 날씨가 여의치 않으니 봄에 출발하자고 했는데도 먼저 떠나자고 고집을 부린 게 누구였지?”
“나였지.”
“그럼! 그래서 조난 당해 동사할 뻔했어. 그래놓고 또 변덕이 나설랑 나를 두고 가시겠다? 떽! 어림없는 소리.”
“그래, 알고 있어.”
로트는 대답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다짐하듯 음울하게 뇌까렸다.
“나도 알고 있어. 난 내 갈 길을 가야겠지.”
“물론이지.”
이터는 벙글벙글 웃어대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자넨 지금 남의 걱정이나 하며 감상에 빠져 있을 처지가 못 돼. 왜냐? 추방을 당했거든. 더군다나 영구추방이지. 돌아가고 싶나? 절대 돌아갈 수 없다지. 왜냐? 영구 추방이니까! 결국 나랑 얌전히 볼로냐로 가는 수밖에! 하하하.”
아무런 대꾸가 없던 로트의 푸르스름한 손등 위로 별안간 물이 뚝뚝 떨어졌다.
혀를 차며 그 꼴을 보던 이터는 느닷없이 “가여운 비둘기!”하고 외치고서 같이 흑흑 울었다.
건장한 두 사내가 나란히 앉아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자, 마주 앉은 빨간 코 손님 일행은 쭈그러든 창자를 잊고서 구경했다.
“누가 죽었어요?”
눈이 말똥말똥한 빨간 코 사내가 물었다.
“멀쩡하게 생긴 양반들이 왜 울고 그래요?”
“차라리 죽는 게 낫죠.”
이터는 손수건에 코를 팽-! 풀었다.
빨간 코가 왜냐고 되물었다.
“이 친구가 고향에서 추방당했거든요. 영구추방이죠.”
빨간 코 일행은 고개를 홱, 돌려 멍하니 허공을 보는 로트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이구동성 했다.
“쯧쯧. 죽는 게 낫겠구먼. 거, 콧물 좀 닦아요.”
“설상가상으로-…….”
이터는 빨간 코를 향해서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운명적으로 불같이 사랑했던 여자가 죽을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결혼식이 미뤄졌답니다.”
“저런!”
“결혼식이라뇨?”
빨간 코는 예리하게 반문했다.
“그 여자를 딴 녀석한테 뺏겼나요?”
“그렇죠. 돈 많은 백작이 귀여운 비둘기를 덥석 물었어요. 흑흑.”
“아니, 결혼식은 미뤄졌다면서요? 그럼 잘 됐구만.”
빨간 코 옆에 앉은 사내가 받아쳤다.
“이참에 얼른 가서 데리고 도망치면 되잖아요. 답답하시긴!”
“이봐, 남의 여자를 데리고 도망치다 잡히면 사형이야. 게다가 저 사람은 추방 당했다잖아. 영구추방!”
“아, 영구추방. 그렇지. 쩝. 안 되셨군요.”
빨간 코 일행은 자기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딴 놈한테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하느니 콱 죽어버리겠다고 목청 높여서 떠들어댔다. 얼큰히 취한 그들의 덥수룩한 수염에서는 고약하고 시큼털털한 맥주 냄새가 났다.
“로트.”
이터는 빨간 코 일행이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말했다.
“눈이 그치면 예정대로 볼로냐로 가자. 화끈한 미녀들이 거기서 자넬 기다리고 있어.”
로트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지난 보름 새에 움푹 눈이 꺼지고 뺨이 홀쭉해진 그를 보고서 이터는 장난기를 거두고 엄하게 말했다.
“내 말 듣고 있어?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야. 행여 돌아갈 엄두도 내지 마.”
“돌아가겠다는 건 아냐.”
로트는 변명조로 뇌까렸다.
이터는 냉정하게 캐물었다.
“그럼, 뭔데?”
“그냥……. 잠깐 확인하고 싶어. 지금쯤은 나아졌는지 어떤지…….”
“힐데가르트 말야? 아니면 이젠하르트 말이냐?”
로트가 눈을 내리깔자 그는 더욱 집요하게 캐물었다.
“좋아. 잠깐 돌아가서 운 좋게 이젠하르트를 만난다 치자. 그다음엔 어쩌려고? 뭔 좋은 수라도 있어?”
“……. 아무것도 없어.”
“그래, 아무것도 없어. 자네가 간들 망령이 든 벨데케가 나을까. 아니면 그녀의 병이 나을까. 납치라도 해주려고? 그것도 아니면 이젠하르트를 만나서 위로해주려고? 그 녀석이 행여 자넬 기다리고 있을까.”
침묵에서 대답을 얻은 이터는 스스로 가혹하다고 여기면서도 지난 보름간 로트가 남몰래 흘린 눈물을 지켜봤기에 몰아붙였다.
“자네가 추방 길에 오른 이유를 명심해. 자넨 피앙세를 수행해야 해.”
너무 가혹한가 싶었지만 이터는 으르렁대며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알겠지? 피앙세의 의무 수행! 그리고 내게도 신성한 임무가 있어. 자네를 무사히 볼로냐 미녀의 품에 데려가야 하거든. 게다가 지금 돌아가면 난 목이 잘려. 숙부님의 단검과 콘드비라무어스의 보석을 훔쳐왔거든. 우린 한 푼도 없으니까 유대 놈한테 팔아먹어야 하잖아. 하하하. 아이구, 내 팔자야. 제기랄! 응? 알겠냐고?”
로트는 주인이 내온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추방 길에 오른 지 이제 약 석 달이 됐다. 최종 목적지는 볼로냐였다.
그동안 고약한 장난질의 책임을 진다며 자발적으로 동행 길에 오른 이터는 볼로냐에서 즐길 환락을 주창하며 불행한 추방자에게 그곳으로 가자고 설득했다.
남쪽으로 향하던 둘은 도중에 서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악천후와 굶주려 날뛰는 도적 떼를 피해서 이터의 인척인 어느 가난한 영주의 성에서 겨울을 보낼 계획이었다.
로트는 그전에 홀로 겨울을 나려고 했던 인근의 시토 수도원으로 먼저 향했다. 그곳에서 사전에 약속된 베르나르 신부의 편지를 추방 당한 후 한 달여 만에 받았다. 추방 당일 새벽, 그는 집으로 찾아온 신부에게 정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하자는 약속을- 특히 벨데케 가의 소식을 꼭 전해달라는- 받아냈다.
그 첫 번째 편지에서 신부는 불행한 추방자를 위한 장문의 설교와 기도문 사이사이에 대수롭지 않다는 문투로 벨데케의 발병, 힐데가르트와 백작이 곧 혼인한다는 얘기 그리고 그 준비로 바쁜 이젠하르트의 소식을 전했다. 칼부림을 벌인 사건으로 발병한 후에 여전히 가택에 구금된 신세인 탐파니스의 자숙 상황도 짤막하게 덧붙여 보냈다.
그날, 조악한 침상과 의자 하나뿐인 수도원의 여행자 숙소에서 로트는 밤을 새워 정성껏 답장을 썼다. 자신은 이터와 함께 봄에 볼로냐로 떠날 예정이니 겨우내 묵게 될 영주의 성으로 계속 편지를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다음 날 목적지로 떠났다.
그로부터 약 한 달 보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영주의 성으로 신부와 로에란그린, 카이렛이 보낸 편지 세 통이 도착했다. 발송일이 제각각인 편지는 장거리를 거쳤고 도중에 폭설로 길이 막혀서 거의 동시에 연달아 도착했다.
두 번째 편지에서 베르나르 신부는 첫 번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장황한 설교 끝에, 간략히 힐데가르트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고서 결혼식이 미뤄졌으나 자신과 백작이 열성적으로 기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명한 로에란그린의 편지는 봄에 볼로냐에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베르나르 신부가 전한 소식에 약간의 부연설명이 담긴 정도였다.
그러나 세 번째, 카이렛이 보낸 편지는 달랐다. 대필시킨 편지의 첫 대목에서 ‘미치도록 그리운’, ‘불알을 떼 주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자네 없인 못살아’ 따위의 격렬한 애정을 표한 카이렛은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서두를 시작했다.
[로트, 큰일 났어. 벨데케가 완전히 미쳤어.]
강렬한 서두도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그 빛을 잃었다.
[벨데케가 죽은 자의 왕한테 영혼이 팔렸대. 자기 집안에 재앙이 닥쳐온다며 울부짖고 헛소리를 한 대. 저러다 미쳐 죽을 거래.
백작은 힐데가르트를 꿀떡 삼키려고 눈이 빨갛다지.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작자가 힐데가르트를 정부로 삼을 거래. 사별했다는 부인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거야. 그래서 힐데가르트가 병이 났고 결혼식이 미뤄졌어.
이젠하르트는 어떤 줄 알아? 빼짝 말랐어. 왜냐고? 놀라지 마. 탐파니스 새끼가 악을 쓰고 울면서 소문을 내고 있거든. 이젠하르트가 적기사라고 말야. 설교사도 자네가 아니라 이젠하르트가 죽였다고 울부짖고 있어. 그 녀석이 자넬 잡아먹은 거래.
영주님은 탐파니스 새끼가 미쳤다고 의심하신대. 내가 보기에도 그 새끼는 돌았어. 왜 그렇게? 제기랄! 토할 준비하고 들어. 그 새끼는 자네 때문에 날마다 찔찔 짜고 있어. 그 새끼가 자넬 좋아하는 거야. 봄에 추방당하면 볼로냐로 쫓아갈걸. 내가 갈 때까지 조심해. 하, 지긋지긋한 빨간 원숭이 새끼!
아무튼 이젠하르트는 궁지에 몰렸어. 그런데도 두 번째 결혼식 날짜를 잡고 무조건 힐데가르트를 결혼시킨대. 하, 독한 인간. 자네를 쫓아낼 때부터 놈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아봤지만 점점 더 냉혈하고 악독해지고 있어.]
로트는 그날 밤 성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이터에게 붙잡혔다. 이터가 눈을 부릅뜨고 어디 가느냐고 묻자, 눈 더미에 드러누운 그는 자신이 깜빡 정신을 잃었노라고 말했다.
그 후 열흘간, 로트는 슬그머니 전조를 내비치는 광포한 정열의 재폭발을 두려워하며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나 갈등과 고뇌의 수렁은 깊어만 갔다. 추방 전야에 이젠하르트가 내비친 생경하고도 피폐한 모습, 그 모습이 불러일으킨 불길한 예감을 우려하면서도 그에게 어떤 불행이 닥치건 자신으로선 속수무책이라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 때문에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잠시 눈이 그쳤다.
로트는 갑작스레 볼로냐로 떠나자고 고집했다. 불가항력인 갈등과 근심으로부터 도피해서 오로지 피앙세만을 수행하고픈 결의 때문이었다.
그 후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게 닷새 전의 일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생각에 잠겨 있던 로트가 말했다.
이터는 맥주를 마시며 곁눈질로 물었다.
“뭘 말이야?”
“피앙세 말야. 내가 짐승이 아니라면 패자의 맹세를 지켜야겠지. 하지만 전에는 이토록 불안한 적이 없었어. 이대로는 도저히 발이 떨어지질 않아.”
“그러니까, 왜?”
이터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아주 결판을 내려는 듯이 물었다.
“자네가 이 눈보라와 도적 떼를 뚫고 천만다행으로 돌아간다 한들, 거기서 자네는 영원한 불청객이자 추방자인데도 고집을 피우는 이유가 뭐야?”
“뭐라고 하든지 자네는 비웃겠지. 나를 미친놈으로 여기니까.”
“오호,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또 그 얘기군. 이젠하르트가 황제의 총애를 받던 흰바다매다, 이거지?”
“그래.”
로트가 단언하자 이터는 베실베실 웃었다.
“그럼 자네는 매 훈련대장이고?”
“…….”
“오냐. 그럼 난 놈의 날개를 찢은 황제다.”
“농담하지 마. 그럴 기분이 아니야.”
“어허! 농담이 아냐.”
이터는 자못 심각하게 낯빛을 바꾸고 받아쳤다.
“자네의 과대망상이 또 재발할 조짐을 보이니 나도 맞대응을 해야지. 지난여름에는 주구장창 흰둥이 수사슴 얘기를 하더니, 이제는 흰바다매께서 자네한테 계시를 주더라, 이 얘기 아냐. 매 유령이 말이지.”
“유령이 아니라니까.”
로트는 불쾌한 듯 언성을 높였다.
“내 눈으로 그 흰바다매를 똑똑히 봤어. 꿈에서도 나타났지. 내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 출몰했어. 처음엔 착시인가 싶었지만 아니었어. 이젠하르트도 그 녀석을 봤다고 했으니까. 과대망상이라고 마음대로 비웃어. 하지만 왜 그랬을까? 흰바다매가 왜 나를, 아니 우리 둘을 집요하게 쫓아다녔느냐고.”
“그 이유를 내가 말해볼까.”
이터는 코를 쥐고 말했다.
“어머나! 싸우지들 말아요. 사이좋게 지내요.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거예요? 어서 화해해요! 그분께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잖아요!”
이터는 두 팔로 파닥파닥 날개짓을 해대며 흰바다매 흉내를 냈다. 내밀히 품었던 꿈 얘기를 털어놨더니 이후로 번번이 조롱이었다.
“마음대로 나를 놀려.”
로트는 상심해서 읊조렸다.
“그래. 어쩌면 내가 또 미쳤는지도 모르지. 자네 말처럼 놈은 유령이겠지. 흰바다매는 죽었으니까. 단 한 번 저지른 실수로 황제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쓸쓸히 비참하게 죽어버렸지. 속죄의 기회조차 구원의 길조차 얻지 못한 채 불행한 최후를 맞았어.”
흰바다매가 죽자 매사냥꾼은 그를 수도원 암자에 묻었다. 매사냥꾼도 곧 죽었다.
로트는 귀향하기 전에 지냈던 수도원 원장으로부터 나중에야 둘의 사연을 전해 들었다. 그들의 무덤은 암자에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곳에서 로트는 귀향 전까지 그 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무덤을 보살폈다.
요리사가 저녁을 내왔다.
굶주린 손님은 몸 여기저기에서 나무 숫가락과 고기 자르는 조그만 칼을 꺼냈다. 그 부산한 소동의 한가운데서도 로트는 외딴 섬처럼 고립돼 보였다.
‘돌아가려는 이유가 뭐냐.’
그는 카이렛이 보낸 편지 이후로 수백 번이나 되풀이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이유는 단순해. 견딜 수 없는 미치도록 초조한 이 불안을 달래고 싶어. 그토록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또 재발한 과대망상 때문이겠지. 가서 또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야. 그저 가서 잠깐 확인만 하고 싶어.’
「용서를 빌고 싶어?」
이젠하르트는 그날 밤 어둠 속에서 이렇게 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진심으로 날 돕고 싶어? 그렇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날이 밝는 대로 떠나. 눈과 귀를 막고 당장 여기를 떠나. 넌 오늘 이후로는 평생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는 거다. 나에 대해서도, 그날 밤에 대해서도 전부 잊어. 그리고 명심해. 네가 놈을 죽였어.」
「가라. 죽는 그날까지 다시는 널 만나지 않기를.」
식사가 시작됐다.
화덕이 뿜어대는 뿌연 연기와 후덥지근한 열기에 휩싸인 손님들은 나무 숟가락으로 보리죽을 떠먹고 독한 맥주를 마시고, 요리사가 나무판째로 내던진 구운 양고기에 이리떼처럼 덤벼들었다.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체면보다는 욕구충족이 삶의 우선 순위인 이터는 양고기를 보자마자 고함을 내지르며 갈빗대 두 대를 우악스럽게 뜯었다. 한 대는 일단 로트의 입에 쑤셔 박고 나머지는 제 입에 처넣었다.
그러던 도중에 웬 갈빗대가 날아와서 땅! 머리통을 갈겼다.
“으악! 이게 뭐야?”
“아, 제겁니다. 이리 던져주세요. 이봐, 팔을 조심해. 내 뼈다귀가 날아갔잖아.”
멀찌감치 떨어진 좌측 반대편에서 사내는 옆 손님에게 불평을 토했다.
갈빗대를 던져준 이터는 사내의 얼굴을 보자 놀라서 소리쳤다.
“어, 자넨?”
“어라? 당신은?”
상대편이 반색하자 이터도 반색하며 물었다.
“여긴 웬일이야?”
“저도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죠.”
상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식사 중인 손님들을 가리켰다.
“길이 막혀서요. 동쪽으로 가려다 다 털리고 간신히 도망쳐 왔어요. 인근에서 영주들이 벌인 전투 소식 들으셨죠? 떠돌이 용병 녀석들이 도적 떼가 돼선 아무나 잡아 죽이고 있거든요. 저보다 앞서 가던 전령 하나도 잡혀서 죽었대요. 약탈과 방화 천지입니다.”
“주인장 말이 그거였군. 동쪽으로 가지 말라더니.”
“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사내는 갈빗대를 뜯으며 물었다.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감쪽같이 숙부님의 영지를 떠나셨다고 들었는데요.”
살코기를 한입 가득 깨문 이터는 히죽, 웃기만 했다.
“뭐, 잘하셨네요.”
사내는 이터의 행실을 익히 안다는 듯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남쪽으로 가시나요? 여하튼 잘 떠나셨어요. 저도 공연히 거길 오갔나 봅니다. 뭐, 고작해야 일 년에 한두 번뿐이었지만 앞으로는 그것도 마뜩하지가 않군요.”
“뭐라고?”
주점 안이 소란하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터는 소리쳐 되물었다.
사내도 그러자 소리쳐 답했다.
“숙부님 영지에서 잘 떠나셨다고요! 제 직업이 이렇다 보니 외국은 물론 두루두루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아다닌단 말이죠. 어디를 가나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눈에 척, 그 도시의 흥망성쇠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지요. 육감으로 그걸 느끼는 거죠. 외람된 말씀이지만, 제가 갈 때마다 그 도시엔 암운이 느껴지더군요. 우리 상인들 끼리는 망조라고들 하죠. 잘 떠나셨어요. 숙부이신 영주님께서도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닌가 보더군요.”
이 사내는 상파뉴에서 온 양모 중개업자였다. 전에 환전상 포겔바이데의 소식을 영주에게 전해서- 본인은 모르는 새에- 포겔바이데와 벨데케 두 집안의 전세를 역전시킨 장본인이었다.
“자네가 우리 숙부를 만났다고?”
이터는 사내의 입모양을 보고 그 한 마디만 알아듣고 물었다.
“콘드비라무어스도 만났어? 날 찾든가?”
“아뇨!”
사내는 소리쳐 대답했다.
“이번엔 따로 만나 뵙지는 못했어요. 상인조합에만 들렀거든요. 거길 떠나서 동쪽으로 가려다 죽을 뻔했다죠.”
“이봐!”
사내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쳐들었다.
로트였다.
빨간 코 일행은 죽 그릇에 코를 박을 듯 보이던 그가 갈빗대를 내던지고 벌떡 일어서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로트는 사내에게 소리쳐 물었다.
“이봐, 자네 성백 오스터팅겐의 영지에서 왔다고 했지?”
“네, 그런데요.”
“그럼 벨데케 가 소식도 알고 있나?”
“벨데케요? 그게 누군데요?”
상인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가 로트가 되물으려는 찰나, 대답했다.
“아, 그 실성했다는 늙은 기사 말씀이시군요? 흠, 그분은 죽을병에 걸려 쓰러졌어요. 얼마 살지 못한다더군요. 불행과 재앙이 겹쳤어요.”
“뭔 소리야? 다 나았다던데.”
이터가 껴들었다.
살코기를 우물우물 씹어대며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설마요?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쯤 죽었을걸요.”
“죽어? 왜?”
“결혼식장에서 쓰러졌거든요. 외동 딸이 파혼했어요.”
“뭐라고? 파혼?”
이터가 양손에 쥔 갈빗대를 와직, 부러뜨리고 소리쳤다.
옆자리에서는 손님이 소란을 떨고 뼈다귀를 물어뜯느라 정신이 팔린 사내는 태연히 받아쳤다.
“네. 파혼이요. 갑부인 기사단장 아시죠? 그 사람하고 파혼했어요.”
“맙소사! 만필요트 백작이 파혼을 청하다니!”
“기사단장 말인가요? 아뇨, 신부 쪽에서 했는데요.”
“뭐? 힐데가르트가 먼저?”
“잘됐구먼.”
이때 느닷없이 빨간 코 사내 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결혼식이 파탄 났으니 절호의 기회가 왔네. 이봐요, 젊은이. 뭘 하고 있어요? 얼른 달려가요. 여기서 찔찔 짜지만 말고 얼른 여자를 납치하러 가란 말이오.”
“이 놈팡이가 말귀를 못 알아 처먹네.”
빨간 코 사내는 만취한 제 일행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자꾸 누구더러 어딜 가라고 해? 저 양반은 영구추방을 당했다잖아.”
“영구추방이라고요?”
어리둥절한 중개업자는 식탁 위로 고개를 빼 내밀고 좌측에 있는 빨간 코한테 물었다.
“누가요?”
“이 젊은이지 누구요. 고향에서 쫓겨났대요. 저 얼굴 딱 보면 모르겠어요?”
취중인 빨간 코의 일행은 사내에게 로트를 가리켜 보였다.
로트는 파혼 소식이 안겨준 충격파를 고스란히 얼굴에 담고 넋이 빠져 있었다.
중개업자는 갈빗대를 뼈째 삼키고 입맛을 다시며 로트를 이모저모 뜯어봤다.
“그럼 댁이 환전상 포겔바이데의 아드님이신가요? 설교사를 죽였다는?”
“허억! 설교사를 죽였다고?”
빨간 코 일행이 이구동성으로 외치자 주점 안에 끓던 소음이 뚝 끊겼다. 입을 닥친 손님들은 동시에 고기 뜯던 손을 멈추고 로트를 올려다봤다.
“아뇨, 염려들 마세요!”
그러자 이터는 맥주잔을 쳐들고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하하하! 사실 그 녀석은 밤도둑이었어요. 설교사가 아닙니다. 가짜였어요. 이 친구는, 제 귀염둥이 불알친구입니다만, 신성모독을 범한 살인마는 아니에요. 하지만 추방을 당한 건 사실입니다. 영구추방이요. 왜냐구요? 실은 미쳐서 쫓겨났다죠. 무시무시한 유령과 사귄답니다. 덕분에 누구든 이 친구한테 시비를 걸면, 아유 무서워라, 죽은 자의 왕 아시죠? 그 친구가 복수를 해준답니다. 하하하……. 아니, 뭣들 하세요? 체하셨나. 자자, 어서 식사들 하세요!”
손님들은 웅성대며 다시 먹기 시작했다.
배가 덜 찬 상인도 꾸물댔다가는 도둑질 당할세라 허겁지겁 죽 그릇에 숟가락을 처넣었다.
“어엇!”
이때 상인의 몸이 갑작스레 공중에 떴다.
그의 몸뚱이를 낚아챈 로트는 그를 주점 구석으로 들고 날랐다.
“으악!”
상인을 꽝, 벽 구석에 처박고서 로트는 소리쳐 물었다.
“이봐요. 파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으악, 진정하세요.”
“빌어먹을! 뭐든 아는 대로 죄다 말해봐요! 빨리!”
“아, 알았어요. 팔 좀 놔줘요. 아이고 팔 부러지겠네.”
“왜 파혼을 했대요? 언제?”
“결혼식 당일에요.”
상인은 로트의 난폭한 기세에 놀라서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 집안의 젊은 기사 있죠? 신부의 오라버니 말예요. 그가 파혼을 선언했어요. 저도 직접 봤지요. 거기 간 날이 마침 결혼식 날이라서 배도 채울 겸 구경 갔거든요.”
“왜 파혼을 했는데?”
이터가 껴들었다.
로트는 상인이 젊은 기사를 언급한 순간 말문을 잃고 있었다.
“그야 저도 모르죠.”
상인은 로트가 넋을 놓은 사이 움켜잡힌 팔을 간신히 빼내고 말했다.
“갑작스레 선언하던데요. 신부도 기겁했다죠.”
“저런! 그럼 백작은?”
이터가 외쳤다.
“기사단장 말인가요? 말도 마세요. 그분이야말로 청천벽력을 맞은 게죠. 하객들은 그 일이 벌어지자 경악했답니다. 그날 결혼식장에는 그 도시에 사는 시민이 죄다 구경을 왔더군요. 저처럼 뭣 좀 얻어 먹으려고 간 치들도 많았어요. 기사단장이 프랑스 궁정의 피로연 못지않은 성대한 피로연을 열겠다고 공언했거든요. 아무튼 그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기사단장이 명예훼손에 공개적인 치욕을 당한 터라, 하객들은 전부 기사의 만행을 비난했어요. 게다가 하필이면 신랑 신부가 제단 앞에서 성스러운 혼인 서약을 하려는 순간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신랑의 입장에서는 그런 날벼락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더군요. 전 그때 딱 눈치를 챘죠. 이거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구나, 하고요. 그 일이 터지자마자 하객들은 신랑을 동정하며 신부 측에 야유와 고함을 쳐댔단 말이죠? 걔 중에 대다수는 파탄 난 피로연 때문에 더욱 분통을 터뜨렸지요. 헌데 그 장본인은 말이죠, 신랑 말이에요, 웬걸요? 그 나이에 그런 지위고 보니 산전수전을 다 겪어서 그랬겠지만, 노발대발하기는커녕 상당히 침착하고 이성적이란 말이죠. 신부의 오라버니가 파혼을 선언하자 침착하게 듣고만 있더군요. 마치 그런 재앙을 각오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죠. 그러고는 심각한 명예훼손을 당한 대가로 그 자리에서 젊은 기사한테 결투를 신청하더군요. 그런데-…….”
“결투라고? 제엔장할!”
이터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결투를 했나? 누가 이겼지?”
“아뇨. 아직 더 들어보세요.”
“뭐야? 얼른 말해봐!”
“으악, 알았어요! 파혼 선언과 결투 신청으로 난리가 난 바로 그때였어요. 또 다른 난리통이 벌어졌지요. 천상에서 무저갱으로 추락한 죄인처럼 하객들이 놀라서 아우성을 치던 판국에 웬 귀공자가 만취해서는 느닷없이 식장 안으로 뛰어든 겁니다. 그러고는 젊은 기사를 소리쳐 가리키며 그가 적기사이자 살인자라고 고발했어요. 기사의 사촌이라던데요?”
“탐파니스!”
“네, 그 사람이었어요. 하객들은 난데없이 그가 식장에 뛰어들어 악을 쓰고 날뛰자 실성했다고 웅성대더군요. 사촌누이인 신부를 짝사랑했대요. 그래서 헛물켜고 깽판을 논 거죠. 그런데 사태가 갑자기 돌변했어요. 깃발이 등장했거든요.”
“깃발이라니?”
이터는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적기사의 붉은 깃발 말예요. 한 때 동쪽에서 악명을 떨쳤던 도적 기사 아시죠? 소문이 무성하다가 한동안 종적을 감췄죠. 그자의 붉은 깃발이었어요.”
“망할, 그게 뜬금없이 어디서 나타났지?”
“죽은 설교사가 몸에 지니고 있었다더군요. 그 집안 어린 종복 녀석한테 갈취했대요.”
“맙소사! 설교사 놈이?”
“네. 가짜 설교사가 그걸 노리고 종복 녀석을 습격했다더군요.”
“그럼 살인자가 이 녀석도 아니고, 훔친 게 빵도 아니었군!”
소스라치게 놀란 이터는 로트를 돌아봤다.
둘 다 얼이 빠져 있자 상인이 되물었다.
“빵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튼 사람들이 그 출처를 묻자 그 어린 종복 녀석과 애비가 기사단장의 시종들한테 뒷덜미가 잡혀서 끌려 나왔어요. 낯바닥이 포도 알처럼 보랏빛이 된 어린 종복 녀석은 검은 숲에서 깃발을 캐냈다고 자백했어요. 애비는 적기사의 깃발을 아들놈한테 빼앗아 팔아치웠답니다. 어린 종복 녀석은 두 번째의 깃발을 갈취당한 거고요.”
“두 번째 깃발?”
“네.”
“빌어먹을! 그건 또 뭐야? 제기랄, 뭐가 뭔지 모르겠군. 아니, 그런데 그걸 누가 가져왔어? 깃발 말이야. 죽어 나자빠진 설교사 녀석이 가져왔나? 아니면 탐파니스가?”
“아뇨. 기사단장이 가져왔어요.”
“백작이!”
“네. 사촌이라는 귀공자가 미쳤다고 떠들어대던 하객들은 전부 얼이 빠졌지요. 왜냐면 기사단장이 그 두 개의 깃발을 젊은 기사의 발아래 내던졌으니까요. 흐유! 만약 그 순간의 젊은 기사를 직접 보셨더라면, 필시 저처럼 놀라셨을 겁니다. 사람의 피를 쪽 빼서 가죽만 널어 놓으면 그런 안색이 되겠죠. 그런데 말이죠, 제가 마침 젊은 기사의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목격한 겁니다만, 백작이 두 개의 깃발을 그의 발아래 내던지는 순간, 어쩐지 제게는 그가 웃는 것 같이 보이지 뭡니까. 마치 검은 숲의 유령처럼 섬뜩하게 말입니다. 소름이 쭉 끼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됐지?”
이터가 다그쳤다.
“하객들은 적기사의 깃발 곁에 던져진 또 하나의 깃발이 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기사단장의 시종이 그 깃발을 쳐들어 모두에게 보여주더군요. 피로 얼룩진 그 깃발에는 죽었다는 어느 기사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지요. 기사단장은 파혼으로 인한 명예훼손은 결투로 청산하겠다고 재차 공언하더군요. 그러나 두 가지 죄목으로 영주님께 젊은 기사를 심판해달라고 청했어요. 첫 번째는 가짜 설교사를 죽인 죄 그리고 두 번째는 이스트리엔에서 신의를 저버리고 의형제를 맺은 동료 기사를 죽인 죄였지요.”
“이젠하르트가 의형제를 죽였다고? 그건 또 뭔 소리야?”
“아욱! 전장에서 동료를 죽였대요!”
상인은 갈수록 혼란에 빠져든 이터가 괴수처럼 소리를 지르자 얼른 받아쳤다.
“젊은 기사는 전에 이스트리엔 후작의 기사단 소속이었대요. 그러다 전투가 벌어져 후작의 명으로 의형제였던 동료 기사랑 함께 출전했는데, 젊은 기사만 살아 돌아왔대요. 헌데 알고 보니 동료 기사를 사지로 몰아넣고 혼자서만 도망쳤다더군요. 나중에 적지로 전사자들 시체를 회수하러 갔는데, 갑옷이고 뭐고 다 털린 죽은 기사의 맨몸뚱이에 수십 군데나 상처가 있었다더군요. 적의 보병이 굶주린 승냥이처럼 떼로 포위해선 칼과 창으로 마구 찔러 죽인 거죠. 이름이 아이케라고 했던가, 아무튼 기사단장은 그 죽은 기사의 숙부랍니다. 살해당한 가짜 설교사는 그의 종복이고요.”
“맙소사!”
“아무튼 그렇게 된 겁니다. 제가 아는 건 전부 말씀드렸어요.”
이터가 입을 쩌억 벌리고만 있자 상인은 식탁으로 되돌아갈 틈을 노리며 로트를 돌아봤다. 그리곤 때마침 떠오른 생각에 반색하며 말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두 집안이 원수 사이였죠? 그럼 혹시 죽였다는 설교사는 그 가짜 설교사인가요? 저런! 그럼 누명을 쓰셨네요. 제가 결혼식 다음 날 떠났으니까 한 보름은 지난 일이라지만, 어쨌거나 이젠 속 시원하시겠어요. 그 집안도 결국 패가망신했으니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대신 복수해주셨군요. 신부의 부친은 그날 실신해서 의식불명에 빠졌어요. 신부의 모친도 발작을 일으켰지요. 신부도 기절했고요. 영주님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눈물을 흘리셨답니다. 가장 경사스럽고 주님의 축복이 가득한 날에, 재앙도 그런 재앙이 없었던 데다가, 듣자 하니 그 젊은 기사로 말하자면, 저도 한 번 성에서 식사를 함께한 적은 있습니다만, 명예와 신의의 기사로서 그 도시에서는 불세출의 영웅이었는데 한순간에 무저갱으로 추락한 죄인이-……. 커억!”
상인은 채 말을 맺지 못하고 눈이 불거졌다. 숨통이 턱, 막혔다. 일순간 새하얘진 시야에 제 멱살을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움켜쥔 로트가 들어왔다.
“커, 컥!……. 왜, 왜 이러세요?!”
상인은 로트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달싹대는 모습을 봤다. 이윽고 거칠고 쉰 목소리가 그의 목구멍을 쥐어짜듯 흘러나왔다.
“……. 그래서 이젠하르트는 어떻게 됐지?”
“컥! 기, 기사 말씀인가요?”
상인은 죄인 숨통으로 얼굴이 벌게져서 간신히 말했다.
“그야 얼음 감옥에 갇혔으니 지금쯤 죽었을걸요. 벌써 보름이나 지났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