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힐데가르트의 눈물 (26/33)

14. 힐데가르트의 눈물

겨울이 찾아왔다.

로트가 떠난 지 3주가 흘렀다.

그동안 벨데케 부인은 원수의 아들을 격파한 기쁨을 마음껏 누리며 온 도시에서 열리는 만찬장에 드나들었다. 거기서 아들이 이룬 업적을 칭송하고, 복수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원수이자 살인자의 악랄한 계략을 비난했다.

그리고 고독한 싸움을 벌인 아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난날 자신이 쏟아부은 눈물겨운 노고도 하소연하며 머지않아 성대한 축하연을 벌이겠다고 공고했다.

3주째 그런 호언장담이 이어지자 몇몇 호사가는 짓궂게 왜 연회가 지체되느냐고 물었다.

프랑스에서 온 유명한 투르바두르에게 아들의 무훈담을 의뢰하느라 분주했던 벨데케 부인은 아직 불행한 포겔바이데 가를 위한 애도의 기간이 끝나지 않았으며 만사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고 응수했다.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얼굴로 조만간 이 도시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고 덧붙였다.

“귀부인이시여.”

심술궂은 호사가는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저희를 까무러치게 할 희소식이라면 말씀대로 천하의 말썽꾸러기를 속 시원히 쫓아버렸겠다, 덕분에 지리멸렬한 겨울을 보내는 저희를 가엾이 여기시고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누심이 어떨까요?”

“글쎄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만사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혹시, 혼담이 오가는 중 아닌가요?”

“어머나, 제게 말인가요?”

부인은 놀라서 소리쳤다.

“아직 제 주인이 살아 계신걸요. 성급하기도 하시지!”

“하하. 댁의 아름다운 막내 따님께 말입니다.”

부인은 이 대답에 다소 기분이 잡쳤지만 체면을 차려서 대꾸했다.

“글쎄요. 아무리 조르신들 뱃속의 달걀을 삶아 먹자고 암탉을 끓는 물에 던질 수는 없지 않겠어요. 때가 되면 아시게 될 겁니다.”

“젊은 기사가 그러라고 신신당부를 하던가요?”

“눈치도 빠르시네. 호호.”

만찬장에 모인 손님들은 벨데케 부인이 시치미를 떼자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계속 졸랐다.

벨데케 부인은 그럴수록 모두를 깔보듯 목을 꼿꼿이 쳐들고 두고 보시라고 애를 태우기만 했다.

짓궂은 호사가는 부인에게 벌꿀 과자를 권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젊은 기사와 영주님 따님과의 혼담은 어떻게 됐습니까? 올여름에만 해도 올해가 가기 전에 식을 올리나 싶었는데요.”

“그 얘긴 관두세요.”

벨데케 부인은 무례하다 싶을 만큼 손을 내저으며 단언했다.

“제가 잠시 요양하러 간 동안 그런 얘기가 나돌았나 본데 어림없는 혼사지요. 제가 안 된다고 딱 잘랐어요. 영주님께선 참 고매하시고 너그러우시지만 따님은, 다들 아시지요? 다소 기가 세잖습니까. 저번에도 보세요. 그 망나니 포겔바이데 녀석을 단칼에 죽이게 하지 않고 공연히 마상 창시합 훈련을 시키라고 해서 우리 이젠하르트가 살이 쪽쪽 빠지며 욕을 보지 않았나요. 그때 어찌나 힘들어하던지 식욕이 싹 달아났다며 몇 날 며칠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 잤답니다. 그 여파 때문에, 세상에나, 아직도 제 때에 식사를 못하고 있답니다. 쯧쯧. 게다가 우리 이젠하르트는 머지않아 고향을……. 큼큼. 그 과자를 좀 건네주시겠어요?”

부인이 의뭉스럽게 말을 돌려서 호사가는 집요하게 캐물었다.

“머지않아 무슨 일이 있나요?”

“네?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천연덕스럽게 반문이 되돌아왔으므로 호사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만찬석에 있는 손님을 돌아봤다. 과자를 먹느라 여념 없는 벨데케 부인 몰래 어디선가 ‘만필요트 백작’, ‘후계자’ 따위를 소근대는 말소리가 들렸다.

호사가는 갈수록 짓궂은 미소를 품고서 화제를 돌렸다.

“주인의 건강은 어떠신가요?”

“그건 왜 물으시죠?”

벨데케 부인은 남편이 화제로 오르자 따분하기 짝이 없다는 투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호사가는 자못 동정조로 말했다.

“요새는 통 뵙지 못해서요. 편찮으시다는 소식도 있고요.”

“그이라면 절대 염려하지 마세요.”

벨데케 부인은 벌꿀 과자를 와작, 깨물었다.

“제 주인께선 맥주를 마신 당나귀처럼 원체 튼튼하답니다. 요새는 제 처자식을 버리고 수도원으로 달아날 꿍꿍이를 품고서 엄살을 피우며 누워 있지만 두고 보세요. 그런 잔꾀가 통하지 않는단 걸 깨닫는 날엔 벌떡 일어나서 거위 알부터 세러 갈 겁니다. 흠, 이 과자는 꽤 맛있군요. 그런데 벌꿀은 아끼지 말고 듬뿍 듬뿍 치셨어야지.”

손님은 3주간 이렇게 부인과 유쾌한 승강이를 벌였다.

그러나 그녀가 떠나고 나면 한 자리에 우루루 모여들어 명예로운 승자의 영광 대신에 심상치 않은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벨데케 가에 대해서 쑥덕거렸다.

2주가 흘렀다.

벨데케 부인은 최근에 외출을 삼가고 집안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녀처럼 활기에 넘치기는커녕 근심이 가득한 가솔은 안주인이 내리는 변덕스러운 지시를 따르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다.

늙은 한스를 제외하고 가솔 모두는 2주 전부터 집안에서만 상주했다. 농한기이며 혹독한 추위 탓도 있지만 젊은 주인으로부터 외출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젠하르트 본인도 외출을 삼가고 주로 가족실에 상주했다. 외출이 불가피할 때는 이른 새벽과 저녁 종이 칠 무렵에 속히 용무를 보고 귀가했다.

이 날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늙은 한스를 불러서 누이의 행방을 물었다.

“아가씨께선 지금 주인 나리의 침실에 계십니다.”

늙은 한스는 예상대로 대답했다.

이젠하르트는 그녀를 불러오라고 했다.

늙은 한스는 난처한 듯이 주인의 심기를 살피다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 곧바로 모시고 와야 할까요?”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나.”

“그게……. 아가씨께선 엊저녁부터 주인 나리 곁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나리께서도 아가씨가 안 계시면 부쩍 헛소리를 하시고요.”

“잠시 보잔다고 해라.”

젊은 주인이 단호히 명령하니 늙은 한스는 곧바로 물러갔다. 그러나 곧 가겠다고 대답한 힐데가르트가 감감무소식이라서 가족실과 벨데케의 침실을 수차례 왕복해야 했다.

“저를 부르셨나요.”

힐데가르트는 한참 후에 가족실로 들어섰다.

이젠하르트는 공손히 인사를 건네는 누이의 핏기 없는 이마와 그늘이 드리워진 눈가, 빨래 중인 세탁부처럼 불그스레한 두 뺨을 보면서 자리를 권했다.

마주 앉은 누이의 가냘픈 어깨는 애처로울 만큼 굳어 있었다. 시선은 줄곧 아래를 향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구나. 어디가 불편하니?”

“아녜요. 괜찮아요.”

힐데가르트는 바닥의 융단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이젠하르트는 난롯가를 가리켰다.

“이쪽으로 옮겨 앉으렴. 여기가 더 따듯하구나.”

“됐어요. 여기도 좋답니다. 절 왜 부르셨어요?”

용건을 캐묻는 누이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를 찌를 듯이 응시하다가 이내 아래로 향했다.

이젠하르트는 누이의 당돌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사뭇 다정하게 말했다.

“꼭 용건이 있어야만 하겠니. 그냥 너를 보고 싶었어. 한집안에서도 얼굴 보기가 여의치 않구나.”

“아버님 침실로 오시면 언제든 보실 수 있을 텐데요.”

“…….”

“전 항상 거기 있는걸요.”

대담하게 일침을 놓은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무례가 지나침을 뉘우치듯 고개를 숙였다.

몇 마디 잡담으로 그녀의 불안을 덜어준 이젠하르트는 몸종을 시켜서 비단 천에 싸인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

제 앞에 놓인 그걸 묵묵히 내려다보던 그녀는 눈을 쳐들고 물었다.

“이게 뭔가요?”

“직접 펴보렴.”

불안과 호기심이 그녀를 갈등케 했다. 이윽고 조심스레 천을 벗겨 낸 그녀는 무심결에 탄성을 발했다.

“이걸 어디서 구하셨어요?”

“마음에 드니?”

힐데가르트는 갑옷 한 벌 값에 버금갈 값비싼 책과 오라버니를 번갈아 바라봤다. 탄성의 눈초리는 그러나 이내 낙담으로 뒤바뀌었다.

“백작께서 보내셨나요?”

“그렇단다. 글을 모르는 기사들보다는 네게 유용할 거라며 주셨지.”

누이의 속내는 아랑곳없이 이젠하르트는 아무 곳이나 한 구절 낭독해 보라고 했다.

힐데가르트는 처음엔 마지못한 듯이 명령을 따랐지만 테두리가 금박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채색 삽화에 매혹되어 글을 읽다 말고 책 구경에 정신이 팔렸다. 책이 귀한 시절이고 영주의 성에서도 진귀한 구경거리가 됐던 보물이었다. 그녀의 그늘졌던 눈가에는 어느새 황홀경에 취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하르트는 그 모습을 만족한 듯이 눈에 담고 물었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니?”

고개를 쳐든 힐데가르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봤다. 이윽고 갑자기 단꿈에서 깬 듯이 뺨을 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치마자락을 움켜쥔 두 손등에는 파리한 핏줄이 돋았다.

이젠하르트는 조용히 말했다.

“물론 네가 퍽 신경을 쓰고 있고 어머님께서도 애를 쓰고는 계시지만 나로서는 노파심에 묻지 않을 수 없구나. 내게는 하나뿐인 소중한 누이의 결혼식이잖니.”

“……. 오라버니.”

“그래. 말해보렴.”

“제가 어딘가로 도망이라도 칠까 봐 걱정되세요?”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말을 이었다.

“만약 그러시다면 간청 드리니 그런 염려는 하지 마세요.”

“…….”

“저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에요. 오라버니께서 견습 기사 시절 숙부님과 함께 잠시 귀향하셨을 때처럼, 오라버니의 꽁무니를 쫓으며 마냥 행복했던 철부지가 아니랍니다. 물론 제가 못 미덥겠지만 저도 제 본분을 잊지 않고 있어요. 그러니 염려 놓으세요. 전 오라버니의 명령에 복종해서 어머님께는 효성스러운 딸이, 만필요트 백작께는 훌륭한 아내가 그리고 오라버니께는 평생토록 귀여움을 받는 누이가 될 작정이니까요.”

“힐데가르트.”

이젠하르트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내 명령이라고 하니 마음이 아프구나. 너도 흔쾌히 백작의 청혼에 동의했다고 생각하는데.”

“아, 제가 그랬던가요?”

힐데가르트는 쓴 미소를 품었다.

“네, 저도 흔쾌히 청혼을 수락했어요. 용서하세요. 제가 말실수를 했답니다. 그래도 저를 너무 나무라지는 마세요. 어머님 말씀대로라면 저는 늘 제멋대로에 철부지 고집쟁이이니 어쩌면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발 제 걱정은 마세요. 고매하신 백작님의 현명한 아내로서 평생 사랑받겠다는 제 결심은 확고하답니다. 더욱이 귀향하신 이후로 홀로 ‘큰일’을 해내시고, 이제는 아버님의 병환과 제 장래까지 걱정하시느라 자신의 건강마저 해친 오라버니께 저도 보답을 해야 하니까요.”

“사랑스럽고 다정한 내 누이, 힐데가르트.”

누이의 어조가 그 내용과 모순될수록 이젠하르트는 더욱 상냥하게 말했다.

“네 음성은 샘물처럼 맑고 잔잔한데 그 속에 손을 담갔더니 가시덤불처럼 따끔하구나. 나를 원망하는 네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디에서 그만한 혼처를 찾을 수 있겠니. 너는 분별력이 있고 똑똑한 아이니까 이 결혼이 장차 네게 큰 행복이 될 것을 아리라고 믿는다.”

“네, 물론 지금도 잘 알고 있답니다.”

힐데가르트는 순순히 동조했다. 그러나 자신으로선 넘어설 수 없는 장벽과 맞서고 있음도 알고 있기에, 부지불식간에 원망조로 말했다.

“제 신분이나 지참금으로는 앞으로 평생이 걸려도 그만한 혼처를 찾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리고 저 또한 백작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답니다. 베풂에 인색하지 않고 사려 깊은 그분께선 처음부터 우리 집안에 과분한 호의를 베풀어주셨고 또 근래에는 아버님의 병환을 누구보다 염려하시며 온갖 약초와 영험한 의사까지 보내주셨지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아버님께선 주님의 품으로 불러가셨겠지요. 그것도 그렇지만, 저 때문에 그간 큰 고역을 치르신 오라버니께 보답하고픈 마음도 크답니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백작님께 제 사례의 말씀을 대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런 값진 선물은 넘치도록 보내주셨으니 더는 제게 과분하다고도 전해주세요.”

“힐데가르트.”

이젠하르트는 일어서려는 누이를 되앉혔다.

“거듭 말한다만 네 심정을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결혼식이 예상보다 앞당겨졌으니 너로선 두렵고도 당혹스럽겠지. 나 또한 너를 이토록 일찍 보내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백작께도 사정이 있으니 네 말대로 큰 은혜를 입어온 우리로서는 도리가 없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아버님께서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그전에 서둘러야겠지요. 그런 속사정쯤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아니었나요?”

“…….”

“그리고 오라버니께서도 결혼식이 끝나면 곧바로 고향을 떠나실 생각 아니신가요? 무거운 짐을 떨어버리셨으니 모험과 명성을 찾아서 다시 편력의 길에 오르시겠죠?”

“…….”

“그럼 전 이만 나가봐도 될까요?”

황급히 일어선 힐데가르트는 입술을 깨물고 제자리에 서버렸다.

이젠하르트는 누이의 손을 잡고 자기 앞으로 끌어당기며 손등을 어루만졌다.

“조금 더 있다 가렴.”

그는 본심 그대로 말했다.

“네가 나를 원망하니 이 마음이 한없이 슬프고 괴롭지만 귀엽고 선량한 내 누이의 얼굴을 보며 위로받고 싶구나.”

힐데가르트는 마지못해 앉았지만 격정을 억누르느라 눈가가 시큰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녀가 이젠하르트를 경외시 한 건 부친 벨데케가 수도원으로 쫓겨났을 때부터였다. 이젠하르트가 귀향한 이래로 막연히 느꼈던 위화감의 실체를 서서히 깨닫는 동안 그녀는 점차 그와 내외하게 됐고 설교사가 살해된 사건으로 벨데케가 기절한 후로는 이젠하르트를 두려워하고 원망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에게만 상냥한 미소를 건네는 그를 보고 있자니, 원망과 두려움으로 메워졌던 가슴에 혈육으로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연민이 피어올랐다. 그의 음울한 낯빛과 메마른 입술 그리고 여읜 뺨이 안쓰러워서 더욱 그러했다.

‘아, 나야말로 죄인이야.’

그녀는 마음속에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삼켰다.

‘오라버니만의 잘못이 아냐. 나야말로 우리 집안에 불행을 가져온 장본인이면서 누구를 탓할까. 난 이기적인 연모의 정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

지난여름 내내 자신을 가혹하게 고문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녀는 원망 따위는 한순간 전부 잊고서 이젠하르트의 품에 몸을 던졌다.

“오라버니는 요새 왜 그토록 근심이 많으신가요?”

“내가 그렇게 보이니?”

“네, 그래 보여요. 왜 이토록 마르셨어요. 제가 도울 일이 없을까요?”

“네가 염려할 일은 아무것도 없어. 너의 행복한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난 아무래도 괜찮아.”

“아니, 아니에요. 식사를 통 안 하시잖아요. 무엇 때문인가요? 네?”

“요새 살을 빼고 있다.”

이젠하르트는 태연히 대답했다.

“추위 핑계를 대고 훈련을 게을리했더니 체중이 불어나는구나. 외양만 봐서는 모르겠지만 실은 몸이 몹시 무겁다.”

“아, 오라버니!”

힐데가르트는 그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쳤다.

“오라버니는 역시 저를 어린애로만 보시는 거예요. 평생토록 저를 그렇게만 보시겠지요.”

이젠하르트는 누이를 가슴에서 떼어내고 화제를 돌려 위로했다.

잠시 후, 그녀가 평정을 되찾고 돌아가려고 할 때, 그는 문가에 선 누이를 불러 세웠다.

“결혼식이 머지않았으니 오늘부터는 네 몸과 건강을 돌보려무나. 하인이 수두룩한데 네가 날마다 아버님 곁에서 밤을 새워서야 되겠니.”

힐데가르트는 흐릿하지만 서글픈 미소를 띠고서 아무런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이젠하르트는 그녀가 두고 나간 책을 몸종을 시켜 치우게 했다.

그러고서 난롯불이 미치지 않는 체스 테이블로 옮겨 앉아 불빛을 등지고 피로한 눈을 감았다.

백작과 힐데가르트의 혼인 약속은 로트가 추방 당한 직후에 이뤄졌다.

혼담은 그전에도 공공연한 비밀이어서 두 남매가 만난 지 2주가 지났을 무렵, 영주가 두 사람이 혼인한다는 일정을 공표하고 축복했을 때도 시민들은 벨데케 부인이 바람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혼인 준비는 순풍을 탔다. 고귀한 품성과 자선가로서 덕망이 높은 백작은 결혼 준비에도 미덕을 유감없이 발휘해 사람들에게서 찬사를 받았다. 터무니없이 적은 신부의 지참금에도 흔쾌히 동의하더니 오히려 그 몇십 배의 재물을 신부와 병든 벨데케를 위해서 아낌없이 베풀었다.

몇몇 호사가는 고작 보잘것없는 기사 가문의 신부를 얻으려고 재산을 탕진하는 백작의 낭비를 험담했지만, 부자가 빈자에게 재물을 희사해서 축성하듯이, 백작의 기행도 영혼을 구제하려는 일환으로 결론지어졌다.

시장판에서는 다른 의견도 나왔다. 푸줏간 주인은 식칼을 흔들며 말하길, 신앙심이 두터운 백작은 외국에 드넓은 봉토를 소유한 엄청난 재산가이지만 그의 신분과 재산에 어울리는 신부랑 수도 없이 이혼과 재혼을 거듭했던 터라 마지막으로 가난하지만 순결한 어린 신부에게서 영적인 안식처를 구한다고 했다.

만사는 어쨌든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벨데케 가에 다시 암운이 드리웠다. 딸에게서 극진한 간호를 받고 호전되던 벨데케의 병세가 급격히 반전됐다.

힐데가르트는 주야로 부친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간절한 기도와 노고에도 불구하고 벨데케의 병세는 갈수록 나빠졌다. 겁에 질려서 죽은 자의 왕을 부르짖고, 늑대인간이 저주를 내렸다고 외쳐대는 헛소리가 심해졌다.

혼인 준비로 분주했던 하인은 이러한 불행의 기습을 예상한 듯이 뒷마당의 작업장과 부엌에서 수군댔다. 오래전부터 집안에 감도는 흉흉하고 암울한 기운 때문에 주인에게 임종의 순간이 임박했다고 확신한 것이다. 젊은 주인의 나날이 어두워지는, 예사롭지 못한 낯빛도 불길했다.

그날 저녁이었다.

늙은 한스는 가족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주인이 앉아있는 체스 테이블 곁으로 다가섰다. 근래 주인의 심기가 어떠한가를 알기에 이마에는 벌써 진땀이 배어있었다.

주인이 용건을 묻자 그는 난처한 투로 말했다.

“나리, 아가씨께서 나리를 뵙자고 하십니다.”

“이리로 오라고 해.”

이젠하르트가 말했다.

담담한 대꾸에도 한스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아가씨께선 주인 나리 곁에 계십니다. 직접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나리께서 어제부터-…….”

“곧 가겠다.”

대답과는 달리 그는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늙은 한스는 그동안 젊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병실로 가서는 변명을 늘어놓느라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러는 새에 밤이 깊었다.

마지막으로 난롯불을 살핀 늙은 한스는 밖으로 나갔다. 장작불은 활활 타오르는데도 갑자기 찬바람이 실내를 한 바퀴 휘돌았다.

늙은 한스가 문을 열어두고 나갔나 싶어서 이젠하르트는 뒤를 돌아봤다. 열린 문가에는 힐데가르트가 서 있었다. 두 뺨은 새빨갛고 금빛 머리칼은 바람에 날린 듯이 헝클어져 있었다.

“왜 그러고 서 있니?”

그는 일어나서 누이에게 말했다.

“추울 텐데 어서 들어오렴. 찬바람은 여자의 몸에 좋지 않아.”

“오라버니.”

힐데가르트는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눈을 똑바로 쳐들고, 가쁜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물었다.

“왜 아직도 여기 계세요? 무얼 하시느라 바쁘신가요? 잠시의 틈도 나지 않을 만큼 바쁘신가요?”

“너야말로 사냥꾼에 쫓기는 사슴처럼 달려왔나 보구나. 뭣 때문에 그러니?”

“병실로 와주십사 부탁드렸잖아요.”

그녀는 원망조로 물었다.

“오라버니는 아버님의 병세를 정말 모르세요?”

“그걸 나만큼 아는 사람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럼 왜 안 오시나요? 아버님께서 어제부터 찾고 계신걸요.”

“곧 가겠다.”

그는 누이에게 가서 얼굴을 근심스레 들여다보며 말했다.

“딴 데 정신을 팔았더니 밤이 이렇게 깊었구나. 그런데, 힐데가르트, 넌 어떻게 된 거냐? 네 모습은 여전히 결혼을 앞둔 축복받은 신부라기보다는 꼭 뒷마당의 세탁부 같구나. 이 집안엔 너 말고는 하녀가 없단 말이냐? 옷차림은 이게 뭐냐? 소매도 달지 않고 농부의 아내처럼 입었구나. 네 외양과 건강을 돌보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너는 나를 실망시키는구나.”

“아, 오라버니!”

힐데가르트는 그의 질타는 아랑곳없이 손을 움켜잡고 소리쳤다.

“왜 아버님을 뵈러 오지 않으세요? 아버님께선 오라버니를 뵙고 싶어 하세요!”

“곧 가겠다고 하지 않았니. 네가 이러니 내가 마치 천하의 불효자처럼 여겨지는구나.”

“아녜요! 그렇지 않아요! 아버님께선 오라버니만 찾고 계세요. 여윈 손을 내밀었다가도 제가 잡아드리면 오라버니가 아님을 알고 얼마나 상심하시는지 몰라요.”

“이쪽으로 오렴.”

이젠하르트는 누이의 어깨를 안고서 의자로 이끌었다.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녀는 마지못해 의자에 앉으면서도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네가 진정하면 가보겠다.”

그는 누이를 안심하게 했다.

“틈틈이 가보고 있는데도 너를 나를 원망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그러지 못할 이유도 없지.”

“오라버니,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하지만 오라버니께선 아버님께서 주무실 때만 잠깐 들르셨잖아요. 아버님께선 오라버니를 직접 뵙지도 못했는걸요.”

“그럼 넌 내가 다른 시급한 일을 모두 제쳐두고 종일 아버님 곁에서 병간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는 냉정하면서도 반쯤은 달래고 반쯤은 꾸짖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는 더욱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 오라버니.”

힐데가르트는 이 순간 그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 상황에서 그게 도대체 뭔가요? 오라버니께는 무엇이 그토록 시급하고 중요한가요? 아버님의 위독한 병세를 숨기고 하인들 입단속을 하는 일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제가 달아날까 봐 감시하는 일 말씀이신가요?”

“…….”

“네? 오라버니?”

누이의 창백한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곧 가보마.”

그는 조용히 말했다.

“너는 규방으로 가서 좀 쉬어라. 그리고 너무 염려하지 마렴. 아버님께선 노쇠해서 자리에 누우셨다만 겨울이 지나면 곧 기력을 회복하실 거야. 그러니 너도 네 건강을 돌봐라. 네가 곁에서 울기만 한다면 아버님께서 어떻게 쾌차하시겠니.”

이젠하르트는 누이를 내보내려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냉기가 밀려왔다. 이때 뒤에서 의자가 덜컹대며 밀려나는 소음이 들렸다.

“차라리 수도원으로 보내세요!”

힐데가르트는 제 가슴을 움켜잡고 불쑥 소리쳤다.

이젠하르트는 뒤돌아서 누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두 뺨이 새빨갰다. 한 줄기 눈물이 그 위로 흘러내렸다.

“차라리 아버님을 수도원으로 보내시라고요. 바로 지척에 아들을 두고도 볼 수 없다면 거기로 쫓아 보내세요. 그편이 아버님께는 덜 가혹하지 않나요.”

“그게 무슨 말이냐? 너는 요사이 뜻 모를 말을 자주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구나. 어서 규방으로 올라가 마음을 가라앉히렴.”

“아니, 그럴 수 없어요. 오라버니께선 저번에 아버님이 수치스러워 수도원으로 쫓아 보내셨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쫓아보내시라고요. 그럼 저도 자진해서 성으로 갈게요. 탑에 가둬두면 오라버니께선 더는 제가 달아날 염려를 안 하셔도 되니까요.”

이젠하르트는 가냘픈 어깨를 와들와들 떨며 온몸으로 소리치는 그녀에게 가만히 다가왔다.

“넌 잘못 알고 있구나.”

그는 누이의 젖은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를 성으로 보낸 건 콘드리라무어스가 너를 위로하려고 먼저 청했기 때문이야. 너도 거기 상주하고 싶어 했잖니. 아버님께서도 오래전부터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어. 나도 그래서 동의했지만 네가 아직 미혼이라서 훗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기력을 잃으셨으니 잠시 요양을 보내드린 게 아니냐?”

“네, 그랬었지요.”

힐데가르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대꾸했다.

“아버님께서 영혼의 안식처를 구하길 원하셨지요. 평생 가난한 집안을 이끌며 남들의 조롱을 받아오셨기에, 거기서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하셨어요. 하지만 그분의 온화한 성품과 나약함의 대가로 그토록 신뢰하고 사랑했던 아들로부터 수치스레 쫓겨날 줄은 모르셨겠지요. 복수를 위해선 아버님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으려던 오라버니께 말이에요!”

“…….”

“오라버니! 아버님의 나약하고 선량한 성품이 왜 죄가 되나요? 왜 아버님께서 부질없는 복수의 제물이 돼야 하나요?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게 뭔가요? 명예회복인가요? 아니면 부귀영화인가요? 아니면 신의가 사라진 집안인가요?”

아무런 대꾸가 없자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연이어 소리쳤다.

“탐파니스 오라버니는 만나보셨나요? 오라버니는 그곳에 한 번도 안 가보셨지요? 아버님께서 그토록 애원하셨는데도 어째서 한 번도 안 가보셨나요? 오라버니께선 탐파니스 오라버니가 가엾지도 않으세요? 머지않아 또다시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데도 불쌍하지 않으세요? 마음의 병으로 오랫동안 앓고 있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실 건가요? 어째서 그토록 매정하실 수 있나요? 오라버니가 너무나 원망스러워요!”

이젠하르트는 누이의 격앙된 원성을 말없이 듣기만 했다.

오랜 번뇌와 자책으로 지치고 절망한데다 벨데케의 병세가 나빠져서 잠시 이성이 흐려진 그녀는, 일견 냉담해 보이는 시선 속에 연민과 애정을 품고 있던 이젠하르트가 이 순간 자신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느꼈다.

이젠하르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선 사람은 자신의 오라버니가 아니었다. 싸늘하고 모호한 위화감을 풍기는, 낯선 타인이었다.

‘아, 내가 또 죄를 저질렀구나!’

그녀는 뒤늦게 탄식했다.

‘그토록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 헌신하셨는데도 또 배은망덕하게 굴었어. 나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야!’

이젠하르트는 고개를 숙이고 온몸을 떠는 누이를 잠자코 바라보다 말했다.

“네가 나를 그토록 오해하는 줄은 몰랐구나. 미리 알았다면 오해를 풀어줬을 텐데. 탐파니스한테는 한스를 보내서 몇 차례나 위로의 말을 전했다. 나도 직접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가 내 병문안을 거부했으니까. 어린 시절에 우린 형제처럼 자랐고 지금도 그를 형제로 여긴다만, 나도 모르는 새에 그의 미움을 샀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하지만 너의 우려와는 달리 그가 나의 유일한 형제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할 리 없고 나 또한 탐파니스에게 영원한 신의와 우애를 바칠 거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다시 가보마. 이제 그만 나가보렴. 아버님께는 내가 가볼 테니 너는 규방으로 가서 심신의 안정을 찾아라. 네가 병이 날까 봐 두렵구나. 이건 내 명령이니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다오.”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린 그녀는 치맛자락을 끌고서 문가로 향했다.

“오라버니?”

불현듯 그녀는 뒤로 돌아서 그를 쳐다봤다.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는 샘물 속의 사파이어처럼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오라버니, 배은망덕한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녀는 문에 매달려 온몸을 떨며 말했다.

“앞으로는 오라버니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무엇이든 오라버니의 뜻에 순종할 테니 제 무례를 용서하시고 부디 저를 예전처럼 사랑해주세요. 결혼 준비도 착실히 할게요. 그러니 지금 병실로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아버님께 제발 함께 가주세요! 네? 오라버니?”

이젠하르트는 문가로 가서 누이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두 뺨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았다.

“그래. 가마.”

그는 누이의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지금 곧바로 가자. 몇 번이고 말하지만, 힐데가르트, 너는 나의 주인이다. 너의 불안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내가 부끄럽구나. 네가 흘리는 이 눈물은 내게는 독이로구나.”

“……. 오라버니!”

“눈물을 닦으렴. 네가 불행하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니?”

이 밤 이후로 벨데케의 병세는 호전됐다.

베르나르 신부와 의사는 일시적인 호전이라고 진단했지만, 벨데케 부인은 상당히 계획적이고 집요한 엄살이라며, 간신히 수족을 놀리는 남편을 강제로 침상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 후 지체됐던 결혼 준비가 속개됐다. 백작은 신부에게 선물과 재단사를 보냈고, 규방에 가득 널린 호사스러운 옷감은 벨데케 부인과 하녀의 혼을 빼앗았다.

그러나 결혼을 이틀 앞두고 또 한 차례의 불행이 벨데케 가를 기습했다. 가장 축복받은 신부가 갑작스레 병석에 누운 것이다. 부친의 간병에 과도히 집착한 그녀가 발병한 것은 가솔 사이에서는 이미 예견된 불상사였다.

하지만 급속히 나빠지는 병세는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라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리스인 의사와 베르나르 신부는 환자의 곁에 상주했다. 벨데케 가의 가솔 전원은 그녀를 간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예비신랑 만필요트 백작이 바친 헌신은 이례적이고 남달라서 벨데케 가의 가솔과 시민에게서 경탄을 자아냈다.

열흘간 이어진 병치레 끝에 결국 그녀는 건강을 회복했다.

결혼 준비가 다시 속행됐다. 그 와중에 호사가들 사이에선 늙은 벨데케와 신부가 앞으로 또 병이 날까 봐 신부의 오라버니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결혼을 서두른다는 소문이 오갔다.

그러나 반대인 의견도 암암리에 나돌았다. 반대파인 영주의 측근은 말하길, 혼인 준비를 속행하는 이유는 만필요트 백작이 직접 요청해서라고 했다.

백작은 신부가 쾌차하기를 기원하며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봉사를 바쳤지만, 결혼식이 불가피하게 연기됐을 때, 신부의 오라버니를 비밀리에 호출해서 정중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선에서 상당한 유감을 표했다는 것이다.

그 얼마 후에 미뤄졌던 혼인 날짜가 잡혔다.

그리고 결혼식을 앞둔 날, 예비 신부는 조석 미사에 참석함으로써 지리멸렬한 혹한의 겨울에 지쳐 은근히 불상사를 기대했던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렸다.

이날 저녁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이젠하르트는 누이를 방문했다. 백작이 보내온 값진 보석과 옷감이 궤짝 안에 가득 담긴 규방에서 둘은 몸종을 내보내고 마주 앉았다.

“몸은 어떠니?”

이젠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리한 이마와 가느다란 손끝에 병색이 남아있는 힐데가르트는 결혼 전야의 신부답지 않은 침착한 태도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오라버니와 백작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보시다시피 건강하답니다.”

“다행이구나.”

그는 담담히 말했다.

“오늘 밤은 쉽사리 잠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찍 잠을 청해보렴. 내일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 기대되는구나.”

“……. 오라버니.”

힐데가르트는 문득 고개를 쳐들고 이 순간만은 자신의 처지를 온전히 잊었다. 그저 이젠하르트에 대한 연민에 휩쓸려서 두려워하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오라버니께서는 왜 나날이 여위어 가시나요? 오라버니를 책망한 저의 배은망덕한 짓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신가요?”

“그 일이라면 벌써 잊었단다.”

그는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그렇게 보인다면 왜 그럴까. 아무래도 이 밤이 내 사랑하는 누이와 함께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섭섭해서 그렇겠지. 하지만 오늘 밤만 지나면 영혼과 육신이 순결하고 선량한 네게는 축복받은 미래가 보장될 테니 참는 수밖에.”

이날 저녁 두 남매는 한동안 담소를 나누고 헤어졌다.

밤이 깊어가고 어느덧 자정이 지났다.

감청색인 맑은 겨울 밤하늘에서는 달빛이 박공지붕에 새하얗게 내리비췄다.

모두 잠이 든 이 무렵, 늙은 한스는 젊은 주인이 밤을 지새우는 가족실로 달려갔다.

이젠하르트는 한스가 들어간 직후 그곳을 나와서 규방으로 향했다. 벨데케 부인과 힐데가르트가 겨울철에 함께 기거하는 그곳 문 앞에는 힐데가르트의 몸종이 등불을 들고 서 있었다.

“나, 나리…….”

몸종은 젊은 주인을 보자마자 앞으로 일어날 불상사의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올까 두려운 마음에 새파랗게 질려 말했다.

“나리께서 가시고부터 갑자기 저러세요. 꼼짝도 없이 저러고만 계세요.”

이젠하르트는 규방으로 들어갔다. 침상에서는 숙면 중인 벨데케 부인의 태평한 숨소리가 울렸다.

그 침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몸종이 잠을 청하는 쿠션 더미 위에는 힐데가르트가 몸을 반으로 접고 엎드려 있었다.

이젠하르트는 누이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얼굴을 두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얼굴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도 그의 손바닥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왜 또 그러니?”

“……. 오라버니!”

자신을 한없이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상냥한 목소리에 그녀가 품은 마음의 금선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이젠하르트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눈물을 삼키며 속삭였다.

“오라버니, 저는 못된 계집이에요. 저를 용서하지 마세요. 죄를 저지르고도 참회할 줄 모르는 저를 결코 용서하지 마세요!”

“울지 말고 왜 그러는지 말해보렴.”

그는 더욱 상냥하게 말했다.

눈물이 그의 가슴을 흠뻑 적시고 나서야, 그녀는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오라버니, 모두가 제 탓입니다. 저의 잘못이에요. 그분이 아니었어요! 아무런 죄도 없이 그 가엾은 분은 저 때문에 오라버니에게서 오해를 사고 고향에서 쫓겨나셨어요. 불명예와 치욕을 떠안고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실 수 없게 되었어요. 저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리셨어요. 하지만 제가 연모한 분은 그분이 아니었답니다. 이기적인 연모의 정 때문에 오라버니께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고 무고한 그분을 대신 불행에 빠뜨렸어요. 그러고도 오라버니를 원망하고 미워했으니, 제가 어찌 감히 저만의 행복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용서받지 못할 죄악으로 심신을 더럽히고도 어찌 남의 아내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런데도 참회는커녕 연모의 고통에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으니, 어찌 구원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아, 오라버니! 저 때문에 불행해진 그분이 너무나 가엾어요! 게다가 제가 연모하는 분마저 떠나버리셨으니 이 세상이 전부 멸망한 것처럼 슬퍼요! 오라버니, 저를 제발 결혼시키지 마세요! 수녀원으로 보내주세요! 영원히 속세를 떠나서 이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제발 저를 수녀원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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