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황제의 흰바다매 이야기
어느 제국에 흰바다매와 매사냥꾼이 살았다.
흰바다매는 매의 제왕이었다. 은빛 털은 갑옷이고 부리와 발톱은 창이었다.
매사냥꾼과 흰바다매는 어느 깊은 숲에 있는 암자에서 살았다. 바람이 이는 숲과 깎아지른 절벽 같은 바위, 파란 하늘만이 전부였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은 대게 은자라고 불리었으며 기도와 침묵, 자연만이 벗이었다.
흰바다매는 늘 높다란 바위에 앉아있었다. 비바람과 뇌우가 몰아쳐도 늘 그랬다.
매사냥꾼은 동이 트면 바위로 갔다. 해가 저물 때도 그랬다. 날마다 하루에 두 번, 바위에 앉아있는 흰바다매를 보고서 발걸음을 되돌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다시 그곳을 찾았다.
흰바다매는 황제의 매였다. 매사냥꾼은 황실의 매 훈련대장이었다.
한 때 둘은 한 몸으로 하늘을 정복했지만 이제는 깊은 암자에서 외따로 서 있다.
흰바다매는 단 하루도 바위를 떠나지 않았다.
매사냥꾼은 아침저녁으로 그에게 먹이를 잡아다 줬다. 먹이는 바위 아래 묶여 기력이 다할 때까지 몸부림을 쳤다.
아침이 되면 매사냥꾼은 다시 바위로 갔다. 먹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매사냥꾼은 다음날 더 살지고 싱싱한 먹이를 잡아다 줬지만 먹이도 흰바다매도 늘 제자리에 그대로였다.
셀 수 없는 밤낮이 지나갔다. 먹이가 쌓여갔다.
어느 날 매사냥꾼은 새로운 먹이를 흰바다매의 발치에 놓았다. 산 채로 잡힌 뇌조는 몸부림을 쳤다. 흰바다매는 고개를 살짝 돌려 뇌조를 내려다봤다. 뇌조는 흰바다매가 선호하는 먹이였다.
매사냥꾼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다음날 더 많은 뇌조를 잡아들고 바위로 찾아갔다. 뇌조는 바위 아래 흙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갈가리 찢겨 죽은 채. 흰바다매는 높다란 바위에 어제처럼 앉아있었다.
매사냥꾼은 고함을 질렀다. 매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죽은 뇌조는 발치에 내던졌다. 커다란 돌멩이도 집어 던졌다.
돌멩이는 흰바다매의 어깻죽지를 때렸지만 흰바다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 발짝 발을 옮겨 등을 돌리고 돌아앉을 뿐이었다.
매사냥꾼은 주먹으로 바위를 후려치고 고함쳤다. 새빨간 핏방울이 풀잎에 듣고 맨땅에 스몄다.
흰바다매는 날개가 찢긴 제왕, 다시는 정복하지 못할 하늘의 제왕이었다.
흰바다매는 어려서부터 하늘을 정복했다.
그를 키워낸 매 훈련대장은 삼십여 명인 매 사냥꾼과 삼 백여 마리의 매를 거느렸다. 뿔매, 송골매, 새매가 모두 그에게 복종했다. 황제마저도 사냥터에서는 그의 권위를 능가하지 못했다.
예외는 단 하나, 흰바다매만은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았다.
드높은 하늘은 흰바다매, 그의 제국이었다. 창공을 누비는 그의 우아한 비상, 그림 같은 공중전, 날카로운 발톱에 찢긴 사냥감은 황제에게는 기쁨을, 매 훈련대장에게는 부와 권력을, 그에게는 명성과 영예를 선사했다.
흰바다매의 명성은 나날이 치솟았다. 그는 겸양과 신의로써 매를 이끌고, 승리와 찬사를 남에게 양보했다. 모두가 그를 더욱 찬미하고 숭배했다.
명성은 절정에 올랐다. 그는 지상과 하늘의 제왕이었으며 늘 황제의 손목을 독차지했다.
어느 날 황제는 색다른 공중전을 원했다.
매 훈련대장은 또 다른 흰바다매를 추천했다. 은빛 깃털이 아름다운 그는 흰바다매의 어린 동생이었다.
둘은 힘차게 날아올라 하늘을 뒤덮은 왜가리 떼의 목을 꺾었다.
황제는 공평히 둘을 치하했다. 어린 흰바다매는 그날 황제의 손목 한쪽을 차지했다.
나날이 둘의 명성은 높아갔다. 두 형제의 절묘한 공중전은 덕망 높은 황제에게 크나큰 기쁨이었다.
어린 흰바다매는 형의 꼬리를 쫓으며 하늘을 누볐다. 형을 따라서 이착륙했고 형의 명령에 복종했다. 그리고 사냥이 끝나면 매 훈련대장의 손목에 내려앉았다. 황제는 동생의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써 이따금 자신의 다른 쪽 손목을 내주었다.
형제는 그렇게 황제의 총애와 영광을 공평히 나눴다. 사람들은 어린 흰바다매의 겸손과 선량한 마음씨를 칭송했다.
어느 날 대대적인 사냥이 열렸다. 제후와 봉신이 저마다의 새매를 자랑하며 사냥터에 모였다. 수많은 백조와 왜가리, 매가 하늘을 새하얗게 뒤덮었다.
흰바다매 형제는 그날도 두각을 나타냈다.
마침내 사냥이 끝났을 때, 흰바다매는 황제의 손목에 내려앉았다.
황제가 나머지 어린 흰바다매를 찾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목이 꺾인 왜가리와 백조의 틈에 어린 흰바다매가 쓰러져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바닥에 떨군 채였다.
황제는 정죄를 천명했다. 목격자의 증언이 전해졌다.
황제의 명으로 매 훈련대장이 불려 나왔다. 그는 황제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누가 어린 흰바다매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증언했다. 가공할 죄악이 속속 밝혀졌다.
황제는 진노했다. 자신의 손목에 내려앉은 흰바다매의 어깻죽지를 잡아서 양쪽 날개를 찢었다.
사냥은 끝이 났다.
수많은 제후와 봉신이 저마다 뽐내는 새매를 데리고 사냥터를 떠났다. 어린 흰바다매는 황제의 안장에 실려 갔다.
모두가 사냥터를 떠났다. 말발굽에 짓밟힌 풀잎에 밤이슬이 내려앉았다.
날개가 찢진 흰바다매는 홀로 버려졌다.
홀로 버려진 흰바다매는 사냥터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 찢긴 날개를 웅크리고서 몇 날 며칠이고 황제의 뿔 나팔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이따금 푸득이는 날갯짓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깼다.
황제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매 훈련대장이 돌아와서 죽어가는 그를 암자로 데려갔다.
흰바다매는 그때부터 암자에서 살았다. 바위를 지키며 날마다 하늘을 지켜봤다. 매사냥꾼이 두고 간 뇌조를 찢어 내버리고 남몰래 쥐를 잡아먹으며 황제를 기다렸다.
어느 날 뿔 나팔 소리가 암자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흰바다매는 날개를 힘껏 움직였다. 한껏 목을 빼고 몸부림치다 바위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숲을 쳐다봤다. 뿔 나팔 소리가 가까워졌다. 있는 힘껏 날개를 퍼덕였다.
그때 그가 날아왔다. 두 날개를 한껏 펼친 어린 흰바다매였다. 그는 하늘의 새로운 제왕답게 유유히 창공을 누볐다. 아름다운 은빛 몸통이 창공에 수를 놓았다.
뿔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창공을 누비던 어린 흰바다매는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암자에 또다시 밤이 깃들었다. 이슬에 젖은 나뭇잎이 바람에 부대꼈다.
흰바다매는 다음날도 바위를 지켰다. 죽은 뇌조가 발치에서 작은 둔덕을 이루었다.
흰바다매는 부리로 깃털을 고르며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이 순간 커다란 돌멩이가 그의 어깻죽지를 때렸다.
매사냥꾼은 죽어버리라고 그에게 소리쳤다. 이런 비참한 최후는 너의 명예욕과 탐욕 그리고 배신의 대가라고 소리쳤다. 속죄를 거부하는 그를 하늘에 고발하고 저주했다. 자신의 헌신과 사랑에 대한 보상을 강청하며 그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흰바다매는 바위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매사냥꾼도 수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암자는 덩굴과 수풀에 파묻혔고 그 후로는 아무도 찾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