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전야
날이 추워졌다.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도시를 감쌌다. 박공지붕에는 서리가 하얗게 내리 덮이고 가을비로 진창이 됐던 땅이 굳었다. 초여름부터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던 도시에는 늦가을의 추위와 함께 평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혹독한 추위가 닥쳐옴에도 기쁜 마음으로 이번 겨울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되찾은 이번의 평화는 영구적이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암운이나 헛소문 같은 돌발변수도 더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열흘만 지나면 앓던 이가 빠진다.
재판소에서 영구추방이라는 선고를 받은 로트는 열흘 후에 고향을 떠나겠다고 맹세했다. 과거처럼 발광하리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선고를 받은 후에 그가 보인 초연한 태도와 순종에 놀랐다. 털갈이를 한 새처럼 언행과 분위기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터와 로에란그린, 신부 등은 영주에게 청원하겠다고 나섰지만 로트가 반대했다. 그는 맹세를 이행하기를 원했다. 판결에 대한 복종 때문이 아니었다. 살인죄는 양심에 꺼리지 않았다. 죽을 놈이 죽었으니까.
그가 원하는 건 피앙세의 이행이었다. 영주나 황제가 사면을 내려도 기꺼이 떠나리라고 결심했다.
죽었으리라 믿었던 탐파니스가 살아났다. 그와의 충돌은 자신이 벌인 광란의 정점을 찍었고 그가 회생함으로써 극적인 구원을 얻었다.
그런 구원은 피앙세를 이행해야 한다는 결심을 확고히 했다. 목욕탕에서 흘렸던 눈물과는 달리, 이번에는 그 속에 일말의 반발심이나 원망, 한탄, 비관적인 자포자기의 충동도 품지 않았다.
승자가 애초부터 그것을 원했으므로 속죄를 원하는 패자는 맹세를 이행하면 된다. 그뿐이다. 고향을 떠나서 평생 마음의 고통과 슬픔으로 육신이 쇠한다 해도 자신이 발산한 무분별한 정열과 집착이, 과대망상이 자처한 죗값을 달게 치러야 한다.
탑에 감금된 이래로 로트는 이젠하르트를 만나지 못했다. 그를 만나야 할 이유도 없었고 만날 엄두도 내지 않았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은 그에게 이젠하르트의 소식을 전했지만 로트는 이전만큼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본심이야 어떻든 그가 그런 관심마저도 의식적으로 자제하려는 듯 보였기에 두 귀공자는 이후에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로트도 그 이후로는 벨데케 가에 대해선 묻지 않고, 세 친구를 놀라게 하는 초연한 침묵 속에서 떠날 날만을 기다렸다.
“빌어먹을!”
이터는 어느 날 그런 로트를 보며 소감을 토로했다.
“흉악한 살인을 저지르더니 전혀 딴 판이 됐어. 새침한 늑대 같군. 내 발랄한 귀염둥이는 어디로 갔지?”
판결 후 열흘간 베르나르 신부와 세 귀공자는 로트가 신변 정리하도록 도왔다.
로트는 자신의 장래와 생사가 달렸음에도 모든 출발 준비와 그에 대한 결정권을 세 귀공자와 신부에게 맡겼다. 그 때문에 앞으로의 거취에 대한 이견이 분분했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은 로트에게 각각 볼로냐와 파리로 가자고 제안했다.
베르나르 신부는 클레르몽의 시토회 수도원을 추천했다.
자택 구금이 풀리는 내년 봄에 형들 때문에 수도원으로 쫓겨날 신세가 된 카이렛은 함께 영국으로 도주하자고 제안했다. 곧 귀향할 로트의 부친이 집안을 망신시킨 아들에게 자객을 보낼 테고 머지않아 추방자가 될 탐파니스도 집요하게 로트를 추격할지 모르니 일찌감치 따돌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추방을 하루 앞 둔 날이 밝아왔다.
포겔바이데 가의 문지기 힌츠는 이날 아침부터 잠시도 쉴 새가 없었다. 어제도 그제도 마찬가지였다. 오줌을 싸러 갈 여유조차 없었다. 오후에는 방광이 가득 차서 더욱 포악해졌다.
“염병할! 줄을 서요, 줄을 서!”
힌츠는 후문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보쇼, 아가씨! 귓구멍이 막혔어? 줄을 서라고!”
“왜 나한테만 그래요? 이 인간이 새치기를 하잖아요.”
힌츠에게서 핀잔을 들은 젊은 하녀는 자기 앞에 선 남자의 등을 우악스럽게 떼밀었다.
“새치기하지 말아요! 문지기 영감이 줄을 서라잖아. 난 종일 기다렸다고!”
“상판은 꼭 주전자 같이 생겨서 목청이 크군. 내가 먼저 왔어.”
“어머나, 이 말 도둑처럼 생긴 자식이 누굴 속이려 들어? 저리 꺼져!”
“억! 제 주인을 닮아서 사나운 암컷 망아지 같군.”
“뭐야, 이 말 도둑아! 그런 넌 니네 집 과부를 닮아서 말상을 하고 있냐?”
“옘병할, 남의 집에서 잘들 설치는군. 더는 못 참아. 에잇!”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노고와 문지기로서의 권한이 무시당하자 분노한 힌츠는 문간방으로 달려가서 몽둥이를 들고 왔다. 그걸 사람들 머리 위로 휘두르며 악을 썼다.
“이봐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난장을 부려? 여긴 시장판이 아니라 쫄딱 망한 집구석이야. 줄을 서고 주둥이들 좀 닥쳐요! 다들 내쫓기고 싶지 않으면 질서를 지키라고, 질서를! 에잇, 영주님께 일러바칠까 보다. 몽땅 잡혀가게!”
“쳇, 잡혀가긴요.”
하녀와 입씨름하던 하인이 응수했다.
“누가 누굴 잡아가요? 저치가 죄다 들여보내고 있는데.”
하인이 지목한 자는 후문 입구에 버티고 선 사내였다. 체격과 외모가 곰 사냥꾼 같은 그는 추방자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실은 잠적을 막는다는- 이유로 영주가 파견한 옥리였다. 허리에는 칼을 차고 단검과 철퇴, 양날 손도끼로 무장한 총 세 명의 옥리가 정문과 후문을 지켰다.
후문을 지키는 옥리는 자기 얘기가 나오자 방문객을 비집고 젊은 하녀 쪽으로 왔다.
“자아, 자아, 조용조용히 순서대로 올라갑시다. 왜들 소란을 떨어요?”
“그게 우리 탓인가요?”
젊은 하녀가 쏘아붙였다.
“줄은 줄지도 않는데 당신이 아무나 마구 들여보내니까 이 북새통이지 뭐예요. 발 디딜 틈도 없잖아요.”
“그럼 누군 들여보내고 누군 쫓아낼 수 있소? 다들 발을 구르는데.”
“그래도 그렇죠. 난 종일 기다리고 있다고요. 아유, 다리 아파!”
“자아, 자아, 우리 모두 서로의 절박한 처지를 감안해서 조금씩만 참고 양보합시다.”
그러고서 옥리는 하녀에게 얘기하는 척하며 힌츠가 들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참읍시다. 그래 봤자 두 번 할 고생은 아니잖소. 참고로 영주님께서도 눈감아 주셨으니 잡혀갈 걱정일랑은 말아요.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관대한 영주님께서 그 정도의 배려도 못 해주시겠소. 그래서 눈 딱 감아 주신 거요. 죽이니 마니 했어도 젊은 포겔바이데랑 그간 미운 정이 들었으니까요. 쩝, 나도 막상 닥치고 보니 무척 서운하군. 댁들도 그래서 온 거잖소.”
옥리가 입구로 되돌아갔다.
힌츠는 불만에 차서 옥리와 손님을 노려봤다. 현재 후문 안팎에서 아우성을 치는 이들은 전부 남의 집에서 온 젊은 하녀나 하인, 몸종이었다.
이들은 열흘 전부터 한둘씩 찾아오다가 사흘 전부터는 후문이 닫힐 새 없이 모여들었고, 이 집 주인이 추방 당하기 전날인 오늘은 새벽부터 떼로 몰려온 참이다.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주인의 신분을 감추고 집주인과 단독으로 면회하기를 청했다. 직접 만나서 긴히 전할 편지나 물건이 있다고 했다.
그중에는 묘령의 방문객도 있었는데 대부분 늦은 저녁과 새벽을 틈타 찾아왔고 예외 없이 검은 베일로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흥. 말세군. 말세야.”
힌츠는 그들을 노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저 여편네들 좀 보라지. 가문의 파괴자를 보러 존귀하신 여편네들이 줄줄이 행차라. 차라리 오늘이 장례식 날이었으면 좋았을걸. 쳇.”
날이 저물어가자 방문객이 급증했다.
옥리는 반색하며 그들을 맞이했다. 손님 한 명이 후문 안으로 들어가면 옥리의 가죽 주머니 안에는 달걀이나 빵, 맥주가 차곡차곡 쌓였다.
홀쭉했던 그 주머니가 불어날수록 힌츠의 불만도 커졌다. 반나절이나 줄을 선 심부름꾼들도 불만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아유, 왜 이렇게 줄이 안 줄죠? 저녁 종 치겠어요.”
“그러게 말야. 빨리 빨리 내려오지 않고 뭣들 한담.”
“아, 답장을 받아오라고 시킨 여편네들이 있어서 그래요. 그걸 일일이 언제 써준담. 그냥 머리카락이나 한 움큼씩 뽑아서 줘버리지.”
“누가 이렇게들 몰려올 줄 알았겠어요. 그렇게 욕을 하고 죽이지 못해 안달하더니, 쯧쯧, 많이도 왔다!”
“몰골은 어떻대요? 죽어간대요?”
“집주인 말인가요? 열흘째 꼼짝도 못 하고 갇혀 있으니 답답하지 않겠어요?”
“어디로 간대요?”
“사막에 있는 동굴에 가서 산대요.”
“어머나, 그런 데서 뭘 먹고 산대요?”
“먹긴 뭘 먹어요. 쫄쫄 굶다가 요부로 둔갑한 사막의 악마한테 홀려 죽는 거죠.”
“어머나, 제 버릇 개한테도 못 준다고 요부를……. 세상에 거기 가서도 고걸 노리고…….”
“거기선 아주 의젓했다던데요.”
“재판소에서 말인가요?”
“네. 탑 속에 가뒀다가 꺼내놨더니 나흘 만에 사람이 아주 달라졌더래요. 점잖고 말도 잘 듣고 재판소에선 깊이 죄를 뉘우쳤대요.”
“그럼 뭐 하겠어요. 언제 죽을지 모를 판인데. 늑대인간의 처지나 마찬가지죠. 겨울에 혼자서 여행길에 올라야 하는데, 굶주린 도적 떼가 가만 놔두겠어요? 가죽까지 벗겨 내서 팔 걸요.”
“그 집안은 살 판이 났겠죠?”
“벨데케 집안 말인가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벨데케 부인이 조만간 축하 연회를 벌인대요. 올여름보다 훨씬 성대할 거라더군요. 게다가 그 집 딸이 기사 단장한테 시집을 간다잖아요.”
“어머나, 그 기사단장은 외국에 어마어마한 백작령을 갖고 있다던데 딸 덕을 톡톡히 보겠군요. 그런 겹경사를 맞이했으니 아마 보름 정도는 연회를 벌이겠죠?”
“연회라고? 거, 모르는 소리들 하시네. 그 집안 곧 초상날 걸요.”
“그건 또 뭔 소리요?”
“늙은 벨데케가 위독하답니다. 그리스인 의사가 이번엔 가망이 없다고 했대요.”
“그 노인은 날마다 가망이 없다죠. 그러고서 백 년은 살 걸요.”
“아뇨. 요번엔 뜬소문이 아녜요. 그 집 하녀가 그러는데 약간 실성했다나 봐요.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고 백발을 흔들어대면서 자기가 신심이 부족해서 천벌을 받았다고, 자기 집안이 쫄딱 망할 거라고 헛소리를 한 대요. 죽은 자의 왕이 자길 잡으러 온대나 뭐래나, 이러면서요.”
“쯧쯧. 철천지원수를 영원히 쫓아냈겠다, 딸은 억만장자한테 시집가겠다, 축제를 벌여도 모자를 판에 웬일이래요?”
“쳇. 그럼 연회는 글렀군. 공짜 맥주는 물 건너갔어.”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지는 중에 저녁 종이 쳤다.
심부름꾼들은 전쟁을 치르다시피 서둘러 면회를 끝내고 제각각 뭔가를 품에 안고서 되돌아갔다.
열흘간 한몫 단단히 챙긴 옥리는 야간 통행 금지를 못 마땅해 하며 늦게 온 심부름꾼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제2종이 쳤다.
옥리는 뒤늦게 허겁지겁 달려온 심부름꾼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늦었수다. 그만 돌아가요. 종이 쳤어요.”
“아우, 제기랄! 이걸 꼭 전해줘요. 내일 새벽에 받으러 올 테니 답장도 꼭 써달라고 전해줘요. 우리 마님이 안 그럼 제 목을 매단다고 하셨어요.”
“그러죠.”
옥리는 이날 밤 자정이 넘어 또 다른 방문객을 맞이했다.
“흠. 누구시지요? 이 집 주인을 찾아오셨나?”
방문객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옥리는 그의 차림새를 살폈다.
방문객은 발등을 내리덮는 외투에 검은색 후드를 머리에 깊숙이 덮어쓰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는 날카로운 콧날과 창백한 입술이 보였다.
그 모습에 딱 감을 잡은 옥리는 후문 입구를 빈틈없이 가로막고 서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지난 열흘간 이런 부류는 꼭 야밤에만 나타났다. 야간통행이라는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건 그만큼 절박하며 비밀 보장을 원한다는 뜻이고 그만큼의 짭짤한 보상을 뜻했다.
“야경꾼이 돌고 있는데 용케도 오셨군요.”
옥리는 몹시 안타까운 척 말했다.
“하지만 어쩌지요? 너무 늦으셨어요. 밤에는 절대 면회가 안 됩니다. 낮에도 안 되지만 제 모가지를 걸고 간신히 봐준 거예요. 영주님께 들키면 큰일 납니다. 안됐지만 얼른 돌아가세요.”
“안에 있나?”
방문객이 물었다. 그 음성은 낮고 아무런 억양도 없었는데도 옥리는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그럼요. 있죠. 우리가 밤낮으로 지키고 있는데 어디로 달아났겠어요? 꼼짝 못 하죠.”
방문객은 침묵했다.
옥리는 그가 여차하면 돌아갈 듯 보여서 작전을 바꿀까 고민에 빠졌다.
방문객이 다시 물었다.
“누가 또 있지?”
“손님들 말인가요? 베르나르 신부님께선 아까 저녁때 제일 마지막으로 돌아가셨어요. 다들 시끌벅적하게 몰려와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일찌감치 물러갔죠. 내일 새벽에나 시문 밖으로 배웅을 나간다고 몰려올 겁니다. 지금은 집주인 혼자 있어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렇게 늦은 밤중에는 곤란해요. 특히 오늘 밤엔 더더욱 그렇죠. 영주님의 따님도 몰래 몸종을 보냈다가 허탕치고 돌아가셨어요. 혼자서 밤을 맞겠다고 했다지만, 제가 보기엔 퇴짜를 맞은 겝니다. 훗훗. 어쨌거나 이렇게 늦은 밤에는 절대로 면회가 안 되니-…….”
“들어오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이때 힌츠가 옥리의 뒤에서 소리쳤다. 그는 문에 버티고 선 옥리의 옆구리를 옴팡지게 밀어젖히고서 반갑게 소리쳤다.
“어서 들어오세요! 어차피 이 도시의 여편네들이 열흘 밤낮으로 모조리 왔다 갔는데 마지막 밤이건, 늦었건 뭔 상관입니까. 들어오세요! 제 모가지가 붙어 있는 한 벨데케의 개놈들 빼곤 누구나 환영입죠. 공짜입니다. 무료예요. 저는 달걀이니 맥주니 사슴 뒷다리니 그딴 건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제가 이 집 문지기인데도 말이에요. 얼른 들어오세요.”
옥리에게 한 방 먹였다는 기쁨에 겨워 힌츠는 방문객을 계단까지 안내했다.
“저리로 올라가시면 2층에 응접실이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가시면 우리 집 훌륭한 주인 나리를 마지막으로 만나볼 수 있습죠. 참, 기구한 운명의 주인을 보셔도 너무 불쌍히 여기시거나 놀라지는 마세요. 그분께서 지금 뭘 하고 계시느냐고요? 가서 직접 보세요. 가문을 패가망신해놓고 날이 밝으면 영영 고향에서 쫓겨날 판국인데도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험! 이리로 올라가세요.”
방문객은 혼자서 계단을 올라 2층에 있는 응접실 앞에 섰다.
집안은 주인의 마지막 밤을 애도하듯이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
그가 문을 열려는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돌아서니 3층에서 누군가 등불을 들고서 내려오고 있었다.
몸종으로 보이는 소년이 계단에 나타났다.
“앗, 주인 나리를 뵈러 오셨나요?”
몸종은 방문객을 보자 계단 중간에 섰다.
“나리께선 거기 안 계세요. 지금 위층 침실에 계세요.”
손님이 아무런 대꾸가 없어서 몸종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내려왔다. 등불에 비친 눈꺼풀이 눈물에 젖어 퉁퉁 부어 있었다.
지난 열흘간 익명의 방문객을 접대한 몸종은 손님에게 말했다.
“주인 나리를 불러드릴까요? 그런데 어쩌죠? 지금 주인께선……. 앗? 손님?”
방문객은 몸종을 휙 지나쳐서 3층으로 올라갔다. 곧바로 침실을 찾아내서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 안도 집안처럼 춥고 어둡고 고요했다. 창턱과 궤짝에 놓인 촛불은 제단의 촛불처럼 군데군데 동그랗고 어스름한 불빛을 밝혔다.
방문객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섰다.
침상에서는 숙면에 빠진 사람에게서 나는 고르고 평온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실내의 가구나 촛불의 그을음마저도 그 숨소리와 함께 밤의 적막 속으로 녹아들 만큼 부드럽고 깊은 숨 소리였다.
몸종이 허둥지둥 쫓아와서 방안에 들어섰다. 그는 우두커니 문가에 선 방문객의 등허리에 머리를 처박을 뻔했다가 어린애 특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 나리를 꼭 만나셔야 하나요? 지금 깊이 잠드셨는데요.”
“…….”
“오늘은 일찍 주무시겠다고 하셨어요.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셔서 그런 거예요.”
“…….”
“주인 나리를 깨울까요?”
“…….”
“그런데 내일 먼 길을 가셔야 하는데 어쩌지요?”
몸종은 묵묵부답으로 서 있기만 한 손님 때문에 어리둥절했다.
이때 침상에서 이불이 바스락대는 기척이 나고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핀.”
“앗, 나리. 깨셨나요?”
“뭐 하는 거냐. 너도 가서 얼른 눈을 붙이렴. 새벽에 일찍 나를 깨워야 하니까.”
“나, 나리…….”
“짐을 다 쌌나? 그래……. 그럼 새벽에 늦지 않게 깨워줘. 이터랑 손님들이…….”
잠에 취한 로트는 말꼬리를 흐리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방문객은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순간 창턱의 촛불이 흔들리고 문가의 궤짝에 놓인 촛불이 연기를 피우며 피시식, 꺼져버렸다.
“……. 핀?”
로트는 무거운 머리를 짚고서 일어나 앉아 멍하니 실내를 둘러봤다.
창밖에는 달이 뜨고 침상 옆에 있는 바닥에는 잠을 청하려고 마신 포도주용 뿔잔이 그대로 있다. 꿈도 아니고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상했다. 살갗에 스며드는 위화감.
어리둥절한 몸종 핀의 얼굴을 보며 몽롱한 머리로 깨닫기 전에 심장이 먼저 그걸 느꼈다.
-!
이때였다. 조금 열려있던 문이 외풍으로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틈으로 게걸스럽게 불빛을 삼키는 어둠이 밀려와서 촛불을 삼키고 한기를 퍼뜨렸다.
“……. 누구냐?”
무심코 숨을 죽인 로트는 문가의 어둠을 향해 물었다.
그 소리에 그림자가 움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피곤에 젖은, 메마르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포겔바이데.”
“……!”
“배짱이 남다른 건 알았지만 오늘 같은 밤에 세상모르게 자고 있을 줄은 몰랐군.”
로트는 찬물에 적신 천으로 얼굴을 닦았다. 곧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문으로 뛰어갔지만 멈춰 서서 문에 이마를 처박고 생각에 잠겼다.
오랜 망설임 끝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응접실 문밖에 서 있는 몸종이 보였다.
로트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직도 안에 있어?”
“손님 말인가요? 네.”
몸종은 로트의 초조한 기색에 깜짝 놀라서 답했다.
“나리께서 시키신 대로 아무도 못 들어가게 제가 문 앞에서 꼭 지키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나요?”
“아니, 잘했다. 그럼 내려 가봐.”
“짐은 언제 쌀까요? 날이 밝기 전에 저 방의 짐을 싸야 하는데요.”
“나중에. 내가 부를게.”
“나리?”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몸종이 불렀다. 주인과 이별하는 게 슬퍼서 틈날 때마다 흑흑 울었던 몸종은 커다란 눈에 불안한 호기심을 담고서 물었다.
“나리께서 기다린 손님이 저분이셨나요?”
“왜 그런 걸 묻지?”
“나리께선 밤이 되면 꼭 창밖을 보셨잖아요. 손님을 기다리는 줄 알았는데요. 그런데 저분은 빚쟁이죠? 아까 주무시기 전에는 괜찮으셨는데 지금은 좀 이상해서요. 무서운 빚쟁이 맞지요? 오스터팅겐 나리께서 마지막 날 밤에는 제일 무시무시한 빚쟁이들이 몰려온다고 하셨어요.”
이터가 한 말을 꺼내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몸종이 벌벌 떨자 로트는 쓴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이곳에 얼씬 못 하게 해.”
“나리, 조심하세요. 빚쟁이는 사람을 잡아먹는대요.”
몸종을 뒤로하고 문 앞에 선 로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나지막한 욕설이 절로 입안에 맴돌았다. 찬물로 여러 번 닦아냈는데도 뺨에는 불쾌한 열이 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가만히 서 있자니 집안의 냉기로 소름이 돋은 얇은 살갗 아래서 세차게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빌어먹을.’
그는 마지막까지 문 앞에서 망설였다. 전력을 다해 피해왔던 상대가 저 안에 있다.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승부는 이미 정해져 있다. 자신은 이미 패자이며 약자다.
그래서 한사코 피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불시에 당면하고 말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마지막 장면을 그리며 우울해졌다. 이대로 달아나고도 싶지만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안으로 들어선 로트는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았다.
이젠하르트는 바닥에 끌리는 검은 외투로 전신을 감싼 채 뒤돌아 서 있었다.
“이젠하르트.”
그가 돌아섰다. 깊숙이 내리 덮인 후드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로트는 본심을 감추고 태연히 물었다.
“많이 기다렸지? 날이 꽤 춥네……. 네가 올 줄 알았다면 미리 불을 피워놨을 텐데.”
대답 대신에 무언가 날아와 발치에 떨어졌다.
메마른 음성으로 기사가 물었다.
“이게 뭔지 알 거다.”
“이건……. 편지군.”
로트는 주저하며 말했다. 눈에 익은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누가 그걸 썼지?”
“……. 내가 썼지.”
“맞아. 그래서 직접 물으러 왔어. 왜 그딴 걸 내게 보냈지?”
두루마리를 집으려고 허리를 굽히는 로트의 얼굴에 낭패감과 안도가 묘하게 뒤섞였다.
다행이었다. 편지 때문에 왔다고 예상은 못 했지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로트는 편지를 탁자에 올려놓고 물었다.
“언제 이걸 받았어?”
“오늘 받았어.”
“신부님께서 주셨어?”
“다른 누군가한테도 시키지 않았다면 그렇겠지.”
“신부님께만 드린 부탁인데 미리 전해주셨나 보군.”
자신이 출발한 후에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던 편지다. 그걸 신부가 미리 전해준 거다.
이젠하르트가 서릿발을 날리며 물었다.
“왜 그걸 내게 보냈지? 뭐라고 썼어?”
“안 읽었어?”
두루마리를 살펴보니 봉랍이 그대로다.
“안 읽었어. 아니, 못 읽었지. 난 글을 모르니까.”
“신부님께서 읽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러시겠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어. 직접 듣고 싶어서.”
“…….”
“읽어봐라.”
실내가 촛불 몇 자루만 켜놔서 어둡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서 이젠하르트의 표정을 잘 볼 수 없는 로트는 그의 음성에 평소 같은 비난이나 조롱 대신에 강한 의심이 담겨 있어서 이상하게 여겼다. 게다가 감정이 부자연스럽게 억제된 메마르고 불안정한 목소리였다.
“뭐 하냐. 직접 낭독해 봐. 그러려고 가져왔으니까.”
로트는 고민 끝에 거듭 확인하듯이 조심스레 물었다.
“넌……. 이 편지 때문에 온 거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이 대답에 로트는 내심 크게 안도했다.
“편지 때문에 왔다면 공연히 헛걸음을 했군. 별다른 말은 아니니까…….”
“그럼 용건만 말해. 네가 원하는 게 뭐냐?”
“원하다니? 아무것도 원하는 건 없어. 나는 그저…….”
정직하게 대답하고 나면 조롱을 받으리라는 생각에 로트는 말꼬리를 흐렸다.
“네가 달가워하지 않으리란 건 알았지만 작별의 인사를 하고 싶었어.”
“……. 작별의 인사?”
“그래.”
로트는 사실대로 답했다.
“그것 말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정말로 그것뿐이냐?”
“응. 그것뿐이야.”
이젠하르트가 의심에 차서 추궁하자 로트는 거듭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건 씁쓸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날에 벌인 술책 때문에 의심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거짓이 아니다. 저 작별의 편지는 로트가 마지막 충동에 휩싸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추방 당하는 날이 임박할수록, 모두가 떠나고 하인마저 잠든 새벽에 고질적인 감상벽이 도져서 편지를 썼다. 자기만족과 위로라는 이기적인 욕구와 장차 두 가문의 화합을 기원하는 순수한 바람에서 그리고 영원한 이별이라는 절박함과 어차피 이게 마지막이라는 대담성에 고무되어, 장차 벨데케 가문이 부흥하기를 기원하고 이젠하르트의 후손의 장래까지 축복하는 등, 터무니없이 감상적이지만 선의로 가득한 작별 인사를 써 보냈다.
“원한다면 읽을게.”
이젠하르트가 의심을 풀지 않아서 로트는 두루마리의 봉랍을 뜯었다.
“별 내용은 아니지만…….”
“그걸 누구한테 보여줬지?”
“아무에게도. 네게 쓴 거니까.”
“태워.”
이젠하르트가 단호히 말했다.
“태우라고?”
“그래. 네 말대로라면 얼굴을 직접 맞대고 인사를 나눴으니 읽을 필요는 없겠지.”
제가 저지른 못 말릴 충동의 산물을 보자 후회와 부끄러움을 느꼈으면서도 로트는 망설였다.
“왜 망설여? 별 내용 아니라며.”
“……. 그래.”
“그럼 태워라.”
“그러지.”
주저할수록 공연한 의심을 살 것 같아서 로트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불을 붙였다.
이젠하르트는 두루마리 귀퉁이에 불이 붙어서 검은 연기가 솟는 모습을 지켜봤다. 잿더미가 될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 조각이 타버렸다. 잿더미의 불씨를 발로 비벼 끄던 로트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젠하르트는 문으로 향하는 도중에 바닥에 널려 있는 궤짝을 내려다봤다. 그 안에는 지난 열흘간 방문객이 선사한 장신구와 편지, 여자의 화려한 소매 따위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소문 그대로군.”
그는 걸음을 멈추고 냉소했다.
“이 도시의 모든 덕망 높은 귀부인께서 이별의 눈물을 넘치도록 보여줬으니 네 신세도 불행하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
“…….”
“속 편히 자고 있었으니 떠나는 발걸음도 가벼우리라 믿는다. 빈말로라도 행운을 빌어주길 바란다면 유감이군.”
“이젠하르트.”
로트는 문가로 몸을 되돌린 그를 불러 세웠다.
이젠하르트가 돌아섰다.
“네 용무는 그것뿐이야?”
“…….”
“정말로 편지 때문에 왔어?”
이젠하르트는 이 질문에 강한 경계심을 느낀 듯이 날카롭게 물었다.
“그건 왜 묻지?”
“뭐, 별다른 이유는 없어……. 갑자기 찾아왔으니 좀 놀라서.”
“용건이 끝났으니 간다.”
로트는 되돌아선 그의 뒤를 쫓았다.
로트가 다짜고짜 따라와서 이젠하르트는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넌 어딜 가는데?”
“같이 가자.”
“어디에?”
로트가 대꾸 없이 문고리를 잡자 이젠하르트가 조소했다.
“아, 이 집에선 주인이 직접 문을 열어주나 보군.”
“데려다줄게.”
로트는 문득 쉬어버린 목소리로 문을 열었다.
“밖에 야경꾼이 돌고 있으니까. 게다가 넌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가식적인 친절이 고맙긴 하다만 사양하마. 야경꾼이라면 너 못지않게 따돌릴 수 있거든.”
문고리를 움켜잡은 로트는 문을 닫고 물었다.
“그럼 조금만 더 있다 가.”
“왜?”
“포도주를 내올게.”
로트는 자꾸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식사는 했어?”
“…….”
“밤이 깊었으니 뭐든 요깃거리를 내올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만 어쨌든 네가 내 집에 왔으니 손님 대접을 하고 싶어.”
“사양하겠으니 비켜서라.”
“그럼 불이라도 쬐고 가. 네 몸에서 냉기가 흘러. 목소리도 조금 이상하고.”
“네가 미끼를 던지지만 않았어도 난 지금쯤 따듯한 이불 속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어.”
“미안해. 그래도 잠시만 더 있다 가.”
“왜 자꾸 이래? 이러다 눈물까지 흘리며 매달리겠군. 그러고 나선 절절한 사랑 고백까지 할래?”
“못할 것도 없지…….”
침묵과 냉기가 녹아든 어둠 속에서 깊숙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이젠하르트의 타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충동으로 받아친 로트는 경솔함을 대번에 후회하고 입을 다물었다.
모래성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렇게나 맹세하고 다짐하고 눈물과 회한 속에서 자책했으면서도 충동이 범람하는 건 한순간이라서 맹세가 쌓아놓은 모래성을 단번에 허물어뜨렸다.
이젠하르트가 자리를 뜨자 두 발이 절로 움직였다. 저주받을 두 다리와 맹세를 비웃는 두 손이 주인을 배반하고 멋대로 움직였다. 문을 열고 이 방에 들어서면서 이미 이런 짓을 하리라고 예감했기에 두려웠다.
이젠하르트의 대답은 확고했다.
“비켜.”
“매정하게 굴지 말고 조금만 더 있다 가.”
로트는 무너진 결심을 한탄했다.
“마지막으로 뭐든 대접하고 싶어. 날이 밝으면 네가 원하는 대로 반드시 떠날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널 만나지 못하겠지.”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네가 자처한 불행이다. 나한테 책임을 전가하지 마라.”
“그래. 물론이지. 알고 있어.”
로트는 슬퍼하며 말했다.
“네게 화해의 키스도 더는 청하지 않을게. 다만 가기 전에 뭐든 대접하게 해줘. 그래준다면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 알아. 그래도 마지막이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날이 추워. 불을 쬐고 뭐든 마시고 가. 그러면 더는 붙잡지 않을게.”
이젠하르트는 그러나 위협을 하듯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 말했다.
“이 집에서 환대를 받는다면 그거야말로 내겐 모욕이지.”
“……. 이젠하르트.”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두들겨 팼는데도 소용이 없으니 넌 구제 불능이야. 비켜서라고 몇 번을 말해? 기어코 피를 보고 싶어? 마지막에 추태를 보이지 마. 재판소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초연했던 네 모습은 역시 가식이었나. 이번에도 교활한 눈속임이었어? 그렇다면 또 멋지게 나를 속였군.”
로트는 거친 숨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안에 흐르는 침묵은 두 사람의 숨소리마저 삼켰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대치가 이어지자 로트는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내뱉었다.
“그거 알고 있어?”
“뭘 말이냐?”
“나도 널 보내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발로 걷어차서라도 쫓아내고 싶지.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왜 그럴까?”
“무슨 헛소리야?”
“말해봐. 너도 끝까지 모른 체할 수는 없잖아. 너도 알고 있지?”
“…….”
“알고 있잖아? 그렇지? 내가 왜 이러는지?”
어깨를 움켜잡은 손이 갑자기 뿌리쳐졌다. 문이 쾅, 하고 여닫혔다. 세차게 옆으로 떠밀려 문을 등지고 선 로트에게는 그 소리가 자신의 무분별한 충동을 꾸짖는 호통처럼 들렸다.
‘그래, 가라. 가버려.’
그 문소리가 남긴 여운에 귀를 기울이며 그는 몹시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편히 가라. 잡지 않을게. 네가 떠난 게 아니고 내가 놓아 준 거니까 마음 편히 가라.’
그러고서 그는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어쩌겠냐. 어차피 넌 왔고 나는 너를 봤어. 네가 좋건 싫건 이 마음속에 영원히 너를 담았어. 하. 하……. 혹시 그걸 알고 있어, 이젠하르트? 이 넓은 세상에서 나만큼 너의 증오를 산 놈이 또 있을까. 그런 놈이 단 한 놈이라도 있어? 없지? 그렇지? 그것만으로도 너는 평생 나를 잊지 못할 거야. 영원히……. 죽을 때까지 날 잊지 못하겠지. 하. 하. 빌어먹을……. 가라. 얼른 가버려. 제기랄……. 어서 날이 밝았으면…….’
머리를 감싸 안은 로트는 난롯가의 의자에 몸을 던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에 고개를 처박았다. 이젠하르트가 떠나려는 순간 결심을 무너뜨린 자신의 의지박약이 저주스러웠다.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통제할 수 없었다. 떠나기 전에 그를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워했다. 얼굴을 맞댄 이러한 작별에서 앞으로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말의 희망이나 용기 따위를 기대할 수 있었다면 자신이 먼저 찾아갔으리라.
허나 그 반대임을 알기에 바라지 않았다. 더욱이 전날 밤이라는 가장 최악의 순간에 술기운으로 얻은 평온한 망각의 늪에서 강제로 깨워져 그간의 맹세와 결심을 위협하는 이러한 만남 따윈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잠에서 깨어 그를 알아본 순간 두려우면서도 기뻤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고 가슴에 담고 싶은 욕구- 고향을 떠나기 전에 그 전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려는 서글픈 미련처럼- 그 욕구를 채울 수 있어 기뻤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긴장과 위험이 사라지자 커다란 공허가 밀려왔다. 이대로 마음의 고통 속에서 날이 밝을 때를 기다리자니 그 순간이 참을 수 없이 괴롭고 아득히 여겨졌다.
콰당탕-
불현듯 터진 소음과 희미한 숨소리 그리고 인기척에 로트는 군마의 뒷발에 차이듯 벌떡 일어섰다. 궤짝 하나가 발길에 차여 굉음을 내며 뒤집혔다.
그 소음이 소스라치게 놀란 로트의 욕지거리를 삼켰다. 그는 제 눈을 의심하며 문가를 바라봤다. 미련 없이 떠났다고 여겼던 이젠하르트는 그곳에 있는 한 의자에 이마를 감싸 쥐고서 앉아있었다.
‘빌어먹을.’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령이 따로 없구나.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지? 제기랄, 심장이 멎을 뻔했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이젠하르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없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갑작스럽고 생경한 모습이다.
로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한참이 흐르도록 대꾸가 없다.
로트는 촛대를 찾아 쥐고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팔꿈치로 무릎을 괴고 고개를 숙인 이젠하르트의 얼굴은 손과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마를 감싸 쥔 두 손이 죽은 자작나무 수피처럼 뻣뻣하고 푸르게 보여서 사람의 손 같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리 가.”
이젠하르트는 여전히 이마를 감싸 쥐고서 대답했다.
로트는 가려진 얼굴을 비추려고 촛불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어디 아파?”
“불을 저리 치워. 신경에 거슬려. 위가 뒤틀려서 가라앉히는 중이다.”
“왜 위가 뒤틀리는데?”
잠깐의 침묵 후에 이젠하르트는 혼잣말을 억지로 하듯 대답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떨어져 있어……. 여차하면 너를 죽일 수도 있어. 지금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으니까…….”
위협이라기보다는 고통의 호소에 가까운 대답에 로트는 촛불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어디가 아픈데?”
“시끄러워.”
“어쩐지 아까부터 목소리가 좋지 않았어. 위가 뒤틀리다니, 체했나?”
“저리 가라고 했지.”
“네 손도 좀 봐. 살가죽은 표백한 것 같고 앙상해서 관절이 너무 불거졌어. 혹시 병에 걸렸어?”
“유감이겠지만 난 건강해.”
“그럼 술을 마셨어?”
“안 마셨다.”
“얼마나 마셨지?”
“안 마셨다고 했지?”
“몸에 열이 나나?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춥지 않아?”
“네 목소리만 들어도 열불이 솟아서 온몸에 땀이 나고 더워. 저리 가 있어.”
“어디가 아픈 거냐니까? 많이 아프다면 신부님께 약초를-…….”
“빌어먹을! 제발 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
카당-
“나를 보면 한시도 가만두질 않는군. 제발 잠시만이라도 입 좀 닥치고 내버려 두면 안 돼? 잠깐 쉬고 간다고 했잖아. 빌어먹을!”
날아간 촛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로트는 멍청히 입을 다물고 그를 내려다봤다.
촛대를 쳐낸 이젠하르트는 양쪽 관자놀이의 머리칼을 움켜잡고서 낮은 신음을 흘렸다. 한마디 더 물었다가는 다음엔 단검이 날아올 것 같다.
“방해해서 미안해.”
로트는 신중하게 한 발 물러섰다.
“괜찮아질 때까지 얼마든지 쉬고 가. 거기서 잠을 자든 뭘 하든 나는 괜찮으니까.”
“…….”
“혹시 기분이 좋지 않다면 화풀이로 집안을 때려 부숴도 좋아. 나로선 좀 억울하긴 하지만.”
“…….”
“느닷없이 찾아와서 단잠을 깨우더니 포도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해도 매몰차게 간다고 해서 그럼 가라고 하니까 귀신처럼 거기 앉아서 사람을 기겁하게 하고, 그래도 걱정을 해줬더니 화를 내고.”
“…….
”그렇게 치면 누가 누굴 가만두지 않는 거지? 누가 이 오밤중에 먼저 찾아와서-…….”
“닥쳐. 제발…….”
입을 다문 로트는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쳐들어 보이고서 난롯가로 순순히 물러섰다. 거기서 난롯불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 앉아서 이젠하르트를 가끔 돌아보고 불쏘시개로 빨갛게 타오른 장작을 뒤적였다.
위가 뒤틀리다 못해 다 죽어가는 이젠하르트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서 로트도 침묵을 지켰다. 손에 쥔 불쏘시개는 무의식중에 장작을 탁탁, 내리쳤다. 오렌지빛 불씨가 허공에 흩날렸다. 불길에 바짝 댄 가죽 신발이 눌어붙어 냄새가 났다. 탁탁. 단조로운 소음이 계속 울렸다.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할 수 없냐.”
탁-
“개자식…….”
침울해진 로트는 불쏘시개를 바닥에 내던졌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불꽃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달콤한 망각의 늪도, 평정도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다. 술기운이 가신 머리는 맑기만 했다.
그리고 저 문가에는 생경한 모습으로 이젠하르트가 앉아 있다.
‘……. 나는 모든 걸 이곳에 남겨 두고 떠날 생각이었어.’
로트는 생각했다. 침울한 시선으로 불꽃을 보며 그 불 속에서 자신의 굳건했던 맹세와 쓰라린 노고 끝에 얻은 마음의 평정이 속절없이 타버리고 허물어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지난 열흘간 내 눈과 귀를 막고 모든 미련을 떨쳐버리고 홀연히 이곳을 떠나려 했어. 그런데 이젠하르트는 왜 저럴까. 패자는 불명예를 안고 길을 떠나고 승자는 고향에 남아서 영예와 명성을 누린다. 이게 우리의 운명 아니었나. 이젠하르트, 네가 승자 아니었어? 무슨 고민을 그토록 하는 거냐. 혹시 위가 뒤틀릴 만큼 내가 떠나는 게 서운해? 마지막 내 가는 길을 축복해주고 싶어서? 그래……. 그렇다면 좋겠지…….’
이때 문가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고질적인 감상벽에 사로잡혀 완전히 맥을 놓고 있던 로트는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해봐라, 포겔바이데.”
어둠 속에서 이젠하르트는 이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가 날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해?”
이젠하르트는 일어나 로트에게 다가왔다. 후드에 가려졌던 그의 얼굴이 난로 불빛에 훤히 드러났다.
‘제기랄.’
로트는 갑작스레 치미는 욕설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고개를 되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태연한 체 불꽃을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온 신경이 경종을 울리며 곤두섰다.
‘빌어먹을.’
그는 연거푸 자신이 한 실수를 저주했다.
뭣 때문에 이토록 어리석게 방심했을까. 애초에 이젠하르트가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작별의 인사니, 포도주니 전부 때려 치워야 했다. 그를 알아본 순간 즉시 쫓아냈어야 했다.
그런데도 마지막 밤이니 포도주 따위의 한가한 감상에 젖어 있었다. 이젠하르트의 생경한 모습에 방심이 너무 일렀다. 그 사이 불운이 발소리를 죽이고 코앞까지 다가왔다. 창백하고, 황폐한 이젠하르트의 안색이 그걸 뜻했다.
이젠하르트가 다시 물었다.
“대답해봐라. 넌 날 위해서 희생했나?”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대답을 피하고 싶은 로트는 화병의 물을 장작불에 끼얹고서 일어났다.
“좀 괜찮아졌어? 시간이 꽤 흘렀네.”
“대답을 못들을 만큼 늦지는 않았어.”
“글쎄……. 난 이제 짐을 챙겨야겠어. 날이 밝아오니까.”
“대답을 듣고 나면 나도 도와주마.”
로트는 그를 힐긋 쳐다보고 손에 닿는 대로 궤짝 안의 물건을 끄집어내 바닥에 내던졌다. 자신의 달라진 태도가 의심을 사리란 걸 알았지만 수습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또 공연한 트집을 잡으려거든 돌아가.”
“대답해봐. 너는 날 위해 희생했어?”
“주인이 문을 열어주길 바란다면 그러지.”
문으로 향하는 그를 이젠하르트는 가로막았다.
“왜 태도가 돌변했냐. 가지 말라고 먼저 매달린 건 누구였지?”
“그런 넌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무슨 말인지는 너도 알 거다.”
“……. 그만 돌아가.”
로트는 이젠하르트의 집요한 시선을 외면했다.
“난 이제 피곤해. 출발 전에 잠시라도 눈을 붙여야 해.”
“대답을 듣기 전엔 갈 수 없어.”
“빨리 돌아가. 넌 지금 저승사자랑 다름없는 모습이야. 돌아가서 쉬어야 해.”
“대답을 듣고 나면 가서 편안히 쉬도록 하마.”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데?”
“그날 밤에 넌 뭘 봤지?”
“…….”
대답이 없자 이젠하르트는 집요하게 되물었다.
“설교사가 죽은 그 밤에 뭘 봤냐? 그 대답만 듣고 나면 돌아가마.”
“…….”
로트는 옆으로 비켜섰다.
이젠하르트는 그의 팔을 콱 움켜잡았다.
로트는 그 손길을 뿌리쳤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난 아무것도 못 봤어.”
“나를 봤어?”
“아니.”
“나를 봤지?”
“꿈에서라면 질리도록 봤지.”
“나를 봤냐니까.”
“아니. 본적 없어.”
-!
멱살을 잡아챈 이젠하르트는 서로의 입술이 맞닿을 만큼 얼굴을 끌어당기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위협했다.
성마른 그 어조에서 폭발 전의 분노를 감지한 로트는, 궁지에 몰리자 외려 대담해졌다.
“지난 얘기를 지금 갑자기 들추는 이유가 뭐냐? 속이 아프다더니 머리를 싸매고 내게 시비를 걸 궁리만 짜내고 있었어? 내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 불명예의 고통을 주려 한다면 안됐지만 너무 늦었군. 이미 끝난 일이니까.”
“끝이 아니라 내겐 시작이야. 게다가 네가 먼저 시작했지.”
“그자는 죽었어. 죗값을 받았지. 끝난 일이야.”
“정말 그럴까.”
갑자기 멱살이 풀리며 목덜미에 손이 닿았다. 얼음장처럼 찬 손가락은 로트의 뺨을 지나 목덜미로 미끄러졌다.
로트는 손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젖혔지만 난폭한 손길이 그걸 막았다.
“아름다운 포겔바이데, 말했다시피 나는 지금 뒤틀린 속을 가까스로 참고 있어. 자꾸만 내 화를 돋우면 무슨 짓을 할지는 나도 몰라. 발광이 났을 땐 너도 네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지? 이런 기분일 땐 나도 마찬가지야.”
“…….”
“그럼 한 번 더 묻는다. 넌 내게 사죄하겠다고 눈물을 뿌리며 애원했었지. 나를 능욕하고 실컷 욕정을 채웠잖아. 얼마나 짐승처럼 해댔던지 몸뚱이에 밴 네놈의 냄새를 떨쳐낼 수가 없더군. 그 후로 사흘이나 구역질을 했지. 내 집 앞에서 널 때려눕힌 것만으론 부족해. 오늘 정식으로 네게 사죄의 기회를 주마. 그 밤에 나를 봤나?”
“…….”
“나를 힘들게 하지 마. 봤냐고 묻잖아.”
“……. 그래.”
오랜 침묵 끝에 대답이 들렸다.
“어쩌면 널 봤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땐 캄캄했고 너의 집 근처라서 너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너를 확실히 본 것은 아니-……!”
쾅-
무시무시한 충격을 받고서 로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를 때려눕힌 이젠하르트는 괴롭게 숨을 고르며 뒤로 물러섰다.
로트는 고개를 숙이고 입가의 피를 훔쳤다. 머리 위에선 분노를 삭이는 이젠하르트의 숨소리가 들렸다.
“일어서.”
로트는 일어섰다.
이젠하르트는 다가서서 다시 물었다.
“왜 서로 힘들게 해? 잔꾀를 부리려고 시간을 끌지 마. 이번엔 바로 대답해. 그럼 누가 그놈을 죽였지?”
“자꾸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넌 못 본 새에 머리가 이상해졌군.”
“그놈을 내가 죽였다고 생각해?”
“생트집 잡지 말라니까.”
“그렇군.”
이젠하르트는 조용히, 자신에게 말하듯 뇌까렸다.
“넌 그렇게 믿고 있구나.”
“천만에. 그랬다면 자백은커녕 널 고발했겠지.”
이 대답에 이젠하르트는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심장이 버겁게 쿵쾅대는 로트는 그를 지나쳐서 난롯가로 되돌아갔다. 거기서 입을 닥치고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듯 뒤돌아섰다.
불쾌한 침묵이 흘렀다. 로트는 뒤통수와 어깨에 그의 시선을 느꼈다.
바로 등 뒤에서 이젠하르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계속 잡아떼니 그럼 내가 먼저 자백하마. 네가 본 그대로야. 난 그날 밤에 놈을 쫓고 있었어. 하지만 놈을 찾아냈을 땐 이미 죽어가고 있더군. 피투성이가 돼서 숨통이 끊기기 직전이었어. 네가 먼저 해치웠으니까. 놈을 어떻게 했어?”
로트는 돌아선 채로 대답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묻지?”
“네게 직접 듣고 싶어서. 사실대로.”
“……. 재판소에서 진술한 그대로야. 그날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에 길을 잘못 들었는데, 그자가 어린 종복을 해치고 있더군. 그래서 달아나는 놈을 뒤쫓다 싸움이 벌어졌어. 놈이 도중에 또다시 달아나서 난 집으로 돌아갔지만, 네 말대로 죽어버렸지.”
“왜 놈을 뒤쫓았어?”
“그놈을 몇 차례 봤었으니까. 너희 집 근처에서. 어느 날 밤에는 우연히 맞닥뜨려서 주먹질을 한 적도 있어. 벼락이 치던 날도 놈하고 붙었지. 처음엔 시시한 밤도둑이라고 여겼지만 네가 그놈을 나로 오인한 일이 기억나더군. 그날 밤엔 정체를 캐내려고 했을 뿐 죽일 생각까진 없었지만 술에 만취했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어쨌든 놈은 죽었고 이제 끝난 일이야.”
“만취해서도 놈을 때려죽였다?”
“술기운엔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놈은 칼을 지니고 있었어.”
“내게도 있었어. 그걸로 찔렀다.”
로트는 그러고서 되돌아섰다. 그 낯빛은 어두웠지만 경계심이 되살아나 있었다.
“이제 됐어? 내가 놈을 죽였지만 사고였어. 억울하긴 해도 이미 끝난 일이야. 이제 돌아가.”
“시체는 왜 건져냈어?”
이 질문을 로트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이젠하르트를 쫓아내려고 문을 열러 가던 도중이었고 마음의 동요를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시체를 누가 건져냈지?”
이젠하르트가 되물었다. 감정을 짓눌러 메말랐던 어조도 이때부터 공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로트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젠하르트가 말했다.
“놈을 찾아낸 건 내 집 앞이야. 거기서 죽어가고 있었지. 시체를 내가 강물에 버리고 왔어. 하지만 새벽에 보니 집 앞에 있더군. 그건 누가 그랬을까? 그것도 네 짓이냐?”
우두커니 서버린 로트에게 이젠하르트가 다가왔다.
“이번엔 잘 기억나지 않아? 아무리 만취했어도 그것만은 기억해 봐.”
둘은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 서로 마주 섰다. 창백한 두 낯빛이, 의심과 경계의 두 시선이 교차했다.
“왜 그래? 네가 아니었어? 그럼 누가 그랬을까. 고기밥이 돼야 했을 그놈이 직접 걸어왔을까.”
“…….”
“대답해봐. 누가 놈을 건져냈지?”
“그게 문제가 되나.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교활한 개자식 같으니!”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고 소리쳤다.
“어째서 끝이냐? 네놈이 날 위해서 희생한답시고 가증스러운 위선을 떠는데도 끝난 일이냐?”
움켜잡힌 어깨가 세차게 흔들렸다.
로트가 잡힌 그대로 흔들리며 눈을 내리깔고만 있자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 이젠하르트는 마침내 폭발했다.
“개자식! 역시 나를 봤구나! 그럼 똑똑히 들어! 그놈은 내가 죽였어. 단검으로 단 한 번에 찔러 죽였다. 숨을 헐떡이며 악마처럼 달려들기에 단 한 번에 숨통을 끊어줬어. 네 말대로 죽을 놈이 죽었어. 하지만 내가 참을 수 없는 게 뭔 줄 알아? 너의 위선이야! 네놈의 그 숭고하신 희생정신이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닥쳐! 그따위 허위에 찬 동정의 눈길은 집어치우고 마음껏 날 비웃어라. 네놈에게 밤도둑의 누명과 살인죄를 뒤집어씌운 나를 조롱하란 말이야.”
“…….”
“사실 나는 원했어. 네놈이 오욕과 불명예를 떠안고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리길 간절히 바랐지.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군. 너를 생각하면 위가 뒤틀려서 참을 수가 없었어…….”
“이젠하르트, 네게 간청할게, 잠시만 내 말을…….”
“제발 입을 좀 닥쳐! 넌 뭘 원해? 고고한 희생양, 포겔바이데, 넌 나를 기다렸나? 오늘 밤처럼 달려와 용서를 빌기 바랐어? 엎드려 네 발등에 입 맞추길 바랐어?”
“아냐.”
로트는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네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너를 위해 희생한 게 아니야. 난 놈을 죽였다고 믿었어. 그뿐이다. 네가 아니었더라도 내버려두면 어차피 죽을 놈이었어. 내가 순순히 판결에 복종한 것을 의심해서 이러는 거냐? 난 하루빨리 패자의 맹세를 지키고 싶었어. 여길 떠나고 싶었어. 그 외엔 어떤 이유도 없어.”
“거짓말. 또 다른 이유를 내가 직접 알려줄까?”
이젠하르트는 싸늘하게 웃었다. 그는 로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갈수록 불신에 휩싸여 이성을 잃는 듯했다.
“교활한 포겔바이데, 넌 내게 죄의식을 주려고 했어. 너를 희생양으로 삼은 죄책감으로 평생 나를 괴롭게 하고 싶었지. 하지만 난 알고 있었지. 그게 너만의 영악한 복수의 방식이란 걸. 나의 원한과 복수에 대해서 정당히 맞서기는커녕 넌 항상 무고한 피해자인 척, 불행한 희생양인 척 눈물을 흘리며 뒤에서는 나를 마음껏 농락했어. 이번에도 그런 술책이었지.”
“…….”
“말해봐. 그런 속셈이 아니었어?”
“그래서 네 속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생각해.”
어떤 대답이건 이젠하르트의 화를 잠재울 수 없다는 생각에 로트는 슬퍼하며 잡힌 어깨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어차피 이제는 전부 끝났으니까…….”
“더러운 개자식아!”
이젠하르트는 그의 어깨를 다시 잡아챘다.
“또 수작을 부리는군. 어디 마음껏 술책을 부려봐라! 하지만 결국 패배의 눈물 속에서 자멸하는 건 너야. 나는 이제껏 창과 방패만으로 내 왕국을 세웠어. 네놈이 황금의 궁전에서 방탕한 음욕을 탐닉하며 호의호식할 때, 나는 내 고혈과 땀으로 명예가 주인인 왕국을 세웠어. 타락한 네놈이 내 누이를 농락할 동안, 수많은 용맹한 제후를 낙마시켜 명성을 얻었어. 이런 내가, 너 같은 더러운 상인 놈의 계략에 굴복할 것 같아?”
난폭하게 로트를 돌려세운 이젠하르트는 어깨를 툭툭 치며 벽으로 그를 밀어붙였다.
로트는 반항을 포기한 채 한 번 칠 때마다 맥없이 뒤로 떠밀렸다.
“말해봐라!”
그 경직된 낯과 무저항을 또 다른 술책이라고 여긴 이젠하르트는 그가 휘청대면 댈수록 더욱 난폭하게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네가 나를 굴욕의 주인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최후의 승자지? 누가 굴욕적으로 패배했어? 결국엔 누가 비참하게 자멸했느냔 말이다!”
“이젠하르트…….”
로트는 격분과 의심으로 흐려진 이젠하르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입술이 떨리고 목구멍이 꽉 막혔다. 유례없이 이성을 잃고 분노를 표출하는 이젠하르트의 모습은 너무나 생경했다.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 분노의 원인이 비단 자신만이 아니란 걸 직감으로 깨닫자, 저항하거나 해명하고자 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연민과 우려 그리고 새로운 불안이 들어찼다.
“이젠하르트, 나는 이미 네게 승복했어. 나는 패자이고 너는 내가 복종을 맹세한 주인이야.”
“그렇지. 그렇게 승패가 가려졌지. 공정하고 명예로운 방식으로.”
이젠하르트는 쓰디 쓴 비웃음을 머금고 뇌까렸다.
“나는 영예의 주인이고 너는 불명예의 노예이며 영원한 패자야.”
“하지만 이대로 끝낸다면 너답지 않지.” 하고 그는 로트의 귓전에 연이어 속삭였다.
“너는 교활한 까마귀니까, 포겔바이데. 아직 포기하지 마라.”
그러고서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턱을 움켜쥐고 쳐들었다. 무방비한 초록색 눈동자가 흔들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이젠하르트는 그 꼴이 비위에 거슬렸다. 놈의 침묵과 무저항은 지난날의 광적인 도발보다 더한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놈이 저항하지 않을수록 자존심은 뒤틀리고 모욕감이 들었다. 눈물을 쏟을 듯한 낯이 파리해지고 일그러질수록, 자신의 분노가 부당하며, 놈이 아닌 자신에게 그 원인이 존재함을 알기에 놈이 더욱 미웠다. 낭떠러지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고서 뒤흔든 놈의 저 깊은 우수와 연민에 찬 낯이 미치도록 밉살스러웠다. 그래서 더욱 부당한 복수욕이 끓어올랐다.
“듣고 있냐? 포기하긴 아직 이르다니까. 네게 마지막으로 설욕의 기회를 주마.”
“돌아가.”
잡힌 턱을 빼내려고 고개를 돌리며 로트가 호소했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사양하지 마. 작별의 선물이니까.”
이젠하르트는 교활하게 웃었다.
“설교사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아? 왜 그놈이 내 집에 얼씬댔는지 궁금할 텐데. 놈은 시시한 밤도둑 따위가 아니야. 나를 노렸지. 내게는 부서진 창과 방패의 개수만큼 원한에 맺힌 수많은 적이 있어. 내 무공과 명성을 시기하며 내 파멸을 꾀하는 그런 쓰레기들. 설교사 놈도 그런 부류였지. ‘불사의 아이케’를 네게 소개해준 적이 있던가. ‘신의의 기사’ 아이케. 이스트리엔으로 가서 그를 찾아봐. 놈의 망령을 내게 데려와라. 너에겐 두 번 다시없을 설욕의 기회야.”
“……. 돌아가.”
로트는 진심으로 부탁했다. 이젠하르트에게 자신의 존재는 오로지 고통과 불행이라는 슬픔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를 돌려보내고 영원히 그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왜 그래? 그런 수고도 필요 없나. 아, 그래. 더 간단한 방법이 있지.”
“그만하고 제발 돌아가라니까.”
“날이 밝는 대로 성으로 달려가서 내가 적기사임을 고발해. 이스트리엔을 떠난 후로 나는 떠돌이 용병이었고 적기사라고 불렸어. 용병으로서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도 악명이 드높았어.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오합지졸의 도적 떼만 봐도 모두 적기사라고 여기고 두려워했으니 나로선 기막히고 우스운 일이지. 그러다 단 한 번의 실수를 했어. 황야에서 뚱보를 죽였지. 그때 사실은 널 죽였어야 했는데.”
“제발 돌아가줘…….”
“왜? 후환이 두려워?”
이젠하르트는 히스테릭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고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적기사라고 고발해. 하지만 사람들이 네 말을 믿어 줄지는 모르겠군. 넌 광인에 이교도의 악마이자 살인자에 오욕의 추방자이니까. 그럼 어쩌지? 혹시 보상을 바라? 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네게 뭘 해줄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로트는 치미는 슬픔을 억누르며 거칠게 내뱉었다.
“난 널 위한 희생도 한 적 없어.”
“흥, 위선떨지 말고 뭘 원하는지 솔직히 말해봐.”
“네가 돌아가길 바라.”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턱을 더 단단히 움켜쥐고 단언했다.
“이 밤에 내가 왜 너를 굳이 찾아왔겠냐. 그 빌어먹을 놈의 편지를 왜 들고 왔겠어? 네놈이 또 교활한 술책을 부린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신부님께도 편지를 읽어달랠 수가 없더군. 편지에 전부 폭로했다고 믿었거든. 하지만 태워버렸으니 할 수 없이 네 말대로 작별 인사를 담은 편지라고 믿는 수밖에.”
“…….”
“그렇다고 내가 너를 그냥 보내줄 것 같냐? 이대로 속 편히 떠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천만에. 내 십자가를 대신 짊어졌다고 여기고 기세등등하게 떠나선 안 되지. 마지막 승부를 벌이든가 보상을 받든가, 서로 계산을 해야지.”
로트는 그를 떨쳐내고 반대편으로 물러났다. 눈물을 억누르느라 아릿한 목구멍에서 쉬어버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탁이니 제발 돌아가. 나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죽을 때까지 빌어도 네게 용서를 구할 수 없겠지.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날 가엾게 여긴다면…….”
“뭐라는 거냐. 네 사악한 본성은 어디로 갔어? 비굴하게 애원하지 말고 내 등을 찔러봐! 내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복수해. 그대로 떠나기엔 너무 억울하잖아.”
“전혀 억울하지 않아. 그저 참을 수 없이 마음이 괴롭고 슬플 뿐이야.”
“왜? 지난날 너의 집요한 미친 짓이 갑자기 후회스러워서? 개자식아, 혐오스러운 위선 떨지 마라. 우리 이제는 서로 본색을 드러내자. 우리 둘이만 있을 땐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잖아. 안 그래?……. 거기 서!”
-!
갑자기 문가로 성큼 성큼 가버린 로트의 팔을 이젠하르트가 낚아챘다.
“어디로 달아나려고? 아직 안 끝났어.”
“나한텐 끝났어.”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며 로트는 목이 메여 말했다.
“네가 돌아가지 않겠다면 내가 지금 떠나겠다.”
“미친 자식이 아직도 말귀를 못 알아듣네. 더러운 눈물은 집어치워! 계산을 끝내고 가야 한다니까!”
“이젠하르트! 제발 부탁한다…….”
잡힌 팔을 뿌리치고 로트는 이젠하르트의 손을 움켜잡았다.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떨리는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내가 뭘 해야 네 화를 풀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네게 용서받을 수 있는 거냐. 제발 알려다오!”
“비겁한 소리를 하려거든 입을 다물어!”
이젠하르트는 손을 힘껏 뿌리쳤다.
“술책을 들키자 전의를 잃었냐? 그래. 넌 원래 그런 놈이었지. 명예를 되찾기보다는 속물적이고 값싼 보상을 바라지?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이니 우리 서로 본색을 드러내자. 우린 맨몸뚱이로 뒹군 사이니까, 마지막으로 너랑 한 번 더 뒹굴어줄게. 그날 밤처럼 항문에다 네놈의 흉물스런 성기를 원 없이 처박아봐. 내 얼굴에 사정을 해도 이번엔 참아줄게. 십자가를 짊어진 나의 그리스도에게 내 육신을 기꺼이 희사하마.”
“이젠하르트, 제발…….”
“왜? 싫어? 넌 좋아했잖아. 남의 목덜미에 침을 줄줄 흘려대며 사정하지 않았어?”
“그만해!”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로트는 거친 숨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왜 이러는 거냐? 오늘 밤 너는 전혀 너답지 않아.”
이젠하르트는 소리 높여 비웃었다.
“하, 새삼스레 놀랄 게 뭐 있냐. 내가 원래 이런 놈이란 걸 몰랐어? 내 이중성의 폭로를 노리고 대낮의 광장에서 도발한 게 누구였더라?”
로트는 뺨에 와 닿는 이젠하르트의 손을 쳐냈다. 다시 닿았다. 다시 쳐냈다.
“개자식! 가만있어!”
“윽!”
욕지거리를 뱉은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벽으로 쾅! 처박았다.
뒤통수가 처박힌 로트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젠하르트는 머리칼을 움켜쥐고 연거푸 처박아대며 강제로 자길 보게 했다.
“빌어먹을 자식아, 눈을 떠! 개처럼 박아댔으면 이번에도 원 없이 즐겨보라고. 오늘은 얌전히 엉덩이를 대줄 테니까.”
“제발 그만둬…….”
“왜 이래? 넌 비역질 좋아하잖아.”
“그만두라니까!”
“왜? 전희가 없어서 싫어?”
이젠하르트는 심술궂은 냉소를 흘렸다.
“짐승 주제에 할 건 다 하려 드는군. 그럼 넌 키스에 집착하니까 키스부터 할까. 남의 입술이 짓무르도록 빨아대고 구역질이 나도록 입안을 파헤치고 혀를 빨아댔으니 오늘도 마음껏 해봐라. 이번엔 잇새에 옷자락 따윈 물리지 않아도 돼. 깨물지 않을게.”
“이젠하르……. 윽!”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뺨을 눌러서 강제로 입을 벌렸다. 메마른 입술이 꽉 다문 입술을 파고들었다. 로트는 혀를 밀어내고 고개를 젖혔다. 즉시 관자놀이가 움켜잡혀 뒷머리가 연거푸 꽝! 꽝! 처박혔다. 신음이 흐르는 잇새로 다시 혀가 파고들었다. 점막을 헤집고 목구멍 깊이 치고 들어와 혀를 감아올렸다. 혀뿌리가 얼얼할 만큼 빨아대다 물러간다 싶으면, 날을 세운 이가 입술을 짓씹고 다시 파고들었다.
“어때? 마음에 드냐.”
이젠하르트는 핏방울이 맺히고 젖은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내 솜씨는 어때? 너처럼 거칠지는 않지만 금세 흥분되지? 나도 바로 사정할 것 같아. 벌거벗긴 여왕을 아래 깔아도 이렇게 흥분되진 않을 거야. 너도 그렇지?”
이런 상황에서도 쾌감에 반응하고 그걸 눈치 채였다는 수치심에 로트는 당황하고 화가 났다. 주먹을 움켜쥔 손이 아래로 늘어졌다.
이젠하르트는 그의 턱을 쳐들어 저를 보게 했다. 저항과 애원에서 외면과 침묵으로 돌아선 로트의 얼굴은 미간이 일그러지고 두 뺨이 울긋불긋했다.
이젠하르트는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로트는 신음을 뱉으며 물러서려 했지만 제압당했다.
“음탕한 개자식아, 이거 봐.”
이젠하르트는 웃었다.
“성기를 이따위로 부풀려놓고도 반항해? 키스만으로 이 꼴이 됐으니 넌 정말 구제불능인 호색한이야. 숭고한 맹세도 육욕 앞에서는 비굴한 노예지. 이번엔 어디를 핥아 줄까. 네 놈의 성감대는 어디냐. 혀만 빨아줘도 이렇게 발기해 버렸으니 바로 엉덩이를 대줄까? 날이 밝기 전에 끝낼지는 모르겠군. 그날 밤처럼 줄줄이 사정해대려면 시간이 여의치 않은데.”
“이제 그만 둬.”
로트는 힘껏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곧바로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얌전히 굴어.”
이젠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슥, 스윽, 단검의 날이 로트의 목울대를 부드럽게 긁다가 날을 세워 턱밑을 지그시 눌렀다.
로트는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
이젠하르트는 웃었다.
“그래, 좋아. 가만있으니 공연히 힘 빼지도 않고 서로 좋잖아. 내 몸뚱이로 보상을 해주마. 그날처럼 입에 거품이 괴도록 해봐.”
“제발 정신 차려.”
로트는 애원했다.
“넌 제정신이 아냐. 내 탓인 건 알지만 제발 정신을 찾아.”
“개자식아, 내 정신은 샘물처럼 맑아. 너야 말로 속히 본성을 드러내. 같이 재미를 보자니까.”
이젠하르트는 단검을 목에 댄 채 성기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두 뺨이 벌게진 로트는 시선을 외면하며 거칠게 숨을 뱉었다. 미간이 수치심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젠하르트는 하의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사타구니 사이를 더듬으며 귓불을 할짝대고 속삭였다.
“탐파니스가 왜 널 쫓아다닐까. 알고 있었어? 그 녀석은 너라면 네놈의 애까지 낳으려 들 거다. 원수를 굴복시킨 사랑이라니 그 비법이 궁금하군. 남녀를 불문하고 원수까지도 매혹시키는 네놈의 음탕한 비술이 뭐냐. 오장육부는 썩어빠지고 추악하지만 살가죽만은 미향을 풍겨대는 아름다운 포겔바이데, 네 놈은 만인의 애증의 대상이지. 비속하고 천박한 몸뚱이만으로도 천하의 사랑을 얻지. 육욕의 노예인 년놈의 사랑 말이다. 저길 봐. 네놈이 그토록 찬양하는 영혼과 육신이 순결한 귀부인들 정표가 산더미를 이뤘군.”
“이제 그만해.”
로트는 쉰 목소리로 간청했다.
“제발 부탁이다, 이젠하르트. 이대로 떠나게 해줘. 나를 더 비참하게 하지 마.”
“닥쳐. 널 만족시키려면 아직 부족하잖아.”
“이러지 마. 제발…….”
“왜 새삼 목석처럼 굴어? 아, 그렇군. 입으로 해줄까? 네놈의 흉물스러운 성기에 침을 잔뜩 처바르고 짜릿하게 빨아줄까. 자, 내 입에 처넣어봐. 뼈가 녹을 만큼 빨아줄 테니까.”
“빌어먹을! 정말 미쳤어?! 그만두라고 하잖아!”
-!
단검이 카당, 벽에 부딪히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두 손으로 이젠하르트의 어깨를 콱 움켜잡았던 로트는 다음 순간 제 손을 내려다보며 서버렸다.
둔중한 충격음을 울린 이젠하르트는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데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그의 어깨에 부딪친 궤짝이 요란하게 뒤집혔다. 그 속에서 장신구와 옷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로트는 우두커니 서서 쓰러진 이젠하르트를 내려다봤다.
“망할 자식 같으니…….”
널브러진 궤짝 옆에서 이젠하르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팔꿈치를 궤짝에 딛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윤기를 잃은 금빛 머리칼은 헝클어진 실 다발처럼 창백한 손 등 위로, 처진 어깨 위로, 뻣뻣한 등 뒤로 흘러내렸다. 욕설과 신음이 섞인 깊은 한숨의 뒤를 이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한 번 해주겠다는데 왜 이래?”
이젠하르트는 독백을 하듯 조용히 뇌까렸다.
“뭐가 불만이냐. 그새 수도승이 됐냐. 흥, 웃기지 마. 네놈의 음탕한 시선이 얼마나 집요한 줄 알아?……. 집요하고 간절하게 나를 뒤 쫓는 네놈의 음란한 시선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개자식아, 차라리 악마를 속여라. 훈련할 때도 경기장에서도 너는 내게 애걸했지. 입을 닥치고 파리한 낯짝으로 내게 애걸했지. 그렇지? 음탕한 호색한아, 대답해봐. 넌 내게 더러운 색욕을 품고 나를 겁탈했어. 그렇게 짐승같이 정욕을 풀고도 뭐가 부족했어? 그 이상 더 뭘 바랬지?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니까? 빌어먹을 자식……. 넌 미친놈이야. 악귀에 홀렸어. 망상에 빠진 포겔바이데, 넌 앞으로는 원수의 자격이 없어……. 너 같은 미친놈은 자격 미달이야. 우습군. 기가 막히고 우스워. 넌……. 개자식아, 넌…….”
어깨에 닿는 손길에 그의 말이 끊겼다.
“이젠하르트.”
그 옆으로 다가선 로트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손을 떨며 이젠하르트의 어깨를 만졌다.
이젠하르트는 고개를 숙인 채 욕지거리를 퍼붓고 손을 쳐냈다.
로트의 목울대가 두어 번 오르내렸다.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콱 움켜쥔 두 손이 덜덜 떨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젠하르트는 가슴에 격심한 통증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이젠하르트!”
로트는 문득 그의 어깨를 뒤에서 움켜잡고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 미친 자식이, 저리 꺼져!”
격분한 이젠하르트는 그를 떨어내려 했지만 로트는 얼굴을 처박고 애원했다.
“이젠하르트, 어떻게 해야 너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제발 그 방법을 알려줘. 이 마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게 해다오. 마지막이라도 좋으니 속죄의 기회를 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아, 그날 이후로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과 회한 속에서 몸부림쳤는지 네가 조금이라도 알아준다면! 나의 후회와 고통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네가 알아준다면!”
“나도 후회한다.”
이젠하르트는 로트를 밀쳐내고, 눈을 감은 채 명치를 누르고 말했다.
“너를 살려준 걸 미치도록 후회해. 두 번의 기회를 놓쳐버리다니. 아니, 마지막에는 돌개바람 때문이었나. 흰바다매가 너를 살렸지. 돌개바람만 불지 않았다면 넌 그날 첫 회에서 죽었어. 목이 부러져 즉사했겠지. 그때 죽어버렸다면 이런 꼴을 보이진 않았겠지.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 네놈에겐 더 뭘 감추겠냐. 타고난 악덕으로 따지자면 너와 나는 형제나 마찬가지야. 기분은 상당히 더럽지만…….”
그는 말을 끊고 고개를 쳐들었다. 관자놀이에서 뇌를 울려대는 맥박이 뛰었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명치의 격통에 핏기가 가신 입술이 떨렸다. 이마에는 구슬땀이 맺혔다.
궤짝을 짚고서 일어섰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길 올려다보는, 머리가 텅 빈듯한 로트의 얼굴이 들어왔다.
“왜 또 그래?”
이젠하르트는 혀를 찼다.
“또 얼이 빠졌군.”
“이젠하르트……. 너도, 너도 그 녀석을 본 거냐?”
“뭘 말이냐?”
“시합장에서 흰바다매를 봤어?”
“장님이 아니니까 물론 봤지. 공회당에서도 광장에서도 봤어. 네놈이 미쳐 돌아다닐 때 어김없이 출몰했잖아.”
이런 뜻밖의 얘기를 가장 뜻하지 않은 때에, 더군다나 이젠하르트에게 듣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로트는 이 순간 벌떡 일어서 그를 쳐다봤다.
“또 발광하려나보군.”
그 모습에 이젠하르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네놈의 그 얼빠진 얼굴을 힐데가르트에게도 보여주고 싶구나. 그럼 철부지의 환상에서 깨어나겠지. 뭐에 놀란 거냐? 흰바다매 때문에? 놈의 정체를 알려줄까? 놈은 유령이야. 검은 숲에서 네놈에게 쓰인 악귀지. 도대체 넌 누구한테 영혼을 판 거냐? 죽은 자의 왕? 아이케? 아니면 그놈? 아니면 전부 다인가? 그래서 그 꼴이 됐을까?”
명치의 통증이 격심해 의식이 흐려졌으므로 그는 찬바람을 쐬고자 응접실의 덧창을 열었다. 밖은 아직 캄캄했지만 동녘에서 쐐기처럼 검푸른 여명이 비쳤다.
로트의 창 시합 훈련을 앞둔 어느 날, 벨데케 가에는 밤도둑이 침입했다. 놈은 요행으로 달아났지만 이젠하르트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트가 아니었다. 죽은 설교사였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재침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어린 종복을 습격한 괴한도 놈이었다.
이젠하르트는 문가로 향하며 검은 후드를 깊숙이 덮어썼다.
어차피 포겔바이데는 날이 밝으면 떠나야 한다,
이젠하르트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되뇌었다. 저놈은 복종을 맹세했고 내게는 승자의 권리가 있다. 놈은 패자고 내가 놈의 주인이다. 날이 밝으면 놈은 떠날 것이다. 이 도시를. 영원히.
“이젠하르트.”
문을 열려는데 로트가 그를 불렀다.
그는 뒤돌아서 물었다.
“왜? 이제 하고 싶어?”
“내가 어렸을 때…….”
기습이랄 만큼 갑작스러웠지만 자신의 운명을 새로이 자각한 로트는 이젠하르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면서도 격정에 휩싸여 말했다.
“어렸을 때 난 꿈속에서 머리칼이 황금빛인 소녀를 봤어. 난 그녀를 내 운명의 상대로 믿었고, 널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힐데가르트가 그녀라고 여겼지만……. 그건 바로 너였어.”
이젠하르트는 그러자 예상했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아, 내가 너의 운명의 상대라고?”
“그래. 그건 틀림없이 너였어.”
로트는 힘주어 말했다.
“우습게 들리리란 걸 알아. 하지만 우리가 수목원에서 만났던 날을 기억해? 난 그날…….”
“물론 그날을 생생히 기억해.”
이젠하르트가 로트의 말을 가로챘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냐. 오줌싸개에 울보였던 너와 운명적으로 해후했는데 잊을 수야 없지. 친애하는 지크프리트, 넌 오늘도 나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하는구나. 내가 너의 운명의 상대라니……. 흠. 그럼 백색 수사슴의 계시를 이번엔 내가 읊어볼까. 발광한 네놈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 외우고 있거든. 그런데 그걸 알고 있어? 실은 나도 너를 내 운명의 상대라고 여긴다고 말했었잖아. 기억나지? 내가 니 애비란 소리야.”
“이젠하르트!”
“비켜. 왜 또 이래?”
“이젠하르트!”
로트는 몸을 던져 무릎을 꿇고 앉아 돌아서려는 그의 두 다리를 꽉 붙들고 매달렸다.
이젠하르트는 무감한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봤다. 다리를 붙든 원수의 두 손은 떨쳐낼 수 없을 만큼 완강했고, 초록색 홍채는 불안과 우려의 맹화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젠하르트! 부디 오해하지 말고 한 가지만 대답해다오.”
로트는 발작적인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애원했다.
“나는 무분별한 정열의 노예이고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지만, 네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면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 너를 돕고 싶어. 무엇이든 하겠다. 너의 고뇌를 내게 나눠다오! 설교사가 뭘 빼앗아 간 거냐?”
“…….”
“나를 신뢰할 수는 없겠지만 맹세컨대 너를 해하거나 협박하려는 게 아냐. 결코. 제발 한 번만 믿어줘. 그 어린 종복을 난 검은 숲에서 본 적이 있어. 그자가 종복에게서 뭘 빼앗아갔지?”
그것이 깃발임을 알았지만 로트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숨기고 물었다.
뚫어지게 그를 내려다보던 이젠하르트는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갔다. 쾅! 문이 세차게 여닫혔다.
“이젠하르트!”
로트는 계단으로 뛰쳐나가 소리쳤다.
“이젠하르트, 제발 알려다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알려다오! 이젠하르트!”
그림자가 멈춰 섰다.
“진정으로 나를 위한 희생을 원해?”
이젠하르트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용서를 빌고 싶어? 진심으로 날 돕고 싶어?”
“그래. 진심이야.”
“그렇다면 네 소원을 들어주마. 날이 밝는 대로 떠나. 눈과 귀를 막고 당장 여기를 떠나. 넌 오늘 이후로는 평생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는 거야. 나에 대해서도 그날 밤에 대해서도 전부 잊어. 그리고 명심해. 네가 설교사를 죽였음을.”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발소리의 여운과 함께 단호한 음성이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가라. 죽는 그날까지 다시는 널 만나지 않기를.”
맑고 쌀쌀한 늦가을의 이른 새벽.
영주의 수비대 기사단이 시문 밖에 있는 경계석까지 추방자를 인도할 임무를 띠고 포겔바이데 가로 찾아왔다.
베르나르 신부와 임시 외출을 허가받은 카이렛, 로에란그린은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출발 준비가 끝나자 일행은 시문으로 향했다.
그보다 이른 시각, 몇몇 부지런한 시민은 기상 직후에 시문으로 달려갔다. 지난 여름 이래로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분란을 일으킨 추방자의 비극적 말로를 구경하고 싶었다.
시문에 도착한 그들은 몹시 놀랐다. 이미 바글바글하게 군중이 모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 광장에서부터 이어진 대로에 기사대가 나타났다.
뒤에는 비운의 주인공이 말을 타고 등장했다.
시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로트는 말에서 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그러고서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쥐고 성스러운 고향의 대지에 입 맞췄다.
“으흑흑!”
어디선가 곡이 터졌다. 남몰래 로트를 흠모하던 과일 장수 아가씨였다. 옆에서도 곡이 터졌다. 한때 눈이 맞았던 목욕탕 집 딸이었다.
“흐으윽!”
세 번째 곡이 터졌다. 로트가 개를 쫓아 구해준 어린 소녀였다.
“자비로운 주님, 저 가여운 천사님의 앞날에 축복을 내려주소서.”
그러자 개망나니의 비참한 종말을 목격함으로써 10년 묵은 체증을 싹 씻어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꼭두새벽부터 시문에 몰려든 군중은 어리둥절해서 서로 돌아봤다.
때마침 로트가 일어나서 눈을 내리깔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주변은 여자들로부터 시작된 눈물의 바다가 됐다.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며 신부는 간절히 기도했다.
“권능하신 주님, 저기 불행에 빠진 한 어린 양이 자신의 죄악과 수치에 대항해 싸우러 참회의 길을 떠납니다. 주님의 따사로운 은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굽어 살펴주소서.”
“로트, 봄까지만 기다려! 내가 자네를 찾아갈게!”
카이렛이 통곡하며 외쳤다.
“도적기사 놈들을 조심하고!”
봄이 되면 수도원으로 쫓겨날 카이렛도 비장한 각오를 하고 왔음에도 울다가 기절했다.
광장으로 이어진 대로를 계속 살피던 로에란그린도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군중은 이제 로트를 에워싸고 축복을 빌어주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 뒤에서 오직 두 명, 벨데케 가의 한스 부자는 철천지원수의 추방을 축하하려고 북과 나팔을 완벽히 준비하고 왔다가 느닷없는 눈물바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침내 기사대가 선두로 시문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로트와 젊은 몸종이 따랐다.
카이렛과 로에란그린, 신부도 말을 타고 배웅하며 뒤따랐다.
이들이 막 시문을 빠져나갔을 때, 한 직공이 광장 쪽의 대로를 보고서 소리쳤다.
“앗, 저게 누구야?”
“누가 달려오는군.”
군중은 우렁찬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침의 뿌연 안개를 뚫고 늠름한 흑마가 등장했다.
흑마에 탄 이터는 화려한 망토를 펄럭이며 뒤를 돌아보고 외쳤다.
“잘 있어라, 나의 제2의 고향아! 성스러운 이 땅에 주님의 가호를!”
이어서 그는 여자들에게 소리쳤다.
“잘 있어요, 나의 귀염둥이 비둘기들이여! 이 몸은 불알친구를 따라갑니다. 아차, 콘드비라무어스가 나를 봤냐고 묻거든 못 봤다고 해줘요. 나를 붙잡으러 올 테니!”
웅성대는 군중을 뒤로하고 흑마는 시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로트의 뒷모습을 보며 울먹이던 카이렛은 이터에게 빨리 로트를 쫓아가라고 소리쳤다.
이터의 흑마는 한달음에 로트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로트는 안장에 짐을 매달고 등장한 그를 보고 깜짝 놀라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이터는 히죽, 웃기만 했다.
잠시 후, 두 귀공자는 시의 경계석을 지나고 강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고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