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재판
이날 아침 종이 칠 무렵에 벨데케 일가는 2층의 가족실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어제 성에서 벌어진 축하연에서 귀가해 오랜만에 평온한 단잠을 즐기다 날벼락을 맞고 모였다.
가족실 안은 창문이 닫혀서 어둡고 고요했다.
자리옷 차림인 벨데케는 비둔한 몸을 끌며 긴 의자에 눈을 부릅뜨고 앉아있는 아내 앞을 오갔다.
뒤에는 입술이 희게 질린 힐데가르트가 두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이젠하르트가 반대해서 마상 경기에 참관하지 못했던 그녀는 불안스레 방안을 거니는 부친과 문 앞에 서 있는 이젠하르트 쪽을 역시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 된 변고냐?”
벨데케는 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부르짖었다.
“내 집 앞에 주검이라니! 상서롭지 않아. 흉조야.”
“아버님, 진정하세요.”
이젠하르트가 말했다.
“흥분이 과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별일 아닐 겁니다.”
“아들아, 알았다. 네 말이 맞다. 별일이야 있겠니.”
벨데케는 의자에 앉아서 아들을 쳐다봤다.
벨데케 부인은 그런 남편을 힐끔 보고 아들의 창백하고 피로한 안색과 이슬에 젖은 옷차림을 보고, 다시 남편을 노려봤다.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막듯이 문 앞에 버티고 선 이젠하르트는 자신을 불안스레 쳐다보는 힐데가르트에게 꾸민 듯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힐데가르트, 아버님께 포도주를 한 잔 따라 드리렴. 마음을 가라앉히시게.”
“난 괜찮다. 방금 한 잔 마셨단다.”
“한 잔 더 드십시오. 상품이라서 몸에 좋습니다.”
벨데케는 딸이 건넨 포도주를 전부 마시고 아들을 쳐다봤다.
아들이 미소로 화답했다.
벨데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얘, 아들아.”
“네, 아버님. 포도주를 더 내오라고 할까요?”
“그래, 그것도 좋겠구나……. 그런데, 얘야, 어째서 설교사의 시신이 남의 집 앞에 버젓이 누워 있는 게냐? 문지기 영감 말로는 저 시신이 새벽에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던데?”
“술주정뱅이의 시신입니다.”
이젠하르트는 포도주를 권할 때와는 다른 어조로 차갑게 말했다.
“더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버님 건강을 또 해칠까 염려되는군요.”
“그러마……. 하지만 설교사라던데…….”
“설교사 중에도 주정뱅이가 많습니다. 지난여름에 열린 연회 때도 술통을 거덜 낸 자들이 그들이었어요. 그들이 마신 포도주와 맥주로 축성을 쌓았다면 벌써 천국에서 영생을 얻었을 겁니다.”
“하지만, 얘야, 그래도 성직자 아니냐?”
“차림새만 그럴 뿐입니다. 저런 자들은 대부분 정체불명인 떠돌이에 술꾼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런데 누가 죽였을까?”
“아버님!…….”
이젠하르트는 직접 부친을 데리고 나가려다가 제가 언성을 높이자 겁을 먹은 힐데가르트를 보고 생각을 고쳤다.
“저런 주정뱅이는 강도에게 가장 손쉬운 먹잇감입니다. 그리고 야간통행자는 밤도둑이나 다름없으니 죗값을 치른 겁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렇지.”
“연회로 피로하실 텐데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아버님.”
“오냐. 그러마.”
벨데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많이 피곤하구나. 문지기 영감이 소란을 떨지 않았다면 지금쯤 꿈속에서도 축배를 들고 너의 승리를 축하했을 텐데 아쉽구나.”
“문지기 영감한테 제가 주의를 주겠습니다.”
“알았다. 그런데 여보, 귀부인. 당신 어젯밤에 혹시 밤도둑 소리를 들었소?”
“밤도둑 소리요? 아뇨. 전혀요.”
부인은 딱 잘라서 답했다.
“그건 왜 물으시죠? 당신께서 자다가 도둑놈을 보기라도 하셨나요?”
“흠. 그게 아니고 얼마 전에 문지기가 그랬다오. 요사이 밤도둑이 드나들었다고 말이요. 그래서 혹시 저놈이 그놈인가 싶어서.”
“어마나! 뭘 훔쳐갔지요?”
“그건 모르겠소. 닭은 고대로 있소만 거위 한 마리는 줄어든 것도 같고…….”
“그럼 밤도둑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이 대답에 벨데케 부인은 오히려 낙심천만해서 남편 곁에 선 힐데가르트를 가리켰다.
“저 애가 지금 당신 옆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잖습니까. 제정신인 밤도둑이라면 저런 어여쁜 비둘기를 놔두고 고작 말라빠진 거위 따위를 훔쳐가겠어요? 지난여름의 밤도둑을 기억하시죠?”
“험, 뭐, 그렇소만.”
“아버님.”
저를 부르는 위압적인 음성에 벨데케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젠하르트는 부드러운 미소 속에 깊은 수심을 담고서 말했다.
“빨리 침실로 돌아가셔서 쉬셔야겠습니다. 수도원에서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또 지나친 걱정으로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가 되는군요.”
“그래 알았다. 올라가마. 너도 가서 좀 쉬어라. 어제 시합장에서도 그랬다만 요사이 갈수록 네 얼굴빛이 좋지 않구나. 아들아, 너의 노고로 이제 만사가 잘 해결되었으니 너도 긴장을 풀고 네 몸을 좀 돌보렴. 젊은 육체를 과신해선 안 된다.”
“네,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이젠하르트는 힐데가르트를 향해 돌아섰다.
“힐데가르트, 너는 어머님을 모시고 물러가렴. 너도 피로해 보이는구나.”
“허, 그런데 느닷없이 이 무슨 흉조일까. 축배의 잔을 들자마자 미심쩍은 시체라니!”
“아버님!”
“얘야, 알았다. 하지만 내 말 좀 잠깐 들어보렴.”
아들의 높아진 언성에도 불구하고 벨데케는 가슴 속에서 치미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아들아, 네 말이 옳다. 나도 알고 있다. 저놈은 아마도 강도를 당했겠지. 하지만 어젯밤에는 비도 내리지 않았는데 몸뚱이가 물에 불지 않았느냐. 마치 익사체처럼.”
이때 문밖에서 들리는 소음에 벨데케의 말이 끊겼다.
“저 밖에 무슨 소리냐? 고함이 들리는군. 한스 이 녀석은 어디로 사라졌어? 밖에 누구냐? 한스냐?”
“나리! 나리! 안에 계신가요? 나리!”
연이은 고함에 벨데케는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하듯 아들을 바라봤다.
이젠하르트가 문을 열자 젊은 하인이 뛰어들었다. 그는 진짜 주인을 가늠하듯이 벨데케 부자를 번갈아 보다가 이젠하르트의 발아래 넙죽 엎드려 외쳤다.
“나리! 큰일입니다! 큰일이에요!”
“무슨 일이냐?”
이젠하르트가 물었다.
“헛! 무슨 일인데 그러냐?”
벨데케도 덩달아 소리쳤다.
“시체가, 시체가 깨어났더냐? 악마가 부활했다더냐? 오, 가혹하신 주님!”
“아닙니다, 나리. 탐파니스 도련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칼에 찔려서 돌아가셨어요!”
이 대답에 벨데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젊은 하인을 내려다봤다.
“얘, 너 방금 뭐라구 했느냐?”
“나리! 탐파니스 도련님께서 칼을 맞고 돌아가셨어요. 배를 칼에 찔려서 피를 흥건하게 쏟으셨답니다.”
“우, 우리 탐, 탐파니스가?…….”
“네, 나리! 광장에서 습격을 당하셨대요. 도련님의 시신은 사라졌지만 바닥에는 아직도 뜨끈한 피가 흥건하답니다요. 주님! 가여운 도련님의 영혼을 구해주소서!”
벨데케는 하인에게 비틀대며 달려가서 그가 살인자이기라도 하듯 그 어깨를 사납게 움켜잡았다.
“누, 누가 그런 짓을 했다니? 설, 설마 포겔바이데는 아니겠지?”
“그자랍니다. 그가 도련님의 배를 칼로 푹, 찔렀답니다. 목격자들이 있어요!”
“오!”
“아, 아버님!”
외마디 탄식을 내뱉고 쓰러진 부친을 힐데가르트가 달려가서 부축했다.
이젠하르트는 하인에게 포겔바이데가 한 짓이 틀림없느냐고 되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하인은 젊은 주인의 갑작스레 돌변한 이상한 낯빛을 보고 놀랐다.
“그 미치광이가 살인자입니다!”
문득 난데없는 절규가 문가에서 터졌다.
“제가 하늘에 대고 맹세합니다! 이런 무서운 범죄를 저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안으로 뛰어든 늙은 한스는 가족실 한복판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나리! 나리! 그 미치광이가 살인자입니다. 제 아들놈이 지금 피를 철철 흘리며 주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선량하고 총명한 어린애가 강도의 칼에 찔려 다 죽어가고 있어요. 어흑흑! 가여운 내 새끼!”
“얘, 한스야.”
딸의 품에 안겨있던 벨데케는 경악스런 비보에 반쯤은 넋이 빠져서 대답을 두려워하듯 조심스레 물었다.
“넌 또 뭐라는 거냐? 네 녀석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해괴한 소리를 하느냐?”
“칼에 맞았어요!”
늙은 한스는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제 아들놈이 칼에 맞았어요. 원수의 칼을 맞고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복수를! 자비로우신 주님, 부디 이 늙은이에게도 복수의 불칼을 내려주소서!”
아비규환처럼 소리를 지르는 늙은 한스에게 이젠하르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젊은 주인의 기묘한 얼굴을 마주 본 늙은 한스는 더욱 서럽게 통곡하며 말했다.
“어흑흑, 나리! 제 아들놈이 어젯밤에 자다가 사라졌습니다. 밤중에 오줌을 싸러 가나 했었지요. 그런데 밤이 깊도록 그놈이 안 오지 뭡니까요. 그래서 제가 뛰쳐나가서 밤새도록 찾아 헤맸습죠. 그랬더니 후문 뒤쪽의 골목에 정신을 잃고 쓰려져 있지 않습니까. 어젯밤에 강도에게 칼을 맞았답니다. 강도는 이 집에 앙심을 품고 왔다가 그 애의 팔을 찌르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제 아들놈은 그놈을 꼭 물고 늘어져 잡았지요. 미친 악마를 잡은 겝니다!”
“악, 악마를?”
벨데케가 힘없이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그 미친 악마예요! 포겔바이데 말입니다!”
“포, 포겔바이데!” 하고 외친 벨데케의 홍채가 흐리멍덩해졌다. 그는 두 팔을 힘없이 쳐들고 천장을 올려보다가 입에 거품을 흘리며 중얼댔다.
“……. 오, 주님……. 주님께서 또다시 죄 많은 나를 벌하시는구나……. 최후의 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피의 축제가 시작됐다. 끝없는 복수의 순환…….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피의 향연!……. 가여운 디트리히! 가여운 우리 탐파니스! 오, 오, 얘들아…….”
“아, 아버님!”
벨데케는 목을 젖히고 쓰러졌다.
힐데가르트는 기절한 부친을 품에 안았다. 그러면서 두려움과 슬픔, 원망과 자책이 묘하게 뒤섞인 시선으로 문가에 버티고 선 이젠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제관 지붕에서 종달새가 울었다.
사제관에서 나온 베르나르 신부는 낙엽을 긁어모으는 종복에게 뭔가를 물었다.
종복은 고개를 저었다.
신부가 몇 마디 명령을 내리자 종복은 갈퀴를 나무에 세워두고 안뜰을 떠났다.
새가 울고 낙엽이 이슬에 젖은 예배당의 안뜰은 평온하고 한적했다.
주변을 살피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간 신부는 문을 꼭 잠그고서 안을 휘둘러봤다.
“헛! 그새 어디로 갔어?”
좌우측 통로까지 두루 살핀 신부는 당혹해서 소리쳤다.
“이놈이 또 달아났군. 잡히려고!”
회중석 맨 앞쪽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그쪽으로 달려간 신부는 한숨을 내쉬고 주머니에서 말린 약초를 꺼냈다.
“얘, 로트, 일어나 봐라.”
신부는 회중석 바닥에 모로 누워 있는 로트의 어깨를 흔들었다.
“어서 일어나 보라니까. 응? 이걸 좀 씹으면 기운이 날게다.”
로트는 일어나기는커녕 엎드려서 두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깐 일어나 보라고 달래고 위협하고 어깨도 잡아당겼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한동안 그와 실랑이질을 벌인 신부는 로트의 등짝을 맵게 후려갈기고 소리쳤다.
“이 못난 녀석아, 홍수가 났니? 어디 홍수가 났어? 이 녀석아, 하늘이 무너졌니? 땅이 꺼졌니? 죄를 지었으면 재깍 무릎을 꿇고서 주님께 두 손 두 발을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한심하게 울고만 있어? 눈이 먼다! 그러다, 올빼미처럼 눈이 멀게다. 얼른 못 일어나겠느냐?”
“……. 그냥 두세요.”
로트가 목이 메여 말했다.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혼자 있고 싶습니다.”
“얼른 일어나!”
“제발 그냥 가세요, 신부님. 전 혼자 있고 싶어요.”
“그럼 여긴 왜 왔느냐? 홀딱 미쳐가지고 저 뒷골목에서 또 싸돌아다녀야지 여긴 왜 왔어? 요 모양 요 꼴로 내 앞에서 찔찔 짜러 왔니?”
“신부님……. 전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을 했어요…….”
“그러니까 썩 일어나지 못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한 자초지종을 들어야 네놈을 살려주든 목을 매달든 할 게 아니냐?”
“제가 탐파니스를 죽였습니다. 제 손으로 탐파니스를 죽였어요. 아아!…….”
“못난 놈 같으니!”
신부는 로트의 어깨를 움켜잡고 강제로 일으키려고 했다.
로트는 완강히 반항하며 바닥에 들러붙었다. 호통을 치고 엉덩이를 걷어차고 옆구리를 꼬집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대머리에 땀이 찬 신부는 결국 포기하고서 바닥에 주저앉아 땀을 닦았다.
“그래, 이놈아. 실컷 울어봐라. 사내놈이 눈물이 그토록 많아서야, 원. 그만큼 울어서야 눈이 먼다니? 더 울지 그러느냐.”
“…….”
“동굴에는 언제 갈 거냐? 거기서 혼자 산다며? 얼른 가라, 이 녀석아. 장님이 돼서 어디 동굴에 처박혀 살면 내 속 끓일 일도 없지.”
“아아, 탐파니스!”
“떽!”
신부는 로트의 뒤통수를 세게 쥐어박았다.
“이 못난 놈아, 내가 뭐라고 했느냐. 네놈의 그 방종한 정열이 언젠가는 재앙을 부를 테니 백 번 천 번 자중하고 주의하라고 경고했지? 수사슴이 네놈을 살려줬으면 현세의 시간에서 영원한 내세의 계단에 이를 때까지 신실하게 축성을 쌓고 얌전히 살라고 했지? 그런데 이놈아,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타락자로 돌변해선 날마다 과부니 목욕탕 딸내미를 쫓아다니며 방탕한 연애질만 해대느라 온 도시에 분란을 일으켰지? 영원한 사랑의 맹세니 헌신이니 하고 현혹해서 가련하고 우매한 여자들을 음탕한 쾌락과 불행에 빠뜨려 희롱하고 울게 하고!”
“신부님……. 맹세를 지킬 기회는 얻지 못했지만 제 마음만은……. 진실했었습니다.”
“입은 뚫려서!”
“…….”
“그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 나는 너의 선량한 본바탕을 믿고, 네가 사악한 악마의 유혹에 맞서 싸우리라고 믿었다. 네놈이 읍소하며 맹세한 대로 주님의 성실한 종복이 되리라 믿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 또 슬금슬금 나를 피하더니, 또다시 사탄의 유혹에 굴복해 재앙을 부르는 악마의 편지까지 썼겠다?”
“……. 악마의 편지라니요?”
“이놈아, 시치미 떼지 마라. 이젠하르트 그 애가 그걸 내게 직접 가져왔다!”
신부의 호통에 로트는 얼굴을 두 팔에 더 깊숙이 파묻었다.
“쯧쯧. 어쩌자고 그런 짓을 했느냐. 네가 제정신이면 그 애 성품이 몹시 완고하고 자존심은 어느 제후 못지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조롱의 편지를 쓰느냐. 천사로 둔갑을 하고 가서 화해를 청해도 목숨이 위태로울 판에 작정을 하고 덤비다니! 그 애가 편지를 읽어 달라며 새매처럼 나를 노려보고 섰는데 식은땀이 흘러 대머리가 다 젖었다.”
“신부님…….”
“말해라. 입은 뚫렸으니.”
“그 편지에는 제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 말이 그거다! 그러면 그렇지! 발광이 나설랑!”
그의 방탕한 과거와 무분별한 정열에 대해 온갖 힐난을 퍼부은 신부는 죄인을 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로트는 회중석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고개를 젖히고 예배당의 천장을 멍하니 우러러봤다.
몰골이 참담했다. 검은 튜닉은 피로 얼룩지고 머리는 쥐어 뜯겨서 산발이고, 아름답던 초록색 눈동자는 오래된 젤리처럼 뿌옇고, 여윈 뺨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지상에서 가장 불행한 이라도 적선과 동정을 아끼지 않을 그 모습에 신부는 “이 망할 놈!” 하고서 모질게 먹으려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이걸 좀 마셔봐라.”
신부는 허리띠에 찬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고 로트의 입에다 들이댔다.
“헛, 내 정신 좀 보게. 정신이 이리 사나우니.”
갑자기 화들짝 놀란 그는 갈색 약병을 잡아채 주머니에 처넣었다. 그 대신 다른 병을 꺼내 로트의 입속에 강제로 들이붓고 달랬다.
“요걸 좀 마셔봐라. 정신이 들게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속히 정신을 차리고 기도를 드리자. 기도와 속죄만이 네가 살아남는 길이다.”
“살인자 주제에 더는 살아서 뭣합니까.”
“그건 사고였느니라. 우발적이고 불행한 사고였어. 가여운 탐파니스 그 애가 늘 너를 도발하며 시비를 건다는 건 영주님께서도 알고 계시니 네가 진심으로 속죄하고 그 애의 죽음을 애도하면 영주님께서도 정상참작을 하실 게다. 그러니 얼른 나랑 같이 기도를 드리고 나서 잠깐 얘기 좀 하자.”
“하지만 탐파니스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놈아, 그러니까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일단 기도를 드리자니까! 아이구 내 속이야!”
신부는 로트를 쥐어박고 제 가슴을 쳐댔다. 답답한 속이야 참으면 그만이었다. 기도도 속 편할 때 올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소문은 이미 온 도시에 퍼졌다. 곧 있으면 영주의 기사들이 죄인을 체포하러 몰려올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의 어린 양은 속수무책인 공황 상태라서, 진위를 파악해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사태만 나빠지고 있다.
혼란을 더할까 봐 두려워서 고민했지만, 신부는 결국 결단을 내렸다.
“얘, 로트, 내가 솔직히 말하마.”
“아, 탐파니스…….”
“이놈아! 정신 차리고 똑똑히 잘 들어! 지금 이렇게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래도!”
로트의 눈물 젖은 뺨을 움켜잡고서 신부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듣고 있느냐. 옳지. 지금 밖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탐파니스가 죽은 게 문제가 아니야. 네놈 목숨은 여기에 달려 있어. 그 소문이 무엇이냐, 네가 설교사를 살해했단다. 벨데케 가의 어린 종복도 지난밤에 습격을 당했다는구나. 그 애가 네 얼굴을 똑똑히 봤다며 너를 강도로 지목했어. 그래, 그게 사실이냐? 네가 그 애를 해쳤니? 설교사도 네가 죽였니?”
“네.”
로트는 순순히 답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오, 가혹하신 주님! 어쩌다 그랬니? 그자가 먼저 덤볐더냐?”
“아니요. 그저 평소처럼 시비가 붙었어요. 탐파니스는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저는 여기 오느라고 정신이 팔려서-…….”
“이, 이 녀석이 지금 누구 얘기를 하고 있나?”
“탐파니스 얘기 아닙니까?”
눈물로 뿌연 눈동자를 멍하니 보다가 신부는 두 손을 쳐들고 탄식했다.
“불쌍한 놈아! 불쌍하고 불쌍한 주님의 종복아!”
천성적으로 정이 많은 신부의 볼에 눈물이 흘렸다.
로트가 그 모습을 보며 함께 슬퍼하자 신부는 그 얼굴을 우악스럽게 부여잡고 소리쳤다.
“이 못난 녀석아, 너를 어쩌면 좋으냐. 네놈의 심성이 본디 선량하고 악의라고는 없다지만, 주님 이외에 그 누가 너의 결백을 믿어주겠느냐. 이렇게 얼이 빠져 있으니 누가 너를 위해 닥쳐올 불행과 맞서 싸워준단 말이냐. 악마도 견디지 못할 혹독한 심문과 끔찍한 고문이 저 문밖에서 너를 향해 쇠사슬을 쩔렁이며 달려오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바보처럼 넋을 넣고 울고만 있으니!”
“…….”
“이놈아, 속히 정신을 차려! 검은 튜닉의 설교사 말이다. 그자를 네가 죽였느냐? 어젯밤 네가 벨데케 가 근처에서 그놈과 난투극을 벌였다던데? 너냐? 네가 설교사를 죽였냐니까?”
절망과 비탄으로 망아의 상태에 빠져 있던 로트는 추궁이 이어지자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하 감옥에서 억지로 끌려 나와 갑자기 대낮의 태양 아래 선 듯이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해 보였다.
그러다 신부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두 눈을 무섭게 번쩍이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시야에 잡히고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신부는 소문을 되풀이했다. 그리고서 로트의 손을 꼭 잡었다.
“그래, 이제 사실대로 말해봐라. 네놈이 죽였어? 아니지?”
“신부님…….”
로트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아마 제가 그랬을 겁니다.”
“이놈아, 그랬을 거란 말이 어디 있느냐? 죽였으면 죽였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말해야지! 횡설수설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디서 그놈을 봤어?”
“어느 뒷골목에선가 그놈을 봤어요……. 거기서 그놈이 어린애를 칼로 찌르고…….”
“그럼 네가 종복을 해친 건 아니구나?”
“네, 제가 아닙니다. 전 그놈을 쫓아갔어요. 쫓아가서 붙잡고 놈의 정체를 물었지요. 그랬더니 갑자기 제 머리를 후려갈기고 달아나더군요. 그래서 다시 놈을 뒤쫓다가……. 놈을 찾아내고…….”
“그래서?”
“……. 몸싸움을 벌이다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그래서 때려죽였습니다.”
오! 하고 처절한 탄식을 내뱉은 신부는 성호를 긋고 기도문을 외웠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로트의 어깨를 콱 움켜쥐고 캐물었다.
“틀림없느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기억을 더듬어봐라. 만취한 놈이 사람을 때려죽일 힘이 어디 있겠느냐?”
“신부님……. 그래서 죽인 겁니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참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놈은 밤도둑이었어요……. 어차피 죽어 마땅한 놈 아닙니까…….”
“이놈아, 그자는 방랑 설교사란다! 네놈은 성직자를 죽였어!”
신부는 로트를 얼싸안고 제 가슴을 치는 대신 그 등을 내리쳤다. 튼튼한 주먹에 동정과 연민을 담아, 슬픔과 염려를 담아서 어린 양의 죄악과 방종을 방치한 자기 견책의 고통을 담아 사정없이 퍽퍽, 내리쳤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탕탕탕-
이때였다.
“신부님! 신부님! 문을 열어주세요!”
누군가 고함을 치며 예배당 문을 두들겼다.
신부의 낯빛이 싹 달라졌다. 문밖의 손님은 그가 이터에게 급파한 로에란그린도, 종복도 아니었다. 생소한 목소리에, 문을 두들겨 대는 손길도 그들의 위세처럼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신부는 회중석에서 나와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로트는 망연히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기도를 마친 신부는 검은 사제복의 옷매무새를 갑주인 양 가다듬었다.
“얘, 로트야, 이제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정신을 차려라. 영주의 저승사자들이 너를 데리러 왔구나. 하지만 걱정하지 마렴. 이곳은 주님의 성스러운 집, 황제의 군대가 떼로 몰려온들 늪에 빠진 가련한 어린 양들의 안식처에서 속세의 권력자가 칼을 들고 설칠 수는 없지. 절대로!”
“신부님! 빨리 문을 열어주세요! 속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옳지. 기다려라, 이놈들. 내가 직접 문을 열어줄 테니.”
대머리를 번쩍 빛낸 신부는 문으로 달려갔다.
그새를 기다리지 않고 문은 부서질 듯 쿵쿵댔다.
문을 열어젖힌 신부는 벽력같은 노성을 내질렀다.
“이놈들아! 권능하신 주님의 문짝을 어떤 불경스러운 악당 놈들이 함부로 부수느냐. 지옥에 갈 놈들아! 신성모독 죄다! 하늘이 두렵지 않으냐, 이놈들!”
“안녕하세요, 신부님.”
“헛!”
난데없는 낭랑한 음성에 신부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목전엔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목에 은방울을 단 광대가 생글대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신부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너는 밤바 아니냐?”
“네. 저는 밤바라고 합죠.”
키 작은 광대는 발랄하게 인사를 했다.
신부는 펄쩍 뛰었다.
“이놈아! 누가 그걸 모른다니? 여긴 웬일이냐? 네놈이 이 문짝을 두드렸냐?”
“넵, 제가 그랬죠. 한 번 더 해볼까요? 신부님! 쿵쿵쿵! 어서 문을 열어주세요! 속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쿵쿵쿵!”
“뭐야? 이, 이 녀석이 장난을!”
눈을 부릅뜬 신부의 대머리가 분노로 번쩍이자 밤바가 잠깐! 하고 외쳤다.
“앗, 신부님! 진정하세요. 제가 가져온 소식을 듣기도 전에 그 쇠망치 같은 주먹으로 제 골통을 깨시면 천국에 가셔도 통탄하실 텐데요. 그럼 속보를 전해드립죠. 볼로냐의 악명 높은 폭동 주모자이신 이터 나리께서 저보고 당장 신부님께 달려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어요. 탐파니스 폰 벨데케, 그 심술보 질투꾼을 아시죠? 고 녀석이 현재 말짱하답니다요.”
“헉! 뭐라고? 탐파니스가 살아났느냐?”
“넵. 그렇다죠.”
“허억! 그, 그놈이 그럼 벌써 부활했느냐?”
“넵. 그럼 저는 첫 번째 임무를 마치고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미치광이 울보’는 저 안에 있나요? 볼로냐의 폭동 주모자께 울보의 상태를 보고해야 합죠.”
밤바는 곧 어리둥절한 신부를 제치고 예배당 안으로 쪼르륵, 사라졌다.
“허!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혼자 밖에 남은 신부는 망연자실해서 외쳤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사람을 죽인 놈은 저세상에 갈 판인데, 피를 철철 쏟은 그놈은 말짱하게 살아났다니!”
탐파니스가 회생했다는 낭보가 전해지자 로트는 신부를 놀라게 할 만큼 빠르게 맑은 정신과 기력을 회복했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이 곧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구원의 서광은 잠시뿐, 저녁 종이 칠 무렵에 영주의 기사단이 예배당으로 몰려와 피의자를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베르나르 신부는 성소로서의 신성한 권한을 내세워 인도를 거부했다.
로트는 그러나 자발적으로 체포에 응해서 이날 영주의 성에 있는 외벽의 탑에서 밤을 보냈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은 로트를 따라서 성으로 동행했다.
술과 심리적 충격으로 발병한 카이렛과 탐파니스는 쾌차할 때까지 재판 유예라는 처분을 받고 자택 구금되었다.
로트는 탑에서 나흘간 구금당했다.
그리고 구금된 지 닷새째 되던 아침에 영주의 재판을 받았다.
*
로트의 재판이 열린 날이었다.
저녁 종이 칠 무렵에 벨데케는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닷새 전에 벌어진 소동으로 발병한 터라 귀족의 의무임에도 재판에 불참했다.
하지만 이번 재판에 조카의 생사여부가 달려있고 그 불씨가 가문의 흥망성쇠와 직결되니 날이 밝은 후부터 재판 소식을 초조히 기다렸다.
올여름에 열린 연회 때 가장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그는 수도원으로 쫓겨나기 전후로 몰라보게 늙어버렸다. 초여름까지만 해도 멋을 부려서 동그랗게 말았던 금발은 백발이 됐다. 고뇌를 품은 이마의 주름은 수도원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나날이 깊어만 갔다.
그런 벨데케는 자신이 곧 죽게 되리라고 믿었다. 노쇠한 육신만을 고려한다면 남들 같은 사치와 향락은 누리지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평안히 여생을 마칠 것이다.
하지만 늙은 가슴에 품은 비밀과 눈물은 독이었다. 평범한 재능과 소심한 성격으로 남들에게 조롱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아들에 대한 자부심만은 드높았던 그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고뇌와 슬픔이 심신의 생기를 나날이 좀먹었다. 그래서 두 번 다시 건강을 되찾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저녁의 제2종이 치고 이젠하르트가 그를 찾아왔다.
벨데케는 곁에 온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젠하르트는 부친의 손등에 형식적으로 입을 맞추고 물러섰다.
벨데케는 슬픔을 감추며 말했다.
“이젠하르트, 내 아들아, 늦었구나. 너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단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아버님.”
“많이 나아졌다. 네가 염려해준 덕분이다. 재판은 어떻게 되었느냐. 포겔바이데는 어떤 판결을 받았지?……. 설마 목을 자른다더냐?”
“포겔바이데는 영구 추방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젠하르트는 억양 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영구 추방! 역시 그렇게 됐군. 추방일은 언제냐?”
“열흘 후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런데 그놈의 정체는 뭐라더냐? 죽은 설교사 말이다.”
“예상대로 신분을 위장한 떠돌이였습니다. 방랑 설교사는 맞습니다만 오래전에 성직을 잃고 파문당한 자라더군요.”
이젠하르트가 부친에게 전한 재판의 전후 상황은 다음과 같다.
탑에 구금된 로트는 탐파니스가 극적으로 회생하자 유혈 충돌에 대한 책임 추궁은 일단 면하게 됐다. 시비를 가리고자 해도 사건 당사자인 세 명 중에서 두 명이 심리적 충격으로 앓아누웠고 그 사고의 원인과 결과가 만취자의 난동이었던 탓에 부차적으로 밀려났다.
로트는 그 대신 설교사 살해와 어린 한스를 습격한 죄목으로 탑에 구금돼 나흘간 심문을 받았다. 두 사건이 동일 동시에 발생했으며, 한밤중에 벨데케 가 인근에서 둘의 추격전과 난투극을 목격했다는 증언 외에도, 결정적으로 어린 한스가 로트를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분명히 보고 들었어요!”
사고 당일 아침, 어린 한스는 몰려든 구경꾼 앞에서 칼에 찔린 팔을 내보이며 겁에 질려 소리쳤다.
“무시무시한 살인자가 어젯밤에 제 팔을 푹! 찌르고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네 녀석의 원수인 포겔바이데다! 지옥에서 너를 벌하려고 왔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었어요. ‘전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애인데 꼭 저를 잔인하게 죽여 복수해야 하나요?’ 그랬더니, ‘물론이다. 네 녀석은 벨데케 가의 충성스러운 종복이라서 피의 복수를 절대 면할 수가 없다. 네 죽음을 원망하려면 너의 주인을 탓해라.’ 이렇게 말하고서 저를 꼭 붙잡고 칼로 찔렀어요. 그러고서 제가 품속에 꼭 감추어뒀던 깃발……. 앗, 아니, 빵, 빵을 강제로 빼앗아 갔어요. 빵을요!”
“빵을? 그건 뭣 하러?”
“그, 그야 배가 고팠나 보죠.”
빵을 훔친 살해범과 나눈 대화를 똑똑히 읊는 대목에서 어린 한스의 주장은 신빙성을 다소 잃었지만 사람들은 로트가 습격자이자 설교사 살해범임을 믿었다.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에겐 보복 살해건 화풀이 살해건 그 이상의 흉악한 짓도 범할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즉, 로트는 한여름 내내 도시를 뒤흔든 미치광이였고 오밤중에 종종 난투극을 벌였으며, 사건 당일엔 마상 경기에서 굴욕적인 참패를 당해 앙심을 품고서 목욕탕에서 유례 없이 폭음을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절친한 세 귀공자랑 난투극까지 벌이는 와중에 ‘그놈을 몰래 죽여 버렸어야 했다!’고 공언했단다.
이러한 살해 동기의 분석- 과거의 광란, 축적된 앙심, 무분별한 분노와 폭음-은 사건 당일 광장과 시장으로 들판에 불길이 번지듯 퍼졌다.
결국 로트는 당일 저녁에 탑에 구금됐다.
그리고 구금 이틀째인 심문 첫날, 로트는 죄를 자백했다. 그가 첫날에 자백한 건 설교사의 살해 건이었다. 어린 한스의 습격 건은 처음엔 부인했지만 앞 뒤가 어긋난다는 위협과 심문 끝에 진술을 번복하고 자백했다.
피의자가 이렇게 순순히 죄를 자백하자, 영주의 배심원은 벌금과 배상금 그리고 영구추방이라는 판결을 내리기로 합의를 봤다.
초여름부터 두 가문이 벌이는 반목과 불화로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던 영주는 이에 만족했다. 뜻밖의 사고로 자신의 짐이 덜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젠하르트가 승인을 요구한 패자의 영구 추방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몇몇 측근들- 이터 일행과 숱한 귀부인들, 베르나르 신부 등-의 청원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와 관계없이 우려하던 또 다른 일이 발생했다.
이 도시의 주교는 이번 살해사건이 발생하자 세속의 재판권을 부정하고 불신하며 죄인의 신병 인수를 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피해자는 방랑 설교사, 즉, 성직자이며 이 경우 재판은 속권이 아닌 신권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속권을 남용하며 그다지 신실하지 못한- 축성과 기부에 인색한- 영주와 방종한 시민들에게 이번 사건으로 경종을 울릴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로트는 또다시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다. 영구추방도 한 개인에게는 치명적인 형벌이다. 범죄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고향에서 쫓겨나 무법지대나 기아의 땅으로 내몰리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권이 발휘된다면 그보다 더 가혹한 형벌, 즉 파문이나 가장 고통스럽고도 잔인한 처형을 선고받을 확률이 높았다.
이런 위기에 처한 로트에게 예상 밖으로 갑작스러운 구세주가 등장했다.
로트의 증인을 자청한 그는 만일 위증 시에는 자신이 저주를 받겠으며 진실만을 수호할 것을 신 앞에 맹세한 오른손을 절단하겠다고 했다. 만필요트 백작이 그 증인이었다.
백작은 설교사의 신분에 의혹을 제기했다. 이 도시로 오기 전에 어느 백작령에서 그와 비슷한 방랑 설교사들을 봤다고 했다.
그들은 도둑질을 일삼고 야간 통행 금지를 어기며, 상습적으로 도시와 마을의 질서를 파괴하는 등, 영주에게 수시로 도전했다고 했다. 그중에서 다수가 체포 후에 처형당했는데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탈주자가 있다고 했다.
그 후 만일 자신의 증언이 위증이라고 밝혀진다면 기꺼이 오른손을 자르겠으니, 먼저 그 백작령으로 사람을 보내 신원확인을 해주십사, 공손히 요청했다. 그러고서 올 초여름에 벨데케 가의 연회장에서도 저 ‘가짜 방랑 설교사’를 본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서약이었다. 판결을 좌우하는 건 피의자와 증인의 서약과 진술 그리고 신분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재력가인 백작은 로트가 결백함을 주장하며 자신의 명예와 명성을 걸었다.
이로써 재판권은 영주에게로 돌아갔고 로트는 상기한 판결을 받았다.
아들의 얘기를 듣고 난 벨데케는 백작의 돌발적인 증언에 한편으론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을 위한 귀향 연회 때에 백작이 선뜻 베푼 호의를 떠올리며 이해했다.
이젠하르트는 그 배후에 이터와 콘드비라무어스가 있다고 여겼으나 부친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벨데케는 다시 물었다.
“그럼 탐파니스는 어떻게 되겠느냐?”
“탐파니스도 추방 선고를 받게 될 겁니다.”
이젠하르트가 답했다.
벨데케는 내려앉는 가슴을 누르며 겁에 질려 물었다.
“설, 설마 그 애도 영구 추방은 아니겠지?”
“2년 정도라고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렇담 언제 쫓아낸다니?”
“아직 모르겠습니다. 당사자가 자리에 누워 있으니.”
“허어, 불쌍한 녀석!”
벨데케는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 되누웠다.
“이젠하르트, 내 아들아. 넌 탐파니스를 만나고 왔겠지?”
“내일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의 냉정한 대답에 벨데케는 그가 가지 않으리란 걸 알고서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그래. 꼭 만나고 와다오. 그 애를 위로해 줄 혈육이 너 말고 누가 있겠느냐. 가여운 탐파니스, 철부지 녀석! 허어, 그 녀석을 도대체 어쩐단 말이냐.”
“…….”
“아들아, 부디 네가 잘 달래다오. 그 애는 힐데가르트 때문에 뿔이 난 게다. 어려서부터 질투심도 강하고 화를 잘 냈지. 하지만 그토록 엉뚱한 짓을 저지르다니! 대체 어쩌다 그런 영악한 잔꾀를 꾸며냈을까. 거위 알에 구멍을 뚫어 짐승의 피를 넣고 제 배때기에서 터뜨리다니! 도대체 그런 잔꾀를 누가 가르쳐줬을까. 그 커다란 알을 어떻게 숨겼다니? 어쩌다가 천하에 그런 영악한 술책을 꾸몄단 말이냐. 불쌍한 녀석.”
“아버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너도 요새 통 잠을 못 잔다고 하던데 어서 가서 쉬렴. 다 잘 될 게다.”
이젠하르트는 곧바로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벨데케는 갑자기 아들을 불러 세웠다.
“얘, 이젠하르트.”
“네, 아버님. 말씀하세요.”
촛불 두 자루만이 불을 밝힌 방안의 어둠 때문에 벨데케는 아들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견습 기사로서 고향을 떠나기 전 아들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물었다.
“힐데가르트는 어쩌고 있다니? 그 애는 울고 있겠지?”
“지금 가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네가 이 애비 대신 위로해다오. 그 애는 어려서부터 네 말이라면 순순히 따르잖니. 너도 그 애를 무척 귀여워했지. 지금쯤 눈이 멀도록 울고 있을 게다. 제 어미가 호통을 쳤는데도 울고만 있다. 제 혈육이 살아났는데도 눈물만 흘리더구나.”
“…….”
“그 애를 수녀원에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집이 세고 당돌한 애니 수녀원으로 보내야지 달리 방법이 있겠느냐.”
“아버님, 그럼 편히 쉬세요.”
“그래. 그런데 만필요트 백작이 힐데가르트한테 청혼을 한다던데 그게 사실이니? 어제 연회장에선 내게 아무런 말도 없었다만 네 어미가 그러는구나.”
“네, 사실입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순순히 응낙할까?”
“영리하고 착한 아이니 곧 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축 늘어진 두 뺨을 부들부들 떨어댄 벨데케는 아들의 눈치를 보고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이젠하르트, 얘야. 이 못난 아비가 네게 한 가지만 간청해도 되겠느냐? 그 애들을 잘 보살펴 다오. 힐데가르트와 탐파니스 말이다. 나는 곧 수도원으로 들어갈 참이다. 모든 걸 네게 맡기고 거기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고 싶구나. 네 어미도 수녀원으로 보내주면 네 부담이 덜하겠지……. 기부금을 다소 내야 한다만…….”
“아버님, 달리 하실 말씀이 또 있으십니까?”
“없단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냐. 가서 푹 쉬렴……. 이젠하르트?”
벨데케는 또다시 아들을 불러 세웠다.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느냐?”
“네, 말씀하세요.”
“얘야, 너는……. 너는 나 대신에 우리 가문을 지켜주겠지?”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벨데케가 곧바로 대답을 못 하자 방안에 침묵이 엄습했다.
이젠하르트는 부친의 대답을 기다렸다.
노쇠한 벨데케의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윽고 그는 아들의 침묵과 오싹한 냉기에 무심코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얘야, 너는 명예와 신의의 기사다……. 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전사이며 주님의 선량한 종이지……. 그런 너만이……. 너만이 우리 가문의 오랜 불행과 비극을 끝낼 수 있다. 너만이 두 가문의 비극을……. 슬기롭게…….”
“아버님, 그만 편히 쉬세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오냐. 피곤할 테니 너도 가서 푹 쉬렴.”
벨데케는 눈을 감고 힘없이 덧붙였다.
“얼른 가서 쉬어라. 너는 오늘 밤 꼭 저승사자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