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포겔바이데! (22/33)

10. 포겔바이데!

초스트가 끝나자 시합장 사방으로 흩어진 관객은 언덕을 넘고, 숲 언저리를 돌아 집으로 돌아갔다.

영주 일행과 벨데케 일가는 승자의 연회를 즐기러 성으로 갔다.

아직 창시합의 여흥이 남은 다른 이들은 시벽 근처에 있는 공중목욕탕으로 몰려갔다. 거기서 땀을 흘리고 물을 끼얹고 피를 뽑고 그날의 관전평을 왁자하게 지껄이며 욕조에 들어앉아서 술을 마셨다.

본채와 떨어진 귀빈용 욕실에서도 창 시합 직후부터 요란한 술판이 벌어졌다. 그곳에는 손님 둘이 마주 보고 들어앉을 수 있는 커다란 나무 욕조 두 개가 있었다.

욕조 가운데에 걸쳐놓은 널빤지 위에는 고기와 술이 놓였다. 주인은 이 목욕탕의 단골이자 자칭 황제인 귀빈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지만 반은 외상을 꼭 갚겠다는 회유와 반은 자리를 내놓지 않으면 엉덩이를 걷어차겠다는 협박에 쫓겨 급히 방을 마련해줬다.

네 명의 손님이 그 방을 독차지하고서 술을 마셨다. 맨몸뚱이에 모자만 쓴 그들의 얼굴은 땀을 쪽 빼서 윤기가 흐르고, 오랫동안 뜨거운 물 속에 앉아있던 터라 뺨이 삶은 능금처럼 붉었다. 물에 젖은 양어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다 같이 축배를 들자!”

카이렛과 마주 앉은 목욕탕의 황제, 이터가 술잔을 쳐들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우리의 용사를 위해서!”

이터는 주인을 불러서 맥주통을 전부 가져오라고 고함쳤다.

로에란그린은 시종이 로트에게 맥주잔을 내밀자 그를 제지했다.

“취했으면 그만 마셔, 로트. 이터랑 카이렛은 만취했어.”

“한 잔 더 줘. 마시고 싶어.”

로트는 맥주를 전부 들이켰다. 카이렛은 주먹을 휘두르며 실컷 마시라고 응원했다.

이터도 갓 잡힌 물고기가 물을 튀기듯 사방으로 물을 튕겨대며 일어나 소리쳤다.

“굉장하구나. 드디어 우리의 로트로 돌아왔어. 날마다 찔찔 짜다가 숲의 파괴자한테 한 방 맞고는 정신을 차린 거지. 여봐라, 맥주와 포도주를 더 가져와라. 술값은 내가 낼 테니! 모자라면 내 불알을 떼다 팔겠다! 마시고 죽자!”

목욕탕 주인이 부지런히 술과 고기를 날랐다.

오가는 음담패설과 홍소 속에서 술판이 점점 더 무르익었다. 밖에서는 불에 달군 돌에 물을 끼얹어가며 사우나를 즐기는 손님들이 왁자하게 떠든다. 여자들은 웃고 있다.

한참 술을 마시던 중에 로트가 옆을 보니 카이렛이 울고 있다. 이터도 훌쩍훌쩍 운다. 술을 즐기지 않는 로에란그린은 향료 포도주를 다섯 잔째 마셨다.

맥주 거품과 찌꺼기가 윗입술에 묻은 로트는 두 손으로 잔을 들고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카이렛의 붉은 얼굴이 커졌다, 작아졌다, 근접했다, 멀어졌다 했다. 동그란 파란 눈은 네모에서 세모로 찌그러졌다, 펴졌다 했다.

“로트, 솔직히 털어놔 봐.”

카이렛이 젖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고서 꼬인 혀로 물었다.

“이젠하르트의 창이 첫판에 자네 모가지를 쳤을 때 기분이 어땠어?”

“죽는구나 싶었지.”

“많이 아팠어?”

“말도 마.”

“난 자네가 죽은 줄 알았어.”

저녁 종이 칠 무렵에 로에란그린은 주인이 새로 내온 술통을 돌려보냈다.

인사불성인 카이렛과 이터는 잠이 들었다.

시종을 불러 술판을 정리하게 한 로에란그린은, 목욕통 안에서 멍하니 맥 놓고 있는 로트를 불렀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자네 집으로 갈까?”

“어림없는 소리! 지가 도대체 뭔데?”

이때 카이렛이 눈을 번쩍 뜨고서 소리쳤다. 가라앉았던 얼굴이 금세 빨개진 그는 벌거벗은 채 로트의 목욕통에 달려들었다.

“이젠하르트, 이 못된 놈! 지가 뭔데 맘대로 남을 추방해?”

“……. 카이렛.”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 건데?”

카이렛은 두 뺨에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그딴 게 패자의 맹세냐. 차라리 죽여 버리지! 냉혹한 개자식! 로트, 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 으흑흑.”

카이렛의 곡소리가 구슬프게 울리자 목욕탕 시종들이 안을 훔쳐보다 저희끼리 쑥덕대며 나갔다.

로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로에란그린은 카이렛을 위로했다.

어느새 잠에서 깬 이터는 욕조 통을 두들겨 이목을 모았다.

“로트, 차라리 잘됐어. 이번 일을 전화위복으로 삼아서 나랑 볼로냐로 떠나자. 볼로냐에서 힐데가르트를 쏙 빼닮은 세탁부 처녀랑 실연의 상처를 달래는 거야. 아님 이젠하르트를 닮은 빵가게 직공 녀석은 어때?”

“닥쳐! 지금 농담이나 할 때야? 자넨 언제든 여기 오갈 수 있지만 로트는 평생 고향에 못 돌아온다고!”

로에란그린이 화를 내는 카이렛을 위로했다.

“아직 추방 기한이나 날짜가 확정되지 않았어. 그동안 우리가 영주님께 간곡히 청원을 드려보자. 어쩌면 기한을 줄일 수 있을 거야.”

“아니, 절대 안 줄여주실 거야.”

카이렛이 받아쳤다.

“영주님은 로트가 오늘 죽기를 바란 거야. 다들 그랬지. 한때는 로트한테 실컷 술과 고기를 얻어먹고 형제니 우애니 했던 놈들도 피에 굶주린 승냥이처럼 이젠하르트를 응원했어. 영구 추방이라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난 이젠하르트가 처음부터 싫었어. 놈이 귀향하자마자 민심이 흉흉해지고 불행이 몰려왔어. 한동안 잠잠했는데 로트도 발광이 났어. 게다가 폭풍우에 벼락까지! 그때 종탑도 부서졌잖아. 언제부터 이 도시에 흉조가 들고 시끄러워진 줄 알아? 바로 올여름부터야. 도적 기사들이 사방에서 활개를 칠 무렵에 이젠하르트가 홀연히 귀향했어. 놈이 재앙을 몰고 온 거야. 이제 곧 우리 고향에도 무시무시한 재앙을 몰고 올 거야. 쳇, 누구든 그놈을 몰래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차라리 나를 죽여.”

이때 이터가 뜬금없이 껴들었다.

“올 봄에 로트랑 힐데가르트가 우연히 성에서 마주치게 한 사람이 나거든.”

이터는 제 모자에 목욕물을 끼얹고서 히죽 웃었다.

“사실은 사소한 호기심이 발단이었어. 콘드비라무어스랑 내기를 했거든. 저놈이 원수의 딸하고도 과연 사랑에 빠질지 궁금했어. 한 방탕아의 무분별한 애욕과 정열의 실체를 캐내고 고약한 운명의 희롱도 실험해보고 싶었달까. 뭐, 그런 학구적인 호기심에서 내기한 건데…….”

역시 네놈의 농간이었다며 카이렛은 이터를 때려눕히고 올라타서 목을 졸랐다. 벌거숭이의 두 몸뚱이가 맨바닥에 흘러넘친 목욕물을 튕겨내며 한 덩어리로 뒹굴었다.

사람들이 문밖에 모여들었다. 고함과 비명, 욕설로 난장판이 된 방안에서 로트는 고개를 숙이고만 있다.

한참 후에야 난투극이 끝났다. 세 귀공자는 제풀에 녹초가 돼 바닥에 드러누웠다.

로트는 로에란그린을 일으켜 앉히고, 이터의 터진 코피를 닦아주고, 마지막으로 카이렛을 일으켜 앉혀서 어깨를 감싸 안고 울지 말라고 위로했다. 이어서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오늘 초스트에서 패했지만 덕분에 다른 소중한 행복을 얻었어. 자네들의 우애와 신의를 거듭 확인했고, 현세에서 영원에 이르는 계단을 오르나 싶었는데 운 좋게도 새 생명까지 얻었지. 새 출발의 기회를 얻은 거야.”

“그딴 게 무슨 소용이야? 영구 추방이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나는 이미 신성한 패자의 맹세를 했어. 자네들의 우애와 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 의무를 수행해야 해. 영구 추방이 너무 가혹하다면 그건 이젠하르트가 아니라 내 탓이야.”

어느새 저녁의 제2종이 쳤다.

목욕탕 손님은 전부 귀가했고 목욕탕도 문을 닫았다.

네 귀공자는 귀빈실에 남아서 술판을 이었다. 카이렛과 이터는 맥주통 꼭지 아래서 입을 벌리고 마시다가 기절했다. 로에란그린도 오랜만의 과음으로 잠이 들었다.

로트는 옷을 입고 세 귀공자의 이마에 입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

“로트.”

문가에서 뒤돌아보니 로에란그린이 깨어 있었다.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어디로 가려고?”

“잠깐 바람을 쐬고 올게.”

“야경꾼을 조심해. 오늘은 달이 밝군.”

“그래.”

“같이 갈까? 자네 오늘 꽤 많이 마셨잖아.”

“괜찮아.”

“검은 숲에 가는 건 아니지?”

“아냐. 곧 돌아올게.”

로트는 로에란그린을 안고서 뺨에 입 맞췄다. 잠이 든 카이렛과 이터에게도 다시 입맞춤하고서 밖으로 나갔다.

밖은 해가 저물기 직전이었다.

로트는 목욕탕 후문으로 나와서 발 닿는 대로 걸었다. 도중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 멀리 성채와 교회의 무너진 종탑이 핏빛 노을을 배경으로 검붉게 솟아 있었다.

수백 마리의 까마귀 떼가 수목원 위쪽 하늘에서 군무를 펼쳤다. 잘 곳을 찾아 수십 마리씩 숲에 내려앉으며 밀려왔다 밀려가는 모습은 범선의 뒤를 쫓는 거대한 파도 같았다.

로트는 계속 걸었다. 술과 눈물로 붉게 달아올랐던 뺨이 찬바람을 맞아 차가워졌다. 몽롱했던 머리도 맑아졌다. 더운 몸뚱이에선 취기가 빠져나갔다. 땀과 술로, 눈물로 씻어낸 몸뚱이가 개운했다. 털갈이를 한 새처럼 심신의 고통과 가책이, 슬픔이 정화되고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승부를 창으로 결판낸다. 이 얼마나 명예롭고 화끈한 방법이냐.’

그는 생각했다.

‘나 같은 개자식에게도 명예로운 속죄의 기회가 주어지고 단 한 번에 결판을 냈으니 속이 후련해. 그 무서운 장창으로 이 뱃속의 집요한 불덩이를, 악마의 욕망을, 방종한 정열을 깨끗이 찔러 죽였어. 피를 한 동이는 뽑아낸 듯이 시원하구나. 숨통마저 끊겼다면 좋았겠지……. 이젠하르트, 너는 지금 축배를 들고 있을까. 나 또한 너를 위한 축배를 들고 싶다. 그리고 못난 나를 위해서는 내 쓰라린 눈물로 채워진 고배를…….’

한때는 명예회복과 복수라는 망령에 사로잡힌 이젠하르트를 비웃었지만, 자신이야말로 흰둥이 수사슴의 망령에 놀아난 바보라고 로트는 생각했다. 그 수사슴의 망령이 다시 속삭였다. 마음의 신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들려왔다.

'내일 당장 떠나자. 보따리 하나만 챙겨서. 작별의 고통은 짧고 뜻밖일수록 좋아. 친구의 눈물은 족쇄요, 포옹은 결박이야. 저 바깥세상은 무법의 검은 숲. 하지만 반드시 떠나겠다. 속죄에 대한 염원과 나의 맹세가 진실함을 이젠하르트에게 전해야 한다. 새벽에 신부님을 만나고 곧바로 떠나자.'

기꺼이 피앙세를 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고통과 슬픔을 모험과 위험으로 잊고 싶은 충동으로 이런 결정을 내리자, 자신의 무모함을 인정하면도 원기가 되살아났다.

‘동굴로 가자. 거기서 은자가 되자. 물냉이랑 이끼를 캐먹고 매 한 마리를 기르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이 오뇌와 눈물도 말라버리겠지. 아, 제발 그랬으면…….’

어느새 주위가 암흑으로 덮였다. 반딧불이 스러지듯 집집 창가에 켜둔 등잔불도 하나둘씩 꺼졌다.

등잔불이 야경꾼의 호롱불을 연상시키자 로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간통행은 금지다. 체포되면 재판을 받는다. 이렇게 달 밝은 밤에는 밤도둑도 자체휴업하리라.

‘담이 이토록 작은데 어떻게 밤도둑 노릇을 했냐.’

허탈한 쓴 미소를 품고서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상념을 떨쳤더니 주변 풍경이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문득 제가 어디 있는지 깨달은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벨데케 가가 멀지 않았다. 그 인근에 있는 골목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불 켜진 창문이 보인다.

심장이 창자 쪽으로 내려앉음을 느끼며 골목을 재빨리 더듬어 나갔다.

‘제기랄! 담은 작을지언정 습관은 무섭도록 정직하군.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

이때 멀리서 탁탁탁탁, 성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로트는 뛰었다. 담은 작지만 두 다리가 알아서 움직였다.

그러자 야경꾼도 고함치며 쫓아왔다.

“서라!”

‘빌어먹을.’

“꼼작하지 마라! 서라니까! 네놈이 누군지 알고 있어. 집까지 쫓아갈 테다!”

야경꾼이 내지르는 고함이 커질까 두려워서 로트는 도주를 포기했다. 집집을 다 깨울 수는 없다. 야경꾼을 설득하든가 얼굴을 봤을 리 없으니 여차하면 때려눕히고 튀는 수밖에.

야경꾼은 도망자가 서버리자 같이 멈췄다. 달빛이 모자 위에 솟은 뾰족한 깃털을 비췄다. 사나운 콧바람 소리도 들려왔다.

“이 녀석! 왜 도망갔지?”

“……. 탐파니스?”

“시끄러워! 네까짓 게 왜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아, 탐파니스 너였구나.”

로트는 배 속이 텅 빌 정도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목소리가 다른데도 추격자가 이젠하르트인 줄 알았다.

육감이 그랬다. 아무런 근거 없이 그랬다. 꼭 한 번은 오늘 밤 그와 마주칠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이 어둠과 괴괴한 달빛, 고요, 추격과 도주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으리라.

로트는 탐파니스에게 다가섰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기억이 까마득했다.

“오랜만이구나, 탐파니스. 반가워. 얼마 만이지?”

“…….”

“그런데 밤에 왜 돌아다녀? 빨리 집으로 돌아가.”

대답이 없어서 로트는 더 가깝게 다가섰다. 이상한 냄새가 확, 풍겼다.

“이게 무슨 냄새야? 너, 술 마셨어?”

“누가 술을 마셔? 내가 너 같은 주정뱅이냐?”

“취해서 돌아다니다니 별일이군.”

“시끄러워! 넌 오늘 종일 어디에 있었어?”

“난 시합장에 있었어.”

“이 바보 천치야! 누가 그걸 몰라? 끝나고 누구랑 있었냐고?”

“쉿. 목소리를 조금만 낮춰다오. 이터랑 있었어. 카이렛이랑 로에란그린도 함께.”

“닥쳐! 조금 전에는 어디로 내빼던 중이었지?”

“집에 가던 중이었어.”

“거짓말! 여긴 니네 집 가는 길이 아니잖아.”

“네가 갑자기 쫓아와서 야경꾼인 줄 알고 길을 잘못 든 거야. 넌 이 밤중에 왜 돌아다녀? 잡히며 재판을 받는 걸 몰라?”

“웃기지마! 넌 딴 데로 가고 있었잖아. 내가 다 지켜봤어!”

“……. 나를 찾았어? 용건이 있으면 힌츠한테 말하지 그랬어. 아님 목욕탕으로 부를 걸 그랬군. 거기 계속 있었는데.”

“미쳤어? 내가 거길 가게? 내가 네 녀석 꽁무니만 따라다니는 머저리냐!”

탐파니스의 고함에 맑아졌던 머리가 지끈댔다. 더 시급한 문제도 있었다. 근처에 사는 개가 짖고 창 너머의 등잔불이 하나둘씩 켜졌다.

“내 말이 맞지? 이 바람둥이야! 넌 또 우리 숙부님-……. 으압!”

로트는 탐파니스의 입을 막고 모퉁이 뒤에 숨었다.

탐파니스는 몸부림치며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몸뚱이를 꽉 껴안은 로트는 제발 조용히 해달라고 애걸하고 빌다가 그를 놔줬다.

“카이렛이 그러던데 넌 나를 찾았었다며. 무슨 일인데?”

“네, 네까짓 게!…….”

“탐파니스, 제발 목소리를 낮춰. 야경꾼이 올 거야.”

애원이 너무나 간절해서 탐파니스는 입을 닥쳤다.

로트는 가슴을 쓸어내리고서 난폭한 고양이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다오. 지금은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뭐라고? 날 무시하는 거냐?”

“절대 아냐. 지금은 밤이 너무 깊었잖아. 야경꾼이 돌고 있어.”

“이 바람둥이야! 넌 날 속였어. 날마다 속이고 거짓말을 했어.”

“난 거짓말 한 적 없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흥, 정말 그럴까?”

“널 속인 일이 있다면 용서해줘. 본의는 아니었어……. 다정한 탐파니스, 미안하지만 이만 가봐야겠다. 조심해서 가라. 주님의 가호를!”

“거기 서! 넌 절대 못 가!”

“이 팔을 놔다오. 왜 자꾸 이러는 거냐?”

“못 간다니까! 난 이제 두 번 다신 안 속아.”

로트의 앞을 막아선 탐파니스는 그의 오른팔을 집게처럼 잡고 매달렸다. 술 냄새는 독했고, 혀도 만만찮게 꼬여 있었다.

생트집으로 울분을 푸는 주정꾼한테 된통 걸렸다는 생각에 로트는 초조해졌다. 화가 풀리려면 오래 걸릴 테고 탐파니스의 성격상 온 도시를 깨울 것이다.

“집으로 그만 돌아가. 이러고 돌아다니면 위험해. 그럼, 안녕. 주님의 가호를!”

“어딜 또 혼자 내빼려고? 에잇!”

탐파니스는 로트의 팔을 콱 잡았다.

“너, 내 생일에 왜 안 왔어?”

“생일?”

잡힌 팔을 빼낼 궁리에 여념이 없던 로트는 되물었다.

“생일이었어? 몰랐어. 축하해. 파티는 어땠어? 못 가서 미안해.”

“멍청아! 내 열일곱 번째 생일에 왜 안 왔냐고?”

열일곱 번째라는 말에 어리둥절한 로트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3년 전 얘기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땐 아마 네가 초대장을 안 보내서 못 갔을 거야.”

“내가 미쳤냐? 너한테 초대장을 보내게? 멍청아! 알아서 왔어야지!”

맹렬한 비난이 콩이 쏟아지듯 쏟아졌다.

그를 도발해서 체포를 당하느니 참고 달래서 빠져나갈 기회를 노리는 로트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자 탐파니스는 입을 닥쳤다. 쥐 잡듯 잡았더니 속은 시원했지만 로트에게서 한숨이 들린 것이다. 땅을 파고 우물을 파고도 남을 한숨이.

“흥. 꼴좋군. 넌 이제 곧 추방을 당한다지?”

“그래.”

몹시 풀 죽은 음성이 어둠을 타고 흘러왔다.

탐파니스는 콧방귀를 꼈다.

“흥. 엄청 멀리멀리 쫓겨나겠군. 평생 못 돌아올걸. 영구 추방을 당할 거니까.”

“알고 있어.”

“쳇.”

“…….”

“순순히 떠날 거야?”

“그래야지.”

로트는 슬픈 목소리로 답했다.

탐파니스는 심술궂게 웃었다.

“떠나기 싫지?”

“……. 탐파니스, 그동안 너한테도 미안했어. 우린 어릴 때부터 늘 다투기만 했지. 수도원에서 돌아온 후에도 난 너랑 진심으로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 슬퍼. 그래도 너를 위해 기도할게. 내가 날 미워하지 않게 되고, 언젠가는 우리가, 저세상에서든 어디에서든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사이좋게 지내기를 간절히 기도할게. 넌 조금 난폭하지만 난 널 좋아했어. 이 마음만은 거짓이 아님을 알아다오.”

어둠속에서 탐파니스의 벌건 얼굴이 더 벌게졌다.

“정말이야?”

“응?”

“넌 날 정말 미워하지 않았어? 날 정말……. 좋아했냐고?”

“그럼. 좋아했고말고. 내가 왜 널 미워하겠냐. 어릴 때 네가 던진 돌에 맞을 때마다 난 많이 울었지. 너랑 정말 형제처럼 지내고 싶었는데 날 너무 미워해서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

이 대답이 굉장히 진솔했으므로 탐파니스는 이상한 신음을 지독하게 흘렸다.

어둠 때문에 그 야릇한 표정을 볼 수 없는 로트는 여차하면 반격의 고함을 막으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탐파니스는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대신 문득 로트한테 바짝 다가섰다. 달착지근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내가 비밀을 말해줄까?”

탐파니스가 얼굴이 벌건 사탄처럼 속삭였다.

“그럼 넌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될걸.”

“무슨 말이야?”

“넌 이제 추방을 당할 거야. 베르나르 신부님이 배상금으로 합의를 보게 하자고 청원하셨지만 영주님은 자기 입장이 난처하다고 했어. 이젠하르트는 쇠고집이니까. 어쨌든 넌 날짜가 정해지면 추방당하는 거야. 근데 그걸로 끝이 아냐. 이젠하르트가 왜 널 살려둔 줄 알아? 낙마시켜서 목을 부러뜨려 죽일 수도 있었지만 널 봐준 거라고. 왜라고 생각해?”

“그건 내가 운이 좋아서…….”

“바보, 멍청아! 그 녀석은 널 죽이려는 거야! 외국으로 쫓아낸 후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널 살해할 작정이지. 그래서 널 추방하는 거야.”

“이젠하르트가……. 그렇게 말했어?”

“그 자식이 실토했냐고? 천만에.”

탐파니스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 녀석은 속이 새카만 까마귀야. 왜가리 깃털을 붙인 음흉한 까마귀라고! 절대 속을 내비치지 않아. 이젠하르트는 엄청난 위선자야. 그 속을 뒤집어 놓으면 구역질이 나서 다들 달아날걸. 그 녀석은 늘 널 죽일 생각만 하고 있어. 숙부님이랑 숙모님도 그 녀석이 수도원으로 쫓아낸 거야. 힐데가르트 그 못생긴 계집애도 그 녀석이 자청해서 성으로 보낸 거야. 너희 집 노인네가 용병을 몰고 온다는 소문이 났을 때 백작이랑 합세해서 너랑 이 도시를 쓸어버릴 심산이었지. 그 자식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아. 복수를 위해선 음모와 배신을 마다하지 않지. 이 도시의 유대인도 다 죽여 버리고, 그놈들 재산이랑 너희 집 재산도 모조리 가로챌 계획이었어.”

“탐파니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내가 전부 직접 캐낸 사실인데?”

“그런 소문이 있긴 했지. 하지만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이야.”

“이 바보 멍청아! 그러니까 넌 날마다 당하는 거야. 이젠하르트가 네 낯짝을 그 모양 그 꼴로 후려 팼는데도 아직도 모르겠냐? 그런 놈이 명예의 기사라고? 웃기지 마. 그놈은 도적기사나 마찬가지야!”

“무슨 얘긴지 난 모르겠군.”

“이 바보!”

“그만 돌아가렴. 나도 갈게. 안녕.”

“앗! 저게! 서라! 거기 서라! 이 추잡한 바람둥이야!”

탁탁탁탁-

소란한 발걸음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돌담 밑에서 튀어나온 개가 달아나는 그림자에 대고 짖었다. 추격하고 도주하는 발소리가 골목골목을 누볐다.

“서라! 내가 널 그냥 둘 줄 알아? 죽인다!”

추격자의 고함이 뚝 끊겼다.

무작정 내달리던 로트는 어느 골목 모퉁이에 숨었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발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하아, 간신히 따돌렸군.’

한참 후에 그는 골목에서 나와 천천히 걸었다. 호흡을 가라앉혔는데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탐파니스의 카랑카랑한 음성이 뇌리에서 울렸다.

「바보 멍청아! 그 녀석은 널 죽이려는 거야! 외국으로 쫓아낸 후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널 살해할 작정이지. 그래서 널 추방하는 거야!」

‘나를 죽인다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어야겠어. 이렇게 도망 다니다 또 밤도둑으로 몰려 잡히느니 그편이 나아. 가슴이 불쾌하게 뛴다. 얼른 집으로 가서 보따리를 싸자……. 그런데 여긴 어디지?’

달빛을 찾아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길을 따라 들어선 곳은 생소한 골목이었다. 달은 뾰족한 박공지붕에 가려 있었다. 골목이 너무 비좁아서 방향을 가늠할 종탑마저 보이지 않았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어쩐지 오싹해.’

“이 녀석!”

“……!”

“이 추잡한 바람둥이 녀석!”

갑자기 고약한 구취가 덮치며 멱살이 휘어 잡혔다.

“남의 집 뒤뜰에서 왜 알짱거리냐? 에잇! 죽어라! 이 간통꾼! 우리 집 암탉을 노리고 왔지? 그년이 널 여기에 숨겼냐? 오입쟁이 년놈들! 그년 젖퉁이랑 네놈 불알을 잘라서 구워먹자! 에잇! 죽어라! 억, 이놈이!……. 으헉!”

로트를 폭행하려던 사내는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벌러덩 자빠졌다. 악귀처럼 질러대는 고함에 인근에 사는 개들이 동시에 짖어댔다.

얼결에 사내를 때려눕힌 로트는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둠 속에서 육감으로만 더듬어 나가자 몸뚱이는 사라지고 심장의 고동만 쿵, 쿵 울렸다. 악몽 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취기 때문이거나 사내한테 관자놀이를 세게 얻어맞아서 그러리라.

“으아악!”

“……!”

이때 어디선가 비명이 어렴풋이 들렸다.

로트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렸다. 사위는 고요했다. 비명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헛것을 들었나.’

그는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봤다.

이때 비명이 다시 터졌다.

“내 놔! 도둑놈아! 내 놔! 돌려줘! 검은 괴물이 내 보물을 훔쳐간다! 깅코! 저 녀석을 물어! 도둑놈이다! 도둑 잡아라!”

“컹컹! 컹컹!”

“내놔! 내 깃발이야! 우아악!”

로트는 비명을 쫓아서 달렸다. 저 멀리 달빛 아래에서 그림자 두 개가 엎치락뒤치락 엉켜 있다. 기다란 그림자랑 엉켜 있던 작은 그림자가 바닥에 픽, 쓰러졌다.

이 순간 발소리를 들은 긴 그림자가 로트 쪽을 돌아보았다. 달빛이 그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저놈은!’

달려가던 로트는 무심코 멈춰 섰다. 스르륵 일어선 괴한은 로트의 반응을 기다리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때 작은 그림자였던 어린애가 팔을 꿈틀댔다. 괴한은 몸을 돌려서 달아났다. 충동적으로 그 뒤를 쫓던 로트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를 가로막은 작은 손이 다리를 꼭 붙들었다.

“얘야, 손을 놔! 저놈이 달아난다!”

“으……. 으으……. 사람 살려…….”

“제기랄……. 피가 많이 흐르네.”

“내 깃발이야……. 내 깃발이야…….”

“얘야, 어디를 다쳤어? 넌 어느 집 녀석이냐?”

쓰러진 어린애는 바닥에서 기어가며 몸부림쳤다.

로트는 그 몸뚱이를 더듬었다. 가느다란 팔뚝에서 뜨끈한 피가 흘렀다. 이 빠진 늙은 개는 꼬리를 내리고 킹킹대며 주인의 얼굴을 핥았다.

어린 한스는 로트의 팔을 움켜잡고 눈을 부릅떴다.

“으으……. 내 깃발……. 돌려줘……. 내 보물……. 으.”

“얘야, 정신 차려라. 팔이 찔렸는데 또 어디를 다쳤지?”

“으, 내 깃발 내놔! 내 깃발이야!”

“그놈 얼굴을 봤어? 놈이 뭘 훔쳤는데? 깃발이라니?”

로트에게 매달렸던 어린 한스는 문득 로트를 알아보더니 공포에 전율하며 부르짖었다.

“허억!……. 포, 포겔바이데다! 포겔바이데!”

얼마 후 짙은 안개가 낀 새벽.

흑돼지가 광장으로 나왔다. 통구이에 알맞게 자란 놈은 침이 흐르는 주둥이로 땅을 후비며 도토리를 찾아 골목골목 쏘다녔다. 여기저기서 새벽닭이 울고 등판이 이슬에 젖은 도둑고양이는 지붕에 오도카니 앉아서 닭을 노렸다.

흑돼지는 주변을 살피며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안개에 젖어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을 파헤치다 어느 집 앞의 가로로 나갔다. 어디선가 도토리 냄새가 났다.

흑돼지는 냄새를 쫓아서 뛰어갔다. 땅바닥에 검은 튜닉을 입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흑돼지는 젖은 튜닉 자락을 주둥이로 들춰보았지만 허사였다.

냄새는 좀 더 위쪽에서 났다. 흑돼지는 묵직한 머리통을 주둥이로 밀어냈다. 그러자 고개가 힘없이 젖혀지고 검은 후드 아래로 푸르죽죽한 낯이 드러났다. 흑돼지는 꽤액, 소리를 질렀다.

새벽부터 또 광장을 헤매던 돼지치기가 비명을 듣고 흑돼지를 찾아냈다.

“흑돼지야, 거기 서라!”

“꽤액!”

“이 녀석! 잡아먹는다! 서라!”

흑돼지는 두두두두 땅을 울리며 내뺐다.

잠이 덜 깬 돼지치기는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막대기를 휘두르며 돼지를 쫓았다.

“우악!”

그러다 헛발질을 하고 넘어졌다. 축축한 뭔가가 막대기를 놓친 손에 닿았다.

“아우! 요놈의 돼지 새끼!……. 어엉? 이게 뭐지?”

돼지치기는 벌떡 일어나 눈을 비볐다. 이 순간 안개가 물러가며 발밑에서 자길 쳐다보는 푸르죽죽한 얼굴이 드러났다.

“우아악! 사, 사람 살려!

혼비백산한 돼지치기는 광장으로 내달렸다.

“시, 시체다!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

힌츠는 자다 일어나서 오줌을 싸러 나갔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어욱! 깜짝이야 이 꼭두새벽에 어딜 가세요?”

주인이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나가서 힌츠는 밖으로 쫓아나갔다.

“나리! 어디에 또 가시냐고요? 어젯밤에도 오밤중에 오시더니 벌써 보따리를 싸서 도망가시는 겝니까? 나리!……. 어이쿠, 저 개망나니 좀 보게. 집안을 다 말아먹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추방이라! 쳇, 그럴 줄 알았지. 그냥 뒈지지 않고! 주인 나리 얼굴을 무슨 낯으로 본담. 돌아오시면 날 죽이실 게다! 이 충직한 힌츠의 목을 매달겠지. 에잇, 퉷!”

힌츠의 고함을 뒤로한 로트는 중앙 광장으로 향하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얼굴이 희다 못해 푸르고 음침했다. 광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그는 젖은 풀을 뜯어 얼굴을 문질렀다. 찬 이슬과 알싸한 풀 내음이 정신을 맑게 했다.

문득 그는 제 옷차림을 알아채고 놀랐다. 망설이던 그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대신에 검은 후드를 깊숙이 내려썼다. 광장에는 안개가 짙었다. 저 멀리 위를 올려다보니 부서진 종탑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였다.

두 목적지를 두고 고민하던 그는 벨데케 가로 향하는 지름길을 택했다.

이때 발소리와 고함이 어렴풋이 들렸다.

로트는 골목으로 뛰어들어 벽에 몸을 붙였다.

“시체다! 사람이 죽었다!”

돼지치기는 광장을 가로지르며 내달렸다. 집집에서 등불이 켜지고 창문이 열렸다.

“시체예요! 사람이 죽었어요! 칼에 찔려 죽었어요!”

망토나 짧은 튜닉으로 몸을 휘감은 사람들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한둘씩 밖으로 나온 그들은 광장 한 귀퉁이에서 떼를 이뤘다.

누군가 물었다.

“누가 죽었다는 거야?”

“주정뱅이 녀석 아닐까.”

“칼에 찔려 죽었다잖아.”

“어디래?”

“글쎄……. 저기 누가 오는군. 어이, 여봐요, 어디서 오는 길이요?”

“시체를 보고 왔어요.”

“어디 있소?”

“벨데케 가에 있어요. 거기 집 앞 가로에 드러누워 있어요.”

“가봅시다.”

사람들은 안개를 헤치며 벨데케 가로 몰려갔다.

벨데케 가에서는 출입구인 홀 앞에 면한 가로에 구경꾼이 울타리를 치고 모여 있었다. 그 안쪽에서 벨데케 가의 문지기가 구경꾼을 쫓느라 고함쳤지만 시신을 직접 보려고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자는 누구지?”

구경꾼 중 한 명이 검은 튜닉을 입은 시신을 가리켰다.

“누가 알아? 저런 작자가 한둘이어야지.”

“얼핏 봤을 땐 그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아니군.”

“포겔바이데 말야?”

“그래. 못 보던 놈이군.”

“차림새만 봐선 방랑 설교사야. 여기 사는 놈은 아냐.”

“흠.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모르겠군.”

“왜 옷이 흠뻑 젖었지?”

“안개 때문이겠지.”

“몸뚱이도 푹 젖었어. 살가죽은 물에 불었고.”

“익사했나?”

“익사한 놈이 제 발로 걸어와서 남의 집 앞에서 제 몸뚱이를 찌르고 드러누울까.”

“그렇군. 이상한데.”

“저리들 가쇼! 저리들 가! 새벽부터 남의 집 앞에서 재수 없게 쑥덕대나? 물러들 가시오!”

벨데케가 문지기는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자 그들을 쫓아냈다.

별다른 놀라움 없이 호기심에서 칼에 찔린 시신을 보러왔던 구경꾼은 시체가 방랑 설교사임을 화두로 삼았다.

평범한 시신은 별 구경거리가 아니다. 살인과 폭력이 일상인 시대였다. 보복 살해, 강도 상해, 아사자의 시신, 처형된 범죄자의 시신을 보기란 일상이었다. 비렁뱅이나 떠돌이, 이웃 도시에서 원정 온 거지가 주로 그 해당자였다. 귀족이거나 성직자일 경우는 예외지만.

문지기가 애를 썼는데도 구경꾼 무리가 계속 불어났다. 여기저기서 다툼이 벌어졌다.

“이봐, 뭐야? 밀지 마.”

“잠깐 비켜봐. 나도 좀 보게. 설교사가 죽었다며?”

“나도 아직 못 봤어.”

로트는 뒤에서 구경꾼 틈으로 파고들었다. 옆으로 밀린 사람들이 돌아볼 새도 없이 재빨리 치고 나가서 땅바닥에 아무런 덮개도 없이 드러누운 시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뒤로 빠졌다.

때마침 앞으로 치고 나오던 한 사내가 소리쳤다.

“억, 이보쇼! 내 발을 밟았어!”

“미안해요.”

“젠장. 발가락이 부러졌나 봐.”

“잠시 지나갑시다.”

“그냥 내빼려고……. 엇, 당신은?”

“비켜요!”

“억!”

로트는 서둘러서 벗어났다. 낯빛은 시체보다 더 푸르렀고 입술은 와들와들 떨렸다. 후드 아래서 번쩍이는 눈은 놀라움과 두려움, 혼란, 의혹 따위가 뒤섞여 있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나.’

동녘의 햇살이 안개를 서서히 몰아냈다.

벨데케 가에선 문지기 외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구경꾼이 계속 불어났다.

로트는 전에 이젠하르트에게 추격당했던 골목에 몸을 숨겼다. 거기서 구경꾼을 엿보고 말소리를 엿들었다. 한편으론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신부님께 가자. 여긴 위험해.’

중앙 광장으로 달려가니 또 한 무리의 사람이 벨데케 가 쪽으로 몰려갔다. 몇몇은 안개 속에서 튀어나와 바로 옆을 지나갔다.

로트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뛰었다.

누군가 전방에서 튀어나왔다.

“이 녀석! 꼼짝하지 마라!”

“……!”

소스라치게 놀란 로트는 상대를 알아보고 한숨과 신음을 한꺼번에 뱉었다.

“탐파니스!”

탐파니스는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봤다. 두 뺨이 밀랍처럼 하얗고 눈동자는 독이 오른 고양이의 그것 같았다.

로트는 뒤를 돌아보고 그의 팔을 잡았다.

“아직도 술이 덜 깼구나. 빨리 집으로 돌아가.”

“흥! 이번에는 못 빠져 나갈걸.”

탐파니스는 방향을 튼 로트의 앞을 냉큼 가로막고 섰다.

로트는 화를 냈다.

“왜 또 이래?”

“날 또 따돌리고 도망쳐 보시지.”

“이러지 마. 난 지금은 널 상대할 여유가 없어.”

“정말 그럴까?”

탐파니스는 입술을 비틀며 이상하게 웃었다.

“내가 곧장 영주님께 달려가지 않고 네놈을 먼저 찾아낸 걸 고마워 해야 할 텐데.”

“……. 무슨 말이야?”

탐파니스는 입술을 비죽대며 히죽 웃었다.

“시치미 떼도 소용없어.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비켜다오. 나중에 얘기하자.”

“난 다 봤어! 어젯밤 똑똑히 다 봤지. 네 녀석이 지난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꽉 깨문 로트의 입술에서 기묘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창백한 낯빛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꼴을 보고 탐파니스는 베시시 웃었다.

“내 생각이 맞았군. 넌 또 도망치는 중이지? 잘 생각했어. 도망치는 게 좋을 거야. 붙잡혔다간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그땐 네놈 시체를 추방시키겠군.”

“탐파니스, 부탁이 있어.”

“흥. 뭔데?”

“나를 가게 해다오. 지금은 너한테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나중에 얘기하자. 나중에 꼭…….”

“가고 싶으면 가. 도망치고 싶으면 가보시지. 먼저 날 죽이고 말야.”

“빌어먹을!”

“앗! 저 녀석을 잡아라!”

탐파니스를 밀쳐내고 달아나려던 로트는 몇 발짝 못 가 서버렸다. 탐파니스의 고함에 분수대 뒤에서 졸개들이 뛰쳐나와 그를 에워쌌다. 모두 허리에 찬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화가 치민 로트는 탐파니스에게 소리쳤다.

“이게 또 무슨 짓이냐? 그만둬! 난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넌 날 배신했어. 날 배신하고 슬프게 했어. 널 죽을 때까지 용서하지 않을 거야.”

“탐파니스! 제발 나를 가게 해다오.”

“닥쳐! 넌 아무 데도 못 가! 넌 미친 멍청이야! 차라리 그놈한테 도움을 청해보시지?”

“탐파니스, 제발!”

“닥쳐! 이 추잡한 바람둥이야! 이젠하르트를 불러다 줄까. 네가 궁지에 몰렸는데도 그놈은 어디에 있지? 그딴 녀석한테 홀려서 날 속이고 배신하다니! 앗! 달아난다! 서라! 널 죽일 거야! 꼭 죽일 거야! 저 녀석을 잡아! 죽인다!”

이때 누군가 탐파니스 앞으로 뛰어들었다.

“너나 죽어라! 이 빨간 원숭이야!”

“아앗! 이게!”

“카이렛!”

로트가 놀라서 되돌아선 사이, 탐파니스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뒷덜미를 잡아챈 카이렛은 또 한 번 패대기를 치려고 달려들었다.

“이 집요한 원숭이 자식아! 비겁하게 떼거리로 한 명을 공격해? 너나 죽어라!”

“아앗! 이 새끼가 또 방해를 하는군. 이 녀석을 해치워라! 죽여버려!”

“카이렛, 그만 둬!”

칼을 잡아 빼려는 탐파니스의 손을 로트가 잡아챘다. 물러서라는 로트의 고함에 멈춰 선 졸개들은 서서히 원을 좁혔다.

칼을 빼든 탐파니스는 로트를 뿌리치고 옆으로 튀어나갔다.

“죽여라! 카이렛 저 새끼를 먼저 죽여! 술을 처먹고 미쳤다! 에잇!”

“너나 뒈져라! 네 비겁한 낯짝도 오늘로 마지막이야!”

“카이렛! 그만둬! 아, 안 돼!”

“으아아악!”

세 개의 몸뚱이가 동시에 달려들고 칼날이 맞부딪치나 싶더니 째지는 비명이 터졌다.

카이렛을 말리려던 로트는 칼을 움켜쥐고서 서버렸다. 카이렛도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봤다.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진 탐파니스의 양 손가락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렀다.

“나를 찔렀어!”

얼굴이 시뻘게 진 탐파니스는 울부짖었다.

“저놈이 나를 찔렀어! 나는 원수의 칼에 맞아 죽는다!”

“……. 탐파니스.”

“네 녀석이 날 찔렀어! 으아아아, 나는 죽는다!”

복부에서 흐른 새빨간 피가 바닥에 고였다. 그 피를 뭉개며 탐파니스는 몸을 비틀고 숨을 헐떡였다.

카이렛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칼을 떨어뜨린 로트는 그 둘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기 무슨 일이야?”

“사람이 쓰러졌다!”

“저건 포겔바이데 같은데?”

“어디, 어디?”

“검은 튜닉을 입은 놈 말이야. 벨데케 가에서 조금 전에 저 녀석을 봤어.”

“가보자! 억!”

앞을 다투어 달려드는 구경꾼 앞으로 이터가 튀어나와서 고함쳤다.

“저리들 꺼져버려! 잡히면 매질을 할 테다!”

“어엇!”

“어딜 가시려고? 고환을 터뜨려 주랴?”

안개를 뚫고 나타난 이터는 구경꾼을 막아섰다. 이어서 등장한 로에란그린은 탐파니스에게 달려갔다.

탐파니스는 황급히 제 어깨를 감싸 안은 로에란그린을 떠밀며 저리 가라고, 자기는 죽는다고 악을 썼다.

로에란그린은 주저앉은 카이렛의 얼굴을 움켜잡고 물었다.

“카이렛, 어떻게 된 일이야? 카이렛!”

“내가, 내가 저놈을-…….”

“내가 찔렀어.”

뒤에서 로트가 대답했다.

“나야. 내가 탐파니스를 찔렀어.”

“저 녀석이야! 저 원수가 날 찔렀다!”

탐파니스가 바닥에서 버둥대며 울부짖었다.

“난 죽을 거야! 신부님을 불러줘! 난 죽는다! 포겔바이데, 이 원수 놈아! 악마가 너를 데리러 올 거다! 아아아, 난 죽는다! 난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으아아아!”

“빌어먹을, 뭣들하고 섰어? 너희들 이리와!”

이터는 탐파니스의 졸개들한테 소리쳤다.

“탐파니스를 집에 데려가. 의사를 보내줄 테니 빨리!”

졸개들은 탐파니스를 들고 날랐다.

탐파니스는 로트를 향해 끝까지 저주를 퍼붓다 끌려갔다.

이터는 달아나는 구경꾼 셋을 가로막고서 가슴에 칼을 들이댔다.

“그 입을 함부로 나불댔다간 너희 세 놈을 반드시 찾아내 눈알을 찌르고 혀를 잘라낼 테다. 알았나? 알았으면 당장 꺼져!”

구경꾼들은 침묵의 맹세를 하고서 달아났다.

“카이렛, 넌 나랑 가자.”

이터가 말했다.

“로에란그린, 자넨 로트를 사제관으로 데려가. 나머진 내가 처리할게.”

“내가, 내가 찔렀어…….”

로트가 멍하니 중얼댔다.

“내가 탐파니스를 죽였어…….”

“정신 차리고 일어서! 빨리!”

이터는 머리를 움켜쥐고 주저앉은 로트를 일으켜 세워 로에란그린에게 떠밀었다.

“이 녀석을 빨리 신부님께 데려가. 우리 숙부한테 일러바치려고 벌써 성으로 달려간 놈이 있을 거야.”

“로트, 어서 가자!”

로에란그린은 비틀거리는 로트를 잡아끌고 사제관으로 달려갔다.

이터는 만취해서 비틀대는 카이렛을 데리고 광장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떠나자 새빨간 핏자국에 햇살이 내리비쳤다.

광장으로 되돌아온 흑돼지는 곧바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고서 주둥이로 피 냄새를 맡다가 입맛을 다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