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ROMEO MUST DIE (21/33)

9. ROMEO MUST DIE

성백 오스터팅겐이 시합장을 건설한 이래로 무예 시합이 열리는 날이면 남쪽 숲은 구경꾼으로 뒤덮였다. 그들은 시합장의 관람석과 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숲 언저리나 언덕 위, 나무 위에까지- 빼곡히 올라앉아서 아침부터 경기가 시작하기를 고대했다.

그중에는 이웃 마을이나 도시에서 온 농부와 시민, 외국에서 온 상인과 직공도 있었고 무예 시합에 참가한 편력기사만큼이나 국적이 다양했다.

시합장 내부도 다양한 신분의 관객으로 만석이 됐다. 무장한 기병을 거느린 감찰관은 관람석의 질서 유지를 위해 자리싸움을 중재하거나 관람객을 단속했다.

장내에서 울려대는 시끄러운 나팔 취주는 난리 법석을 부추기듯 관람석을 지나서 언덕을 휘돌며 하늘로 울려 퍼졌다. 호전적인 나팔 소리가 정점에 오를 때면 천막에서 밤을 보낸 투사는 군마를 타고서 시합장 입구로 몰려들어 승리와 영예를 기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가 시작한다는 나팔이 울리면 관객은 훌륭한 기사도 정신의 수호자이자 미지의 영웅이 탄생하기를 고대하며 환호했다.

초스트가 예정된 이 날도 남쪽 숲에는 아침부터 수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지난밤부터 가슴을 두근대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던 그들의 속내는 여느 무예 시합과는 달랐다.

어떤 어린 소녀는 꼭두새벽부터 엄마 손에 잡혀 밖으로 끌려나가며 물었다.

“엄마, 갑자기 어딜 가요?”

“잠자코 따라오렴. 재미난 구경을 시켜줄게. 네 아빠가 떡갈나무 위에 명당자리를 잡아 놨단다.”

소녀는 엄마에게서는 답을 듣지 못했지만 또래인 소년이 달려가며 신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소년은 요전 날에 먹구름을 군대로 오인해서 도시를 발칵 뒤집었던 어린 양치기였다.

“구경 가세요! 모두 남쪽 숲으로 얼른 구경 가세요! 오늘은 미친 포겔바이데가 벌을 받는 날이에요! 무시무시한 약탈자가 몰려온다는 소문을 자기가 직접 퍼트렸대요! 새빨간 거짓말쟁이에요!”

소녀가 떡갈나무로 끌려가는 동안, 신분이 높고 운 좋은 관객은 시합장 안에 있는 동서쪽 관람석을 차지했다.

감찰관이 활약해서 장내의 질서가 잡히자 영주와 수행원 그리고 콘드비라무어스가 등장해서 동쪽에 있는 특별관람석에 앉았다.

영주는 이날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낸 직후부터 유난히 위엄을 지닌 모습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는 내심 자신이 내린 결정이 남들에게 어떻게 여겨질지, 즉, 처음에 두 가문이 화해하도록 내린 명을 번복하고 이번 결투를 허락한 이면에 환전상 포겔바이데에 대한 개인적 앙심이 개입되지 않았는지 따위의 의혹이 불거질까 봐 노심초사했기에 그런 의혹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러 권위적인 침묵을 지켰다.

이 시합을 주선한 콘드비라무어스는 등장할 때부터 투구를 쓴 정복자다운 권력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많은 관람객은 그녀의 미모를 찬양하며 두 가문의 오랜 반목을 끝장내 줄 평화의 중재자이자 공정한 승패의 수호자 인양 그녀를 치켜세웠지만, 그녀의 아름답고도 도도한 이마에는 어서 빨리, 가능하면 양쪽 모두의 피를 봤으면 하는 욕구가 엿보였다.

최근에 수도원에서 돌아온 만필요트 백작도 특별석에 착석했다. 그가 벨데게 가에서 열린 연회 이후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이날이 처음이었다.

일반 관객이 그가 갑작스레 출현해서 놀라는 사이, 백작은 몇몇 상급 귀족과 지극히 사적인 태도로 인사를 나눴다. 그중 몇몇은 요사이 비밀리에 혼담이 재개됐다는 힐데가르트를 슬쩍 암시하며 백작을 예비 신랑으로 대접했다.

하지만 금식 기도를 바친 여파 때문인지 예비 신랑의 눈빛이 매우 근엄하고 날카로워서 관객은 그를 보며 엄혹한 성직자나 폭압적인 군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급 귀족과 부유한 상인은 특별관람석 주변, 완만한 경사면에 마련된 일반 관람석에 앉았다. 그들 중에는 이번 시합에 가장 큰 기대를 품은 재력가도 포함돼 있었다. 최근에 자택에서 칩거하던 그들은 일장춘몽이 된 야망과 그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을 바라며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힐데가르트가 불참한 가운데 동쪽 일반 관람석에는 벨데케 일가가 참석했다. 아들이 호출해서 곧바로 수도원을 떠나온 벨데케 내외는 황야에서 사탄을 물리치고 구원과 영생을 얻은 고행자처럼 등장해 관객의 환대를 받았다.

한때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에 굴복해서 아들을 실망하게 했던 벨데케 부인은 이날 튼튼한 암말처럼 옛날의 호전적인 원기를 되찾았다.

병색이 가시지 않은 벨데케는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관객의 손을 꼭 잡고서 오늘이 바로 주님이 공정한 심판을 내리는 날임을 강조했다.

“죽여라! 죽여! 쓸어버려!”

벨데케 내외 옆에는 탐파니스가 자리했다. 두 뺨이 진홍빛 모자처럼 빨간 그는 개장 전부터 목청이 터져라 저런 호전적인 구호를 외쳐댔다.

소란함을 참을 수 없었던 관람객은 감찰관을 시켜서 그를 제지했지만 헛수고였다. 늘 탐파니스 때문에 골치가 아팠던 영주는 최근 그가 술독에 빠졌다는 전언을 듣고 금주를 권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한층 과격해진 탐파니스는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며 “다 죽여 버린다!”하고 소동을 피웠다가 경기장 밖으로 쫓겨나곤 했다.

이렇게 저마다의 사적인 앙심이 팽배한 동쪽 관람석과는 달리 서쪽 관람석을 장악한 분위기는 숙연, 비장, 탄식 그 자체였다.

개장 직후 제일 먼저 등장한 세 귀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이날 그들은 최고급인 플랑드르 산 옷감으로 만든 멋진 의복과 보석으로 치장하고 마치 벌써 승리의 개가를 올린 듯이 자못 씩씩하게 등장했지만 관람석에 착석하자마자 태도가 돌변했다.

카이렛은 손수건으로 눈을 닦거나 아주 사소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내서 자신의 불안과 절망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터는 여느 때처럼 쾌활하게 관람석에 있는 모든 과부에게 일일이 은근한 눈짓을 날렸다. 하지만 나팔 소리가 울리자 기도문을 부르짖었는데 그 태도에 유난스러운 간절함이 담겨 있어서 관객을 놀라게 했다. 게다가 때로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모자를 잡아 뜯고 제 머리를 쥐어박기도 했다.

셋 중에서 오직 로에란그린만은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보였다.

관람석의 질서가 잡히자 관객의 흥을 돋우려고 볼거리가 진행됐다.

주인처럼 갑옷을 입은 영주 수비대의 시종이 멋진 말을 타고 등장했다. 그들은 달리는 말 위에서 창끝으로 바닥의 고리를 집는 묘기를 보여 관객을 즐겁게 했다.

마침내 시합이 열리는 순간이 임박했다. 관람석에 고요가 덮쳤다.

영주는 전례관에게 신호를 보냈다. 전례관은 나팔수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초스트가 시작함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터지며 시합장 북쪽에 있는 문이 열렸다.

“와아아!”

최고조로 높은 함성과 함께 숲의 파괴자가 등장했다. 거친 군마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며 입장한 그는 시합장을 한 바퀴 돌며 영주 부녀에게 예를 표하고 관객의 환호에 보답하고 시합장 끝으로 되돌아갔다.

그가 장내를 도는 동안 동쪽 관람객 전원은 금은화와 보석을 던져대며 ‘숲의 파괴자!’를 연호했다.

광장에서 기사의 이중성을 목격하고 경악했던 시민의 환호가 가장 뜨거웠다. 숲의 파괴자는 이미 승리자였다. 희대의 영웅이었다. 적수에겐 용맹과 무공으로 두려움을 선사하지만, 관객에겐 여유롭고 우아한 태도로 화답하는, 벌써 오래전에 이 도시의 명성을 드높인 영웅이었다.

서쪽 일반 관람석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거기선 환호 대신 곡소리가 터졌다.

“빌어먹을! 이제 끝장이야.”

카이렛이 절망해서 외쳤다.

로에란그린은 얼른 그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 구경꾼들이 자네를 보고 있어. 저들을 계속 희희낙락하게 해줄 거야?”

“하지만 눈뜨고 볼 수가 없는걸. 로트는 이미 죽은 목숨이야. 엉엉.”

“아니, 로트는 죽지 않아. 오늘 결투는 승패를 가리는 게 목적이야. 어느 쪽이 이기든 살해는 금지고, 패자의 맹세만 지키면 돼. 그게 규정이잖아.”

“하지만 로트 녀석이 말에서 떨어지면 어떡해? 그땐 규정이고 뭐고 그냥 죽는 거야.”

“낙마하지 않도록 버티겠지.”

“말도 안 돼. 버틴다고 그 녀석이 안 떨어져? 저 숲의 파괴자 녀석이 한 방에 떨어뜨릴 거라고. 아주 무지막지하게 떨어뜨려서 즉사시킬걸. 그 녀석이 살해금지라는 초스트 규정에 동의한 것도 실은 낙마시켜서 죽일 흉계라고. 엉엉!”

“그런 불길한 소리 하지 마. 이건 두 집안의 반목을 일단락하려는 형식적인 결투야. 상징적인 승패 가리기라고.”

“그럼 이젠하르트가 로트를 순순히 살려둘까?”

“그러리라 믿어. 패자의 맹세를 원하겠지만.”

“뭘 요구할까?”

“사죄와 굴욕을 원하겠지. 로트뿐 아니라 그의 부친께서도 돌아오는 대로 책임을 져야겠고.”

“설마 그 녀석이 패자의 맹세만으로 만족할라고? 분명 다른 목적이 있을걸.”

“이를테면?”

“재산을 노릴지 누가 알아. 말이나 갑옷만으론 만족 안 할 테니까.”

“갑옷과 말 대신에 배상금을 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는걸. 로트는 개인 재산이 한 푼도 없잖나?”

“숨겨놓은 재산을 노릴지도 모르잖아.”

“로트한테 숨겨놓은 재산이 있을 것 같아?”

“아니. 젠장할…….”

카이렛은 그래도 불길한 의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젠하르트가 사죄만을 원할 것 같지는 않아. 죽이려고 하겠지. 이건 내 예감만이 아니야. 목격자가 있어. 자네들도 들었지? 이젠하르트가 저번에 번개가 치던 날 밤에 길거리에서 로트를 폭행했다고. 돼지치기가 목격자야. 그 녀석이 말하길, 기절할 정도로 얹어 맞아서 로트 얼굴이 피범벅이었대. 아직도 그때의 멍이 콧잔등에 남아 있어.”

“내가 들은 얘긴 좀 달라.”

로에란그린이 말했다.

“그 돼지치기는 로트가 발광이 나서 돌아다니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했지. 그래서 기절한 걸 이젠하르트가 살려냈다고 하던데.”

“거짓말이야. 난 푸줏간 주인한테 똑똑히 들었어. 그 돼지치기 녀석이 자기 아들한테 비밀이라며 말해줬다는 거야. 이터, 자네도 들었지?”

“암, 들었지.”

이터가 대답했다.

“이젠하르트가 미친 로트를 집으로 끌고 가서 정성스레 간호했다더군. 무려 간호를!”

“제기랄, 그게 아니라니까!”

“흠, 그런데 그 돼지치기 녀석, 벨데케의 어린 종복 놈하고 붙어 다니던데. 꼬마 양치기 놈도 말야. 둘이 그 집에서 맥주를 한 통씩 얻어가더군.”

“모두 한통속이니까.”

카이렛은 주먹을 휘둘렀다.

“저놈도! 이놈도! 저기 저놈들도! 탐파니스 저 빨간 원숭이 새끼는 고래고래 죽여라 소리를 질러대는군. 모두가 로트가 죽기를 바라고 있어. 저 잔혹한 녀석이 해치워주길 바란단 말야. 여기 오는 길에 들었어. 양치기 녀석이 미친 악마 포겔바이데가 미친 짓을 한 죄로 주님의 창에 맞아 죽을 거라고 하자, 어떤 어린애가 이렇게 묻더군. ‘그럼 사자랑 호랑이도 나와서 미친 악마를 잡아먹나요?’ 망할 것들! 어헝헝.”

로에란그린은 통곡하는 카이렛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사람들을 너무 탓하지 마. 발광이 났을 때 로트가 벌인 악행을 생각해 봐. 상점의 기물을 파괴하고 무단 침입하기도 했어. 여기저기서 주정뱅이나 떠돌이랑 난투극도 벌였고. 그것만으로도 처벌감이야. 어제 로트가 말한 대로 이건 본인이 택한 속죄의 길이야. 한 번은 넘어야 할 장벽이자 그간의 불명예를 씻어줄 명예로운 기회지. 우리는 기도만 하자.”

로에란그린의 진솔한 위로에 마음이 누그러진 카이렛은 눈물을 그쳤다.

“옳은 말이야. 로트는 이젠하르트가 시킨 혹독한 연습을 견뎌냈어.”

곁에서 함께 흑흑 울던 이터가 한마디 보탰다.

“난 로트의 대단한 용기와 노고를 찬양해. 아무리 본인이 자처한 불운이라지만 감히 누가 숲의 파괴자와 맞설 생각을 할까. 로트 뿐이지. 그런데 연습할 때마다 로트 저 녀석이 툭하면 픽픽 나가떨어져서 사경을 헤맸다더군. 흑흑.”

“쉿! 모두 닥치고 기도나 올리자. 저기 우리의 용사가 등장한다.”

세 귀공자가 막 고개를 돌리자 남쪽 문에서 황금 박차를 찬 기사가 등장했다.

새 군마를 타고 몸에 꼭 맞는 갑옷을 입은 그가 시합장에 등장하자 동쪽과 서쪽 관람석에선 저마다의 바람을 품은 탄성이 우레처럼 울렸다.

그 탄성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황금 박차의 기사는 숲의 파괴자처럼 훌륭한 승마술을 과시하며 장내를 한 바퀴 빙 도는 대신에 제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러자 이날 군중 심리에 대한 공연한 반항 심리로 그의 승리를 바랐던 극소수의 모험가는 즉각 마음을 고쳐먹었다.

숲의 파괴자가 말을 몰고 황금 박차의 기사에게 다가섰다.

면갑 너머로 두 전사의 시선이 마주쳤다.

숲의 파괴자가 먼저 말했다.

“반갑구나, 포겔바이데.”

“기사여, 나도 반갑네…….”

로트가 대답했다.

그 음성을 듣고서 이젠하르트는 비웃었다.

“그새 또 새 갑옷을 구해 입었구나. 수완도 좋으시지.”

“이건 빌려 입은 거야.”

“누가 그런 선심을 썼는지 몰라도 참 든든하겠군. 이제껏 내가 본 중에 가장 훌륭한 갑옷이다.”

“고마워.”

이젠하르트의 비웃음이 멸시와 섞여 짙어졌다.

“오늘 기분은 어떠냐?”

“덕분에 참을 만 해. 좀 떨리기는 하지만…….”

“용케도 오긴 왔구나. 실은 지난밤에 달아나리라고 생각했는데.”

로트는 절대로 그런 비겁한 의도를 품지 않았으며 오히려 명예롭게 속죄할 기회를 준 이젠하르트에게 감사한다고 강조하고 싶었지만, 보일 듯 말 듯 서글픈 미소만 품을 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젠하르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각오는 됐냐?”

“됐어.”

“그럼.”

“관대한 기사여.”

말 머리를 되돌리려던 그를 로트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

이젠하르트가 물었다.

“달리 어떤 할 말이 또 있지? 자꾸 시간을 끌 셈이냐?”

“그게 아냐.”

“비겁하게 자비를 애걸하겠다면 듣지 않겠다.”

“어젯밤에는 편히 잤어?”

이젠하르트는 불쾌했다.

“이건 또 웬 엉뚱한 질문이냐. 내가 설마 두려움에 잠 못 이뤘을까 봐? 네 주제를 모르고 하는 질문이니 답변은 굳이 하지 않겠다.”

“그런 뜻이 아냐. 나는 네가 편안히 잠들기를 기도했어.”

이젠하르트는 크게 콧방귀를 날렸다.

“덕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편안한 단잠을 잤어. 귀향한 후로 처음이었지. 하지만 너는 이제껏 본 중에 가장 초췌한 낯빛이니 유감이군. 그럼.”

“잠깐만.”

“또 왜 그러냐? 마지막에 와서 이런 구차한 모습을 보이다니 스스로가 비참하지 않나?”

“마지막이니 너한테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뭐냐?”

“네 이름을 부르는 걸 한 번만 허락해다오. 꼭 할 말이 있어 그래.”

“…….”

“부탁이야.”

“좋다. 너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서 한 번만 허락하마.”

“이젠하르트…….”

로트는 목이 메었다.

“나는 네게…….”

“빨리, 간단히 말해.”

“……. 나는 네게 참된 신의와 우애를 바치고 싶었어. 헌신과 열의로써 형제처럼 봉사하고 싶었어. 맹세컨대 너의 명예를 더럽히고 치욕을 끼치고 싶지 않았어. 네게 그토록 수치스러운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어. 이것만은, 나의 이 진심만은 네가 믿어준다면 나는 아무런 여한 없이…….”

“못다 한 고해는 지옥에나 가서 해라.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내게 당당히 맞서. 오늘 네놈이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그뿐이다.”

이젠하르트는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로트도 면갑을 내리고 자기 자리에 섰다.

영주가 시합을 시작하라고 선언했다.

전례관은 두 전사를 위해서 신의 가호를 빌어주길 관객에게 요청한 후에 시합 규정을 큰 소리로 낭독했다.

결전의 순간이 임박했다.

두 기사는 양측 끝에서 출발 신호가 떨어지길 기다렸다.

숲의 파괴자에게는 이미 승리의 후광이 드리운 듯했다.

그러나 만일 무명의 편력기사였다면 적수에 못지않다고 여길 만큼 황금 박차를 단 기사의 태도도 자못 용맹해서, 귀부인은 동정의 눈물을 흘리며 꽃을 던졌다.

-!

마침내 나팔 소리가 울렸다.

두 군마는 지축을 흔들며 전광석화처럼 중앙으로 돌진했다. 곧이어 충돌하는 엄청난 굉음과 비명 섞인 탄성이 관람석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들이 입을 벌리고 내려다본 시합장에는 갑작스러운 돌개바람으로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가 시야를 뒤덮었다.

“와아아!”

먼지구름 속에서 숲의 파괴자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얼굴이 시뻘건 탐파니스는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카이렛은 자기 눈을 가리고 쓰러졌다.

와! 하는 탄성이 승리의 함성으로 이어지려는 찰나, 오! 하는 경악의 탄성이 뒤를 이었다.

먼지구름을 뚫고 나타난 로트의 군마는 주인을 안장에 그대로 싣고서 장내를 반 바퀴 회전하여 남측에 있는 출발선으로 향했다.

갑옷 몸통에 부딪친 로트의 창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이젠하르트의 창은 로트의 목 부위를 쳤지만 로트는 용케도 말에서 버텼다.

벌떡 일어선 카이렛은 모자를 내던지고 미친 듯이 용사의 이름을 불러댔다.

‘천운이 따르는 놈이다.’

분을 감춘 이젠하르트는 출발선으로 돌아가며 생각했다.

‘아니면 역시 악마의 농간인가.’

‘개망나니 포겔바이데’가 전혀 뜻밖으로 선전하자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얻게 된 관객이 얼결에 환호하는 동안, 두 적수는 다시 출발선에 마주 섰다.

지축을 흔들듯 소란했던 함성과 구호가 잦아들고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흘렀다.

이젠하르트는 전례관에게 재시합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영주가 전례관에게 허락을 보냈다.

두 번째 나팔 소리가 울렸다.

두 군마는 맨땅을 파내며 튀어나갔다. 무서운 속도로 근접하는 둘의 투구가 햇살을 반사했다.

“와아아아!”

충돌하는 굉음이 터진 즉시 이번에는 승패가 명확히 드러났다.

로트의 창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서 파편이 땅바닥을 뒤덮었다. 뒷발이 허공에 쳐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군마는 주인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등자에 발이 걸린 로트는 두 팔을 벌린 채 쓰러져 있었다.

이때였다.

“로트! 와악!”

“아아앗! 죽인다! 잡아랏!”

양측 관람객에서 날카로운 고함이 터졌다.

카이렛과 탐파니스였다.

어느새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이젠하르트는 단숨에 땅을 박차고 쓰러진 로트에게 달려들었다. 그 손에는 자비의 단검(미세리코르데 misericorde. 낙마나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적의 숨통을 끊어주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칼이 갑옷의 이음매를 통해 패자의 목을 콱! 찔러버리겠거니 믿었던 관람객은 다음 순간에 입을 닥쳤다. 자비의 검이 로트의 목 대신에 투구 끈을 툭, 끊어버린 것이다.

“오, 아!”

애매모호한 탄성이 관람석에서 흘렀다.

의식을 잃은 로트의 고개가 움직였다.

“포겔바이데.”

이젠하르트는 투구를 쳐내고, 오른발로 로트의 가슴을 밟았다. 그리고 그 목에 검을 들이댔다.

“……. 으.”

관객은 숨을 죽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로트는 혼미한 정신으로 눈을 깜빡였다. 뭔가 얇고 날카로운 것이 바로 코앞에 어른댔다. 멍하니 위를 쳐다봤다.

승자가 말했다.

“포겔바이데. 너의 천운도 다했구나.”

“……. 이젠하르트.”

얼굴이 땀과 먼지로 범벅된 로트는 한쪽 눈을 간신히 뜨고 말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아직 살아 있나?”

“그렇다. 명이 더럽게 질기구나.”

“햇살에 눈이 부셔 앞이 안 보여……. 이건 뭐지? 검인가? 그렇구나……. 이젠하르트, 나의 고귀한 기사여, 잘 있어.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눈부신 이 태양 아래서 너의 검으로 명예롭게 최후를 맞는구나. 사랑하는 친구들아, 안녕!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게!”

“닥치고 대답이나 해라.”

“응?”

“너의 패배를 승복하겠느냐?”

“아, 깨끗이 승복할게. 그럼 난……. 살아난 거야?”

“불행하게도 그렇다.”

“아아! 자비로우신 주님!……. 결투는 끝났고?”

“끝났다. 너에겐 패자의 맹세만 남았지.”

“무조건 너의 뜻에 따를게. 내 말과 갑옷을 전부 가져가.”

“너나 가져라.”

“그럼……. 배상금을?”

“그딴 건 필요 없어.”

“그럼 50일의 참회 기도를 드리러 수도원으로 갈까?”

“그런 수고도 필요 없어.”

이젠하르트는 투구를 벗어 내던졌다. 그러고서 관객과 영주를 향해 돌아서서 패자에게 피앙세(결투 후 패자가 자신의 패배를 자인하면서 승자에게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는 맹세)를 요구하겠다고 알렸다.

“포겔바이데!”

영주가 허락을 내리자 그는 큰 소리로 로트에게 명령했다.

“나는 승자로서 정당한 내 권리를 행사하겠으며 너는 맹세한 대로 패자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 당장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가라, 포겔바이데.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마라. 영원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