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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관대한 기사 (20/33)

8. 관대한 기사

영주의 소유지인 남쪽 숲에 가을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떡갈나무가 울창한 숲 언저리를 훑고서 곁에 있는 완만한 경사면을 이룬 낮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짧은 풀을 부드럽게 쓸고 숲으로 물러났다.

언덕 아래에는 평원이 있다. 나무 울타리가 평원의 사면을 둘러쌌고 남쪽과 북쪽에는 나무로 된 좁은 출입문이 있다.

울타리 너머에 있는 언덕 경사면의 동쪽과 서쪽 중앙에는 나무로 지은 높은 관람석이 있다. 특별한 날이면 그곳은 화려한 태피스트리와 색색의 깃발, 비단 천개로 장식됐는데 이 평원은 옛날에 성백 오스터팅겐이 이 도시에 요새를 세운 이래로 기사들이 영예와 무공을 다투던 무예 시합장이었다.

가을 햇살이 평원의 이슬을 비추는 이날 아침.

남쪽 하늘에서 날아온 매 한 마리가 시합장의 창공을 가로질렀다.

매가 사라지자 어느 종자가 시합장에 나타나 남측에 난 좁은 나무문을 양옆으로 열었다.

종자가 물러난 후 그곳에서 동방의 준마 한 필이 시합장으로 들어섰다. 그 준마는 아라비아 혈통인 품종으로써 경쾌한 구보로 시합장에 들어섰지만 그 위에 중무장한 기수의 체중을 견디기에는 종아리가 지나치게 날씬했다.

문을 나선 동방의 준마는 시합장 가운데로 향했다.

도중에 기수가 서툴게 고삐를 다루자 준마는 주인의 애매한 명령에 따라 서야 할지, 주인 대신 스스로 영리한 판단을 내려 그대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느라 약간 갈팡질팡했다.

그 준마가 진입했던 남쪽 문에는 기사의 종자와 시종 몇몇이 서 있다. 그들도 시합장의 준마와 기수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역시 갈팡질팡하다가 말뚝처럼 울타리 앞에 서버렸다.

결국 스스로 판단을 내린 영리한 준마는 시합장 한복판으로 나아가 관절이 튼튼하고 체구와 종아리 근육이 우람한 어느 군마 앞에 섰다. 군마의 풍채가 어찌나 위풍당당했던지, 제아무리 담대한 준마라도 방향을 틀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준마와 군마는 마주 섰다.

그 위에 탄 두 기사도 서로 마주 봤다.

깊고도 무거운, 오랜 침묵 사이로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준마 위의 기사는 상대의 침묵 때문에 이 순간을 영원처럼, 지옥의 염화처럼 괴롭게 느꼈다.

“각오가 대단하신가 봐.”

카스티야 산 군마에 탄 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장을 단단히 하고 왔구나. 그 각오가 그날까지 불변했으면 좋겠군.”

“…….”

“언제 벙어리가 됐냐. 하긴, 뚫린 입이라고 해도 없느니만 못 하지.”

“……. 이젠하르트.”

“두 번 다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기사가 조용히 명령했다. 낮게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지만 죽은 이도 떨게 할 만큼 음산하고 단호했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네 영혼을 빼앗은 죽은 자의 왕이든 불사의 전사든 아니면 오딘 신(북유럽 최고의 신)이든, 누구에게든 물어봐라. 네가 감히 내 이름을 부를 자격이 있는지. 나는 오늘 이 자리로 너를 불렀어. 친구가 아니라 적수로서. 너의 두 손발을 잘라내고 잔인하게 죽여도 마땅하지만, 명예롭게 내게 맞설 기회를 주려고 불렀다. 그리고 네게는 단 한 가지만을 청했어. 내 이름을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말라고. 그런데도 너는, 이 자리에서 네 심장을 단칼에 꿰뚫는 대신에 단지 그것만을 청했는데도 들어줄 수 없단 말이냐? 그것조차 네겐 부당한 요구냐? 일찍이 내가 창과 방패만으로 편력의 길에 오른 이래로 이토록 과분한 관용과 자비를 베푼 적수는 없었어. 너 이외는. 네놈에게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두 번 다시 나를 욕되게 하지 마.”

“……. 나의 관대한 기사여.”

준마에 탄 로트는 고개를 떨구고 답했다.

“성 베르나르에게 맹세코, 너의 결투장을 받고 나는 너의 관용과 자비에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읍했어. 가장 추악하며 어떤 참회로도 면죄 받지 못할 죄를 지은 나의 괴로움 따윈 말해서 뭘 하겠어. 네 고통에 비한다면……. 하지만 이것만은 감히 맹세하도록 허락해다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기꺼이 네 뜻에 따를게. 무엇이든 네 뜻에 어긋난다면 시정을 명령해다오. 복종과 순응, 이것만이 내 대답이야. 네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겠다. 오늘도 네가 부른다니 기쁜 마음으로 달려왔어. 여기가 아니더라도, 기꺼이 지옥문 앞에라도 갔을 거야.”

“치욕스레 끌려오느니 그편이 낫겠지.”

심장 박동의 격렬함에, 뺨을 태우는 수치심에 로트는 정신이 혼미했다. 죄책감에서 비롯된 마음의 고통은 마주 서 있는 이젠하르트의 담대하면서도 침착한 태도에 더욱 극심해졌다.

그의 품위 있는 말투와 거동, 음성과 몸짓에 담긴 절제와 인내 그리고 불법이며 잔혹한 보복 대신에 명예로운 결투를 청한 그의 아량에 스스로가 한없이 수치스럽고 비참했다. 그토록 명예를 숭상하고 긍지가 강한 기사를 가장 추악한 죄악으로 더럽혔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웠다. 윤기를 잃은 금발과 지울 수 없는 그늘이 깃든 수척한 얼굴에서 이젠하르트가 홀로 삭여야 했던 치욕의 상흔을 읽고서 지금 당장 제 가슴을 내밀어 그 죗값을 치르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이렇게나 많이 변하다니.’

로트는 속죄의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사이 몰라볼 만큼 수척해졌구나. 저 모습을 똑바로 봐. 누구의 짓인지.’

시종을 부른 이젠하르트는 뭔가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제 주인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동방의 준마는 엷은 색의 갈기를 흔들며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관대한 기사여.”

시종이 떠나자 로트가 그를 불렀다. 음성은 탁하고 불안했다.

“넌 어째서 그런 차림이야?”

“어리석은 적수여, 너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만.”

“난 갑자기 숨쉬기가 힘들어. 땀은 비 오듯 흐르고 숨통이 막혀. 팔다리도 좀처럼 꼼짝할 수가 없네.”

“그 꼴을 하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관대한 기사’가 대답했다.

“그렇게 깃털로 잔뜩 치장된 무거운 투구를 쓰고 철갑 갑옷으로 중무장을 했으니 당연히 거동이 불편하지.”

그러자 로트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갑옷은 필요 없어?”

“어리석긴. 갑옷은 필수다.”

이젠하르트는 단호히 말을 이었다.

“네가 불사조가 아니라면. 하지만 넌 생 초보인데도 연습용 창을 쥐기도 전에 잔뜩 멋만 부린 사치스러운 갑옷부터 챙겨 입고 왔으니 고생을 자처했지. 뭐, 그러고 오리라 예상은 했다만.”

황금 장식이 번쩍이는 갑옷에 풍성한 투구 깃은 하늘 위로 치솟고 발에는 황금 박차까지 달고 온 로트는 면갑 너머에서 뺨을 붉혔다. 굴레와 재갈에 황금 장식을 단 준마도 덩달아 부끄러운 듯 꼬리를 쳐댔다.

이젠하르트는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목숨 귀한 건 알아서 지나치게 두꺼운 철갑 갑옷을 입었구나. 진짜 기사도 아닌 주제에 그런 값진 갑옷을 이틀 만에 구해 입다니 역시 돈 많은 환전상의 아들이군.”

“실은 이건 급히 빌린 거야.”

로트는 변명이라기보다는 사실을 전하고픈 마음에 말했다.

“그런데 투구를 쓰니 얼굴에 땀이 비 오듯 흘러서 앞이 전혀 안 보여. 숨도 콱 막히고 어지럽고……. 어쩌면 좋지?”

“면갑을 위로 올려.”

“아!”

로트가 면갑을 열고 허겁지겁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이젠하르트는 한숨을 뱉었다.

“고마워. 덕분에 정신이 좀 들어.”

“아무리 초짜라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음……. 이건 어쩌지? 갑옷이 굉장히 무겁군. 수족을 놀리기도 힘들어. 이렇게 무거울 줄 알았다면…….”

“그렇다면 벗어. 먼저 창술과 승마술부터 중점적으로 익혀. 갑옷 입고 으스대는 건 그다음부터다.”

로트는 안도하며 투구를 벗으려 했다. 하지만 머리에 너무 꼭 맞는지 전혀 벗겨지지 않았다.

“이상하군. 이게 왜 이러지? 투구가 달라붙었어!”

낮은 한숨이 또 들리더니 이젠하르트가 휘슬을 불었다.

남쪽 문에서 우물쭈물하던 로트의 시종이 급히 달려왔다.

“네 주인을 데려가서 갑옷과 투구를 벗겨라. 투구를 벗길 땐 끈을 먼저 풀도록.”

“아, 투구 끈을 먼저 풀어야 하는군. 명심하고 다음부터는 잊지 말아야지.”

이젠하르트가 냉정하게 말머리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리자 시종은 뺨을 붉힌 로트의 말을 끌고 남쪽 문으로 갔다. 오랜 고투 끝에 갑옷을 벗고 짧은 튜닉으로 갈아입었다. 그 덕에 창을 쥐어보기도 전에 시종과 주인 모두 녹초가 됐다.

다시 준마에 올라탄 로트는 시합장으로 되돌아갔다. 투구를 벗어서 시야가 트이자 시합장과 관람석이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솟았다. 비록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고 심판에 순응하기로 맹세했지만, 죄인에게든 성자에게든 그 아름다움을 공평히 나눠주는 자연 앞에 서니 가슴이 뭉클해지며 서글픈 감상이 일었다. 이제 곧 저 자연 속으로 돌아가서 한 줌의 흙이 되어 죗값을 치를 생각에 홀가분하면서도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만일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죽기 전에 내 진심을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늦었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이미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뭘 하고 섰냐?”

이젠하르트가 멀리서 그를 불렀다.

“빨리 이쪽으로 와. 해야 할 연습이 태산이야. 잠시도 빈둥댈 틈이 없어.”

로트는 마음을 급히 가다듬고 말을 재촉했다. 원래의 자리에 도착한 그는 이젠하르트를 흘끔 보고서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새삼스레 맨 얼굴로 맞대면하기가 부끄럽고 두려웠다. 그래서 시합장 한 곳을 가리키며 안 그런 척 말했다.

“넌 준비성이 철저하고 꽤 근면하구나.”

“또 조롱이냐?”

“아냐. 저건 방패를 든 허수아비 맞지? 네가 세운 거지?”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로트는 혼잣말을 했다.

“저게 내 연습 상대인가보군. 이른 아침에 세웠을 테니 참 수고가 많았구나.”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어라. 쓸데없이 떠들지 말고.”

로트는 입을 닥치고 시종에게서 무기를 건네받았다. 오른손에는 약 6미터 길이의 장창을, 왼손에는 가죽으로 싼 세모난 방패를 들었다.

자유롭던 두 손에 상당한 중량의 무기가 쥐어지자 서글픈 감상 따위는 싹 달아났다. 그 대신 새로운 경험에 대한 흥분과 긴장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한편으론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경종이 뇌리에서 울렸다.

로트가 물었다.

“이제 어떡할까?”

“말을 달려서 창으로 저 허수아비의 방패나 머리를, 가능한 목을 쳐.”

“목을?”

“그래.”

“그럼 목이 잘리나?”

“창으로 칼질을 하라는 게 아니라 창끝으로 일격을 가하라고. 투구를 치면 창이 미끄러져서 허공으로 빗나가지만 목 부위를 치면 투구 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릴 수 있어.”

“아, 그렇군. 그런데 창이 부러지지 않을까?”

“그런 염려는 하지 마라. 네 실력으론 절대 맞출 수 없을 테니. 허공을 찌른 창이 부러진 건 내 평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로트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젠하르트의 한마디 한마디를 열심히 귀담아 들었다.

이젠하르트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방패를 겨냥해. 그편이 가장 쉽지. 그러고나서 숙달된 후에 목을 겨냥해봐.”

“갑옷을 직접 찌르면 안 될까? 가장 넓고 판판해서 잘 맞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대부분 창이 옆으로 비켜나가서 낙마시킬 수가 없어.”

“그렇구나.”

“상대편의 무릎과 군마 겨냥은 금지이니 명심하도록.”

“그래. 명심할게.”

로트의 태도가 극히 순종적이며 생초보의 불운한 운명이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탓에 이젠하르트는 베테랑이 지닌 우월감에서 선심을 쓰기로 했다.

“거기 박힌 징이 보이지?”

그는 손잡이 고정용으로 방패 앞면에 박힌 징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방어할 수 있어. 끝이 뭉툭한 창으로 겨룰 때 그 징 속에 창끝이 끼도록 방어하면 적수를 말안장에서 푸른 초원으로 내동댕이칠 수 있지.”

“아, 하지만 쉽지 않겠는걸.”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네놈이 내 애비다.”

“역시…….”

“마지막으로, 창을 부러뜨리는 것은 낙마보다 더한 수치이자 불명예임을 명심해라.”

“이유가 뭐지?”

“목표물에 설맞은 창만이 뒤틀리고 부러지거든. 그만큼 기사의 무예가 서툴다는 증거야. 넌 허공을 찌르고도 능히 창을 부러뜨리겠지만. 그럼, 내가 시범을 보여주마.”

“관대한 기사여.”

이젠하르트가 시합장의 끝으로 말머리를 돌리자 로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 음성에는 새삼스러운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넌 훌륭한 스승이야. 이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배웠어.”

“훌륭한 제자여.”

훌륭한 스승이 대답했다.

“네 운명을 짐작한다면 그런 입바른 소리를 그날에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

“자, 그럼 똑똑히 지켜보고 나서 배운 대로 해봐라.”

“그래. 열심히 할게.”

그 대답이 무색하게 스승의 모범적인 시범 후에도 로트는 제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양손에 무기를 든 채 말을 제어하는 요령을 익히느라 장시간이 소요됐다. 오랜 악전고투 후에 그가 창을 수평으로 눕혀 든 모습을 보며 스승은 속으로 생각했다.

‘초짜 주제에 흔들림 없이 잘도 들고 있구나. 역시 무식하게 힘은 세거든.’

마침내 요령을 터득한 로트는 박차를 가해 달렸다. 갑옷의 무게를 벗어내자 몸이 한결 가뿐해진 준마는 제 임무를 훌륭히 해냈지만 주인의 창은 멋지게 과녁을 빗나갔다.

연습은 해질 무렵까지 계속됐다.

사흘째 연습 날.

로트는 투구와 갑옷을 착용했다. 이때부터 제자는 본색을 드러냈다. 이틀간 한 맹훈련이 무색하게 갑옷을 입자 사람이 달라졌다. 창을 쥐고 힘차게 돌진하기는커녕 준마가 움직이기만 해도 땅바닥에 픽픽, 쓰러졌다.

보다 못 한 이젠하르트는 노엽게 쏘아붙였다.

“툭하면 자빠지니 배우려는 의지가 의심스럽다.”

“관대한 기사여.”

로트도 자신의 무능을 슬퍼하며 답했다.

“네 노고에 보답해야 하건만 도무지 꼼짝할 수가 없어. 갑옷 때문에 사지가 짓눌리는 것만 같아. 가슴이 답답해서 숨쉬기도 힘들고. 하아…….”

“잘못 엎어져서 가슴의 철갑 판이 찌그러졌으니까 그렇지.”

“아, 그렇구나. 어쩐지…….”

“낙마하는 요령을 벌써 잊었냐?”

“그게…….”

“그렇게 강조했건만. 낙마할 땐 고개를 땅에 처박고 엎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옆으로 틀어. 일단 쓰러지고 나면 좀처럼 혼자선 일어설 수도 몸을 뒤집을 수도 없어. 그땐 흉갑이 찌그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면갑의 숨구멍이 흙으로 막혀 질식사할 위험이 있어.”

“알았어.”

이젠하르트는 한숨을 뱉고 시종을 불렀다.

“안장 끈을 몸에 더 단단히 묶어줘라. 떨어지지 않게.”

시종이 명령에 따르는 동안 로트는 면갑을 올리고 이젠하르트를 몰래 훔쳐봤다. 그는 시종의 작업을 감시 중이었다.

그 얼굴이 오늘도 무척 피로해 보였다. 모자 아래의 두 뺨은 나날이 여위어 가고 혈색도 매우 나빴다. 게다가 그런 상태로 때로는 로트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이상하게도 어두운 낯으로 혼자만의 근심에 잠기곤 해서 로트의 의문과 우려를 자아냈다.

‘이상하군. 왜 또 저러나. 어디 병이라도 났나. 자꾸만 명치를 만지는군. 속이 쓰린가, 과음을 했나. 아니면 나 이외에 다른 근심거리가 생긴 걸까.’

때는 어느새 정오가 한참 지났다. 훈련은 끼니를 이을 새도 없이 계속됐다.

고민하던 로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이젠……. 친구여, 넌 괜찮아?”

“뭐가?”

이젠하르트는 눈에 띄게 경계하며 물었다.

“내가 어때서? 또 뭔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네 안색이 조금……. 가스코뉴 산 포도주를 좀 가져왔는데 마시지 않을래?”

이젠하르트가 입을 꾹 다물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로트는 얼른 덧붙였다.

“맛이 아주 좋아. 맥주도 가져 왔는데 잠시 목을 좀 축이면 안 될까? 땀을 많이 흘렸더니 나도 목이 마르군. 잠깐 쉬고 나면 기운이 좀 날 것 같은데……. 날씨도 선선하니 좋고…….”

“좋아. 마시지.”

“오! 그럼 사슴 고기 파이도-…….”

“그러고 나선 뭘 할까?”

“……?”

“사랑의 입맞춤이라도 나눌까? 아니면 마상에서 식후의 교접은 어떠냐? 화끈하게 또 한 번 해볼까?”

“…….”

“정신 차려라, 포겔바이데. 넌 어떤 착각을 하는 거냐. 우리가 지금 사슴 사냥을 온 거냐?”

“……. 사슴 고기가 싫다면 종달새 구이는 어때?”

“빌어먹을!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야!”

이젠하르트가 내지른 노성에 로트는 침통하게 낯을 붉혔다.

그 꼴을 보고 치를 떨며 이젠하르트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잘 들어라, 포겔바이데. 살고 싶다면 가증스러운 위선과 술수로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정당히 승리를 얻어. 자비를 바란다면 날 패배시켜. 날 이긴다면 그땐 너랑 또 뒹굴어줄 수도 있어. 포도주보다는 그게 더 낫지 않나? 자, 창을 쥐어라. 휴식은 사치다. 네 꼴로 봐선 날이 저물기 직전까지 연습해야 하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몸을 똑바로 가눠. 네놈의 짐승 같은 괴력은 아껴뒀다가 어디다 써먹을 셈이지? 음탕한 정욕에만 용을 쓸 작정이냐? 내게 알량한 호의를 베풀고 싶거든 포도주 따윈 집어치우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창을 들어! 말을 달려서 저 허수아비의 목을 정확히 쳐보란 말야. 내 노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고!”

이후로는 침묵과 묵종 속에서 혹독한 연습이 계속됐다.

로트는 오랜 훈련기간 동안 온갖 굴욕과 조롱,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묵묵히 견뎌냈다. 그로써 이젠하르트의 노고에 보답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침내 연습 기간이 끝났다.

그리고 ‘신의 평화'(금요일부터 일요일, 대축제 기간, 사순절 및 강림절 기간의 결투 금지 결의안. 어길시 파문을 당한다) 주간이 끝난 그 다음 월요일 아침에 결투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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