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우정의 찌르기
밤새 뇌성벽력이 몰아쳤던 다음 날.
도시를 뒤덮었던 비구름이 북쪽으로 물러갔다. 채 물러나지 못한 먹구름이 군데군데 검은 양떼처럼 남아있었지만 가을 하늘은 오랜만에 맑게 개었다.
시민들은 불길했던 암운이 몰려가자 안도하고 감사하며 기도문을 외웠다. 비록 강풍에 축사와 가옥 몇 채가 무너지고 교회의 종탑이 번개를 맞아 부서졌지만 그런 피해를 감수할 만한 충분한 정신적 보상을 얻었다.
도시의 재력가들은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정찰병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 사이에도 비관론이 대두됐지만 희망을 저버리기에는 이권의 유혹이 너무 컸다.
며칠 후.
카이렛이 중앙 광장에 나타났다. 그는 빗물 웅덩이가 채 마르지 않은 광장을 지나 지름길을 타려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과일 바구니를 껴안은 한 처녀와 물동이를 안은 처녀가 서두르는 그를 피해 벽에 붙었다.
‘오늘은 로트가 집에 있겠지.’
카이렛은 처녀가 고개를 숙인 사이 사과 하나를 덥석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내 몸종 녀석이 새벽부터 문 앞에서 지켰으니 몰래 내빼지 못했을 거야. 없다고 잡아떼지도 못할걸. 오늘이 벌써 며칠 째야.’
“야! 이 자식! 서라! 거기 서라!”
난데없는 고함에 뒤돌아선 카이렛은 한 입 깨문 사과를 마저 와작, 깨물었다. 고함의 주인을 알아보자 입가에는 허탈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쳇. 난 또 누구라고. 사과 장수의 오라비라도 되는 줄 알았네.”
“야, 죽인다! 이 원숭아!”
“깝죽대지 말고 꺼져.”
카이렛은 탐파니스에게 쏘아붙였다.
“난 지금 너랑 한가하게 시시덕댈 여유가 없어.”
“너나 깝죽대지 말아! 까불지 말고!”
탐파니스는 팔팔 뛰었다. 카이렛이 그를 무섭게 노려보자 물동이를 안은 처녀는 달아날 틈을 노리며 탐파니스 쪽으로 다가갔다. 사과 처녀는 바구니를 꼭 껴안고 벽에 붙어 부들부들 떨었다.
탐파니스의 뺨은 바구니 안에 든 사과처럼 새빨갰다.
카이렛은 먹다 만 사과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왜 또 시비야?”
“로트 자식 어디 있어?”
“그걸 네가 알아서 뭐할 건데?”
“그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하, 아직도 못 죽여서 징징대고 있냐?”
“그 녀석 어디 있냐니까? 빨리 불어!”
탐파니스는 악을 쓰며 덤빌 듯 말 듯이 앞뒤로 비틀비틀 오갔다.
그 꼴을 보며 픽픽, 비웃음을 날리던 카이렛은 혀를 찼다.
“이젠 가지가지 하는구나. 아침부터 술 처먹고 시비라니.”
“누가 술을 먹었다고 그래? 죽인다!”
“얼굴이 새빨갛잖아. 넌 꿀물만 마셔도 천상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닌다며.”
“까불지 마! 빨간 원숭이야! 죽인다! 로트 녀석 어디 있어? 얼른 데려와!”
“네가 뭔데 로트를 데려오라 마라 명령이냐?”
“데려오라면 데려와!”
“모른다는데 어떻게 데려와? 내가 그 녀석 유모라도 되냐?”
“웃기지 마! 그 녀석을 네가 감췄잖아! 난 다 알고 있어! 네 녀석들이 그놈을 감췄어!”
독이 오른 탐파니스는 칼자루를 쥐었다 말았다, 하며 자꾸만 휘청댔다. 이상하게 휘적대는 그 모습을 주시하며 카이렛은 말했다.
“그 녀석이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나도 찾고 있어.”
“시끄러워! 너희들은 수작을 부리고 있어. 그 녀석은 바람둥이야! 바람둥이라고!”
카이렛은 여차하면 탐파니스의 머리통에 날리려던 사과를 마저 깨물고 바닥에 내던졌다.
그걸 공격이라 여긴 탐파니스는 칼자루를 쥐고 화들짝 뛰어올랐다.
카이렛은 실소를 터트렸다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마침 잘됐군. 만난 김에 뭐 하나 물어보자. 넌 왜 자꾸 로트를 찾는 거야?”
“그 녀석은 내 원수니까! 그 녀석 낯짝은 보기만 해도 배알이 꼴려.”
“내가 보기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카이렛이 정색을 하자 탐파니스는 눈을 치뜨고 숨을 씩씩댔다.
“넌 날마다 로트를 쫓아다니고 있어. 네 녀석이 할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 이유가 대체 뭘까? 힐데가르트 때문도 아니라면서? 아마 네가 로트를 찾아다니는 만큼 딴 여자들을 찾아다녔다면 벌써 애 하나를 낳았다고 소문이 났을걸.”
“뭐라는 거야? 이 녀석!”
“시치미 떼긴. 너, 혹시 로트한테-……. 으악! 앗 차가워!”
느닷없이 찬물을 뒤집어쓴 카이렛은 뒤로 물러섰다. 고개를 쳐들자 물동이를 빼앗긴 처녀는 바닥에 자빠져 있고 탐파니스는 벌써 저만치 달아나서 소리를 질렀다.
“로트한테 경고를 전해! 날 자꾸 속이고 피해 다니면 가만 안 두겠다고 말야! 내 눈에 띄기만 하면 죽을 줄 알라고 해!”
탐파니스는 물동이를 동댕이쳐 박살 내고 바람처럼 내뺐다.
그를 추격하던 카이렛은 도중에 방향을 틀어 포겔바이데 가로 향했다.
포겔바이데 가에 도착한 카이렛은 몸종에게서 보고를 듣고 문을 두드렸다.
문지기 힌츠는 불만에 찬 얼굴을 문틈으로 살짝 내밀고 용건을 물었다. 얼굴 여기저기가 까지고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카이렛이 물었다.
“영감 얼굴이 왜 그래? 도둑괭이한테 뜯겼어?”
“괭이가 뜯어 놨냐고요? 웬걸요. 새끼 악마한테 뜯겼어요. 저주받을 개놈들 같으니! 부자가 쌍으로 개잡놈들이라지. 퉷.”
“로트 녀석은 위층에 있어?”
“그 개망나-……. 큼, 작은 나리요? 안 계신데요. 어제 외출하셔서 안 돌아오셨어요.”
“자꾸 거짓말할래? 다 알고 있어. 오늘은 집에 있잖아.”
“정말 안 계신다니까요. 제가 왜 존경하옵는 나리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어제저녁에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뭐, 이런 일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요? 나리도 잘 아시잖습니까.”
“요 늙은이 보게. 능청이 대단한데. 좋아. 내가 직접 들어가서 녀석을 찾아내면 영감 코를 베어낼 테다. 비켜봐!”
“아이고!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벨데케의 개놈들이 아니고선 절대 들어오실 수 없어요! 절대로요!”
“벨데케의 개놈? 절친한 벗은 불청객이고 원수 놈은 환대를 받는다? 그런 헛소리가 어디 있어?”
“저야 모릅죠. 이 충직한 힌츠가 뭘 알겠어요? 그저 이 세상이 불신자들과 미치광이랑 악마들한테 점령당해 미쳐 돌아간다는 것 빼곤 저도 몰라요. 제발 돌아가세요! 제가 죽어요! 나리께선 누구든 안으로 들이면 절 목매달겠다고 하셨어요!”
벨데케 운운하던 요상한 언급이 거슬렸지만 힌츠의 완강한 저항과 절규에 카이렛은 할 수 없이 물러났다. 노인의 필사적인 저항이나 처지를 이해해서가 아니다. 종복의 강제적 충성은 그만큼 주인의 단호한 명령과 결심을 반영한 탓이다.
로트가 검은 숲에서 돌아온 이래 세 귀공자는 그의 조력자로 나섰다.
그러나 우려한 문제가 발생했다. 로트의 고질적인 정열의 광풍이 재발한 것이다. 발광이 난 그는 세 친구의 감시와 제어를 교묘히 뚫고 도시의 음침한 곳을 쏘다녔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암행의 증거와 목격담이 전해졌다. 로트의 부친이 진군한다는 소문이 극에 달했을 땐 더욱 튼튼한 감시망을 세웠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러던 중에 폭우가 내렸다.
그날 이후부터 로트는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만 칩거 중이었다.
카이렛은 며칠 후, 포겔바이데 가로 다시 찾아갔다.
힌츠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가자미 눈초리로 그를 흘겨보며 쏘아붙였다.
“또 오셨군요. 도대체 나리께선 날마다-……. 으헉!”
다짜고짜 힌츠를 떼밀고 뛰어든 카이렛은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 뒤에 등장한 로에란그린도 자빠진 힌츠를 지나서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로트의 침실로 향하던 둘은 도중에 2층 연회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올봄까지도 그들이 아무런 근심 없이 유쾌하게 먹고 마시고 뛰놀던 곳이다.
카이렛은 그쪽을 보며 말했다.
“웬 류트 소리지? 설마 저기 있나?”
“시끌벅적하군. 가보자.”
둘은 망설일 여유가 없었으므로 안으로 뛰어들었다.
얼핏 보니 예상대로 흥겨운 술판이 진행 중이었다. 조개를 테두리에 장식한 진보랏빛 자루 모자를 쓴 작은 광대, 류트를 켜는 악사 그리고 떠돌이 투르바두르가 보였다.
멀리서 보니 연회의 주인인 로트도 그곳에 있었다. 그는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 단처럼 쌓아올린 쿠션에 파묻혀 드러누워 있었는데, 그 폼이 꼭 기독교도 노예를 거느린 오만한 술탄 같았다.
대번에 주인을 발견한 카이렛은 그쪽으로 뛰어갔다. 때마침 알록달록한 뭔가가 튀어와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서 옵쇼.”
체구가 작고 얼굴이 뾰족한 광대가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목에 매단 노예용 은방울이 짤랑짤랑 울렸다.
카이렛은 그를 알아보고 물었다.
“어라? 네 녀석이 왜 여기 있어? 이터가 보냈나?”
“헌신짝도 쓸 데가 있는 법이죠. 나리들께선 제 안내가 필요하신가요? 은화 한 닢이면 팔레스타인의 성묘까지도 모셔다드리죠.”
“저 녀석 취했나? 아주 태평한데.”
두 귀공자는 광대를 무시하고 서둘러 단상으로 갔다.
가까이 갔더니 거나하게 취한 오만한 술탄은 온데간데없고 잠이 덜 깬 듯이 누워 있는 기독교인만 보였다.
갑자기 머리맡에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로트는 고개를 쳐들었다.
“제기랄!”
카이렛은 그 얼굴을 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낯짝이 왜 그 모양이야? 맙소사! 아주 만신창이군.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는데.”
“오랜만이야, 로트.”
로에란그린은 카이렛의 옆구리를 찌르고 인사를 건넸다.
로트는 관절을 삐걱대며 일어나 앉았다.
그가 뭔가 입을 떼기 전에 카이렛이 대뜸 쏘아붙였다.
“흥. 왜 왔느냐고 묻지 마. 네 녀석 생사가 걸려 있어서 이렇게 뛰어왔으니까.”
“어서 와. 여기 앉아. 나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생뚱맞은 대답을 한 로트는 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고서 누워 있던 쿠션 사이에 몸을 파묻고 기대앉았다.
서로 마주 본 카이렛과 로에란그린은 각각 로트의 양쪽에 바짝 붙어 앉았다. 로트는 둘의 의도를 눈치 채고 의기소침한 죄인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카이렛이 물었다.
“뭘 하고 있었어? 술 마셨어?”
“아니.”
죄인이 순순히 답했다. 음성은 차분하지만 잠겨 있었다.
카이렛은 악사와 트루바두르를 턱짓했다.
“그럼 저것들은 뭐야? 술판을 벌였잖아.”
“귀를 즐겁게 하며 그저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어.”
“어제는 뭐 했어?”
“집에 있었어.”
“그럼 네 녀석은 투명인간이군. 문지기 영감은 없다고 딱 잡아떼던데. 우리가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한 줄 알아?”
로트가 눈을 내리깔고 묵묵부답하자 두 귀공자는 시선을 교환했다.
하인이 독한 맥주와 향료 포도주, 다과를 얹은 테이블을 차려놓고 나갔다.
로트는 술과 다과를 권했지만 두 귀공자는 그보다 더 중대사가 있다고 표정으로 응답했다.
그 시선을 못 본체하며 로트는 멀거니 앞을 응시했다. 그들 앞에선 악사는 루트를 켜대고 투르바두르가 상투적인 무훈시를 읊고 있었다. 영주의 광대는 세 남자의 대화에 낄 틈을 호시탐탐 노리며 단상 근처를 살금살금 오갔다.
조바심이 난 카이렛을 무언으로 제지하며 로에란그린은 로트에게 물었다.
“얼굴에는 웬 상처야?”
“……. 검술 연습을 하다가 넘어졌어.”
로에란그린과 카이렛은 마주 봤다. 동일한 의문과 답이 허공에서 오갔다.
카이렛이 심술을 참지 못하고 나섰다.
“생뚱맞게 검술 연습은 왜 했는데? 연습은커녕 당한 거겠지. 심하게 다쳤잖아. 뺨에는 웬 멍 자국이야? 끔찍하군! 누구한테 터졌어? 강도떼? 아님 문지기 영감이랑 한 판 붙었나? 아님, 이젠하르트한테 터졌어?”
“…….”
“제엔장! 뻔하군. 죽어라 쫓아다니더니 결국 만신창이로 얻어터졌어. 목이 붙어 있는 게 천만다행이지. 나쁜 자식! 그래도 그렇지, 사람을 이런 몰골로 만들어놔? 하!”
로트는 계속 묵묵부답했다.
그 침통한 태도와 내리깐 눈꺼풀에서 답을 얻은 카이렛은 복장을 두드리며 치미는 울화와 조바심을 참았다. 로에란그린이 말리기도 했지만, 급보를 전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로트의 상태가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었다.
최악의 경우 로트가 여전히 발광 중이리라 각오했는데 의외로 만사에 지친 듯이 얼이 빠지고, 침울하고, 공허해 보였다. 머리를 쥐고 허공에다 몸뚱이를 탈탈 털면, 텅 빈 영혼이 스르륵 빠져나올 듯이.
슬슬 본론의 서두를 꺼내려고 카이렛이 다시 입을 열었다.
“탐파니스 녀석이 자넬 찾더라. 그 녀석 왜 그러는 거야? 왜 자꾸 자넬 쫓아다녀? 자길 속일 생각 말라고 악을 쓰더라.”
“글쎄. 모르겠어.”
“그저께 힌츠가 한 말은 무슨 뜻이야? 나는 문전박대하면서 벨데케의 개놈들은 환대한다더군. 자네가 시켰다면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이 질문이 가져온 여파는 극명했다. 벨데케라는 말에 온몸을 떨어댄 로트는 목구멍을 쥐어짠 쉰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나는 자네들한테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이미 자네들은 내게 극진한 사랑과 신의를 보여주었어. 자네들은 내 형제고 하늘이 내린 보물이야. 죽을 때까지 그 은혜에 보답할게.”
“웬 생뚱맞은 대답이야? 친구를 배반하고 원수랑 동맹이라도 맺었나?”
“……. 카이렛, 나는 진심이야. 내 어리석음과 악마의 정열이 이제껏 자네들을 얼마나 괴롭혀왔어. 난 지금 참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자네들을 피한 건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야.”
“그간 성실히 참회의 시간을 보냈다면-…….”
로에란그린이 말을 받았다.
“이제까지 충분했으리라 믿어. 하지만 자네가 여전히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니 우리에겐 더 큰 폐이자 무례야. 자네라면 소중한 친구의 고뇌를 모른 체하겠어? 우리가 신의와 우애로 맺어진 형제라고 자네도 늘 말했잖아.”
“사랑하는 로에란그린, 자네 말이 옳아……. 어쨌든 날 용서해줘.”
“얼굴은 왜 그 모양인데?”
카이렛이 껴들었다.
“실컷 터져놓고 살인이라도 한 얼굴이잖아. 도대체 또 무슨 짓을 했어?”
“……. 아무 짓도 안 했어.”
“근데 왜 그래? 멍청하고 맥없는 얼굴이 꼭 얼빠진 수탉 같군.”
“그 수탉한테 날개라도 달려있다면 훨훨 날아갈 텐데…….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지옥의…….”
“하, 갈수록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네. 우리 모르게 또 뭔 짓을 한 거야?”
“천벌을 받을 짓을 했죠!”
그들 뒤에서 별안간 또랑또랑한 음성이 껴들어 발랄하게 외쳤다. 밤바라고 불리는 광대였다.
“살인보다 더 하다죠. 어떤 고해와 참회로도 씻지 못할 흉악한 죄를 저질렀답니다.”
“뭐라고?”
“글쎄요. 저는 광대지만 남의 죄악을 들추어내 떠벌리는 수다쟁이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죠. 광대는 익살로 먹고사는 바보지만 그보다 더한 바보는 암시를 줘도 못 알아먹는 바보다.”
밤바가 뭔 말을 하는 거냐고 로트를 닦달하려던 카이렛은 불쑥 입을 닥치고 말았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광대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누운 로트의 얼굴에 제 손수건을 덮어버렸다. 투루바드루는 그들 앞에서 절정의 대목을 흥겹게 읊고 악사는 태연하게 연주를 계속했다.
로트는 울었다. 가만히 누워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로트가 또 뭔가 큰 사고를 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카이렛은 로트를 노려보다 말고 울컥해서 소리쳤다.
“젠장. 너 같은 녀석은 수도원에 평생 처박혀 있어야 했어. 거기서 사슴이나 쫓고 수녀원의 담벼락이나 기웃댔으면 좋았지. 너처럼 변덕스럽고 감상적이고 말썽꾼인 녀석은 그런 데 처박혀 살아야 심신의 평정을 얻고 건강히 제명대로 살았겠지. 제기랄!”
로트의 얼굴에 덮인 손수건이, 미세하게 떨리며 젖어들었다.
“로트.”
로에란그린은 광대가 얹어놓은 손수건을 치우고 눈물이 흐르는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닿자 눈물 줄기는 협곡의 폭포수로 변해 주룩, 주룩 쏟아져 내리고 흐느끼는 곡소리가 높아졌다.
로에란그린은 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로트……. 이유가 뭐든 간에 우리 앞에서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마. 눈물은 인간성과 양심의 징표잖아. 하지만 자네는 우리의 비난만은 감수해야 해. 지금까지 이렇게 혼자 울고 있었다니 화가 나는군. 자네의 친구들은 전부 신의를 내버리고 달아났단 말이냐?”
“몇 날 며칠이나 종일 울었다죠.”
광대가 껴들었다.
“콧물을 찔찔 흘리고 울었답니다. 제가 직접 코를 닦아줬죠. 숨을 컥컥대서 등을 두들겨 주기도 했답니다. 그 눈물이 진주알이었다면 벼락부자가 됐으련만! 근데 이 양반 나이가 몇이죠? 푸줏간 아들 녀석이 소시지를 한입 훔쳐 먹고서 볼기를 처맞고 요렇게 엉엉 울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죠. 고 녀석 나이가, 아함, 다섯 살?”
광대의 손수건을 빼앗은 카이렛은 그걸로 제 눈을 닦았다.
로에란그린은 로트의 어깨를 그러안고서 그 위로 몸을 숙여 무언가를 속삭였다.
악사의 류트 연주는 어느새 비정한 연인에게 버림받아 폐인이 된 영웅을 애도하는 비가로 변했다. 그 곡조가 처량 맞고 절절할수록 연회장 내로 몰려온 암운이 짙어졌다.
벼락이 치던 그날 밤.
로트는 종달새가 울 무렵에 벨데케 가에서 도망쳤다. 포겔바이데 가의 젊은 하인 둘은 힌츠의 고함을 듣고 집 앞 가로에 나체로 엎어져 있는 주인을 데려가 침실에 눕혔다.
무의식의 경계를 오가는 로트의 발광은 이날 정점에 올랐다. 힌츠와 하인들은 주님을 부르짖으며 미친 개망나니가 파멸한다고 믿었지만 명이 질긴 주인은 저녁 종이 치자 잠에 빠졌다.
악몽에 시달리던 로트는 다음 날 새벽 종소리에 눈을 떴다. 곧이어 현실의 악몽이 노도처럼 달려들었다.
그는 의아했다. 불에 달군 인두로 맨가슴을 지지듯 괴로워하며 자문했다. 어째서, 왜 제 목숨이 그대로 붙어 있는지, 그것을 한탄하고 저주했다.
‘내가 바란 게 이거냐.’
그날 이후로 수천 번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바로 이걸까. 참을 수 없는 회한과 자기 환멸, 고통과 눈물 그리고 이젠하르트의 치욕과 고통, 그걸 원했던가.’
자신은 간절히 화평을 원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우애와 신의의 회복을, 화합을 바랐다. 틀림없이 그것을 열망했다. 이젠하르트의 치욕이나 굴욕이 아니다. 그의 복종도, 불명예도 아니다. 하물며 가장 추악한 정욕의 희생자는 더욱 아니었다.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
바라는 건 오직 화평이었다고 그는 거듭 괴롭게 되뇌었다. 그 열망은 편집광적인 집념이 됐다.
집념은 발광을 촉발시켰다. 제 사명과 신념이 옳음을 입증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욕구, 그게 집념으로 화했다. 세 친구는 그의 외고집과 무모함을 만류하고 지나친 몽상을 비판하고 발광을 경고했지만, 악마의 정열에 굴복한 그는 술책과 거짓으로 그들을 기만하고 따돌렸다.
‘내가 어리석고 무모했음을 인정해. 하지만 내 사명과 신념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증명할 방법이 뭐였을까. 직접 실행해보는 외에는 없었어. 행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게 한낱 몽상임을, 옳지 않음을 알까.’
그래서 실행으로 옮겼다. 일단 칼을 빼면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나운 전사처럼 부딪쳤다.
이제 그 결과가 드러났다. 참담한 패배였다. 수치스러운 실패였다. 남은 건 바닷물만큼의 고해와 참회의 눈물로도, 면죄부로도 살 수 없는 사악한 죄악뿐이었다. 가슴을 찢어대는 후회와 슬픔뿐이었다.
더 이상의 가책과 괴로움을 견딜 수 없던 로트는 얼마 후 벨데케 가로 찾아가서 이젠하르트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대답은 그 집의 충견인 쿤츠가 이빨을 드러내어 전했다.
다음 날도 찾아갔다. 이번엔 깅코가 합세해서 주인의 완고한 뜻을 알렸다.
다음 날은 뒷문에 매복해서 이젠하르트가 나오자 몸을 던져 다리를 붙들었다. 뒤늦게 달려온 쿤츠와 깅코는 불청객이 주인에게 어떤 무시무시한 대접을 받는가를 똑똑히 목격했다.
다음 날은 힌츠가 편지를 들고 찾아갔다. 힌츠는 한스 부자와 전투를 치르고 어린 한스에게 귀가 물어뜯긴 채 돌아왔다.
로트의 몸종이 이튿날 다시 찾아갔다. 뒤통수에 흉측한 화상이 생긴 늙은 한스는 로트의 편지를 몸종의 면전에서 활활 불태웠다. 그러고서 주인이 직접 답장을 보낼 것이라고 전했다.
로트는 그래서 기다렸다. 눈물로 비참한 하루하루를 보내며 답변을, 처벌을 기다렸다. 결국 답장은 오지 않았고 눈물은 마를 새가 없었다.
연회장을 눈물로 물들인 애절한 비가가 끝났다.
광대 밤바는 남자의 눈물 따위는 죄다 짜내야 한다며 마지막으로 장송곡을 요청했다가 카이렛에게 혼쭐이 났다.
밤바가 문득 목에 찬 방울을 울리며 창가로 달려갔다. 곧이어 발소리가 나고 연회장 출입문이 열렸다.
밤바는 허리띠에서 뿔 나팔을 빼내 불며 외쳤다.
“어서 옵쇼! 바이에른의 탕아, 볼로냐의 폭동 주모자께서 납시셨습니다!”
“밤바, 달콤한 탕아 녀석. 이 집 귀염둥이의 동태를 살피고 오라고 했더니 아예 눌러앉았군. 여어, 내 귀염둥이, 잘 있었어?”
입구에 등장한 이터는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서 로트를 살폈다.
로트는 눈물을 죄다 짜낸 터라 몸뚱이가 뻣뻣하고 기진맥진해서 일어나지 못했다.
냉큼 달려든 밤바는 로에란그린의 젖은 손수건을 쭉 짜보였다.
숙연한 낯으로 성호를 긋고 기도문을 외운 이터는 진홍빛 망토를 휘날리며 앉아서 로트의 수염이 까칠한 턱을 잡았다.
“우리 귀염둥이, 어디 얼굴 좀 보자. 에그머니! 이게 뭐야?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추남이 됐네. 고왔던 얼굴이! 쯧쯧. 알맹이는 죄다 눈물로 짜내고 쭉정이만 남았군. 그 속의 정열도 죄다 짜낸 것 같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제 송장만 치르면 되겠네. 얘, 밤바야.”
“네잇, 고해 신부를 데려올까요?”
“아니. 장송곡부터 골라봐. 악사한테 연주하라고 해. 로트, 자넨 심정이 어때? 무시무시한 역공에 맞설 각오는 돼 있겠지?”
카이렛은 이터의 옆구리를 찔러대다 로트에게 걸렸다.
눈이 퀭한 로트는 비렁뱅이가 제 외투를 잘라줄 만한 낯으로 그 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난감해진 카이렛은 이터의 귀를 잡아당겨 속삭였다.
“아직 로트에게는 말 안 했어.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말이 나와야지.”
로트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
이터는 은 테두리를 친 뿔잔의 맥주를 전부 비워내고 빙그레 웃었다.
“궂은일은 다 내 몫이지. 불운의 여신은 전령사로 미남을 뽑거든.”
이 대답에 로트는 순순히 일어나 앉아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그것에 묵종하겠다는 태도였다.
카이렛은 무심코 내뱉은 깊은 한숨으로써 침묵이 감도는 연회장 내에 불길한 전조를 퍼뜨렸다.
모두가 음울한 침묵을 고수하자 유례없이 진지한 태도를 한 이터도 자못 심각하게 말문을 열었다.
“로트, 세 가지 소식이 있어. 어떤 것부터 들을래? 좋은 소식? 나쁜 소식?”
“……. 좋은 소식.”
“깍쟁이. 양심도 없지. 좋은 소식이 있겠어?”
이터는 로트를 마주하고 엄숙히 말했다.
“세 가지 나쁜 소식이 있어. 첫 번째 소식. 어제저녁에 우리 숙부에게 방문객이 있었어. 양모중개업자인데 상파뉴(국제 시장)에서 왔다더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환전상 얘기가 나왔는데 순례 여행을 때려치우고 시장에 눌러앉은 작자니, 이스라엘의 백성(유대인)보다 잇속에 밝고 수완이 좋은 나자렛 인(기독교도)이니 하다 보니 상당히 귀에 익은 인물이 떠오르더라고. 귀가 솔깃한 숙부가 캐물으니까 그 환전상은 역시 자네 부친이더군. 상파뉴에서 뭘 하고 계셨는지 알아?”
“……. 혼자 계셨대?”
로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터는 빙그레 웃었다.
“맞았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거기서 현재 저울질을 하느라 몹시 바쁘시다네. 더불어 그 중개업자한테 이런 말을 했다더군. 귀향할 때까지 자기 아들이 영주의 외동딸 코를 꿰놓지 않으면 교황청에 뇌물을 먹여서라도 파문시키겠다고. 유감이야, 불운한 친구여. 이로써 자네 부친이 진군한다는 소문은 허위로 밝혀졌어. 십만 대군은커녕 남쪽 하늘에 펄럭이는 건 벨데케 가의 복수의 깃발이지. 자네는 오늘부터 맹금 앞에 놓인 뇌조 신세야. 두 번째 소식.”
얼굴이 허연 뇌조가 된 로트에게 혀를 차대며 이터가 말을 이었다.
“콘드비라무어스가 심술이 났어. 요새 부쩍 시종을 괴롭히고 숙부를 들볶아. 나한텐 하루 한 번씩 투창을 던져. 귀엽고 순결한 비둘기, 힐데가르트가 종일 비위를 맞춰줘도 헛수고야.”
“뭐? 힐데가르트는 수녀원에 갔다며?”
카이렛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성에 있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로트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 꼴을 본 이터는 그에게 눈을 흘기고, 옆구리를 맵게 꼬집었다.
“벨데케 가의 공주께서는 숙부의 볼모로 잡혀 왔어. 저번에 폭풍우가 몰아쳤던 날 새벽에 변장한 채 끌려왔지. 그럼 성에서 여태까지 뭘 했냐고? 어이, 광포한 정열의 희생양인 로트, 너무 자책하지 마. 힐데가르트가 탑에 갇히지는 않았으니까. 사실은 콘드비라무어스랑 라틴어를 배우고 있어. 그리고 하루 세 번씩, 물론 조석 미사 때도 성의 예배당에서 풍비박산 직전인 집안의 불운을 거두어 달라고 주님께 간원한대. 자네는 그 오라버니를 노리고 미친 지랄을 하느라 몰랐겠지만.”
“말이 볼모지 차라리 잘 된 거 아냐?”
카이렛이 말했다.
“그 음침한 집 구석보다는 거기가 낫지. 원래도 영주님 댁에서 살고 싶어 했고.”
“그것도 그렇지만, 벨데케가 난데없이 수도원으로 달아나고서 통 소식이 없으니 앞으로는 좀 더 현명하게 굴어라, 이런 충고인 거지. 이젠하르트에게 말야. 그리고 예방을 했달까.”
“뭘 예방해?”
“로트 이 녀석이 이젠하르트에게 힐데가르트를 납치하겠다고 협박했대.”
로트의 고개는 실 끝에 잡아맨 추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이렛은 로트를 나무라고 힐데가르트를 동정했다.
“그 여자도 운이 참 없어. 오라버니는 폭군이고 사촌 오라버니는 철부지 원숭이요, 한때의 연인은 요 모양 요 꼴이고, 이제는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백작이 청혼한답시고 설치잖아.”
“힐데가르트가 불운하다고? 글쎄, 속단은 일러.”
이터가 반박했다.
“볼모로 잡혀 오자 힐데가르트는 며칠간 부모 얘기를 꺼내면서 몹시 슬퍼했어. 굴욕의 위기에 처한 오라버니 얘기를 할 때는 궤짝에 쓰러져서 하염없이 울었지. 하지만 내가 누구냐?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가 눈 앞에서 쓰라린 눈물을 흘리는데 목석이 아니고서야 어떤 사내가 가만히 있겠어. 내가 거창하게 재롱을 한 판 떨어줬더니 살포시 웃더군. 에라, 모르겠다 말린 두꺼비를 보여줬을 땐 자지러지게 놀라면서 내 품에 안기지 뭐야. 두 뺨을 능금처럼 붉히고……. 하아, 나한테 마음이 있나 봐. 어쩐지 날 보는 눈길이-…….”
“흥, 이미 백작이 채간 비둘기야. 백작이 금식 기도에서 돌아오는 대로 결혼식을 올리겠지. 세 번째 소식은 뭐야?”
“세 번째 소식. 투구를 쓴 여신인 콘드비라무어스가 요즘 무료해서 미치려고 해.”
이터가 말을 이었다.
“그 여자의 무료함을 달래주려면 미남이 꼭 피를 흘려야 하지. 내 머리로 화병을 들이박아서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그런데 이번엔 안 먹히더군. 왜냐. 마상 창 시합을 보고 싶대.”
이터는 그러고서 망토 안에서 서한을 꺼내 로트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고대하던 답장이야. 자네 운명의 판결문이지.”
“……. 이젠하르트가 보냈다고?”
로트가 안색이 회반죽처럼 굳어서 물었다.
“응. 얼마 전에 자네가 구애 편지를 보냈잖아. 그 답장이나 마찬가지지. 조금 전에 아래층에서 마침 벨데케의 종복이 이걸 가져왔길래 내가 힌츠에게서 가로채 왔어. 읽어봐.”
편지를 건네받은 로트는 그걸 콱 움켜쥐고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단단히 굳어버린 그의 낯빛이 깁작스레 암운이 걷히듯이 맑고 밝아져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로에란그린, 자네가 대신 읽어줘.”
로에란그린은 서한의 봉인을 뜯고 제일 먼저 발신인을 확인했다.
“결투장이야.”
결투장임을 예상했음에도 카이렛은 의아했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로트의 부친께서 진군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으로 드러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결투장이 오다니. 이젠하르트가 그 소식을 어떻게 벌써 알았지?”
“어제 저녁에 이젠하르트도 성에 있었거든.”
이터가 대답했다.
그는 이젠하르트가 최근 며칠간 성에서 살다시피 했고 어제 저녁에 양모 중개상인이 영주의 식탁에 초대받았을 때 콘드비라무어스의 옆자리에서 동석했다고 했다.
그리고 상인이 물러나자마자 발아래 무릎을 꿇고서 영주에게 로트와 결투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간청했으며, 그 간절한 태도로 판단컨대, 누이동생을 위로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최근 성에서 상주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소식에 카이렛은 분노했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님이 결투를 허락하셨다니 이건 너무 불공정하고 불공평해. 이젠하르트는 숲의 파괴자야. 그런 놈하고 마상 창시합을 하라는 건 로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거나 마찬가지야.”
“우리 숙부님은 물론 처음엔 불허하셨지. 그래서 이젠하르트가 ‘우정의 찌르기’를 먼저 제안한 거야.”
이터는 ‘사형선고를 받은’ 로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설명했다.
“어제 이젠하르트는 처음엔 자네한테 검술 결투를 청하겠다고 숙부께 허락을 구했어. 자네도 검은 다룰 줄 아니까. 숙부께선 안 된다고 했어. 그래도 간곡한 청이 이어지자 한 발 물러서서 벨데케 가가 자네 가문에 사죄하라는 권고를 취소하셨어. 그 이유는 자네도 알 거야. 자네 부친이 진군한다는 소식이 허위로 드러난 건 둘째 치고, 자네가 그 동안 벌인 미친 짓이 이웃 마을까지 퍼졌어. 어쨌든 이젠하르트는 단단히 결심했는지 뜻을 굽히지 않더군. 그런데 콘드비라무어스가 자기는 검술 결투는 딱 질색이라며 초스트(1:1 마상 창 시합)를 제안했어. 둘이서 한 판 붙어보라는 거지.”
이터는 부르르 몸을 떠는 로트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내가 그래서 술잔을 쾅, 내던지고 콘드비라무어스에게 따졌어. ‘무자비한 마녀야, 초스트라니? 차라리 비둘기랑 새매한테 한판 붙어보라고 해. 잔인하기도 해라.’ 그랬더니 콘드비라무어스가 교만하게 코를 쳐들고 받아치더군. ‘그럼 새매한테 비둘기를 훈련시키라고 하세요. 그 방탕한 비둘기가 사지가 멀쩡하고 무지막지하게 힘은 세니 훈련을 시키면 되잖아요. 보세요, 명예와 신의의 기사님. 당신께서 그토록 결투를 원하신다면 그 정도의 수고는 감수하셔야겠죠? 비둘기에게 매의 발톱과 날개가 없다면 가짜를 달아줘서라도 맞서야 당신께서도 체면이 서지 않겠어요? 그럼 당장 날짜를 잡도록 하세요. 참, 훈련을 혹독하게 시켜야 할 거예요. 처음 판부터 낙마를 해버리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이렇게 된 거야.”
진저리를 친 이터는 엄숙히 성호를 그었다.
“자, 로트, 자네를 위해 신의 가호를 빌겠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