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사탄의 부활 (18/33)

6. 사탄의 부활

이날 밤에는 콰직! 쾅쾅! 번개가 끝없이 내리쳤다.

늙은 한스는 주님을 외치며 허겁지겁 뒷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들고 나갔던 등불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고 옷은 흠뻑 젖었다.

아들놈을 깨우다 쿤츠가 짖는 소리에 집 밖으로 뛰쳐나갔던 그는 가로에 면한 나무 기둥 아래서 박살이 난 창유리 조각과 부러진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그러나 주인을 따라 밤도둑을 쫓으려던 충성과 용기는 번갯불이 번쩍이자 모조리 타버렸다.

“흐억!”

늙은 한스는 뒷마당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드디어 심판의 날이 왔구나! 자비로운 주님, 이 충직한 한스를 굽어 살피소서. 커헉, 주님의 불 칼이 내리친다! 악마가 죄인을 잡으러 왔구나!……. 헉, 거기 누, 누구요?”

공포에 질려 허둥대던 그는 출입구인 홀을 향해 소리쳤다. 그곳에서 지익, 지익 기묘한 소음이 악귀처럼 울부짖는 비바람을 뚫고 들렸다.

지익, 지익.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을 스치며 긁는 듯한 그 소음은 아치형의 홀을 괴기스럽게 울리며 점점 더 커졌다. 이윽고 묵직한 꼬리를 매단 검은 그림자가 뒷마당에 나타났다.

한스는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뒷걸음질치며 헐떡였다.

“허억……. 악, 악마가 나타났다!……. 꼬리 달린 악마가……!”

이때 번개가 콰쾅! 하늘을 찢어 뒷마당을 훤히 밝혔다.

“나, 나리!”

뒷마당에 들어선 이젠하르트는 바닥에 자빠진 한스를 지나서 마구간으로 향했다. 축 늘어진 무언가를 끌고서 그걸 마구간 입구에 내던졌다. 그러다 육중한 무게에 휩쓸려 중심을 잃고 같이 쓰러졌다.

한스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그, 그게 대체 뭡니까, 나리?”

“밤도둑이다.”

이젠하르트가 대답했다.

한스는 얼른 달려가서 밤도둑의 낯바닥을 보고 외쳤다.

“헉! 포, 포겔바이데!”

“마구간에 처넣어.”

이 말만을 남기고 이젠하르트는 집안으로 사라졌다.

망연자실한 한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주인의 명에 따랐다. 오랜 시간을 끙끙대며 로트의 두 다리를 끌어다 마구간 바닥에 던져 놨다.

빗물이 흐르는 밤도둑의 안색은 희다 못해 푸르죽죽했다. 피범벅이 된 콧등은 부어 있고 눈두덩과 입술은 검푸르렀다. 그 흉측한 몰골에 소름이 끼쳐 한스는 짚더미를 위에 덮어버렸다. 그러고서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죽었군……. 죽었어……. 개망나니 원수가 드디어 천벌을 받았구나. 이렇게 빨리 해치우실 줄은 몰랐거늘 기어코 사달을 내셨구나.…… 잘 뒈졌어. 잘 죽었지……. 하지만 저 송장을 왜 끌고 오셨을까. 갖다 내버리지 않고……. 하이구, 저 악귀 같은 몰골을 좀 보게.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덤빌 것 같구먼.”

뒷마당을 떠난 이젠하르트는 2층의 가족실로 올라갔다. 온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발밑에 작은 시냇물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의 빗물을 닦아내자 그 두 배의 빗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목덜미에는 김이 오르고 숨이 찼다.

축 늘어진 원수의 몸뚱이를 어깨에 짊어진 채 암흑 속에서 헤매고, 내리꽂히는 번개를 피하고 그러다 진창에 자빠지고, 다시 질질 끌고 온 터라 모든 기운이 빠졌다.

하지만 미처 기력과 냉정을 되찾을 새도 없이 빗속을 뚫던 돼지치기의 비명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모퉁이 주택의 닫힌 창 너머로 어른대던 등불과 사람의 그림자도.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때, 쾅쾅쾅, 문짝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나리, 나리! 접니다. 나리!”

늙은 한스가 문밖에서 다급히 외쳐댔다.

그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이젠하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문을 열고 소리쳤다.

“제기랄! 놈이 죽었나?”

“예?”

“죽었냐니까? 맙소사, 기어코 죽었군! 망할 자식 같으니!”

늙은 한스는 더욱 놀라 소리쳤다.

“죽었냐고요? 아닙니다, 나리! 살아난 걸요. 송, 송장이 살아났어요! 시커멓게 떴던 입술이 달싹대더니 갑자기 코피가 줄줄 흐르며 살아났어요! 숨까지 쉽니다요. 아이구, 하느님 아버지! 사탄의 부활이에요!”

“제기랄. 그거 다행이군.”

“예?”

늙은 한스는 주인의 표리부동한 낯을 멍청히 쳐다봤다. 대답과 그 표정이 극과 극으로 달랐다.

“사, 사탄이 부활했는데 다행이라고 하신다면-…….”

“쉿. 목소리를 낮춰. 하인들을 다 깨울 셈이냐.”

이젠하르트는 어안이 벙벙한 늙은 한스의 뒷덜미를 잡아서 아래층 계단으로 난폭하게 떼밀었다.

“입 닥치고 마구간으로 가라. 문지기 영감이건 누구건 아무도 얼씬 못하게 감시하고 거기서 놈을 지켜봐. 놈이 깨어나거든 당장 알려라. 죽지 않게 잘 지켜봐. 놈이 죽어선 안 돼!”

“죽어선 안 된다고요? 하지만 나리께서 이미……. 그, 그러니까 원래 송장이었는데요?”

“빌어먹을! 잔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서 놈을 지켜봐. 나도 곧 내려가겠다.”

한스를 쫓아 보낸 이젠하르트는 가족실 안을 어지럽게 오가며 냉정을 되찾고 산란한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적막이 찾아온다 싶으면 어김없이 터지는 뇌성벽력이 집중을 방해하고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짙어진 의혹이 이 순간 되살아나서 신경을 긁고 혼란을 가중시켰다.

‘악마의 부활이라.’

그는 지끈대는 머리를 양손으로 누르며 생각했다.

‘그래, 늙은이의 말이 옳다. 사탄의 부활이야. 죽일 수도 없고 죽인다 한들 어김없이 되살아나는 불사의 사탄……. 사탄의 부활이다.’

“나리! 나리!”

불길한 의혹의 소용돌이는 여기서 끊겼다. 늙은 한스의 애처로운 호소가 문틈 사이로 다급히 울렸다.

이젠하르트는 사납게 문을 열어젖혔다.

“나리, 큰일입니다. 큰일이에요!”

“무슨 일이냐, 또? 놈이 깨어났나?”

“그게 아니에요! 살아났다 싶었는데 이젠 꼼짝을 안 합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에요.”

“뭐?……. 죽진 않았겠지?”

“아직은 숨통이 붙어 있어요. 하지만 저대로 뒀다간 죽을 겁니다. 얼굴도 시퍼렇고 손발도 시퍼렇고 코피를 계속 줄줄 흘립니다. 몸뚱이는 얼음장처럼 차고요. 짚을 덮어줬는데도 사지를 벌벌벌 떨고 있어요. 어째야 할까요, 나리? 저대로 내버려 두면 이 집안에서 죽습니다. 송장이 또 송장이 되는 게지요! 아이구, 하느님! 이게 무슨 요지경이람.”

“…….”

“나리, 차라리 밖에다 내버리는 게 어떨까요? 그럼 벼락이라도 맞아서 죽을 텐데요?”

“멍청한 소리!”

이젠하르트는 난폭하게 쏴붙였다.

“아직은 놈이 죽을 때가 아냐. 당장 살려내.”

“하지만 벌써 다 죽은 목숨인데요?”

마구간 바닥에 나뒹구는 로트의 처참한 몰골을 거듭 설명하며 늙은 한스는 벨데케 가의 철천지원수가 마침내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인은 기뻐하기는커녕 방안을 정신없이 오가며 대답이 없다.

그런 주인에게서 유례없는 흥분과 당황을 발견한 한스는 매우 놀랐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린들 들려오는 건 오로지 거친 욕설과 이상한 혼잣말이라서, 원수를 살려내야 한다는 주인의 말뜻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명령을 따르고자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나리, 그렇담 이리로 데려오겠습니다. 마구간에 저대로 뒀다간 큰일 납니다.”

“뭐라고?”

그러자 이젠하르트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누굴 어디로 데려와?”

“저 산송장 말입니다. 여기로 데려오지 어디로 데려오겠어요? 살려내야지요? 뜨끈히 불을 피워서 몸을 지져줘야죠. 이 방에만 벽난로가 있으니까요.”

“벽난로를?”

“그럼요. 포도주도 한 잔 먹여야겠어요. 그럼 벌떡 일어날 겁니다.”

“포도주까지?”

“그럼요. 그래야 몸이 금세 뜨끈해지죠. 주인 나리께서도 늘 그러셨어요.”

“…….”

이러한 제안에 주인이 칼에 찔린 듯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한스는 여세를 몰아붙였다. 사고뭉치에 우유부단한 늙은 벨데케의 몸종이자 충복으로서 그간 갈고닦은 해결사의 능력이 되살아났다.

“어쩔까요? 저대로 얼어 죽게 둘까요, 아니면 살려낼까요?”

이젠하르트는 한스를 노려보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고는 목구멍을 쥐어짜서 마치 독약을 마신 듯한 표정으로 괴롭게 중얼댔다.

“……. 데려와라.”

한스가 마구간으로 가버리자 이젠하르트는 양손으로 이마를 짚고 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로트가 들이박은 이마는 깨질 듯이 지끈대고 그 안에선 과거의 망령이 날뛰어 혼란만 가중됐다. 어깨에선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깨닫지도 못했다.

한참을 방안에서 서성인 그는 문득 마구간에 생각이 미쳤다. 원수를 데리러 간 늙은 한스가 감감무소식이었다.

‘왜 이렇게 늦지? 설마 그 자식이……!’

놈이 기어코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치솟자 그는 한달음에 마구간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뭣들하고 있어? 죽었나?”

“나리!”

늙은 한스는 그를 보자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곁에는 눈이 퉁퉁 부은 어린 한스가 낯짝이 파래져서 로트의 다리 한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머지 한 짝을 잡고 있던 늙은 한스는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하이구, 나리. 곧 갑니다. 하지만 무척 무거워서요. 돌덩이를 삼켰는지 전혀 꼼짝을 안 해요. 몸뚱이는 얄팍한데 뭘 삼켰기에 이렇게 무거울까요? 바윗돌이에요.”

“제길. 저리 비켜.”

이젠하르트는 둘을 떼어놓고 로트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직접 어깨에 떠멨다. 2층의 계단을 오르던 그는 도중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군마의 사체를 짊어진 듯한 무게에 안 그래도 기력이 다한 다리가 힘을 잃고 꺾여버렸다.

그가 죽은 듯이 계단에 엎어져 있자 한스 부자가 기겁하고 달려들었다.

이젠하르트는 그 둘을 쫓아버리고 로트를 다시 떠멨다. 그러고서 가족실 안으로 간신히 짊어지고 가서 바닥에다 내던졌다.

어린 한스는 포도주를 가지러 달려나갔다. 늙은 한스는 난로를 피웠다.

완전히 탈진한 이젠하르트는 체스 테이블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아서 이마를 짚었다.

난롯불이 활활 타올라 싸늘했던 방안을 데웠다.

한스 부자는 산송장을 난롯가에 눕혀놓고, 불을 피우고, 뿔잔에 담은 포도주를 송장의 목구멍에 들이붓고, 양가죽을 덮어주고, 마지막으로 사탄의 부활이라며 면상에다 십자가를 들이대다가 밖으로 쫓겨났다.

소란을 참을 수 없어 둘을 쫓아낸 이젠하르트는 젖은 옷을 입은 채 체스 테이블에 앉았다.

산송장은 양가죽 아래로 두 발을 내보이고 누워 있었다. 얼굴은 음영이 져서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마치 반쪽짜리 가면을 쓴 듯이.

‘저놈은 누구냐.’

이젠하르트는 자신에게 물었다.

저놈은 포겔바이데라고 그는 스스로 답했다.

그래. 숙적 포겔바이데다.

하지만 왜 놈이 저곳에 있지?

어째서 내 집에 버젓이 누워 있는 걸까?

누가 데려왔을까?

이게 환상이나 악몽이 아니라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저 원수 놈을 네가 직접 데려왔다고 그는 자신에게 답했다.

누가 데려왔다고?

네가 직접 데려왔다.

내가?

그렇다, 하고 마음속의 또 다른 그가 거듭 속삭였다.

내가 데려왔다니? 무엇 때문에?

그는 놀라서 되물었다.

놈을 살려내려고 네가 직접 데려왔다고 또 다른 그가 거듭 말했다.

맙소사! 내가 데려왔다고? 숙적을 살려내려고?

그렇다. 살려내야만 한다고, 그는 그것을 쓰라린 패배의 일부로 자인하며 생각을 이었다.

저놈을 반드시 생환시켜야 한다. 오늘 밤 내에 살려내야 한다.

놈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내 창에 꿰뚫려 죽든지 발광이 나서 미쳐 죽든지 둘 중 하나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오늘 밤만은.

그렇다면 너도 그 소문을 믿는구나, 하고 머릿속의 또 다른 그, 사악한 악마가 그를 조소하며 물었다.

천만에. 전혀 믿지 않는다. 환전상이 대군을 이끌고 진군한다는 소문은 허위다. 말 그대로 유언비어다.

정말로 믿지 않느냐?

믿지 않는다. 거짓과 기만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오로지 나 자신뿐. 내 육신과 직감, 창과 방패뿐이다. 유언비어 따위에 기만당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반쯤은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는 자조하며 생각을 이었다.

저놈을 회생시켜야 한다. 그 소문이 포겔바이데의 교활한 모략이건, 탐욕스러운 상인 놈들의 농간이건 어쨌든 너는 역습 당했다. 굴욕적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네 부모를 수도원으로 쫓아 보냈다.

그건 요양 때문이었다고 그는 자신을 변호했다.

아니, 그 때문이 아니었다. 네 부모가 오욕 앞에 무릎을 꿇고 가문을 욕되게 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의 부친은 어떠했나. 그는 영주의 성에서 돌아오자 자리에 누워 아들의 동정과 연민을 애걸했다. 창과 방패를 스스로 꺾고 원수에게 굴욕의 입맞춤을 하자고 애원했다. 나태와 비겁이라는 나병에 걸려 제 안위만을 애걸하는 늙고 병든 당나귀였다.

모친은 어떠했나. 그녀는 허세의 비단옷을 걸친 아담의 갈빗대였다. 작은 불씨가 튀자 삽시간에 잿더미로 화해버린 허수아비였다.

늙은 당나귀와 허수아비 한 쌍.

그들은 안위와 타성에 젖어 바르쿠스의 비극을 잊었다. 의무를 망각했다.

기사 가문의 후손이 명예를 사수하지 않는다면, 황금만을 좇는 천박한 상인의 무리와 다를 바가 뭘까?

내 삶은 바르쿠스의 비극으로 운명 지어졌다. 놈에게 설욕하고 명예를 회복하리라. 대가와 희생이 요구된다면 무엇이든 희사하겠다.

그래서 힐데가르트를 영주에게 보냈나?

그렇다. 그래선 안 될 이유가 뭐냐.

영주는 내 충성의 맹세를 의심했다. 벼랑 끝에 몰려서 저놈을 죽이고 야반도주하리라 의심했겠지.

참 재미난 일이다. 나로선 손해될 게 뭐냐.

볼모로 잡혀간 내 귀엽고 소중한 누이여, 성에서 마음껏 라틴어를 배우렴. 차라리 너를 영원히 탑 속에 가둬주길. 드높은 성벽과 수비대의 장창이 음탕한 악마의 희롱과 거짓된 사랑으로부터 너를 보호해주리라.

타닥.

타닥.

“…….”

난롯불의 불씨가 튀는 소음에 이젠하르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핏기가 도는 건지 난롯불의 희롱인지 모를 반쪽뿐인 로트의 붉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놈의 몰골은 어째서 저 모양이냐.’

그건 저놈이 발광 난 미친 개자식이기 때문이다, 라고 그는 생각했다.

만필요트 백작이 금식 기도를 떠나서 유감이다. 예상은 했지만 어쨌든 유감이다. 그는 신앙이 깊고 베풂에 인색하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음험할 정도로 신중하고 약삭빠른 처세술사다.

내 계획이 무모한 도박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실전에 앞서 신이 아니고선 누가 승패를 장담할까.

무모한 도박일수록 적의 허점을 찌르며 허황될수록 승자는 영웅이 된다. 오합지졸의 까마귀 떼를 몰살하고도 영웅이 될 수 있다면.

만일 우리가 승리한다면, 영주는 도시의 실권을 되찾고 환전상 포겔바이데와 유대인들의 채권을 불태운다. 그자와 상인 조합 일당은 반역의 죗값을 치른다.

백작은 이 기독교도의 도시에서 오합지졸 약탈자들의 목을 베고 힐데가르트를 얻는다. 반역의 배후로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 도시의 권익을 송두리째 획득한다.

저놈의 재산은 내 몫이 된다. 그래서 부러진 발목을 끌고서 성과 수목원을 오갔다.

‘그런데……. 빌어먹게도…….’

그 또한 저 교활한 까마귀의 계략이었다고 그는 고배를 삼키며 생각했다.

놈은 장담한 대로 날 물 먹였다. 금식 기도를 떠나기 전 백작은 콘드비라무어스를 만났다.

천막에서 둘은 뭘 했을까? 정답게 트루바두르의 연애시나 경청하며 체스나 두었을까.

콘드비라무어스, 그 여자는 내게 청혼하려 했을까.

나야말로 그녀와의 결혼을 진정 기대했나.

물론 아니다. 우리는 순진한 바보는 아니니까.

그 여자는 정복자다. 본능에 따라 남자를 정복하려는 야만적인 여자다. 구세주처럼 등장해 회교도를 섬멸한 몽골의 야만인처럼.

그들은 성왕 루이가 주님의 뜻으로 명하노니 감히 십자군에 맞서지 말고 공손히 물러나라고 경고했을 때도 무슨 개소리냐고 물었다. 성지니 순례니, 이교도의 땅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모욕이니, 신의 뜻이니,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과 약탈, 살육, 정복 그리고 또다시 전쟁, 정복. 그들은 야만인이었고 타고난 정복자였다.

저놈이 바로 그런 여자를 정복했다.

그렇지 않다면 야만족의 여왕이 고결한 사랑이니 사랑 봉사의 맹세니, 헌신을 다하는 진정한 사랑 따위를 갑자기 운운할 리 있을까.

내 사랑의 맹세가 진실함을 물을 리가 있나.

내 지난날의 영예와 미래의 영광을 모두 그녀에게 바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요구할 뿐인데, 어째서 영리한 그녀가 어리석게도 사랑 운운했을까.

바로 저놈의 농간 때문이다.

호언장담한대로 나를 또 한 방 먹였다. 저 미친 개자식이.

‘저놈의 정체는 도대체 뭐냐.’

자꾸만 몽롱해지는 의식을 다그치며 그는 사고의 실마리를 이었다.

저놈이 황야에서 끌려가던 얼간이였음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헛된 몽상에 빠져 영원하고도 헌신적인 사랑의 맹세를 떠들어대던 지크프리트, 아담의 갈빗대에 헛된 눈물을 쏟던 호색한.

실상 놈은 영악한 까마귀였다.

광장에서 저놈이 뭐라고 지껄였던가?

나를 적기사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어디 해보렴, 개자식아. 이스트리엔을 떠난 이후로 나는 용병으로서 적을 쳐야 했고, 그 보상을 원했고, 따라서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너는 또 이렇게 말했지. 내가 끝내 굴복하지 않으면 나를 바르쿠스로 만들겠다고. 바로 내 면전에서, 뱀의 혀를 날름대며 해맑은 낯짝으로 지껄였다.

왜 저놈을 분수대 대신에 끓는 역청 속에 처박지 못했을까.

저놈의 실체는 도대체 뭐냐.

놈은 검은 숲에서 악귀에 홀려 되돌아왔다.

누구에게 영혼을 팔았을까.

불사의 전사, 아이케. 그일까?

놈의 인두겁을 쓰고 나를 찾아온 걸까.

아이케 폰 레브고프, 미덕과 신의의 기사.

슈바벤의 마상경기에서 우리는 명성과 영광을 함께 나누었다. 우리의 창과 방패를 뒤덮은 귀부인의 소매와 보석들. 빛나는 승리. 정당한 승패. 영예의 나날들.

아이케, 소중한 형제여, 네가 후작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 나는 너를 축복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공정한 승패였던가.

네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예였던가.

영혼과 육신이 순결한 리아세, 그 여자는 나를 야심가라고 불렀다. 고귀한 품성과 신의를 저버리고, 사랑 봉사와 헌신의 서약을 부정하며, 오로지 명성만을 좇는 야심가라고 불렀다. 그러고서 아이케의 무덤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결코 내 아내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젠하르트?’

이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귀에 닿을 듯 생생하면서도 또렷한 음성이었다.

이젠하르트는 몽롱해진 정신을 가다듬고 귀를 기울였다. 더욱 생생하고 맑은 음성이 다시 그를 불렀다.

“이젠하르트, 정다운 친구여, 우리 화평의 입맞춤을 나누자!”

“…….”

“우리는 어려서부터 함께 들판을 누비며 사슴을 쫓아다녔지. 흰둥이 수사슴을 본 적이 있어?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고집쟁이 이젠하르트, 내게 무릎을 꿇고 입맞춤을 청해다오. 이젠하르트!”

사뭇 정답게 그를 불러대던 로트의 음성이 갑자기 뚝 끊겼다. 간절한 외침과 깊은 한숨은 난롯불의 그을음처럼 공중으로 흩어졌다. 허공을 더듬어댄 두 팔은 양가죽 위로 힘없이 늘어졌다.

이젠하르트는 관자놀이를 눌러서 몽롱한 정신을 일깨우며, 단절된 상념의 꼬리를 되짚어 나갔다.

저놈이 원하는 게 뭘까.

화해의 입맞춤일 뿐이라고 놈은 말했다.

하지만 저놈은 교활한 까마귀다. 결백을 주장하는 천연덕스러운 낯바닥으로 집요하게 화평을 애걸하지만, 그게 놈이 택한 복수의 방식이다. 단검을 품고서 굴욕의 키스를 강요하는 밤도둑.

비에 흠뻑 젖어 굳은 몸이 풀리자 피로가 몰려왔다. 어깨에서 배어난 핏물은 가슴께로 번졌다. 동그란 빗물 웅덩이가 발밑에 고였다.

그 속에 작은 주홍색 꽃불처럼 난롯불이 비췄다. 달칵, 문소리가 나고 호리호리한 그림자가 그 위를 지나갔다. 그림자는 마른 장작을 난롯가에 쌓아놓고, 부지깽이로 불을 쑤시고, 산송장의 얼굴 위로 허리를 굽혔다.

이젠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늙은 한스가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쇳소리를 울리며 바닥에 부딪쳤다.

그 소리에 눈을 뜨자 한 덩어리로 뒤엉킨 두 개의 인영이 보였다. 두 팔을 허우적대며 입을 크게 벌린 한스의 눈은 흰자가 툭 불거져 있었다.

“허억! 사, 사람 살려! 사탄이다! 우어억!”

-!

바닥에 쓰러진 한스는 무너진 장작더미에 깔렸다. 그 멱살을 잡아 올린 시커먼 인영이 불씨를 휘날리는 난롯불에 한스의 머리통을 처넣었다. 화락, 불꽃이 올라 머리통을 삼켰다.

이젠하르트는 의자를 쓰러뜨리고 튀어나갔다.

“포겔바이데!”

“나, 나리! 사람 살려! 커억!”

“놔! 이 개자식! 손을 놔! 놔!”

“우아악!……. 흐억! 컥!…….”

“제기랄! 밖으로 나가! 어서!”

뒤통수가 타버린 한스는 피를 흘리며 기어나갔다. 장작을 뒤통수에 처맞고 쓰러진 로트는 벌떡 일어나서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퍽-

두 번째 장작이 이마를 정타했다.

로트는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다 다시 어깨가 콱 움켜잡혔다. 손이 뿌리쳐지고 팔이 비틀렸다. 바닥에 쓰러져 짓눌렸다. 몸부림을 치고 벗어나서 또 달려들자 묵직한 도자기가 정수리를 쾅! 내려쳤다.

“으…….”

산산 조각난 파편을 뒤집어쓰고서 로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터진 코피가 사방에 튀었다.

뒤로 물러선 이젠하르트는 숨을 삭이다 그에게 다가섰다. 도자기의 파편이 발밑에서 으스러졌다. 로트는 미동조차 없었다.

기절했나 싶어서 발로 로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 자식……. 단단히 미쳤군. 악귀에 홀린 정도가 아냐. 발광으로 곧 죽을 판이야. 이 정도일 줄이야……. 빌어먹을……. 죽지는 않았겠지?’

젖은 가죽 신발이 연이어 어깨를 건드렸다. 반응이 없다.

툭툭. 툭툭.

역시 무반응이다.

어깨를 손으로 잡아서 몸을 똑바로 눕혔다. 그러자 로트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곳에 시선이 끌린 이젠하르트는 별안간 눈살을 찌푸리고 튜닉을 아래로 잡아 찢었다. 그대로 끝까지 찢어버리자 맨몸뚱이가 불빛에 전부 드러났다. 충격이었다.

‘이게 무슨 꼴이냐.’

불쾌한 경악을 억누르며 그는 생각했다.

‘온몸이 상처와 피멍투성이군. 누구한테 얻어터졌나. 밤낮 미쳐서 쏘다니더니 이 짓을 하고 다녔구나. 발광도 이 정도면 중증 자해야. 스스로 제 무덤을 파니…….’

이때였다.

로트가 눈을 번쩍 떴다. 치켜 오른 얇은 눈꺼풀 아래서 초록색 눈이 부엉이 눈알처럼 커졌다. 멍하니 눈꺼풀만 깜박이며 제 눈을 비벼댄 로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아서 소리를 질렀다.

“허억! 깜짝이야! 네, 네가 왜 여기 있지?”

“……!”

“이젠하르트, 네 녀석이군! 네 녀석이 왜 여기 있어?”

아무런 대꾸가 없자 로트는 허겁지겁 주변을 살피고, 천장을 보고, 난롯불을 쳐다봤다. 그대로 얼떨떨해 있자니 험악하다 못해 으스스한 지옥의 저음이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거든 나가라.”

이젠하르트가 말했다.

“불사의 아이케, 유감이지만 멍청한 짓을 하셨군. 하고많은 몸뚱이 중에 하필 그런 인두겁을 빌려 쓰다니.”

“무, 무슨 소리야? 여긴 어디야?”

“내 집이다.”

“헉! 네 집이라고? 제기랄! 나를 납치했나?”

이젠하르트는 단검의 칼자루를 으스러지게 쥐었다 놓았다.

“저기가 문이다.”

그는 오른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넌 미친 지랄을 하다 기절했어. 정신을 차렸으면 일어나서 저기로 꺼져.”

-!

이 순간 집을 흔들어대는 뇌성벽력에 로트는 펄쩍 뛰어올랐다. 천지를 밝힌 벼락이 의식을 새하얗게 일깨우자, 그는 도로 주저앉아서 머리를 쥐어뜯고 몸을 떨었다. 피 딱지가 앉은 입술에선 괴로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기랄……. 이제 기억이 나는군. 빌어먹을……. 그랬지. 난 빗속을 달렸어. 힌츠가 등불을 들고 나를 뒤쫓았는데……. 그 영감을 빗물 웅덩이에 처박고 계속 달렸지……. 그러다 눈앞이 번쩍이며 괴한과 부딪쳤는데……. 놈을 뒤쫓았고……. 그러고서 번갯불에 맞았어. 그렇군. 그래서 의식을 잃었군. 제기랄…….”

‘뭐, 이 자식아? 번갯불에 맞아? 돌머리로 남을 들이박고서?’

“……. 이젠하르트.”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사를 흘끔 올려다본 로트는 불쑥 얼굴을 붉혔다. 은근한 놀라움과 호기심의 눈초리가 방안 곳곳을 살폈다. 그러다 사뭇 부끄러우면서도 흥분한 듯, 기쁨과 기대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가 날 구해준 거냐?”

“내가 널 구했냐고?”

이젠하르트는 지옥의 저음으로 되물었다.

로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반신반의하면서도 수줍게 두 뺨을 붉혔다.

“날 여기로 데려온 게 너지? 저건 포도주 통인데 내 목구멍에서도 달콤한 포도주 맛이 나는군. 난롯불도 활활 피우고? 그렇지?”

“그래. 내가 널 구했어.”

“아, 역시 그랬군.”

“그래. 내 목숨을 걸고 빗속에서 널 구했지.”

이젠하르트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벼락을 맞고 죽어가던 널 내 어깨에 떠메고 직접 여기로 데려왔어. 죽게 내버려둘 수도 있었지만 이제 와서 어이없게 비명횡사한다면 그간의 내 노고가 아깝지. 그래서 널 데려왔어. 알았으면 그만 꺼져라. 바윗돌 같은 네놈을 끌고 오느라 피곤해 죽을 판이니까.”

“아, 그러지. 미안해.”

로트는 허겁지겁 일어섰다. 창백했던 얼굴은 한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이 이젠하르트의 집안에 와있고 마지못했을망정 보살핌을 받고 나니 실제임에도 꿈처럼 얼떨떨하고 놀라운 만큼 뜻밖의 기쁨도 컸다. 그 기쁨이 너무 커서 잠시나마 그간의 혈전과 발광의 기억은 깡그리 잊었다.

“폐를 끼쳐서 미안해. 어쨌든 참 고맙다. 날 구해주다니……. 난롯불이 뜨끈하니 아주 좋군. 너도 좀 가까이 와서 불을 쬐지 그래? 푹 젖었군. 나 때문에 한잠도 못 잤어? 무척 피로해 보여.”

“…….”

“알았다. 그럼 난 갈게.”

이젠하르트의 푹 젖은 몰골과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보일 만큼 피로한 안색, 바닥의 빗물 웅덩이를 본 로트는 순순히 문으로 갔다.

문고리를 잡은 그는 머뭇대다가 할 말이 남은 듯 살그머니 뒤를 돌아다봤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철천지원수를 여기까지 끌고 왔을 기사의 입장을 되새겨보니, 뭔가 사례나 위로의 말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막 입을 연 순간 축축한 뭔가가 날아와 얼굴과 가슴팍에 철퍽! 들러붙었다.

로트는 그걸 떼어내며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이게 뭐야?”

“네 넝마니까 가져가라. 냄새가 고약하니까.”

“이게……. 내 거냐?”

“보면 몰라? 네놈의 몸뚱이를 봐.”

로트는 손에 쥔 검은 튜닉 뭉치를 지나서 전라인 제 몸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왜 발가벗고 있지?”

“왜냐고?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을 해봐.”

이젠하르트는 차갑게 조소했다.

로트는 이윽고 반짝 떠오르는 생각에 무척 반색하며 대답했다.

“아, 흠뻑 젖었으니까 그랬겠지. 하하. 고맙다. 네가 젖은 옷을 벗겨줬구나.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병에 걸리니까. 어릴 때 수도원에 있었을 때도 비를 맞고 나면 양모를 두르고 따듯한 포도주 한잔을 얻어 마시며 난롯불 옆에서 특별히 호사를 누렸지. 오늘처럼 말야. 하하.”

“멍청하긴. 그게 아니지.”

“응?”

“내가 재미를 봤으니까 그렇지. 알았으면 꺼져.”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

“그렇겠지. 어련하시겠냐.”

이젠하르트는 넌덜머리를 내며 받아쳤다.

“밤낮으로 미쳐 쏘다니니 네놈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기억을 못 하겠지. 잘 들어라, 포겔바이데. 내가 이 빗속을 뚫고 기절한 널 뭐 하러 떠메고 왔을까? 이런 밤에 네놈이 보고 싶어서 널 찾아 헤맸을까. 깃털 뽑힌 수탉같은 맨몸뚱이로, 흉물스러운 성기를 축 늘어뜨리고 선 네 꼴을 보고도 몰라? 뭐, 하긴 모르는 게 나을 거다. 이만 나가.”

손바닥으로 쓸어내듯이 로트의 두 뺨을 물들인 홍조가 사라졌다. 난롯불의 열기에 부드럽게 이완된 맨몸뚱이가 이때부터 긴장으로 굳었다. 어깨에서 손끝으로 흐르는 억센 근육이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히 조여졌다.

뱃속에서 다시 끓기 시작한 불덩이를 억누르며 로트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 날 겁탈했어?”

“엉덩이가 쑤실 테니 못 믿겠거든 두고 보면 알겠지. 아주 더러운 기분이라서 또 하고 싶지는 않지만.”

“…….”

“또 당하기 겁이 나거든 이제 그만 꺼져. 구역질이 나서 네놈 냄새도 맡기 싫으니까.”

“…….”

얼굴이 벌게진 채 그를 노려보던 로트는 찢어진 튜닉을 들고서 밖으로 나갔다.

‘개자식 같으니…….’

난장판 한복판에 선 이젠하르트는 조각난 도자기 조각을 짓밟아 부쉈다.

기분이 더러웠다. 원수 놈을 떠돌이 개처럼 쫓아냈는데도 굴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껏 복수의 일념을 불태우며 전력을 다했는데도 결국 또다시 원수의 책략에 놀아나고 말았다. 이 두 손으로 목을 졸라도 시원찮을 놈을 제 손으로 살려냈다. 무엇보다도 홍조가 핀 놈의 상판이, 그 흐뭇해하는 눈빛이 아니꼽고 불쾌했다.

‘야비한 자식. 히죽대며 날 조롱해? 널 살려줘서 고맙다고?’

이 순간 찬바람이 뒤에서 몰아쳤다. 돌아보니 열린 문가에 그림자가 서 있었다.

“또 뭐냐?”

이젠하르트는 단검 자루에 손을 댔다.

“왜 돌아왔어? 벼락이 무서워? 아니면 복수하려고?”

“생트집 잡지 마.”

전라를 그대로 드러낸 채 문가에 선 로트는 아무런 억양 없이 말했다.

“내 신발을 가지러 왔을 뿐이야. 저기 있네. 이 빗속을 맨발로 다닐 수는 없으니까…….”

“털 뽑힌 닭 주제에 신발을 신겠다니 우습군. 볼 만하겠어.”

한쪽 옆구리에 젖은 튜닉 뭉치를 낀 로트는 잠자코 이젠하르트의 앞을 지났다.

단검 자루에 손을 대고서 그를 지켜보던 이젠하르트는 로트가 신발을 주워들어 공중에다 빗물을 휭휭 털어내자 어이가 없어 일갈했다.

“빨리 가지고 나가. 어디서 그걸 털고 있냐. 여기가 네놈 빨래터인 줄 알아?”

“쫄딱 젖은 주제에 빗물 좀 튄 걸 갖고 유난 떨긴.”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나가라.”

“가지 말래도 나간다.”

로트는 양쪽 팔에 튜닉 뭉치와 신발을 끼고서 기사를 지나치며 거칠게 대꾸했다.

“누군 여기가 좋아서 돌아왔겠어? 이런 남루하고 음침한 동굴 구석에는 초대해도 다신 안 와. 네가 애걸을 해도 절대 안 올 거야.”

“그런 걱정은 마셔. 그런 추한 꼴로 벌거벗고 다니니 참 잘 어울리는군.”

“…….”

“하긴 포겔바이데 놈들은 천성이 추악하고 음란한 변태거든. 울긋불긋한 네놈 상판은 추잡한 음욕으로 번들대고……!”

불현듯 신발이 날아가고 체중이 실린 어깨가 이젠하르트의 가슴을 꽝! 처박았다.

이젠하르트는 단검을 잡아 빼려다 로트를 떠안고 쓰러졌다. 단검을 쳐낸 로트는 두 손목을 콱 움켜쥐고 그를 뒤집었다. 그리고 어깨를 바닥에 쾅쾅 찧어대며 이를 드러내고 물었다.

“얼마나 했어?”

“이 미친 자식이! 윽!”

“얼마나 해댔냐고?”

“더 해버리기 전에 꺼져!”

“넌 장님이야! 복수에 눈이 뒤집힌 장님이라고!”

원망에 차서 고함치느라 방심한 사이 이젠하르트는 몸을 뒤집어 로트의 복부를 걷어찼다.

로트는 허리가 접힌 활처럼 몸을 굽히고 벽으로 날아가 꽝! 부딪쳤다. 이젠하르트는 그 위로 몸을 날렸다. 한 덩어리가 된 둘은 융단 위에서 굴렀다. 의자를 넘어뜨리고 체스 테이블 다리에 정수리를 처박고 난롯가로 굴러갔다.

경사면을 내닫는 눈덩이처럼 굴러온 두 몸뚱이 위로 장작더미가 와르르 무너졌다. 이젠하르트는 벌떡 일어나서 장작 아래 깔린 로트를 뒤에서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오른팔로 목뼈가 부러져라 목을 죄었다.

로트는 숨통이 죄여 저항을 잊은 채 얼굴이 벌게졌다. 이젠하르트의 완력이 더해졌다.

이때 날카로운 통증이 팔뚝에 파고들었다. 로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미친 개자식이!”

이젠하르트는 그를 떨쳐내고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어딜 깨물어? 미쳤어?”

“그래! 미쳤다! 너 때문에 미쳤어!”

“읏!”

올가미 같은 팔을 떨쳐낸 로트는 제 어깨로 이젠하르트를 다시 치받았다. 바닥에 나가떨어진 그를 뒤집고 그 위에 엎드려 전신으로 이젠하르트의 몸을 짓눌렀다.

이젠하르트는 팔꿈치를 뒤로 휘두르며 벗어나려고 했다. 로트는 그의 팔을 고리처럼 제 두 팔에 끼우고 짓누르며 원망과 노여움에 차서 괴롭게 물었다.

“왜 날 그렇게 미워해? 왜 날 모욕하고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야? 내가 그렇게 미워?”

“아직도 헛소리냐? 저리 비켜!”

“나한테 구역질이 난다고 했지?”

“그래! 개자식아! 너만 보면 욕지기가 치민다!”

“난 너만 보면 사타구니에 피가 몰려. 알고 있었지? 입에선 침이 절로 고이고 욕정이 치밀어. 널 볼 때마다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어.”

“이 변태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죽여 봐.”

로트는 쓴 미소를 짓고 그의 귓가에 화끈한 숨을 뿜어대며 속삭였다.

“날마다 위협에 허세만 부리지 말고 얼른 죽여보라고.”

“오냐! 지금 당장 죽여주마!”

“얼마나 해댔어? 기절한 몸뚱이를 겁탈하니 좋았어? 원 없이 했어?”

“그래, 개자식아!”

이젠하르트는 뺨이 짓눌린 채로도 조소하며 받아쳤다.

“네놈의 뱃속에다 실컷 처박고 사정했어. 하도 처박았더니 나중엔 네놈의 끈끈한 창자가 딸려 나올 것 같더라.”

“그럼 너도 당해봐.”

“어디 해봐라, 미친 자식아!”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더욱 소리 높여 비웃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입만 나불대지 말고 당장 해.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우습구나. 어디 실컷 육욕을 채워봐라. 언젠가는 썩어 문드러질 고깃덩어리를 껴안고 부질없이 용을 써봐. 아무리 그런들 네놈이 굴복시킬 수 없는 건 바로 내 정신이야. 넌 복수한답시고 미련하게 헛짓만 해대는 거지.”

로트의 괴력이 더해질수록 이젠하르트는 독설을 퍼부었다. 예상대로 원수 놈은 한 방 먹었는지 대꾸가 없다. 무지막지하게 등을 짓눌러 대는 가슴팍만 오르내릴 뿐이다.

이젠하르트는 혀를 차며 웃었다.

“왜? 하라니까 못 하겠냐? 해봐. 짐승처럼 네놈의 아랫도리 욕정을 풀어보라니까. 그래도 못하겠어? 추잡한 색마께서 왜 못하실까. 하긴, 넌-……!”

우악스런 손아귀에 입이 틀어 막혔다. 뒷목덜미에 후덥지근한 숨결이 뿜어졌다.

그곳에 열기로 뜨거운 입술을 지그시 눌러댄 로트는 땀이 배어난 이젠하르트의 목덜미와 젖은 머리칼을, 배부른 맹수가 사냥감의 맛을 보듯이 느릿느릿 핥았다.

뜨겁고 뾰족한 혀가 뱀처럼 기어가며 경추를 핥아 내리자 이젠하르트는 격렬히 몸을 뒤틀었다.

그 몸뚱이를 완전히 제압한 로트는 뒤통수에 대고 혼탁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오해하지 마. 난 복수하려는 게 아니야.”

“읏, 이……!”

“조용히 해. 겁탈은 안 해. 복수는 내 취미가 아냐. 난 그 대신 쾌감을 즐기며 오랫동안 너와 사랑을 나눌 거야. 오랜 이별 끝에 만난 연인처럼 소중히 네 몸을 보듬고 애무해줄게. 널 보면 흥분되니까 아주 천천히 이 순간을 즐길 거야. 무작정 배속을 쑤셔대지도 않아. 천천히 오랫동안 네 속을 파헤칠 거야. 그러니까 입 닥치고 가만있어.”

“……!”

입을 틀어막은 손아귀에 악력이 더해졌다.

이젠하르트의 호흡이 한계에 이르자 로트는 입을 놔주고 양쪽 어깨를 틀어쥐었다. 이젠하르트는 이 순간 목구멍을 긁는 신음을 뱉으며 저항을 멈췄다. 어깨를 잡았던 로트의 손에 피가 묻어났다. 다시 어깨를 틀어쥐자 몸이 요동치며 같은 신음이 흘렀다.

약점을 찾아낸 로트는 그곳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집요하게 상처를 헤집고 저항을 억눌러서 이젠하르트가 반격을 포기하고 축 늘어질 때를 기다렸다. 피투성이인 손가락이 상처를 자꾸만 파헤쳐 바닥에 처박힌 고개는 힘을 잃고 미약한 숨을 토했다.

이젠하르트는 한참 후에야 저항을 멈췄다. 로트는 방심하지 않고 이젠하르트의 두 팔을 제 팔로 사슬처럼 단단히 옥죄고서 말했다.

“벌써 포기했어? 똑똑히 정신을 차려. 이제부터 할 테니까. 잊지 마. 이번엔 누가 당하는 건지. 넌 날 벌레처럼 미워하지만 난 너를 사랑해줄 거야. 내 몸뚱이를 바쳐서 봉사해줄게.”

“으…….”

이젠하르트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찍어 누르며, 로트는 벌써 부풀어 오른 제 성기를 쥐었다 놓았다. 옷을 찢어발기고 내장을 휘젓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잠재우고 대신 이젠하르트의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그대로 입술을 뺨에 댄 순간, 뒤로 치솟은 팔꿈치가 옆구리를 퍽, 가격했다. 로트는 신음을 토하면서도 두 팔을 그러잡아 다시 그를 찍어 눌렀다. 화끈한 입술이 머리칼을 헤치고 관자놀이를 더듬었다.

이젠하르트는 몸서리를 치며 소리쳤다.

“더러운 입술을 치워! 어디다 그걸 대?”

“왜? 마음껏 하라며? 슈바벤의 수도사 녀석이라고 생각해. 그놈 상판보다는 내가 낫잖아. 실력도 낫지.”

반항이 거세졌으므로 로트는 전력을 다해 두 팔을 다시 옥죄고 체중을 실어 그를 눌렀다. 출혈과 탈진으로 저항은 점차 미약해졌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젠하르트는 숨을 헐떡이며 씹어뱉었다.

“개자식아…….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후회하게 될 거야. 네 무덤을 파지 마…….”

“이미 파놨어. 어차피 한 번 거기 들어갔다 나왔고. 이제 가만히 좀 있어. 그때처럼 뼈가 녹는 입맞춤을 하고 싶어.”

“제기랄! 이 새끼……!”

몸부림을 치던 이젠하르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사지를 맥없이 뻗었다.

장작으로 퍽, 그의 뒤통수를 갈긴 로트는 그가 기절한 걸 확인하자 옆으로 굴러 누워서 가쁜 숨을 골랐다. 저항이 어찌나 격렬했던지 누르고만 있었는데도 맨몸뚱이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기력을 되찾은 로트는 이젠하르트를 뒤집고 황급히 위에 올라탔다. 고개를 힘없이 옆으로 젖히고, 젖은 머리칼이 수초처럼 엉켜 있는 창백한 얼굴을 보니, 자신을 그토록 경멸하며 증오하는 인간을 허벅지 아래에 깔고 몸속을 드나들며 정복할 생각에, 몸뚱이 전체에 후끈한 열기가 치솟았다. 핏줄이 돋아 단단히 발기한 성기와 사타구니 사이로는 끓는 피가 몰렸다.

걷잡을 수 없는 정욕과 열기에 정신이 몽롱해진 로트는 두 손바닥으로 이젠하르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혀를 내밀어 천천히 음미하듯이 매끄러운 살갗을 할짝할짝, 핥았다.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안면 골격의 굴곡에 따라 혀를 미끄러뜨리며 매끈한 뺨과 파란 실핏줄이 보이는 얇은 눈꺼풀, 인중과 콧대 양쪽의 오목한 곳을 핥았다. 그러고서 닫힌 입술을 비집고 들어가 혀를 감아올렸다. 축 늘어진 혀가 빨리고 당겨졌다. 치열을 샅샅이 핥고 점막을 할짝대는 마찰음이 가쁘게 그렁대는 숨소리와 뒤섞였다.

“하아.”

입안을 탐욕스럽게 흡입하고 핥아대 한차례 욕망을 충족시킨 로트는 사타구니가 후끈 달아올라 이젠하르트의 옷을 모조리 벗겼다. 빗물에 젖어 희다 못해 푸르죽죽한 늘씬한 나체가 긴 머리칼에 휘감긴 채 늘어졌다.

로트는 제 튜닉을 찢어서 그의 손발을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어깨를 흔들어 깨우며 속삭였다.

“기절한 체하지 말고 일어나. 얼른.”

뺨을 두들기고 엉킨 머리칼을 얼굴에서 걷어내자 얇은 눈꺼풀이 쳐들리며 잿빛 눈동자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 시선은 곧 제 얼굴로 다가오는 그림자로 향했지만 정체를 식별하기도 전에 입안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이물감을 느꼈다. 파고들자마자 강하게 휘감겨오는 혀에 놀라서 이젠하르트는 혀를 밀어내고 고개를 홱 젖혔다. 그러나 완강하게 움켜잡힌 두 뺨에 손가락이 파고들어 강제로 입을 벌렸다.

“읏.”

뱀처럼 휘감겨 혀뿌리까지 더듬고 빨아대자 욕설과 신음이 이젠하르트의 목구멍 안쪽에서 맴돌았다. 막 어금니로 혀를 밀어 넣은 찰나 로트는 신음을 내지르며 난폭하게 입술을 뗐다.

“윽!……. 미쳤어?!”

“네놈이야말로 미쳤냐? 개자식아, 구역질 나는 혀를 어디다 집어넣어?”

“넌 구역질이 나지만 난 뼈가 녹는 것 같아. 더 할래.”

“이 개자식……. 윽! 뭐냐? 날 묶었냐?”

“그래. 묵었다.”

“맙소사! 너 정말-……. 읏!”

로트는 들이대는 입술을 피해 좌우로 비틀리는 고개를 콱, 틀어쥐고 다시 입안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게걸스럽게 혀를 빨고 점막을 헤집을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혀를 물릴 뻔했다.

그 짓이 되풀이되자 로트는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그만 좀 물어!”

“개자식아, 그런 넌-……. 아읏!”

부서진 도자기 조각이 어금니 사이에 틀어박혔다. 격분한 이젠하르트가 이를 악물어 그걸 으스러뜨리자, 로트는 그걸 끄집어 뱉게 하고 찢어낸 튜닉 조각을 새로 틀어넣었다. 양쪽 위아래 어금니 사이에 천 뭉치가 맞물리고, 집게 같은 손에 두 뺨이 짓눌려 이젠하르트의 입은 속수무책으로 벌어졌다.

그제야 한숨 돌린 로트는 그의 상체를 제 무릎에 끌어올리고서 얼굴 전체를 한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그리곤 만족스러운 한숨이 뱃속에서 울려 나올 때까지 느릿느릿 입맞춤을 되풀이했다. 물고 빨아 부르튼 입술을 제 입술로 비비고 쪼아대며 치아 하나하나를 혀끝으로 더듬었다. 위, 아랫입술의 안쪽 점막까지 샅샅이 훑고 쪽쪽대며 빨았다. 그동안 강제로 벌려진 이젠하르트의 입안에는 타액이 가득 고였다.

“삼켜 봐.”

로트는 고인 침 때문에 이젠하르트가 괴롭게 목구멍을 꿀럭 대자, 침 범벅이 된 입술을 맞댄 채로 말했다.

“뱉으려 하지 말고 삼켜. 숨이 막히잖아. 죽고 싶어서 그래? 어차피 네 침이야. 내건 조금밖에 없어. 다 삼켜.”

이젠하르트의 목울대와 가슴이 오르락 거리며 타액이 넘어갔다. 잇새에 물린 찢어진 튜닉 조각은 침으로 흥건히 젖었다.

그 후로도 집요하게 키스가 이어지자, 이젠하르트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쾌감에 도취한 로트는 제 침을 연신 입안에 흘려 넣으며 부르터 거친 입술과 부드러운 속살의 질감을 번갈아 음미했다.

문득 이젠하르트는 이따금 뒤틀던 몸을 늘어뜨리고 저항도 멈췄다. 꽉 감긴 눈꺼풀에 경련이 일었다.

로트가 왜 그러냐며 튜닉 조각을 빼내고 근심스레 묻자, 이젠하르트는 발작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려 버둥대며 을러댔다.

“더러운 비역쟁이야, 이 손 풀어. 언제까지 입안만 헤집어 댈 거냐. 하려면 얼른 처박고 끝내!”

“싫어.”

로트는 몸부림치는 그를 바닥에 깔고 위에 올라타서 분노로 이글대는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난 농밀한 키스를 더 좋아해. 서로의 끈끈한 타액을 삼키고 눈을 마주치며 내 입술이 네 입술이 되어 뒤섞이는 그런 키스, 영혼이 빨리는 그런 키스 말이야. 넌 못 해봤지? 내가 해줄게.”

그러나 팽팽히 발기한 성기와 사타구니가 아프도록 뻐근해서 입맞춤이 끊겼다.

로트는 결박당한 이젠하르트의 몸을 뒤집었다. 격심한 몸부림 탓에 손목과 발목이 천에 쓸려 빨갛게 부었다.

그는 이젠하르트의 발목을 풀어주고, 부푼 성기를 엉덩이 사이에 끼워 넣었다. 손에 쥔 성기를 그 곳에 마찰시키고 항문에 비벼댔다.

“흐으.”

소름이 돋은 살갗에 성기가 닿자 후덥지근한 숨이 절로 토해졌다. 이젠하르트는 귀두가 엉덩이에 닿는 감촉에 몸서리를 치며 무서운 욕지거리를 퍼부었지만, 무아의 쾌감에 정신이 흐려진 로트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쾌감이 증대할수록, 로트의 숨결은 격해지고 이성이 날아갔다. 입가에선 거품이 일고 욕망의 해갈을 갈망하는 전신의 힘줄은 불끈불끈 치솟았다.

그는 이젠하르트의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꽉 맞물린 살 틈으로 귀두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긴장으로 뻣뻣해진 근육이 너무 꽉 조여 있어서 아무리 애를 써 쑤셔 넣으려고 해도 자꾸만 튕겨 나왔다.

때마침 축축한 튜닉에 생각이 미치자 그걸 항문에 대고 쥐어짰다. 빗물이 흘러내리며 살 틈이 젖어들자 곧바로 거대하게 부푼 성기를 쑤욱 밀어 넣었다. 연속으로 두세 번 깊숙이 찔러 넣고, 끝까지 잡아 빼고서 단숨에 찔러 박자 이미 기진맥진한 이젠하르트는 어깻숨을 내쉬며 한숨을 토했다.

“읏.”

헉, 헉! 숨이 턱까지 차는 무지막지한 삽입이 시작됐다. 빡빡한 살 틈을 우악스럽게 드나드는 사이사이, 로트는 그의 맨 등에 달라붙어 목을 모로 꺾고 침 범벅을 해대며 집요하게 입술을 탐했다. 실내에 가득 찬 더운 숨결과 신음이 질척대는 마찰음과 뒤섞여 흘렀다.

“윽. 읏.”

삽입은 갈수록 격렬해지고 빨라졌다. 이젠하르트의 목덜미에 헉, 허억, 후끈한 숨을 뿜어대며 로트는 마구 허리를 놀렸다. 질척한 마찰음을 내며 직장을 넘나드는 검붉은 살덩이는 경직된 내벽을 쿡쿡 찔러대고 이리저리 파헤치고 다시 깊숙이 처박혔다.

“흐으. 으. 으.”

이젠하르트는 배속에 가득 찬 성기가 직장을 긁어댈 때마다 몸서리를 치며 괴롭게 신음을 흘렸다. 삽입이 격해질수록 로트의 손아귀에 잡힌 두 손목이 부러질 듯해서 신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아……. 후우. 으.”

오랜 삽입 끝에 로트는 허리를 튕기며 사정했다. 성기를 쑥 잡아 빼자 정액이 딸려 나왔다. 그걸 이젠하르트의 등에 문질러대다 머리칼로 닦아내고서 발기시킨 후 다시 비좁은 살 틈으로 파고들었다.

다시 삽입하던 도중 어느 순간에 이젠하르트의 저항과 신음이 완전히 멈췄다. 바닥에는 그의 어깨에서 흐른 핏자국이 난무했다.

“이젠하르트……. 하아……...”

끓어오르는 욕정에 거의 정신을 잃은 로트는 그를 뒤집어 어깨의 상처에 입술을 대고 빨다가, 반듯이 눕혀 그 위에 올라타고 다시 속살을 헤집길 반복했다.

동녘에서 검푸른 여명이 비출 무렵에 이젠하르트의 늘어진 몸뚱이는 정액과 자상에서 묻어난 핏물, 땀으로 얼룩졌다.

땀투성이가 되어 등허리를 끌어안고 마지막 정액을 뱃속에 뿜어댄 로트는 무아의 지경에서도 본능적인 방어로써 이젠하르트의 상체와 두 팔을 등 뒤에서 끌어안고 숨을 삭였다.

그대로 한동안 몸을 포개고 엎어져 있던 그는 종달새 우는 소리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처음에 눈을 떴을 때, 그는 몽롱한 정신과 나른한 몸뚱이의 감각에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다고 여겼다.

그러나 목전에서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칼과 후끈한 땀 냄새, 비릿한 체향 그리고 낯선 실내가 서서히 의식을 일깨우며 시야에 들어왔다.

“……!”

문득 벌떡 일어선 그는 뒷걸음질을 치려다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았다.

나체의 이젠하르트는 정신을 잃고 엎드려 있었다.

“……. 이젠하르트?”

주검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나.

경악한 로트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터졌다.

로트는 괴성을 내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