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반격
포겔바이데 가의 안뜰이 로트의 발광으로 소란할 무렵이었다.
벨데케 가는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늦여름인 활기찬 대낮인데도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여느 때 같으면 하인들이 작업하느라 소란했던 뒷마당도 가축과 말을 귀찮게 하는 날파리만 날아다닐 뿐 고요했다.
가로에 면한 그 집 앞은 행인의 왕래가 잦았다. 할 일 없이 떠들며 분주히 제 길을 가던 행인은 벨데케 가의 근처에선 입을 다물고 걸음을 늦췄다. 걔 중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집 앞에 서서 2층 창문을 훔쳐보거나 출입구인 세 개의 홀 안쪽을 엿보기도 했다.
결국 아무런 낌새도 얻지 못한 그들은 제 갈 길을 갔다. 음성을 낮춰 쑥덕대는 말 중에는 개망나니 용병과 도적 기사단을 이끄는 환전상이니, 벨데케 가의 종말이니 따위의 말들이 들렸다.
이날, 오가던 행인의 발길마저 끊긴 무렵이었다.
적막했던 집 근처에 모피를 덧댄 튜닉을 입은 탐파니스가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허리에 찬 칼은 축 늘어뜨리고서 터벅터벅 벨데케 가의 앞을 지나쳤다. 남의 집 담벼락에 얼굴을 처박고 신음하며 발길질도 해댔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어서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가를 깨닫자 갑자기 주먹을 그러쥐고 벨데케 가의 중앙 현관홀에 냉큼 뛰어들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우당쾅쾅 올랐다.
“억, 깜짝이야!”
2층의 가족실 앞에 서 있던 늙은 한스는 문을 열려다 말고 계단을 향해 외쳤다.
“전 또 누구신가 했습니다. 어쩐지 발소리에 천지가 요동치더라니 역시 도련님이셨군요.”
“야, 영감탱이!”
탐파니스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젠하르트는 돌아왔어? 어디 있지? 앗, 그건 뭐야?”
탐파니스는 콩을 쏴대듯 질문을 퍼붓다 말고 늙은 한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닛, 왜 이러세요?”
늙은 한스는 펄쩍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이건 작은 나리께 온 서한이에요. 도련님 것이 아녜요.”
“뭔데? 이리 줘봐!”
탐파니스는 왈칵 달려들어 늙은 한스가 손에 든 양피지 두루마리를 빼앗았다. 봉랍된 그걸 이리저리 잽싸게 돌려봤다. 두루마리의 가장자리를 눈에 대고 안쪽 구멍까지 샅샅이 살폈다. 킁킁 냄새도 맡고 귀퉁이를 콱, 물어뜯어 맛을 봤다.
“아닛, 도련님!”
늙은 한스는 기겁하며 외쳤다.
“이러시면 어떡해요? 작은 나리께 온 서한을 먹어치우다니! 이리 돌려주세요! 염소두 아니고!”
“이 영감탱이, 저리 못 가? 요걸 누가 보냈지?”
두루마리를 등 뒤로 홱, 감춘 탐파니스는 초조하게 외쳤다.
“누가 이걸 갖고 왔냐니까? 어떤 놈이야?”
“그건 저도 몰라요.”
늙은 한스는 부루퉁하게 맞받아쳤다.
“웬 어린애가 가져왔는데 그 녀석도 낯선 사람한테 심부름을 받았대요.”
“어린애가 이젠하르트한테 주라고 했대?”
“그렇대요. 틀림없이 작은 나리께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도련님께선 또 어쩐 일이시지요? 오늘은 시문 밖에 안 나가셨나요? 엇, 도련님! 돌려달라니까요. 아닛, 왜 자꾸 고걸 물어뜯으세요? 이리 주세요.”
“시끄러워! 죽인다! 이젠하르트는 어디 있어?”
“조금 전에 귀가하셔서 쉬고 계세요. 오시자마자 안으로 들어가셔서는 저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하셨어요. 주인 나리와 나리 마님께서도 벌써 며칠째 병석에 누워계시니 저희보고 점잖게 조용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도련님께선 그간 문병은커녕 날마다 시문 밖에만 쏘다니시더니 갑자기 와서는 뿔난 까마귀처럼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대시는군요. 작은 나리께서 아시면……. 엇, 도련님! 거긴 들어가시면 안 된다니까요!”
“저리 가, 이 멍텅구리야! 내 집인데 왜 못 들어가? 에잇!”
“으헉!”
늙은 한스는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그를 홱 떠다민 탐파니스는 가족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콩이 튀듯 뛰어들었다.
가족실 안은 덧문이 닫혀 있어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방 안의 공기는 먹구름이 깔린 듯 묵직하고 음침해서 여타 방문객이라면 출입을 꺼렸을 정도다.
용감한 탐파니스는 그 한복판으로 당당히 뛰어들었다. 커다란 눈을 횃불처럼 번쩍이며 사방을 휙휙 살펴봤다.
그의 사촌은 체스 테이블 앞에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이젠하르트!”
탐파니스는 곁으로 달려가서 우렁차게 사촌을 불렀다.
사촌은 두 손을 배 위에 깍지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탐파니스는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이젠하르트? 뭐 해? 자는 거야? 일어나! 이 판국에 태평하게 잠이 와? 이젠하르트!”
목이 부러져라 흔들린 이젠하르트가 눈을 떴다. 반쯤 벌떡 일어선 그는 탐파니스를 알아보자 얼굴을 확 찌푸렸다. 세로 주름이 잡힌 미간에는 짜증과 피로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가 채 눈을 감기도 전에 탐파니스가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뭘 하고 있었냐니까. 잔 거야? 아님 자는 척 한 거야? 자는 척 한 거지?”
“보다시피 난 잠깐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젠하르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거위 목을 쥐어짠 듯이 소리를 질러대며 방해하기 전에는.”
빨간 혀를 사촌의 정수리에 대고 날름 내밀어 보인 탐파니스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불안하게 데굴거리는 잿빛 눈알과 두 팔다리는 그의 번잡하고 초조한 심기를 대변하듯 꼭두각시 인형처럼 제각각 움직였다.
인내심과는 항상 담을 쌓는 탐파니스는 사촌이 일어나려고 하자 앞을 냉큼 가로막고 물었다.
“이젠하르트, 오늘은 어디에 갔다 왔지? 아까도 없던데?”
“집에 있었어.”
이젠하르트는 옆으로 비켜섰다.
탐파니스는 그 앞을 또 막고 외쳤다.
“거짓말! 진짜 없었는데? 다리도 다 안 나았으면서 어딜 갔다 온 건데? 또 남들 몰래 만필요트 백작을 만나고 왔어? 그 녀석은 왜 자꾸 만나는 건데? 힐데가르트를 그 녀석한테 진짜 팔아치울 거야? 맙소사! 그 작자는 참 비위도 좋군. 그런 못생긴 말라깽이에 왈가닥을 뭐 하러 데려가려는 거지? 세탁부를 만들려는 걸까? 아님 부엌데기를 시키려나? 하, 참! 취향 한 번 유별나군.”
“탐파니스.”
“왜?”
그윽하게 저를 부르는 음성에 탐파니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젠하르트는 조용히 물었다.
“힐데가르트는 부엌데기가 아냐. 네 소중한 누이지. 그런데 내 다리가 어쨌다고?”
“응? 넌 다리가 똑 부러졌잖아?”
혀를 찬 이젠하르트는 사촌의 커다란 잿빛 눈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넌 또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내 다리는 보다시피 멀쩡해.”
“이상한 소리라니? 난 네가 절뚝대는 것도 봤는데.”
“헛것을 봤겠지.”
이젠하르트가 웃으며 덧붙였다.
“하긴 그럴 수도 있어.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이 하찮은 근심에 빠졌을 땐 가끔 허깨비가 보이기도 하거든. 정신이 마귀에 홀려서 오락가락하니까.”
“내가 돌았다는 거야?”
이젠하르트는 대꾸 없이 웃기만 했다.
탐파니스는 얼굴이 빨개져서 외쳤다.
“웃기지 마! 넌 나를 얕잡아보는 거지? 내 말이 맞잖아. 넌 요전 날 다리를 다쳐서 집에 돌아왔어. 그때부터 줄곧 집에만 있었잖아. 어디서 다쳤어? 누가 그랬어? 어떤 녀석이 네 다릴 부러뜨렸지?”
두 사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탐파니스는 독을 품고서 그를 노려봤다.
이젠하르트는 고요히 그 시선을 마주하며 쌀쌀맞게 말했다.
“넌 오늘은 꽤나 한가한가 보군.”
“한가하긴! 바빠 죽겠는데…….”
“뭘 하시느라 바쁜데?”
“몰라도 돼. 나라고 할 일이 없을까 봐? 쳇.”
“아, 물론 있겠지. 날이 새면 시문 밖에 쏘다니셔야 할 테니까. 그저께는 검은 숲에도 다녀왔다던데, 오늘은 안 가?”
“뭐, 뭐야? 내, 내가 거길 왜 가? 난 그런 데 안 갔어!”
“그래?”
“왜, 왜 그래?”
갑자기 바짝 다가서는 이젠하르트를 피해 탐파니스는 뒷걸음질 쳤다.
이젠하르트는 탐파니스의 귀를 잡고 그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다정히 물었다.
“그럼 네 얼굴은 왜 이 모양일까. 요사이 살은 쪽 빠지고 눈이 퀭한 게 꼭 잠 못 자고 굶어 죽은 허깨비 같구나. 꼭 그날처럼. 너도 기억나지?”
“제엔장. 뭐라는 건지 난 모르겠군.”
탐파니스는 사촌한테 잡힌 귀를 빼냈다.
이젠하르트는 다른 쪽 귀를 강제로 잡아 쥐었다.
“기억이 안 난다면 말해주마. 옛날에 난 너희 집에 놀러 갔었어. 우리가 일곱 살 때. 그날 난 네 보석함에서 이교도의 인형을 꺼내 난롯불에 대고 두 손발을 하나씩 태웠지. 요사스런 검은 머리에는 불을 붙여서 작은 횃불을 만들었잖아. 참 잘 타더군. 넌 그때 내 손을 물어뜯어 인형을 빼앗고선 날 죽인다고 저주했어. 그러고는 저녁 종이 칠 때까지 악을 쓰며 울다가 제풀에 기절했거든. 불에 타 흉측해진 검은 머리의 괴물을 끌어안고서 그 이후로 사흘은 울었다고 하더군. 숙모님께서 하신 말씀이야.”
이젠하르트는 포도주가 놓인 탁자로 걸어갔다.
얼얼한 귀를 문지르며 탐파니스는 그의 오른쪽 다리를 맹렬히 노려봤다.
“하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을 끊고서 이젠하르트는 포도주 잔을 사촌에게 내밀었다.
“그땐 내가 정말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아. 미안했다, 탐파니스. 네가 아직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짓궂은 장난은 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넌 나를 이해해 주겠지? 우린 그때 둘 다 철부지에 어렸잖아. 이해해 준다니 고맙구나. 자, 이 잔을 받고 우리 화해의 잔을 들자. 이 세상에서 너와 나만이 서로 신의를 지닌 형제니까 우리는 항상 사이좋게 지내야 해.”
“……. 네, 네가 그런 거지?”
탐파니스는 눈은 부릅뜬 채 목구멍을 쥐어짰다.
이젠하르트가 되물었다.
“내가? 뭘 말이냐?”
“네가……. 네가 죽였지? 역시 네가 그 녀석을 죽였어! 네가 그 녀석을 죽인 거야!”
고함을 내지른 탐파니스는 바닥에 픽, 쓰러져 발버둥을 치고 데굴데굴 구르며 부르짖었다.
“네가 로트 그 놈을 죽인 거야! 수족을 자르고 눈알을 파내 죽였지? 난 다 알고 있었어! 으으……. 이제 우린 끝장이야! 숙부님은 목이 잘릴 거야! 우리 집안은 완전히 망한 거야! 늙은 포겔바이데가 쳐들어올 거야! 그놈은 이 도시를 파괴하고 우리한테 복수할 거야. 우릴 잔인하게 살해할 거야. 그 녀석을 네가 죽였으니까! 으!…….”
“뭐 하는 짓이냐. 일어나라.”
“싫어! 싫어! 네가 그 녀석을 죽였어! 네가 다 망친 거야! 내가 굶겨 죽이려고 했는데!……. 니가 다 망쳤어! 네가 우리 집안을 망친 거야!……. 으으!…….”
“바보 같으니! 어리석게 굴지 말고 어서 일어나!”
이젠하르트의 노성이 가족실에 쩌렁쩌렁 울렸다.
“수치를 모르고 짐승처럼 울부짖다니 어이가 없군. 네가 그래도 우리 벨데케 가문의 일원이냐? 내 낯이 뜨겁다. 부끄러운 줄 알아. 그 자식은 죽지 않았어.”
“거짓말 마! 네가 죽였잖아!”
“죽여 버리려고 했지. 하지만 너를 위해서 참았어.”
“뭐, 뭐라고? 안 죽였다고?”
콩이 튀듯 팔딱 일어선 탐파니스는 사촌의 팔을 잡았다.
이젠하르트는 그 손을 매몰차게 떨쳐냈다.
“네가 원한다면 죽이겠다고 약속했잖아. 아직 죽이지 않았어. 그러니 내게 누명을 씌우지 마라.”
“그럼 그 녀석은 어딜 간 건데? 보름이나 안 보인단 말야!”
“그걸 난들 알아? 어쩌면 죽은 자의 왕이 잡아먹었을지도 모르겠군. 그 자식은 저 시문 밖에서 나를 미행하다가 현장에서 걸렸어. 칼을 빼들고 나를 죽이려고 했어. 하지만 나는 놈을 살려줬어. 내가 신의를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놈을 죽여버렸겠지만 너와 한 약속을 떠올리고 놈을 살려줬지.”
이 소식이 안겨준 여파는 탐파니스의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는 사람이 벌릴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입을 벌린 채 눈을 뜨고서 이젠하르트를 망연히 쳐다봤다.
이윽고 철천지원수를 단칼에 해치웠다면 사촌의 낯이 저토록 불만에 찼을 리 없다는 자각이 들자 가족실 안을 쌩! 내 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 그 녀석을 역시 만났었군? 그래서 네 다리가 부러진 거지? 아하하! 그렇군. 그랬었군! 이거 참 믿을 수 없는데! 굉장하군!”
뭘 믿을 수 없어서 그토록 감격한 건지 감을 잡은 이젠하르트는 술잔을 내려놓고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관자놀이에는 경련이 일고 눈빛이 험악해졌다.
볼에는 핏기가 새로 돋고 흥분한 탐파니스는 자세한 정황을 캐물었다.
이젠하르트는 그 질문을 묵살하고 말했다.
“평온한 명상에 잠겨 있던 나를 깨워 적적함을 달래주다니 참 고마웠다, 탐파니스. 이젠 그만 돌아가렴. 네 목소리만 들으면 항상 내 머리는 맑아지고 마음은 퍽 유쾌해지는구나.”
“쳇.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이거나 받아.”
“뭐냐.”
“몰라. 너한테 온 편지래. 누구야? 누가 보낸 거야?”
이젠하르트는 건네받은 두루마리를 힐긋 보고는 탁자에 내던졌다.
탐파니스는 와락 달려들어 두루마리를 집어 들고서 물었다.
“왜? 안 볼 거야? 어서 뜯어 봐봐! 중요한 건지도 모르잖아.”
뼈다귀 한쪽을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작은 개한테 반쯤은 자포자기해서 양보하듯, 이젠하르트는 한숨을 쉬며 봉납을 뜯었다.
탐파니스는 어깨너머에서 고개를 쭉 빼고 펼쳐진 두루마리 양피지를 노려보다 말했다.
“에잇! 뭐라는 건지 통 알 수가 없군. 누가 보낸 거지? 뭐라는 걸까?”
글을 읽지 못하는 두 사촌은 가문의 문장이나 특별한 표식을 찾아 양피지를 이리저리 돌려봤다.
하지만 별다른 표식 없이 채색 잉크로 쓰인 글귀만 있었다. 글귀를 빼곤 본문 가장자리의 금박 테두리가 유일한 장식이었다.
이젠하르트는 늙은 한스에게 힐데가르트를 불러오라고 일렀다. 한스는 그녀가 부친 벨데케를 간병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그럼 기다려야겠군.”
이젠하르트는 두루마리를 내던졌다.
탐파니스는 그걸 다시 잡아채서 소리쳤다.
“안 돼. 어서 봐봐. 당장 봐야 해. 웬 놈이 보낸 결투장일지도 모르잖아.”
탐파니스가 무심코 뱉은 이 말은 단박에 효과가 있었다.
눈빛이 변해서 벌떡 일어선 이젠하르트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빼앗아 밖으로 나갔다.
탐파니스는 냉큼 그 뒤를 쫓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데?”
“사제관으로.”
“나도 갈래!”
그들이 찾아간 베르나르 신부는 마침 사제관 앞마당에 있었다.
신부는 50대 중반에 몸집이 육중하고 인상이 후덕한 사내였다. 두꺼운 목이나 팔뚝의 근육만 보면 성직자라기보다는 시장판의 푸줏간 주인 같았다.
“너희 왔구나. 한동안 통 감감무소식이더니 이게 얼마 만이냐. 어서 와라.”
곡괭이로 사제관 입구의 땅바닥에 박힌 모난 돌을 파내던 신부는 그들을 반겼다.
그가 곡괭이를 내려놓고 검은 튜닉 소매로 대머리의 땀을 닦는 사이 탐파니스는 이젠하르트의 뒤에서 고꾸라질 듯 휘청대다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앗! 제기랄! 이건 또 뭐야? 에잇!”
“얘, 발밑을 조심하렴, 탐파니스. 눈을 머리꼭지에 달고 다니나보구나.”
“이딴 바윗돌을 여기다 두시면 어떡해요? 제 머리통을 깨려고 그런 거죠?”
“그건 주님께 여쭤봐라. 그분이 거기 두셨다. 자, 안으로 들어가자.”
신부는 둘을 사제관 안으로 데려갔다.
안에는 그가 채집한 갖가지 말린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그중에는 젊은이의 사랑의 상처를 치유해준다는 백선이나 뱀 해독제 또는 만병통치약으로 쓰이는 테리아카 같은 약초가 있었다.
서로 인사치레를 마친 이젠하르트는 신부에게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이게 뭐니?”
“오늘 받았습니다만 발신인을 모르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읽어주세요.”
“음, 어디 보자. 익명의 서한이라…….”
베르나르 사제는 건네받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치고 묵독했다.
두 귀공자는 그를 빤히 주시하며 기다렸다.
불현듯 신부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뭔가 심기를 건드릴 때마다 무심코 드러나는 그 버릇을 눈치 채고 탐파니스가 왜 그러느냐고 캐물었다.
신부는 눈이 침침하다며 창가로 갔다. 그러고는 양피지 두루마리로 얼굴을 가렸다.
“신부님, 누구예요?”
탐파니스는 이젠하르트의 눈치를 살피다 신부 곁에 달려가서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고요? 신부님! 누가 보낸 거예요?”
“글쎄다. 그건 안 쓰여 있는데……. 흠.”
“보낸 사람이 안 쓰여 있다고요? 그럼 뭐라는 건데요?”
“흠, 그게 말이다……. 험…….”
“신부님.”
실랑이를 하던 신부와 탐파니스는 밝고 경쾌한 음성에 놀라 옆을 돌아봤다.
이젠하르트가 그들 곁에 서 있었다. 그는 탐파니스가 깜짝 놀랄 정도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서 신부에게 말했다.
“됐습니다.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알겠군요. 실은 저도 짐작했습니다. 그건 결투장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떤 자가 그걸 보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탐파니스는 그러자 화살 꽂힌 까마귀처럼 펄쩍 날아올라 소리쳤다.
“역시 그 녀석이군! 그 녀석이 역시 살아 돌아온 거야! 그 녀석이 돌아왔어! 아하하! 제엔장!”
신부는 엉뚱한 괴성을 질러대는 탐파니스를 진정시키고 이젠하르트에게 물었다.
“결투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젠하르트?”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건 포겔바이데 녀석이 보낸 결투장 아닙니까?”
“……. 로트 말이냐?”
신부는 굵은 목젖을 한 번 꿀꺽, 울렸다.
“하지만 그 애는 행방불명이잖느냐. 글쎄, 항간엔 흉흉한 소문도 돌고……. 험험.”
“그럼, 아닙니까?”
“그, 그렇단다. 그 애가 보낸 게 아니다. 흠. 여기엔…….”
말꼬리를 흐린 사제는 정수리 부분의 대머리의 땀을 얼른 닦고서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발신인은 쓰여 있지 않지만 결투장은 아니란다.”
“그럼 대체 뭔데요?”
발칵 소리를 지른 탐파니스는 이젠하르트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닥쳤다.
신부는 곤혹스러운 낯으로 서한과 이젠하르트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얘, 이젠하르트, 이게 네 앞으로 온 게 맞느냐?”
맞다고 대답한 이젠하르트는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자 몹시 낙담해서 물었다.
“그럼 결투장이 아니고 뭡니까?”
“음, 그게 말이다…….”
“청구서라도 됩니까?”
“청구서라니?”
“예를 들어 치료비 청구서라든가 말입니다. 제 이름은 물론 쓰여 있겠지요?”
“청구서도 아니야. 발신인도 수신인의 이름도 쓰여 있지 않구나. 다만 창과 방패니, 명예의 기사니 운운하는 걸 보니 네 얘기가 맞는 것도 같은데…….”
“그럼 무슨 내용인지 읽어주시겠습니까?”
“그, 그러마. 일단 너희가 듣고 판단해 보려무나.”
신부는 세 번째로 대머리의 땀을 닦고 서한을 낭독했다.
그의 투박하지만 배 속에서 울려나오는 엄숙한 음성이 경건한 성가를 부르듯 이어질수록 낙담 천만이었던 이젠하르트의 낯이 오묘하게 굳었다.
신부의 음성도 성가를 부르다가 수녀의 나체를 본 양 곤혹에 차고 대머리에는 땀이 줄줄 흘렀다.
탐파니스는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으로 신부의 입을 노려봤다.
낭독이 끝날 즈음 이젠하르트는 눈길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미간에는 푸른 핏줄이 돋았다.
입을 크게 벌린 탐파니스는 묵묵부답인 사촌과 신부를 미친 듯이 번갈아 봤다.
일순간 험악해졌던 낯이 창백해진 이젠하르트는 줄곧 침묵을 지켰다.
“너희가 들은 그대로다.”
낭독을 마친 신부는 양피지를 도로 말아 이젠하르트에게 내밀었다.
이젠하르트가 마지못해 그걸 건네받는 걸 보고 신부는 헛기침을 했다.
“거참, 누가 이런 연서를 보냈을까. 요새 귀부인들은 참 대담하기도 하지. 큼.”
“…….”
“얘, 이젠하르트……. 너는 누군지 알겠느냐?”
잠시의 침묵 끝에 이젠하르트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신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사제관 밖으로 나갔다.
사제는 그를 황급히 불러 세워 집안의 안부를 묻는 끝에 이어 말했다.
“얘야, 나는 항상 너와 너의 집안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다. 물론 너는 그에 대한 보답을 충분히 해왔지. 너는 귀향하자마자 이 도시에 큰 은공을 세웠으니까. 축성에 인색하지 않고 빈자에게도 재물을 아낌없이 희사했지. 그래서 난 네게 주님의 은총을, 특히 네 가문의 해묵은 고난을 속히 해결해 주십사 날마다 기도드리고 있다. 흠……. 그래서 말인데, 그 집안, 포겔바이데 가 말이다, 그 로트 녀석도 실은 너처럼 심성이 선량한 젊은이다. 때로 과도한 정열에 휩쓸려서 어리석게 굴지만 본 바탕이 소문처럼 악하지는 않단다. 그러니까, 음, 내 생각엔 말이다, 그 애가 살아 돌아오면, 주님! 그 불쌍한 짐승을 굽어 살피소서! 아멘, 둘이 한 번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면 어떻겠느냐? 너는 현명한 젊은이이니 현재 네가 처한 고난을 지혜롭게 헤쳐나가리라 믿는다만……. 아니, 벌써 가려느냐? 그래, 그럼 내일 미사에는 꼭 오겠지? 꼭 와야 한다?”
이젠하르트는 알겠노라고 약속하고서 곧바로 사제관을 빠져나갔다.
탐파니스는 사촌이 밖으로 나가자 콩이 튀듯 따라가서 소리쳤다.
“망할 자식! 그놈이군! 그놈이 저딴 걸 보냈을 거야!”
“그놈?”
성큼 성큼 사제관 뒷길로 빠져나온 이젠하르트가 뒤로 돌아섰다.
흥분한 탓에 무작정 내달리던 탐파니스는 사촌의 코앞에 우뚝 섰다.
이젠하르트는 그 앞에 버티고 서서 날카롭게 캐물었다.
“그놈이라니? 어째서 그놈이라는 거냐?”
“뭐, 뭐라고? 내가 뭘?”
“네가 방금 그놈이라고 했잖아.”
“내, 내가? 난 그런 적 없는데……. 그럼 넌 누군지 알아?”
“알다마다.”
이젠하르트가 태연히 답했다.
탐파니스는 펄쩍 튀어 오르며 누구냐고 물었다.
“이런 짓을 할 만큼 대담한 여자는 흔치 않으니 뻔하지.”
“여자라고? 누군데?”
“글쎄, 누굴까. 여기서 이만 헤어지자. 잘 가라.”
“그럼 콘드비라무어스라는 거야?”
탐파니스는 돌아선 사촌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 여자라는 거지? 하지만 이상한걸? 그 여자가 왜 너를 죽은 자의 왕이라고 부르는데? 죽은 자의 왕에게, 라고 신부님이 읽어주셨잖아. 그 여자가 왜 너를 그렇게 부르지? 응?……. 이젠하르트!”
이젠하르트는 대꾸 없이 가버렸다.
그를 뒤쫓으려던 탐파니스는 두 발로 급정거를 하며 우뚝 서버렸다. 커다란 잿빛 눈엔 느닷없이 불꽃이 튀고 빨간 입술은 이로 짓씹어서 더욱 새빨개졌다.
‘제엔장할! 으…….’
그는 분을 삼키며 속으로 외쳤다.
‘그랬군! 날 속이려면 누구든 큰코다칠걸? 편지를 보낸 인간은 콘드비라무어스가 아니야. 양피지에 그렇게 금박을 입힌 꼴을 난 전에 본 적이 있단 말야! 이 녀석! 어디 두고 보자!’
탐파니스는 홱 돌아섰다. 곧 오던 길을 되돌아서 사제관으로 쌩, 달려갔다.
이젠하르트는 사제관 뒷길로 나와서 광장을 지나는 대신에 뒷골목으로 우회해 집으로 향했다. 곧 2층에 있는 가족실로 들어갔다. 벨데케 내외가 사계절 거주하던 가족실은 현재 그의 개인 응접실로 쓰이고 있었다. 잘 때를 제외하곤 그곳에서만 칩거했고 늙은 한스 외에는 하인도 출입금지였다.
가족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바닥에 내던졌다. 발로 걷어차고 마구 짓밟았다. 너절해진 두루마리는 맹금한테 물어 뜯겨 죽은 새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차례 분을 토한 이젠하르트는 체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심호흡하며 숨을 골랐지만 관자놀이와 이마에 돋은 푸른 핏줄이 두근두근 거렸다.
‘개자식!’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분을 삭였다.
‘죽지 않고 잘도 돌아오셨군. 식인종도 네놈은 구역질이 나서 못 먹었구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두루마리를 힐긋 쳐다보니 또 욕지기가 나온다.
‘그래. 이번엔 네가 이겼다, 더러운 원수야. 나를 한 방 먹였구나. 추잡한 색마답게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날 모욕했어. 그러고 보니 교활한 네놈의 아비를 닮아서 네놈도 머리란 게 있긴 하구나……. 빌어먹을……. 뭐라고 지껄였냐. 네놈의 심장을 떨게 하는 그윽한 음성? 영롱한 음색? 이 개자식아, 너의 이름을 영롱하고 그윽하게 불러주마. 네 녀석이 관 속에 드러눕는 날에!……. 또 뭐라고 지껄였더라. 황금빛의 찬란한 머리칼? 이 빌어먹을 망할 변태 자식아, 네까짓 추잡한 색마가 눈 보신하라고 달고 다니는 머리칼이 아니다. 원하신다면 소원을 들어주지. 조만간 그걸로 네 목을 휘감아 들보에 매달아주마.’
실컷 저주와 욕설을 퍼부은 이젠하르트는 촛불로 양피지 두루마리의 한 귀퉁이에 불을 붙였다. 두루마리는 역한 냄새를 피우며 활활 타올라 새카만 잿더미로 변했다.
그 잿더미가 차게 식을 무렵, 조용한 실내에 그의 규칙적인 발소리가 뚜벅, 뚜벅 울리다 멎었다.
‘지금쯤 내게 한 방 먹였다고 신이 났겠군.’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지는 두고 보자꾸나. 네까짓 놈한테 화해의 키스를 애걸할 거라고? 이 내가? 하, 가소롭군. 추잡한 원수야, 네놈이야말로 내게 자비의 키스를 애걸하게 될 거다. 그땐 죽은 자의 왕이 나 대신 네놈의 추잡한 입술에 달콤하고 황홀한 키스를 해줄 테니 어디 두고 보렴.’
호기로운 각오와는 달리 그의 낯빛은 피로하고 음울했다.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입술이 거칠었다.
그는 부어 오른 오른쪽 다리를 끌며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서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저녁의 제2종이 쳤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빠르게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어둠이 밀어닥치자 밸데케 집안은 음산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