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 전조 (16/33)

지은이 · 이한

목차

1. 전조

2. 반격

3. 교활한 까마귀

4. 기습

5. 밤도둑

6. 사탄의 부활

7. 우정의 찌르기

8. 관대한 기사

9. ROMEO MUST DIE

10. 포겔바이데

11. 재판

12. 전야

13. 황제의 흰바다매 이야기

14. 힐데가르트의 눈물

15. 흰바다매 이젠하르트

16. 전령

17. 에필로그1

18. 에필로그2

-등장인물-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

하르트만 폰 데어 포겔바이데: 로트의 부친

이터: 영주의 조카. 친구

로에란그린: 친구

카이렛: 친구

지그문트: 사촌

이젠하르트 폰 벨데케

헤르만 폰 벨데케: 이젠하르트의 부친

벨데케 부인: 모친

힐데가르트: 누이동생

탐파니스: 사촌

디트리히: 사촌

콘드비라무어스: 영주의 딸. 이터의 사촌

만필요트 백작: 기사단장

하인리히 폰 오스터팅겐: 영주

베르나르 신부

늙은 한스: 벨데케의 종복

어린 한스: 한스의 아들

이스트리엔 후작

아이케: 이스트리엔의 기사

리아세: 이스트리엔 후작의 딸. 아이케의 약혼녀

1. 전조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이었다.

기사와 원수가 전초전을 벌인 이후 어느 날.

시민들은 로트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접했다. 납치 의혹 사건이 벌어진 후에 종적을 감춘 그가 열흘째 행방불명이었다.

혹자는 그가 영국으로 도주했다고 주장했다. 비밀재판과 보복이 두려워서 바다를 건넜단다.

혹자는 볼로냐에 있는 사창굴로 피신했다고 주장했다. 영주의 조카인 이터가 그 공모자로 지목됐다.

날마다 새로운 주장과 의혹이 제기되던 열 하루째, 어느 농부가 급보를 전했다.

그는 시장판 푸줏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마 전 오후였다. 울에서 도망친 염소를 쫓는데 염소는 검은 숲 근처로 달아났다. 염소를 잡은 농부는 숲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비명과 고함을 들었다. 죽은 자의 왕이 부르짖는 괴성 같아서 농부는 겁에 질려 달아났다.

며칠 후에 염소가 또 탈출했다. 농부는 잡아먹힐 각오를 하고 검은 숲으로 되돌아갔다. 염소를 찾아 헤매던 중에 그곳 숲 한복판에서 처참하고 오싹한 광경을 목격했다. 안개가 너울대는 그곳은 멀리서부터 역한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가까이 가보니 남자의 시체가 두 손발이 잘린 채 나무 둥치 아래 버려져 있더라.

이 급보에 도시의 재력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두 손발이 잘렸다면-…….”

그 중에서 한 귀족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보복 피살이야.”

젊은 농부는 시신이 심하게 훼손됐고 까마귀가 눈알을 파먹었다고 전했다.

귀족들 몇은 검은 숲에 사람을 보내서 시체를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보복 피살이라고 단정한 귀족이 반대했다.

“살은 썩고 눈알은 없다지만 머리칼은 남아있을 것 아닙니까. 그 농부 녀석이 검은 머리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자 반론이 제기됐다.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자칭 영주의 측근이라는 자는 확신을 품고 말했다.

“그 시체는 젊은 포겔바이데일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벨데케의 젊고 명예로운 기사가 영주님의 명을 어기고 가문의 멸족을 자처했으리라 생각합니까? 그럴 작정이었다면 무도회 때 이미 결딴을 냈겠지요. 기사는 저번에 벌어진 납치 미수 사건 때에도 주야로 참회의 기도를 올리며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골백번은 되풀이하더랍니다. 고해성사 때도요. 베르나르 신부가 증인입니다.”

이로써 보복 피살 주장은 한 발 후퇴됐다.

영주의 측근은 반론을 이었다.

“하물며 영주님께선 얼마 전 만찬회석에서 은근한 희망을 피력하셨잖습니까? 포겔바이데와 벨데케 두 가문은 이제 화합할 때가 됐다, 두 집안의 가련한 비둘기 한 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지 않느냐, 이는 두 가문의 화합을 바라는 주님의 뜻이다, 만일 이를 방치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비극과 재앙의 씨앗이 된다. 그러고서 벨데케의 딸과 젊은 포겔바이데가 혼인하기를 희망하셨습니다.”

“영주님께서 직접 혼인 얘기를 꺼냈다고요?”

“예.”

측근은 단언했다.

“와병 중인 벨데케와 밀담까지 나누셨지요.”

“밀담이라? 그럼 역시 젊은 포겔바이데의 만용과 도발을 관대히 용서하라는 충고였겠군요.”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니요?”

영주의 측근은 일동이 놀라는 꼴에 내심 만족해서 말했다.

“영주님께선 직접 친절히 ‘권유’하셨습니다. 지난번 연회장에서 벨데케의 젊은 기사가 칼부림 난동을 벌인 것과 최근에 납치 미수 의혹을 씌운 것에 대해 젊은 포겔바이데한테 정중히 사죄하라고 말이지요. 주인 벨데케가 직접 말입니다.”

“아니, 사죄를 하라고? 벨데케가 먼저?”

“네, 그렇습니다.”

“그건 뜻밖인데요?”

“뭐,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야 없잖습니까.”

영주의 측근은 나무딸기 포도주 잔을 들어 일동의 이목을 모았다.

“늘 이 도시의 화합과 평화, 번영에 헌신하는 영주님으로선 마땅하고 공정한 처사였습니다. 두 원수 가문의 오랜 반목과 유혈 참극은 영주님의 선조 때부터도 이 도시의 크나큰 불행이자 고뇌의 짐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보시오!”

그러자 한 귀족이 언성을 높였다.

“솔직히 터놓으시오. 우리라고 먹통인 줄만 아오? 내일이면 만천하에 죄다 밝혀질 텐데.”

“성미가 급하시군요.”

빨간 입술을 끌어올린 영주의 측근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마악 말씀드리려던 차였는데요. 물론 영주님께는 속사정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늙은 포겔바이데 때문입니다. 하르트만 폰 데어 포겔바이데, 그 환전상이 소식을 접했답니다. 제 아들놈이 벨데케의 무도회에서 치욕과 수모를 당하고 이스라엘의 백성처럼 쫓겨난 사건을 말입니다. 어느 누가 날개를 달고 날아가서 일러바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로마에는 파다하게 소문이 났답니다. 그 소식을 접한 다음 날, 포겔바이데는 순례고 나발이고 때려치우고 스페인의 개망나니 용병을 모조리 사들였답니다. 그 중엔 거짓 개종한 이교도도 섞여 있다더군요. 닥치는 대로 난폭자를 고용한 게죠. 살육과 약탈에 굶주린! 교황께는 일찌감치 면죄부를 사들였답니다. 그들의 목적지가 어디겠습니까?”

영주의 측근은 포도주를 마셨다. 혀가 포도주 찌꺼기 탓에 뱀처럼 붉었다.

“재물 앞에선 제 존속 살해도 마다하지 않는 도적기사들, 명성과 재물을 잃고 자포자기한 편력기사들이 그 패거리에 속속 합세 중이랍니다. 그러니 영주님께서도 수수방관만 할 처지는 아니지요. 애초부터 그 환전상한테 상당한 빚을 졌는데, 그 채권자가 명예회복이라는 깃발 아래 핏빛으로 물든 복수의 깃발을 휘날리며 진군 중이니까요.”

귀족들은 이 소식에 경악한 체했다.

그러나 대다수가 부유한 상인인 그들은 내심 쾌재를 외쳤다. 이 소문이 사실이라면 오랜 세월 영주에 맞서 도시의 자치권을 노려왔던 그들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영주로부터 헐값에 빼앗을 막대한 이권이 그 목적이었다.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이제껏 말을 아끼던 한 노귀족이 운을 뗐다.

“늙은 포겔바이데가 진군한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일 뿐이니 경솔하게 부화뇌동하지 맙시다. 그렇긴 합니다만, 벨데케의 젊은 영웅의 귀향은 이 도시의 안정과 평화에 분명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 같군요. 더욱이 두 집안의 앞날에 대해선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으니……. 흠. 벨데케가 먼저 사죄를 해야 한다라…….”

노귀족의 교묘한 말꼬리 흐리기에 일동의 주의가 환기됐다. 그는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으니 비로소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밝힌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충분히 예측 가능했지요. 나는 영주님의 처사가 공정했다는 데에 적극 찬성합니다. 젊은 포겔바이데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명랑하고 선량한 게다가 그 또래답지 않게 순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젊은 치기로 인한 과오는, 기껏해야 부정한 과부랑 놀아난 그의 순수한 열정을 반증할 따름입니다. 원수의 딸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그의 선량하고 순박한 심성을 대변하지 않습니까? 그런 포겔바이데는 현재 어디에 있을까요? 원수의 칼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간구하고, 납치 미수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종적을 감춘 젊은 포겔바이데는 현재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자리에 누웠다는 벨데케는 종부 성사를 하기 전에 그의 실종에 관해서 먼저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귀족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노귀족은 잔을 쳐들었다.

일동은 우루루 그를 둘러싸고 말했다.

“실은 저희 딸년도 종일 울고만 있답니다.”

그 중에서 한 명이 눈을 붉히며 말문을 열었다.

“열흘이나 됐습니다. 젊은 포겔바이데가 썩은 고깃덩어리로 돌아온다면 수녀가 되겠다고 식음을 전폐하며 울기만 한답니다.”

“불쌍한 포겔바이데! 나도 실은 그의 결백을 확신하고 있었어요. 납치 미수라니, 그 사건은 어쩐지 처음부터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요. 그는 대낮에 당당히 규방에 침입해 사랑을 갈구할 정열가이지 비겁하게 야음을 틈타 처녀를 납치할 밤도둑 따위는 아니잖습니까?”

“벨데케는 그 벌을 받은 겁니다. 그가 내일 당장 죽더라도 죽기 전에 사죄는 해야 할 겁니다. 손발이 잘린 주검을 끌어안고서라도……. 그래야 주님의 심판을 면하겠지요.”

노귀족을 둘러싼 이들은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낯은 심적 부담을 덜어낸 듯이 한결 밝아졌다.

“그렇다면 젊은 기사 쪽은 어떻게 나올까요? 먼저 사죄할까요? 허수아비인 벨데케 본인이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젊은 기사가 실권을 쥐고 있는데.”

“달리 방법이 있겠습니까? 영주님의 ‘친절한’ 권유를 받았는데.”

“그럼요. 기사는 마땅히 영주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누군가 이젠하르트를 지목하며 말했다.

“그는 주군께 충성과 신의를 맹세한 ‘자칭’ 명예와 신의의 기사 아닙니까? 하지만 회의적이군요. 지난 무도회 때의 그 경솔한 칼부림 난동만 봐도……. 아무튼 요사이 그 영웅은 집안에만 칩거한다던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군요.”

귀족들은 포도주 잔을 들었다. 영주의 측근은 가장 높이 잔을 쳐들고 벨데케 가의 장래를 위한 축배를 제안했다. 모두가 잔을 높이 쳐들고 주님의 가호를 빌었다.

“우리가 이러니저러니 여기서 언쟁을 한들-…….”

영주의 측근은 건배가 끝나자 마무리 언사를 했다.

“만사는 주님의 뜻에 달렸어요. 그 무고한 젊은 포겔바이데가 조만간 이 도시에 큰 공을 세울지 말지는 두고 볼 노릇이지요. 죽어서든 살아서든 말예요. 우리는 물레방아나 빵 구이 화덕(사용 강제권이 따르는 중세 영주의 대표적 이권 사업)이 무탈한지 점검이나 하면서 점잖게 지켜보면 되겠지요.”

저녁 종이 쳤다.

귀족들은 저마다 잇속을 계산하며 서둘러 귀가했다.

박공지붕과 교회의 종탑에 앉아있던 새들은 하늘을 물들인 핏빛 낙조 속에서 불길하게 울어대며 날아다녔다.

해가 저물자 제2종이 쳤다. 상점과 술집은 모두 닫혔다. 시민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로트의 흑마가 빠져나갔던 시문도 굳게 내리 닫혔다.

도시는 이윽고 암흑과 적막에 휩싸였다.

포겔바이데 가의 문지기 노인 힌츠는 천지가 요동치는 우렛소리에 눈을 떴다. 밖에서 누군가 문짝을 부슬 듯이 두들겨대는 소리였다.

힌츠는 낮잠이 싹 달아났다. 멍했던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는 서둘러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깡마른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몽둥이를 집었다. 이윽고 이가 몽창 빠져 쪼글쪼글한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했다.

“드디어 때가 왔군.”

힌츠는 제 몸뚱이만 한 몽둥이를 문짝에 흔들었다.

“어디서 고약한 썩은 냄새가 난다 싶더니 벨데케의 개새끼들이 왔구나. 잘 됐어. 오늘이야말로 이판사판, 결판을 내자. 이 집안의 주인은 집안이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한 줄도 모르고 저 혼자만 천당에 가려고 순례를 떠났겠다, 젊은 개망나니는 오밤중에 발정이 나서 보름이나 바깥을 쏘다니니 진즉에 골로 갔어야 할 쓸모없는 인간이겠다, 하는 수 없이 이 내가 홀로 고독하게 원수 놈의 개새끼들과 맞서는 수밖에! 주님! 이 가련하고 연약한 힌츠를 굽어 살피소서!”

쾅쾅쾅-

힌츠는 와락 덤벼들어 문을 발칵 열고 고함쳤다.

“비렁뱅이 개새끼들이 왔구나! 덤벼라! 에잇!”

“이크!”

“헉!”

힌츠는 몽둥이를 머리 위에 쳐들고 서버렸다.

문간에 선 이터는 눈을 비비며 외쳤다.

“제기랄! 여기가 아닌가?”

“큼, 나리 오셨군요.”

“힌츠 맞군. 난 또 잘못 온 줄 알았잖아.”

힌츠는 입술을 삐죽대며 몽둥이를 슬그머니 내렸다. 마지못해 내리는 폼과 이터를 흘끔 흘겨보는 꼴이 모른 척 후려치지 못한 걸 무척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이터는 안으로 들어섰다.

“대낮부터 누굴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설쳐?”

“뻔한 걸 물으시는군요. 큼!”

힌츠는 퉁명스레 대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몽둥이는 그대로 쥐고서 골목 어귀를 날카롭게 살피다 침을 뱉고 돌아왔다.

이터가 물었다.

“영감, 로트는 어디 있어?”

“저도 몰라요.”

“뭐야? 아직도 안 돌아왔어? 몸종 녀석이 돌아왔다고 날 부르러 왔다던데.”

“그럼 돌아오셨나 보네요.”

힌츠는 문을 단단히 잠그고 몽둥이를 점검했다.

이터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의뭉스러운 영감탱이야, 로트는 안뜰에 있나? 거기서 뭘 하는데?”

“나리도 참! 단짝 친구께서 그걸 저한테 물으셔요? 까마귀한테 눈알이 파 먹혔다는 둥, 숲의 패거리가 솥에 넣고 팔팔 끓여 먹었다는 둥, 이 도시의 흉흉하고 추잡한 소문이라면 그 주인공 자리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그분께서, 보름 만에 도둑괭이처럼 스리슬쩍 귀가해서 이 대낮에 뭘 하고 계시겠어요? 그분이 닭을 잡고 계시겠어요? 아니면 빵을 굽고 계시겠어요? 아니면 이 충직한 힌츠를 도와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한 집안의 명예회복과 복수를 위해서-…….”

“됐어. 영감탱이 심술은 꼭 그 녀석을 닮았어.”

이터는 힌츠의 말을 끊고 돌아섰다.

“하느님 맙소사! 제가요? 차라리 저주를 하세요. 악마의 저주를!”

이터는 힌츠의 탄식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현관을 지났다. 어젯밤 과음으로 곯아떨어졌다가 로트가 귀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차였다.

안뜰로 이어진 어두컴컴한 홀에 들어서다 말고 그는 중반쯤에서 걸음을 멈췄다. 제자리를 오가며 음음, 흠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때론 제 머리를 세게 쥐어박기도 했다.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아.”

몰래 뒤따라와 그를 훔쳐본 힌츠는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저 꼴을 보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군. 또 뭔 수작을 부렸을까. 흥. 유유상종이라고, 내 진즉에 알아봤지. 저 패거리는 하나같이 천벌을 받을 개망나니들이니 남의 뒤꽁무니에서 뭔 수작인들 못 부릴까!”

이터는 안뜰로 들어섰다. 안뜰은 로트의 부친이 축재하자마자 옆집을 사서 집을 허물고 조성한 인공 숲이었다. 영주의 수목원과 비슷했다.

너른 숲은 고요했다.

이때 새 울음소리에 뒤섞여 사람의 곡소리 같은 게 얼핏 정원수 너머로 들렸다.

그쪽으로 발길을 내딛던 이터는 귀를 쫑긋했다.

‘응? 저 소린 뭐지? 또 눈물을 줄줄 짜고 있나? 아닌가? 고함이 들리네. 저런, 술에 취해 울부짖나 보군. 으이구, 못난 녀석!’

제 머리를 세게 쥐어박은 이터는 시야를 가린 정원수를 헤치고 달려가며 외쳤다.

“여봐라, 이 가련한 울보 녀석아! 내가 왔다! 눈물은 뚝 그치고 나랑 볼로냐로 가자. 내가 원 없이 귀여워해 줄 테니-……. 응?……. 으악-!”

“와, 맞혔다!”

“하. 하. 잘했어! 카이렛!”

로트는 맞은편에 있는 카이렛에게 달려가서 말했다.

“이번에는 내 차례야. 작대기를 줘봐.”

“네가 나처럼 칠 수 있다고?”

로트는 카이렛에게서 기다란 나무 작대기를 건네받고서 기운차게 말했다.

“얼른 던지기나 해.”

“좋았어. 각오해라! 에잇!”

땅-

“쳤다! 하. 하. 하.”

나무 공은 안뜰 담장 너머로 날아갔다.

몸종이 냉큼 달려와서 새 나무 공을 건넸다.

카이렛은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공을 던졌다. 로트는 작대기를 기운차게 휘둘렀다. 울퉁불퉁한 나무토막이나 마찬가지인 공은 곧잘 작대기에 빗맞고 튀거나 허공에서 뚝 떨어졌다. 그때마다 안뜰에는 욕지거리와 홍소가 넘쳤다. 로에란그린은 그늘에 앉아 공놀이를 구경했다.

놀이가 끝났다.

카이렛은 공에 맞아서 토끼풀에 뻗어 있는 이터의 발을 툭, 차고 지나서 탁자에 앉았다.

로트는 이터에게 달려들어 키가 훌쩍 큰 그를 번쩍 쳐들었다. 카이렛도 신이 나서 달려 나왔다. 로트는 그에게 이터를 던지고 제 위치로 달려가 나무 작대기를 주워들고 소리쳤다.

“공을 던져, 카이렛! 저 첨탑 너머로 날려버리게.”

“좋았어. 받아라!”

“악, 사람 살려!”

발버둥치는 이터를 카이렛이 로트한테 던졌다. 로트는 방망이를 휘둘러 그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이터는 비명을 지르며 토끼풀 위로 고꾸라졌다.

호사스런 튜닉이 엉망진창이 된 이터는 엉금엉금 기어서 세 귀공자가 모여 있는 자리에 꼈다.

로에란그린이 그에게 말했다.

“로트의 몸종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났는데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셨군.”

“잠깐 볼일이 좀 있었거든.”

시종이 손을 씻을 물그릇과 맥주를 내왔다.

네 사람은 한동안 맥주를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로트와 카이렛은 약간의 취기로 기운이 뻗치자 몸싸움을 했다. 풀밭에 서로를 내던지거나 칼싸움을 했다.

막판에는 새 놀이를 시작했다. 안뜰의 정원수 하나를 목표로 삼고서 나무 공을 운반하는 놀이었다. 로트가 먼저 공을 안고 달렸다. 카이렛이 몸을 날려 다리를 잡아채고 공을 뺐었다. 사지가 뒤엉킨 둘은 또다시 흙바닥에서 굴렀다. 둘은 서로 공을 뺏어 먼저 목표에 도달하고자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 꼴을 구경하던 이터는 로에란그린에게 물었다.

“저 녀석 언제 돌아왔대?”

“오늘 새벽.”

“남쪽 숲에 다녀왔대?”

“검은 숲에 있었다더군.”

“저런!”

이터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용케도 살아 돌아왔구나. 거기서 뭘 했대?”

“몰라. 자네가 직접 물어봐.”

로트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며 카이렛을 상대로 마구 농담을 해댔다. 한시도 수족과 입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힌츠의 엉덩이를 걷어찼지. 이 통나무 대가리 영감탱이야, 네놈은 주인을 몰라보냐? 그랬더니 힌츠가 기겁을 하며 날 보더니 허깨비가 나타났다고 난리법석이잖아.”

카이렛은 실없는 농담에도 폭소를 터뜨리며 맞상대해줬다.

그러나 로트는 웃지 않았다. 입술은 웃고 있으나 초록색 눈은 열을 품고 번득였다. 평소의 낮고 부드러웠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메마르고 성급하고 거칠었다.

이터는 로트를 잠자코 지켜봤다. 그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눈가의 장난기와 입가에 떠돌던 미소가 사라졌다. 선사시대 야만인을 닮은 완강한 눈두덩에 긴장이 흘렀다. 그 아래 길쭉한 눈은 맹수 앞에서 돌도끼를 쳐든 사냥꾼의 그것처럼 변했다.

이터는 로에란그린을 돌아봤다. 로에란그린도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이터는 방만했던 자세를 똑바로 추스르고 앉아서 입을 열었다.

“어이, 로트, 잘 지냈어? 오랜만이군. 자네 오늘 기분은 어때?”

“좋아.”

“그럼 나랑 목욕탕에 가서 피 뽑자.”

“갑자기 왜?”

로트가 경계하며 되물었다.

이터는 태연히 답했다.

“왜긴? 열흘인가, 아니 보름인가. 네 녀석이 무사히 살아 돌아왔으니 생존 축하연을 벌여야지. 목욕탕에 가서 맥주도 마시고 마사지도 받고, 개운하게 피를 뽑아 심신을 정화하자. 네 녀석이 또 지랄발광을 하기 전에.”

로트는 이터를 노려봤다.

이터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왜, 가기 싫어? 아님 내 말이 틀렸나? 넌 또 곧 뭔 짓을 저질렀거나 당장 저지를 태세인걸.”

“…….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로트는 의뭉스럽게 목소리를 낮췄다.

“참 다행이군.”

이터는 가식적으로 활짝 웃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난 믿을 수는 없는걸. 네놈이 사지를 주체하지 못하며 쓸데없는 농담을 마구 늘어놓고, 기다란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이고, 아흐마르디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 속에서 괴이한 열기를 번쩍일 땐 내 귀염둥이 로트가 아니거든. 야수의 탄생이지. 제 광포한 정열에 정복당해 잔등의 털과 발톱을 세우고 음침한 동굴 속에 도사린 한 마리의 거친 야수 말야.”

“…….”

로트는 입을 꾹 다물고 이터를 노려봤다.

미소를 싹 거둔 이터도 그 시선을 마주했다. 눈싸움이 벌어졌다.

잠시 후, 로트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공격적인 적의에 찬 시선이 소극적 방어 태세로 수그러들었다.

이터는 계속 노려봤다.

로트는 원군을 요청하듯 로에란그린과 카이렛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들은 침묵했다.

3대 1이란 것을 깨달은 로트는 눈길을 떨어뜨리고서 말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사실이냐고 이터가 되물었다.

“사실이야. 하늘에 맹세할게.”

“그래? 어이, 로트, 그럼 이번엔 어디로 할까? 성채의 망루에 널 내걸어 줄까? 아니면 종탑에 매달아 줄까?”

이터가 으스스하게 묻자 로트는 입을 닥쳤다. 호소의 눈길로 두 귀공자를 쳐다봤지만 두 귀공자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이터는 언제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제 이마를 감싸 쥔 로트는 나지막한 신음을 뱉었다.

“뭐, 나야 어느 쪽이든 괜찮으니까 천천히 숙고해서 결정해.”

“네놈 속은 창자까지 다 보이니까.” 하고서 빙긋 웃음 지은 이터는 느긋하게 로트의 항복을 기다렸다.

로트의 광적인 정열이 폭발할 때, 그걸 제어할 만한 완력과 담력을 지닌 사람은 이터였다. 소를 때려잡는 하녀를 로트의 침실에서 구해준 사람도 그였다.

이터는 그날 하녀에게서 억지로 떼어낸 로트의 두 발목을 잡고 3층 창밖에 세탁물처럼 내걸었다.

로트는 오랫동안 거꾸로 매달린 채 그를 저주했다. 온갖 악랄한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풀어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발광은 그날 저녁 무렵에 멎었다.

이터는 옷이 찢기고 머리가 뜯겨 만신창이였다. 한쪽 눈은 주먹에 맞아 퉁퉁 부었다.

차디찬 돌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로트는 제정신을 차리자 이터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젊은 육신을 사로잡았던 광란의 폭풍은 참회와 회한의 눈물만 남겼다. 자기부정과 자괴감이 그 결과물이었다. 이성으로 억압했던 마음의 혼란과 고뇌가 장기간 축적되거나, 편집광처럼 한 가지 신념과 목적에 집착할 때 그런 정열의 폭발이 일었다.

그 폭풍이 광포하고 오래 지속될수록 후유증도 치명적이었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은 그 발광의 전조를 감지했다.

“자네들이 원하는 게 뭐야?”

마침내 로트가 반항적으로 물었다.

친구들을 외면한 시선은 맥주잔이 탁자에 남긴 동그란 물 자국에 못박혀 있었다.

“뭘 알고 싶은데? 뭐든 물어봐. 다 털어놓을게.”

“검은 숲에 다녀왔다며?”

이터가 물었다.

로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남쪽 숲에 있었어.”

“그래? 거기선 뭘 했는데?”

로트는 이터를 힐긋 곁눈질한 후 말했다.

“뭘 하긴. 명상과 산책을-……. 알았어! 알았어! 다 말할게! 제기랄! 이렇게 자꾸 쥐어짤 거면 죽여! 차라리 날 죽이라고!”

이터는 옆구리에 끼고 나르려던 그를 토끼풀 바닥에 꽝, 내던졌다.

널브러진 로트는 두 팔을 벌리고 누워 괴롭게 숨을 내쉬었다.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힘없이 눈을 감고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그 짓을 한동안 되풀이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슬그머니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세 귀공자는 냉정하게 그를 노려봤다.

“맞아. 나는……. 검은 숲에 다녀왔어.”

로트는 자포자기한, 쉰 목소리로 고백했다.

“거기서 이젠하르트를 우연히 만났어. 열흘 전에.”

이어서 그는 실종 보름간에 벌어진 일, 즉, 남쪽 숲에서 했던 야숙, 이젠하르트와 벌인 충돌, 검은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열흘 만에 숲에서 탈출했으며 구르네만츠를 도둑맞아서 집까지 걸어오게 된 경위를 순순히 알렸다.

이젠하르트랑 충돌했다고 하자 카이렛은 놀라서 외쳤다.

“맙소사. 숲의 파괴자가 자네를 살려줬다니 믿기지 않아.”

“살려주긴.”

로트가 울컥해서 받아쳤다.

“그 녀석은 날 죽이려고 했어. 달아나는 날 붙잡더니 이렇게 하고 뒷머리를 움켜잡아서 땅에 처박고 짓이겼지. 이렇게, 이렇게.”

로트는 카이렛의 팔을 뒤로 꺾고 탁자에 코를 비벼대며 몸소 폭행을 당한 시범을 보였다. 다리가 부러진 이젠하르트가 쫓아와서 저를 흠씬 두들겨 팬 사실을 강조했다. 그때의 심경과 육체적 고통에 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장황하게 쏟아냈다.

말을 마친 그는 맥주로 목을 축였다. 그런데도 목이 탔다. 초록색 홍채는 잠열을 품고서 불안스레 움직였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이 날카로운 탐색의 눈초리로 지켜보자 로트는 맥주를 마시며 슬그머니 그들을 외면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탁자에 엎어져 끙끙대던 카이렛이 말했다.

“놈은 자넬 죽일 거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아니라고 고집 피웠지? 이제 알겠어? 녀석은 화평의 특사 따위는 목을 잘라서 돌려보낼 고집불통 폭군이야.”

“…….”

“요새 자네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어. 우린 믿고 싶지 않았지만 왈칵 무서운 생각이 들더군. 황야에도 가보고 남쪽 숲도 뒤졌어. 심지어 검은 숲도 가봤는데 자네를 못 찾았어.”

쏟아지는 질타에 로트는 반성하듯이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다음에는 어딘가 가려면 먼저 귀띔이라도 해. 안 그럼 자네 주검이 말안장에 실려 올 때까지 우리 애만 타겠지. 자넨 콘드비라무어스가 없었다면 벌써 성채의 지하 감옥에 구금당했거나 이젠하르트한테 살해당했을 거야.”

카이렛은 콘드비라무어스가 로트가 결백하다고 증언했음을 알렸다.

납치 미수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과음으로 곯아떨어진 이터는 잠결에 콘드비라무어스에게서 직접 납치 의혹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터는 즉시 로트에게 몸종을 보내서 집에 처박혀있으라고 경고했지만 로트는 몰래 달아났었다.

“그런데 좀 이상해. 콘드비라무어스는 왜 위증을 했을까? 로트한테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이터, 자넨 같은 핏줄이니까 알지?”

“아니, 나도 몰라. ”

이터가 대답했다.

“난 잠결에 콘드비라무어스가 시키는 대로 한 거야. 원래 여자들 속마음은 미궁이야. 어쨌거나 축배를 들자. 또 황야에서 헤맬 뻔했는데 이놈이 살아돌아 오긴 했잖아.”

세 귀공자는 맥주잔을 들었다. 침울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던 로트도 슬그머니 잔을 쳐들었다. 세 귀공자는 내키지 않았지만 선심 쓰듯이 건배를 해줬다. 로트는 몹시 기뻐하며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꼴을 보고 카이렛이 엄하게 말했다.

“이걸로 얼렁뚱땅 우리가 자넬 용서했다고 착각하지 마.”

“응. 걱정을 끼쳐서 자네들한테 면목이 없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로트는 친구들 비위를 맞추려고 거듭 술을 권했다. 유독 완고한 낯을 한 로에란그린과 이터에게는 정겹게 잔을 부딪치고 어깨동무를 해대며 뺨에 억지로 입 맞췄다.

그가 필사적으로 둘의 비위를 맞추는 꼴을 보고 카이렛은 너무 불쌍하고 비굴해 보이니 그만 용서해주자고 말했다.

로에란그린과 이터는 이번만 용서해주겠지만 앞으로 두고 보겠다고 경고했다. 로트는 가슴에 손을 대고서 앞으로는 돌발 행동으로 심려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나서 카이렛이 물었다.

“로트, 자네 아버지는 언제쯤 도착하신대? 지금쯤 저 시문 밖에 당도했으려나.”

“뭐? 그게 무슨 얘기야?”

로트가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카이렛은 늙은 포겔바이데가 진군한다는 소문을 못 들었느냐고 일렀다.

로트는 산란한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이 미간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불안정했던 시선이 또렷해졌다. ‘친절한 권유’로 빗대어진 영주의 화해 권고가 전해졌을 때는 긴장으로 굳은 낯에 순간적인 변화가 일었다. 빛보다도 빠르게 속내를 드러낸 그 표정 변화는 친구들이 감지하기도 전에 감쪽같이 지워졌다.

소식을 모두 전한 카이렛이 물었다.

“자네 아버지가 왜 약탈 패거리를 끌고 진군 중인지 알아?”

딴 생각에 빠진 로트는 모르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벨데케 집안을 깨부수기 전에 그분이 제일 먼저 뭘 할지 정말 몰라? 자네부터 작살낼걸. 자네가 집안의 명예를 박살냈잖아.”

로트는 겁에 질려서 입을 다물었다.

“난 그게 뜬 소문이라고 생각해.”

로에란그린이 로트를 위로하려고 나섰다.

“로트의 아버지는 여태까지 명예회복이나 복수보다는 재산 불리기랑 자신의 영혼 구제를 최우선으로 삼고 살아온 분이야. 그런 분이라서 섣불리 유혈 사태를 벌이지는 않으실 거야.”

로트는 이 말에 실망인지 안도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터가 칙칙한 분위기를 바꿔주겠다며 화제를 돌렸다.

“두 가지 재미난 소식이 있어. 첫 번째는 기쁜 소식인데 짝사랑에 백번 빠졌건만 백번 차인 로트, 축하해. 자네 드디어 백한 번째로 힐데가르트에게 차이게 됐어.”

“힐데가르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로트가 놀라서 물었다.

“생겼고말고. 네 놈이 정신 놓고 시문 밖에서 쏘다니는 동안 그 여자는 엄청난 위험에 빠졌거든. 얄궂은 운명의 희롱으로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어.”

“어떤 녀석이야!”

로트는 벌떡 일어나서 고함쳤다.

“그 여자를 괴롭히는 자식이 누군지 당장 알려줘! 내가 해치울 거야. 성스럽고 순결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을 짜내고 시름에 잠기게 하는 놈, 그놈을 내가 죽여 버리겠어. 덤벼라! 어떤 음탕한 악마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지?나와라!”

로트는 맥주잔으로 탁자를 쾅쾅 내리치며 핏대를 올렸다.

세 귀공자는 기가 막혀서 입을 닥쳤다.

로트는 제자리에 앉으며 조용히 뇌까렸다.

“어떤 놈이든 그런 녀석은…….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가 자리에 앉자 카이렛이 뚱한 표정으로 중얼댔다.

“방금 로트가 쏟아낸 저주문,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아?”

“응. 귀에 많이 익군.”

이터가 대답했다.

“아마 이젠하르트가 밤마다 우리 중에서 어떤 놈을 향해 뇌까릴 저주문일 거야.”

카이렛이 웃어대고 이터가 폭소를 터트리자 로트는 얼굴이 벌게졌다.

로에란그린은 힐데가르트가 위험에 처했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물었다.

“힐데가르트가 결국 수녀원으로 쫓겨나게 됐나?”

“아니. 전화위복이야. 구세주인 영웅이 나타났지. 눈먼 큐피드가 이번엔 만필요트 백작을 장님으로 만들었거든.”

“백작이 청혼이라도 했대?”

“아직은 아니지만 조만간 하겠지. 백작이 숙부랑 상의하는 걸 엿들었어.”

떠들썩했던 안뜰에 갑작스런 침묵이 흘렀다.

카이렛은 로트를 홱, 돌아봤다.

로트는 자신이 주목을 받자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흥분을 삭이려는 건지 본심을 숨기려는 건지 모호했지만 동요한 건 분명했다.

“빌어먹을! 그럴 줄 알았어.”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카이렛이 일어나서 소리쳤다.

“말 뼈다귀 같은 기사단 자식들! 난 처음부터 딱 알아봤지. 놈들은 정숙한 여자들 규방만 넘보는 방탕꾼들이야. 휘황찬란한 갑옷에 황금 박차, 보석 브로치 따위를 달고 으스대더니 역시 그런 음흉한 수작을 품었군. 무도회 날에도 봤지? 놈들은 프랑스 궁중 예절을 익혔다고 여자들 앞에서 뽐내더니 백작이 없을 때 거길 개판을 만들었잖아. 만필요트, 그자도 역시 음흉한 작자였군. 왜 거렁뱅이인 벨데케한테 선심을 썼는지 이제 알겠어. 그자는 황금과 보석을 짐말에 가득 싣고 다니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편력하며 어여쁜 처녀를 낚고 다녔던 거야. 제기랄!”

격렬히 기사단을 헐뜯던 카이렛은 도중에 로트가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자, 왈칵 달려들어 울지 말라고 부둥켜안았다.

로트는 오히려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힐데가르트가 운명의 짝을 만났다니 잘 됐어. 난 진심으로 그녀의 결혼을 축하할 거야. 만필요트 백작은 덕망 높고 고매한 성묘의 수호자야. 그런 호적수라면 기꺼이 양보해야지. 사랑하는 카이렛, 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나? 이건 주님의 뜻이야. 그녀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평생 사랑과 행복을 나눌 남편을 찾은 거야. 나 같은 바람둥이가 아니라……. 이건 수사슴의 예언이기도 했어……. 왜냐하면……. 내 꿈속의 그는 황금빛 머리칼의……. 소년이었으니까…….”

로트는 카이렛의 품에서 빠져나와 조용히 제자리에 앉았다.

이터와 로에란그린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팍팍, 이마에 꽂혀 따가웠다.

카이렛은 로트가 이젠하르트에게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아직 망상에서 깨어나질 못했다고 개탄했다.

“자, 두 번째는 더 재미난데 역시 로트가 축하를 받을 소식이야.”

이터는 로트를 향해 얄밉게 웃었다.

“로트, 축하해. 자네는 또 실연을 당했어. 이젠하르트가 청혼을 받아서 조만간 유부남이 될 거 같거든.”

“그게 무슨 헛소리야?”

로트가 험악하게 묻자 이터는 활짝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콘드비라무어스가 우리의 젊은 영웅에게 청혼했어. 강력한 사랑의 맹세와 봉사를 요구한 거지. 그 여잔 정복욕이 강하니까 곧 결실을 맺겠지.”

이터는 저를 노려보는 로트의 어깨를 다정히 감싸 안았다.

“알겠나, 로트. 예비 신랑은 그만 포기해. 이젠하르트는 자네의 운명의 상대가 아냐. 흰둥이 수사슴은 심술쟁이 거짓말쟁이야. 그러니까 나랑 볼로냐로 가자.”

로트는 거짓말이라며 이터의 손을 뿌리쳤다.

“사실이야. 콘드비라무어스가 그저께 대낮에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목욕을 했어. 그럼 승부는 끝난 거야. 자네가 검은 숲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였지. 이젠하르트가 남의 이목을 피해서 그날 백작을 방문했거든. 젊은 영웅이 백작의 천막으로 가는 길목에 나타나자 콘드비라우어스가 그를 불렀어. 벌거벗은 몸으로 통에 들어앉아서는 백조 모가지같이 뽀얀 목과 어깨에 비누칠을 해달라고 청했지. 목욕이 끝나고선 맨몸뚱이 물기를 닦아 달라고 청하고 막판엔 옷 시중까지 받아 입었거든. 어렸을 때부터 그 여잔 호언장담했어. 자기는 맨몸뚱이만으로 맹수를 잡는 덫을 칠 줄 안다고.”

카이렛은 대담한 행각이라며 감탄했다.

이때 안면이 굳은 로트가 벌떡 일어나서 쉰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은 이만 돌아가. 나 혼자서 생각할 일이 있어.”

“혹시 콘드비라무어스에게 결투를 신청할 작정이라면 나한테 먼저 상의해.”

이터가 말했다.

“내가 숙부에게 결투 사유서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아줄게. 대신 거세당할 각오쯤은 해야 할 거야. 콘드비라무어스는 결투장에서 남자의 거시기를 잘라버리거든.”

카이렛이 폭소를 터트렸다.

로트는 탁자를 쾅, 내리치고 고함쳤다.

“빌어먹을! 다들 당장 가버려! 친구란 놈들이 내 불행을 조롱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 하긴 너희는 처음부터 날 비웃었어. 나를 걱정하는 체하며 내 불행을 내심 기뻐하고 비웃었어. 족쇄에 묶인 곰이 사냥개한테 물려 춤을 추는 꼴을 구경한 셈이지. 위선자들!”

“자네, 진짜 미쳤군.”

“그래! 난 미쳤어!”

카이렛의 말에 로트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난 미쳤으니까 더는 내 일에 상관하지 마. 너희는 고결한 영혼과 명철한 이성을 겸비한 고매한 귀공자들이시니 나 같이 망상에 빠진 미친놈과는 관계를 끊어. 내가 얼마나 미쳤는지 알려줘? 난 열흘 동안 검은 숲에서 헤매다 악귀에 쓰였어. 갓난애를 납치해서 뜨거운 물에 팔팔 끓여 뼈를 발라 먹었어. 죽은 자들의 왕의 손바닥 자국이 내 가슴팍에 찍혀 있다어 자, 여기 봐. 이젠 알겠지? 난 미쳤어! 미쳤다고!”

“로트, 진정해.”

“시끄러워! 나쁜 녀석들! 너희는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롭고 슬픈지 몰라. 태어나서 지금까지 방탕과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비로소 인생의 목표를 찾고서 그 목표를 이루고 싶어 하는데, 날 조롱하기만 하는구나. 그래, 마음껏 비웃어. 나는 내 신념대로 할 테니까. 어떤 위협이나 회유도 하지 마. 너희가 나를 막으려고 들이대는 핑계는 다 비겁한 것들이야. 이젠하르트의 칼이 두렵지 않느냐고 했지? 두려워. 하지만 난 비겁한 놈이 아냐. 내가 죽음을 마다할 것 같아? 아니. 난 이미 죽었다 살아난 놈이야. 내가 두려워하는 건 오직 하나, 내 안에 도사린 광포한 정열의 악마야. 내 꿈을 헛된 야망이니 망상이라고 불러도 좋아. 하지만 그저 어리석기만 한 걸까? 무모할망정 시도조차 해선 안 될 이유가 뭔데? 내가 이젠하르트를 사랑해선 안 될 이유는 뭔데? 난 지금까지 이렇게 격렬한 마음의 동요를 느껴본 적이 없어. 칼에 맞아 죽어도 좋아. 어차피 한 번 죽었던 몸이니까……. 제기랄, 너희한테 이런 조롱을 받느니 차라리 검은 숲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격정을 폭발시킨 로트는 정원 한가운데로 뛰쳐나가서 주먹을 휘두르고 덤비라고, 너를 굴복시키겠다고 고함쳤다. 화해의 키스를 간청하게 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세 귀공자는 침묵에 빠졌다.

이터가 그를 불렀다.

“로트, 자넬 놀려서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그런데 자넨 아직 우리한테 할 말이 남아있을 텐데.”

“있긴 뭐가 있어? 없어.”

“그럼 왜 도망쳐? 두 발이 안 보이게 달려가는군. 종탑에 내걸지는 않을 테니 이리 와서 다시 조용히 대화를 해보자.”

“없다니까!”

로트는 저 멀리 뛰어가서 고함쳤다.

“없다는데 자꾸 뭘 더 짜내려고 그래? 지독한 녀석!”

로트는 방향을 홱홱 바꾸며 정신 사납게 정원수 사이에서 오갔다. 느닷없이 내달리다가 정원수나 울타리에 머리를 꽝꽝 처박거나 뒤로 자빠져서 거친 숨을 뿜어댔다. 그러다 한참 후에는 죽은 듯이 풀밭에 드러누웠다.

새가 울었다.

오후의 햇살이 땀에 젖은 로트의 얼굴을 내리비췄다. 얇은 눈꺼풀은 밀랍으로 봉한 듯이 굳게 닫혔다.

긴 속눈썹이 맥없이 늘어진 로트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저녁 종이 치는 소리에 로트는 눈을 떴다. 토끼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깨닫고 고개를 쳐들었다.

횃불을 걸어놓은 안뜰은 어두컴컴했다. 일어나 앉다 보니 베고 있던 비단 쿠션이 손에 잡혔다. 주위를 둘러보니 빈 맥주잔을 옆에 두고 두 귀공자는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다. 요새 과음을 일삼은 이터는 자고 있다.

“내가 얼마나 잤어?”

“반나절쯤.”

로에란그린이 로트에게 와서 부드럽게 말했다.

“로트, 자네에게 사과할게. 우리가 경솔했어. 생각해보니 우린 지금까지 자네한테 이래라, 저래라 겁만 줬어. 앞으로는 가능한 자네를 도울게. 자네가 원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도록. 그러니 자네도 뭐든 숨기지 말고 전부 털어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의 번민, 고통과 슬픔, 가슴 깊은 곳의 비밀까지도.”

로트는 제 이마를 감싸 쥐고 물었다.

“내가 또 발광했어?”

“전혀 기억이 안 나?”

카이렛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기억나. 얼핏얼핏 수면에 떠오르는 물고기 등처럼 기억나. 소름이 끼치고 추악한 내 모습이…….”

시종이 맥주와 음식을 내왔다.

로트는 괴로워하며 물었다.

“콘드비라무어스가 이젠하르트에게 정말로 청혼했어?”

“아직이래.”

로에란그린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둘 중 누구에게든 자네가 청혼하고 싶다면 서둘러야 해. 둘이서 동맹을 맺는다면 자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맞수가 되는 거야.”

“그꼴을 두고 볼수는 없지.”

카이렛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로트,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자네가 선수를 쳐. 이젠하르트를 우리 편으로 꼬드기자. 우리 넷이서 달래고 어르면 설마 전부 죽이려고 덤비지는 않겠지. 우선 그 집에 병문안 가는 게 어때? 사경을 헤맨다는 벨데케한테 선물을 들고 가는 거야. 단, 그전에 명심할 게 있어. 절대 이젠하르트를 먼저 도발해선 안 돼. 일단 고개를 숙여. 명예욕이 드높고 자존심이 센 놈이니까, 이쪽에서 먼저 비위를 맞춰줘야 해. 우리가 놈하고 맞붙어서 창으로 승복을 받아낼 순 없으니까. 그럼 우린 다 죽어.”

카이렛이 열을 내며 화해 방법을 제안하는 동안, 로트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이때 이터가 부스스 잠이 깼다.

“응? 뭐지? 벌써 날이 밝았나. 그런데 나 자는 사이에 로트 저놈이 또 뭔가 사고를 치진 않았겠지? 방금 꿈자리가 좀 뒤숭숭했거든. 이젠하르트가 장창을 쳐들고 우리 넷을 줄줄이 꿰어버리겠다며 쫓아왔어. 아휴, 무서워라.”

이터가 몸을 부르르 떨자, 로트는 불현듯 몹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는 동정과 자비를 애걸하면서도 곁눈질로는 도주로를 살피는 범죄자처럼 이상한 표정이었다.

“여보게들, 자네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도록 무조건 돕겠다고 했지? 고맙군. 하지만 성공할지는 모르겠어. 나는 도무지 내 정열을 제어할 수 없거든. 사실 난 이젠하르트에게 편지를 한장 보냈어.”

불길함을 느낀 로에란그린이 언제 보냈느냐고 물었다.

“오늘 아침에 자네들이 오기 전에.”

“설마 결투장은 아니겠지? 괜한 도발은 어리석은 짓인데.”

“결투장은 아냐.”

로트는 차분히 말했다.

“구애 편지를 보냈지. 절절한 나의 진심을 담아서.”

경악하는 세 친구를 향해서 로트는 히죽, 웃었다.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참겠더군. 검은 숲에서 날 쫓아와서 후려 팼잖아. 다리가 부러진 주제에도 쫓아와서 마구 두들겨 팼지. 내 팔을 꺾고 죽인다면서. 그래서 보낸 거야. 나라고 계속 당할 수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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