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친절한 경고, 마지막 자비 (15/33)

15. 친절한 경고, 마지막 자비

밤도둑이 침입한 사건이 있던 다음날 아침.

늙은 한스는 시장 골목 앞에 있는 광장에서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퍼질러 앉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제 탓입니다! 제가 천벌을 받았어요. 이 충직한 한스가 주님의 노여움을 산 겝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서럽게 땅을 치며 울어대는 늙은 한스를 행인들이 에워쌌다. 가장 붐비는 시간대에 시장 입구가 막혔으므로 구경꾼이 순식간에 모였다. 시장판에서 입담꾼이자 호사가로 불리는 푸줏간 주인도 식칼을 허리춤에 차고 달려왔다.

“이 늙은이가 돌았나? 왜 길을 막고 울고불고 난리야?”

“도둑이에요!”

어린 한스가 절규하는 아비를 꼭 껴안고서 조그만 두 뺨에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울부짖었다.

“지난밤에 우리 주인 나리 댁에 밤도둑이 들었어요.”

어린 한스는 겁에 질려서 연거푸 외쳤다.

“우리 연약한 아가씨만 혼자서 집을 지키고 계실 때였어요. 주인 나리와 마님께선 몸이 편찮아 일찍 자리에 드셨는데 오밤중에 못된 밤도둑이 들었어요. 우리 아가씨의 방 창문턱까지 올라왔다가 저를 보고 달아났어요!”

“제가 천벌을 받은 겝니다!”

늙은 한스가 맞받아 소리쳤다.

“천벌이 아니면 악마의 짓이에요. 우리 신실한 작은 나리께서 참회의 금식 기도를 떠나서 집을 비운 사이 음탕한 밤도둑이 정숙한 우리 아가씨를 납치하려 한 겁니다. 저는 작은 나리께 신신당부를 받고도 아가씨를 지켜 드리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납치라구? 처음엔 도둑놈이라며?”

“납치범입니다!”

늙은 한스는 핏대를 올렸다.

“그냥 밤도둑이 아니었어요. 젊고 건장한 놈이었어요. 우리 아가씨께서 홀로 주무시는 걸 알고 잠입한 극악무도한 납치범이었어요. 값진 무구와 보석이 수두룩한 작은 나리의 방은 놔두고, 등불이 떡 하니 켜진 힐데가르트 아가씨 방에 침입했으니까요. 하지만 제 아들 녀석이 놈의 다리를 사납게 깨물려고 하자 쌩! 하니 달아나고 말았어요. 제가 쫓아갔지만 놓치고 말았지요. 말세예요! 종말입니다! 어떤 음탕한 악귀가 그런 몹쓸 짓을 저질렀을까! 그놈을 당장 잡아 이 광장 한복판에서 손발을 잘라야 합니다! 제 탓이에요. 다 제 불찰이에요! 아이구우, 불쌍한 우리 아가씨는 이제 어쩐담? 그 누가 음란한 악마의 손아귀에서 우리 순결한 아가씨를 지켜줄까!”

늙은 한스는 땅을 치며 울었다.

“으앙! 아버지, 우리는 이제 교수형을 당하는 거예요?”

어린 한스도 아비를 부여잡고 흑흑 울다 소리쳤다.

“으아앙! 살려줘요! 난 죽기 싫어요! 하느님! 성모 마리아님! 천사님! 그 악마 놈을 꼭 잡아주세요!”

이틀 후, 이젠하르트가 참회의 금식 기도를 예정보다 앞당겨 마치고 홀연히 귀가했다. 그는 며칠간 집안에서 두문불출했다.

회복세를 탔던 벨데케가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도시에 떠돌았다. 밤도둑 소식에 까무러친 벨데케 부인에겐 그리스인 의사가 다녀갔다. 의사는 몰려든 시민을 향해, 설상가상으로 겹친 불명예스러운 불행이 두 내외의 자존심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고 했다.

이젠하르트는 며칠 후 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놀랐다. 숙연히 눈을 내리깔고 교회와 집만 오가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수척하고 슬퍼 보였다.

호사가들은 마침내 그를 동정했다. 무도회에서 벌인 폭력이라는 단 한 번의 과오는 명예의 깃발이었던 그의 명성을 단숨에 떨어뜨렸다.

그게 얼마 전이었다. 불운한 영웅은 원수의 도발을 용서하고 금식 기도와 기부, 자선으로써 참회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다시 혹독한 시험대에 올렸다.

“겸허히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호사가는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맞서 싸워야지요. 신성한 그리스도의 용맹스러운 전사라면 자비와 관용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정죄의 검을 높이 쳐들고 악과 불명예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범인이 누구일까요?”

호사가들은 납치범의 정체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하, 참. 빤하지 않소. 차라리 그리스도를 배신한 놈이 누구냐고 묻든가.”

설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그들은 야릇한 침묵 속에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추격전이 벌어졌던 골목의 주민도 용의자를 지목했다. 그들은 허수아비인 야경꾼을 질타한 후, 이 도시에 사는 귀공자들의 문란하고 극악무도한 행실을 비난했다. 대낮에는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짓는 그들이 가공할 음욕에 휩쓸리면 처형대나 지옥의 형벌도 무용지물이며, 일단 범죄를 실행할 때는 그 뻔뻔함과 대담성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했다.

“나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중에서 한 시민이 목격자로 나섰다.

“벨데케 가에 침입한 납치범도 그런 놈이더군요. 놈은 발소리를 죽이며 처마 밑에서 살금살금 숨어다니기는커녕 대담하게도 고함을 치고 날뛰더이다. 놈들은 이 도시의 평화를 유린하고 있어요. 잡히는 족족 손발을 잘라서 광장에 매달아 놓읍시다. 아니면 재산을 몰수하는 벌금형에 처한 후, 쥐가 들끓고 오물의 악취가 진동하는 지하 감옥에 구금합시다!”

한편, 늙은 한스가 광장에서 벌인 소동은 포겔바이데 가에도 전해졌다. 이젠하르트가 귀가했다는 소식도 곧바로 뒤를 이었다.

포겔바이데 가의 하인들은 즉시 집안의 모든 문을 쾅쾅 닫아걸었다. 시장판에서 활개치던 포겔바이데 가의 혈기왕성한 두 젊은 하인도 집안에 처박혔다.

그들이 시장에 얼씬도 하지 않자 푸줏간 주인은 그들 보기가 성모 마리아의 영접보다 어렵다고 비웃었다.

*

며칠이 지났다.

이젠하르트는 이른 새벽에 기상했다. 시종은 그의 머리를 빗겨주고 옷을 입혀줬다. 그리고 사흘째 같은 질문을 했다.

“오늘은 갑옷을 준비할까요? 녹을 말끔히 닦아냈습니다.”

“창과 방패만 준비해라.”

“네.”

잠시 후 이젠하르트는 뒷마당으로 내려갔다. 시종은 물푸레나무로 만든 창과 무거운 방패를 짐말에 실어 놨다.

이젠하르트는 말에 올라탔다.

“넌 오지 마라.”

그는 어린 시동에게 말했다.

오늘은 주인을 꼭 따라가려던 시동은 깜짝 놀랐다.

“창 시합 연습을 가시는 게 아니신가요?”

“넌 남아서 창을 계속 만들어.”

“저도 데려가 주세요, 나리.”

“네가 더 크면 데려가마. 거긴 요괴들이 날뛰어서 넌 오줌을 싸고 달아날 거야.”

군마는 뒷마당에서 홀을 빠져나가 가로로 나갔다. 시종이 짐말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어린 시동은 울면서 배웅 나갔다.

가로에 선 이젠하르트는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군마는 주인의 명에 따라 안개에 젖은 땅바닥을 발굽으로 차대며 섰다.

그는 으슥한 골목 한곳을 날카롭게 노려보다가 어린 시동에게 일렀다.

“혹시 내 행방을 묻는 자가 있어도 모른다고 대답해라.”

시동은 엄명이 떨어지자 눈물을 닦고 야무지게 알았다고 답했다.

도시 전체에 거룩한 아침 종이 울려 퍼졌다.

군마는 자욱한 안개를 뚫고서 시문으로 달렸다. 시문이 열리자마자 통과한 군마는 숲으로 향했다.

시문 밖에 있는 숲은 북쪽과 남쪽, 두 곳이었다. 두 숲 사이에는 목초지인 평원이 있고 가운데에 강이 흘렀다.

이젠하르트는 영주의 사냥터를 지나쳐서 북쪽에 있는 검은 숲으로 달렸다. 안개가 자욱한 숲은 간밤의 어둠을 그대로 삼킨 듯이 동이 텄음에도 어둡고 음습했다.

검은 숲은 인근에 있는 어느 수도원의 사유지였다. 수도원은 사냥과 벌목은 금하되 인근에 사는 농부가 가축용으로 도토리나 개암나무 열매 따위를 주워가도록 허락했다.

농부들은 그러나 검은 숲에 출입하기를 꺼렸다. 숲에 감도는 음침한 기운과 죽은 자의 왕에 관한 괴담 탓이었다.

근처의 목초지에서 양 떼를 돌보는 양치기와 숲에 몰래 벌목하러 간 농부들이 영혼을 빼앗겨 실성했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그들의 몸에는 불에 탄 듯한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는데 그건 죽은 자의 왕이 영혼을 빼앗고 찍은 낙인이며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후로 검은 숲은 늑대인간이나 범죄자들의 피난처요, 요괴나 도적 기사의 온상으로 여겨졌다.

이젠하르트는 검은 숲 언저리에서 말을 멈췄다. 그곳에서 창 찌르기, 방패 휘두르기 등의 무술 연습을 했다. 양손에 창과 방패를 든 채 두 넓적다리만으로 질주하는 군마의 속력과 진로를 조절하는 훈련도 했다.

‘무술과 체력 단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돼.’

이젠하르트는 한차례 훈련을 마친 후 휴식을 취하며 생각했다.

‘방심과 교만에 빠져 이미 그 대가를 치렀다. 치욕스러운 대가를!’

훈련은 반나절 간 이어졌다. 온몸에 흠씬 땀을 흘린 그는 강가로 갔다. 강가에 엎드려 물을 마시고 말에게도 물을 먹였다.

‘오늘은 기필코 해내자.’

그는 소매로 입술을 닦고 군마의 곁에 서서 다짐했다.

‘내 육신은 치욕과 패배를 결코 용서할 수 없어. 두고 봐라. 음탕한 포겔바이데, 이 개자식.’

대낮이 되자 평야에 감돌던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이젠하르트는 짐말에 창과 방패를 실어 시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시종이 떠나자 그는 군마에 올라탔다. 근육질인 옆구리에 박차가 가해지자 군마는 검은 숲의 언저리를 따라 바람처럼 내달렸다.

남쪽 숲은 영주의 사냥터였다. 그곳에는 매가 둥지를 틀만 한 높다란 절벽이 있었다. 절벽 꼭대기에서는 안개가 걷힌 드넓은 평원과 검은 숲이 한 눈에 보였다.

이 날, 안개가 자욱한 이른 아침에 절벽 중턱에 있는 우거진 초목에서 바작바작, 소음이 울렸다.

오소리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놈은 먹이를 찾다 말고 저 아래 들판을 내려다봤다. 곧이어 절벽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뒤를 돌아보더니 부리나케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하늘에는 은빛 깃털이 아름다운 매 한 마리가 떠있었다.

창공을 유유히 선회하던 매는 절벽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깃털 하나가 절벽 아래로 나풀나풀 떨어지다 바위에 부딪혔다. 그러자 깃털이 영롱한 은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오소리가 달아난 곳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후드가 달린 검은 튜닉을 입은 그는 숨을 헐떡이며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밤이슬과 안개로 옷은 푹 젖어 있었다.

그는 검은 숲과 평야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의 중턱에 서서 저 아래 평원을 내려다봤다. 검은 후드 아래 가려진 그의 초록색 눈이 번쩍 빛났다.

‘아!’

그는 탄성을 발했다.

‘역시 나타났군. 멋진 군마다. 카스티야 산이라더니 과연 튼튼한 명마구나. 쏜살같이 평원을 가르는 저 날랜 모습은 주인을 닮아서 힘차고 아름답군.’

로트는 시야를 가리는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었다.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우거진 나뭇가지도 잘라내서 시야를 확보했다.

햇살은 평원의 안개를 서서히 걷어냈다. 안개는 들판으로 물러났다. 그곳에 있는 영주의 들에서는 농부들이 부역을 하고 있었다.

로트는 오전 내내 절벽에 서서 무술 훈련을 하는 이젠하르트를 지켜봤다. 그와 군마는 두 개의 체스 말처럼 보일 만큼 멀리 있었지만 탁 트인 평원을 울리는 군마의 힘찬 말발굽 소리는 잡힐 듯이 생생했다.

도중에 이젠하르트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로트는 암벽을 타고 구부러진 나무 등걸을 밟으며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 거기서는 발을 내딛는 순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미로 같은 검은 숲 전체가 잘 보였다.

로트는 꼭대기에서 정오가 다되도록 평원을 지켜봤다. 군마는 전력으로 질주했다. 그 위에서 이젠하르트의 황금빛 머리채는 휘날리는 깃발처럼 나부꼈다.

로트의 시선은 줄곧 그를 쫓았다. 때때로 두 발이 아슬아슬하게 절벽 끄트머리에 닿았지만 깨닫지 못했다.

‘과연 소문대로 훌륭한 기사구나.’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경탄이 절로 나온다. 이제껏 저렇게 완벽한 그리스도의 전사를 본 적이 없어. 깃털보다도 가볍지만 힘차고 절제된 몸짓, 새매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허공을 꿰뚫는 창, 듀랜달(Durendal 롤랑의 검)조차도 속절없이 튕겨 나갈 튼튼한 방패!’

로트는 한때 도시를 흥분에 빠뜨린 슈바벤의 마상경기를 떠올렸다.

그가 수도원에서 귀향한 직후였다. 슈바벤 공국에서 당시에 전례 없이 대대적인 마상경기가 열렸다. 각국의 왕과 제후가 기사단을 이끌고 경기에 참여했다. 부르고뉴와 영국 등, 외국의 편력 기사단도 대거 참여했다. 마상경기는 대대적인 축제로써 한 달간 이어졌다.

그 경기에 오스트리아의 공작이 아홉 명의 영주와 4백여 명의 기사단을 이끌고 참여했다. 무공과 명망이 드높은 이스트리엔 후작도 여덟 명의 영주와 3백여 명의 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두 기사단은 단체 경기에서 맞붙었다. 경기장의 지축을 흔드는 군마와 눈부신 갑옷을 입은 기사단의 승부는 장관을 연출했다.

승리의 깃발은 후작의 기사단이 획득했다. 신예 기사인 이젠하르트가 승리의 주역이었다. 그의 장창과 방패는 명망 높고 아름다운 귀부인들의 브로치와 장신구로 뒤덮였다. 이젠하르트는 후작 영애의 키스라는 눈부신 영예와 명성을 얻었다. 수염이 없는 맨 얼굴의 젊은 기사는 영웅이 되었다.

그 승리가 영웅이 내디딘 최초의 일보였다.

이후 그의 명성은 수 많은 편력기사를 통해 왕국과 왕국을 돌아 고향에 전해졌다.

‘최악의 불운이야.’

로트는 새삼스레 몸을 떨며 생각했다.

‘어떤 불행한 기사가 과연 저 창에 맞고도 갈빗대가 남아날까. 어떻게 제 안장을 지킬까. 창을 쥔 손은 굳건하고 저 무거운 방패도 깃털처럼 가볍게 드니 만약 누구든 저 창에 맞서야 한다면 그보다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 없지.’

그러자 머릿속의 냉정한 목소리가 그런 불운아를 멀리서 찾지 말라고 속삭였다.

등골이 싸늘해진 로트는 애써 못들은 체했다.

군마가 방향을 틀었다. 이젠하르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로트는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가 자신에게 화를 내며 일어났다.

‘여기서 보일 리가 없잖아.’

군마는 연습 장소를 벗어났다.

‘훈련이 끝났구나. 어디로 가는 거지?’

이젠하르트는 군마를 강으로 몰았다. 이윽고 말에서 내려 강가에 엎드려 강물에 입술을 대고 흐르는 물을 마셨다.

‘돌아가려나 보군.’

로트는 강가에 엎드린 그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서글픈 미소가 입가를 스쳤다.

‘이젠하르트, 용맹한 기사여, 나는 지난밤에도 밤이슬로 어깨를 적시며 꼬박 이 숲에서 밤을 새웠어. 흉포한 정열이 내 육신의 주인이 되는 밤, 나는 푸른 달빛과 축축한 안개 속에서 내 과오를 참회하며 내 육신을 지배하는 괴물과 맞서 싸웠다.’

밤도둑 소동을 벌인 다음 날, 로트는 잠에서 깨자마자 수도사로 변장하고 남몰래 집을 나왔다. 말은 시문 밖으로 달려나갔고 로트는 남쪽 숲에서 밤을 지새웠다. 눈앞에 쳐든 손조차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의 숲에서 그는 땀에 흠뻑 젖어 걷고 또 걸었다. 동이 틀 무렵에는 젖은 이끼에 쓰러져 잠을 잤다.

야숙과 방황은 며칠간 계속됐다. 들키리라는 위험 때문에 낮에는 잠을 잤다. 밤에는 주린 배를 끌어안고 발 닿는 대로 쏘다녔다. 암흑의 공포, 맹수의 포효와 소름이 끼치는 괴성은 그의 핏속에 들끓는 정열을 억눌렀다.

육체는 피폐해질망정 그는 서서히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자신의 육신을 극한의 궁지에 몰고 보니 기묘한 뿌듯함과 희열마저 느꼈다.

로트는 이런 자기 견책과 참회의 순간에도 수사슴이 한 예언이 실현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앞으로의 전진을 위해서 다만 일보 후퇴했을 뿐, 예언의 실현은 숙명이며 그걸 이뤄내는 일은 자신의 사명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던 어제 아침, 절벽 근처에서 잠자리를 찾던 그는 군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평야에 등장한 이젠하르트를 목격했다.

‘가려나.’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이젠하르트가 군마를 강가에서 끌어내 올라탔다. 군마는 검은 숲의 뒤편으로 질주했다. 그가 박차를 가하며 외치는 기합이 남쪽 숲에까지 울렸다.

‘갔구나.’

로트는 절벽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군마는 검은 숲 뒤편으로 사라져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도 감상에 빠진 사이 그를 놓친 터다.

로트는 절벽에서 기어 내려왔다. 숲 언저리에 숨겨놓은 말을 끌고 목초지로 나갔다. 말을 타고 평원을 가로질렀다. 말은 북쪽으로 내달렸다.

검은 숲에서 그는 말을 멈춰 세웠다. 나무에 말고삐를 매어놓았다. 강으로 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강가를 더듬어 올라갔다. 강변을 유심히 살펴보다 도중에 멈춰 섰다. 잡초와 부드러운 흙에 말발굽과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여기군.’

충동이 재발한 건 한순간이었다.

그는 본능에 따랐다. 발자국에 넙죽 엎드려서 잔잔히 흐르는 수면에 입술을 댔다. 입술을 스치는 찬 물줄기를 감미롭게 느끼며 눈을 감았다.

-!

이때 뒤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로트는 고개를 쳐들었다. 정신이 확 들었다. 부끄러움으로 피가 머리에 몰렸다. 말 울음소리가 연거푸 터졌다.

‘말 도둑인가? 제기랄!’

그는 벌떡 일어나서 말을 매어둔 곳으로 뛰어갔다.

말이 사라졌다. 고삐를 매었던 나무만 휑하니 남아있다.

“구르네만츠! 구르네-……!’

그의 흑마 구르네만츠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로트는 놈의 기다란 주둥이를 잡고서 물었다.

“이 녀석! 어딜 갔었어? 도둑맞은 줄 알았잖아.”

이때에 검은 숲 깊숙한 곳에서 말 울음이 다시 들렸다.

로트는 구르네만츠를 끌고 검은 숲 언저리로 천천히 다가갔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서 겉에서 그 안을 엿보았다. 수목이 원시림처럼 서로 뒤엉켜 빽빽한 숲은 축축한 습기를 뿜어냈다.

이상한 말 울음이 그쳤다. 로트는 되돌아서 말에 올라타려고 했다. 동시에 수목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휙, 스쳤다.

‘누구지? 벌목꾼인가.’

로트는 말고삐를 쥐고 망설였다.

검은 숲에는 숲의 패거리가 있다. 죽은 자의 왕도 물론이다.

잠시 망설인 그는 말을 끌고서 그림자가 스쳤던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이내 발길을 돌렸다.

‘들짐승이겠지.’

그는 고삐를 잡아당겨 걸음을 재촉했다.

‘알게 뭐냐. 아니면 말 도둑들이겠지. 으스스하니 그냥 가자.’

다시 말에 올라타려고 등자를 딛으려던 그는 뒤로 돌아섰다.

‘응? 이번엔 웬 개가 짖네.’

분명 개 짖는 소리였다. 맹수의 포효도 아니고, 체구가 작은 개가 짖는 카랑카랑한 소리였다.

로트는 바작대는 뭔가의 기척을 감지하고 몇 발짝 옆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저 멀리 썩은 고목의 등걸 아래로 머리를 바짝 깎은 조그만 난쟁이가 불쑥 나타났다.

“뭐야. 난쟁이잖아.”

“앗!”

난쟁이는 잽싸게 달아나서 숲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어딜 가는 거야? 거긴 위험해.”

로트는 다짜고짜 난쟁이를 뒤쫓아 달렸다. 난쟁이와 개는 수풀을 날래게 헤치며 달아났다. 손에 잡힐 듯 말 듯하면서도 어느새 저만큼 성큼 달아났다.

로트는 힘닿는 데까지 놈을 추격했다.

문득 멈춰 선 그는 주위를 돌아봤다. 사위가 온통 썩은 가지를 그물처럼 뻗어댄 음습한 고목이었다.

‘나가자. 아주 으스스하군. 식인종이 나타날라.’

로트는 열심히 썩은 등걸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아갔다.

‘난쟁이야, 요괴야. 아니, 어린애 같던데……. 놓쳤으니 할 수 없군. 그 녀석은 안됐지만 잡아먹히겠지.’

그는 계속 나아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첫째는 되돌아갈 방향이었고 둘째는 다시 들려온 말 울음 소리였다.

‘빌어먹을. 여긴 또 어디냐.’

나무 우듬지에 가려서 조각조각 비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새 떼가 그 위에서 수천 마리의 박쥐 떼처럼 짖어댔다.

무턱대고 뛰어들었으니 로트는 방향 감각을 잃었다. 청각을 곤두세우니 귀에 거슬리는 말 울음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아까 그 소리군. 말 도둑들이겠지.’

로트는 소리를 따라서 살금살금 그쪽으로 갔다. 놈들의 위치를 파악해서 그 반대로 내뺄 작정이었다. 발 닿는 대로 달아났다간 돌도끼를 쳐든 놈들과 코를 맞댈지도 몰랐다.

‘……!’

문득 그는 어느 나무 기둥 뒤로 몸을 날렸다. 침입자가 뛰어들자 수풀에 숨어 있던 벌레와 곤충이 사방팔방 튕겨 나갔다.

로트는 후드를 푹 눌러썼다. 성호를 재빨리 그었다.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누르고 나무 기둥에 등을 납작하게 대고 주저앉았다. 그대로 입을 닥치고 숨을 죽였다.

주변은 고요했다.

그는 살금살금 뒤로 돌아앉았다. 기둥 옆으로 고개를 슬쩍 빼서 정면을 엿봤다.

‘죽은 자의 왕이 여기 계셨군.’

숨을 죽이며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데서 뭘 하는 거지? 신종 무술 연습인가. 집에 돌아간 줄 알았는데.’

더 잘 보이도록 고개를 옆으로 뺐다. 눈앞에 광경이 이상했다. 주워들은 지식을 더듬어봐도 저게 어떤 무술 법인지 알 수 없었다.

‘전혀 모르겠어. 어쨌든 이런 으슥한 데서 몰래 연습하다니 신종 공격법이겠지. 그런데 창도 방패도 검도 없어. 군마는 저 멀찍이서 구경만 하는구나.’

의문은 이내 풀렸다. ‘죽은 자의 왕’ 정면에는 썩은 고목이 쓰러져 있었다. 거대하고 늘씬한 고목은 둥치로 갈수록 키가 높은 장애물이었다.

그 장애물을 향해서 바람이 일었다. 이젠하르트는 허리까지 닿는 수풀을 헤치며 고목을 향해 질주했다.

‘달리기 연습이구나.’

로트는 사뭇 감탄했다. 그다음 장면은 더욱 놀라웠다. 고목에 도달한 그가 별안간 땅을 박차고 휙 뛰어넘었다.

‘점프까지! 훌륭하군.’

로트가 마음속으로 박수를 치는 동안 이젠하르트는 쉴 새 없이 뛰고 장애물을 넘었다. 연습이 거듭되자 달리기 속도가 빨라졌다. 점프력도 상승했다. 어찌나 혹독히 집중해서 쉼 없이 연습하는지, 그의 거친 숨결이 산새가 짖어대는 소리를 넘었다.

나무 기둥 뒤에 숨어서 로트는 그를 계속 지켜봤다. 연습은 강행군이었다. 이젠하르트가 향하는 고목의 높이도 점차 높아졌다. 그만큼 로트의 탄복도 더해갔다.

‘참 열심히도 하는군. 저토록 훈련에 매진하다니 분명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거야.’

한 가지 의혹이 이 순간 얼핏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이젠하르트가 고목의 둥치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흠, 저긴 너무 높은데.’

로트는 나무 기둥을 꽉 껴안았다.

‘의욕이 대단하군. 하지만 저러다 넘어지면-…….’

히이잉-

군마가 불현듯 주둥이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그가 숲 언저리에서 들었던 바로 그 울음소리였다.

로트는 나무 옆으로 뛰어나가서 멈칫하며 섰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군마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군마가 앞발을 쳐들었을 때, 로트는 이미 잡초를 헤치고 달리는 중이었다.

“제기랄!”

그는 달리며 소리쳤다.

“어쩐지 너무 높더라니!”

질주하는 로트의 외침이 숲에 메아리쳤다. 새들이 거대한 화살촉처럼 모여 일제히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이젠하르트는 고목 아래 축축한 이끼에 쓰러져 있었다. 장애물을 훌쩍 넘으려던 순간 도끼에 찍힌 통나무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고 바닥으로 쓰러지며 뒷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터다. 주인의 추락을 목격한 군마는 불길하게 울어댔다.

“이젠하르트!”

로트는 이젠하르트를 내려다보며 우뚝 서버렸다. 정신을 놓은 이젠하르트는 머리칼이 땀에 젖었고 뺨은 핏기가 가셨다. 눈은 감기고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젖혀 있었다.

“이젠하르트……. 괜찮아?”

조심스레 다가서서 곁에 주저앉았다. 답이 없자 꽤나 망설이다가 그의 한쪽 팔을 살그머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경악했다. 손을 놓자 팔이 뚝 떨어진 것이다.

“맙소사! 이젠하르트! 정신 차려!”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자 이젠하르트의 머리가 힘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로트는 부르짖었다.

“제기랄!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일 냈군. 어쩌자고 저 높은 걸 뛰어넘으려고 했어?”

이때 고목에 내려앉은 까마귀가 불길하게 울어댔다. 검은 깃털을 흩뿌리며 날개를 퍼덕이던 놈들은 박쥐 떼처럼 우루루 모여앉아서 로트를 빤히 내려다봤다.

“재수 없는 놈들! 저리 가!”

로트는 험악한 욕지거리를 날리며 돌을 던졌다. 빗발치듯 날아간 돌이 놈들의 주둥이에 맞았다. 까마귀들은 음산하고 불길하게 짖어대며 도망쳤고 로트는 큰 돌을 쥐고 마지막 한 놈까지 뒤쫓아서 꼬리를 때려 맞혔다.

되돌아오니 이젠하르트는 여전히 의식이 없다. 핏기가 싹 빠진 밀랍 같은 낯빛과 굳게 닫힌 눈꺼풀을 내려다보던 로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제기랄……. 이게 무슨 일이야……. 만일 죽었다면…….”

무심코 코밑에 손을 대자 옅은 숨결이 손가락에 닿았다.

“살았다!”하고 고함을 친 로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어버렸다. 소매로 이마에 줄줄이 흘러내리는 진땀을 닦았다. 아찔했다. 정신이 멍했다. 욕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이 가장 길었다.

“기절했구나. 그럴 만도 하지.”

그는 냉담하게 기절한 기사를 나무랐다.

“어쩐지 훈련을 무리해서 하더라니! 저 높은 나무를 정말로 뛰어넘을 작정이었나. 쯧쯧. 의욕이 지나치면 과욕이 되는 거야. 남들은 수년에 걸쳐 남의 집 지붕과 담벼락을 타고 다니며 익히는 기술을 단 하루의 훈련으로 체득한다? 어림없는 소리. 그래, 저 나무가 누구네 담벼락도 아닌데, 누굴 그렇게 쫓아가서 잡으려고……. 이런, 제기랄……. 그랬군……. 나를 쫓는 거였어. 하아…….”

보이지 않는 샘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로트는 초조히 제자리를 오갔다. 혼절한 기사는 요지부동이다.

‘어쩌지?”

그의 혼란된 마음의 고민은 시시각각 깊어갔다.

‘깨울까, 말까……. 이대로 두고 가도 될까……. 그냥 두고 가자……. 안 돼……. 젠장. 목이 막히고 심장이 벌렁대서 미칠 것 같아.’

로트는 이젠하르트의 곁으로 돌아갔다. 선 채로 그를 내려다봤다. 빽빽한 나무 우듬지 사이를 뚫고 햇살 한 줄기가 이젠하르트의 단단한 턱과 목덜미를 비췄다. 황금빛 머리칼은 눈이 부시도록 빛을 발했다.

로트는 지난밤들을 떠올렸다. 이 짧은 순간의 고통은 지난 며칠보다 더 깊고 격렬했다. 심장의 고동이 관자놀이를 꽝꽝, 울렸다. 초록색 눈동자가 열을 품고 번뜩였다.

“…….”

그는 마침내 주저앉아서 숨을 죽이고 손을 뻗었다. 이젠하르트의 목덜미에서 어른대는 빛을 잡으려고 했다. 손가락이 땀이 밴 턱 밑을 스쳤다. 금실 다발 같은 머리칼로 미끄러져서 머리칼을 잡았다. 검지와 엄지 사이에 머리카락을 끼우고 감촉을 느끼며 문질렀다.

그러다 그 머리칼을 한 손에 움켜잡고 와락, 잡아당겼다. 이젠하르트의 고개가 옆으로 확, 당겨졌다.

눈이 광인처럼 번득이는 로트는 그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뒤엉킨 머리칼을 휘감은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불시에 휘몰아치는 격정에 사로잡혀서 로트는 혼절한 기사의 몸뚱이에 올라탔다. 너른 양어깨를 으스러뜨릴 듯이 붙잡고 아래로 찍어 눌렀다. 밀랍 같은 얼굴에 거친 숨을 뿜어대며, 흙과 땀에 젖어서 핏기를 잃은 얼굴을 노려봤다.

‘이젠하르트, 아름다운 나의 기사여. 하아……!’

이때 이젠하르트의 미간이 구겨지며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

로트는 펄쩍 뛰어올라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벌떡 일어나 앉은 이젠하르트가 채 일어서지 못한 로트를 멍하니 쳐다봤다.

“후, 골이 띵하군.”

얼어붙은 로트에게서 무심히 시선을 거둔 이젠하르트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털썩, 되누웠다. 나지막한 신음이 희게 질린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보시오, 댁이 날 깨운 겁니까? 내가 얼마나 기절해있었습니까?”

“…….”

“당신은 수도사인가요?”

로트에게서 대답이 없자 이젠하르트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만 약간 쳐들었다. 발등까지 덮은 로트의 치렁치렁한 검은 튜닉을 확인한 그의 목소리가 불쾌한 듯이 높아졌다.

“수도사가 아닙니까? 거기서 멍하니 가만히 서 있는 걸 보니 강도나 도둑은 아니겠고, 방랑 설교사거나 수도사가 맞는 것 같은데.”

정신이 아직 혼미한 이젠하르트가 천만다행하게도 저를 못 알아봤다.

로트는 허겁지겁 후드를 뒤집어쓰고 수도사가 맞다고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지나가던 탁발 수도사요. 말 울음소리를 듣고 여기 와보니 당신이 쓰러져 있더군요.”

이젠하르트는 크게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그가 단검에 대고 있던 손을 떼는 걸 로트는 눈치 못 챘다.

한동안 누워 있던 이젠하르트는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일어나는 대신에 왼쪽으로 돌아누웠다. 낮은 신음이 흘렀다. 오른손은 관자놀이를 계속 짚고 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물었다.

“혹시 포도주나 맥주를 갖고 있습니까?”

“아니요. 없습니다만……. 그런데, 당신은 괜찮습니까? 어디가 아픈 거요?”

“아픈 곳은 없습니다.”

이젠하르트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이마를 짚었다.

“뒷머리를 부딪쳤는지 어질어질 하지만 곧 나아지겠지요.”

“저런, 뒷머리를!”

“뭐, 별일 아닙니다. 죽지는 않았으니.”

“그래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런 높은 데서 떨어졌으니…….”

“실례지만 괜찮으시다면-…….”

목이 탄 이젠하르트는 로트의 말을 가로챘다.

“저기에 내가 맥주를 담아온 자루가 있는데 그걸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맥주요?”

“네. 오전에 다 마셔버렸지만 쥐어짜면 조금은 남아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 그 아인베크 산 맥주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그걸 한 모금 마시면 괜찮을 것 같군요. 저쪽에 제 말안장에 가시면-…….”

이젠하르트는 돌아눕다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

“…….”

불현듯 묘한 침묵이 흐르는 이 찰나.

때로는 본능이 판단을 앞설 때가 있다. 간발의 차이로.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고 두 발이 판단을 앞서야 살아남는다.

이젠하르트가 말꼬리를 흐리자 본능으로 머리털이 쭈빗 서버린 로트에게는 바로 이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제기랄!’

로트는 돌아서서 죽어라 달렸다. 누워있던 이젠하르트랑 눈이 마주친 순간 생각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수풀을 헤치고 달렸다.

이젠하르트도 땅을 박차고 튀어 올라서 달렸다. 화살이 과녁을 향하듯 사냥감을 쫓아 달렸다.

둘의 거친 숨소리가 숲에 메아리쳤다. 들짐승이 달아났다. 새들이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고 잡초가 짓밟혔다. 야생화가 꺾이며 풀벌레가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로트는 숨이 끊어질 듯이 달렸다. 옆구리가 조이고 굶주린 창자가 뒤틀렸다. 눈앞이 핑핑 도니 숲 전체가 뱅글뱅글 돌았다. 치렁치렁한 튜닉이 다리에 휘감겼다.

불시에 몸이 허공에 솟아올랐다. 곧이어 젖은 이끼 위로 상체가 처박혔다.

“윽.”

사지를 쭉 뻗은 그의 목을 무지막지한 악력이 짓눌렀다. 난폭하게 잡힌 팔에서는 우두둑,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오랜만이구나, 지크프리트.”

추격자인 기사가 그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도망자인 수도사는 짧게 답했다.

“으…….”

“에른스트가 네 녀석에게 안부 전하던데 그간 안녕하셨는지?”

“이, 이젠하르트…….”

땅바닥에 얼굴이 무지막지하게 처박힌 채 간신히 입을 여니 축축한 이끼가 입안에 파고들었다. 말을 잇기가 여의치 않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보다시피 오늘은 내가 좀 사정이 안 좋아.”

“저런. 그때처럼 아인베크 산 맥주를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좀 나아지려나.”

“으, 이젠하르트, 나의 친구여, 잠깐만-……. 윽!”

“더러운 포겔바이데.”

기사는 르트를 처박은 악력에 더욱 팍, 힘을 실었다.

“입을 다물어. 네놈이 친구 운운하다니 너 같은 색마 패거리가 이 숲에 숨어있나보군. 그럼 데려와 봐. 네 상판처럼 고운지 구경 좀 하자. 뭐, 보나 마나 너처럼 추잡한 간통자, 수간자, 남색가겠지만.”

“이젠하르트…….”

“닥쳐.”

기사는 손아귀에 힘을 빡! 줬다.

수도사는 목구멍을 쿨럭이며 짓눌린 가슴팍을 가쁘게 들먹댔다. 숨이 막혀 몸부림칠수록 기사의 무릎이 등허리를 무지막지하게 짓눌렸다.

“네놈은 목숨이 아깝지 않구나. 하긴 너같은 더러운 색마의 부질없는 목숨 따위 연명한들 뭔 소용이 있을까. 마침 잘 됐어.”

“이, 이젠하르트! 잠깐만 내 말을 들어다오!”

“변명은 하지 마. 추해.”

“제, 제발, 우리 말로 하자. 대화랑-……. 으!”

“무슨 짓을 했냐?”

이젠하르트가 사납게 다그쳤다.

로트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젠하르트의 악력이 강해질수록 얼굴이 흙에 처박혀 눈조차 뜰 수 없었다. 대답이 없자 이젠하르트는 그의 팔을 더욱 난폭하게 뒤로 돌려 꺾었다.

“대화와 타협으로? 좋아. 한 번 해보자. 넌 조금 전에 내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몸부림을 치며 웅얼대던 로트는 뒷머리가 확 낚아채였다.

로트는 입안에 파고든 흙을 내뿜고 외쳤다.

“이젠하르트! 진정해. 맹세컨대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럼 왜 달아났냐?”

“나도 몰라. 발이 그냥 저절로 움직였어.”

“가증스럽고 더러운 원수!”

“으…….”

이젠하르트는 무지막지하게 돌려 꺾은 팔을 콱! 비틀어 자지러지는 신음을 듣고 나서야 만족했다.

“그놈의 혀를 맘껏 놀려봐라. 거짓과 술책을 일삼는 교활한 그 혓바닥은 구멍을 뚫거나 잡아 빼서 돼지 먹이로 줘야 좋지.”

“이젠하르트, 잠깐 팔을 좀 놔줘……. 으, 어깨가, 어깨가 빠질 것 같아…….”

“많이 아프냐.”

“아프고말고! 팔이 부러진 것 같아. 흐으.”

“그럼 이렇게 하면 좀 어때?”

“악!”

“어때? 훨씬 낫지?”

“악. 사, 사람 살려…….”

“엄살 피우지 마.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렇게 엄살을 피우다니 수치를 모르는 구나.”

으스스한 경고에 로트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손아귀에 잡힌 목을 비틀고 팔을 빼내려고 거세게 저항했다. 그러나 반항할수록 속박과 고통만 커졌다.

결국 반항을 멈췄다. 호흡곤란으로 짓눌린 등판이 거칠게 오르내리자 이젠하르트는 뒤통수에 대고 문득 옛 생각이 난다고 했다.

“어쩐지 익숙하지 않나? 이 장면이 네겐 매우 익숙할 텐데.”

“으, 난 모르겠는데…….”

“잘 기억해봐.”

“글쎄, 모르겠어. 전혀…….”

“그거 안 됐군. 그럼 말해주마. 내가 널 이렇게 잡아서 엎어놓고 마구 팼지. 네 녀석이 울보에 오줌싸개였을 때 난 사슴 대신에 너를 잡으러 다녔어. 넌 날마다 이렇게 얻어터지고도 좋다고 웃었지.”

제기랄, 로트는 낙담해서 중얼댔다.

“이터 말이 사실이었구나.”

“닥쳐, 이교도의 악마야. 뭐라고 웅얼대는 거냐. 날 두꺼비로 만들려고 주문을 외웠냐?”

“그런 적은 없지만 지금이라면 한 번 해보……. 윽!”

짓눌렸던 목과 머리칼이 손아귀에 잡혀서 위로 당겨졌다. 그대로 퍽, 왼쪽 관자놀이가 흙 속에 처박혔다.

흙바닥에 부딪힌 왼쪽 눈에 별이 번쩍했다. 귀가 먹먹하고 윗입술이 터졌다. 머리에서는 종이 뎅뎅뎅! 울렸다.

“하지만 내 실수도 있어.”

이젠하르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발정이 난 색마인 줄만 알았지 네 녀석의 교활함을 간과했거든.”

“내가 교활하다니?”

“시치미를 뗄 테냐? 넌 여기로 날 죽이러 왔잖아. 아무도 모르게.”

“뭐, 뭐라고?”

“하, 어쩌면 그렇게 진심으로 놀라는 체하실까. 깜빡 속겠어. 참 뻔뻔해. 차라리 아니라고 잡아떼지.”

“당연히 아니고말고!”

로트는 괴력을 뿜어서 머리를 쳐들고 소리쳤다.

“절대 아냐! 맹세할게! 너를 죽이려 하다니, 절대 그럴 마음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로트의 말문을 앗아갔다. 입을 벙긋할 때마다 팔은 더 난폭하게 꺾여서 끔찍한 통증이 어깨를 관통했다.

숨을 헐떡이다 반항을 포기했다. 고통으로 벌려진 입안에서는 핏물과 침이 줄줄 흘렀다.

“그런데 어쩌냐.”

이젠하르트가 조소를 날렸다.

“오늘 누가 먼저 망자가 될지 이미 정해졌는걸.”

손이 떨어져 나가서 로트는 숨을 토하며 몸을 뒤집었다. 터질 듯한 가슴과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하며 입안에 범벅이 된 이끼와 흙을 핏물에 섞어 뱉어냈다.

숨통이 다소 트이자 흐릿해진 시야가 점차 맑아졌다. 관자놀이의 혈관을 터뜨릴 듯이 울리던 심장의 고동도 가라앉았다.

“일어나.”

이젠하르트가 명령했다.

로트는 순순히 옆구리를 짚고 바닥에 일어나 앉았다. 바로 코앞에서 칼자루의 단검을 잡아 빼는 이젠하르트의 손이 보였다. 단검의 날이 가죽에 쓸리며 스윽 빠져나왔다. 로트를 노려보는 이젠하르트의 잿빛 눈은 단검의 날만큼이나 차고 오싹했다.

“그럼 죽여.”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로트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야만 네 원한이 풀린다면 그 흉악한 검으로 찔러서 죽여.”

로트는 흙바닥에 드러누워서 눈을 감고 팔을 십자가처럼 벌렸다. 핏기가 가신 눈꺼풀은 부르르 경련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고개만 쳐들고 심술궂게 물었다.

“왜 못 찔러? 이 가슴을 갖다 대주는데도?”

“허세부리지 마라, 색마야.”

“찔러! 자, 마음껏!”

“두려움에 미쳤버렸구나.”

“뭐 하고 섰어? 왜 못 찌르지?”

“…….”

“하! 왜 못 찔러? 무고한 사람을 해치려니까 양심에 걸리나 보지?”

“못 찌르는 게 아냐.”

이젠하르트는 기가 막혀서 받아쳤다.

“잠깐 구경하는 거지. 발광해대는 꼴이 참 볼만하군.”

“빨리 찌르라고! 제기랄!”

로트는 분에 겨워서 고함쳤다.

“마음껏 칼을 휘둘러서 결백한 사람의 심장을 난도질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아! 난 너를 구했어! 자, 찌르라니까!”

로트는 벌떡 일어났다. 채 뱉어내지 못한 이끼가 입에서 툭, 떨어졌다. 검은 튜닉은 흙과 잡초와 짓이겨진 이끼가 묻어서 더러웠다.

이젠하르트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응시했다. 정열의 폭풍이 집어삼킨 로트의 얼굴은 창백하고 초록색 눈동자는 병적인 열을 품고서 번뜩였다.

“난 네 목숨을 구해줬어.”

로트는 침착하게 되뇌었다.

이젠하르트는 그를 노려봤다.

“네놈이 내 목숨을 구해?”

“그래.”

로트는 그의 시선을 당당히 받아쳤다.

“넌 조금 전에 죽을 뻔했잖아. 고목을 뛰어넘다 추락해서 의식을 잃었지. 난 기절한 널 발견하고 곁을 지켰어. 이 숲에는 범죄자랑 강도가 우글대. 내가 널 내버려 두고 갔다면 넌 어떻게 됐을까. 지금처럼 그 흉악한 검을 쳐들고 날 위협할 수 있을까? 아무리 패배를 모르는 용맹한 기사여도 기절하면 창과 검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닥쳐.”

“너랑 나는 원수인데도 난 널 두고 가지 못했어. 명예를 숭상하는 기사라면 강도한테 속절없이 살해당할 나를 그냥 두고 갔을까? 이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기사께선 정말 그랬을까?”

“빌어먹을, 닥치라고 했으면 닥쳐!”

“…….”

이젠하르트가 단검으로 목을 겨눴으므로 로트는 입을 닥쳤다. 손끝이 떨리고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가라앉았던 심장의 고동이 되살아났다.

로트는 지금처럼 다급한 생명의 위기를, 저를 향한 적나라한 증오를 겪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다만 슬프고 안타까웠다. 직접 맞부딪친 증오와 원한의 장벽이 너무나도 맹목적이고 격해서 새삼스레 놀라고 슬펐다.

당장 로트의 목을 날릴 듯이 살기가 시퍼렇던 이젠하르트가 불현듯 칼을 거두며 비틀거렸다. 미간이 일그러진 그에게서 심한 욕지거리와 신음이 흘렀다.

이마에 식은 땀이 배어난 그는 칼자루에 단검을 꽂았다.

“좋아. 그럼 네놈한테 마지막 자비를 선사하마.”

로트는 그의 다리를 살폈다.

“움직이지 마.”

이젠하르트는 제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딘 로트에게 경고했다.

로트는 멈춰섰다. 시선은 이젠하르트의 오른쪽 다리로 되돌아갔다.

“그럼 변명할 기회를 줄 테니 해봐.”

“어떤 변명을 하라는 거냐?”

이젠하르트는 염증을 냈다.

“끝까지 시치미를 떼다니 비열한 자식. 넌 그날 밤에 왜 달아났어?”

“내가 달아났다고?”

로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젠하르트는 차게 웃었다.

“그래. 네놈은 그날 밤에 들키니까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지.”

“그날 밤이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하, 힐데가르트를 노리고 내 집에 침입하고서도 몰라?”

“그건 누명이야.”

“이 파렴치한 개자식이!”

“누명이야.”

로트는 완고히 되풀이했다.

“그 얘기였구나. 넌 나한테 무조건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데 난 그런 적 없어.”

“너를 봤는데도 잡아떼냐?”

“누가 나를 본 거지?”

로트는 날카롭게 물었다.

“네가 나를 봤어? 넌 그럼 그날 집에 있었나? 아니, 금식기도를 갔다고 들었는데.”

로트는 이젠하르트가 대꾸하기 전에 빠르게 몰아붙였다.

“내가 아니라서 실망했겠지만 정말로 내가 한 짓이 아냐. 나도 그 흉흉한 소식을 듣고 내가 의심받으리라고 짐작했어. 내가 그날 밤을 혼자서 보냈다면 다들 날 용의자로 의심했을 거야. 날 체포해서 구금하고 자백받으려고 심문했겠지. 하지만 못 했지. 왜일까? 너도 알잖아. 난 그날 밤에 콘드비라무어스랑 같이 있었어.”

로트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벨데케 가에 누군가 무단침입을 시도했다는 소식이 퍼진 날, 도시의 호사가와 목격자는 입을 모아서 로트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콘드비라무어스가 사건이 벌어진 시각에 로트가 자신과 함께 있었다며 로트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런데도 넌 나를 아직도 의심해?”

로트는 침묵하는 이젠하르트를 연이어 몰아붙였다.

“넌 나처럼 어리석지 않으니 냉정하게 판단해봐.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가면 무도회장에서 너는 나의 도발을 관대히 용서했는데도 내가 무모하게 힐데가르트를 납치하려고 했다? 네 칼에 죽고 싶어서?”

이젠하르트는 한동안 침묵했다.

로트는 제가 한 거짓말이 간파당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답은 곧 주어졌다.

“덫에 걸릴 뻔한 놈이 큰소리를 치는군.”

이젠하르트는 냉소를 던졌다. 그날 밤에 제가 친 덫에 걸려들었으면 저 원수 놈은 지금쯤 관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놈은 보기보다 영악하고 교활했고 그걸 간과했다.

“오늘 나를 미행한 이유는 뭐냐?”

“널 미행한 게 아냐.”

“그래? 이것도 억울한 누명이냐? 오늘 새벽녘에도 내 집 앞 골목에서 얼씬대는 널 봤는데?”

“잘못 본 거야.”

로트가 단호히 말했다.

“그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난 새벽녘부터 여기……. 아니 저 남쪽 숲에 있었어. 거기서 우연히 널 봤어.”

“남쪽 숲?”

이젠하르트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영주님의 사냥터에 무단 침입했다는 자백이군. 그건 교수형 감인데 부잣집 귀공자시니 벌금으로 모면하려나. 새벽에 숲엔 왜 갔어?”

“그건 말할 수 없어.”

“왜 말할 수 없어?”

“…….”

“궁금하군. 소문난 색마께서 처녀나 과부랑 벌이는 간통으로도 모자라 밤사이 저 숲을 쏘다니며 뭘 했을까. 수간이라도 하셨나? 아니면 네놈의 더러운 정욕을 채우려 누굴 또 납치해서 겁탈했을까. 어느 집 순결한 처녀를 데려다 능욕한 거냐? 네놈의 추잡한 정욕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랬겠지.”

“마음껏 나를 조롱해. 하지만 때로는 나도…….”

로트는 괴로워하며 대답했다.

“나도 차라리 짐승이 되고 싶어. 이 마음의 고통을 달랠 수만 있다면…….”

“걱정하지 마.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두 손발을 잘라내면 너도 추괴한 짐승이 돼. 곡예단 구경거리가 되는 거지.”

“이젠하르트.”

“원수야,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젠하르트! 이젠하르트!”

“개자식!”

“이젠하르트!”

로트는 불시에 언성을 높였다. 억눌렀던 감정이 점점 더 격해졌다. 이젠하르트가 해대는 잔인한 조롱이 그의 가슴을 모질게 후벼 팠다.

“나를 마음껏 비난하고 조롱해. 그래서 네 원한을 풀 수만 있다면! 하지만 친구여, 그러고 나선 우리 화해하자. 나는 너한테 어떤 원한도 없어. 가면무도회에 침입한 건 내 잘못이야. 악의는 없었지만 너의 분노는 지당했고, 나도 마음의 고통이라는 벌을 받았어. 하지만 나는 지금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 너도 그날 나를 용서했잖아. 이젠하르트, 그러니 나랑 화해하자. 이렇게 애걸할게. 아니, 너는 반드시 들어줘야 해. 내가 네 목숨을 구해줬으니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어. 이젠하르트, 나랑 화해하자! 너는 은혜를 원수로 갚지는 않겠지?”

“나의 파렴치한 친구여.”

로트가 협박을 섞어 애걸하자 이젠하르트가 즉시 대꾸했다.

“너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이 아니었나. 하긴 네놈은 더러운 포겔바이데의 피를 타고 났으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

“지난날의 원한이라면 이미 과거의 일이잖아. 왜 너와 내가 해묵은 원한 때문에 서로 칼을 겨눠야 해? 우린 서로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았는데도.”

“참 뻔뻔한 게 과연 네놈의 비열한 선조를 빼다 박았구나.”

“내 조상을 모욕하지 말아다오.”

로트는 슬프게 말했다.

“이미 천국에 가신 분들이야.”

“천국에 갔다고?”

이젠하르트는 노엽게 숨을 삭였다. 창백한 입술이 비틀렸다. 음성은 분노를 삭이느라 떨리기까지 했다.

“네놈들은 어쩌면 그토록 조상 대대로 철면피할까. 천국에 가 있어? 지옥이 아니라? 치가 떨린다! 네놈이 무장을 했더라면 단숨에 그 혀를 잘라낼 텐데!”

로트는 이때 이상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젠하르트의 사무친 원한이 그를 놀라게 했다.

“이해가 안 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두 가문 사이에 왜 이렇게 원한과 증오가 깊어졌을까. 도대체 왜? 한때 우리 두 가문은 혼약의 맹세까지 나눌 만큼 친밀했는데.”

이젠하르트는 이 말에 분노했다.

“더러운 개자식!”

경멸에 가득 찬 시선이 폭풍을 품은 그는 마침내 이성을 잃고 고함쳤다.

“이제 와서 파렴치하게 시치미를 떼? 네 녀석 집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 내 증조부께 파혼이라는 불명예를 선사했지. 명예가 전부인 기사에게 그런 수치스러운 오욕과 불명예를 안기고도 네놈들은 쉽사리 용서받으리라고 여겼나?”

“나도 그 일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어째서 원한인 건데? 결혼을 약속했던 그 두 분은 불가피하게 헤어졌어.”

“더러운 원수야, 감히 그 역겨운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 네놈의 집안은 돈 많은 상인 놈에게 딸을 팔아치우려고 파혼을 요구한 거야. 황금에 눈이 멀어 천박한 상인 놈한테 그 고귀하신 딸을 팔아치웠지. 우리 가문을 모욕하고 치욕스러운 불명예를 끼치고!”

“그건 사실이 아냐. 너는 잘 못 알고 있어.”

로트는 소리 높여 항변했다.

“그 두 분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했어. 고귀하고 진실한 사랑이었지. 하지만 서로의 집안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아서 파혼이 된 건데 그게 왜 불명예야?”

“닥쳐!”

이젠하르트는 고함쳤다.

“네까짓 타락한 색마가, 천박한 상인 놈의 자식이 진실을 알아? 명예가 뭔지 알아? 내 증조부는 당시에 크게 좌절하여 과오를 저질렀어. 그래서 늑대인간이 되어 농부들에게 살해당했어. 참을 수 없는 치욕과 불명예를 떠안고서 모두의 조롱을 받으며 도시에서 추방당했어. 비천한 농부들이 그분을 개처럼 때려죽였지. 이제 알겠냐? 너희 가문과 너는 대대손손으로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거다.”

“그게 사실이라고 치자. 그 오래된 원한이 어째서 대물림되어 너와 내가 원수가 돼야 해? 우리는 함께 참회하자. 내가 네 증조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게. 나는 너희 집안의 명예회복을 위해서 뭐든 할게. 우리 가문의 죄를 내가 기꺼이 대속할게.”

“네놈은 그래서 천박한 상인 놈이라는 거야.”

이젠하르트는 멸시가 가득찬 조소를 흘렸다.

“개돼지만도 못한 비천한 속물. 명예 따윈 거추장스러운 허울이라 여기고, 중요한 건 오로지 황금과 육욕뿐! 추잡하고 비천한 짐승 같은 육욕뿐! 네놈은 그 더러운 입으로 순결한 사랑 운운하지만 너 같은 음탕한 짐승 따위가 순결한 사랑을 갈망해? 너 같은 추잡한 간통자에 색마 따위가?”

“네 말이 옳아.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지도 몰라. 그동안 많은 과오를 저질러왔으니까. 난 너처럼 명예를 숭배하지는 않지만 불명예를 친구로 삼는 놈도 아냐. 그리고 사랑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어. 난 한때 쾌락을 탐하며 죄악을 저질렀지만 지금은 크게 뉘우치고 있어. 순결한 사랑의 성취만이 이제는 나의 유일한 염원이야.”

이젠하르트는 치를 떨었다.

“순결한 처녀를 희롱하는 게 네가 말한 순결한 사랑이냐?”

“이젠하르트! 힐데가르트 그녀에 관해서라면-.”

“닥쳐! 그 더러운 혀를 나불대서 감히 내 이름을, 내 누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네겐 그럴 자격이 없어!”

로트는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격정을 억누르며 앞으로 한발 다가섰다. 그는 제 가슴에 한 손을 대고서 진심이 전해지길 간절히 기원했다.

“이젠하르트, 제발 내 변명이라도 들어다오. 넌 누이 때문에 원한이 깊어졌구나. 그렇다면 부디 화를 풀어줘. 나는 다시는 힐데가르트를 만나려고 하지 않을게. 내 마음은 이미 정리가 됐으니 제발 화를 풀어다오!”

“뭐?”

“뭐라니?”

“너,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이젠하르트가 이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로트는 조용히 되풀이했다.

“나는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 이미 마음을 깨끗이 정리했으니까.”

“다시는 힐데가르트를 만나지 않겠다고?”

“그래.”

로트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네 누이에게 더는 어떤 불명예나 폐해를 끼치지 않을게. 꿈속에서조차 감히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나 때문에 많이 고통받았으니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은데 네가 대신 전해줄래?”

“어째서냐?”

이젠하르트가 조용히 물었다.

“왜 그새 마음이 바뀌었지?”

“그건…….”

이젠하르트를 흘끔 훔쳐본 로트는 격정을 억눌렀다.

“내게 다른 사람이 생겨서……. 이게 축복받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진정한 운명의 상대를 마침내 만났거든. 그 사람은……. 그는-……!”

꽝! 하는 충격을 받고 로트는 바닥에 쓰러졌다. 어깨를 꿰뚫은 고통에 일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서슬 퍼런 단검이 그의 목젖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 이젠하르트…….”

멱살이 잡힌 로트는 숨을 들이켜며 위를 올려다봤다. 충격과 숲의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살의가 가득한 기사의 목소리만은 귓가에 똑똑히 울렸다.

“네놈은 역시 내 누이를 농락했구나.”

복수심에 불타는 목소리가 말했다.

“사악한 농락으로 내 누이를 비탄과 눈물 속에 빠뜨려놓고는 이제는 새로운 운명의 상대를 찾으셨다?”

“아, 이젠하르트! 나는-…….”

“닥쳐, 이 수치를 모르는 호색한아!”

“윽!”

“어느 집 과부냐? 이번엔 또 어느 집 음란한 과부하고 바람이 났어? 아니면 목욕탕 집 딸과 눈이 맞았냐?”

“이젠하르트, 잠깐만 이 손을 놔다오. 내가 말을 잘못했어. 나는 그녀를 농락하려는 게 아냐. 오히려 순결하고 고귀한 그녀를 성모 마리아처럼 숭배하기로 결심한 거야.”

“닥쳐라, 원수야!”

-!

단검의 칼자루가 로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로트는 코피를 쏟고 옆으로 쓰러졌다. 충격과 통증이 너무 커서 잠깐 의식을 잃었다.

그는 곧 신음을 토하며 깨어났다. 흐릿한 의식의 너머로 바스락, 바스락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일어선 로트는 아찔한 머리를 흔들며 입안에 흥건한 피를 뱉어냈다. 소매로 피투성이인 입술을 닦았다. 고개를 들자 잡초를 짓밟는 발소리의 주인이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젠하르트!”

로트는 튕겨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대화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냥 가면 어떡해?”

“…….”

“이젠하르트! 넌 끝까지 나랑 화해하지 않을 거냐? 내가 네 소중한 목숨을 구해줬는데도 은혜를 갚지 않고 그냥 가버린다고?”

“추잡한 개자식아!”

이젠하르트는 멀리서 고함치며 돌아섰다. 그의 욕설이 메아리가 되어 숲에 쩌렁쩌렁 울렸다.

“네놈이 날 구해? 그래서 내가 감읍하며 네놈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거냐? 천만에. 난 너처럼 비열한 놈이 아냐. 거짓을 일삼거나 처녀를 농락하지도, 가증스러운 연극을 해대지도 않아. 정말로 네가 나를 구했어? 가소롭군. 오늘 네 목숨을 살려준 게 바로 나야. 너의 구역질 나고 더러운 피로 내 검과 손을 더럽히기 싫어서다. 하지만 맹세하마. 언젠가는 너를, 더러운 포겔바이데 너를 반드시 벌한다. 가장 공정하고 명예로운 방법으로, 너 같은 비천한 짐승 따위에게도 마지막 자비와 친절을 베풀어서 명예롭게 너를 죽여주마. 그게 내 방식이니까.”

이젠하르트는 몸을 홱 돌려서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

이때 오른쪽 발을 헛디디고 비틀거렸다. 고통이 자아낸 욕지거리가 로트에게 들렸다.

선전포고를 받고서 침통한 낯으로 눈시울을 적시던 로트는 앞으로 달려갔다. 벼락을 맞은 듯이 뛰어나가서 노기등등하니 고함을 쳐댔다.

“이젠하르트. 넌 다리를 다쳤구나. 그랬어. 다리를 다쳤어!”

이젠하르트는 대꾸하지 않고 걸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비틀거리길 수차례. 그 꼴을 목격한 로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빌어먹을! 다리가 똑 부러졌구나.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프지? 오른쪽 다리냐? 아니면 발목이 부러졌냐? 이젠하르트!”

“당장 꺼지지 못해!”

이젠하르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함쳤다. 발걸음이 위태로웠다.

로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멀리 가버린 이젠하르트는 급기야 오른발을 심하게 쩔뚝이며 걸어갔다.

로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분노가 점점 커졌다. 그는 이제껏 이때처럼 격렬하게 원망을 품고 남에게 분노한 적이 없었다.

“다리가 부러졌어!”

로트는 그를 쫓아 달려가며 소리쳤다.

“제기랄! 넌 부러진 다리로 나를 쫓아온 거야!”

“꺼져!”

“이젠하르트, 이 망할 자식아! 넌 그 다리를 하고도 나를 쫓아왔구나. 세상에! 하느님 맙소사! 내가 그토록 미웠냐? 그 다리를 하고서도 날 쫓아와 두드려 팰 정도로 내가 미웠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렇게 지독하게 나를 쫓아와서 후드려 팼어? 다리가 딱 부러진 주제에!”

“안 꺼져?”

이젠하르트가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로트는 히스테릭하게 웃어대며 고함쳤다.

“지독하군! 참 지독해! 넌 복수에 눈이 멀어서 피도 눈물도 말라버린 냉혈한이야!”

“…….”

“이 고집불통아! 어디 맘대로 해봐라! 덤벼! 덤비라고!”

로트는 돌을 집어 들어서 휙, 던졌다. 돌은 빠르게 걸어가는 이젠하르트의 등판을 강타했다. 이젠하르트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돌아서서 소리쳤다.

“저 개자식이 완전히 미쳤나? 죽으려고 환장했군.”

“덤벼! 덤비라고!”

로트는 가까이 이젠하르트를 뒤쫓아가서 고함쳤다.

“이 폭력배야! 냉혈한아! 그렇게 날 미워한다면 어디 또 쫓아와서 죽여보시지? 그따위 부러진 다리로 뛰어와 날 죽여보라니까!”

“개자식!”

이젠하르트가 땅을 박찼으므로 로트는 뒤로 돌아서 질주했다. 이젠하르트도 다리를 절며 쫓아왔다.

“뭘 하느라 꾸물대냐? 어서 덤비라니까!”

로트는 나무 뒤로 뛰어가며 소리쳤다.

“이 무서운 놈아! 빨리 쫓아와서 날 죽이라고! 덤벼! 내가 상대해주마!”

“저 미친 개자식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군!”

“지독한 놈! 아주 지독하고 집요한 녀석!”

로트는 죽어라 달아나는 중에도 맞받아 소리쳤다.

“빨리 못 쫓아오겠냐? 많이 아파서? 아유, 저걸 어쩐다? 아무리 철의 기사라도 다리까지 철은 아니니까 앞으론 조심 좀 해. 어때, 지금은 좀 괜찮아? 많이 아프다고? 내가 집까지 안아다 줄까? 이 튼튼한 두 팔로 너를 꼭 안아서 데려다줄게.”

큼지막한 돌이 휙, 날아왔다. 로트의 정수리를 비켜서 나뭇가지를 작살냈다.

이젠하르트는 곧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로트는 돌아서서 달렸다. 울창한 고목과 우거진 덩굴을 헤치며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그를 뒤쫓았다.

분노와 격정으로 정신을 놓고 한참을 헤매던 중에 문득 군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로트는 곧장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렸다.

이때 거대한 군마가 별안간 수풀을 헤치고 뛰쳐나와서 로트의 정면으로 육박했다.

히이잉-

“비켜!”

찢어질 듯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앞발을 멈추고 선 군마 위에서 이젠하르트가 소리쳤다.

“네놈 몸뚱이를 산산조각으로 짓밟기 전에 비키라고! 더러운 포겔바이데! 이게 네놈에 대한 나의 마지막 자비야. 하지만 다음에 또 내 앞에서 얼씬대면 그땐 오직 창과 검으로만 상대해줄 테니 각오해라!”

군마가 로트의 얼굴에 흙덩이를 퍼붓고 달려나갔다.

로트는 멀어지는 군마를 숨 가쁘게 뒤쫓으며 고함쳤다.

“너나 각오해라, 고집불통인 망할 자식아! 나야말로 널 내 발아래 굴복시킬 거야. 나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 포겔바이데의 핏줄! 넌 반드시 내게 먼저 화해의 키스를 애걸하며 굴복하게 될 거다! 제기랄!”

군마는 로트의 다짐을 비웃듯이 드높은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숲을 헤쳤다.

그 뒤에서 로트는 숲이 요동치도록 고함쳤다.

이젠하르트는 박차를 가했다.

사나운 기합과 말발굽 소리가 검은 숲을 뒤흔들고 사라졌다.

해가 저물어가자 검은 숲은 음침하고 으스스한 본색을 드러냈다. 까마귀는 떼로 몰려서 불길하게 울고 나뭇가지는 곡을 하듯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녀의 긴 머리칼처럼 뒤엉킨 덩굴에서 기척이 들렸다.

로트가 그곳을 헤치고 나왔다.

“어디가 어디냐.”

로트는 덩굴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굶주린 창자는 울부짖고 사지는 숲을 헤치느라 긁혀서 만신창이 됐다.

땀에 젖고 더러워진 튜닉을 끌고서 한참이나 길을 헤맨 그는 쓰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앉았다.

밤이 찾아왔다. 잠자리를 찾아나선 짐승이 소름 돋는 불쾌한 비명을 질러댄다.

“무정한 자식…….”

그는 맥없이 중얼댔다.

“혼자서만 가냐. 사람을 이런 데 혼자 내버려두고.”

기진맥진해서 더는 몸을 까딱할 수도 없다. 요괴나 죽은 자의 왕이 나타나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고개를 숙인 로트에게서 깊은 한숨과 함께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 너 혼자 실컷 가라, 의리 없는 놈아. 아파죽겠군. 이가 부러졌나. 제기랄, 이 고운 얼굴 때릴 데가 어디 있냐. 망할 자식아, 두고 봐. 여길 나가기만 하면 영주님한테 이를 거야. 화해의 특사를 두드려 패고 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다니……. 빌어먹을…….”

로트는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대로 오랫동안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윽고 암흑이 숲을 삼키자 그는 나무 둥치를 향해 돌아누워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권으로-

일러두기

* 로트, 이젠하르트, 이터, 로에란그린, 카이렛, 콘드비라무어스, 탐파니스, 등장인물 이름은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팔』에서 차용.

* 표지 이미지: 독일 중세, 뉴렌베르크 전경 Hartman Schedel (1440-1514) Nuremberg Chronicle, Page 100: View of the city of Nuremberg. Woodcut,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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