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밤도둑
벨데케 가의 주택은 4층짜리 석재와 목재가 섞인 건물이었다. 지상층의 전면부에는 마차나 사람이 가로에서 뒷마당으로 곧바로 진입할 수 있는 세 개의 홀이 나 있다.
현관 홀의 계단은 2층과 이어졌다. 뒷마당은 장방형으로 넓어서 마구간과 헛간이 있는 작업 공간이었다. 거기서 마부와 하인이 마구와 농기구를 수리하거나 농산물과 식품을 가공하는 일을 했다.
가족이 주거하는 공간은 2, 3층에 있다. 2층에는 뒷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는 회랑이 있고 가족실과 개인 침실이 있다. 겉에는 회반죽을 바르고 주홍색 박공지붕을 얹은 검은 목재 골조의 4층은 하인이 기거하는 숙소였다.
저녁에 제2종이 칠 무렵이었다.
종이 치면 시문이 닫히고 도시는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됐다. 상점과 술집은 모두 문을 닫았다. 외출과 통행도 금지였다. 정적과 암흑이 지배하는 거리에는 야경꾼만이 오갔다.
탐파니스는 이 무렵에 방문했다. 허둥지둥 홀에 뛰어든 그는 문지기에게 이젠하르트가 뒷마당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뒷마당으로 달려갔다. 아치형인 긴 홀을 지나는 동안 장작을 패는 듯한 둔탁한 소음이 어렴풋이 들렸다.
탐파니스는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이젠하르트는 나무를 쌓아둔 곳에 있었다. 달려온 터라 숨이 찬 탐파니스는 씩씩대며 물었다.
“오늘 종일 어딜 갔었어? 계속 찾아도 없던데.”
“바람 쐤어.”
이젠하르트가 대답했다.
탐파니스는 놀랐다.
“어디에서? 들에 다녀왔어? 시문 밖으로 나간 거야? 내가 암만 찾아도 안 보이던데.”
“날 찾는 줄 알았으면 언질을 해둘 걸 그랬군.”
“난 며칠 전부터 몇 번이나 널 찾았는데 몰랐다고? 어제도 왔었는데.”
“몰랐어.”
단호한 대답에 탐파니스는 입술을 삐죽였다.
“여기선 뭘 하는 거야?”
“그냥 둘러보는 중이야.”
“저것들은 뭐야?”
탐파니스는 커다란 눈을 재빨리 굴려서 하인이 횃불로 밝혀놓은 뒷마당을 샅샅이 살폈다.
뒷마당에서는 하인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이젠하르트의 어린 시동과 시종은 갑옷과 무구의 녹을 닦고 있다. 어찌나 열심히 닦는지 어둑한 작업장 구석이 번쩍이는 무구의 광휘로 환했다.
다른 곳에선 젊은 하인이 도끼로 재목을 잘라내고 있다. 옆에는 새로 들여온 목재가 수북이 쌓여 있고 근처인 벽에는 검은 역청으로 과녁을 그렸다. 과녁의 정중앙에는 커다란 도끼 한 자루가 깊숙이 꽂혀 있다. 그 아래 바닥에는 부서진 창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탐파니스가 뒷마당을 매섭게 훑는 사이 이젠하르트는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탐파니스는 냉큼 뒤쫓아 들어가서 튼튼한 군마의 목덜미를 애무하는 사촌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어쩔 셈이야?”
“뭘 말이냐?”
이젠하르트가 되물었다.
“결정했어? 로트 그 녀석한테 맛을 보여 줄 거야?”
탐파니스는 커다란 눈을 불안스럽게 굴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이젠하르트는 말 갈퀴에 입을 맞추며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군마는 코를 불며 주인의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탐파니스는 안절부절못하다 물었다.
“그 녀석을 어쩔 거냐고? 진짜 독살할-……. 으앗!”
사촌이 홱 돌아서는 바람에 탐파니스는 뒤로 밀려서 엉덩방아를 찧고 자빠졌다.
이젠하르트는 혀를 차며 손을 내밀었다. 호되게 자빠진 탐파니스는 끙끙대며 손을 잡았다.
마악 일어서려던 그는 갑자기 어중간한 자세로 사촌의 손에 매달렸다. 이젠하르트는 그가 혼자서는 앉지도 서지도 못할 애매한 자세일 때 잡았던 손의 힘을 갑작스레 풀고 물었다.
“너는 나를 그런 놈으로 보는 거냐?”
“뭐, 뭐가? 왜 그래?”
“내가 그놈을 독살할 것 같아? 놈이 아무리 원수라지만 내가 그런 비겁한 방식을 택할까?”
“하지만 숙모님이 독살하라고-……!”
탐파니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사촌과 마주친 눈이 달각대며 흔들렸다. 등골에는 식은땀이 짝 흐르고 머리가 쭈삣 섰다.
이젠하르트는 제 손에 매달린 사촌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누, 누가 네가 그런대? 숙모님이 독살하자고 하셨으니까 궁금해서 물은 거지-……. 으앗!”
손이 확 잡아채인 탐파니스는 얼결에 일어섰다.
“귀가를 서둘러. 곧 종이 칠 거야.”
이젠하르트는 사촌을 내버려두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두 뺨에 돌연 생기가 핀 탐파니스는 그를 뒤쫓아나갔다.
“그럼 어쩔 건데? 결투로 죽일 거야?”
이젠하르트는 시동이 녹을 닦아낸 갑옷을 세심하게 살폈다.
탐파니스는 뒤에서 소리쳤다.
“결투로 죽여! 해치워버려!”
“면갑의 녹을 더 닦아라.”
이젠하르트가 어린 시동에게 말했다.
탐파니스는 연거푸 소리쳤다.
“결투로 죽이라고! 그 방법밖엔 없어. 그런데 영주님이 허락하실까? 영주님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숙부님도 병이 나셨잖아. 네가 몰래 놈이랑 결투한다면 숙부님이 가만히 계실까? 숙부님은 심장마비로 돌아가실걸. 틀림없어! 눈을 까뒤집고 돌아가실 거야. 오늘도 종일 네가 그놈의 행방을 찾더냐고 물으셨다던데?”
“녹을 다 닦고 나면 너흰 내일부턴 장창을 만들어라.”
“연습용 창 말이죠?”
시종이 물었다.
“산더미처럼 만들라고 하셨죠? 알겠습니다.”
“이젠하르트! 숙부님은 진짜 돌아가실걸. 나한테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놈을 탑에 가둬서 굶겨 죽이자.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놈을 납치해서 우리 집에 가두는 거야. 내가 밤낮으로 보초를 설 테니까 놈이 도망친다는 걱정은 하지 마. 절대 도망 못 가. 빵과 맥주를 아주 조금씩만 주면서 반년에 걸쳐서 천천히 굶겨 죽일래.”
“탐파니스.”
“굶겨 죽일 거지? 응?”
이젠하르트는 시종의 곁을 떠나며 어깨너머로 물었다.
“글쎄. 독살과 아사는 뭐가 다르지?”
“그, 그야 독살은 독을 먹여서 죽이는 거고 아사는 아무것도 안 줘서 말려죽이는 거지.”
“…….”
“그럴 거지? 우리 집에 가두자! 응? 내가 놈을 잡아 올게.”
“종이 치네. 지금부터 달려가면 늦진 않을 거야.”
이젠하르트는 재목을 자르는 하인에게 갔다. 젊은 하인은 주인이 다가오자 열을 내서 도끼를 휘둘렀다. 공중에 치솟은 도끼날이 푸르게 번뜩였다. 이젠하르트는 곁에서 수북이 쌓아놓은 재목을 살폈다.
“싫어? 그럼 어쩔 건데? 꼭 결투로 죽여야 해?”
초조한 탐파니스는 사촌의 등에 대고 외쳤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영주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테고 사전에 사유서를 내야 해. 그냥 죽이는 건 건 불법이라서 처벌을 받아. 그리고 삼 일 전에 녀석한테 너랑 결투로 담판 짓겠다고 선고해야 하는데 그 녀석이 얌전히 기다릴 것 같아? 꽁지 빠지게 달아날걸.”
이젠하르트는 재목을 집어 들어 살폈다.
“넌 꼭 내가 결투를 결심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냐? 넌 그 녀석을 당장 죽여 없앨 거잖아?”
“…….”
“놈의 갈빗대를 부숴온다며? 안장에 달고 온다며?”
“그랬나? 글쎄. 난 기억에 없는데.”
이젠하르트는 재목의 질에 만족하며 자리를 떴다.
탐파니스는 사과 하나를 집어넣어도 될 만큼 입을 크게 벌렸다.
“뭐야? 그럼 안 죽일 거야?”
그는 저를 앞질러 가는 사촌의 뒤를 냉큼 쫓아서 앞을 가로막고, 콩이 쟁반에 쏟아져 굴러가듯이 소리쳤다.
“저 재목으로 창을 만들라고 했잖아. 그걸로 놈을 찔러 죽일 거지? 사람들도 수군대던데? 네가 녀석한테 복수할 거라고. 그 집안 하인들도 싸그리 잔인하게 살해할 거라고. 콘드비라무어스 그 야만적인 여자랑 이니베가 벌써 다 떠벌렸어. 넌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를 거래. 그래서 그 바람둥이 녀석을 동정하는 놈들도 생겼어. 네가 무자비하다고 헐뜯더라. 그놈이 용서를 간구했는데도 잔인하게 살해하려고 했다며 비난했어. 너도 들었지? 너보고 도적기사래!”
이젠하르트가 어깨를 으쓱였으므로 탐파니스는 놀라서 물었다.
“뭐야? 그래도 아무렇지 않아? 다 죽여 버릴 거야?”
“그런 소문이 돈다니 내 마음이 아프군.”
“뭐? 그게 다야?”
“귀가 따가워서 더는 못 참겠네. 곧 종이 멈출 거야. 그만 돌아가.”
이젠하르트는 뒷마당에서 벗어났다. 주 현관 홀로 들어가서 2층으로 가는 계단에 올랐다.
쪼르륵 뒤따라간 탐파니스는 그의 등에 대고 고함쳤다.
“그럼 어쩌려는 건데? 놈을 죽일 거야, 말 거야?”
계단을 따라 올라가려던 탐파니스는 층계에 한발을 올려놓은 채 움찔했다.
뒤로 돌아선 이젠하르트는 조용히 물었다.
“넌?”
“내가 뭘? 뭐가?”
이젠하르트는 가만히 웃었다.
“넌 나보고 놈을 죽이라는 거냐, 아니면 살려주라는 거냐.”
“…….”
“탐파니스, 네가 원한다면 놈을 살려주마.”
탐파니스가 입을 꼭 다물고 저를 노려보자 이젠하르트는 한 계단 내려섰다. 그의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이 좁은 계단에 나직하게 울렸다.
“어떻게 할까, 탐파니스.”
“…….”
“대답해봐.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 으.”
“죽일까, 말까?”
“그, 그야 죽여야지! 당장 죽여 버려!”
탐파니스는 대뜸 소리를 질렀다.
“뭘 그딴 걸 물어? 그깟 녀석을 누가 동정할 줄 알고? 잔인하게 죽여서 원수를 갚아! 에잇! 요사스런 악마의 자식!”
“알겠으니 그만 돌아가.”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혼자 남은 탐파니스는 어리둥절해서 눈을 비볐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탐파니스는 갑자기 계단을 박차고 뛰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네 뜻대론 안 될걸?”
이젠하르트는 2층의 맨 위 계단에서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내 뜻이라니?”
“그놈을 잔인하게 찔러 죽이고 싶겠지만 절대 불가능해.”
“글쎄다. 난 네 간절한 바람을 이뤄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녀석이 결투 신청을 수락할 리 없으니까! 로트 그 자식은 평생 창을 쥐어 본 적이 없다고. 맞수가 안 되는데 너한테 얼씨구나 덤비겠어?”
“창을 쥐어본 적도 없다?”
“당연하지!”
“그럼 그 나이 먹도록 이제까지 뭘 했다는 거냐.”
“뭘 하긴! 목욕탕에서 맥주나 처마시며 매춘부들이랑 놀았지. 고약한 냄새나 피우는 음탕한 과부들 노리개였어. 쳇, 뭐, 여자들이 녀석을 내버려 두지는 않았지만. 간통자! 추잡한 바람둥이!”
탐파니스는 로트의 방탕과 죄악을 낱낱이 고발했다. 그를 부추긴다는 이터 일당도 고발했다.
이젠하르트는 열을 뿜는 탐파니스의 고발 내용보다는 그의 표정 변화와 어조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탐파니스는 흥분해서 마구 주워섬겼다.
“녀석은 절대 네 상대가 아냐. 그런 멍청이 바보 녀석하고 마상 결투를 한다면 불명예라고! 사람들이 조롱할 거야. 녀석은 오늘도 잔뜩 겁을 먹고 자기 집에 처박혀 있어. 넌 겁쟁이에 바보를 억지로 끌어내서 잔인하게 찔러 죽이지는 않겠지? 그건 수치라고!”
“생각해보니 그렇군.”
이젠하르트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수밖에.”
탐파니스는 몹시 어리둥절했다.
“그게 뭐야? 죽일 거야, 말 거야?”
“아니. 너그럽게 용서해줘야지.”
“뭐엇? 진심이야?”
“그럼. 이런 말도 있잖아. 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책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제기랄! 이건 정말 믿을 수 없어.”
탐파니스는 꽥 소리쳤다.
“녀석을 용서한다고? 넌 그 녀석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마치 가축을 도륙하듯이 무자비하게 살해해서 복수할 거라고 믿었는데, 이거 참 뜻밖이네.”
적잖은 충격에 머리가 혼란스러운 탐파니스는 무심코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의 우렁찬 외침이 적막한 집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갑자기 그는 입을 닥쳤다. 이젠하르트는 아무런 말 없이 탐파니스를 뚫어지게 보기만 했다.
“왜, 왜 그래? 뭘 그렇게 봐?”
“탐파니스.”
“왜?”
“잔소리는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아?”
이젠하르트가 한 계단 내려서자 탐파니스는 엉겁결에 아래로 내려섰다.
“탐파니스, 앞으론 네 현명한 충고가 필요하면 내가 먼저 부탁하마. 문지기가 문을 닫기 전에 어서 돌아가. 종이 멈췄군. 야경꾼이 올 거야.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탐파니스. 포겔바이데 그놈을 그냥 찔러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독살이나 납치도 내 방식이 아냐. 아사도 그다지 탐탁지 않아. 그러니 안심해. 놈이 먼저 죗값을 자청하지 않는 한 난 너그럽게 원수를 용서할 거야. 그게 최선의 복수지.”
“믿을 수 없어.”
“곧 믿게 될 거야.”
“거, 거짓말! 난 안 속아!”
탐파니스는 부르짖었다.
“넌 죽일 거지? 그 녀석을 반드시 죽일 거잖아!”
“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
이젠하르트가 모호한 미소를 지어서 탐파니스는 어리둥절했다.
“뭐가 내 뜻이라는 거야? 왜 자꾸 이상한 말을 해?”
“불명예스러운 복수는 기사의 도리가 아냐. 복수가 불가피하다면 정당한 대결을 해야지. 나는 비겁한 방식으로 내 결백한 손을 원수의 더러운 피로 물들일 생각이 없어. 그러니 안심해, 탐파니스.”
이젠하르트는 잘 가라는 인사를 건네고 올라갔다.
그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이젠하르트!”
탐파니스는 계단을 우당쾅쾅 올라서 외쳤다.
“넌 우리가 어릴 때 함께 사슴을 사냥하러 갔던 걸 기억하지? 우린 해가 저물도록 신나게 뛰어다녔잖아. 넌 나랑 단짝이었어!”
“물론 기억하고말고.”
멀어져가는 이젠하르트가 상냥하게 답했다.
“우린 언제나 친형제처럼 지냈지. 뭐든 반으로 나누며 함께 즐겼고.”
“맞아. 우린 제일 친했어. 지금도 그렇지?”
“그럼. 내가 유일하게 신뢰하고 사랑하는 친구이자 형제는 너뿐이야, 탐파니스. 참, 이것도 기억나는군. 어린 시절에 네 보석함에는 잔뜩 멋을 부린 옷에 검은 머리와 에메랄드 눈알이 박힌 이교도의 인형이 벨벳에 싸여 담겨 있었지. 지금도 그걸 애지중지하며 갖고 노나? 그럼, 안녕.”
*
며칠이 지났다.
성대한 무도회를 불명예스러운 소동으로 끝맺은 벨데케 가는 침묵에 빠졌다. 원수의 일족 전부를 손발을 잘라내거나 불구로 만들고 눈을 파내는 등 한바탕 복수의 피바람과 유혈참극을 예상한 시민들은 어느 날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이젠하르트가 이번에 발생한 원수의 도발을 관대히 용서했으며 비명횡사한 그들의 사촌 디트리히와 지그문트의 영혼을 위해서 신축 예정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공사비를 희사했다는 소식이었다.
뜬소문이라 추정됐던 이 소식은 사실로 드러났다. 두 집안의 세례와 성사, 예배를 도맡아 온 베르나르 사제가 이를 공표했다.
그러자 영주는 이젠하르트를 치하하고 두 가문의 영원한 화합이 속히 이뤄지기를 기도했다.
만필요트 백작도 그의 명예로운 기사도 정신을 높이 샀다. 이젠하르트가 마상 창 시합에서 쓰는 연습용 장창을 석 대의 수레에 실어 백작의 천막에 보낸 후에는 서로 절친한 벗이 됐다.
까마귀가 눈알을 파먹는 악몽에 시달려 쇠약해진 벨데케도 회복세를 탔다.
이젠하르트의 선행은 이후에도 돌발적으로 이어졌다. 시에 있는 빈민 구제소에 비밀리에 대량의 빵과 맥주가 희사되고 농부는 고기를 얻었다. 이런 자선은 비밀엄수가 조건이었는데도 이 소식은 다음 날이면 도시 전체에 퍼졌다.
그동안 탐파니스는 수시로 숙부의 집에 오갔다. 무더위에 모피를 껴입고 헐레벌떡 집안에 뛰어든 그는 매번 야릇한 표정을 띠고서 밖으로 나왔다. 방문이 거듭될수록 그 조그만 얼굴은 더욱 야릇해졌다.
그가 떠난 후에는 어김없이 뒷마당에서 장작을 패는 듯한 소리가 울렸고 다음 날 아침에 뒷마당에 가보면 너덜너덜해진 과녁 아래에 창 조각이 산산이 박살 나 있었다.
한편 무도회 직후에 포겔바이데 가의 하인들은 자발적으로 집안에 칩거했다. 문을 열고 길에 발을 내딛는 순간 보복 살해를 당할 위험이 커서였다.
그러나 이젠하르트가 로트의 이번 무단 난입을 눈감아주고 베르나르 사제의 소개로 근교 수도원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그들은 은근슬쩍 집안의 문을 열었다.
*
늙은 한스는 주인 벨데케가 자리에 들자 집안 곳곳을 살폈다. 주인을 대신해서 아래층의 문단속 여부를 점검했다.
그 후에 등잔불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등불 없이는 한발도 내디딜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계단을 지나서 2층의 어느 문 앞에 섰다.
여긴 전에 빈방이었다. ‘수도원으로 참회의 금식 기도를 떠난’ 이젠하르트의 명령으로 방은 최근에 청소됐다. 이 방의 창문은 가로에 면해 있어서 바깥과 주변 골목이 훤히 내다보였다.
늙은 한스는 문 앞에서 등불을 훅, 불어 끄고 컴컴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한껏 낮췄음에도 교묘하게도 또렷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나리, 분부대로 문단속을 마쳤습니다. 또 시키실 일은?”
“그 애는 옆방에 있나.”
“그럼요. 새 침대에서 편안히 주무시도록 잠자리를 봐 드렸습니다.”
“하녀와 투르농 부인은?”
“마님의 분부라고 명하고 3층 규방에 그대로 뒀습니다. 지금 자고 있어요.”
“그 애 방에 등불은 켜놨나?”
“예, 물론입니다.”
늙은 한스가 재빨리 답했다.
“아주 훤하게 켜 놔서 저 시문 밖에서도 밤새 볼 수 있을 겁니다. 아가씨께서 웬 등불을 자꾸만 들여오느냐고 하시기에 밤을 지새려면 켜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습니다.”
“꺼지지 않도록 살펴줘라. 그 애는 어려서부터 밤을 무서워했어.”
“그럼요. 창가랑 궤짝에도 틀림없이 여러 개 불을 밝혀놨습니다. 대낮처럼 밝습니다.”
“달리 불편한 건 없다더냐?”
“왜 갑자기 침실을 옮기느냐고 물으시기에 3층의 규방에는 악의 기운이 넘쳐나서 아가씨의 건강에 해롭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인마님의 분부라고 일러드렸어요.”
“파수꾼은?”
“예, 제 아들 녀석이 궤짝에 숨어서 현재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 드리고 있습니다. 연약한 아가씨는 우리 충직한 새끼 한스가 혹시 뒤쫓아 올 악마의 손아귀에서 보살펴 드릴 거라고 안심시켜 드렸지요. 그 녀석은 나리께서 부재중이실 때 밤도둑의 다리를 개처럼 물어뜯어 잡은 적이 있습니다. 아주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어요. 그 녀석은 저를 꼭 닮았습니다.”
“밤도둑을 잡았다니 기특하군.”
“예, 도둑놈을 물어 죽이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목숨을 붙여놨더랬죠.”
“밤도둑은 현장에서 즉시 찔러 죽여도 무방해. 그런 중대 범죄를 지른 자는 반드시 체포해서 목숨으로써 그 죗값을 값게 해야 한다.”
“여부가 있습니까.”
“힐데가르트가 다른 말은 안 했나?”
“아가씨께선 작은 나리께서 언제 돌아오시느냐고 자꾸 캐물으셨지만 전 시치미를 딱 뗐습니다. 탐파니스 도련님께서도 제 뒷덜미를 잡아서 뒷마당에 내팽개치고 귀를 비틀어 잡고 정강이를 걷어차시며 나리께서 어딜 가셨느냐고 매섭게 추궁하셨지만 전 절대로 입을 뻥긋 안 했습습니다. 암요!”
“뒷마당의 출입구는?”
“예, 잊지 않고 열어놨습니다. 의심 많은 문지기가 쿤츠를 데리고 나가서 튼튼하게 꼭꼭 닫아두는 곳인데 제가 냉큼 빗장을 빼서 숨겨놨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늙은 한스는 묵묵히 주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어두컴컴해서 한 치 앞도 두 손으로 간신히 더듬어야 오갈 수 있는 방에서, 젊은 주인이 기척 없이 그림자처럼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에 무척 감탄했다.
창가에 선 이젠하르트는 밖을 내다봤다.
그는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야경꾼은 언제쯤 온다고 했지?”
“예, 요맘때쯤 광장을 돌고 있을 겁니다. 저 앞집 지붕 위에 뜬 달이 성채의 깃발 쪽에 오면 틀림없이 요 앞을 지나갑니다.”
“그자들한테 이곳에는 얼씬거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겠지?”
“물론입니다.”
늙은 한스는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이유를 둘러대느라 애를 먹었습다만 근래에 주인 마님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개가 짖지 않도록 절대 얼씬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맥주와 포도주도 챙겨줬습니다.”
“알겠다.”
어둠 속에서 이젠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진 이곳엔 계속 얼씬대지 못하도록 잘 지켜봐라.”
“네잇!”
“나가봐.”
늙은 한스는 주인의 흉내를 내며 발뒤꿈치를 들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혼신의 주의를 기울여 까치발로 걸었는데도 발걸음 소리가 진동하자, 땅속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저승사자 뺨칠 정도로 은밀한 주인의 거동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여름의 밤바람은 달콤했지만 좁은 골목에선 악취가 풍겼다.
이젠하르트는 창가에 몸을 숨기고 새카만 밤의 골목골목을 살폈다. 훤한 달빛이나 떠돌이 개는 그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는 어둠을 꿰뚫어 보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누이의 방에 있는 창가로 굵은 가지를 뻗은 나무에서 나뭇잎이 몇 개 떨어졌다. 땅바닥에는 잔돌과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널려있었다.
‘밤도둑과 첩자, 요괴 그리고 발정 난 개들이 검은 튜닉으로 몸을 휘감고 활개를 치는 밤에는 그들만의 비밀이 있는 법.’
이젠하르트는 같은 자리에서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동이 트면 잠자리에 들고 제2종이 치면 바로 어제와 같은 자리에 서서 창밖을 살폈다.
골목과 집 근처에는 적막과 암흑뿐이었다. 너무나 고요해서 설치류가 땅을 파헤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바삭-
‘역시.’
그러던 사흘째 날이었다.
밖을 주시하는 이젠하르트의 고개가 처음으로 살짝 움직였다. 나뭇잎과 돌이 바삭대는 소음이 아래서 울렸다.
그는 허리에 찬 검에 가만히 손을 댔다. 암흑의 방안에서 그의 실루엣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골목 한 곳을 뚫어지게 지켜봤다
찬 달빛은 맞은 편 골목을 낱낱이 비췄다. 바삭바삭, 잔돌을 밟는 발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검은 살쾡이 한 마리가 골목에서 빠져나와 벨데케 가의 나무 뒤로 미끄러지듯 몸을 감췄다. 어둠에 익지 않았다면 전혀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기민한 몸짓이었다.
‘도둑 살쾡이구나.’
이젠하르트는 나무 뒤를 지켜봤다.
‘검은 튜닉을 입은 도둑 살쾡이 한 마리.’
이때 나무 뒤에서 노란 안광이 번뜩였다. 위로 쳐든 고개는 옆방 누이의 창문을 향했다.
이젠하르트는 기름을 칠한 창문으로 손을 가만히 미끄러뜨렸다.
‘오냐. 어서 나무에 올라타라. 네놈이 나무에 한발 오르는 순간, 이 단검은 네 심장이 뿜는 선혈로 물들 거다. 어리석은 밤도둑아, 빨리 나무에 올라타.’
-!
문득 찢어질 듯이 날카로운 새소리가 울렸다.
이젠하르트는 홱, 고개를 돌려서 앞집의 지붕을 봤다. 이 순간 검은 튜닉을 입은 살쾡이가 나무 뒤에서 달아나 반대편 골목으로 날쌔게 사라졌다.
이젠하르트는 단검을 제자리에 밀어 넣었다.
‘실컷 달아나렴.’
그는 도둑 살쾡이에게 조소를 건넸다.
‘차디찬 달빛과 검은 유령들, 굶주림에 지친 떠돌이 들개 따위만이 네 녀석의 유일한 길동무다. 하지만 네가 다음에 또 내 땅을 딛는 순간, 네 목숨은 나의 것. 기다리마. 음욕의 포로인 음탕하고 추악한 밤도둑아.’
도둑 살쾡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젠하르트는 창가를 지켰다. 비겁한 밤도둑이 오늘은 되돌아오지 않으리라고 확신은 했지만, 사전 계획의 철저한 엄수와 자기 단련을 위해서 자리를 지켰다.
오랜 시간이 흐르자 차디찬 달빛은 복수심을 냉정하게 가라앉혔다. 동녘이 밝아올 때쯤이면 밤새 들끓었던 증오와 살의도 다소 가라앉곤 했다.
이젠하르트는 동이 터오길 기다렸다. 증오와 원한이 물러난 곳에 얄팍한 감성이 싹을 틔웠다.
‘가여운 힐데가르트.’
그는 옆방에서 자고 있을 누이를 떠올렸다.
‘불쌍한 내 누이. 그 음탕하고 비겁한 밤도둑에게 순결한 영혼이 더럽혀지다니.’
-!
이때 이젠하르트는 가슴이 칼에 찔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빌어먹을!’
단 한 순간의 방심이었다. 그러나 치명적이었다.
‘교활한 도둑 살쾡이 같으니!’
그는 숨을 죽였다. 그가 방심한 사이 달아났던 검은 살쾡이가 돌아와서 나무 뒤로 재빨리 숨었다. 수법이 동일한, 두 번째 야간 침입이었다.
‘흠, 이걸 어떻게 봐야 하지?’
이젠하르트는 밤도둑의 그림자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난 저놈이 오늘 밤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걸 노린 게 틀림없다. 같은 장소에, 두 번째의 침입 시도가 그걸 증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저놈 보게.’
이젠하르트는 뜻밖에도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놈은 그의 예상을 뒤엎고 대담해졌다. 아니, 멍청하든가 대담하든가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아니라면 저렇게 대담하게 나무 뒤에서 나와 제 몸을 달빛에 전부 드러내지는 않았으리라.
‘어딜 보는 거냐, 무모한 밤도둑아.’
이젠하르트는 기가 막혔다.
‘힐데가르트의 방을 찾고 계시나. 물론 그러시겠지. 모자란 놈. 2층을 봐라. 등불로 대낮처럼 밝혀 놓은 방이 안 보여? 거기서 너의 명망 높은 귀부인이 네놈을 기다리며 홀로 잠들어 있어. 뭘 망설여? 깃발이라도 꽂아서 얼른 들어가시라고 너를 환영해줄까.’
이때 도둑놈은 이상한 짓을 했다.
이젠하르트는 서툰 밤도둑을 꾸짖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생각했다.
‘또 어디를 보냐? 3층이 아니라니까. 뭘 하고 있어?’
밤도둑은 이번에도 그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빌어먹을. 어리석은 밤도둑아, 눈이 멀었냐? 어서 네놈 옆에 있는 나무에 올라타. 사다리라도 내려다 줄까? 못 하겠으면 뒷마당으로 돌아가. 널 위해서 문을 활짝 열어놨어.’
그러나 밤도둑은 전혀 예측불허였다. 당연히 나무에 훌쩍 올라타리라고 기대했던 도둑놈은 어째선지 이제는 가로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꼼짝하지 않는다. 누이의 옆방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3층을 올려다보고 있다.
이젠하르트는 초조하게 놈을 지켜봤다. 예측이 불가능한 놈의 행동에 허점이 찔리자 치욕스런 증오심을 느꼈다.
‘저 얼간이가 남의 방에서 뭘 찾는 거야? 눈치를 챘나. 아니면 설마 내 방에 그 애를 가둬뒀다고 믿나.’
이젠하르트는 숨을 죽이고 기도했다.
‘빌어먹을. 등불에 놀아나지 않는 걸 보니 네 녀석도 발정 난 개만은 아니구나. 자, 소용없는 머리만 굴리지 말고 네놈의 본능이 명하는 대로 해. 어서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네 귀부인을 품에 안으렴, 그때는 음탕한 네놈의 최후가 기꺼이 널 반겨줄 거다.’
-!
문득 날카로운 새소리가 또 울렸다.
밤도둑은 갑자기 주춤했다. 당황한 게 역력했다.
“……?”
이번에도 날쌔게 골목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놈은 뜻밖에도 땅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리곤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고서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이젠하르트는 피가 솟구쳤다.
“더러운 밤의 살쾡이!”
그는 창문을 젖히고 소리치며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
“음탕한 밤도둑아! 거기가 네놈 무덤인 걸 용케도 알고 손수 땅을 파고 있구나!”
“……!”
“서라!”
-!
밤도둑은 튕겨 일어나서 재빨리 맞은편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이젠하르트는 검을 빼들고 추격했다.
두 개의 그림자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암흑을 쉭쉭, 갈랐다. 쫓는 화살은 쫓기는 화살보다 한 발 빨랐다. 쫓기는 화살은 거친 숨을 헐떡대며 골목을 뚫고 오물을 뛰어넘으며 마구 질주했다.
한밤의 추격전에 잠이 깬 개들이 짖었다. 놈들은 밤을 쩌렁쩌렁 울리는 추격자의 노성에 덩달아 요란하게 짖어댔다.
“서라!”
좁은 골목을 헤집던 밤도둑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그를 추격하는 맹렬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골목은 높다란 담벼락에 막혔다.
밤도둑은 힐긋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담벼락에 훌쩍 올라탔다.
검을 쳐든 이젠하르트는 그대로 담벼락을 향해 돌진했다.
“비열한 밤도둑아! 오늘이 너의 최후다!”
-!
그는 담벼락을 향해 도약했고 직후에 쿵- 하는 소음이 담벼락 안팎에서 두 번 울렸다.
담을 쉽게 뛰어넘은 밤도둑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젠하르트가 혼자 남은 좁은 골목에서는 개들이 사납게 짖어댔다.
컹컹컹-
불쑥 늘씬한 개 한 마리가 골목에 나타났다. 주인을 쫓아온 벨데케 가의 사냥개 쿤츠였다.
녀석은 주변을 홱홱 돌아보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곤 담벼락 아래로 와락 달려들어서 낑낑대며 주인의 머리를 핥았다.
쓰러진 이젠하르트는 땅바닥에서 일어나 앉았다. 바닥에 부딪힌 뒷머리가 지끈, 울렸다.
쿤츠는 정신 차리라고 맹렬하게 짖었다. 담을 넘다가 발이 걸려서 추락한 이젠하르트는 입술을 깨물고 일어섰다. 골목에 있는 집들은 한밤중에 날뛰는 강도들의 소란이 두려워서 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이젠하르트는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주먹을 으스러지게 쥔 입술이 경련했다.
‘검은 튜닉을 입은 추잡한 도둑 살쾡이! 오늘의 수치를 잊지 않겠다…….’
그는 집 앞에서 검을 빼들고 달빛에 비췄다.
‘개자식. 두고 봐라.’
희푸른 검의 날이 손아귀에서 창백한 악귀의 눈빛처럼 번쩍였다.
이젠하르트는 입술을 깨물며 검을 칼자루에 꽂았다.
‘각오해라. 다음번에 네 녀석의 그림자마저도 베어버릴 테니까.’
이젠하르트에게 쫓긴 검은 튜닉의 도망자는 골목길에서 빠른 걸음으로 나와 광장을 가로질렀다. 발소리를 죽이고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선 그는 한참 좁은 골목을 돌고 돌다가 어느 가로에 면한 후문으로 들어섰다.
“누구냐!”
“쉿. 나다.”
“나리?”
포겔바이데의 늙은 문지기는 한 손에는 몽둥이를, 다른 손에는 초롱불을 움켜잡고서 물었다.
“큰일 나시려고! 이 밤중에 어딜 쏘다니다 오셨어요?”
“조용히 해.”
“아휴, 이게 웬 고약스런 냄새야.”
“혹시 날 찾아온 사람은 없었겠지?”
“종이 친지가 언젠데요. 당연히 없었어요.”
“확실해?”
“확실하죠. 이맘때에는 야경꾼이랑 악마가 아니면 누가 저 시커먼 밖을 쏘다닌답니까. 어디를 다녀오셨어요? 오밤중에 뭔 일을 내시려고 밤도둑처럼……. 에잉! 쯧쯧.”
문지기가 열을 내며 침을 튀기는 사이 로트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문지기는 몽둥이랑 초롱불을 내려놓고 뒷골목으로 나갔다. 주변을 잽싸게 살펴보고 길바닥에 오물을 내버렸다. 떠돌이 개나 쥐가 들쑤셔놓은 쓰레기 더미에서 시금털털한 악취가 올라와 코를 쑤셨다. 로트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코를 잡고 뒷문에 들어서던 노인은 느닷없이 옆을 돌아보고 외쳤다.
“나리!”
문지기는 저만치서 남의 집 벽을 뱀처럼 타고 지나는 검은 튜닉을 목격했다. 달빛이 흐르는 벽을 튜닉의 끝자락이 휙, 스쳤다.
문지기는 목구멍을 쉿쉿 대며 쫓아갔다.
“나리! 어딜 또 쏘다니시려고요? 당장 돌아오세요, 나리!”
담벼락 아래서 힐끔 뒤를 돌아본 인영이 부리나케 내뺐다.
“어쿠, 저 철부지! 에잉!”
허리가 낫처럼 굽은 문지기는 인영을 맹추격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쪼글쪼글한 이마에는 시뻘건 피가 흘렀다.
그는 뒷문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꽝, 닫고 욕지거리를 마구 주워섬겼다. 야경꾼에게 체포될 위험을 감수하고 암흑에서 냅다 내달리다가 어느 집 문짝에 이마를 처박고 자빠진 터다.
“에구구, 저러다 악귀가 잡아갈 거야. 칼에 맞아 죽겠지.”
노인은 제 피를 닦아내며 소리쳤다.
“벨데케의 개새끼들이 시뻘겋게 눈을 부라리고 있거늘, 놈들이 교활한 술책을 부린 걸 모르고 오밤중에 함부로 쏘다녀? 그 비렁뱅이 개새끼들이 우릴 용서했다고? 어림없는 개수작이지. 주인 나리가 그 소식을 들었다면 피를 쏟고 모욕을 당했다고 노발대발하실 텐데! 내 평생의 충성을 바친 이 유서 깊고 거룩한 집안이 쫄딱 망하겠구나. 어이구야, 개망나니도 저런 개망나니가 없어. 해가 시퍼런 낮에는 고운 낯바닥에 반지르르한 윤이 흐르다가도 별안간 발정이 나버리면 단박에 헤까닥 해버리니. 이 집에 돌아와 그 짓을 처음 벌였을 때 난 딱 알아봤지. 자기 체구의 두 배나 되는데다 한 손으로 너끈히 소를 때려잡는 뚱뚱한 하녀를 희롱했을 때부터 난 딱 알아봤지. 그 계집이 하염없이 울면서 그러더군. ‘내 잘못이 아니에요. 작은 나리께서 닭을 잡는 저를 다짜고짜 나리 침실로 끌고 갔어요. 제 두 팔을 꼭 붙들고는 저를 붙잡았어요. 제가 몸부림을 치며 이제 놔달라고 저항하자 새벽 내내 등 뒤에서 제 팔을 꼭 붙든 채 절대 놔주시질 않았어요. 저는 꼼짝도 하지 못했어요. 글쎄, 저 고운 낯의 어여쁜 나리께서 불쌍한 제게 그러실 줄 누가 알았나요?’ 그때 난 딱 알아봤지. 아하, 요것이 인간의 탈을 쓴 음란한 악귀로구나. 요사이 정신을 차렸나 했더니 웬걸! 또 어디로 오입질을 하러 갔을까. 남의 집 지붕을 제 말처럼 타고 다니니 도둑 살쾡이지 뭐야. 또 병이 도졌어! 내가 주인 나리께 그렇게나 경고하고 충고를 했건만, 이교도의 마녀한테 홀려서 저런 악마의 자식을 낳았으니 이 집안은 결국 망하겠구나!”
문지기는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지르며 문간방으로 갔다.
“꼬맹이였으면 볼기를 몽둥이로 찰싹찰싹-……..”
“여봐, 힌츠.”
“헉!”
뒤를 돌아본 문지기는 얼굴이 허옇게 떴다.
“나, 나리?”
“헛것을 봤나? 왜 그래?”
입을 벙긋벙긋하는 문지기에게 로트는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늘 밤 외출했었다는 말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마.”
“나리께선 또 그새 어디에 갔다 오셨어요? 조금 전에 저 골목으로 밤도둑처럼 내빼시더니!”
“조금 전에?”
“예. 저 뒷골목으로 내빼셨잖아요. 나리를 쫓다가 제가 이마를 홀딱 깼지 뭡니까.”
“무슨 소리야? 난 내 방에 있었어. 아무튼 아무한테도 오늘 얘긴 하지 마. 알았지?”
“아니, 분명히 저 골목에서 제가 나리를 봤는데-…….”
“힌츠!”
문지기의 말라빠진 팔뚝을 확 비틀며 로트는 난폭하게 지껄였다.
“잔소리는 그만해, 통나무 대가리 노인네야. 내 마음이 지금처럼 컴컴하고 거칠 땐 시키는 대로 해. 카이렛이나 이터한테 특히 로에란그린한텐 오늘 얘긴 절대 비밀이야. 알았나?”
로트는 문지기를 단단히 위협하고 침실로 올라갔다. 맨바닥에서 자고 있던 몸종 둘도 내쫓고 문을 쾅 닫았다.
그는 검은 튜닉을 벗어서 바닥에 내 던지고 쿠션이 잔뜩 깔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오랫동안 침실은 고요했다.
로트는 가만히 누워서 미동도 없었다. 등불을 모조리 꺼버린 방안에는 이따금 거친 숨소리만 울렸다. 굶주린 짐승이 몸을 뒤틀며 숨을 내뿜는 듯한 그 소리는 새벽이 되자 고른 숨결로 변했다.
해가 뜰 무렵 로트는 눈을 떴다. 누운 채로 물끄러미 천장을 올려다봤다.
불현듯 벌떡 일어나 앉은 그는 놀라서 주변을 돌아봤다. 천만다행하게도 익숙한 방안이다.
그는 두 팔꿈치로 무릎을 괴고서 양손으로 머릴 움켜잡았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와 몸뚱이에서 오물과 흙이 뒤섞인 역한 냄새가 났다. 밤사이 물어뜯은 입술 새로는 깊은 한숨이 흘렀다.
‘내가 또 무슨 짓을 했지.’
로트는 이불을 잡아채서 피가 엉긴 입술을 문질렀다.
‘밤사이 또 정신이 나가서 뭔가 큰일을 저질렀는데…….’
지난밤 기억의 편린이 빠르게 스쳤다.
그는 관자놀이를 두 손바닥으로 꽉 눌렀다. 발소리, 고함, 암흑, 창가의 등불, 그림자 따위가 한 덩어리로 뒤엉켰다.
‘뭐, 큰일을 저지르진 않았겠지.’
불안한 마음에 로트는 자신을 위로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니까 아무 일 없었겠지. 피가 너무 끓어오르면 깜빡 정신을 잃지만 잠깐이야. 뭔가 사고를 치진 않았을 거야……. 빌어먹을…….’
이때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튜닉이 눈에 띄었다.
경악한 로트는 그걸 궤짝 속에 처넣고 몸을 떨며 허겁지겁 포도주를 마셨다.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서 방안을 빠르게 오갔다.
‘차라리 이 두 발을 잘라냈으면!’
핏기가 싹 가신 낯으로 그는 제 다리를 증오에 차서 내려다봤다.
‘제기랄! 밤도둑으로 몰렸으니 이제 어쩌지? 이젠하르트가 나를 알아봤을까. 아니, 그럴 리 없어……. 제길. 붙잡히지 않은 게 기적이야.’
새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로트는 창밖을 내다봤다. 도시의 나무 우듬지에서 수많은 새가 시끄럽게 짖어댔다.
우중충한 도시는 안갯속에 잠겨 있다. 빛바랜 주홍색 지붕도 젖어 있고 나뭇가지도 안개에 젖어 검게 보였다.
서서히 동이 밝았다.
맑은 정신을 되찾자 로트는 괴롭고 슬펐다.
암흑과 적막의 밤, 이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정열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남은 건 잔해뿐이었다. 난파선의 그것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부대낀 심신의 잔해.
‘아, 이놈의 격정을 어떻게 다스리나. 도저히 제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이 발작적인 악마의 충동을 어쩌면 좋을까. 하아…….’
얼마 전에 이젠하르트가 로트의 무도회 난입을 용서한다고 공표했을 때였다.
로트는 즉시 베르나르 사제에게 가서 이젠하르트와 만나고 싶으니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서 들뜬 마음으로 답변을 기다렸다. 수사슴의 예언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이젠하르트에게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베르나르 사제는 그에게서 아무런 답변이 없다고 전하면서 이젠하르트가 최근에 기도와 자선 사업으로 몹시 바빠서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 같다고 알렸다.
화해하려는 첫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로트는 크게 상심했다.
세 귀공자는 무도회 이후로 항간에 나도는 소문과 사실을 가감 없이 전했다.
카이렛은 그중에서 이젠하르트가 돌발적으로 벌인 자선 행위를 대놓고 의심했다. 이터도 자선이 명예 훼손을 만회하려는 눈속임이라고 주장했다. 로에란그린은 무언으로 동조했다.
로트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서 이젠하르트의 선의를 모욕하는 그들을 비판했다.
이후에도 그는 수차례 베르나르 사제를 찾았다. 그러나 만남은 쉽사리 성사되지 못했다. 이 모든 과정은 호사가의 눈을 피해서 비밀리에 진행됐다.
화해의 청이 연이어 거부됐음에도 로트는 굴복하지 않았다.
세 귀공자는 그의 성급함을 나무라고 신중하라고 조언했다. 상심한 로트가 ‘불행한 평화 사절단’이니, ‘저주받은 화해의 특사’니, '수사슴의 심술' 운운하며 격정에 몸부림치는 밤이면, 카이렛은 곁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밤을 새웠다.
외고집인 로트도 결국 한풀 꺾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 속에 어느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무서운 비밀을 감추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던 지난밤.
로에란그린이 우려했고 로트 그 자신도 두려워하던, 타고난 정열의 폭풍이 그를 덮쳤다.
그는 암흑 속에서 골목을 더듬고 헤매어 벨데케 가를 찾아갔다.
2층에 불이 켜진 방이 있었다.
저곳에 아름다운 힐데가르트가 있으리라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다른 곳, 찬 달빛만이 내리비추는 굳게 닫힌 3층 창가에서 헤맸다. 이젠하르트의 방이었다.
이윽고 느닷없이 발생한 한 밤의 추격전.
악몽의 밤이 지나자 남은 건 슬픔과 고통뿐.
‘이젠하르트, 난 네가 수도원에서 돌아온 줄 몰랐어.’
로트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이젠하르트, 나의 용맹한 기사여, 내가 지난 밤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왜 나는 거길 갔을까. 왜 나는 너를 향한 미칠 듯한 동경과 그리움에 휩쓸려 밤도둑처럼 너를 찾아갔을까……. 나의 기사여, 나는 남몰래 너를 훔쳐봤다. 광장을 거니는 너의 모습은 한 마리 흰바다매처럼 기품이 넘치고 힘차다. 눈이 부신 황금의 머리채! 아름다운 잿빛 눈동자! 사람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너의 그윽한 음성!……. 아, 모두가 내게 너를 멀리하라고 경고한다. 나의 무분별한 정열을 경고하고 있어. 하지만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어. 이 피 끓는 정열을 제어할 수 없어……. 이젠하르트, 나의 기사여, 너는 어째서 벨데케의 깃발이냐. 밤도둑이 되어서라도 너를 훔쳐보고 싶은 이 마음을 뭐라고 부를까. 제기랄! 화해의 특사가 음험한 밤도둑이 되고, 이 음험한 마음은 수치를 모르고 괴롭게 설레기만 하니, 부끄러움과 치욕의 감정이 사라진 육신이 나를 저주하는구나!’
로트는 이불을 물어뜯고 쿠션의 깃털을 죄다 빼내며 가슴을 쳤다. 한숨과 눈물로 시를 읊고 비가를 불러댔다.
날이 어느새 훤히 밝았다. 창턱에 날아든 커다란 까마귀는 로트의 그릇된 정열과 헛된 희망을 질책하듯 울어댔다.
‘아니. 이건 시작에 불과해.’
로트는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
‘내가 헤쳐나가야 할 고난의 가시밭길은 이제부터다……. 그대, 나의 용맹한 기사여, 너는 내 운명의 상대다.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에……. 순종하라……. 이젠하르트…….’
건강한 청년의 육신은 오랜 마음의 고뇌와 피로를 이겨내지 못했다.
로트는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곧 몇 날 며칠 가슴을 죄며 과도하게 번민한 탓에 세상만사를 잊고서 깊은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