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네 원수를 사랑하라
힐데가르트가 궤짝에 눈물로 수를 놓을 무렵, 포겔바이데의 하인은 향고래 등유를 들고 3층의 응접실로 갔다. 그곳 바닥에는 값진 양탄자가 깔려있고 벽에는 채색실과 금실로 짠 벽걸이가 가득 걸려 있었다.
어둑한 응접실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등잔불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하인은 꺼져가는 등잔에 등유를 붓고 불길을 새로 돋우었다. 그러자 컴컴한 제단 같던 방 안이 밝아지며, 세 귀공자의 모습이 차례로 드러났다. 그들은 비단 쿠션에 팔을 괴고 바닥에 드러눕거나 팔걸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거나 또는 달빛이 흐르는 창턱에 각각 앉아 있었다.
로트는 응접실 구석에 있는 탁자 앞에 혼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다. 탁자가 원래 거기 있었던 건지, 아니면 본인이 고립을 자처한 건지 또는 관찰하기에 유리한 위치라서 세 귀공자가 그를 외따로 격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귀공자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로트는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건 말건, 등잔불이 미치지 않는 어둠 속에 얼굴을 감추고서 뭔가를 열심히 했다. 이따금 의미 불명의 숨소리를 흘리며.
“내 말이 틀림없어.”
이터가 먼저 침묵을 깨며 이때 얼핏 불빛 아래 드러난 로트의 얼굴을 가리켰다.
“바로 저 얼굴이 증거야. 흰둥이 수사슴의 예언이 실현됐음을 입증하는 얼굴이지.”
“아니. 저 낯짝은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이 궁지에 몰려서 공포와 불안에 떠는 모습이야.”
카이렛이 받아쳤다.
“저것 봐, 눈가는 잠을 못 자서 퀭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잖아. 쥐잡이의 덫에 갇혔던 쥐가 저렇게 두 손발과 꼬리를 바들바들 떠는 걸 난 본 적이 있어.”
“오호, 그렇다면 저건?”
이 순간 등불 주변을 오락가락하던 로트의 얼굴이 불빛 아래에 전부 드러났다.
“몽롱하게 들뜬 저 눈빛이 보이지? 빛나는 얼굴과 붉게 물든 뺨, 입술은 또 어떻고?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입매는? 북처럼 고동치는 저 젊은 가슴의 기복을 못 본 체할 거야? 저건 쥐덫에 갇힌 쥐새끼 표정이 아냐. 이젠하르트에게 첫눈에 반해서 불 같은 사랑에 빠진 광인의 표정이지. 미몽 속에서 황금빛 머리칼의 기사님과 밀담을 속삭이느라 바쁜 거야. 아이고, 기사님. 제발 목숨만 살려주세요.”
“시끄러워! 에잇!”
카이렛은 벌떡 일어나서 로트에게 달려가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로트. 자네 정말로 이젠하르트 놈에게 반했어?”
“…….”
“원수놈에게 반했냐고?”
“아냐.”
“정말 아니지?”
“아냐.”
로트는 탁자를 떠나 응접실 중앙으로 나왔다.
“자네들, 매 얘기를 듣고 싶나?”
입씨름이 벌어졌던 응접실 안이 조용해졌다.
세 귀공자는 방만하던 자세를 바꿔서 앉았다. 바로 곁에서 너울대던 등불의 희롱이 사라지자 로트의 얼굴이 달라졌다. 눈빛이나 표정이 어젯밤과는 달랐다. 그전과도 달랐다. 낯익은 듯하면서도 생소했다. 마치 털갈이를 한 새처럼.
“내가 있던 수도원에 매 한 마리가 있었어. 어느 늙은 기사가 그 매를 데리고 왔는데, 기사는 수도원 깊숙한 곳에 외따로 떨어진 암자에 혼자 살았지. 거기서 울타리를 치고 은자처럼 틀어박혀 여생을 보냈어. 어느 날 원내를 쏘다니던 나는 우연히 암자를 발견했어. 거기서 가시덤불과 쐐기풀 울타리 사이로 높다란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매를 봤어. 난 우여곡절 끝에 놈을 가까이서 봐도 좋다는 기사의 허락을 받아냈지.”
로트는 꿈에 잠긴 듯 골똘히 말을 이었다.
“허락이 떨어진 다음 날 나는 한숨 못 자고 그곳에 갔어. 바위 근처에 가자마자 먼저 메추리를 선물해서 놈에게 경의를 표했어. 군주를 떠받드는 봉신처럼 은빛 털이 눈부시게 반짝인다고 아첨을 떨기도 했어. 하지만 놈은 날 거들떠도 안 봤어. 그렇게 몇 달이 지났지. 난 포기하지 않고 틈틈이 암자를 찾아가서 울타리 사이로 놈을 훔쳐봤어. 어떡하면 내 팔목에 놈을 한 번 얹어볼까 안달이 났거든. 기사가 없을 때는 닫힌 울타리 밖에서 안으로 팔을 집어넣고 설치류나 뇌조를 흔들어대며 와서 먹으라고 유혹했어. 하지만 놈은 끝까지 내 유혹을 뿌리치고 바위에 앉아만 있었어. 난 번번이 울면서 돌아갔지만 놈을 잊지 못했어.”
“고작 새매 한 마리에 목을 맸군.”
카이렛이 껴들었다.
“그놈은 흰바다매였거든. 놈은 매 중에서도 으뜸인 하늘의 제왕이야. 그런 놈에겐 내가 잡아다 준 어린 메추리나 종달새 따위는 모욕이었겠지. 놈은 그토록 오만한 제왕이었어. 어느 날에 난 너무 약이 올라서 돌멩이를 던져 놈의 어깻죽지와 가슴팍을 맞췄지. 다른 새매였다면 죽었을 거야. 놈은 그런데도 제 자리서 꼼짝 않는 거야. 내가 엉엉 울면서 잘못했다고 비는데도 용서는커녕 날 끝까지 외면했어.”
“그 녀석 꼭 이젠하르트를 닮았군.”
카이렛이 짓궂게 말했다.
“녀석이 마음만 먹었다면 날카로운 부리로 자네 머릴 쪼아서 두 쪽을 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로트는 전율하며 말했다.
“어젯밤에 내가 처음 이젠하르트를 봤을 때 난 문득 그 매를 떠올렸어.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불현듯 떠오르더군. 내 마음을 첫눈에 송두리째 빼앗겼던 그 흰바다매처럼 가면을 벗어던진 이젠하르트의 얼굴을 본 순간, 내 가슴엔 격한 감동이, 꼭 그때와 같은 감동적인 전율이 흐르더군.”
“하지만 이상하군.”
로에란그린이 입을 열었다.
“황제와 왕의 특권인 흰바다매가 왜 그런 수도원에 있었지? 기사 신분으로는 흰바다매를 소유하는 건 불법인데.”
“그래서 둘이서 암자에서 산 거야. 매가 죽고 나서는 모두 알게 됐지만 그전까지는 수도원장과 나만 알고 있었어.”
“매가 죽다니? 밀렵을 당했나. 그랬다가는 사형감인데.”
“아니. 사냥을 할 수 없어서 굶어 죽었거든.”
“하늘의 제왕이 왜 사냥을 못 해?”
“양쪽 날개를 다쳐서 어깻죽지가 찢겼지. 기사가 먹이를 잡아줬지만 놈은 거부했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어린 마음에 왜가리랑 공중전을 하라고 졸랐었지. 아무튼 어제 나는……. 이젠하르트를 보자마자 그 매가 떠올랐어. 이젠하르트가 기사라서 그런지도 몰라. 그의 무공이나 명성으로만 따지자면 여느 왕처럼 흰바다매도 능히 거느릴 만하니까.”
“나도 기회만 닿으면 흰바다매를 몰래 기를 거야.”
이터가 신이 나서 껴들었다.
“그걸 여자들 팔목에 얹어주면 깜빡 넘어가거든. 특히 거위를 기르는 과부들이 홀딱 넘어간다지. 그 여자들은 거위를 팔목에 얹고 다니거든. 그럼 거위 놈이 거기다 알을 낳지.”
배를 잡고 웃어대는 카이렛과 이터를 뒤로 하고 로트는 방안을 거닐었다.
그는 창턱에 앉은 로에란그린의 옆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격자로 된 창 너머의 바깥은 새카만 밤하늘의 별빛 외엔 불빛 한 점 없이 캄캄했다. 손에 잡힐 듯한 어둠은 창을 열면 그대로 밀려 들어와서 등불마저 삼킬 듯했다.
“자네들한테 어젠 큰 신세를 졌어. 고마워.”
로트는 세 귀공자를 차례로 돌아봤다.
“자네들이 아니었다면 난 여기 못 있겠지.”
“그렇지. 밤이슬과 흙먼지에 쩔어서 이번에도 황야를 헤매고 있겠지.”
“아니면 탑에 갇혀서 귀여운 탐파니스의 노리개가 됐을 거야.”
카이렛과 이터가 놀림에도 로트는 진심으로 사례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한밤중에 황야를 헤매듯 혼돈의 늪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어. 몹시 혼란스럽고 괴로웠지. 그런데 이제는 맑은 샘물 바닥을 들여다보듯 머리가 맑아졌어. 눈물과 불행이 나의 옛 친구였다면, 이제부턴 기쁨과 행운이 나의 친구야. 여보게들, 내가 자네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만큼 자네들도 나를 사랑한다면, 암흑의 동굴에서 벗어난 나를 축복해줘. 난 오늘 비로소 수사슴이 건넨 예언의 참뜻을 깨달았어.”
카이렛은 무슨 말이 나올지 빤하다며 불을 토했다.
로에란그린이 카이렛을 붙잡고 있는 동안 로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오늘 나는 종일 이젠하르트를 생각했어. 왜 그가 어린 시절 내 꿈에 나타났을까. 어째서 이젠하르트는 예고도 없이 귀향했을까. 우린 왜 같은 하늘 아래 살게 됐을까. 마침내 그 의문이 풀렸는데 이젠하르트가 내 운명의 상대이기 때문이었어. 수사슴은 내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어.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난 또다시 애욕에 빠져 이루지 못할 욕망에 괴로워해야 했나.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곰곰이 되새겨보다가 해답을 찾았어.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화해의 특사! 바로 이거야. 이게 나의 숙명이었어. 주님은 그래서 날 살려주신 거야. 내게 우리 가문의 죄를 대속할 기회를 주신 거지. 여보게들, 나를 축복해줘. 나는 이젠하르트랑 화해할 거야. 이제 우리 두 가문은 대대손손으로 이어진 원한과 반목을 떨쳐내고 우리 둘은 신의와 우애를 지닌 형제가 되는 거지!”
말을 마친 로트는 제일 먼저 로에란그린을 돌아봤다.
그는 로트의 바람대로 온화하게 말했다.
“자네의 앞날에 축복을 빌게. 하지만 이젠하르트랑 화해하겠다는 자네의 결심은 재고 해야할 것 같군. 불행히도 이젠하르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냐. 관용이나 타협이라고는 모르는 무자비한 적이야.”
“아냐. 이젠하르트는 어제 위기에 처한 카이렛과 나를 도와줬어.”
“그땐 우리가 누구였는지 몰랐으니까.”
카이렛이 껴들었다.
“자네의 정체를 알자마자 코앞에 무시무시한 칼을 들이댔지. 그런 놈한테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화해를 간청하겠다고? 어제 놈의 눈빛을 못 봤어? 놈은 냉혈한에 복수심에 불타는 숲의 파괴자야.”
“바질리스쿠스같은 그 눈빛은 나도 봤지.”
이터도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이젠하르트는 자네를 잡아먹을지도 몰라. 식인종이거든. 아프리카에서는 패배한 전사를 잡아먹었대.”
“맞아. 놈은 기근이 덮친 마을에서 어린애를 네 토막 내서 구워먹었대. 어미가 실신하여 죽자 그 여자도 솥에 넣고 삶아서 흐물흐물한 가죽과 살이 뼈에서 떨어질 때까지 끓여 먹었다더군.”
이터와 카이렛은 치를 떨며 하루 밤새 도시에 퍼진 소문을 소개했다. 출처는 아름다운 콘드비라무어스와 이니베 무리였다. 무도회에서 폭력을 행사한 주인공이 명예의 상징이었던 만큼, 그 호사가들은 영웅의 불명예스러운 추락과 일탈 운운하며 소문을 신속히 퍼트렸다.
“그래. 이젠하르트는 식인종이며 도적기사고 바질리스쿠스의 현신이야.”
로트가 침묵 끝에 말했다.
“그리고 소문대로라면 나는 공창의 악독한 포주이며 어디에 씨를 뿌렸는지도 모르는 바람둥이 간통자에 방울을 흔들며 돌아다니는 나병 환자의 우두머리이며 밤에는 그리스도인이 몰살되기를 기도하는 이교도 마녀의 자식이지.”
침묵이 이어졌다. 로에란그린이 마음을 달랠 때 맡는 아니스와 카룸 열매의 향이 조용한 방안에 떠돌았다.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카이렛이 말문을 열었다.
“뭐, 우리가 소문을 다 믿는다는 건 아냐.”
“자네들이 뭘 염려하는지 나도 잘 알아.”
로트는 세 귀공자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내 결심은 확고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삶의 목표를 갖게 됐어. 애욕에 빠져 허송세월하던 내가 죽기 전에 성취하고 싶은 꿈이 생긴 거야.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난 이유지. 이젠하르트가 내 화해의 청을 거절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노력할 거야.”
“그럼 힐데가르트는?”
카이렛이 캐물었다.
“이젠하르트는 누이 때문에 결국 자네를 죽이고 말 거야. 그 여자는 수녀원으로 쫓겨나겠지.”
“아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
“왜? 자넨 힐데가르트를 포기한다는 거야?”
“사랑에 관해서라면 난 이제껏 눈물로 채운 고배만 마셔왔어. 농밀한 입맞춤과 격렬한 포옹도 사랑이라 불릴 수 있다면 난 수 없이 사랑을 해왔지. 하지만 육체와 영혼이 순결한 사랑은 해본 적이 없어. 황야에서 만난 적기사도 눈먼 큐피드의 장난에 놀아나는 내 어리석음을 탓했어. 나는 이제부터는 음탕한 정욕을 버리고 힐데가르트를 마음속으로만 동경하며 사랑할 거야. 그럼 이젠하르트도 그녀와 나 사이의 오해를 풀겠지.”
로트의 결의가 너무나도 확고해서 세 귀공자가 마지못해 지지하자 로트는 감격했다.
“고마워, 다들. 자네들이 날 믿고 축복해주리라고 믿었어. 아, 힘이 솟는다! 이젠하르트도 알고 보면 상냥한 친구야. 요괴나 냉혈한은 더더욱 아니지. 우린 즐거운 마음으로 정겨운 대화를 나눴어. 맥주도 한 잔씩 했지. 하하. 자, 그럼 우리 목욕탕에 가서 축배를 들까?”
“잠깐! 이젠하르트랑 맥주를 마셨다니? 언제? 어디서?”
펄쩍 뛰어오른 카이렛은 로트의 코에 얼굴을 들이대고 물었다.
“설마 숲에서 만났어? 힐데가르트인 줄 알고 쫓아갔었다며?”
로트는 수줍어하며 그렇다고 했다.
이터는 경악했다.
“헉. 그럼 자네랑 힐데가르트가 모르는 사이라고 한 내 말이 거짓말인 걸 이젠하르트가 아는 거잖아?”
“그러게. 이터, 자넨 이제 죽은 목숨이군.”
“염병! 난 창에 찔려서 죽기 싫어! 내 꿈은 복상사라고!”
로에란그린이 애도를 표하자 이터는 로트를 덮쳐서 너 죽고 나 살자고 부르짖었다. 무시무시한 숲의 파괴자가 저를 노리고 있으니 로트의 시체를 끌고 가서 벨데케 네 뒷마당에 던지고 저는 살아야겠다고 고함쳤다.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진 뒤 세 귀공자가 돌아간 후, 로트는 밤새 붙들고 있던 편지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심했다.
잉크가 범벅되어 드문드문 지워진 초안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고귀한 기사여, 어젯밤에 나는 너를 꿈속에서-……. 찬란한 황금빛 머리칼과 그윽한 음성……. 내 마음은 몹시 설레고……. 아름다운 기사여, 나는 잠 못 이루는 이 밤에 너를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