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오라버니는 그분을 죽이고 말 거야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 벨데케 일가는 2층 가족실에 모였다.
가족실에는 하인마저 출입할 수 없었고 닫힌 문은 날이 저물도록 열릴 기미가 없었다.
벨데케 부인은 딱딱한 등받이 의자에 앉았다. 이젠하르트와 탐파니스는 곁에 서 있었다.
벨데케는 아내의 눈총을 피하려는 듯이 황망한 걸음으로 오갔다. 그의 거동을 주시하는 부인의 커다란 눈은 제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메추리를 노리듯 집요했다.
“믿을 수 없군. 그 젊은이가 포겔바이데였다니.”
벨데케가 탄식했다.
“나는 그 젊은이를 도중에 만났지. 자빠진 내게 손을 내밀고 친절을 베풀었어. 나는 그의 선량한 마음씨를 칭찬했고 우리는 뜨거운 포옹을 나눴는데! 허어…….”
“숙부님!”
탐파니스가 분통을 터트렸다.
“그런 추잡한 색마한테 친절이니 포옹이니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 녀석은 더러운 원수라고요.”
“허, 믿을 수가 없어. 꿈이라도 꾸는 것 같구나.”
“숙부님!”
탐파니스는 가족실 한가운데로 달려나갔다.
“더는 이러쿵저러쿵할 이유가 없어요. 그 녀석을 즉시 처단해야 합니다! 야비한 음모를 품고서 잠입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해요. 감히 우리의 면전에서 힐데가르트를 납치해서, 우리 가문을 치욕에 빠뜨리고 풍비박산을 낼 음모를 꾸몄으니까요.”
“하지만 그 애들은 서로 만난 적도 없다는데?”
“아휴, 숙부님! 그건 이터 자식의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둘은 콘드비라무어스, 그 야만스럽고 교활한 여자의 규방에서 틈만 나면 밀회를 했다고요.”
“허어, 도대체 뭐가 뭔지…….”
“게다가 놈은 이젠하르트까지 노렸어요!”
“헉!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어요. 이젠하르트가 놈을 알아채고 가면을 벗으라고 하자 갑자기 덤벼들어 때려눕히고 달아나려고 했다고요. 야비하게 기습하려 했던 거죠. 하지만 그때 전 그 옆에 딱 버티고 있었죠. 그래서 놈은 제가 두려워서 꼼짝 못 한 거예요! 이래도 그냥 두실 거예요? 놈이 제2의 음모를 품었는데도?”
“제2의 음모! 그건 또 뭐냐?”
“아휴, 답답하시긴! 놈은 이젠하르트를 암살하려 했던 거예요!”
“허헉!” 하며 벨데케는 숨을 꼴깍꼴깍했다. 굳게 입을 다문 아들을 향해 덜덜덜 떨리는 손을 쳐들며 물었다.
“아, 아들아. 그게 사실이냐? 포겔바이데가 너를 암살하려 했다니?”
성공했다면 가문의 멸망과 다름없는 이 무서운 음모가 제기되자 벨데케는 망연자실했다. 연회의 성공과 그 보답으로써 자기 영예라는 달콤한 과실을 맛보려던 터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일가족의 시선은 이젠하르트에게 꽂혔다.
이제껏 침묵을 고수해온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실입니다, 아버님. 저도 어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제가 가면을 벗으라고 놈에게 검을 겨누자, 놈의 눈에 이글이글 타오르던 그 이상한 불꽃을! 그 불꽃은 이 지상의 어떤 영웅도 겪지 못했을, 소름 끼치는 증오와 원한의 불꽃이었습니다. 살기가 가득한.”
이젠하르트의 폭로가 이어졌다. 그는 자신이 원수를 숲에서 먼저 만났다고 했다. 자기들은 어둠 속에서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아 어깨를 맞대고 담소를 나눴다고 했다.
그러자 부인이 째지는 비명을 질렀다. 모친을 진정하게 한 그는 권능한 주님의 가호로, 즉 새카만 어둠과 가면 덕에 암살자가 저를 몰라봤으므로 천만 다행히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충격적인 소식에 벨데케는 하늘이 무너진 듯 망연자실했다. 그는 망자도 깨울 법한 지독한 향의 약초를 씹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 청년이 숲에서 뭘 한 게냐?”
“허깨비를 보고선 힐데가르트를 쫓고 있더군요.”
“허깨비라니?”
“악마에 홀린 겁니다. 놈의 얼굴은 족쇄를 끊고 감옥을 탈출한 광인의 얼굴이었어요. 성채의 지하 감옥에서 굶겨 죽여 마땅한 광인 말입니다.”
“허어, 비극이다! 그토록 멀쩡한 청년이 뭐에 홀렸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이젠하르트는 치를 떨었다.
“전율이 온몸을 관통합니다. 비수를 품은 교활한 원수, 그 사악한 원수의 칼을 놈의 피로써 물들이는 대신에 친절과 호의로 주인의 봉사를 했다니…….”
“허억, 비수!”
“나도 봤답니다!”
벨데케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 녀석은 품 안에 비수를 품고 있더군요. 그건 저 극악무도한 이교도가 우리 그리스도 전사들의 몸뚱이를 두 쪽으로 갈랐던 그 무시무시한 검이었어요. 그걸로 저 선량하고 가엾은 애를, 세상에, 쥐도 새도 모르게 두 쪽으로 쪼개려고 했어요. 악랄하기도 하지!”
벨데케는 의자에 육중한 몸을 내던지고 탄식했다.
“무서운 일이구나. 흉조야! 우리 가문의 영예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런 흉악한 음모가 장미꽃밭 아래의 독사처럼 도사리고 있었다니! 나는,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녀석은 그토록 고뇌에 차서 고개를 숙인 채 끌려나갔지 않았느냐.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용서를 갈구하듯이 애처롭게 나를 보며…….”
“어휴, 숙부님!”
탐파니스는 벨데케한테 달려가서 귀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숙부님께서도 벌써 놈한테 홀리셨어요? 그 이교도의 악마가 어리석은 힐데가르트처럼 숙부님께도 흑마술을 씌웠군요. 그놈은 참회는커녕 파렴치하게 우리 가문에 저주를 퍼붓고 침을 뱉고 도망쳤어요.”
“주님! 이제 그럼 어떡해야 좋단 말인가요?”
“해치워야죠!”
탐파니스는 연거푸 소리쳤다.
“언제까지 집안에 처박혀 고민만 하실 거예요? 녀석은 어제 음모가 들통나서 공개 망신을 당했으니 호시탐탐 설욕의 기회를 노릴 거라고요. 절대로 그냥 둬선 안 돼요.”
“당장 해치우세요.”
벨데케 부인도 서슬퍼렇게 껴들었다.
“하지만 귀부인…….”
벨데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런단 말이오? 영주님께선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하시잖소. 귀부인 그리고 얘들아, 너희는 벌써 영주님의 경고를 잊은 건 아니겠지? 만일 두 가문 사이에 또 칼부림이 나서 한쪽이라도 피를 본다면……. 우리의 목을 자르겠다고 하셨다. 광장에 우리의 시체를 매달고…….”
“당신 목이지요.”
벨데케 부인이 냉큼 말을 가로챘다.
“말씀은 정확히 하셔야지 그런 중대한 사항을 얼렁뚱땅 싸잡아 말하면 됩니까? 영주님께선 당신 목을 자르겠다고 하셨어요. 내가 그때 똑똑히 들었어요. 당신은 비대하고 목이 두꺼우니 형리도 제 밥값을 벌려면 튼튼한 도끼로 일곱 번은 내리쳐야 할 겁니다. 당신도 기억나시지요? 도끼로 한 번 내리쳐서 머리가 반이 잘렸는데도 죽지 않아서 형리한테 제대로 내려치라고 화를 내던 죄수말예요. 당신 목을 자른 후엔 흰 담비 모피를 입힌 시체를 광장에 반년쯤 매달아 놓을 겁니다. 까마귀가 눈알을 전부 파먹고 피골이 바짝 마른 후에는 저 시문 밖에서 뒹구는 도둑놈들 시체 곁에 던져놓겠다고 하셨지요. 우리 가문을 대표해서 당신을 처벌하고……. 어머, 왜 그렇게 저를 보시죠?”
“여, 여보, 귀부인. 설마 당신은 그럼 나, 나를…….”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벨데케 부인은 눈을 빠르게 깜짝대며 물었다.
“당신이 참수형을 당하면 나보고 어쩌겠냐고 묻는 건가요? 당신도 참 답답하시지. 그럼 저보고 영주님의 뜻을 거스르라는 건가요? 세상에! 제 처자식을 반역자로 선동하다니.”
얼굴이 노래진 벨데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탐파니스는 정신 놓을 때가 아니라고 그의 팔을 마구 흔들어댔다.
“빨리 결정을 내리세요. 이러실 시간이 없어요. 포겔바이데 놈은 지금도 음모를 꾸미고 있어요!”
벨데케 부인은 하인을 시켜 남편의 입안에 각성용 약초를 쑤셔 넣게 했다.
벨데케는 잠깐 정신을 차렸다.
탐파니스가 부리나케 외쳤다.
“숙부님, 이터 그놈도 당장 처치해야 해요. 그놈은 아주 교활한 모사가예요. 그놈이야말로 영주님과 그 야만적인 여자를 등에 업고서 원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어요. 힐데가르트가 그 여자네 집에서 라틴어를 배우겠다고 고집부린 것도 그놈의 추잡한 잔꾀였다고요.”
“탐파니스, 얘야, 큰일 날 소리 하는구나. 그 젊은이는 영주님의 조카다. 독실한 성직자이자 존경받는 법학생인데 설마 그런 짓을 했을라고.”
“존경받는 법학생이라고요? 그 교활한 건달패가요? 아하하!”
탐파니스는 바닥에 픽, 쓰러져 웃다가 고개를 탁 쳐들었다.
“숙부님은 그놈한테도 속으신 거예요. 그 녀석이 볼로냐 대학의 학생대표로 뽑혔을 때 제일 먼저 뭘 했다는 줄 아세요? 자기들 학생 조합 임원에게 포도주를 열병씩 바쳐서 존경과 예를 표하지 않으면, 학생들을 전부 데리고 파리로 가버리겠다고 상인과 시민을 위협했대요. 프란체스코 수도승인 교수한텐 대머리에다 새 둥지를 틀어야겠다고 놀리며 감금하고, 강의실인 교회로 창녀를 불러서 파티를 했대요! 그놈은 그런 신성 모독자에 안하무인인 무법자예요.”
“그럴 리가…….”
“맞다니까요! 놈은 아주 악질이에요. 이터 그 바람둥이 자식이……. 그 녀석 때문에 포겔바이데 놈이 더 타락해서……. 에잇! 에잇!”
탐파니스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이터를 저주했다. 파리 대학 재학 시절에 라틴 구에서 방탕하고 무질서한 사생활로 역시 명성을 날렸다는 로에란그린도 악마의 자식으로서 지탄받았다. 로트와 같은 수도원에서 지내다 로트가 부친의 호출로 귀향하게 되자 수도원을 탈출해서 함께 귀향한 카이렛도 온갖 저주를 받았다.
탐파니스는 그중에서 이터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했다. 덕분에 이터는 이날부터 로트에 버금가는 벨데케 가의 공적 2호로 급부상했다.
“그럼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이냐.”
모가지가 간당간당하는 벨데케는 사지를 축 늘어뜨렸다. 그는 단 하룻밤 새에 폭삭 늙어서 말라빠진 가죽자루처럼 보였다.
“아버님.”
구하자 답을 내리는 주님의 음성처럼 귓전에 울리는 상냥한 아들의 목소리에 벨데케는 구세주를 대하듯 팔을 내밀었다.
“아들아! 그래, 네가 이 애비를 제발 도와다오. 네겐 우리 가문에 닥친 이 무서운 주님의 시험을 통과할 묘책이 있겠지?”
그렇다며 이젠하르트는 부친의 발아래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아버님의 근심은 이제 저의 것이니 마음 놓으십시오. 날이 밝는 대로 제가 전부 해결하겠습니다.”
벨데케는 아들의 든든한 호언장담에 감격해서 물었다.
“주님의 마지막 시험을 슬기롭게 타개할 묘책이 뭐냐? 설마 너도 그 애를 암살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버님, 저는 그리스도의 기사입니다. 놈을 저와 똑같이 취급하시다니요.”
“그렇다면?”
“전 내일 날이 밝는대로 놈에게 결투를 청해서 단죄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정한 음욕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곧 알게 될 겁니다. 영주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놈을 단죄하고 나서 원수의 야비한 도발이 부득이 결투를 야기했고, 따라서 놈은 정당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말입니다.”
“아들아! 하지만 영주님께선…….”
“아버님, 아버님께선 부디 아무런 염려도 하지 마십시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아버님께선 그저 내일 아침에 원수의 시체를-…….”
“안 된다!”
별안간 벨데케는 창에 찔린 사자처럼 포효했다.
“결투는 절대 안 돼! 난 허락할 수 없어.”
“아버님.”
“절대 안 된다! 아들아, 명심하거라. 난 이 집안의 가장이다. 가장으로서 가문의 존속에 책임이 있으며 너는 내 뒤를 이어야 한다. 만에 하나 네게 불상사가 생기면 이 집안은 어쩐단 말이냐. 인내하고 때를 기다려라. 공정하신 주님께서 우리 대신 놈을 벌하실 것이다. 하르트만 폰 데어 포겔바이데! 그 원수의 모가지를 직접 잘라내주실 거야.”
“그럼 숙부님께선 힐데가르트가 납치되는 걸 맥 놓고 보고 계실 거예요?”
탐파니스가 발을 구르며 끼어들었다.
“얘긴 끝났다! 너희 젊은이들은 좀 더 신중해야 한다. 피는 피를 부르는 법!”
“어릿광대와 그들의 패거리들!”
“……?”
“은밀한 악의, 가시를 품은 꽃, 맹독을 품은 버섯!”
뜬금없는 비유가 세 남자의 언쟁을 막았다.
벨데케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니, 귀부인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씀이오?”
“난 처음부터 그놈들을 알아챘습니다.”
부인이 단호히 말했다.
“그놈들? 그건 또 누구요, 부인?”
“어릿광대는 손님들의 시선을 교란했고 천박한 상인 놈들은 술을 처먹고 난동을 피웠지요. 그건 모두 사전에 계획된 겁니다. 흥청망청 소란을 떠는 그들 뒤에서, 난 놈들을 선동하며 배후에서 조종하는 놈을 보았습니다.”
“그럼 포겔바이데의 아들놈 말고도 또 다른 첩자가 있었다는 거요?”
벨데케가 놀라서 외쳤다.
부인은 턱을 파르르 떨며 그렇다고 말했다.
“난 내 보석 같은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검은 튜닉의 사내가 손님들 사이로 후드를 푹 눌러쓰고 돌아다니는 꼴을. 놈은 교묘히 검은 튜닉으로 존재를 감추고, 상인과 술주정뱅이들을 부추겨 난동을 일으켰어요. 우리의 주의를 교란해서 힐데가르트를 납치하려고 했던 겁니다. 연회 첫날부터, 치밀하고 조직적인 계획을 세우고.”
“허억, 첫날부터!”
“그래요. 첫날부터였어요. 내 눈으로 그날 그 사내를 똑똑히 봤으니까요.”
“숙부님, 제 말이 맞잖아요. 그놈은 틀림없이 포겔바이데의 수하예요.”
“죽입시다.”
으스스한 한 마디에 벨데케는 소름이 쭉 돋아 아내를 쳐다봤다.
부인은 얇은 입술을 비틀었다.
“흥. 당신 얼굴은 꽤 볼만하군요. 새매의 발톱에 찢긴 왜가리도 그만큼 하얗진 않겠죠. 흥, 관두세요. 당신 목이 잘릴 걱정일랑 마세요. 내 소중한 아들 이젠하르트도 공연히 더러운 원수의 피로 숭고한 제 검을 오염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나한테 맡기세요. 묘안이 있어요. 난 주님의 손을 빌리겠어요. 베르나르 신부가 우릴 도울 겁니다. 그 찢어 죽일 원수를 파멸시키겠어요. 그럼 만사는 신속히, 주님의 뜻대로 처리될 겁니다.”
“옳은 말씀이시오, 부인.”
벨데케는 박수를 쳤다.
“내 생각도 그렇소, 부인. 기도와 예배, 우리는 그것으로 신성한 복수를 행합시다.”
“흥, 그까짓 기도 따위.”
벨데케 부인은 남편의 허연 낯은 아랑곳없이 향유를 적신 손수건을 코밑에 갖다댔다. 그런 다음에 향을 품은 나비가 맹독을 쏘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독살.”
“……!”
“독살입니다. 단 한 방울만 입술에 닿아도 즉사할 독약을 구하겠어요. 녀석의 보드라운 낯짝은 뻣뻣한 가죽으로, 쇳물 같은 심장은 차디찬 돌덩이로, 초록색 눈깔은 썩은 생선 눈깔이 되도록 독살하겠어요. 서서히, 서서히, 고통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녀석의 붉고 싱싱한 입술로 맹독을 흘려 넣어서, 사지를 꼬인 밧줄처럼 비틀고,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입에는 새하얀 거품을 물게끔 처참히 놈을 죽이겠어요.”
“부, 부인!”
“흥, 누가 당신 목을 자르자고 하던가요?”
부인은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가장의 뱃심이 그 정도도 못 되다니!”
벨데케는 망연히 아들과 조카를 돌아봤다.
부인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서 향수를 듬뿍 뿌린 손등에 나머지 향수를 쏟아붓고는 과자를 한 개 집어 들었다.
“이제 얘긴 끝났어요. 참, 당신, 우리 ‘귀여운 비둘기’에게 옷 한 벌을 만들어줘야겠어요.”
“난데없이 그 애 옷 얘기는 왜 하시오?”
“이 양반이 참! 미끼 없이 어떤 물고기가 잡힌 답니까?”
벨데케 부인이 혀를 찼다.
“독살을 하려면 힐데가르트 그 멍청한 계집을 내보내서 놈을 이 집으로 유인해야죠. 아무도 모르게! 쥐가 뒤끓는 우리 집 지하실에 가둬놓고 죽입시다. 흠, 이 과자는 참 맛이 좋군. 세상에! 벌써 오밤중이 되었네. 아이, 피곤해라.”
피곤한 부인은 튼튼한 이빨로 과자를 와직 깨물었다.
탐파니스는 이때 이상야릇한 얼굴을 하고서 입을 꼭 다물었다.
이젠하르트도 모친을 뚫어지게 보고만 있었다.
벨데케도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아내가 과자를 맛있게 먹어치울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날 밤 이젠하르트는 하녀를 3층에 보냈다.
하녀는 곧 되돌아와서 힐데가르트가 자고 있다고 전했다.
이젠하르트가 물었다.
“그 애는 편안히 잘 자고 있나?”
“네, 나리. 아가씨께선 전에 없이 편안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럼 가서 깨워.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잠시 후 그는 누이를 방문했다.
힐데가르트는 함께 자는 몸종과 가정교사를 내보내고 혼자서 그를 맞이했다. 이젠하르트가 자리를 잡자 아끼는 과자 단지를 꺼내왔다.
이젠하르트는 누이가 권하는 대로 묵묵히 과자를 먹었다.
힐데가르트는 눈을 내리깔고 맞은편에 앉아서 뜨개질을 시작했다.
“힐데가르트.”
“네?”
힐데가르트는 반짝이는 눈을 조심스럽게 쳐들었다.
“네가 품위 있고 아름다운 귀부인이 되어 이토록 정답게 내 시중을 들어주니 어려서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뒷마당에서 질질 끌고 다닌 소녀 같지가 않구나.”
힐데가르트는 골을 내며 볼을 물들였다. 이윽고 살짝 눈을 들어 오라버니의 미소를 훔쳐보더니 얼굴을 소매에 파묻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하르트는 함께 웃었다.
“힐데가르트, 넌 꼭 그때처럼 장난꾸러기 소년 같구나.”
“다들 그러더군요.”
“내 남동생이면 그것도 재미났겠어.”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힐데가르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남자였으면 어땠을까 하고요. 그럼 오라버니처럼 기사가 될 수 있잖아요.”
“그렇지. 나와 함께 모험도 떠나고.”
이젠하르트의 응수에 그녀는 무척 기뻤다.
“전 어쩌면 오라버니보다 더 훌륭한 기사가 됐을지도 몰라요. 농담처럼 들리나요? 저도 무척 힘이 센 걸요. 자꾸 웃지 마세요. 아, 오라버니는 얼마나 좋아요? 저 바깥세상에서 진기한 구경도 마음껏 하고 모험을 즐기고.”
힐데가르트는 바깥세상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이젠하르트는 맥주 양조장에서 홉 대신에 홉이라고 불린 돼지를 술통에 넣고 삶아버린 떠돌이 직공 얘기를 해줬다. 둘은 마음껏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두 남매는 처음의 서먹함을 떨치고 한 이불에서 장난을 쳐대는 아이들처럼 친해졌다.
‘내가 오해했구나.’
도중에 그녀는 뉘우쳤다.
‘오라버니는 옛날처럼 다정하고 상냥하신 분이야. 아버님은 오라버니께서 변한 것 같다고 하시지만 이렇게 다정하신걸. 오늘도 이 늦은 밤에 나를 위로하러 와주셨어. 오늘 아침엔 내게 마귀나 액운을 쫓는 보석 브로치도 보내주셨고. 아, 상냥한 오라버니가 내 편이 돼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오라버니보다 든든한 아군이 이 세상에 없을 텐데.’
“힐데가르트.”
“네? 오라버니?”
무심코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아름다운 커다란 눈에 담뿍 애정을 담고서 그를 바라봤다.
이젠하르트도 상냥하게 물었다.
“오늘 많이 울었니?”
“아, 제가요? 아뇨.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눈가가 아직도 빨간걸?”
“그건 자다 깨서 그런 거예요. 오라버니께서 절 깨우셨잖아요.”
귀엽게 톡 쏘아붙인 그녀는 뜨개질을 계속했다.
이젠하르트는 비단 이불이 한 가닥 주름도 없이 곱게 깔린 침대와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서 말했다.
“힐데가르트, 난 너의 적이 아니다.”
“오라버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놀란 힐데가르트는 뜨개질을 멈췄다.
“저를 나무라시는 건가요? 제가 뭔가를 잘못했나요?”
“귀여운 힐데가르트, 너무 놀라지는 말아라. 넌 꼭 새매한테 붙들린 종달새처럼 떠는구나.”
“오라버니, 제가 무례했다면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렇지만 제 심장은 오라버니의 것만큼 튼튼하지는 않아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빨리 설명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쓰러질 거예요.”
“그럼, 바로 묻겠다. 넌 그를 사랑하니?”
힐데가르트는 어린애처럼 입술을 반쯤 벌리고 눈을 크게 떴다. 핏기없는 두 뺨은 대리석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오라버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너는 알 거다.”
“자꾸 무슨 말씀이세요? 네?”
“아닌가? 아니라면 다행이지. 그럼 푹 자거라.”
“오라버니?……. 아, 오라버니!”
힐데가르트는 그를 따라 일어서려다 고개를 확, 숙이고 앉았다.
일어섰던 이젠하르트도 자리에 도로 앉았다. 다시 편안히 자리에 등을 기대자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서 물었다.
“오라버니께선 이 늦은 밤에 왜 저를 찾아오셨어요?”
“말했잖니. 네 잠자리가 편안한지 보러왔다고.”
“제가 안 자고 있었다는 것도 알고 계셨죠?”
“안 자고 있었니?”
“…….”
“그럼 하녀가 거짓말을 했구나.”
“안 자고 있었어요. 저를 나무라실 거라면 마음대로 하세요.”
“귀여운 힐데가르트, 왜 화를 내고 그러니?”
“싫어요! 싫다고요! 마음대로 하세요! 저를 그 이상한 백작한테 팔아넘기시려면 마음대로 하시라고요. 저는 그 사람하고 결혼하느니 볼로냐로 도망칠 거예요.”
이젠하르트는 태연히 누이의 팔꿈치 근처에 놓인 과자 단지를 옆으로 밀었다.
“이상한 백작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
“아시면서! 만필요트 백작이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전 그런 사람은 싫어요. 그 사람은 시체 같아요!”
힐데가르트는 뜨개질 꾸러미를 내던지고 궤짝에 쓰러져 흐느꼈다. 과자 단지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팔꿈치를 비켜 추락을 면했다.
이젠하르트는 단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기척을 느끼고서 힐데가르트는 벌떡 일어났다.
“그냥 가시려고요? 그럼 가세요! 얼른!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시고 그냥 가서 저를 백작한테 팔아버려요!”
“내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구나. 내일 다시 오마.”
힐데가르트는 눈을 바짝 치켜들고 그를 노려봤다.
이젠하르트는 자리를 옮겨서 그녀 곁의 궤짝에 앉았다.
“귀여운 힐데가르트, 화내지 마. 네 어여쁜 얼굴이 망가지잖아.”
“…….”
“그렇게 나를 노려보면 내가 무서워서 말을 할 수 있겠니?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너를 나무라려는 게 아냐. 너를 위해서지.”
“저를 위해서라고요?”
“넌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지?”
힐데가르트는 집게로 꽉 꼬집힌 듯 미간을 찡그렸다. 이윽고 앗! 하며 자기 손가락을 깨물었다.
“저런, 조심하지 않고.”
이젠하르트는 뜨개바늘에 찔린 누이의 손가락을 봐줬다.
힐데가르트는 손을 재빨리 잡아 빼고 말했다.
“방금 제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냐고 물으셨나요? 그게 누군데요? 이 집 어디에 제가 사랑할 만한 남자가 있던가요? 설마 탐파니스 오라버니 말씀인가요? 저더러 너무 멍청하고 못생겼다고 싫어하는데 저라고 그 사람이 좋겠어요? 아니라면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혹시 그리스도 말씀이신가요? 그렇담 물론이에요. 전 그분과 굉장한 열애에 빠졌답니다. 그분 없이는 하루도 죽고 못 살아요. 이제 됐나요?”
난데없이 열변을 토한 힐데가르트는 말을 마치자 손에 쥔 뜨개질 바늘을 창처럼 휘둘렀다. 불만과 원망, 불안과 우려가 편물의 한 고리 고리마다 누벼져 벽걸이가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는 요새의 성벽을 짜 올리는 것 같았다.
이젠하르트는 그런 누이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올렸다.
“귀여운 내 누이, 힐데가르트, 내게 화내지 말아다오. 너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마음이 괴롭구나.”
“제가 감히 어떻게 오라버니께 화를 내요?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니?”
“…….”
“힐데가르트?”
“싫어요!”
“엉뚱한 대답을 하는구나.”
“엉뚱한 말씀을 하시니까요.”
“그럼 바꿔 묻겠다. 그놈도 너를 정말로 사랑할까?”
“네? 그놈이라니 누구인데요?”
힐데가르트는 커다란 눈을 깜빡대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를 사랑한다는 남자가 있나요? 오라버니께선 오늘 자꾸만 이상한 말씀만 하시네요. 아, 피곤해. 벌써 날이 밝았나. 감옥처럼 창문을 꼭꼭 잠가놨으니 전혀 알 수가 없네.”
힐데가르트가 딴청을 부리자 이젠하르트는 미소를 머금었다.
“사랑하는 힐데가르트, 앞으로 너를 아내로서 정당하게 얻게 될 행운아는 그놈이 아냐. 너의 남편은 네 순결한 영혼과 육신을 제 목숨을 바쳐 보호해줄 고귀하고 명예로운 인물이어야 해. 이 세상에서 사내라는 사내가 전부 죽어버려도, 그런 방탕한 난봉꾼에게는 절대로 너를 보낼 수 없어. 그런 인간들은 저 지하세계에서 바닷물을 들이부어도 절대 꺼지지 않을 만큼 뜨거운 불과 참을 수 없는 추위로 육신의 안팎이 타고 얼어붙으며 죽지 않는 구더기랑 가공할 악취 속에서 사지를 결박당한 채, 부정한 입맞춤, 방탕, 간통 따위의 죄값으로써 영벌을 받을 거야.”
“방탕한 난봉꾼이 아녜요!”
힐데가르트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그분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그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요!”
홧김에 ‘그’라는 존재를 인정해버린 힐데가르트는 겁에 질려 고개를 숙였다. 뜨개질바늘을 움켜쥔 창백한 손등에는 파란 핏줄이 불거지고 갸름한 턱은 이가 맞부딪칠 만큼 덜덜 떨렸다.
“그럼 어떤 남자니?”
이젠하르트는 부러 다정하게 물었다.
“네가 직접 말해보렴. 너의 기사는 어떤 인물이니? 우리 집안은 가난에 찌들었으니 설마 재물을 노리는 인물은 아닐 테고, 한때는 드높았던 가문의 명성도 이제는 한낱 풍상에 시달리는 퇴색한 깃발과 같으니 명예욕을 지닌 인물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다른 어떤 순수한 의도를 품었을까. 혹시 가엾고 순진한 처녀의 순결을 빼앗고 절망의 나락에 빠뜨리고서도 희희낙락할 놈은 아닐지.”
“아, 오라버니는 왜 그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세요?”
힐데가르트는 새파랗게 질려 궤짝에 엎드렸다. 내던진 뜨개질 꾸러미는 그녀의 발치에 뒹굴고 어깨는 비바람에 떠는 꽃잎처럼 흔들렸다.
이젠하르트는 누이를 강제로 일으켜 앉히고 그 눈물을 닦아냈다.
“힐데가르트,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차라리 저를 수녀원에 보내세요.”
“귀여운 힐데가르트. 이제 그놈의 이름을 말해보렴.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구나.”
“…….”
“어서 말해보렴. 네 고통과 슬픔을 내가 깨끗이 씻어주마.”
힐데가르트는 이젠하르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눈물을 닦았다. 나뒹구는 뜨개질 꾸러미도 다시 무릎 위에 끌어당겨 바늘을 놀렸다.
그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자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노엽게 속삭였다.
“오라버니, 죄송하지만 저는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전 오라버니가 미워요. 미워죽겠어요! 전 절대로 말할 수 없어요. 제게 왜 그걸 물으러 오셨어요? 제가 이유를 모를 줄 아시나요? 그래요. 제겐 사랑하는 분이 있답니다. 그분은 저의 이상적인 기사님이에요. 모두의 미움과 오해를 받지만 그분은 선량하고 명랑한 왕자님이세요. 저는 그분을 미치도록 사랑해요! 하지만 오라버니께는 누군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예요. 오라버니께선 그분을 무섭게 쥐어짤 테니까요. 당장 찔러 죽이려고 하겠지요. 제발 무고한 사람을 벌하지 마세요! 그분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그 가엾은 분을 전 제대로 만난 적도 없다고요!”
격정을 토로한 그녀는 공포에 짓눌린 사람이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발작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것처럼, 원망과 적의에 휩싸여 이젠하르트를 노려봤다.
이젠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넌 여전히 당돌하구나. 난 그만 가야겠다. 또 머리채가 잡혀서 뒷마당으로 끌려가기 전에.”
“오라버니!”
“과자를 좀 먹으렴. 기분이 한결 좋아질 거야.”
“전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절 구슬리려고 하지 마세요!”
“나도 먹었는걸.”
“아, 오라버니!”
누이의 절박한 외침에 그는 문가에서 돌아서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자렴. 내가 뭘 어쩐다는 거냐. 누군지도 모르는데 너의 기사를 어떻게 죽일까. 울지 마라, 내 귀여운 종달새. 눈물은 너의 벗이 아냐.”
방문이 닫혔다.
멀어지는 이젠하르트의 발소리는 조종의 그것처럼 불길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힐데가르트는 궤짝에 쓰러져 흐느끼며 소리쳤다.
“아, 오라버니는 그분을 죽이고 말 거야. 반드시 찾아내서 피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고 잔인하게 죽이겠지. 죽어도 다시는 그분을 만나려고 하지 말자. 그날로 그분의 가련한 영혼은 연옥에서 떠돌고 육신은 차디찬 주검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