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저주일까, 축복일까. (11/33)

11.저주일까, 축복일까.

로트와 카이렛은 숲에서 빠져나와 무도회장으로 갔다. 회장은 숲에서 들었던 소음과 환성으로 시끌벅적했다.

둘이 주변을 탐색하는 동안, 아침이면 시문 밖에 있는 목초지로 향하는 양 떼처럼 인파가 몰려들고, 귀를 찌르는 환성이 터졌다.

로트는 카이렛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힐데가르트는 어디 있는데?”

“조금 전에 백작의 천막으로 들어갔어. 일단 천막 근처로 가서 틈을 노리자! 제기랄, 그런데 이게 웬 난리야?”

두 사람은 천막으로 이동했다.

천막으로 향하는 길은 꽉 막혀있었다. 곡예단을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구경꾼인 여자들의 높다랗고 뾰족한 모자와 공작새 가면 깃털 위로 불붙은 링이 솟아올랐다.

구경꾼은 계속 불어났다.

카이렛이 소리쳤다.

“여길 뚫어야겠는데? 옆이 꽉 막혔어.”

“알았어. 내가 먼저 갈게 따라와.”

로트는 앞 사람의 틈으로 파고들었다. 한 명을 제치면 다시 뒤로 떼밀렸다.

그러길 수차례 조금씩 길이 뚫렸다. 새로운 함성이 나면 구경꾼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로트와 카이렛도 풍랑에 쓸리듯 함께 휩쓸렸다.

“이봐, 좀 비켜줘.”

카이렛은 앞서가는 로트의 노란 가발을 쫓아서 발버둥쳤다. 로트가 터낸 길은 자꾸만 끼어드는 구경꾼 때문에 금세 막혀버렸다.

카이렛은 그들을 마구 밀어젖히며 전진했다. 마지막 한 놈을 밀치자 바로 로트의 뒤에 서게 됐다.

“지크프리트!”

카이렛은 로트의 어깨를 쳤다.

“안 되겠어. 이러다 빨간 여우랑 맞부딪치면 서로 코를 맞대고도 꼼짝 못 할 거야. 딴 데로 가자……. 지크프리트?”

카이렛은 로트의 어깨를 꽉 잡고 귀에다 꽥 소릴 질렀다.

“딴 데로 가자니까?”

“엥? 이 녀석이 또?”

돌아본 사내는 카이렛을 알아채고 고함을 질렀다.

“야, 이놈! 난 지크프리트니 뭐니 하는 통나무 대가리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이 고양이 자식, 아까도 나한테 시비를 걸었겠다?”

“빌어먹을! 또 네 녀석이냐, 이 거위 자식아. 지크프리트!”

카이렛의 사나운 욕설은 왁! 하고 터지는 환성에 파묻혔다. 제비 새끼가 악을 쓰는 듯한 째지는 합창이 환호성의 한복판에서 울렸다.

카이렛은 거위 사내를 밀치고 맨 앞으로 뛰어나갔다가 경악해서 발을 멈췄다. 곡예단에 속한 어린이 합창단이 로트를 머리 위에 짊어지고 구경꾼들이 둘러선 원 안을 빙빙 돌았다. 로트는 계속 반항해서 바닥에 내려섰지만 그때마다 구경꾼들이 합세해서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로트가 격렬히 반항하는 꼴을 보며 구경꾼들은 배를 잡고 기뻐 날뛰었다.

“잘한다! 아하하!”

“인간 제물을 고리 속으로 던져라!”

“던져라! 불 고리를 통과하게 해!”

카이렛은 돌진해오는 합창단의 앞을 가로막고 고함쳤다.

“이 꼬마 악귀 녀석들, 당장 내려놓지 못해? 내려놔! 요 쪼그만 것들이……. 으악!”

합창단은 카이렛까지 번쩍 쳐들고 머리 위로 날랐다. 그들을 충동질한 젊은 남자들은 함성을 울리며 폭소했다. 먹다 남은 음식과 싸구려 보석이 그들의 머리 위로 빗발치듯 날아갔다. 왕관을 쓴 원숭이는 그 뒤를 재빨리 쫓으며 모자 안에 상품을 챙겼다.

로트는 오랜 몸싸움 끝에 간신히 합창단을 물리쳤다. 이윽고 카이렛한테 달려가서 팔을 잡아당겼다. 합창단은 카이렛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양측간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갑자기 합창단이 동시에 손을 탁, 놨다. 로트는 카이렛과 함께 벌렁 나자빠졌다. 남자들은 그 꼴을 보고 숨을 헐떡대며 폭소했다.

두 뺨이 새빨개진 카이렛은 그들 중에서 가장 큰 소리로 웃는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이 거위 자식, 너구나! 네가 우리를 희롱하라고 저 어린애들을 부추겼지?”

“재미로 그런 건데 뭘 야단이야?”

카이렛은 거위 사내한테 덤볐다. 로트가 술꾼들이 장난한 거니 그냥 가자고 뜯어말렸다.

카이렛은 분을 삼키며 발길을 돌렸다.

“야, 표독스런 새끼 고양이.”

이때 거위 사내가 뒤에서 껄껄껄 웃어댔다.

“앙칼지게 대드는 걸 보니 네 놈 상판은 분명 고양이 낯짝일 거야. 가면 좀 벗어 보실까? 그래봤자 고양이 낯-…… 컥!”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들자 거위 사내는 코피를 뿜고 쓰러졌다. 구경꾼들은 싸움이 났다고 동시에 고함을 쳐댔다.

거위 사내의 코를 후려갈긴 로트는 고개를 홱, 돌려서 그들을 노려봤다. 와와, 하며 구경꾼들이 뒤로 물러섰다. 로트는 토끼풀 위에 쭉 드러누운 사내의 머리맡에서 말했다.

“너의 무례는 도를 넘었어. 카이렛에게 사과해.”

“크으……. 이 새끼, 넌 뭐야…….”

“그게 사과냐? 그럼 맛을 더 보여 주지.”

“야! 이게 사람을 먼저 치……. 커억!”

거위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은 로트가 두 번째로 주먹을 치켜들자 카이렛이 뜯어말렸다. 그는 로트를 뜯어내고 거위 사내에겐 이번만 봐준다며 침을 탁 뱉었다.

그러자 거위 사내의 패거리가 두 사람을 막아섰다.

“곡예를 망쳐놓고 사람까지 패더니 그냥 가시겠다?”

“그럼 너희 술주정뱅이들을 마저 두들겨 주고 갈까?”

카이렛의 조롱에 패거리는 서로 수군댔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로트와 카이렛을 에워쌌다. 그 중에서 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지껄였다.

“우린 너희 정체를 알아. 야, 도둑고양이, 넌 우리를 뒤쫓아 왔지?”

카이렛은 놀라서 되물었다.

“뭐? 내가 왜 너흴 뒤쫓냐? 난 너희를 생전 처음 봤는데. 어이, 지크프리트, 이 녀석들 누군지 알아?”

“몰라.”

“잠깐! 아, 이제 알겠네. 이 놈들 전부 나비 가면을 쓰고 있잖아.”

움찔하는 몇몇을 보고서 카이렛은 조소를 품었다.

“이놈들은 밤낮으로 으스대기만 하는, 명예를 숭상하는 기사 나리들이군. 어쩐지 목소리가 낯설다고 생각했는데 훌륭하신 기사단께서 품위는 다 어쩌고 이런 데서 개망나니 짓을 하고 계시나.”

“건방진 놈! 깔아버리자!”

“맛을 보여줘!”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로트와 카이렛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그 중엔 칼을 빼든 자도 있었지만 구경꾼들이 뺏어버렸다.

양쪽 간에 맨손 격투가 벌어졌다. 구경꾼 남자들은 양쪽을 응원했다. 곡예보다 더 흥미진진한 격투에 여자들은 환호하며 꽃을 뿌려댔다. 싸움꾼들의 거친 욕설과 고함은 합창단의 노랫소리에 파묻혔다. 합창단은 죄악을 저지른 어린 양을 주님께 고발하는 노래를 불러댔다.

로트와 카이렛은 수세에 몰렸다. 둘은 진창 속에서 상대를 밀어내는 단체 게임을 할 때처럼 닥치는 대로 기사단을 차고, 밀고, 물어뜯었다.

거위 사내가 싸움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는 거추장스런 건초 다발을 내던지듯이 사내들을 차례로 집어 홱홱 내던졌다. 그러고는 맨 아래 깔려있던 카이렛과 로트에게 성난 곰처럼 소리를 질렀다.

“이, 도둑고양이들, 맛 좀 봐라!”

“으악!”

카이렛의 날씬한 몸이 풀밭 위로 날아갔다.

그 다음으로 번쩍 허공에 들린 로트는 가장 멀리 포물선을 그리며 풀밭으로 뚝 떨어졌다.

진기한 볼거리에 군중의 탄성이 오오, 아아! 연이어 터졌다.

카이렛은 깜빡 의식을 잃었다.

그에게서 멀리 나가떨어진 로트는 신음을 토하며 일어나려고 했다.

이때 몸이 저절로 허공에 떴다.

“길을 비켜라! 얼간이 대왕께서 나가신다!”

그를 쳐든 난쟁이가 목이 터져라 선창했다.

합창단이 복창했다.

“길을 비켜라! 얼간이 대왕께서 나가신다!”

“와아! 길을 비켜라! 얼간이 기사께서 나가신다!”

“와와! 길을 비켜라! 얼간이 기사께서 나가신다.”

합창단은 모두 활짝 웃으며 사지를 축 늘어뜨린 로트를 떠메고 무도회장 가운데서 빙빙 돌았다.

로트는 손을 힘없이 쳐들었다. 그러나 이내 손이 뚝 떨어졌다. 긴 머리 소녀는 새파랗게 질려 합창단의 뒤를 쫓았다.

“와와아! 길을 비켜라! 얼간이 기사께서……. 흐아압!”

난쟁이는 별안간 끼이익, 풀밭을 파내며 멈춰 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합창단은 로트를 떠멘 채로 입을 딱 벌리고 위를 쳐다봤다.

“손님을 내려줘라.”

어느 새 그들을 막아 선 이젠하르트가 조용히 말했다.

“이런 유별난 곡예는 처음 보지만 그다지 재밌지도 않군.”

그는 뒤로 돌아서 이번에는 구경꾼들에게 말했다.

“손님 여러분, 곡예는 끝났습니다. 저쪽으로 야참을 들러 가세요. 영주님의 따님께서도 오셨습니다. 제 어린 누이도 여러분께 봉사하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봐, 난쟁이, 다시 소동을 피우면 매질을 하겠다. 손님들께 무례를 범하지 마. 너희들, 너흰 저분과 저분을 모시고 가서 상처를 봐 드려라.”

벨데케 가 하인들은 로트와 카이렛에게 뛰어갔다.

카이렛은 의식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합창단이 내려준 로트는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풀밭에 일어나 앉았다.

카이렛이 무사한 걸 확인한 그는 관절을 삐걱대며 일어섰다. 쩔쩔매는 난쟁이와 우물쭈물하는 합창단 사이로 저를 구해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옆구리를 움켜쥐고서 바삐 그의 뒤를 쫓았다.

“고귀하신 벗이여.”

로트는 남자를 불렀다.

“여기서 또 만났군요. 이번에도 제가 신세를 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운명인가 봅니다. 당신은 내가 곤경에 처하면 롤랑처럼 등장하시는군요.”

자리를 뜨던 이젠하르트가 천천히 돌아섰다.

“저 말입니까?”

그가 물었다.

로트는 격투 중에 얹어 맞아서 욱신대는 뺨을 문지르며 웃었다.

“그럼 당신이지 누굽니까. 당신의 그 아름다운 머리칼은 한 번 보면 잊을 수가 없으니 한눈에 딱 알아봤지요.”

“…….”

“하하. 접니다, 저예요. 좀 전에 저 숲에서 뵈었잖아요.”

“…….

“에른스트, 당신이 아니었다면 밤새 빙빙 돌 뻔했어요. 어지러워서 혼났습니다.”

이젠하르트는 대꾸가 없었다.

로트는 그의 곁으로 한 발 더 다가서 말했다.

“저 합창단 녀석들은 저 재주밖에 없나 보더군요. 난 저 놈들을 황야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그때도 나를 짊어지고 빙빙 돌았답니다. 그래도 너무 나무라진 마세요. 새끼 제비들이 빽빽 대는 듯한 합창 솜씨보다는 그게 차라리 낫거든요.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설마 벌써 귀가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저기……. 혹시 저 천막으로 가십니까?”

“지크프리트!”

문득 카이렛의 날카로운 외침이 로트의 주위를 끌었다.

이젠하르트는 카이렛을 돌아봤다. 카이렛도 그를 마주 봤다. 두 남자 간에 재빠른 시선이 오갔다.

카이렛의 안면이 갑자기 굳었다. 그는 제 얼굴을 만졌다. 눈가를 더듬었다. 숨을 훅, 들이켰다. 고양이 가면이 풀밭 위에 떨어져 있었다.

“카이렛,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에른스트.”

로트는 이젠하르트의 팔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그리고 퍽 음성을 낮춰 속삭였다.

“무도회는 좀 즐기셨나요? 보셨다시피 전 요 모양 요 꼴이라……. 역시 우리에겐 한적한 숲이 낫지요?”

로트는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투로 싱긋 웃고서 이젠하르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아깐 갑자기 가버리시니 미처 작별의 인사를 못 했군요. 그럼 또 봅시다. 아쉽지만 전 이만 가봐야겠군요. 저기 저 친구가-…….”

“젠장! 지크프리트!”

“알았어. 갈게. 참, 카이렛, 이분이 아까 날 도와주셨던……. 응? 이게 뭐지?”

이때 인기척을 느낀 로트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허리춤에서 웬 시동 한 놈이 그를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두 손을 위로 쭉 쳐든 어린 한스는 로트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외쳤다.

“나리, 아까 요걸 바닥에 떨어뜨리셨어요.”

“……!”

“합창단 녀석들이 나리를 떠메고 빙빙 돌 때 떨어졌어요. 고 욕심쟁이 까마귀 놈들이 훔쳐 갈까 봐 제가 냉큼 챙겼는데 나리 꺼 맞지요? 많이 구겨지고 더러워졌는데 제가 얼른 가서 빗질을 해올까요, 나리?”

어린 한스는 노란 가발을 들어 보이며 활짝 웃었다. 얼굴이 노래진 카이렛은 제 가슴을 꽝! 치고 드러누웠다.

숨이 멎어버린 듯한 로트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이젠하르트는 눈빛으로 모든 걸 말했다.

로트도 한 마디로 제 심정을 말했다. 제기랄.

“포겔바이데! 더러운 원수 놈, 포겔바이데가 나타났다! 저놈은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다!”

이때 두 사람의 뒤에서 느닷없는 고함이 밤공기를 찢었다. 장내가 술렁였다. 뿔뿔이 흩어졌던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고함을 지른 탐파니스는 이젠하르트의 뒤에서 팔팔 뛰며 검은 머리의 악마를 잡으라고 악을 썼다.

“잡아라! 죽여라! 저놈은 이교도의 악마야! 포겔바이데! 원수가 침입했다!”

구경꾼들이 물 밀듯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탐파니스는 이젠하르트에게 로트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저 녀석이다! 이젠하르트, 네 앞에 있는 저놈이 포겔바이데야! 나비 가면을 쓴 놈! 저 더러운 원수 놈의 검은 머리가 안 보여? 야! 뭣들 하고 있냐? 저놈의 가면을 당장 벗겨라! 에잇!……. 으앗!”

“로트! 달아나자!”

한달음에 날아와 탐파니스를 홱 떠민 카이렛은 로트의 팔을 마구 잡아당겼다.

로트는 멍하니 중얼댔다.

“카이렛, 잠깐만 기다려봐…….”

“정신 차려! 빨리 도망치자고!”

“하지만…….”

“빌어먹을! 닥치고 일단 가자니까!”

“앗! 달아난다! 막아라! 포겔바이데 놈이 달아난다! 이젠하르트, 뭘 하고 있어? 죽여! 저 원수 놈을 죽여! 으아앗! 이게, 또!”

미친 벌 떼처럼 왱왱대는 탐파니스를 두 번째로 떠민 카이렛은 로트의 손을 낚아챘다. 그대로 방벽처럼 둘러선 구경꾼을 뚫으려고 정면으로 돌진했다.

이때였다. 촤악-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구경꾼들이 숨을 들이켜며 뒤로 물러섰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카이렛은 움찔하며 얼어붙었다.

이젠하르트는 둘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카이렛의 어깨너머로 로트를 향해 말했다.

“가면을 벗어.”

허공을 가른 칼이 정확히 로트의 목을 겨눴다.

이젠하르트는 제 가면을 풀어서 로트의 얼굴에 내던졌다.

“못 벗겠다면 내가 벗겨 줄까?”

살얼음이 대기에서 쩍쩍 갈라졌다. 파편이 서리가 되어 풀밭에 내렸다.

이젠하르트의 잿빛 눈은 고요한 폭풍을 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배를 덮쳐 돛대를 꺾고 용골을 부술 폭풍. 황금빛 머리채는 미풍에 부드럽게 흔들렸지만 그가 겨눈 칼날은 죽음을 예고하듯 서슬 퍼랬다.

“속히 결정하시지. 무모한 지크프리트, 아니 포겔바이데. 가면을 벗든가, 이 자리에서 죽든가.”

로트는 이젠하르트를 뚫어지게 보며 서 있기만 했다. 그를 돌아본 카이렛은 입술을 깨물고 욕설을 삼켰다. 서슬 퍼런 칼날이 눈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이젠하르트.”

로트가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그 음성은 거칠고 이상하게 쉬어 있었다.

“자네가 이젠하르트였군.”

“…….”

“이게 얼마 만인지? 오랜 벗이여, 나는 자네를 미처 못 알아봤어. 자네는 너무 많이 변해버려서…….”

“네 녀석도 많이 변했군.”

이젠하르트가 조소를 머금고 답했다.

“울보에 오줌싸개였던 말라깽이가 인간의 탈을 쓰고 악마의 미모를 뽐낸다더니 과연 가면을 쓰고도 그 미모가 눈부시군. 어디, 너의 미모를 직접 보게 해다오.”

“이젠하르트, 고귀한 기사여, 부디 노여움을 거둬줘. 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나는 결코 이런 소동을 원치 않았는데…….”

“가증스러운 원수여, 선택해라. 가면을 벗든가 죽든가.”

로트는 그러자 자기 가슴에 한 손을 짚고 한 손을 이젠하르트를 향해 내밀었다.

“벗이여, 내 말을 잠깐만 들어다오. 나는-…….”

“말이 많군. 비굴한 변명은 네 비참한 최후를 재촉할 뿐이다.”

이젠하르트가 겨눈 칼날이 단호했기에 로트는 가면을 벗었다. 손님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눈을 찌르고 뺨을 태울 듯한 이젠하르트의 적의는 로트의 가슴에 아프도록 파고들었다.

“이젠하르트, 자네가 화가난 건 당연해. 난 불청객이니까. 하지만 다정했던 벗이여, 하늘에 맹세코 나는 오늘 어떤 악의를 품고 여기 온 게 아냐.”

“이제 다시 선택하시지.”

이젠하르트는 아랑곳없이 완고히 말했다.

“네 죄를 인정했으니 이 자리에서 네 손으로 죽든가 내 손에 죽든가. 네겐 최후의 고해도 과분하지만 네 손으로 직접 숨을 끊겠다면 허락해주마.”

“이젠하르트, 부디 화를 풀어다오. 자네는 우리가 함께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닥쳐.”

이젠하르트의 입술이 분노로 떨리며 일그러졌다.

“내 앞에서 함부로 거짓말을 하지 마. 네가 어떤 악의도 품지 않았다고? 저 숲에서 음욕을 품고 힐데가르트를 뒤쫓았던 건 그럼 네놈이 아니고 허깨비였나.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더러운 원수 같으니! 네 피로써 그 대가를 치러라!”

-!

“오라버니!”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터지자 숨을 죽이고 있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그쪽을 돌아봤다.

그곳엔 로에란그린과 콘드비라무어스 그리고 금발의 힐데가르트가 서 있었다. 이니베를 선두로 한 이 도시의 수다쟁이 호사가들, 부유한 과부와 재력가도 그 뒤에 전부 모여 있었다.

구경꾼들은 한순간이나마 그곳에 시선을 빼앗겨 진기한 구경을 놓치자 한탄하며 로트의 목이 뚝 떨어져있을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피를 뿜고 나뒹구는 시체는커녕 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분!”

이때였다. 우렁차고 호소력이 풍부한 외침이 구경꾼들의 주의를 끌었다.

군중 앞에 나선 사람은 그것만으론 부족한지 목청을 한껏 높였다.

“여러분, 잠깐만 저를 용서해주세요. 실례를 무릅쓰고 제가 잠시 여러분과 이분을 방해해야겠군요.”

이젠하르트의 손목을 꽉 움켜쥔 이터는 그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기사님. 저는 이 무도회의 주인공을 찾고 있는데 혹시 그분을 보셨습니까? 그분의 어린 누이께서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애타게 찾고 계시거든요. 흠, 그런데, 약간 바쁘신 것 같으니 제가 그분을 직접 이리로 모셔올까요?”

“아, 오라버니…….”

“이크, 저기 벌써 오셨군요. 잠깐 뒤를 돌아보세요. 아니, 저게 웬일이야? 저분 얼굴이 밀랍 같은데? 흠!”

이터는 나머지 한 손으로 힐데가르트를 가리켰다. 그녀는 콘드비라무어스의 팔에 매달려 이젠하르트를 쳐다봤다.

아름다운 콘드비라무어스는 대치 중인 두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보세요, 이건 또 어떤 흥미로운 놀이인가요? 두 분께선 지금 역할극을 하고 계신 거죠?”

아무도 대답이 없자 그녀는 힐데가르트를 로에란그린의 팔에 맡겼다. 그러고서 긴 치마를 질질 끌며 앞으로 나섰다.

“아, 무언극이었군요. 입을 꾹 다문 두 분 표정을 보니 알겠네요. 그렇다면 나도 한 몫 낄게요. 나도 끼워주시겠죠? 마침 따분한 참이니 잘 됐군요. 우리 새로 무언극을 해봅시다. 배역은 내가 직접 정하겠어요. 뭐가 좋을까? 그게 좋겠군요. 이보세요, 점잖고 예의 바른 두 분, 두 분은 각각 철천지원수 역을 그대로 해주세요. 난 그럼 툭하면 칼부림을 해대는 어리석은 남자들의 정수리에 불벼락을 내리꽂는 여신이 되겠어요. 이터, 내 창을 가져다줘요. 깃발을 잔뜩 달아서요. 여길 곧장 불바다로 만들 테니. 이터? 이터-!”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군중의 시선은 이젠하르트에게 꽂혔다.

이젠하르트는 이터의 손을 뿌리치고 칼집에 칼을 꽂았다.

로트는 꼼짝하지 않았다. 넋을 놓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계속 흘렀다.

이때 백작의 천막 쪽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아들아!”

허둥지둥 늙은 한스를 달고 달려온 벨데케는 두 손을 쳐들고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네가 여기서 칼부림을 한다니?”

“자비로운 주인이시여, 허락해주신다면 제가 대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젠하르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자 이터가 나섰다. 그는 낯빛이 푸르죽죽해서 실신 직전인 벨데케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이젠하르트 그리고 군중을 공손히 돌아봤다. 곧이어 로트를 향해 손을 척, 뻗고 노엽게 말했다.

“이봐, 로트. 자네는 결국 이곳에 잠입했군.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코 목숨을 단축하려고 사자 굴에 숨어들었어.”

이 말에 벨데케가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안색이 변했다.

“뭐? 저 청년이 그럼 포, 포겔바이데인가?”

“네, 맞습니다.”

이터가 엄숙히 답했다.

“저 사람은 벨데케 가의 철천지원수, 벨데케의 사내라면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은 원수의 외아들,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 입니다.”

“으, 저주받을 포겔바이데!”

“그러나!”

벨데케가 늙은 한스의 부축을 받으며 숨을 헉헉댈 때 군중을 향해 돌아선 이터는 로트를 가리켰다.

“우리는 여기서 로트의 피를 보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건 저 불청객이 선량한 조언자의 충고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잠입한 목적인데, 혹시 어려서 죽을병을 앓고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탓이 아닐까요?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을까요?”

아무도 대꾸가 없자 이터는 말을 이었다.

“누구 아시는 분 없으십니까? 그 목적이란 대체 뭘까. 복수의 칼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 어리석을 정도의 무모함은 도대체 뭐 때문인가. 혹시 생명의 위협을 감수할 정도로 간절한 목적이, 예컨대 서로의 원한마저 뛰어넘을 어떤 숭고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요?”

“닥쳐, 닥쳐!”

머리털이 빨갛게 불타는 탐파니스가 소리쳤다.

“네놈은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속지 마라! 포겔바이데 저놈은 흉계를 품고 잠입했어! 저놈은 힐데가르트를 꼬셔서 달아나려고 한 거야!”

“실례지만, 귀여운 탐파니스, 자꾸 껴들지 말아줘.”

“닥쳐! 이 늑대야! 너도 공모자잖아!”

“어허! 쉿.”

이터는 여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담 그 숭고한 목적이란 뭐냐? 제가 말씀드리지요. 바로 이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숭고한 목적! 저 친구는 이 무도회의 주인공에게 화해의 포옹을 청하러 온 겁니다.”

“웃기지 말라고! 로트 저 바람둥이는 힐데가르트를 납치하러 왔다니까!”

“호오, 요런 귀여운 억지를 부리다니. 설마 우리 귀여운 탐파니스의 맹랑한 주장을 믿는 분은 없으시겠죠? 두 선남선녀는 서로 만난 적도 없습니다. 만약 광장에서 서로 마주쳤다면 원수의 아들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 한 채 깍듯이 인사하고 헤어졌을 사이지요.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판국에 무슨 사랑의 도피입니까? 더군다나 어느 멍청이가 무시무시한 ‘숲의 파괴자’께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곳에 잠입해 감히 그의 보석 같은 누이와 사랑의 도피를 하려했겠습니까?”

이터는 팔짱을 척, 끼고서 의기양양하게 군중을 둘러봤다. 로에란그린도 같은 요지로 이터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군중은 동요했다.

예외는 있었다. 냉소를 품고 로트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이젠하르트였다.

탐파니스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다 거짓말이야! 저 원수를 그냥 돌려보내선 안 돼! 죽이자! 탑에 가두자! 가둬서 굶겨 죽이자!”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로트와 모두가 이제 이젠하르트의 결단을 기다렸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힐데가르트는 로에란그린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있었다.

“오라버니.”

그녀는 파래진 얼굴로 울먹이듯 속삭였다.

“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는 로에란그린의 품에서 고개를 홱 쳐들었다.

어느새 다가선 이젠하르트는 누이의 젖은 두 뺨을 어루만졌다.

“사랑하는 힐데가르트, 내 소중한 누이여, 눈물을 닦으렴. 오늘 밤은 네가 나의 주인이야.”

“아, 오라버니!”

이젠하르트는 얼이 빠진 로트를 뒤에 남겨두고 그녀를 지나쳐 자리를 떴다.

벨데케 내외는 황급히 그 뒤를 쫓았다.

“으, 이 호색한! 추잡한 색마!”

약이 바짝 오른 탐파니스는 로트에게 달려가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발을 굴렀다.

“으으! 이 추잡한 바람둥이! 이교도의 악마! 넌 오늘 더럽게 운이 좋았어! 다음엔 아주 끝장이야! 끝장이라고!”

로에란그린과 카이렛은 로트를 끌고 무도회장 밖으로 나갔다.

셋은 곧장 근처에 있는 카이렛의 집으로 피신했다.

카이렛은 제 방에 들어서자마자 몸서리를 쳤다.

“하마터면 오줌을 쌀 뻔했네. 이젠하르트 눈초리를 봤어? 살기가 대단하더라.”

“바질리스쿠스가 따로 없더군.”

로에란그린이 동의했다.

카이렛은 로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로트, 자넨 오늘 정말 위험했어. 저승 구경을 할 뻔한 거야.”

카이렛의 손을 뿌리친 로트는 초조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방을 오갔다. 그의 낯은 어둡고 창백한데도 두 눈은 열을 품고서 번쩍번쩍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두 귀공자는 서로 시선을 나누며 불길하다고 생각했다.

“제기랄, 자넨 왜 또 그러는데?”

카이렛이 참다 못 해서 외쳤다.

“낙담해서 또 절벽으로 달려가려고?”

로트는 잠자코 두 친구를 향해서 돌아섰다. 곧 떨리는 음성이 밤의 고요를 깨기가 두려운 듯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이건 저주일까, 축복일까.”

“뭐?”

“자네들, 오늘 이젠하르트를 똑똑히 봤나?”

“봤지. 그 녀석 때문에 우리가 헐레벌떡 도망쳐서 여기로 숨었잖아.”

“그였어.”

로트는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중얼댔다.

“수사슴의 예언은 사실이었어.”

로트는 갑자기 달려들어 어리둥절한 두 친구의 어깨를 꽉 잡았다.

두 귀공자는 무시무시한 악력과 쇳물처럼 불타는 눈초리에 깜짝 놀랐다.

“그는 이젠하르트였어.”

로트는 외쳤다.

“내가 꿈속에서 본 건 이젠하르트의 황금빛 머리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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