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지크프리트와 에른스트 (10/33)

10. 지크프리트와 에른스트

무도회장의 활기찬 소음과 피들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밝은 달빛은 부드러운 토끼풀과 잡초, 가시나무 덤불 따위를 환히 밝혔지만 바위 근처는 나무 우듬지에 가려 그늘에 잠겼다.

남자는 연주곡이 세 번 바뀌었을 때도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바로 곁 덤불 너머에선 나뭇가지가 맞부딪쳐 바작대는 소음과 인기척이 수차례나 근접하고 멀어지곤 했다.

잠시 후엔 좀 더 먼 곳에서 긴 한숨과 의미 불명인 탄식, 뜀박질 기척 따위가 간간이 들리다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에는 인적 없는 숲에 어울리는 비밀스러운 고요가 흘렀다.

바스락-.

문득 바스락, 바작, 탁탁, 이상한 소음에 이어서 가시덤불이 흔들렸다. 곧 덤불에서 먹이를 찾는 족제비나 다람쥐 대신에 사람이 튀어나왔다.

로트는 가시덤불에 뺨을 긁히며 덤불을 뚫고 나왔다.

그는 여전히 바위에 앉아 있는 남자의 앞을 지나서 반대편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바작, 탁탁, 젖은 나뭇잎과 돌멩이를 밟는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윽고 그 소리가 빠르게 되돌아왔다.

남자는 로트가 제 앞에 서자 고개를 쳐들었다.

“이름 모를 벗이여.”

로트는 숨찬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당신께서 아직도 거기 계신 줄 몰랐군요.”

남자는 무언으로 대답했다.

그의 실루엣을 통해서 나비 가면을 알아보고 로트가 말을 이었다.

“좀 전엔 너무 허둥대느라 인기척을 못 느꼈어요. 주변이 너무 캄캄하니.”

남자는 계속 대꾸가 없다.

로트는 남자 쪽으로 더 다가서며 초조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당신은 계속 여기에 계셨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남자가 처음으로 답했다. 무심한 어조였다.

“언제부터 계셨나요?”

“꽤 됩니다.”

“그럼 혹시……. 조금 전에 혹시 이 앞으로 어느 귀부인께서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어떤 귀부인 말입니까?”

“황금빛 긴 머리칼이 아름다운 젊고 순결한 귀부인 말입니다.”

“그런 순결한 귀부인이라면-…….”

말 꼬리를 끊었던 남자는 차갑게 응수했다.

“이런 컴컴한 숲이 아니라 저 밝은 무도회장에 있지 않을까요?”

“아, 네……. 그렇지요.”

“아니면 이 숲에서 가장 으슥한 곳을 찾아보시든가. 제 아무리 젊고 순결한 귀부인이라도 그런 데서 혼자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만.”

깊은 한숨을 내뱉은 로트는 그의 조언에 사례했다.

“맞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나는…….”

“……?”

“이름 모를 벗이여, 그럼 안녕히.”

“안녕히.”

이때 사나운 바람이 그들 머리 위에 있는 나무 우듬지를 흔들며 몰아쳤다.

자리를 뜨려던 로트는 갑자기 방향을 틀고서 재빨리 남자에게 다가서 손을 콱 움켜잡았다.

“자, 갑시다! 얼른 일어나세요.”

“왜 이럽니까, 갑자기?”

“얼른 가자니까요. 갑시다!”

“이봐요.”

남자는 잡힌 손을 홱 뿌리쳤다. 이윽고 목소리를 팍, 내리깔고 을렀다.

“당신 돈 거요? 다짜고짜 초면에 이게 무슨 실례입니까?”

“일단 여길 떠나자 이 말입니다.”

로트가 언성을 높였다.

남자도 마주 언성을 높였다.

“난데없이 어디로 가자는 겁니까?”

“글쎄, 서둘러요. 가서 말해줄 테니! 이럴 시간이 없어요.”

로트는 무작정 고집을 피웠지만 남자는 한사코 거절했다. 약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들짐승이 내지르는 날카롭고 불쾌한 울음이 한 번 더 터졌다.

로트는 몸서리를 치며 숨을 죽이고 주변을 홱홱 둘러봤다.

남자는 그 꼴을 말없이 지켜봤다. 로트는 재차 여길 떠나자고 요구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군.”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이유를 알아야 가든 말든 하지. 당신이 무작정 따라오라면 내가 얼씨구나, 하고 갈까. 내가 어린애인가? 어려서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는 조기교육도 못 받았군.”

“친근한 벗이여.”

로트는 목소리를 낮추고서 정중히 속삭였다.

“용서하세요. 마음이 너무 급하다 보니 그랬습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조심해야 해요.”

“뭘 조심해야 합니까?”

“이곳에 그가 있습니다.”

로트는 남자의 귀에 대고 잔뜩 숨죽여 말했다.

“죽은 자의 왕 말이에요. 숲의 패거리를 이끄는……. 아시지요?”

“…….”

“모르십니까? 식인종 말입니다!”

로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도 좀 전에 이 숲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어찌나 소름이 쭉 돋던지! 하마터면 산 채로 잡아먹힐 뻔했어요.”

“정말인가요?”

“정말이지 뭡니까. 나를 잡아먹겠다고 대놓고 으름장을 놨어요.”

“그건 믿을 수 없는데요.”

“하, 참. 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배가 몹시 주리다면서 입맛을 다시고!……. 자, 어서 갑시다. 여긴 너무 위험해요. 좀 전에는 깜빡 잊고 당신을 두고 갈 뻔했지만, 저만치 가다 보니 퍼뜩 무서운 경종이 울리더군요. 아차, 이곳엔 식인종이 있더랬지…….”

“먼저 가시지요. 난 괜찮으니.”

“고집 피우지 마세요!”

로트는 벌컥 소리쳤다. 그리곤 자신의 노성에 지레 놀라서 남자한테 화를 냈다.

“내가 당신을 두고 갈 놈으로 보이십니까. 난 그런 비겁하고 인정머리 없는 놈이 아닙니다. 갑시다! 당신도 여기 계속 있다 보면 그 식인종한테 잡아먹혀요.”

“글쎄,”

남자는 그래도 완강히 버텼다.

“그건 염려 마시고 그냥 가시지요.”

“하, 참. 위험을 자처하겠다니 왜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고 사람 말을 안 듣습니까?”

“고집이 아니라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이지요.”

“용감한 벗이여.”

로트는 몹시 안타깝게 그를 불렀다.

“그건 무모한 짓입니다. 당신은 지금 그 자랑 한판 붙겠다는 거죠? 쯧쯧. 당신은 그를 직접 못 봐서 그래요. 그는 죽은 자의 왕입니다. 산 자는 어떤 용맹한 기사도 대적할 수 없어요. 그 사람 목소리만 들어도 당신은 까무러칠 겁니다. 그건 마치 살아있는 인간의 음성처럼 생생하고……. 심술궂고…….”

“심술궂고?”

“네. 한편으로는 놀랍게도 부드럽기도 한데……. 마치…….”

“마치?”

“음, 마치-…….”

“마치 어쨌다는 겁니까?”

“…….”

“혹시 놀랍게도 부드러운 음성이 내 음성처럼 그윽하던가요?”

로트는 거친 숨을 토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는 소리 내어 비웃었다.

“죽은 자의 왕을 두려워하는 이름 모를 벗이여, 조심하세요. 당신 뒤에 돌부리가 있습니다. 또 넘어진다면 죽은 자의 왕이 오랜만에 포식하게 될 겁니다.”

남자는 그러고서 옆으로 돌아앉았다. 하지만 로트의 인기척을 느끼고 바로 옆을 홱, 돌아봤다.

“그럼 당신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 선 로트가 이상한 음성으로 물었다.

“죽은 자의 왕이 아닙니까?”

남자는 순순히 답했다.

“나는 죽은 자의 왕이 맞습니다.”

“……!”

“당신을 잡아먹고 싶은 심정으로 말하자면 맞지요.”

로트는 달빛 가운데로 뛰어들어서 주변을 홱홱 돌아봤다. 이윽고 가시덤불을 뚫고 나갔다 되돌아와서 반대편에 있는 수풀로 건너갔다. 수풀을 헤치자 그곳에선 무도회장에서 울리는 명랑한 소음이 들렸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도 들렸다.

로트는 탄식했다.

“그렇군……. 나는 길을 잃었었군. 빌어먹을,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이제야 그걸 깨닫다니 당신의 명민한 두뇌를 높이 칭찬하고 싶군요.”

뒤에서 노골적인 조롱이 이어져서 로트는 바위로 되돌아갔다.

남자는 조소조차도 아깝다는 듯이 정색했다.

“이 좁은 수목원에서 연주곡이 세 번이나 바뀔 동안에 같은 장소를 배회한다는 건, 어찌 보면 당신한테는 특별한 재능이라 할 수 있어요. 장래가 촉망되니 그 재능을 발전시켜 보세요. 곡예단은 어떨까요? 개한테 쫓겨 울타리 안을 빙빙 도는 곰 말입니다.”

“실례지만-…….”

로트는 그의 발을 내려다봤다..

“그럼 아까 내가 혹시……. 당신 발에 걸려 넘어졌습니까?”

“유감이지만,”

남자는 태연히 응수했다.

“내 발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데 웬 멧돼지가 느닷없이 튀어나와서 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군요.”

로트는 남자의 손이 가리킨 수풀 앞의 돌부리를 내려다봤다. 돌이 땅에 단단히 박혀서 새하얀 달빛을 담뿍 머금고 은덩이처럼 빛났다.

“그럼, 당신 발이 아니었군요.”

“말했다시피.”

“난 그런 줄만 알고…….”

“그걸 꼬투리 잡아 한판 붙겠다면 기꺼이 상대해 드리지요.”

남자가 주저 없이 허리에 찬 칼자루를 잡아 쥘 기세였으므로 로트는 다급히 말했다.

“친절한 벗이여, 오해는 말아주세요.”

그는 바위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섰다.

“당신을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실은 날 넘어뜨린 게 당신의 발이었다면 오히려 감사드리고 싶어서 물었던 겁니다.”

“별 이상한 사람 다 있군.”

남자는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로 자리를 옮겨 옆으로 돌아앉았다. 곁에 둔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그걸 탁, 탁 소리가 나도록 한마디씩 부러뜨려 바닥에 내던졌다.

문득 옆구리에 기척이 닿았다. 남자는 고개를 홱, 돌리고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궁금하실 테니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란히 바위에 걸터앉은 로트가 말했다.

“내가 뭘 궁금해한다는 겁니까?”

“내가 왜 이름 모를 당신께 감사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전혀 궁금하지 않으니 그만 가시죠.”

“낯설지만 다정한 벗이여.”

로트는 멍하니 앞을 보며 씁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한 인간의 무분별한 정열과 충동은 어떤 담금질을 거쳐야 절제나 금욕으로 제련되는 걸까요? 얼마나 호된 망치질을 당해야 산산이 조각나서 사라질까요? 낯선 벗이여, 당신은 의도하지 않았다지만 나를 구했어요. 나는 하마터면 걷잡을 수 없는 정열에 휘말려서 우행을, 몹쓸 짓을 저지를 뻔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돌멩이든, 죽은 자의 왕이든 뭐든, 내 어리석은 정열에 찬물을 끼얹었어요. 안 그랬다면 나는 지금쯤 어느 명망 높고 정숙한 귀부인을 기절시켰을 겁니다. 이런 어두운 숲에서 그 귀부인을 남몰래 쫓아가 붙들었더라면……. 아, 끔찍하네요. 정숙한 그 여자는 내 컴컴한 마음에 부딪혀 얼마나 상심하고 나를 두려워했을까요.”

로트는 관자놀이를 꽉 누르고, 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목구멍이 자꾸만 탁탁 막히고……. 아까부터 뭔가에 홀린 듯 정신이 혼미하군요. 이 뜨거운 혈관 속에는 집요하게 나를 고문하는 정열이 치닫고, 심장은 이토록 괴롭게 고동치고 있어요……. 당신께서도 한 번 여길, 내 가슴을 만져보시겠습니까?”

로트는 남자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됐습니다.”

남자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러고서 자리를 더 옆으로, 로트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옮겨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가 자리를 옮겨 여유 공간이 늘었으므로 로트는 바위에 편안하게 드러누워 물었다.

“실례지만 그럼 당신은 여기서 뭘 하고 계셨나요?”

“평화로운 사색을 즐기던 중에 보다시피 낯선 사람에게 염치없는 방해를 받고 있지요.”

“당신은 어쩐지 쓸쓸해 보이더군요.”

“절대 쓸쓸하지 않습니다.”

“혹시 말 상대가 필요하신가요?”

“전혀.”

“전 기꺼이 당신의 말 상대가 되고 싶군요.”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로트는 퍽 다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저도 이 숲의 고요 속에서 맑은 정신을 되찾고 육체의 정열을 식히고 싶습니다. 그런데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처지인가요?”

“혼자서 돌부리에 엎어지고 식인종을 보자 꽁지가 빠지게 달아난 처지 말인가요?”

“뭐, 그건 아니고. 음…….”

“아니면 손바닥만 한 수목원에서 강을 넘고 산을 타느라 바쁜 처지 말인가요?”

“아뇨.”

로트는 남자의 조롱은 아랑곳없이 연민에 취해 씁쓸히 물었다.

“당신도 나처럼 어느 아름다운 귀부인을 쫓다가 낙담한 게 아닐까 해서요”

침묵 끝에 빌어먹을, 이라는 대답이 들렸으므로 로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뭐가 그렇다는 겁니까?”

남자가 난폭하게 대꾸했다.

“난 그런 적이 없습니다. 내가 당신 같은 부류인 줄 압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만합시다. 변명은 듣고 싶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없으니. 이런 가면무도회에 당신 같은 놈들이 없다면 그게 놀랄 일이지.”

남자의 비난엔 적개심과 환멸이 섞여 있었다.

놀란 로트는 일어나 앉았다.

“당신께선 무도회가 즐겁지 않으신가요?”

“그런 당신께선 아직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는 가장 두꺼운 나뭇가지를 콱 부러뜨렸다.

“당신은 얼마나 더 나를 방해해야 만족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

“남에게 무턱대고 간섭하는 당신의 과잉 친절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 무도회로 돌아가시죠.”

이런 불손한 대답을 들었음에도 로트는 잠자코 있었다.

남자는 부러진 나무토막을 바닥에 픽픽 내던졌다. 그리고 기다렸다. 성가신 방해꾼이 얼른 가버리길.

하지만 초면에 망신을 줬으니 체면상 스스로 수습할 시간도 약간 줘야 했다.

“나도 실은 이 무도회가 즐겁지만은 않답니다.”

잠시 후에 로트가 말했다. 남자의 일변한 표정을 볼 수 없는 그는 침울하게 말문을 이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무도회를 고대하며 몹시 설렜고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나 자신과 내 무분별한 정열이……. 그래서 돌아가기가 망설여지는군요.”

“이봐요!”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로트가 담담히 말했다.

그러자 남자의 음성은 전보다 험악해졌다.

“가라는데 가지 않고 왜 또 거기 드러눕는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심신의 안정을 찾으려고요.”

바위 위에 도로 누워서 팔베개를 하고 저를 올려다보는 로트에게 남자는 최대한 자제하며 을렀다.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가시지요.”

“글쎄요. 여긴 바위가 판판하니 눕기 좋군요.”

“미치겠군. 하고많은 풀밭은 다 놔두고 하필 왜.”

“이 자리에 당신이 앉았던 터라 축축하지 않거든요. 풀밭은 밤이슬에 젖었어요.”

“이봐, 넌 누구야?”

남자는 마침내 성을 냈다.

“뭣 때문에 나를 방해하는 거냐?”

“방해라니요. 나는 당신과 그냥 대화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기랄. 됐으니 그만 떠나주시지.”

“내가, 그토록 방해가 됐나요?”

로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서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그저 당신과-…….”

“그만 가라니까! 빌어먹을!”

로트는 벌떡 일어서서 풀밭을 박차고 나아갔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팍팍, 밟아대며 수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지만 곧이어 되돌아와서 남자 앞에서 큰소리를 쳤다.

“하, 당신을 방해했다니 참 미안하게 됐군요. 평소라면 폭력이나 싸움을 나병보다 싫어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나는 이쯤에서 물러나곤 했는데, 내 마음이 현재 약간 거칠어져 있다 보니 그럴 수 없군요. 낯설고 무례한 벗이여, 잘 들어요. 나의 호의가 짓밟혔으니 너무 불쾌하군요. 그래서 당신한테 하나만 묻겠습니다. 이 바위가 당신 소유입니까?”

“…….”

“이 수목원이 당신 소유냔 말이요.”

“트집 잡지 말고 그냥 가시지.”

“역시 아니군.”

로트는 밉살맞게 빈정대는 웃음을 고의로 흘렸다.

“난 물론 알고도 물었지. 왜냐? 이곳은 영주님의 소유야. 그렇다면 당신이나 나나 이 숲의 손님으로서 숲의 고요와 평화를 공평하게 나누면 될 걸 어째서 당신은 혼자 욕심내지? 날 떠돌이 개 쫓듯이 쫓아내려 하다니, 당신한테 그런 자격이 있어? 내가 당신을 고의로 모욕하기라도 했어? 아님 대단한 피해라도 입혔어? 나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함께 고독을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

“제기랄!”

남자가 대꾸하지 않자 로트는 머리를 나무에 처박았다.

“빌어먹을! 젠장할! 이게 무슨 짓이람. 난 나쁜 놈이야. 괜한 사람한테 심술쟁이 철부지 폭군처럼 웬 억지를 부리는 거냐.……. 무고한 벗이여, 부디 내 무례를 용서하세요. 내 감정에만 골몰해서 남의 진심을 살피지 못하고 당신께 폐를 끼쳤군요……. 젠장. 나는 지금 제정신이 아냐. 이런 유쾌한 무도회에서 이런 수치와 모욕을 자처하다니! 이 무도회의 주인에게도 막심한 해를 끼쳤어. 벨데케는 어제 빈자에게 목욕값을 희사하고 빵과 맥주를 나눠줬다고 들었어. 이 도시의 다리에도 막대한 재물을 봉헌해서 도시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들었어.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에겐 자선을 베풀고, 오늘 밤의 손님들에게는 기쁨을 선사하고 있는데, 그들의 선행을 돕지는 못할망정 더럽히다니 안 되지. 집에나 가야겠군. 당신한테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로트는 고개를 숙이고 성큼 성큼 자리를 떴다.

그러나 몇 발자국 떠나지 않았는데 남자가 그를 불렀다.

“이봐요. 잠깐 기다려요.”

“저를 책망하고 벌하세요.”

수풀 앞에서 돌아선 로트는 진심으로 말했다.

“나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때린다면 맞겠어요. 그게 공정한 처사입니다. 하지만 결투만은 청하지 말아주세요. 내 잘못이 명백하니까요.”

“잠깐 여기 앉으시죠.”

남자는 제 옆을 가리키며 말했다.

로트는 망설였다.

“사양하지 말고 앉으세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당신 말이 옳습니다.”

남자는 로트의 말을 가로챘다. 딱딱한 음성이나마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을 이었다.

“여긴 내 소유인 수목원이 아니니 무도회에 지친 손님이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쉴 권리가 있습니다. 이 바위는 비단 의자보다 편하군요. 저 밖은 연주로 소란하지만 이 숲은 고요한 덕분이겠지요.”

“정말 그렇군요. 어디선가 마음의 평정을 불러일으키는 맑은 샘물 소리도 들리네요. 들어보세요.”

로트는 그러고서 환한 달빛에 고개를 쳐들고 귀를 기울였다. 가면에 가려 있었으나 달빛에 비친 그의 밝은 표정, 그의 사죄가 진심임을 알리는 솔직한 음성과 명랑하고 활기찬 몸짓, 섬세한 선을 그리는 아름다운 입술과 장인에게 제련된 검처럼 미끈한 몸매가 남자의 시야에 잡혔다.

“이봐요.”

남자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발밑으로 밀어내고서 말했다.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가셔도 좋습니다. 당신에게 어떤 악의도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내 천성이 상냥하지 못하고 경계심이 강해 무례를 저질렀군요.”

“제 무례가 컸으니 당신이 날 용서해준다면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자리를 내줬다. 로트는 남자 곁에 앉았다.

남자는 내심 불편한 속마음을 감췄다. 그의 호의는 로트에 대한 사죄나 죄책감 때문이 아니었다. 경솔하고 천박한 자신의 언동에 환멸을 느껴서 스스로 벌할 목적이었다.

남자의 속내를 알 길 없는 로트는 그의 사죄를 진심으로 여겼다. 그래서 서로의 체면을 위해 잠시만 머물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저를 찾고 있을 카이렛이 떠올랐지만 이 순간만큼은 사랑이나 운명보다는 숲의 고요와 평온이 절실했다. 그의 마음은 그토록 갈등과 자책으로 괴로웠다.

두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뜻밖에도 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로트의 처량한 한숨을 들어서다.

“무도회장에는 안 가십니까.”

“가야겠지요.”

로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하지만 역시 망설여지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당신이 아까 목격하셨다시피 내가 또 잘못을 저지를까 두렵습니다. 어쩌면 이런 어둠 속이나 황야의 동굴이 내 안식처일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언제부터 여기 있었나요?”

“당신이 뛰어나오기 직전부터 와 있었습니다.”

“그럼 무도회장엔 안 가실 건가요?”

“갈 겁니다.”

남자는 단언했다.

“다만 지금은 이 숲의 고요가 마음을 끄는군요.”

“나도 그래요.”

로트는 기뻐하며 활기를 되찾았다.

“사실 나도 저런 흥청망청한 무도회나 연회보다는 평화로운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고요한 숲을 사랑합니다. 가끔은 저 시문 밖에 있는 숲으로 산책을 나가지요. 숲이란 경이로운 생명의 보고요, 자신의 운을 시험하거나 앞날을 예측할 수 있는 신성한 장소이지요. 태초의 숨결을 내뿜는 울창하고 광활한 그 속에서 우린 돌도끼로 맹수를 때려잡던 선조의 용감무쌍한 정신을 직접 체감할 수도 있어요. 영주님의 허가장만 있다면, 사슴도 실컷 잡고 여우나 이리 사냥도 하고 말입니다. 물론 컴컴한 밤의 숲에는, 특히 저 시문 밖의 검은 숲에는…….”

“죽은 자의 왕이 있지요.”

남자가 조용히 받아쳤다.

“그자만 없다면 철부지 산토끼라도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지요.”

“하하. 맞습니다.”

로트는 산토끼가 자신을 빗댄 것인지도 모르고 호탕하게 웃어댔다.

남자는 이 순간 문득 깨달았다. 로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그는 고뇌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실랑이를 하느라 정신이 딴 데 팔렸다. 덕분에 머리는 맑아지고 마음을 괴롭게 하는 분노나 원한도 엷어졌다. 잠깐일망정 고뇌가 통렬했던 만큼 달콤한 망각이었다.

“음, 이게 무슨 소린가요?”

로트가 갑자기 놀라서 물었다.

“당신도 들었습니까? 굶주린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를?”

“네, 들었습니다.”

남자는 로트의 배를 가리켰다.

“당신 뱃속에서 울부짖더군요.”

이때 남자의 뱃속에서도 공복 소리가 났다. 로트는 남자의 어깨를 탁탁, 치며 하하하 웃었다.

남자는 남 얘기하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종일 굶었군요.”

“나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만 당신은 왜 굶으셨나요?”

“내겐 식사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중대사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만, 그럼 그 때문에 금식 중이신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그러나 그 때문에 더욱 신빙성 있게 말했다.

“만일 그래야만 한다면 50여 일의 금식 따윈 내겐 식은 죽 먹기입니다. 반년 동안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수년이 걸린다 해도 내가 뜻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얼음 동굴이나 깊은 계곡 속에서 물냉이나 이끼만 뜯어 먹고도 맑은 정신과 강인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어요.”

“굉장하군요. 전 하루만 굶어도 거친 야수가 된답니다. 오늘은 예외입니다만. 어떤 비법이라도?”

“비법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남자는 대답했다.

“의지가 관건이지요. 강인한 정신력, 오직 그것뿐입니다. 반드시 해내겠다는 굳은 일념, 지옥과도 같은 굶주림과 육체적 고통마저 불사하겠다는 신념, 단 한 순간의 망설임이나 비겁을 경멸하고 혹독하게 자신을 채찍질 하겠다는 굳은 정신력, 그것뿐입니다. 그게 남이 죽느냐, 내가 사느냐, 승패를 가를 경우엔 더더욱.”

로트는 남자의 결연한 의지에 무척 감탄했다.

둘은 이후에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강인한 벗이여, 곧 돌아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어디 갑니까?”

갑자기 일어선 로트에게 남자가 물었다.

“잠깐이면 됩니다. 바람처럼 빨리 돌아올게요.”

로트는 다짜고짜 수풀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두 팔로 수풀을 헤치자 연주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동안 바위 위에 앉아있던 남자는 머리를 짚고 기다렸다.

수풀에서 탁탁, 잡음이 들렸다. 그곳을 돌아봤다. 족제비가 튀어나왔다.

물끄러미 그걸 구경하던 남자는, 달아나는 놈의 꼬리를 보다가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때 수풀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뒤에서 로트가 튀어나왔다.

“접니다!”

달려오며 그는 숨이 차서 외쳤다.

“좀 늦었지요? 또 길을 잃었어요. 하하.”

“그게 뭡니까?”

남자는 장갑을 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종달새 구이입니다.”

로트는 신이 났다.

“먹음직한 돼지 뒷다리도 있어요. 맥주와 치즈도! 이리 오세요.”

로트는 대꾸 없는 남자를 강제로 바위에 앉히고 보따리를 풀었다. 음식의 형체는 컴컴한 탓에 제대로 구별 안 됐지만 진한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르며 식욕을 돋웠다.

로트는 남자의 장갑을 뺏고 맥주를 먼저 권하고 자기도 한 잔 마셨다.

“어디서 가져온 겁니까?”

남자가 물었다.

“야무진 시동 녀석이 지나가기에 주사위 말로 쓰던 상아 조각을 한 개 쥐여줬더니 냉큼 가져오더군요. 금화 한 닢을 준다면 자기 간도 내주겠답니다. 이 맥주 맛은 기막히군요. 이런 맛은 처음인데. 이 근방에선 이런 맥주는 맛본 적이 없었어. 어디서 맛을 봤더라.”

“…….”

“목욕탕에서 마셨던가.”

“이건 아인베크(중세 독일의 맥주 명산지)산 맥주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인근 도시에서도 맛보기 힘들어요. 하물며 목욕탕 같은 공창( 公娼)에서 쉽사리 맛볼 수 있는 저질 맥주는 더더욱 아닙니다.”

“어쩐지 시원한 맛이 일품이군요. 자, 건배!”

“난 그만하겠습니다. 당신 몫이니 드세요.”

“사양하지 마세요. 맥주는 많습니다. 함께 축배를 들 겸 항아리째 훔쳐왔는걸요.”

“시동이 가져왔다면서요?”

“사실은 훔쳐왔습니다. 하하. 맥주가 동이 났대요. 아무튼 우리가 비록 여기서는 은자의 처지이지만, 우리도 무도회 손님 아닙니까. 고민거리는 잠깐 제쳐두고 배를 채웁시다. 우리도 남들처럼 즐겁게 먹고 마셔요. 무도회는 즐기지 못할망정 진수성찬까지 마다해서야 삶의 낙이 있겠습니까. 어서 드세요.”

“그럽시다.”

남자는 태도를 바꿨다.

“산해진미는 아니지만 내게도 낙은 있습니다. 그날을 위해서 먹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어요. 먹고 기운이 나야 사슴이든 원수든 때려잡을 수 있는 겁니다.”

“제 말이 그겁니다.”

로트는 종달새 구이 한 마리를 통째로 먹고 흰 빵과 치즈도 먹었다. 남자도 먹었다.

로트는 칼집에서 칼을 꺼내 돼지 뒷다리를 먹기 좋게 잘라서 남자한테 권했으나 그는 조류만 먹는다고 거절했다. 분뇨와 진창을 딛는 네발 가축은 귀족의 먹을거리가 못 된다는 게 이유였다.

“그럼 이걸 드세요.”

로트는 종달새 구이를 전부 권했다.

“댁께서도 드시지요. 난 과식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사양하지 마세요. 전 돼지고기를 먹겠습니다. 종달새는 입가심 거리라서 열댓 마리를 먹어도 배가 안 찹니다.”

“너그럽게 양보하시니 그럼 먹겠습니다.”

“저야말로 덕분에 돼지 뒷다리를 마음껏 먹게 됐군요.”

“별말씀을.”

“별말씀을.”

로트는 칼로 저며 놓은 돼지고기를 먹었다. 남자는 종달새를 전부 먹어치웠다.

배가 부르자 분위기가 호전됐다.

둘은 술기운에 서로를 자비로운 호걸이라며 칭찬했다. 로트는 죽은 자의 왕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용맹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남자는 그의 과잉 간섭을 친절로 빗대어 추켜세웠다. 둘은 맥주 항아리를 전부 비웠다.

로트가 말했다.

“배가 터지도록 먹으니 이제 좀 살만하군요. 내 이름은 로-…….”

“로?”

“지크프리트라고 합니다. 하하. 당신은?”

이때 까닭 없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뇌리를 후려쳐서 로트는 움찔했다.

남자가 그걸 눈치 챘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어깨를 부르르 떨고?”

“혹시 당신은……. 이 무도회의 주인이신가요?”

“네?”

“혹시 벨데케 일가는 아니신지?”

남자는 한동안 가면 너머의 그를 뚫어지게 보다 물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묻습니까?”

“뭐, 별건 아닙니다만 제가 이 무도회가 흥청망청 하다느니 망발을 한 건 아닐까 해서요.”

“맥주를 훔친 것도 포함해서 말입니까?”

“네, 뭐, 그것도 그렇고.”

변명이 너무 어색했으므로 로트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아랑곳없이 말했다.

“지크프리트라고 하셨지요? 안심하세요. 나도 손님입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댁의 성함은?”

“에른스트라고 합니다.”

“음, 에른스트? 에른스트?……. 아, 에른스트! 그렇군요. 당신이 그 에른스트였군요!”

“제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요. 처음인데요.”

굉장히 반색하던 로트가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남자는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로트도 싱글싱글 웃었다. 로트가 다시 입을 떼려는 찰나에 남자는 자신이 이웃 마을에서 왔다며 물었다.

“당신은 백작의 기사단이시지요?”

“네?”

“만필요트 백작의 기사단 아닙니까?”

로트는 잠깐 망설이다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모르면 바보지요.”

남자는 로트의 검은 나비 가면을 가리켰다. 실없는 소리를 해대고 귀부인을 쫓아다니는 걸 보면 알고도 남는다는 말은 생략하고서 말을 이었다.

“오늘 당신들은 모두 어부 같더군요.”

“사람 낚는 어부 말씀이신가요?”

“귀부인을 낚는 어부 말입니다.”

로트는 긴장을 감추느라 쉰 목소리로 기침했다. 에른스트라는 이 남자의 난폭한 성미와 말씨 때문에 그를 기사단 일원으로 여기던 터였다.

침묵이 잠깐 흘렀다.

맑은 피델 소리가 가느다란 은빛 실처럼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들었다. 사람들이 터트리는 홍소도 간간이 들렸다.

‘이상하게 갑자기 목이 막혀.’

로트는 생각했다.

‘아까부터 목이 자꾸 꽉 막히네. 가슴이 계속 두근두근하고 이상해. 긴장해서 그렇겠지.’

수풀 너머의 피델 소리는 문득문득 그에게 카이렛을 상기시켰다 .

‘카이렛은 나를 찾고 있을 거야. 아니면 내가 집에 돌아갔으리라고 생각하겠지……. 역시 돌아가야만 할까. 말썽을 부려선 안 되는데. 어쩌지……. 힐데가르트틀 두고 가자니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냥 이대로 여기 처박혀서 밤을 새울까. 동이 트고 오늘 밤의 설렘과 흥분이 가라앉으면 제 정신이 돌아 올지도 몰라. 힐데가르트, 당신은 지금 천막에 와 있나요? 아, 귀여운 요정이여, 당신의 순결한 두 팔로 가련한 나를 안아줘요. 그럼 이 죄인은 그대의 거룩한 발에 입 맞춰 속죄하며 그릇된 정열을 잠시라도 식힐 게요. 힐데가르트, 황금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그대여, 당신은 내 운명의 연인이거늘 왜 우리는…….’

“네? 뭐라고 하셨어요?”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 로트가 옆을 돌아봤다.

남자는 장갑을 손에 쥐고서 말했다.

“당신은 왜 그토록 깊은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습니다. 두 번이나.”

“아, 네. 그건…….”

로트는 빈 맥주 항아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다정한 벗이여, 당신은 혹시 하얀 수사슴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하얀 사슴?”

“네. 발부터 뿔까지 몸뚱이가 전부 하얀 수사슴이요.”

“흰 사슴이 세상에 존재하나요?”

“네. 뿔이 열여덟 갈래로 갈라졌어요.”

“어디서 그런 괴물을 본 겁니까?”

“역시 못 보셨군요.”

조롱이 아닌 남자의 진지한 물음에 로트는 바위에 도로 드러누웠다.

“어리석은 인간의 정열과 번뇌를 정화해주는 숲의 정령과 저 밤하늘의 거룩한 달빛!”

“……?”

“저 창백한 달은 해가 뜨면 사라지고 해가 지면 다시 뜨니 꼭 수줍은 사랑의 열병 때문에 연인에게서 달아나는 뺨이 창백한 아가씨 같군.”

“…….”

“과연 사랑이란 뭘까. 운명의 연인이란 어떤 존재일까. 그건 이상향으로써 우리는 그곳에 도달하고자 무한한 노력을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는 아닌지. 에른스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은……. 내 생각은 그렇습니다. 내가 사내로 태어난 이상, 권능하신 주님께서 점찍어준 내 운명의 연인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 부질없는 목숨 따위 기꺼이 불사르겠다, 저승사자도 나의 헌신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겁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내 연인을, 운명의 상대를 위해서라면!……. 당신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남자는 일어나서 몇 걸음 떨어져 돌아섰다. 그는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높은 곳의 나뭇가지를 꺾었다. 그 순간 그늘에서 벗어난 그의 얼굴로 달빛이 새하얗게 쏟아져 내렸다.

로트는 팔베개를 하고서 멍하니 달을 감상했다.

“에른스트?”

이때 콰직,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그는 누운 채로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당신께서도 이제껏 살아오면서 운명의 상대를-……!”

이 순간 달빛보다 창백한 경악의 빛이 로트를 휩쓸었다.

-!

일어나느라 그의 팔꿈치에 떠밀린 항아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로트는 당나귀 뒷발에 차인 듯이 벌떡 일어섰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꺾어낸 남자는 넋이 빠져 자신을 쳐다보는 로트에게 물었다.

“왜 또 그러십니까?”

“당, 당신은……. 혹시?”

로트는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며 뇌까렸다.

“이런, 맙소사. 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아!…….”

“왜 또 그러시냐고, 감상적인 벗이여, 재차 공손히 여쭙겠습니다.”

“그렇군. 제길! 당신이 바로……. 바로…….”

남자는 한숨을 뱉고 고개를 저었다.

“그깟 맥주 한 동이에 내가 또 죽은 자의 왕처럼 보입니까?”

“아뇨. 아뇨. 그렇군! 그랬었군! 이런 제길! 하하하.”

“……?”

로트는 별안간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그 괴기한 웃음은 곧 뚝 끊겨서 오장육부를 쏟아낼 듯한 긴 한숨으로 변했다. 망할, 빌어먹을, 젠장할! 등 욕설이 아름다운 입술을 뒤틀며 줄줄이 흘러나왔다.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주시했다. 로트는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이때 로트의 두피가 통째로 확 벗겨지려고 해서 남자는 기겁했다.

‘맙소사! 머리 가죽이!’

로트는 부르르 몸을 떨다 손을 멈췄다. 머리를 쥐어뜯던 두 손은 가면을 조여 맨 뒤통수를 꽉 움켜잡았다.

두피는 천만 다행히도 벗겨지지 않았다. 그게 가발임을 알 리 없는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호기심과 약간의 호의마저 깃들었던 시선은 처음의 경계심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냉정하게 물었다.

“이봐요, 당신 갑자기 그게 무슨 미친 짓입니까?”

“…….”

남자는 두 손에 장갑을 끼며 빠르게 말했다.

“이런 말은 당신을 소중한 벗으로서 여기고 드리니 유념하세요. 나는 당신의 정신 상태가 상당히 의심스럽군요. 언제인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서 당신과 유사한 증상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머리는 산발에, 거품이 이는 침을 흘리고 백치처럼 히죽히죽 웃다가 끝내 도끼로 목이 잘렸어요. 관중의 자비와 동정을 구걸하느라 광인 흉내를 냈지만 그 바보짓이 아무런 효험이 없자 엄숙히 최후의 기도를 드리고 참수됐습니다. 하물며 당신은 평상시에 그런 두뇌 상태라면 위독한 중병입니다. 내가 아는 이발사가 있습니다. 그는 사혈에 능숙해서 많은 미치광이를 살려냈어요. 악마의 피를 한 동이 정도 쏟으면 될 겁니다. 거길 가보세요.”

“아뇨……. 그건 당신입니다.”

“기가 막히는군. 나보고 가라는 소립니까?”

“아니요.”

로트는 오장육부가 괴로운 듯이 탄식을 토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눈이 멀었던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명확히 말하세요.”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눈먼 큐피드가 된다더니 그 말이 옳았습니다. 제기랄!”

여전히 달빛 아래에 선 남자가 이때 수풀 너머로 주의를 기울였다. 고개를 숙인 로트는 바위에 되앉아 허탈하고도, 슬픈 음성으로 말했다.

“다정한 벗이여, 너무 노여워하지 마세요. 그래요. 당신 말대로 난 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당신이었습니다. 바로 당신이었어요. 내가 쫓았던 환상 말입니다. 당신의 그 긴 머리칼, 황금빛의 아름다운 긴 머리칼! 하하……. 그게……. 제기랄……. 난 넋이 빠져서 당신을 쫓았던 겁니다. 나의 귀부인인 줄로만 알고 광인처럼 숲을 헤매며……. 젠장……. 망할…….”

“친애하는 지크프리트.”

남자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가면 너머의 잿빛 눈은 냉정했고 박제된 매의 그것처럼 무감해보였다.

그는 자신의 인내와 자기 채찍질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겼다. 로트를 홀리게 한 자신의 긴 머리칼을 비단 천으로 묶어버리고, 모멸에 차서 오히려 친절한 어조, 상대에 대한 환멸 때문에 오히려 극히 예의를 차린 말투로 말했다.

“친애하는 지크프리트, 불행한 벗이여, 내가 그 귀부인이 아닌 게 천만 다행이군요.”

그는 수풀 너머를 흘긋 보고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가 충고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사랑에 대해서 물었지요? 대답할게요. 사랑이란 것은 그 본질이 자기 최면과 기만입니다. 당신을 시험하는 악마의 희롱질입니다. 수많은 속인이, 심지어 사제들은 물론이요, 산 골 깊숙한 곳의 은자마저도 창부와 다름없는 악녀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사탄의 노리개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어디에 과연 순수하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참된 사랑이 존재할까요? 그들의 사랑이 그렇습니까? 남의 머리칼에 기만당한 당신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랑의 맹세, 운명의 상대 운운하는 당신의 사랑은 순수합니까? 당신의 음탕한 정념과 육욕 그 외에 당신의 사랑을 정의하는 게 뭡니까? 설마 내 사랑은 영혼과 육체의 순결을 지향하는 사랑이라고 주장하진 못 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가 있잖습니까. 수도원으로 가세요. 운명의 연인을 찾아서 음침한 숲에서 헤매지 말고 수도원으로 가세요. 덧붙여 당신의 속셈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그 귀부인도 그다지 명망 높고 순결한 부인은 못 될 것입니다. 눈먼 큐피트라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눈뜬장님입니다. 쾌락을 탐하는 어리석은 정열가이지요. 속히 정신을 차리세요.”

이때 무도회장 쪽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속히 차렸겠지요.”

로트는 고개를 숙인 채 뜨거워진 목구멍을 쥐어짰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모르는 게 있어요……. 내겐 특별한 운명이 닥쳤습니다. 그녀를 알기 전까진 나도 당신의 말대로 육욕에 빠져 쾌락을 탐했지요. 보드라운 여자의 살갗, 빨갛고 싱싱한 입술, 그 아늑한 두 팔에 안겨 있으면 그 순간만은 세상만사 시름이 씻기며 이게 바로 참된 사랑의 안식처이겠거니 믿었답니다. 그랬는데……. 당신처럼 사랑에 냉소적인 분께는 우습게 들리겠지만……. 나는 어느 날 수사슴을 만났습니다. 백색의 수사슴인데 그가 예언하길……. 너는 너의 원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게 너의 숙명이다……. 그랬던 겁니다.”

밤바람이 로트의 뺨을 스쳤다. 정수리에는 젖은 나뭇잎이 떨어져 내려앉았다.

“뭐, 대충, 그랬던 겁니다. 그래서-…….”

로트는 고개를 들고 남자를 올려다봤다.

“나는 내 운명을 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만……. 에르스트?”

말꼬리를 흐리며 로트는 머리에 우수수 쏟아져 내린 나뭇잎을 털어냈다. 에른스트가 사라졌다.

“흠, 인사도 없이 가버렸군……. 그래도 그 음성은 퍽 감미로워서 위로가 됐어. 충고는 쐐기풀처럼 몹시 따끔따끔했다만.”

이때 수풀이 부르르 흔들렸다. 귀에 선 외침이 들렸다.

그 소리는 밤바람을 타고 근접하다가 바로 수풀 곁에서 울렸다.

“지크프리트!”

로트는 벌떡 일어섰다.

“지크프리트! 자네, 어디 있나? 지크프리트!”

“카이렛!”

“제기랄, 여기 있었군.”

카이렛은 수풀 사이에서 와락 튀어나와 소리를 질렀다.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카이렛, 자네 방금 그를 봤어? 에른스트라는 남자인데 방금 자네랑 마주쳤을 것 같은데.”

“몰라. 누군데? 기사단 놈인가.”

초조하게 캐묻는 카이렛을 마주 보며 로트는 눈만 깜빡였다.

“에잇! 아직도 얼이 빠져있군. 아무튼 얼른 나가자고. 힐데가르트가 왔어.”

“……. 힐데가르트가?”

“그래. 이터가 콘드비라무어스랑 이니베랑 같이 데리고 왔어. 아까 왔다고!”

“진짜 그녀가 나타났군.”

카이렛은 수풀로 향하며 로트의 팔을 꽉 잡아서 끌어당겼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채 다급히 속삭였다.

“조심해! 힐데가르트만 얼른 보고 빨리 집에 가자. 탐파니스 녀석이 나타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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