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죽은 자의 왕
헐레벌떡 달아난 두 용맹한 기사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양이 가면을 쓴 카이렛은 나무 뒤에서 살짝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폈다. 으휴휴하는 한숨이 흘렀다.
이윽고 그는 나비를 째려봤다.
“정신이 나갔지? 벨데케랑 말을 하다니!”
“벨데케인 줄 몰랐어.”
나비 가면을 쓴 로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씨구나 포옹까지 하고서?”
“방심한 사이에 그만.”
“손까지 잡아 일으켜주던데.”
“나 때문에 넘어졌는걸.”
“벨데케가 먼저 달려들던데, 뭐. 으휴. 아무튼 들킬 뻔했어.”
카이렛은 식은땀을 닦으며 불빛이 찬란한 무도회장을 염탐했다.
회장에는 군데군데 세운 흰 기둥에 횃불이 놓여 있고, 그 기둥을 꽃줄기가 덩굴처럼 감싸 올라서 싱싱한 꽃다발이 허공에 떠있는 듯이 보였다.
꽃 기둥 사이로는 갖가지 눈 가면을 쓴 이들이 오갔다.
공작새 꼬리 깃털 가면을 쓴 손님은 발걸음까지 공작새 흉내를 내며 도도하게 회장을 거닐었다. 그가 지나간 길에는 의인화된 태양과 달 가면이 줄지어 등장했다. 그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은 모호한 미소를 머금고 익명의 상대에게 도발적인 키스를 보냈다.
일탈의 쾌감이 장내에 물씬했다. 새카만 밤하늘에는 별빛이 흘렀다.
“저기 있군.”
카이렛이 로트의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저길 좀 봐. 저 늙은이, 아주 신이 났는데. 고주망태야.”
“과연 근사한 무도회군.”
로트는 생뚱맞은 탄성을 뱉었다.
“동녘의 일출처럼 타오르는 저 횃불과 꽃 기둥을 봐. 아름다운 가면을 쓴 귀부인, 멋진 기사들, 귀여운 시동의 재잘거림은 청명한 방울 소리 같고, 휘황찬란한 모피와 벨벳의 물결은 에덴의 강물 같구나. 꿈만 같아.”
“자네, 정말로 돌았군.”
카이렛은 로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예 나팔을 불고 나 여기 왔다고 떠들지 그래? 목소리 좀 낮춰. 아예 말을 말든가.”
“사랑스런 카이렛,”
로트는 카이렛의 손을 떨쳐냈다.
“오늘 밤은 나에게서 이런 기쁨을 빼앗지 마. 달 밝은 이 밤의 아름다움조차 만끽하지 못하고 가슴을 채운 격정을 마음껏 토로할 수 없다면 산다 한들 차디찬 주검이 아니고 뭐겠어.”
“흥, 절대 여긴 안 온다고 한 게 언제더라?”
로트는 카이렛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붙였다.
“사랑하는 카이렛, 여길 좀 만져 봐. 느껴져? 펄떡펄떡 뛰는 내 심장이? 난 운명에 이끌려서 오늘 밤 여기 오지 않을 수 없었어.”
“또 시작이군. 그놈의 수사슴 타령.”
흥분한 로트는 카이렛의 곁에 숨어서 나뭇잎 사이로 회장을 훔쳐보며 말했다.
“난 지난밤에 이상한 꿈을 꿨어. 한밤중에 황금색 태양을 봤지. 그 황금빛 햇살은 어느 숲을 비추고 있었는데, 암흑 속의 촛불 한 자루처럼 새하얀 광휘를 발했어. 난 불빛에 매혹되어 넋을 잃었어. 그런데 문득 내 발을 내려다보니 한 줄기의 빛 무리가 날 천국으로 인도하는 광명처럼 내 발끝에서 숲을 향해 뻗어 있잖아. 숲으로 가보니 놀랍게도 벨데케 가문의 깃발이 나를 환영하듯이 너울대고 있었어. 내 어린 시절의 무수한 밤, 꿈속에서 나를 애태우던 황금빛 머리칼의 소녀도 있었지. 난 그때 딱 직감한 거야. 이건 예지몽이다. 수사슴의 예언이다! 고대하던 예언의 실현이 마침내 도래했구나! 심술궂은 예언이지만, 고난과 역경을 뚫고 성취한 사랑은 더욱 값진 법, 그래서 결정을 내렸어. 가자! 무도회장으로! 짓궂은 수사슴이 내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해줄 테니까.”
“운명적인 원수겠지.”
카이렛은 주변을 야무지게 살폈다.
“이제 저쪽으로 이동하자. 한곳에 눌러 있으면 위험해.”
카이렛은 로트를 끌고서 나무 밖으로 나갔다.
도중에 일군의 새가 색색의 깃털을 날리며 그들 쪽으로 몰려왔다. 카이렛은 재빨리 허리를 숙여 길을 터주며 귀부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아름답다는 아첨도 잊지 않았다.
그 태도가 지극히 여유롭고 자연스러워서 새떼가 가버리자 로트가 그를 칭찬했다.
“사실 난 지금 기분이 안 좋아.”
카이렛이 투덜댔다. 로트가 왜냐고 물었다.
“나도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몹시 끔찍했거든. 께름칙해 죽겠어. 자네, ‘죽은 자들의 왕’ 알지?”
“알지. 숲의 패거리의 우두머리잖아.”
“그래. 세례도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애들이랑 미쳐 죽은 과부랑 유령 기사단을 이끈다는 그 자 말야. 그 녀석이 로트 자넬 꼬치구이처럼 창에 꿰어서 맛있게 잡아먹더군.”
로트가 살짝 식은땀을 흘렸으므로 카이렛도 살짝 후회했다.
두 사람은 넓은 회장의 가장 으슥한 곳을 찾아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도중에 어디선가 떠들썩한 웃음이 터졌다. 술 심부름으로 바쁜 어느 시동의 멜빵바지가 벗겨져 맨 궁둥이가 드러나서였다.
시동은 어린 한스였다. 여자들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장난을 친 남자들도 맘껏 웃어댔다.
어린 한스는 조그만 얼굴이 몹시 새빨개졌지만 제가 바친 알몸 봉사가 과연 얼마큼의 금전 가치가 있는가를 재빨리 가늠하며 바지를 당장 추슬러야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로트는 소동 너머로 회장을 살피며 물었다.
“이터는 아직 안 왔나?”
“먼저 왔겠지. 과부들 있는 데로 가자. 로에란그린과 나는 무도회에서 자네랑 이터를 찾을 땐 거기부터 찾거든. 백발백중이야. 앗, 조심해! 가면을 벗어선 안 돼.”
옆을 돌아본 카이렛은 무심코 가면을 벗으려는 로트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차. 깜빡했군. 카이렛, 저 사람들을 좀 봐.”
로트는 회장 한 곳을 가리키며 씁쓸히 중얼댔다.
“저 연인들은 5월의 종달새 같아. 거추장스런 가면을 벗고 불그레한 두 뺨을 맞대고서 밀어를 속닥이는 모습이 참 부럽구나. 이 밤의 달콤한 향을 마음껏 들이마시며 행복에 취해있는 저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나도 이런 답답한 가면 따위는 벗어 던지고…….”
“젠장. 감상에 빠질 때가 아냐. 우리 집을 포함해서 이 도시의 귀족 전부, 심지어 이웃 마을 귀족도 오늘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지만 자네만은 불청객이지. 이교도가 칼을 쳐들고 달려들어도 자네보다는 환영받을 거야.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려. 힐데가르트를 한 번이라도 봐야 하잖아.”
“알았어. 내 정신은 수정처럼 맑으니까 걱정하지 마.”
카이렛은 내심 불안했다. 로트의 눈에 잠열이 자꾸 번쩍번쩍하고 넋이 빠진 꼴이 마음에 걸려서다.
자리를 바꿔서 나무 그늘에 숨어 회장 곳곳을 뚫어지게 살피던 로트가 중얼댔다.
“힐데가르트는 어디 있을까. 다들 가면을 썼으니 알아 볼 수가 없잖아.”
“콘드비라무어스랑 같이 온댔어. 자넨 콘드비라무어스한테 걸리지 않게 조심해. 자네 머리털만 보여도 잡아먹을걸.”
“가발을 써서 괜찮아.”
흑발인 로트는 금색 가발을 세심하게 어루만졌다. 카이렛은 그 꼴을 보고 헤죽 웃었다.
“그럼 우선 로에란그린을 찾아보자. 우리보다 먼저 왔으니 힐데가르트가 어디 있는지 알 거야. 얼빠진 사랑의 기사여, 오늘의 각오는 어때?”
“아다마스(Adamas 중세의 강철이나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해.”
두 사람은 나무 그늘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부러 태연함을 가장하느라 고개를 쳐들고 꽃 냄새를 맡거나 귀부인에게 은근한 눈짓을 해보이며 인파 속을 누볐다.
얼마 후 로트는 무수한 가면 너머에서 저를 보고 우뚝 멈춰 서는 한 남자를 목격했다.
남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서 험악하게 물었다.
“지크프리트, 드디어 오셨군. 가면이 잘 어울리는구나. 그래도 오늘 밤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오싹한 경고에 로트는 외쳤다.
“넌 누구지? 지크프리트라니?”
카이렛이 자기 가슴을 쾅! 쳤다.
“바보! 지크프리트는 자네 가명이잖아.”
“아, 이터군.”
낭패라며 제 이마에 손을 얹는 카이렛의 곁에서 로에란그린이 가면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로트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얼싸안았다.
카이렛은 로트가 오늘 제정신이 아니 잘 지켜보자고 로에란그린에게 속삭였다.
“힐데가르트는 아직 안 왔어.”
로에란그린이 말했다.
“곧 콘드비라무어스랑 입장할 거야. 여왕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라고 콘드비라무어스가 버티고 있어서 이터가 데리러 갔어. 카이렛, 자네의 이니베도 함께 올 거야.”
그들 곁으로 시동이 꽃잎을 뿌리며 지나갔다. 꽃잎이 로트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로에란그린은 그들이 지나가자 로트의 팔을 잡아서 주의를 끌었다.
“이봐, 지크프리트, 조심해. 탐파니스가 지금 돌아다니고 있어. 벨데케가 어제, 오늘 초대장을 남발했다고 여간 독이 오른 게 아니야. 아까는 검은 머리의 남자한테 이름을 캐묻더군. 그 남자가 익명 보장이 관례인 이런 가면무도회 규칙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항의하니까 가면을 벗기려고 덤볐어. 덕분에 그 남자의 검은 가발이 벗겨져서 대머리가 드러났다지. 탐파니스는 벨데케한테 들켜서 호되게 야단 맞았어.”
“설마 그 자식, 우리가 온 걸 벌써 알아챘나?”
카이렛이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단순한 녀석이니까 검은 머리만 보고 덤빈 거지.”
로트가 오늘 무도회장에 잠입하도록 세 귀공자는 묘책을 짜냈다. 로트의 방 창가에 검은 가발을 쓰고 그의 옷을 입힌 하인을 뒷모습이 보이도록 앉혀 놓았다.
탐파니스는 예상대로 졸개를 보내 로트의 집을 감시했다. 졸개가 별 문제 없다고 보고 했을 때쯤, 진짜 로트는 임시 은신처에서 빠져나와 무도회장에 숨어 들었다.
“아무튼 탐파니스가 멀리서 보이거든 당장 도망치라고. 녀석은 빨간 여우 가면을 썼어. 누가 여우 자식 아니랄까 봐.”
카이렛이 웃어대자 로에란그린은 두 사람을 더 으슥한 그늘로 몰았다. 로트는 카이렛이 부주의하다고 탓하며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꾸짖었다가 두 배로 핀잔을 먹었다.
로트가 물었다.
“이젠하르트는 어디 있지?”
“벨데케랑 저기 보이는 대형 천막 안에 있어.”
“그 친구랑 인사했나?”
로트가 물었다.
“응. 우리 가족이랑 인사를 나눴지. 그런데 벨데케 옆에 있으니 알아보긴 했는데 다른 데서 봤다면 몰라 볼 뻔했어.”
“왜?”
“많이 변한 것 같아. 외모도 그렇고, 분위기가 전혀 달라.”
“오늘 기분은 어때 보여?”
카이렛이 긴장하며 물었다.
“설마 로트를 알아채고 바로 칼부림부터 하진 않겠지?”
“글쎄. 다행히 기분은 좋아 보이더군.”
“무슨 가면을 썼어? 나비 가면만 아니면 좋겠는데.”
“검은색 나비 가면이야.”
카이렛은 역시 검은 나비 가면을 쓴 로트를 쳐다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투덜댔다.
“그럼 미리 알아보기 어렵겠네. 여긴 검은 나비가 수두룩하잖아. 백작의 기사단도 검은 나비 가면을 썼고. 뭐, 우리도 그래서 검은 나비로 정하긴 했지만.”
“이젠하르트가 내 얘긴 안 했어?”
로트가 로에란그린에게 물었다.
“자네가 내 친구인 걸 알잖아.”
“안 했어. 탐파니스에게서 얘기를 다 들었을 텐데도 간단한 인사말만 건네더군.”
로에란그린은 자신이 에스코트해온 조모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로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지그프리트, 제발 조심해. 절대 들켜선 안 돼. 특히 이젠하르트에게 말야.”
“알았어.”
로에란그린은 천막 쪽으로 돌아갔다. 도중에 인파가 몰린 곳에서 앞이 가로막혀 빠져나가느라 애를 먹었다.
사람이 점점 그곳에 모였다. 연이어 환성도 터졌는데 여자들이 쓴 길쭉한 모자와 가면 깃털이 시야를 막았다.
카이렛은 그늘에서 조심스럽게 나와 속삭였다.
“곰 놀이를 하나 봐.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잖아. 잠깐만 볼까?”
카이렛은 로트랑 구경꾼 틈으로 파고들었다.
곡예단이었다. 물구나무를 서거나, 공중제비를 도는 어릿광대에게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키다리 사나이는 피리를 불고 곰이 곁에서 두 발을 딛고 춤을 췄다. 곰 놀이 담당인 이빨이 날카로운 개는 곰이 주춤하면 달려들어서 옆구리를 와락 물었다. 가짜 왕관을 쓴 돼지가 등에 올라타자 곰은 엉금엉금 기었다.
관중은 쉴 새 없이 웃음과 야유를 보냈다. 어릿광대는 쉼 없이 돌았다. 그의 줄무늬 옷이 현란한 원처럼 끊임없이 회전하자 꾸준히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가면 아래의 입술이 살짝 벌려진 이들도 있었다.
“저 녀석들은 재작년에 왔던 곡예단이군.”
카이렛이 눈을 깜빡이며 중얼댔다.
“저, 어릿광대 좀 봐. 계속 보니까 기분이 좀 묘해. 최면 효과가 있나 봐. 난 좀 어지러운데 자넨 괜찮아, 지그프리트?”
카이렛은 로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야? 왜 자꾸 남의 옆구리를 찌르고 이래?”
거위 가면을 쓴 남자가 카이렛에게 쏘아붙였다.
“앗, 당신 누구야?”
“그런 넌 누군데?”
“빌어먹을! 지그프리트! 그새 어딜 갔어?”
카이렛이 거위 가면을 쓴 사내를 밀어젖히고 로트를 찾느라 인파를 헤매고 다닐 때, 로트는 기사단의 천막 뒤편에 있었다.
그는 숲으로 뛰어들었다. 컴컴한 숲에는 수많은 반딧불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방울 소리 같은 맑은 웃음소리도 어렴풋이 들렸다.
로트는 그 소리를 쫓아 숲을 헤치며 달려갔다.
‘어디로 갔지?’
그는 주변을 돌아봤다.
‘아, 저기군. 저 덤불 너머에서 장난꾸러기 요정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 저기로 달아났군. 짓궂은 그녀가 날 놀리고 싶어 하니 기꺼이 그 달콤한 고통을 맛보자.’
로트는 희열에 빠져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아갔다. 달빛에 번쩍이다 숲으로 사라진 황금빛 긴 머리채가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며 목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두 발은 밤이슬에 젖은 토끼풀 위를 날듯이 미끄러졌다.
이때 명랑한 웃음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들렸다. 휙, 황금빛 머리칼이 수풀 사이를 스쳤다. 주변에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반딧불이 광휘 난무했다.
‘힐데가르트!’
로트는 수풀 사이로 뛰어들었다.
쿵-
동시에 묵직한 굉음과 돌멩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나며 로트가 쓰러졌다.
마침 편편한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제 발아래 뻗어버린 로트를 구경했다. 수풀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로트는 충격이 굉장했는지 몸을 뒤집지도 못했다. 흘려대는 신음을 들어보니 호되게 아픈 모양이었다.
한참 구경하던 남자는 로트가 전혀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혼잣말을 중얼댔다.
“어지간히 했으면 그만 일어나시지.”
벌떡 일어선 로트는 소리의 출처를 찾아서 고개를 홱홱 돌렸다. 곧 바위에 앉아있는 검은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당신은 숲의 정령인가요? 아니면 길 잃은 나그네? 아니면 나처럼 초대받지 못한……. 도대체 누굽니까, 당신은? 그런데 혼자 앉아 있으니 마치…….”
“난 죽은 자의 왕이다.”
남자가 답했다.
“숲의 패거리를 이끌지. 마침 배가 몹시 고팠는데 잘 됐군.”
“……!”
상대가 이런 무시무시한 대답을 했으므로 로트는 두 말없이 행동에 나섰다. 실례했다고 외치고 덤불 속으로 허겁지겁 도망쳤다.
그가 가버리자 바위 근처에 정적이 깃들었다. 나무 우듬지 사이로는 달빛이 쏟아져 주변을 하얗게 밝혔다.
남자는 다시 혼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