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신의의 기사
그로부터 이틀 후, 이젠하르트의 귀향 환영 연회가 열렸다.
첫날 야외 오찬은 정오 무렵에 시작됐다. 측면을 걷어 올려 지붕만 남은 기사단장의 천막 아래에 상석이 마련됐다. 그곳에 영주와 성직자, 상급 귀족 그리고 벨데케 내외가 앉았다.
하급 귀족의 자리는 부드러운 토끼풀에 꽃잎을 뿌린 천막의 양 측면에 마련됐다. 손님은 장방형의 이동식 식탁에 앉았다. 일반 손님과 성의 기사수비대 자리는 천막 밖에 자리잡았다.
오찬이 준비되자 첫 번째 앙트르메(식전, 식간의 오락용 볼거리)가 선보였다. 뿔 나팔을 든 시동이 말을 타고 등장했다. 말은 뒷걸음질로 식탁의 빈 공간에서 오갔다. 시동은 나팔을 불어 오찬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자 다른 시동 둘이 그릇과 물주전자를 들고 등장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주빈인 영주 내외의 손을 씻어줬다. 나머지 시동도 각자의 손님 시중을 들었다.
아마포 식탁보 위에는 접시와 소스용 그릇, 나이프와 스푼이 놓였다. 오찬이 진행되는 동안 향신료를 듬뿍 친 구이 요리인 왜가리, 백조, 거위와 닭, 소, 돼지 그리고 사슴 고기 등이 줄지어 식탁에 올랐다.
상급 손님들에겐 향을 첨가한 포도주와 맥주가, 일반 손님들에겐 향이 없는 술이 나왔다. 풍성한 음식과 술이 무한 제공되고, 막간마다 기발한 앙트르메가 연이어 선보이자 오찬객은 이 연회의 주인이 손님 대접을 잘하며 인색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격찬했다.
벨데케는 연회 첫날부터 행복의 절정에 있었다. 그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연회장을 부지런히 오가며 연회의 성공을 자축했다. 이튿날에도 손님의 발길은 이어져서 그만큼 자만심이 고취됐다.
“한스야, 너 얼른 요리장한테 가서 돼지 다섯 마리, 소 두 마리를 더 구워내라고 일러라.”
“지금 굽는 백조 스무 마리는 어쩔까요?”
“그것도 굽는 족족 내와. 어느 부유한 왕도, 그가 황금 광산을 소유한 이교도의 왕일지라도 이보다 더한 성찬을 베풀지 못했다는 소문이 나도록 전부 내와. 특히, 저 천막 밖의 용맹하고 고귀한 기사단들, 저들에겐 맥주와 포도주를 잔뜩 가져다 줘.”
“넷. 곧 대령하겠습니다.”
벨데케는 떠들썩하게 웃고 마시는 젊은 기사단을 만족스레 일별한 후, 연회장의 상석으로 돌아갔다. 거기도 귀부인과 손님이 가득 차서 떠들썩했다.
“고귀하신 분이자 우리 가문의 은인이시여.”
벨데케는 한 손님 곁에 앉아서 물었다.
“부족한 건 없으십니까? 주저하지 마시고 말씀하시어 이 연회의 주인이 은인께 보답할 영광을 갖도록 해주시지요.”
“낯선 이에게도 산해진미를 아낌없이 베푸신 주인이시여.”
고귀한 손님은 답했다.
“부족한 것이라면 제 위장이 하나라는 것일 뿐, 오래전 고향을 떠나온 이래, 새매가 잡아 온 종달새 구이에만 길든 입에 오늘의 오찬보다 더한 산해진미는 없었답니다.”
벨데케는 크게 만족하여 백작의 대답에 사례했다. 그리곤 그에 대한 자신의 호의가 무한함을 거듭 강조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백작이 말을 이었다.
“저 또한 주인께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낯선 기사단임에도 저희를 초청해주신 주인의 너그러움에 탄복했습니다. 부디 주인 내외분께 주님의 권능과 보호가 영원히 함께하시길!”
벨데케는 가슴을 내민 채 보란듯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손님들이 고개를 돌려 주인이 자기만의 보물인 양 자랑하는 젊은 백작을 유심히 살펴봤다.
고귀한 손님은 기사단장 만필요트 백작이었다.
삼십 대 초반이라는 그는 훤칠한 키에 드넓은 어깨, 깊고 날카로운 눈빛과 우뚝한 코가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기품 있는 언행에는 나이를 초월하는 위엄이 흘렀다. 궁중 예절이 몸에 밴 듯 기사들 특유의 난폭함은 일체 찾을 수 없었다.
특이한 점은 그의 신비로운 음성이었는데 멋진 수염으로 뒤덮인 젊고 하얀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장년층의 중후한 음색이었다.
벨데케는 손님이 감탄한 눈치를 보며 생각했다.
‘두고 보렴. 이 미지의 영웅은 행운의 인물일 테니 다들 잘 지켜보는 게 좋을 거야.’
연회 내내 벨데케는 지극 정성으로 백작에게 주인의 봉사를 바쳤다.
오찬의 중반 무렵에 두 사람은 서로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객으로서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백작이 운을 뗐다.
“이 도시의 번영한 모습에 충분히 예상은 했습니다만 이 연회의 성대함은 과히 놀랍군요. 분명 주인께선 이제껏 훌륭한 공덕을 쌓아 하느님께서 그에 보답하셨겠지요.”
“네, 그렇기도 합니다만-…….”
벨데케는 가슴이 부풀었다.
“제 아들 덕도 크지요. 그 애는 어린 시절 출가해서 이제껏 모험을 쫓다가 큰 명성과 무공을 세우고 최근에야 금의환향했답니다.”
벨데케는 이 대목에서 자기 연민에 빠졌다.
“백작께선 고매한 기사도 정신으로 초면에도 저희를 물심양면으로 도우셨습니다. 그 친절에 감동하여 고백합니다만, 우리 가문의 현 재정 상태는 혹시 주님의 핍박은 아닐까, 여길 만큼 형편이 좋지 않답니다. 허허. 그래서 제 아내가 용맹스런 영웅의 환영 연회를 주장했을 때 저는 은수저를 하나둘씩 세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지요.”
백작은 심심한 위로와 동정을 표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벨데케는 감정이 더욱 격해졌다.
“그날 우리 가문의 영웅과 그의 부모 되는 자는 오랜만에 한 식탁에 앉아서 말라빠진 거위 한 마리를 뜯었지요. 숙연한 감동 속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런데 식사를 마치자마자 제 아들이 대뜸 이렇게 말하더군요. 성대한 연회 준비를 하라고. 저는 몹시 깜짝 놀랐어요. 연회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아들은 비록 내색하지 않았지만 분명 내키지 않는 듯했어요. 그런데 제 아들은 놀란 저의 손을 꼬옥 잡고서 이렇게 말했지요. ‘아버님, 연회는 여시되 이 연회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어머님, 아버님 두 분이십니다. 저는 늦게나마 자식 된 도리를 할 뿐입니다.’ 그러고는 궤짝에 가득 담긴 금은보화를 떠억! 희사했어요.”
“감동적이고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백작은 진심으로 호기심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 재물은 역시 무공에 대한 포상으로써-…….”
“네, 그렇습니다!”
벨데케가 말을 가로채고 외쳤다.
“물론 고귀하신 백작께 견줄 정도는 못 되지만 그 애는 편력기사로서 저 바깥세상에서 끝없는 모험을 추구하여 숱한 마상 창시합에서 포상을 받았습니다. 그 상금 전부를, 또 다른 모험과 명성을 위해 자기 자신에게 투자해야 함에도 기꺼이 제 아비를 위해 희사했어요. 이 늙고 가련한 애비의 위신을 세워주고 제 어미의 허영을 채워주려 한 겁니다!”
“흠.”
“그렇습니다!”
벨데케는 치미는 감동에 휩쓸려 말을 계속했다.
“그 애는 찬사를 받아 마땅한 영웅입니다. 사막을 포도주로 적시듯 모든 상금을 사흘간의 연회에 쏟아 부었지만 자신의 몫으로는 갑옷 망토에 달아맬 브로치 하나도 남기지 않았답니다. 굶어 죽을망정, 제 부모를 위해선, 특히 제 선량한 아비를 위해선 눈알이라도 뽑아 바칠 인물이니까요.”
백작은 주인의 감동에 방해될까 저어한 듯 침묵을 지켰다.
벨데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가 감정을 추스르자 백작이 말했다.
“이토록 많은 손님을 배불리 대접할 정도였으니 아드님께선 필시 어느 영웅보다 훌륭한 무공을 세웠겠군요.”
“네, 그렇답니다.”
벨데케는 겸손한 체 답했다.
“고귀하신 백작의 무공에는 감히 필적할 수 있겠습니까만 제 아들은 동쪽의 왕국과 아프리카에선 숲의 파괴자라고 불린답니다.”
“……. 숲의 파괴자?”
백작은 이마에 주름을 짓고 조용히 뇌까렸다.
벨데케는 반색했다.
“백작께서도 역시 들어보셨던가요?”
잠시 망설인 백작은 심히 유감스럽게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것이 외려 큰 행운이었으니, 만일 저 바깥세상에서 숲의 파괴자를 만났다면 자신과 기사단 전원은 승리의 안장 대신 드넓은 초원을 침구 삼아 드러누웠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성대한 연회는 구경조차 못 했으리라고 말했다.
무척 만족한 벨데케는 그의 겸손을 높이 사며 물었다.
“백작께선 꽤 먼 곳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전쟁터에 계셨다고요?”
“네.”
백작은 신중한 음성으로 답했다.
“저희는 동쪽에선 슬라브족 전사랑 싸우고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에선 이교도들에 맞서 싸웠답니다. 그 후로는 그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자비로운 왕과 제후의 은혜로 목숨을 연명하는 편력 기사단이 되었지요.”
벨데케는 영주로부터 더 소상히 들은 바가 있어서 백작의 겸손을 치하했다.
“고귀하신 백작님, 당신의 손에는 창과 방패가 들려있지만 그 용맹한 가슴에는 현자의 지혜를 품고 계시는군요.”
“과찬이십니다.”
백작은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저는 고작 주님께 복종하는 미천한 종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말씀대로 비록 손에는 창과 방패뿐이지만, 권능하신 주님께서 허락하는 한 세상을 편력하며 이 세상의 지혜와 진리를 보고 듣고 배우길 기도한답니다. 저 미지의 바깥세상은 수확되지 않은 진리의 보고이니까요.”
“그럼 모쪼록 청컨대-…….”
벨데케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현명하신 백작께선 부디 조언을 해주시지 않겠는지요?”
“조언이라니, 무엇을 말씀이신가요?”
“네, 실은 제 아들 이젠하르트에게 말입니다.”
벨데케는 이 순간 조심스런 눈길로 주위를 돌아보고는 한층 음성을 낮춰 속삭였다.
“백작께서도 인정하셨다시피 그 애는 나무랄 데 없이 이상적인 그리스도의 기사입니다. 드높은 명예심과 용맹함, 제 아비를 쏙 빼닮은 선량함과 겸양도 그렇고……. 하지만 때로는 뭐랄까, 아비 된 처지에서 보면 가끔 그 애가…….”
“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군요.”
무척 사려 깊은 표정을 띤 백작이 벨데케의 말을 끊었다.
“때로는 그런 아드님께 위화감을 느낀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허허허…….”
벨데케는 백작의 통찰력에 감탄하여 맞장구쳤다.
“백작은 뭐든 꿰뚫고 계시는군요. 어째선지 가끔 저 애가 남의 자식처럼 낯설 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저 애의 성미가 다소, 흠…….”
“그 점이라면 단언컨대 주인께선 염려 마십시오.”
백작이 언성을 높였다.
“주인께서 뭘 염려하시는지 잘 알겠습니다만, 단언컨대, 그건 기우이십니다. 왜냐하면 젊은 기사의 경솔함이나 돌발적인 난폭함은, 젊은 객기 탓이지 죄가 아닙니다. 젊은 피, 단지 그 때문입니다. 자고로 젊은이는 사자와 같은 용맹, 용암과 같은 정열과는 친근한 벗이나 아무리 고매하고 이상적인 기사라도 자제심과는 담을 쌓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담은 곧 무너질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벨데케는 감동에 차서 백작을 우러러봤다. 포도주를 과음한 백작은 창백했던 얼굴에 홍조를 피우며 열띤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물론 젊은 객기로도 면죄부를 살 수 없는 과오는 있습니다. 그때는 관용과 이해가 아니라 권능하신 주님의 호된 채찍질이 필요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 그리스도의 전사들이 저 동방의 이교도나 도적기사 따위와 다를 바가 없겠지요. 주님의 전사라면 반드시 올바른 기사도 정신의 수양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 바깥세상에선 정체불명의 도적 기사가 날뛰고 있어요. 대다수의 경솔한 젊은 기사들이 방탕과 무절제, 야만적인 폭력의 죄를 짓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죄를 범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들보다 더 비난받아 마땅한 무리가 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있습니다. 바로 그건 신의를 저버린 기사입니다.”
“신의!”
“네, 그렇지요. 그가 그리스도의 전사이자 명예와 영광을 좇는 기사라면, 어떠한 불의나 배신과는 드높은 성벽을 쌓아야 하며, 신께는 순결한 영혼을, 고매한 귀부인에겐 헌신적인 사랑 봉사를, 그의 군주를 위해선 충절과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신의를 지니고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평생 참회 순례를 떠나야 합니다. 그것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이니까요. 그 외에는…….”
“……?”
“한때의 젊은 치기, 경솔함이나 난폭함, 무모함 따위에는 너그럽게 면죄부를 줘야 합니다. 흠.”
벨데케는 백작의 갑작스러운 웅변에 무척 감동했다.
백작은 자신의 충동적인 장광설에 몹시 마음의 괴로움을 얹은 듯 낯이 창백해졌다. 곧 벨데케에게 무례를 정중히 사과했다.
“사과를 하시다니요.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셨습니다. 신의, 기사에게는 신의가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오찬이 끝없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나눴다.
백작은 그 후로는 향료 포도주를 한사코 삼갔다.
오찬의 끝 무렵에 벨데케가 물었다.
“어제는 백작님을 뵙지 못해서 심히 유감이었습니다.”
“주인께선 부디 너그럽게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어제는 저의 단식일로써 단식 맹세를 지켜야 했답니다.”
“단식일이라면 수호성인을 기리셨나요?”
“아, 그건 아닙니다.”
백작은 대수롭지 않은 듯 서둘러 말했다.
“실은 어느 불운한 이들을 개인적으로 추모하는 날이었지요. 그런데 친절한 주인이시여, 제가 계속 주인을 독차지한 죄로 손님들께 원성을 사지는 않을까 두렵군요.”
“사실은 그 반대일 것 같은데요? 허허.”
벨데케는 젊은 영웅에게서 아름다운 귀부인을 쫓아낸 것을 사과하며 황급히 물러났다.
그는 자기네 일가가 차지한 자리로 달려가서 음성을 퍽 낮추며 자기 딸을 불러댔다.
부친의 급한 손짓에 힐데가르트는 눈길을 쳐들었다.
“왜 그러세요, 아버지?”
“힐데가르트, 너는 여기 새끼 부엉이처럼 오도카니 앉아서 눈만 깜짝깜짝하지 말고 백작님께 얼른 가보려무나. 저분은 네 오라버니의 업적을 치하하고 가문의 경사를 축복하고자 고귀한 발걸음을 하셨다. 귀부인, 그렇지 않소?”
“글쎄요.”
부인은 딸을 노려보고 나서 답했다.
“나는 이 보잘 것 없고 가엾은 애가 부모에 대한 도리를 잊고도 수치를 모를 정도로 뻔뻔하거나 둔하지는 않길 바랄 뿐이에요. 저 하얗고 조그마한 두 손은 지금 뭘 하고 있죠? 어머나, 꽃 이파리를 갈기갈기 찢어놨네. 세상에 끔찍해라! 저런 흉악한 짓거리나 해대는 손이라면 당장 잘라내야 마땅치 않겠어요? 아니라면 이 눈치 빠르고 똑똑한 애는 백작님 곁으로 냉큼 달려가서 고기를 잘라주고, 술잔에 술을 채우거나 하겠지요. 한사코 부엌데기가 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얼굴이 창백한 힐데가르트는 백작의 곁으로 갔다. 지극 정성을 바쳐 백작의 시중을 들었다.
겸손한 백작은 그녀의 봉사에 거듭 사례했다.
벨데케는 득의양양하여 백작과 딸을 감상했다. 등허리에서 굽이치는 하얀 금발 머리에 제비꽃과 백리향, 로즈마리로 엮은 화관을 쓴 힐데가르트는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그 속내를 읽을 순 없었지만, 부모의 기대 이상으로 백작의 호감을 산 듯했다.
벨데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작고 어여쁜 얼굴에 홍조가 활짝 피었구나. 입술을 질끈 무는 버릇만은 아직도 못 고쳤지만. 어쨌든 저 애도 저런 고귀하고 부유한 사내를 만났으니 철없던 눈이 번쩍 뜨이겠지.’
만사가 척척 의도대로 흐르자 벨데케는 오랜만에 통쾌한 희열을 맛봤다. 그 행복은 진한 포도주와 뒤섞여 시시각각 고취됐다.
그런 어수선하고도 강렬한 행복의 와중에 벨데케는 주위를 살폈다. 이 행복의 원천을 찾고 싶었다.
“흠, 한스야. 우리 가문의 영웅, 이젠하르트는 어디에 있느냐? 왜 안 보여?”
“금세 찾아 모시고 오겠습니다.”
늙은 한스가 달려간 후, 벨데케는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녀는 연회 내내 한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꼼짝 안 했다.
얼마 후, 연회 틈틈이 어딘가로 자리를 비웠던 이젠하르트가 회장으로 되돌아왔다. 그가 지나는 길에는 연회객이 환성을 지르며 찬사했고 그때마다 그도 정중히 사례했다.
벨데케는 아들에게 달려가서 연회장 상석을 향해 자랑스레 외쳤다.
“백작, 이 애가 내 아들 이젠하르트입니다. 숲의 파괴자이지요! 아들아, 백작님께 인사를 올려라. 너를 축복하고 이 자리를 빛내고자 먼 곳에서 오셨어.”
백작과 이젠하르트는 인사를 나눴다.
백작은 벨데케의 열망에 보답하듯이 이젠하르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인사를 끝내고 이젠하르트는 백작에게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손님들은 여기저기서 그를 붙들었다.
오찬이 끝날 무렵에 연회장은 명랑하고 무질서한 술판으로 변했다. 손님은 배가 터지도록 술을 마셨다. 소문난 술꾼인 어느 상인은 풀밭에 드러누워 거대한 맥주 통 꼭지에 입을 대고 쏟아지는 맥주를 꿀떡꿀떡 삼켰다. 그리곤 술통의 맥주를 전부 오줌으로 쌀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이러한 어리석은 묘기에 지원자가 속출해 사람들의 흥을 부추겼다.
벨데케 부인은 이틀째 연회장 곳곳을 감시하던 차에 마악 연회장으로 진입한 어느 패거리를 발견했다.
“저 패거리는 뭐냐?”
그 패거리는 연회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개처럼 만취한 손님과 한 데 뒤섞여 있고 곁에서는 이상한 바퀴가 살아있는 듯이 굴러다녔다.
“저 요상한 바퀴는 뭐냐?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군.”
“나리 마님, 저건 바퀴가 아니라 유랑 곡예 단원인 어릿광대예요.”
줄무늬 옷을 입은 어릿광대가 손님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수레바퀴처럼 돌아다녔다.
“황야에서 떠돌다가 마을에 축연이 벌어지면 피델을 켜고 곰 놀이도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 저것들을 불렀지? 난 안 불렀다!”
“주인 나리께서 곡예단을 데려오라고 하셔서 늙은 한스가 며칠이나 황야를 헤맸어요. 그래도 찾지 못했는데 만필요트 백작님께서 기사단을 내보내서 찾아오셨어요. 어제도 영주님 앞에서 공연했어요.”
“흥, 이제 기억이 나는군.”
벨데케 부인은 치떴던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 눈꺼풀은 어릿광대를 보더니 또 휙 치올라갔다.
“저 패거리를 샅샅이 수색했나?”
그렇다고 어린 시종이 답했다.
“탐파니스 도련님께서 어제처럼 연회장 입구에서 빈틈없이 수색하셨어요. 분장을 한 녀석들 몇몇은 발가벗겨 조사하셨습니다.”
“잘했군. 너희도 잘 지켜봐라. 절대 한눈을 팔아선 안 돼.”
부인은 으름장을 놨다.
“만약 이 근처에서 포겔바이데 놈들 냄새라도 나거나 그 종놈들 그림자가 얼씬이라도 한다면 그땐 네놈들 모가지를 들보에 걸라고 영주님께 청원하겠다. 명심하거라!”
연회는 이후로 순조롭게 계속됐다. 오찬이 끝나자 연회장에는 트루바두르(음유시인)가 등장해서 샤를마뉴와 롤랑(사를마뉴 대제 시기 프랑크 족의 영웅)의 무훈담을 들려줬다.
이날 연회는 첫날보다 더 많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기분이 좋은 벨데케는 초대장을 남발해서 수많은 하급 귀족과 상인, 장인을 불러들였다. 불청객 신세였다면 오장 육부를 후비는 고기 냄새에 땅굴을 파서라도 잠입할 작정이었던 그들은 기사단의 야외석에 합석해서 연회를 즐겼다.
오후가 되자 손님들은 흠뻑 취해서 서로 격투를 벌였다. 판자로 된 식탁 상판도 뒤엎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쉈다.
덩달아 신이 난 벨데케는 싸움판에 맥주를 뿌려대서 연회장은 개판이 됐다. 상인들은 주인의 동조에 힘입어 더욱 대담해졌다. 트루바두르의 무훈 영웅담도 그들의 가슴에 불을 싸질렀다.
유랑 곡예단은 연회장 곳곳에 흩어져서 공연했다. 사냥개의 곰 놀이가 벌어지고, 원숭이는 식탁에 뛰어올라서 상인의 모자를 뺏어 썼다. 패거리는 원숭이가 왕처럼 우쭐대는 꼴에 환호했다. 어릿광대는 그 곁에서 미친 듯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야! 야! 시시하다!”
그러던 중에서 상인인 취객 사이에서 고함이 터졌다.
“야! 집어치우고 뚱보를 데려와!”
건장한 상인이 외치자 싱글벙글하던 패거리도 덩달아 뚱보를 데려오라고 소리쳤다.
“저 어릿광대 녀석은 종일 뱅글뱅글 돌기만 하니 눈알이 핑핑 돌잖아. 뚱보를 데려와서 불을 삼키라고 해.”
“뚱보 자식은 어디 갔어? 왜 안 보여?”
뚱보를 찾아대던 취객이 곡예단을 에워싸고 고함을 쳐댔다.
두들겨 맞을까 봐 겁에 질린 곡예단이 자기들은 합창단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근사한 성가를 외웠어요. 밤새 불러드릴게요.”
“집어치워! 요 짜리몽땅한 괴물아! 성가는 때려치우고 불쇼나 하라고!”
“하지만 저희는 합창단-……!”
“요 짜리몽땅한 새끼가 반항이네. 에잇, 맛 좀 봐라!”
두꺼비가 짜부러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상인들 머리 위로 난쟁이가 불쑥 치솟았다.
건장한 상인은 얼굴이 파래진 난쟁이의 멱살을 쥐고 공중에서 흔들었다. 구경꾼들은 열광했다.
“난쟁이를 죽이자! 사탄의 마법사다!”
“죽여라! 죽여라!”
“케엑! 켁……. 나, 난쟁이 살려…….”
이때 곡예단에서 튀어나온 한 소녀가 건장한 상인의 발아래 몸을 던졌다.
“훌륭하신 나리님들, 뚱보는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제발 난쟁이를 살려주세요!”
“뭐? 뚱보가 뒈졌다고?”
이때 누군가 이젠하르트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소동을 피운 상인들은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자 어리둥절해서 뒤를 돌아봤다. 그들 바로 뒤에 ‘벨데케 가문의 영예로운 기사’, 이젠하르트가 서 있었다.
“뭐든 부족한 게 있습니까?”
이젠하르트가 상인들에게 정중히 물었다.
“술이든 고기든 말씀만 해주세요.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상인들은 난쟁이를 떨어뜨리고 우물쭈물했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이젠하르트는 곡예단에게 돌아섰다.
“너희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다시 한번 소동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 가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드려라. 그러면 매질 대신 푸짐한 보상을 받을 거다. 여러분께선 자리로 가시지요. 새 맥주를 잔뜩 내왔습니다.”
상인들은 기꺼이 물러났다. 개망신을 당하거나 쫓겨나리라 각오했던 터라 의기양양해서 거듭 폭음했다.
난쟁이를 폭행한 건장한 상인만은 유독 허둥지둥 물러났는데 이젠하르트의 냉랭한 눈초리가 제게 꽂혀서였다.
소동이 잦아들자 연주가 이어졌다.
이젠하르트는 연회가 다시 순조롭게 이어지자 발걸음을 돌렸다.
“가장 자비롭고 고귀하신 나리님!”
이때 문득 가냘픈 음성이 발길을 붙들었다. 그가 돌아서자 곡예단의 합창단은 둥지 안의 새끼 제비처럼 오밀조밀 모여서 그를 쳐다봤고, 갓난애를 안은 소녀는 발아래 엎드려서 울먹였다.
“가장 자비롭고 고귀하신 나리님, 난쟁이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축복이 언제나 나리님과 함께하시길!”
“난쟁이를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축복이 언제나 나리님과 함께하시길!”
곡예단이 모두 이젠하르트의 발아래 엎드렸을 때, 토끼풀에 뻗어 있던 난쟁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는 이젠하르트를 올려다보더니 눈을 부릅뜨고 팔다리를 버둥대며 합창단 틈으로 파고 들었다.
소녀는 놀라서 난쟁이를 돌아봤고 입을 닥친 합창단은 이젠하르트를 올려다 보며 오들오들 떨었다.
이젠하르트는 몸을 홱 돌려서 자리를 떴다.
그러자 구경꾼이 몰려들어서 난쟁이를 나무랐다.
“요 버릇없는 난쟁이가 목숨을 구해준 주인한테 불손하게 구네.”
“이런 놈을 매질을 해야 해.”
“저……. 저는 너무 황송해서 그랬어요!”
난쟁이가 겁에 질려서 외쳤다.
구경꾼이 욕을 퍼붓고 물러나자 난쟁이는 합창단 가운데로 몸을 숨겼다. 이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에 어릿광대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굳어 있었다.
벨데케는 난쟁이가 막 봉변을 당할 때 허겁지겁 현장에 달려온 터였다. 그는 아들이 소란한 현장을 정리하고 자리를 뜨자 가슴을 들먹이며 늙은 한스를 불렀다.
“얘, 한스야, 너도 방금 봤느냐?”
“그럼요 나리.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래. 저 애가 바로 내 아들이다.”
벨데케는 비대한 몸을 부르르 떨며 아들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자비와 관용의 기사, 비천한 무리를 위해서 악마와 맞서 싸우는 신성한 기사, 신의의 기사! 저 애가 내 아들이야.”
늙은 한스는 감동해서 기절하려는 벨데케를 붙잡고 말했다.
“나리, 영주님께서도 어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고로 세상을 정복한 젊고 정의로운 영웅에게는 그가 사랑 봉사의 맹세를 바칠 명망 높은 귀부인이 반드시 있는 법이라고요.”
“그랬지. 영주님께 주님의 축복을!”
벨데케는 이성을 잃고서 부르짖었다.
“영주님의 말씀이 백배 옳다. 내가 감히 주장컨대, 이 도시에서 우리 힐데가르트를 빼곤 딱 한 분, 그런 명망 높고 아리따운 귀부인이 있지. 허허, 기분 좋다. 자 술을 더 내와라! 맘껏 축배를 들자!”
벨데케는 무아의 행복에 도취해서 이때부터 반실성 상태에 빠졌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살찐 나비처럼 연회장 곳곳을 누볐다.
다음 날, 가면무도회의 밤이 밝았을 때는 공작새로 분장해서 어릿광대 역을 자처했다.
가면 무도회장은 숲을 배후에 둔 기사단의 천막을 울타리 삼아서 차려졌다. 손님은 갖가지 눈 가면을 쓰고 참석했다.
만필요트 백작을 제외한 기사단도 모두 참석했다. 기사단은 세련된 궁중 예절을 갖춰 무도회장의 품격을 높였지만, 때때로 경솔한 치기를 분출해 귀부인의 웃음을 자아냈다.
벨데케는 나비 가면을 쓴 기사단을 열렬히 환영해서 그들의 돌발적인 방종을 조장했다.
횃불이 무도회장 곳곳을 밝혔다. 악사의 연주는 최고조에 올랐다.
벨데케는 인파를 헤치고 미친 나비처럼 쏘다녔다.
“엇! 아이쿠!”
도중에 그는 나무에 부딪혀서 나자빠지며 깜빡 정신을 잃었다. 눈을 번쩍 뜨자 나무 대신에 고양이와 나비 가면을 쓴 두 사람이 보였다.
“미안하오.”
그는 풀밭에서 버둥대며 말했다.
“이 늙은이를 용서하게. 허허.”
“괜찮으십니까?”
“그럼, 그럼.”
“제 손을 잡으세요.”
“친절한 젊은이로군. 자네의 굳건한 두 팔이 나를 구했네.”
나비의 손을 잡고 일어선 벨데케는 껄껄 웃어댔다. 그러고서 상대를 널따란 제 가슴에 꽉 부둥켜안고 소리쳤다.
“젊은이들, 자네들의 선량한 목소리를 들으니 필경 젊고 용맹한 기사들이구먼. 자, 맘껏 즐기시오! 이 순간을 영원처럼 맘껏 즐기시오!”
벨데케는 인파 속으로 사뿐사뿐 날아갔다.
주인의 열렬한 포옹을 받은 두 '용맹한 기사'는 그 즉시 헐레벌떡 달아나서 나무 뒤에 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