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사랑은 그의 빵이요, 포도주
광장에서 소동이 벌어진 이후 도시의 일상은 여느 때처럼 흘렀다.
아침 종이 울리면 상인은 자기 집 1층에 있는 점포를 열고 여자들은 공동 우물로 물을 뜨러 갔다. 시문 밖에 있는 들에서는 농부가 들일을 했다.
분수대가 있는 광장은 행인과 짐 마차, 말, 가금류, 걸인이 뒤섞여 오갔다. 혼잡한 구석에서는 어린애들이 바람을 넣은 돼지 방광으로 공놀이를 하거나 죽은 거위를 기둥에 달아놓고 막대기로 두들겨 패며 놀았다.
저녁에 제2종이 치고 날이 저물면 도시는 어둠과 고요 속에 빠르게 잠겼다.
통행이 금지된 칠흑의 밤, 지상에서는 떠돌이 개나 고양이만 밖에 나다녔다. 첨탑과 박공지붕 꼭대기에 앉아있던 검은 새는 불빛 한 점 없는 새카만 하늘로 솟아올라 밤 내내 거미줄을 짜듯 누비고 다녔다.
어느 날 정오.
사람들은 종소리에 이끌려 시문과 광장 주변으로 몰려갔다. 한 기사단이 깃발을 앞세우고 성의 기사수비대의 인도를 받으며 시문을 통과했다.
서른 명 남짓인 젊은 기사와 시종, 시동, 짐과 무기를 실은 말과 종자가 구경꾼의 호기심 어린 환호 속에서 영주의 성으로 향했다. 광장을 뚫고 행진하는 그들의 빛나는 투구, 끝에 마상 무예용인 납작한 철판을 댄 장창과 방패, 펄럭이는 갑옷 망토, 군마에 놓인 값진 말안장과 안장 덮개 따위가 경이를 자아냈다.
며칠 후.
분수 광장 1층에 점포를 둔 어느 재봉사가 손님에게 말했다.
“저 집안 하인은 요새 꽤 뻔질나게 시장에 들락거리는군.”
“누구네 말이오?”
손님이 물었다.
“벨데케 집안 말이요. 그래 봤자 그 집 살림은 뻔한테 뭐 그리 대단한 연회를 한답시고 저럴까.”
“딸내미라도 어디다 팔았나보군.”
재봉사는 고개를 갸웃댔다.
“이상한 게 또 있다오. 그 말썽꾼들 말이오. 하루가 멀다고 저기서 깽판을 부리더니 요새 며칠째 코빼기도 안 보여. 다 죽었나.”
“흠, 주님께서 그렇게 자비로우실까.”
손님은 콧방귀를 꼈다.
“어림없지. 깽판을 한 번 쳤으니 당분간 꼬리를 사렸는데 지금쯤은 슬금슬금 기어 나올 작당을 하고 있을걸.”
손님의 예상은 정확했다.
날씨 화창한 대낮에 로트 일당은 도시 외곽에 있는 주택에 은신 중이었다.
주택은 안면이 있는 상인이 세를 내준 곳이고 구릉에 자리 잡은 덕분에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구불구불한 골목길과 광장을 중심으로 빼곡히 들어선 주홍색 박공지붕, 그 위에 흰 똥을 갈기며 날아다니는 새들, 요새처럼 지어진 거주용 탑과 멀찌감치 떨어진 교회의 종탑, 성채의 깃발까지도 잘 보였다.
카이렛은 팔걸이가 하나뿐인 긴 의자에 누워 하품했다.
로에란그린은 비단 쿠션을 깔아놓은 바닥에서 나무 바닥에 모자이크처럼 새겨놓은 놀이판에 주사위를 던졌다.
로트는 창가에서 턱을 어루만지며 거닐고 있었는데 쉼 없이 오락가락했다.
또륵, 또르륵, 세 개의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가 방 안의 고요를 깼다.
주사위 소리를 자장가처럼 듣던 카이렛은 하품을 하며 투덜댔다.
“아, 답답해. 닷새째 이런 데 처박혀 있으려니 몸에 이끼가 끼는 것 같아. 로에란그린, 로트 저 녀석 좀 묶어버려. 종일 오락가락해서 정신 사나워죽겠어.”
“하루 이틀인가. 내버려 둬.”
카이렛은 관절이 튕겨나라 기지개를 켜고 물었다.
“이터는 왜 안 오지? 또 목욕탕으로 샜나.”
“그러고 싶었는데 로트 녀석 몸종이 자꾸 졸졸 따라다녀서 못 갔어.”
“이터다! 뭐야, 왜 이렇게 늦었어?”
호사스러운 긴 튜닉을 차려입은 이터는 옷자락이 구겨지지 않게 로에란그린이 차지한 쿠션 옆에 앉으려고 했다. 그러다 에그머니! 소리치고 옆으로 픽 쓰러졌다. 잽싸게 달려와 그 자리를 꿰찬 로트는 쓰러진 그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물었다.
“어떻게 됐어? 얼른 말해봐.”
“에구구 허리야. 첩자 짓을 하느라 생고생을 하고 왔는데 잠깐 숨돌릴 틀도 안 주는구나.”
“이터!”
“알았다고!”
이터는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벨데케 가에서 연회가 열리는 건 사실이야. 내일모레부터 사흘간. 그 집안은 지금 연회 준비로 정신이 없다더군. 가면무도회에는 이웃 마을에서도 여자들이 몰려온대. 물레방앗간 과부랑 목욕탕집 딸내미도 변장하고 올걸. 하하. 신난다.”
“이런 젠장. 지금 누가 그딴 게 궁금하대?”
카이렛이 주먹으로 의자를 내리쳤다.
“그 녀석이 진짜 돌아왔냐니까. 이젠하르트, 그놈 말야.”
“아, 이젠하르트.”
이터는 활짝 웃었다.
“깜빡했군. 그 친구 진짜 돌아왔어. 아무도 모르게 금의환향한 거지. 난 못 봤지만 숙부께서 만나셨대. 인사하러 왔다더군. 콘드비라무어스도 봤대.”
“이상하군. 그렇게 명성이 자자했던 놈이 나팔도 안 불고 스리슬쩍 귀향하다니.”
로트는 벌떡 일어서 창가 앞에서 뚜벅뚜벅 오갔다.
이터는 몸종이 내온 음료랑 풋사과 하나를 먹어치웠다. 그가 향연 중인 고대 로마인처럼 쿠션에 드러누워 사과를 와그작와그작 깨무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렸다.
그가 실컷 먹다가 사과 한 조각을 로에란그린의 입술에 들이대자 로에란그린을 그걸 잡아채서 창밖으로 휙, 내던졌다.
카이렛이 이때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침묵을 깼다.
“젠장. 겁먹을 거 없어. 이젠하르트, 그 자식도 사실 별거 아닐 거야. 창 들고 방패나 좀 휘두를 뿐이지.”
“옳소! 우리 모두 힘을 내자!”
이터도 불끈해서 소리쳤다.
“놈이나 우리나 어차피 같은 사내잖아. 우리는 귀여운 가비욧을 질풍처럼 날려서 고작 새끼 사슴 두서너 마리를 잡았지만 ‘숲의 파괴자’인 그 녀석은 사람을 수십 명이나 잡았다지. 듣자 하니 아프리카의 어느 왕국에선 마을의 전사를 전부 싹쓸이했대. 그때 시종이 새 창을 조달하느라 인근 숲에 있는 나무를 싹 잘라버리는 바람에 숲의 파괴자라고 불리지만, 겁낼 것 없어. 하하하.”
“젠장. 우린 그렇다쳐도 놈한테 로트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냐.”
오기가 치민 카이렛이 맞섰다.
“무장을 빼고 완력만 따지자면 로트가 더 셀걸. 우리 중에서도 가장 기운이 세지. 그리고 수도원에서 창 시합을 배웠다고 한 것 같아. 어떤 기사의 시동이 되어 창 눕히기, 방패로 막기, 양쪽 손에 무거운 창과 방패를 들고 적을 향해 돌진하면서 두 넓적다리로 멋지게 말을 제어하기 그런 걸 배웠다고 했어. 우리 수도원에도 은퇴한 기사들이 많았거든. 그치, 로트?”
카이렛은 의기양양해서 로트를 돌아봤다.
이터가 기뻐하며 되물었다.
“로트, 자네 정말로 창시합을 해봤어?”
“내 투창 실력은 다들 알아줬지.”
로트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이 대답했다.
“난 그걸로 원장 몰래 사슴을 잡았어.”
“사냥 말고 마상 창시합 말야. 한 번쯤은 연습이라도 해봤겠지?”
“아니. 전혀 해본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없다고 고개를 저은 로트는 실망하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한때는 명망 높았던 기사 가문 출신이지만 전쟁과 살육이 불가피한 기사의 삶은 내 길이 아냐. 기사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어긋나. 젊은 시절에 많은 무공을 쌓은 기사들도 은퇴하면 죄과를 참회한다지. 우리 수도원에 있던 노기사도 대부분 그런 참회의 여생을 보냈어. 그럴 형편이 못 되는 기사는 빈민과 거지에게 목욕값이라도 희사해서 속죄했지. 나는 과거에도, 현재도, 주님과 자연에 순종하며 학자의 길을 걷고픈 생도야. 만일 귀향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수도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학예에 매진했겠지. 어쩌면 파리나 볼로냐로 가서 존경받는 교수가 됐을지도 몰라.”
“그럼 이제 어떡해?”
카이렛은 튕겨 일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린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해. 이젠하르트 놈이 무섭다고 언제까지 쥐구멍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잖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냐.”
로트가 순순히 대답했다.
세 귀공자는 그게 뭐냐고 다투어 물었다.
방안에 일순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로트는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나무딸기를 넣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보게들.”
마침내 로트는 조용하고도 힘찬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나를 위해 기뻐해 줘. 나는 요새 며칠간 고민한 끝에 결정했어. 난 가능한 빨리 벨데케 가에 찾아가서 이젠하르트랑 만날 생각이야. 너무 놀라지들 마. 카이렛, 자네 얼굴은 꼭 회반죽 같군. 로에란그린, 자넨 나를 벌써 망자 보듯 하는군. 난 이젠하르트 그를 직접 만나서 맥주를 한 잔씩 하며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거야. 남자 대 남자로서.”
“제기랄, 원수 대 원수겠지.”
카이렛이 일침을 날림에도 로트는 활기차게 말을 이었다.
“이제 때가 왔어. 이보다 더 적절한 때는 앞으로 없어. 이젠하르트가 갑자기 귀향한 건 주님의 계시야. 그래서 결심한 거야. 일단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면 그 친구도 받아줄 거야. 해묵은 원한 때문에 고통받았던 두 가문의 반목을 대화와 포옹으로 풀게 되겠지.”
“쉽게 풀어 설명하면 이 말이군.”
이터가 나섰다.
“우리 순진하고 선량한 불알친구께선 철천지원수의 딸을 유혹해 납치하려 한다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쓰고서도 그 누이의 오라버니, 즉,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숲의 파괴자를 단둘이서 만나서 어깨를 두드리며 난 네가 절대 두렵지 않으니 누이를 순순히 나한테 넘기라고 좋은 말로 타이르겠다는 거군. 그치, 로에란그린?”
로에란그린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트는 발끈해서 반격했다.
“자네들은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해? 이젠하르트는 천성이 용맹한 기사이지 악한이나 무법자가 아냐. 그런데도 마치 그를 도적 기사처럼 취급하다니 불쾌하군.”
“차라리 도적 기사가 백배는 나을걸.”
카이렛도 발끈 화를 내며 응수했다.
“도적 기사는 아무나 해치려 드니 운이 좋으면 피할 수나 있지, 이젠하르트는 로트 자네만 노리고 있거든. 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자넨 장창에 흉곽이 뚫려서 사망이야.”
그러면서 카이렛은 밖을 가리켰다. 어조가 무척이나 확신에 차 있어서 방안엔 어느새 장창의 으스스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로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건 지나친 기우야. 자네들이 우려하는 참사는 절대 안 일어나.”
“어떻게 장담하는데?”
“우리는 죽마고우였으니까 그렇지.”
조심스럽게 대답한 로트는 다시 창가를 거닐기 시작했다.
카이렛은 귀를 후비며 '우리'가 누구랑 누구냐고 되물었다.
“이젠하르트와 나지 누구야.”
로트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물론 현재 우리는 서로 원수의 아들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지만, 원래 우리는 어린 시절에 무척이나 친한 사이였어.”
얼이 빠진 세 귀공자에게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각각 나왔다.
“농담이 아냐.”
로트는 친구들의 얼빠진 표정은 본체만체 말을 이었다.
“들어봐. 이젠하르트가 귀향했다고 했을 때 나도 처음엔 무척 놀랐어.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지난 며칠간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지. 어째서 얼굴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 그를 반기기는커녕 두려워해야 할까. 난 왜 숨어 있나. 그러다 답이 나왔어. 너무 옛날이라서 처음에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는데 갑자기 떠올랐지. 우리가 예닐곱 살일 때야. 우린 날이 밝으면 함께 들판을 뛰어다니며 건강한 수사슴을 뒤쫓았어. 그 친구가 견습 기사가 되어 고향을 떠나고 나는 수도원에 가기 전까지 우리는 퍽 사이가 좋았어. 안개에 덮여 있던 이 아름다운 추억이 이제 되살아난 거야. 이젠하르트는 나의 죽마고우였어.”
카이렛은 믿기지 않는다고 외쳤다.
“참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추억이군. 그러고 보니 나도 얼핏 기억이 나네.”
이터가 감동에 벅차서 말했다.
“그때 난 아홉 살이었을 거야. 난 똘똘한 놈이라서 좀 더 자세히 기억하는데 두 사람은 함께 들판을 즐겁게 뛰어다녔어. 이젠하르트는 창을 들었고 로트는 수사슴처럼 쫓겨 다니면서 말야. 도망다니느라 코피가 터지고 이마를 깬 적도 많을걸. 로트, 그것도 기억해? 이젠하르트는 자네를 오줌싸개라고 불렀잖아.”
카이렛과 이터는 의자에 벌렁 드러누워서 실컷 웃었다.
로에란그린도 웃음을 터뜨렸다.
로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이터의 손을 꽉 움켜잡고 물었다.
“이터, 힐데가르트랑 콘드비라무어스가 곧 만난다고 했지?”
“힐데가르트를 몰래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카이렛이 대신 답했다.
“현재 갇혔거든. 벨데케 부인이 딸을 탑에 감금해놓고 양탄자를 짜게 한다더라.”
카이렛은 풋사과를 한입 베어 삼켰다.
“벨데케 부인은 참 심술이 사나워.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딸의 영혼과 육체의 순결을 지킨다며 수녀원으로 쫓아 보낸다잖아.”
이 말에 로트는 방앗간 제분공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물었다.
“힐데가르트를 수녀원에 보낸다고? 그런 얘긴 없었잖아. 이터!”
“지금 하려고 했어. 으악.”
로트는 괴력으로 이터를 집어들어서 주사위 판에 동댕이쳤다. 쭉 뻗은 이터의 몸뚱이 너머로 로에란그린이 주사위 두 개를 던졌다.
로트는 이터의 멱살을 잡아채서 흔들었다.
“거짓말이지? 응?”
“너무 염려하지 마. 수도원은 아닐 거야. 하하.”
“빌어먹을! 사실이군. 너희를 친구라고 믿은 내가 천치바보군. 자기들끼리만 비밀을 품고서 내 슬픔과 고통을 비웃었어.”
격정에 곧잘 휩쓸리는 로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머리를 쥐어뜯고 창가로 달려가서 기도라도 하듯이 무릎을 꿇고 창턱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 대신 그 입술에서는 야수의 포효가 터졌다. 두 팔에 파묻은 머리와 어깨는 격렬하게 요동쳤다.
로에란그린이 그를 위로했다.
“로트, 진정하고 우리 얘기를 마저 들어봐.”
대답을 삼킨 로트는 잠시 후 로에란그린의 손을 밀어내고 일어나서 조용히 말했다.
“자네들한테 화를 내서 미안해. 하지만 죄 없는 여자를 이렇게 떠나보낼 수는 없어. 그럼 잠시 다녀올게.”
“어딜 가는데?”
카이렛이 물었다.
“카이렛! 로트를 붙잡아. 지금 그 집에 가려는 거야.”
로에란그린이 문으로 달려간 로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로트는 저를 말리지 말라고 극렬히 저항했다.
“내가 가서 오해를 풀어야 해. 이 세상 어느 여인보다 순결하고 정숙한 힐데가르트는 나 때문에 곤경에 처했어. 제발 나를 가게 해줘.”
카이렛은 가려거든 유언장부터 쓰고 가라고 버텼다.
로트는 이터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이터는 한입 깨문 풋사과를 내밀어보였다.
“와, 맛 좋다. 로트, 자네도 한 입 먹어볼래?”
좌절한 로트는 쿠션 더미로 몸을 던지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소란했던 방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로트는 더는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벽에 납작하게 붙었다. 로에란그린이 머리에 쿠션을 받쳐주자 로트는 그걸 홱 집어던지고 울었다.
“로트, 어리석게 굴지 마.”
로에란그린은 내던진 쿠션을 다시 받쳐줬다.
“자네는 또 고집쟁이 어린애처럼 변했군. 때로는 지나치게 충동적이고 경솔한 정열이 자네의 장점을 압도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군. 힐데가르트가 수녀원으로 쫓겨날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아. 자네가 이렇게 나올까 봐 미리 말을 못 한 거야. 이터도 지나가는 말로 얼핏 들었다고 했어.”
“응. 나도 콘드비라무어스에게서 얼핏 들었어.”
이터가 대답했다.
“소문이 아닐 거야.”
벽에 얼굴을 처박은 로트는 목이 메었다.
“탐파니스가 그랬잖아. 내가 그녀를 납치하려 한다고. 그래. 어쩌면 나는 그런 컴컴한 마음을 품었을지도 몰라. 나는 그런 못 된 놈이거든. 내 과도한 정열이 채 피지도 못한 수선화의 뿌리를 뽑아버렸어. 나를 위로하지 말고 꾸짖어줘. 나는 원래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놈이야. 내 무분별한 사랑은 그 여자를 언젠가는 비극에 빠뜨리고 말걸. 나도 때로는 나의 이 무분별한 정열이 너무 무서워서……. 나는……. 나는 떠날 거야. 어느 동굴에 들어가서 혼자 살 테다.”
“바보 같은 소리.”
로에란그린은 돌처럼 굳은 로트의 어깨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젠하르트랑 담판을 내겠다던 그 배짱과 희망은 참 오래도 가는군. 하느님께서 수사슴을 통해 자네한테 부여한 특별한 사명은 어쩔 거야? 그 사명이 자네 주장대로 하늘의 계시라면 그 운명의 상대인 힐데가르트가 쉽게 사라지겠어?”
로트는 그러자 어깨너머로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소문이 거짓일까?”
“벨데케 부인이 교회에서 공공연히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지만 벨데케가 쉽사리 허락하지 않을걸. 마누라한테 실권은 빼앗겼다지만 아직은 그가 가주고 딸을 아내보다 사랑하거든.”
“로에란그린의 주장이 일 리가 있어.”
카이렛이 말을 더했다.
“딸을 수녀원에 보내려면 기부를 크게 해야 하는데 벨데케한테 그런 재산이 없거든. 요새 그 집안은 식사 때마다 거위 알을 세는걸. 게다가 오라비가 돌아왔잖아. 이젠하르트가 로트 자네를 처단해서 불명예의 싹을 싹둑 잘라낸다면 모를까, 설마 애지중지한다는 누이를 강제로 수녀원에 쫓아 보낼까.”
로트는 금세 기운을 되찾고 벌떡 일어섰다.
“자네들 말이 맞아. 사랑에는 시련과 고난이 따르는 법인데 너무 일찍 좌절했군. 힘을 내자! 수사슴의 예언은 유효해. 그녀가 날 두고 쫓겨날 리는 없지. 아, 기운이 솟는다!”
로트는 천성인 낙천적인 정열가의 모습을 금세 되찾았다. 만인의 눈물과 고통의 씨앗인 사랑은 때로는 용맹한 기사에게는 목숨을, 로트에게는 비탄과 눈물을 그 대가로 원했지만, 사랑은 로트에게 삶이자 운명이요, 빵이자 포도주였다.
“이제야 고백하는데-…….”
그는 설렘과 흥분을 누르며 말문을 열었다. 새로운 희망에 고무된 초록색 눈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게 빛났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강렬한 예감을 느낀 적이 없어. 어째서인지 조만간 거부할 수 없는 거룩한 힘이, 운명의 힘찬 소용돌이가 내게 휘몰아칠 것 같아. 예언의 실현이 드디어 도래한 거지. 자네들이 날 사랑한다면 제발 조언을 해줘. 어떡하면 힐데가르트를 만날 수 있을까, 이터?”
“방법이야 물론 있지.”
이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연회에 가. 힐데가르트도 참석할 테니까.”
카이렛이 즉시 반대하고 나섰다.
“절대 안 돼. 로트한테 사자 굴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라니.”
로트의 반응이 모호해서 카이렛은 언성을 높였다.
“백번 양보해서 연회에 간다고 치자. 입장이나 할 수 있겠어? 바질리스쿠스(바실리스크. 유럽 신화와 전설 속에 나오는 상상의 뱀. 시선이 마주치면 죽음에 이른다) 한 마리가 눈을 표독하게 치뜨고 벼르고 있을 텐데. 탐피니스 그놈은 지금도 우릴 미친 듯이 찾고 있어. 여기도 곧 귀신같이 찾아내서 덮칠 거야.”
“숲의 파괴자를 모시고 말이지?”
“웃을 때가 아냐.”
싱글대는 이터에게 카이렛이 쏘아붙였다.
“로트, 차라리 자넨 당장 콘드비라무어스랑 결혼해.”
귀공자들이 멍하니 돌아보는 앞에서 카이렛은 기정사실을 공고하듯 말했다.
“자네를 노리는 콘드비라무어스는 지참금도 많고 영주님의 딸이니 자넨 부친에게서 유산도 고스란히 물려받고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어. 자네 부친이 순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하신 말씀 기억하지? 자네가 신붓감으로서 그 여자를 퇴짜 놨을 때 유언장에서 자네 이름을 파버리시더니, 순례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만한 혼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네 골통을 밀가루처럼 빻아서 반죽하고 굽겠다고 했어.”
“흠, 그랬던가.”
“흥. 모른 체하지마. 만약 자네 부친께서 조만간 돌아와 자네가 지금 요 모양 요 꼴이고 그 상대가 원수일 뿐 아니라 ‘찢어지게 가난한’ 힐데가르트란 걸 알면, 그땐 이 도시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빵이 구워질 거야. 내 말이 틀릴지, 내기할까?”
“난 빵에 걸게. 하하하.”
이터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로에란그린도 피식피식 웃었다.
로트는 얼굴이 해쓱해지고 미간이 고뇌의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로트의 부친 하르트만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대성한 환전상이자 대부업자였다. 이 도시는 물론, 각국의 상인이 모여드는 상파뉴의 국제 시장이 그가 활약하는 무대였다. 부르고뉴의 샤를 은화, 프랑스의 루이 금화, 밀라노 은화 등등이 그의 손아귀를 거쳐 세상 곳곳으로 흐를 만큼 그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빈털터리였던 기사 가문의 극적인 회생도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오래전 사별했지만 이교도의 미녀를 첫 번째 아내로 삼은 이유는 그녀가 고귀한 혈통의 왕녀라는 공상 그리고 방패 대신 금화를 휘두르는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이교도의 정복과 개종에 헌신하겠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런 그는 노년에 이르자 축재, 가문의 부흥과 존속, 영혼의 구제 방법만을 관심사로 삼았다. 어린 로트를 수도원에 보낸 데에는 그가 일찍 죽으리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죽기 전에 자신을 위해 실컷 기도나 해주길 바라는 속내도 있었다.
“어쨌건 난 연회 참석은 강력히 반대야.”
카이렛이 계속 주장을 내세웠다.
“위험을 무릅쓰고 간다 치자고. 힐데가르트가 안 나타나면? 게다가 그 집안 연회에는 변변한 먹을거리나 볼거리도 없어. 샤프란이나 후추 따윈 냄새도 못 맡을 거야.”
“이번엔 달라. 향신료를 듬뿍듬뿍 치겠대.”
이터가 말했다.
“벨데케가 걸인이랑 빈자까지도 배불리 먹일 성대한 연회를 열겠다고 선언했어. 후원자가 나타났거든.”
“누군데?”
“기사단장, 만필요트 백작이야. 벨데케가 이번 연회에 그를 초대했거든.”
이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신의 기사단을 이끌고 이 도시에 입성한 만필요트 백작은 영주의 손님이었다.
영주의 성으로 초대장을 직접 전달한 벨데케는 영주의 소개로 그를 만났고, 백작은 초면인 자신을 기꺼이 초대한 벨데케에게 후원을 자청했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한 게, 백작이 입성하던 날, 기사단은 붉은 공단으로 뒤덮은 수많은 궤짝을 말에 싣고 들여왔다. 종자와 짐말의 호사스러운 치장은 궤짝의 내용물을 짐작하게 했고, 기사들의 갑옷도 최소 집 한 채에 소 여섯 마리쯤 나갈 만큼 값졌다.
“백작은 후하게도 전폭적인 후원을 제안했지만 벨데케가 꿍쳐놓은 돈이 있는지 장소만 빌려달라고 했다더군.”
이터는 설명을 이었다.
“백작의 기사단은 성 근처 수목원에 막사용 천막을 쳤어. 그중에서 백작의 천막은 동방의 이교도의 황제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으리으리한데 거기가 연회장이야. 백작이 선뜻 자기 천막을 내놨다네. 천만 대군도 거기선 한 번에 식사할 수 있을 만큼 넓지. 연회는 내일모레부터 사흘간, 첫날은 정오부터 만찬을, 둘째 날은 빈자와 걸인한테 목욕값과 빵, 포도주를 희사하고, 셋째 날은 오밤중까지 가면무도회를 한다더라. 아름다운 귀부인들도 드글드글 할 거야. 아차차, 카이렛, 자네의 뮤즈, 아름다운 이니베가 돌아왔다더군.”
카이렛은 의자로 펄쩍 뛰어올라서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응. 콘드비라무어스가 알려 줬어. 이니베도 가면무도회에 온대.”
갑작스러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모두의 시선이 카이렛의 울긋불긋한 얼굴에 꽂혔다.
로에란그린은 고개를 저으며 이미 끝난 판에 주사위를 던졌다.
카이렛은 울먹이며 가면무도회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우리 같은 미남자가 무도회에 불참한다면 그건 이 도시 귀부인들에 크나큰 실례지. 로트, 우리 꼭 무도회에 가자. 가면을 쓰면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해. 예언의 실현이 눈앞에 닥친 거야. 자네의 운명을 시험해보자!”
“안 돼.”
신중한 로에란그린이 못을 박았다.
“가면 하나로 위장하고 잠입하기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너무 위험해.”
실망한 카이렛은 로트를 돌아보며 측은히 말했다.
“로트, 우리 너무 실망하지 말자. 다른 방법이 있겠지.”
“고맙지만 카이렛, 난 무도회는 안 갈 거야.”
한동안 침묵에 빠져있던 로트가 진지하게 답했다. 아름답게 빛나던 눈동자가 그새 퀭하니 변했다.
“벨데케 사람들이 이젠하르트의 귀향으로 오랜만에 행복에 빠져 있는데 불청객이 가면 안 되지. 나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있어.”
로트는 이렇게 말하고 슬픈 얼굴로 돌아섰다.
“가면보다 훨씬 안전한 방법이 있다면?”
이때 로에란그린이 로트를 불러세웠다.
“그땐 가고 싶겠지?”
“다른 방법이 있을까?”
“있지. 이터가 초대장을 가져오면 돼. 영주님께 부탁해서 말야. 그땐 공식적인 초청을 받는 거니까 아무도 로트에게 시비를 걸지 못해. 탐파니스든 이젠하르트든.”
카이렛은 그 방법이 좋겠다며 기뻐했다.
“그런데 만일 로트가 나타나면 이젠하르트가 가만히 있을까? 설마 칼부림을 하진 않겠지?”
“로트가 아무리 원수라지만 그 친구는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야.”
로에란그린이 대답했다.
“우리처럼 철부지도 아니지. 더군다나 자기가 주인공인 연회인데 칼부림을 할까.”
카이렛은 크게 기뻐하며 이터에게 초대장을 당장 구해오라고 재촉했다.
“여보게들.”
이때 로트가 심각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니. 아무래도 난 갈 수 없어.”
“영주님의 초대장인데도?”
“어쨌거나 난 불청객이야. 내 이기심 때문에 이젠하르트랑 힐데가르트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 자네들한테는 초대장이 올 테니 가서 내 몫까지 마음껏 즐겨줘. 나는 그럼 잠시만 바람을 쐬고 올게.”
로트는 그러고서 밖으로 뛰어나갔다.